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은 우리 주 환갑날이다. 이 기꺼운 명절을 맞아 필자는 영예로운 주민(州民)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산파이며 초대주장인 주덕해동지를 심심히 추모한다.
1984년 5월 12일, 중공중앙 호요방총서기는 연변을 시찰하며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의 아주 훌륭한 동지이며 조선족의 수령이다》, 《모주석과 주총리는 여러번이나 주덕해동지를 훌륭한 동지라고 말씀하셨다》며 연변에 주덕해기념비를 세울것을 지시하였다.
1986년 7월 3일, 《주덕해기념비》제막식에서 당중앙을 대표해 황광학동지는 《주덕해동지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걸출한 대표이며 중국조선족인민들이 공인하고 경모하는 지도자이며 우리 나라 소수민족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이 60년이라면 필자는 거의 30년을 기자로 지냈다. 이는 자치주가 30년간 필자를 기자로 키웠다는 말이다.
오늘 필자는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나는 이렇게 기자사업을 하였다》는 내용을 자치주 환갑에 올리는 선물로 올린다.
2006년 11월 21일, 나는 《기자와 꽃》이라는 글을 길림신문에 발표하였다.
아래는 《기자와 꽃》전문이다.
- 11월 8일은 기자절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연길시당위에서 기자절 축하로 드린 생화바구니가 신문청사 로비에서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 시각 나의 기분은 1988년 2월 14일, 도문시 김종수시장이 전 시 년말총화대회에서 《오기활기자를 표창할데 관한 도문시인민정부문건》을 읽으며 《연변일보사 오기활기자에게 기공(記功)표창을 한다》고 선포하던 그때만큼 기쁘고 감사했다.
나는 언제부터 기자를 꽃에 비교한다.
지난 1964년 연변인민방송국 서명준기자가 사회주의공작대로 우리 마을에 파견되여왔다. 그때 서기자는 우리에게 많은 세상사를 들려주었다. 나는 기자가 정말 부러웠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한대로 된다》고 하더니 서명준기자를 만나 꼭 20년만에 나는 행정승진을 포기하고 연변일보사 도문시 주재기자로 입선되였다.
나는 기자를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한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해사, 《신》(상급)의 뜻과 인간(백성)의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는 《천사》라고 말한다.
바로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거금을 주고 살수 없다는 우량고추종자(황관단)를 무상으로 기증받아 연변의 남새생산발전에 일익을 주기도 했다.
또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엄동설한에 강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원한 도문시양로단의 고만길의 영웅적사적을 신문에 발표하여 전 연변은 물론 전 성교통분야에서 《뢰봉학습 우수로동자》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를 일으킬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자의 사회적책임감으로 연변의 《이웃절》을 발기하였다.
나는 기자를 꽃에 비긴다.
옛날 하늘의 《신》이 천사를 불러 지상에서 3가지 아름다움을 보고 돌아오라고 했다.
천사는 천상과 손색없는 아름다운 꽃과 어린아이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지상의 아름다움으로 선택하였다.
꽃은 지상과 천상의 미의 상징이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다. 꽃은 묵묵히 향기를 뿜는다. 꽃은 철을 어길줄 모르며 음지와 양지를 탓할줄 모른다. 눈속에서도 어김없이 약속대로 제철에 핀다. 아름다운 련꽃은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른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삭막하고 어두울 때 꽃을 보면 저도 몰래 부드러운 위로를 받는다. 사색, 사랑, 희망, 용기를 주는 꽃은 인생의 영원한 오아시스다.
나의 좌우명은 《먼저 인간이 되고 후에 기자로 되자》이다.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로 되지 말고 참다운 언론인이 되자, 독자들의 가슴속에 메아리를 치는 글을 쓰며 꿈틀거리는 사건현장에서 십자가의 참된 천사로 되자.)
이는 내가 기자사업을 시작한 초심이며 기자로서 지켜야 할 도덕이며 평생을 지켜갈 맹세이다.
필자는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소박하고 부지런한 손이 되여 언제 어디서나 오염을 모르는 《련꽃기자》가 되려는 다짐으로 이 밤을 설친다.
x x x
실로 그랬다.
나는 지난 30년간 수십만자에 달하는 기사를 써내 연변의 물질문명건설과 정신문명건설에 기여를 했다.
아래에 《기자와 꽃》에서 곁들었던 세가지 실례로 이를 증명하련다.
먼저 고추종자이야기다.
1987년 1월 10일, 《연변일보》는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는 나의 기사를 톱기사로 발표했다.
기사 전문이다.
- 《우리 농민들은 돈만 보고 살지 않습니다. 당장 청년들을 묶어세워 문화실이라도 꾸려야 하지요.》
지난해 순수입을 만원이상 올린 도문시 홍광향 향양촌 리명달농민이 지난 12월 26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농민들의 절박한 수요는 무엇입니까?》
《과학기술전수와 기술정보이지요. 전 시적으로 우리네 오이생산량이 제일 높은 축입니다. 그런데도 지난해에 포기당 오이가 60여개씩 열렸지만 대부분이 절로 떨어져 결국 한포기에서 10개밖에 뜯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제문제를 가지고 과학기술부문에서 단위당 수확고를 높일데 관한 기술을 전수해준다면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내가 어느 잡지에서 보았는데 산동성 이남지구에 외국에서 인입한 고산량 고추품종이 있다는데 고추 하나 무게가 250그람 내지 750그람씩 된답니다. 이런 우량종자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면 어느 농민이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기자의 물음에 주는 보통농민의 갈망적인 대답이다.
x x x
이 기사가 발표된 후 필자는 이 신문기사와 함께 조선족농민들의 간절한 념원을 담은 편지를 산동성 이남현남새연구회에 부쳐보냈더니 1987년 2월 16일에 이 연구회의 주순(朱順)이 조선족에 대한 열렬한 기대를 담은 간단한 편지와 함께 다 팔고 더는 없다며 30여개의 귀중한 미국품종 《황관단》고추종자를 보내왔다.
기자로서는 너무도 뿌듯하였다.
나는 이 고추종자를 리명달농민에게 전달했다.
몇년간 노력으로 리명달이 번육한 《황관단》고추는 매 평방메터당 10킬로그람의 고산량을 따내 동네를 놀래웠다. 《황관단》고추의 한개의 평균 무게는 450그람, 큰것은 750그람이나 되였다. 이로 하여 주변에서 《오이보다 더 무거운 고추가 나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입소문으로 퍼지며 이 고추가 길림성우량고추품종에 평선되였다고 했다.
1989년 6월 11일 연변일보 1면에 실렸던 《황관단》고추 보도
다음은 고만길에 관한 보도다.
1987년 3월 13일, 연변일보는 1면 톱기사로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라는 제목으로 나의 글을 실었다.
글은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조선족로동자 고만길이 1986년12월 24일 엄동설한에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해낸 감동적인 사적을 소개하였다. 그때 필자는 40여일간 고만길이 걸어온 발자국을 밟으며 근 100여명의 목격자를 취재하였다.
고만길은 1971년이후 몇년간에 선후로 4차례나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했고 남을 위하여 가는 곳마다 수두룩한 좋은 일을 하였으며 5차례나 선진생산자로 표창을 받았다.
1987년 3월 10일, 중공도문시위와 도문시인민정부에서는 고만길에게 《자기를 잃고 남을 구원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그에게 1등공을 기입하였다. 동년 8월 7일, 중공연변주위와 주인민정부는 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자기를 잊고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란 칭호를 수여, 1988년 5월 28일, 길림성교통청은 도문서 전 성 교통계통표창대회를 열고 고만길에게 《뢰봉학습우수로동자》란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도문시인민정부에서 필자를 기공(記功)표창하자 연변일보가 《본사 력사에서 본사기자가 지방정부의 표창을 받기는 오기활기자가 처음이다》는 소식을 발표하였다.
고만길취재를 마치고(뒤줄 왼쪽부터 고만길, 필자, 도문양로단 당지부서기 박봉구)
올해는 뢰봉 타계 50주년이며 모택동주석이 《뢰봉을 따라 배우자》는 제사를 쓴 49주년 기념해다.
중국공산당 제17기 제6차 전체회의에서는 《뢰봉을 따라배우기 활동을 깊이있게 전개할데 관한 결정》을 지어 뢰봉을 따라배우는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 핵심가치체계를 구축하는 필요한 고리이며 사회주의 문화강국을 건설하는 유력한 조치라고 하였다. 지난 2월 29일 필자는 당의 호소에 따라 25년만에 두번째로 고만길을 취재하고 《80년대 연변의 <뢰봉> 오늘은 어떻게 지낼가?》는 기사와 함께 당년에 연변일보에 실렸던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란 기사의 전문을 인터넷길림신문에 올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기사전문을 인민넷(조선문판)을 비롯한 흑룡강신문, 연변인민방송국 등 신문매체에서 전재하였다.
그 다음은 《이웃절》발기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세포단위다. 가정과 가정, 이웃과 이웃간 화목은 조화사회를 건설하는 기초의 기초의 기초다.
그런데 도시의 거주문화변화와 농촌호도거리보급은 도시와 농촌에서 《이웃사랑》이 식어가는 현실을 초래했다. 이런 실정을 파악하고 필자는 2005년 10월에 《이웃절을 내오자》는 글을 《지부생활》편집부에 보냈다.
글에서 필자는 《이웃절》이 있게 되면 사회공덕, 후대교양, 민족단결에 유리하고 간부와 백성 관계를 개선하는데 필요하며 빈부차이를 줄이는데 리롭다는 근거를 밝혔다.
지부생활편집부는 조화사회건설에서 《이웃절》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제때에 가늠하고 필자의 글과 함께 편집부의 글을 실었다.
지부생활편집부는 《이웃절》전문란을 설치하고 전문기자를 배치하는 등 여러 가지 조치로 《이웃절》을 보도하고 《이웃절》에 따르는 지상토론을 벌였다.
지상토론에서 지부생활편집부는 《편집자의 말》2편, 문자기사 29편, 사진보도 19폭을 발표, 독자, 사회구역, 주, 시 관계부문 책임자들이 참여한 《이웃절좌담회》를 조직하며 《이웃절》토론을 종심에로 이끌었다.
2006년 4월 11일, 연길시 북산가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은 지금 연길, 왕청, 룡정, 돈화 등 시와 현에 파급되여 《이웃절》이 자원적이고 대중적인 《필요명절》로 부상, 몇년전의 《친척잔치》로부터 오늘의 《동네잔치》로 파급되고있다.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은 연변서 연길시 소영진 인평촌,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의 《이웃절》활동을 취재, 정치문화부 원건달부주임은 수십년간 민족보도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이라며 인민일보에 연변의《이웃절》을 대서특필하였다.
나의 30년 기자생활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키워낸 30년이다.
나는 기자사업을 무한히 사랑한다.
나는 연변일보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지금까지 길림신문사에 초빙되여 1선기자로 활약하고있다.
2009년 11월 10일, 나는 기자절 10주년을 맞이하여 《기자정신만세!》를 발표했다.
필자는 글에서 《엄격한 자기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 출중한 자신감, 벼슬을 싫어하는 <생리>, 거기에 평생 분투한 정신이 오늘의 기자정신을 키웠다》고 고백했다.
언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자치주 환갑에 필자는 30년간 기자선문집인 《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쉬는 사람들-오기활기자가 만난 사람들》,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다-오기활 일사일언》을 책으로 출판해 《환갑선물》로 하고저 원고를 연변인민출판사에 교부했다.
나는 이 책이 출판되면 연변의 두가지 문명건설에 단 얼마만의 힘으로라도 될것임을 굳게 믿는다. 나는 《비문없는 벼슬》선배님들을 본보기로 《평생기자》에 도전하며 평생을 《피줄속에서 잉크 흐르는 기자》로 될것임을 다시금 다져본다.
이 글을 맺으며 힘차게 불러본다.
연변 화이팅!
기자정신 만세!
오기활 길림신문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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