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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윤운걸)
2008년 08월 11일 08시 06분  조회:2247  추천:125  작성자: 윤운걸


윤운걸기자문집

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고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 최은택교수님의 명복을 빌면서


윤운걸



기원 2007년 2월 5일 새벽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이였던 한국 한양대 최은택교수가 66세를 일기로 너무나도 일찌감치 이 세상을 마감했다는 비운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연변은 물론 중국 각지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충격에 쌓여 분분히 애도의 뜻을 표하고있다. 기자도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비운에 쌓인 나머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그제날 최은택교수를 취재하면서 적어내려간 수첩을 뒤져보고 재정리한다.

1997년 중국축구 갑A련맹 제12륜경기가 끝난 7월 28일에 기자는 연변오동축구팀의 최은택감독이 심장병으로 한창 치료중이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훈씨(현 연변축구팀감독)에게 의뢰해 취재를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금방 죽지 않는데 왜 취재를 접수 못하겠는가”며 바로 만나자는것이였다. 일단 만나고보니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한창 점적주사를 맞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띄우면서 인자하게 기자를 만나주었다. 당시 기자의 인상은 그가 호랑이같은 축구감독이 아니라 아주 선비다운 교수 그 자체였다

그가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게 된 배경

1987년 중국 광주에서 아시아축구련맹회의가 있었다. 당시 한양대학교수로 있던 최교수도 회의에 참가했는데 연변에서 안내로 온 추명(당시 연변오동팀의 부감독)을 알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여름에 연변을 방문, 그 기회에 연변축구관계자들의 요청에 의해 축구강습반을 조직했는데 그는 축구지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면서 연변축구관계자들은 연변축구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청구를 했다. 당시 최교수는 한양대에서 학장을 4년간 련임했기에 97년도에 1년 안식년(휴식년)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식년도 마다하고 휴식의 한때를 제쳐놓고 바로 이듬해인 97년도에 연변오동팀의 사령탑을 잡게 되였다.

처음 연변오동팀을 맡았을 때

당시 최은택교수는 중국축구의 정황을 잘 몰랐고 더욱이 연변오동팀의 진짜 실력도  잘 몰랐으며 다만 이 팀이 중국축구팀에서 하위수준이라는것만 알았다. 그가 나중에 알게 되였지만 프로축구에서의 연변팀 선수들은 수준이 낮고 또 수자적으로 훌륭한 선수가 적고 쓸만한 선수들은 간염이 아니면 위염이 있었으며 당시 연변팀에서 주력으로 활약하던 리홍군선수가 북경국안팀으로 이적했다는것도 몰랐다. 소개를 통해 연변팀의 선수들의 능력수준은 괜찮은걸로 알았는데 접촉해보니 그가 생각한것보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굉장히 당황했단다.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연변팀의 정신력이 대단히 부족하다는것을 최교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에 따르면 축구는 11명이 치르는 단체경기로서 어느 개인이 설사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단합심이 없으면 경기는 엉망이 되고 감독의 전술배치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개개인의 수준이 낮은것을 단합심을 통해 강한 축구팀으로 키우는것이 가장 빠른 길일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 길을 걸어 정신력을 키워야 연변축구가 살아나갈수 있다는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팀을 틀어쥐자마자 정신력고취에 전력

당시 연변팀을 맡고보니 선수들이 선배인지 후배인지 친구인지 뒤섞여 례의란 도무지 찾아볼 없었단다. 또 감독을 우습게 보고 감독에게 인사하는 기본적인 례의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우선 례의 즉 감독과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신력부터 고취시켰다. 기술이나 체력이나 전술에서 단결력을 강조,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러서 인사를 반드시 하게끔 “채찍질”했다. 결과 처음에는 인사성도 없고 말도 반말을 쓰던것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인사례절도 밝아지게 되였고 후배들도 선배들의 말을 잘 듣는 기풍이 이 팀에 서서이 일어나게 되였다.

당시 주력선수로 있었던 고종훈선수에 따르면 최은택감독이 사령탑을 쥐면서 선수들은 조금도 숨돌릴 사이없이 훈련을 그렇게도 이른바 “악독”하게 시켰단다.

하여 1996년도에 갑급팀에서 강급의 변두리를 헤매던 연변오동축구팀을 1997년도에 일약 4강에로 껑충 끌어올려 이 팀은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진보가 가장 빠른 상”을 수여받았으며 따라서 연변축구팀이라 하면 모두 겁나하는 팀으로 부상했다. 당시 중국의 한 스포츠언론은 “연변축구팀 선수들은 마치도 들에서 줄기차게 달리는 야생말처럼 좀처럼 지칠줄 몰라 상대방팀이 기진맥진했을 때에는 어디서 오는 힘인지 더욱 기승스러웠고 강자와는 더욱 강해서 이른바 중국에서 강자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팀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했다”고 평했다. 바로 그 힘이 정신력이 아니겠는가.

중국축구에 대해

최은택교수는 당시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 한국,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속하는데 축구의 기술적 능력이나 수준은 비슷하다. 중국선수들의 체력이나 기술이 한국에 떨어지는것은 없다. 중국이 자주 한국에 지는 주요원인은 주로 정신력이다. 중국선수들은 직업에 대한 근성이 몸에 배지 못했다. 축구경기에서 정신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일이고 이런 정신력을 키우자면 우선 “머리부터 씻어야 한다”. 그는 또 축구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전술을 알아야 할뿐만아니라 상대방의 력사, 문화, 풍속도 알아야 한다. 중국축구가 한국을 이기지 못하는것은 바로 한국의 축구를 모르기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한동안 최은택교수는 연변팀의 사령탑을 내놓을 생각도 했다. 그 원인이 바로 중국축구 심판의 편파적인 추태였다. 당시 연변팀 대 북경팀과의 경기뿐만아니라 12륜경기에서도 심판의 불공정한 판결을 받았다. 최은택교수는 내가 몸도 좋지 않고 돈을 받자고 여기에 온것도 아닌데 연변팀이 손해를 보고있으니 괴롭고 굉장히 불쾌하다고 밝혔다.

당시 슬라프나(중국국가팀 첫 감독)는 최교수에게 돈을 얼마나 받는가고 문의했단다. 다 아는바와 같이 그는 일전 한푼도 받지 않고 연변팀을 이끌어 왔던것이다. 황차 이런 판국에 중국땅에 와서 감독을 맡아나선 자신이 바보같다는 느낌이 들어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가졌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변팀이 이기든 지든 자기가 선수들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려는 각오는 돼있었다.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심판원이 심판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얘기했다.

최은택교수가 1999년 3월에 중문으로 “축구와 예술”이라는 책을 청도에서 펼쳤는데 그는 이 책을 펴내면서 “1년 더 되는 시간에 중국에서 감독을 맡으면서 중국축구를 잘 알게 되였다. 여기에서 재삼 얘기하고 싶은것은 축구는 육체적인 대항성 운동일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력의 싸움이므로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반드시 심각하게 결핍한 정신력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국가팀 감독설이 나왔을 때

최은택교수가 연변팀 사령탑을 잡으면서 고종훈선수도 제2의 청춘이 꽃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침하게 지냈던 고종훈선수가 당시 연변팀의 주력순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일찍 고종훈선수가 국가팀에 가담했을 때 최은택교수는 몇번이나 당시 국가팀을 맡았던 척무생감독에게 고종훈의 능력을 과시하게 하라고 얘기했지만 척무생은 시종 듣지 않고 국가팀이 국외의 몇차례 월드컵예선 경기에서 고종훈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이른바 “척가군단”이 “10강경기”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자 중국본토 감독의 명성이 잇달아 일락천장이 되였고 따라서 중국본토에서 감독을 맡은 외국적 최은택교수에게 눈길이 돌려지기 시작했다. 연변구단의 4강신화, 축구팬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절박한 호소, 일부 축구관원들의 추천도 잇달았다. 그러나 최은택교수는 기자가 당시 취재시에 그럴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사실 그가 연변팀에 오게 된것은 한피줄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에서였다. 연변팀을 잘 춰세웠다면 일개인으로서 죽어도 보람이 있다고 그는 당시에 호매롭게 얘기했다. 자기는 대학교수로 있기때문에 1년이란 안식년이 있어 여기에 왔지만 명년에는 올수 없다고 했다. 만년에 대학에서 조용히 정년퇴직하겠다고 그는 기자에게 얘기했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 보아도 스포츠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연변팀이 몇차례 이겼다해서 자기를 재차 초빙하려는것은 성급한 처사라고 했다.

현시점에서 사색해볼 점

한개 민족, 한개 국가의 정신력을 어떻게 보는가? 최은택교수가 연변팀을 떠나 1998년도에 귀국한 뒤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창조했다. 최은택감독이 강조하던 정신력은 단순히 축구에만 귀속되는것이 아니라 제반 조선민족의 정체성구축에 굉장히 귀감이 되는 리론이라 하겠다.

고 최은택교수의 명복을 빌면서 축구의 정신력과 민족의 정신력이 동심일체라는것을 심각하게 느낄 시기라고 본다.

(본문은 흑룡강신문 2007년03월2자,5일자,9일자 3기에 나누어 발표)

<<윤운걸기자문집>> 연재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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