진짜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문을 방불케 한다. 문건서류에 남아있는 대부분 렬사의 경력은 단 한두 줄 뿐이다.
“렬사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또 언제 어디서 희생되었다는 짧은 기록이지요.”
솔직히 그때 그 시절의 전란으로 저마다 피치 못할 사연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짧은 기록문은 줄줄이 엮은 장문의 글로 두둑하게 읽혀지고 있다. 렬사가 생활했던 그 시기의 사회적 배경과 렬사가 참전했던 전역… 심지어 전투의 소소한 장면까지 금세 영화필름처럼 생생하게 재현된다.
여든 살 고희의 리송덕옹은 바로 그런 기록문의 몇몇에 불과한 판독자이다.
“흰소리를 치는 게 아닙니다. 장소와 시간만 확실하게 알면 그때 어디서 어떤 전투가 벌어졌는지를 말할 수 있지요.”
잠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얼마전 리송덕옹은 광영원(光榮院)에 가서 영예군인들과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와중에 누군가 언제 어디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했다고 말하자 리송덕 옹은 대뜸 족집게처럼 그의 소속부대와 전역, 전투의 이름을 밝혔고 또 전투 현장에서 벌어졌던 이런저런 사건들을 마치 눈앞에 보는 듯 소상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 리아바이가 그 전투에 참가한 게 아니우?”
“미리 이럴 줄 알고 자료들을 읽어보시지 않았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뉘라 없이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사자도 그때까지 감감 모르고 있었던 옛날 옛적의 전투 이야기였던 것이다.
답사, 기념비의 인물을 따라
1979년, 정부는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지식인, 기술자들을 본래의 직업으로 복귀시킨다. 약 20년동안 학교와 정부 부문을 전전하던 리송덕옹은 이에 따라 연변박물관 연구원으로 배속된다.
이때 리송덕옹이 박물관에서 맡은 과업은 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사회주의혁명시기의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때 전쟁시기의 영웅들이 얼토당토하지 않게 반역자 등등의 감투를 쓴 경우가 적지 않았지요.”
일단 기본적인 연구자료로 되는 각 현과 시 공안국의 해당 문건서류들을 보류해야 했다. 스캐너라는 게 뭔지 모르던 그 시기 산더미 같은 원시적 자료들을 일일이 필사했다. 한번은 리송덕옹 등 연구원 4명이 꼬박 열흘동안 서류를 베낀 적 있었다. 나중에 모두 손가락 마디가 연필 꽁다리처럼 감각을 잃어서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이 떨어져도 모를 처지였다고 한다.
훗날 이런 작업의 결과물은 모두 지방 문물지(文物志)의 목록에 편성되었으며 지금도 이 시기의 력사를 연구하는데서 기본적인 참고문헌으로 되고 있다.
연구원들은 필사작업에 이어 확인과 발굴 작업의 일환으로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또 그들의 안내를 받아 여러 곳에 널린 현지 유적지를 답사했다. 중공 동만특위서기 동장영(童长荣, 1907-1934)의 순난지, 항일무장부대의 군영 옛터 등 많은 유적지는 이때 처음으로 발견하고 확인했다고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유적지 확인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였다. 중공 동만특위 선전부장 겸 연변구위 서기였던 조기석(曹基錫, ?~1932) 등 28명 항일지사의 순난지는 오래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1932년, 일본 군경이 연길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연집강 기슭의 어느 한 가옥에 그들을 가둬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는 게 현존한 전부의 기억이었다. 리송덕옹은 룡정의 일본강점시기 문건을 조사할 때 조기석 등을 지주 장문한의 창고에서 불태워 죽였다는 한 줄의 기록을 발견한다. 그후 리송덕옹은 연집강기슭에서 1년 너머 조사 작업을 벌여 끝내 장문한의 저택자리를 발견하며 이어 이곳에서 족쇄, 인골 등을 무더기로 발굴하였다.
“현장을 찾았다가 마침 인부들이 유적을 모르고 공사를 진행하려고 하는 걸 막았지요.”
단 하루만 늦어도 렬사들의 순난지 옛터가 파괴될 수 있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렵게 찾은 이 순난지에는 마침내 렬사들을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게 되었다.
10여년전, 화룡시 와룡의 화안촌에도 이렇게 유적 기념비 7개가 섰다. 화안촌은 서성진에서 골짜기를 따라 백리 길을 들어가야 한다. 그때 리송덕옹은 인부들을 이끌고 서성에서 시멘트 등을 운반하여 힘겹게 기념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기념비가 세워진 자리는 울창한 숲에 가려있다. 그때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력사 현장의 흔적을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을 터이다.
최초의 유수의 답사자 가운데서 이런저런 사연으로 하여 연변에 현존한 인물은 리송덕옹 한 사람뿐이다. 연변의 적지 않은 학자들은 리송덕옹을 따라 근대사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수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력사인물이 바로 그의 이웃이었다
얼핏 보면 리송덕옹의 시초의 직업은 력사와 아무런 련관이 없다. 연변박물관 연구원으로 배속되기전에 선후로 조양천의 중학교와 정부의 보건위생 부문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사실 리송덕옹은 연변대학 력사학부 초기의 졸업생이다. 그 시기 력사를 전공한 그리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진짜 력사와 그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그의 경력에는 연변 력사의 굵직한 선을 그었던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1930년대 초, 일본토벌대에 의해 10여개 마을이 처절하게 유린당한 “해란강참안”이 발생하였다. 이때 리송덕옹의 백부는 토벌대의 난도에 숨졌다고 한다. 가족은 부득불 다시 조선에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룡정의 수남촌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리송덕옹이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다녔던 룡정 3.1소학교는 전신이 서전서숙(瑞甸書塾)으로서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민족교육의 불씨를 뿌린 학교이다. 3.1소학교는 선후로 학교 이름을 10여차 바꾸면서 오늘의 실험소학교에 이르렀으며 조선민족교육 100년사의 단면을 보이고 있다. 소학교를 졸업한후 리송덕옹의 가족은 수남촌에서 룡정 시내로 이사를 한다. 이때 그의 가족은 윤광주와 한 농업사에 있게 된다. 윤광주는 바로 유명한 저항시인 윤동주의 친동생이다. 리송덕옹은 또 1962년에는 새집을 사면서 윤광주의 옆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를 다닐 때 늘 윤광주와 함께 어울려 다녔지요.”
윤광주가 들어 있던 집은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를 다닐 그 때 살고 있던 집이었다. 훗날 리송덕옹은 이 경력 때문에 늘 윤동주 생가를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길라잡이로 나서게 되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리송덕옹은 력사탐방을 하는 사람들의 전문 안내인이나 다름없다. 중국 국내는 물론 조선과 한국의 연변 옛 항일유적지 답사팀의 안내로 자주 나선다.
리송덕옹에게는 남들이 잘 모르는 비사(秘事)가 수두룩하다. 그가 입을 열라치면 서재에 비장(秘藏)한 소설 같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하나가 바로 연변 나아가 동북의 토비숙청은 물론이요, 관내의 토비숙청에도 조선족부대가 대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중국 중부의 호남성 서부의 원릉(沅陵)은 3성 접경지로서 옛날부터 토비 때문에 소문난 고장이다. 예전에 국민당 군대도 원릉으로 들어간후 얼마 배겨내지 못했다고 한다. 1949년 말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단 주력부대가 원릉에 도착, 본격적인 토비숙청을 진행하였다. 이때 141사단의 421, 422, 423 세 개 연대가 토비의 소굴인 룡산(龍山)과 팔면산(八面山)의 전투에서 토비들을 전부 소멸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세 개 연대가 바로 연길에서 조직되었으며 조선족이 집중된 부대라는 것.
이런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리송덕옹이 대학입시 때 력사학부를 지망한 원인을 금방 알 것 같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후 이런저런 사연으로 20년동안이나 본업을 떠난 직종에서 “떠돌이”를 한 경력은 이때 따라 더구나 가슴에 아프게 맺혀온다.
어쩌면 허송세월을 한 그때 그일 때문이 아닐지 한다. 리송덕옹은 자료의 수집, 정리 그리고 답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요한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세기 3,40년대 동북 땅에 있었던 많은 유명한 인물들은 인제 그에게 여느 이웃집 사람과 다름없었다. 리송덕옹은 마치 이웃 아저씨나 아줌마를 이야기하듯 그들의 경력과 기담 등을 거침없이 술술 엮고 있었다.
리송덕옹은 그간의 답사와 자료 등 수집에 기초, “항일영웅 김정숙”을 집필하여 조선 해당부문의 중시를 받았고 또 한국 고 박정희 대통령의 간도특설부대 근무 설을 부정하여 여론의 초점을 받기도 했다.
어느새 리송덕옹은 근대사 연구의 중심무대에 올라서있었다..
또 하나의 기념비를 세운다
기실 리송덕옹의 본격적인 답사와 자료의 수집, 정리는 퇴직후 진행되었다고 한다. 번다한 일상 사무에서 떠나 그만의 여유를 가질수 있었고 그때까지 단체기억에 차츰 소실되고 있는 인물과 유적을 찾는데 전념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누군가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흔적도 찾을수 없게 될걸요.”
리송덕옹이 곳곳에 유적이나 인물들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전전한 것도 바로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실시된 작업이었다.
“일제의 동북침략 14년 기록”, “연변항일투쟁사”, “연변해방전쟁렬사영웅전”, “항미원조전쟁 사진전시” 등등. 이처럼 그가 예전에 연변에서 적지 않게 열었던 사진전시회도 기실은 력사의 옛 기억을 되찾기 위한 작업이었다.
리송덕옹은 지난 력사의 흩어진 조각을 찾아 맞추는 작업이라면 로쇠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피에 물든 진달래”, “영원한 기념비” 등 다큐멘터리 촬영팀의 유적답사에는 모두 그의 모습이 비껴있다.
리송덕옹은 한때 30미터 길이의 천에 사진 3백여장을 붙여 자작 사진판을 만들고 해방전쟁시기 조선족렬사영웅사진 이동전시회를 열었다. 력사의 현장에 영원토록 잊히지 않을 기념비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영웅들은 저마다 하나의 기념비라고 할수 있지요.”
사실 리송덕옹이 수십년을 하루같이 수집한 옛 자료와 사진 자체가 바로 지나간 력사의 진실된 기록물이요, 둘도 없는 기념비로 되고 있다. 리송덕옹은 현재 그가 품고 있는 유일한 소원은 이런 자료들을 전문 소장할수 있는 전시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후대들에게 력사를 배우는 시각적 자료로 물려주고 싶습니다.”*
글/김호림
중국민족 2013년 제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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