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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우리민족의 대표로 될 수 있을까?
2022년 02월 13일 18시 18분  조회:786  추천:1  작성자: 현용수

한국은 우리민족의 대표로 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韓國은 자기를 우리민족의 당연한 대표로 자처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 문화의 모든 것에 韓이라는 모자를 씌운다. 이를테면 韓민족, 韓글, 韓복, 韓식... 등. 심지어 우리민족 몇 천 년의 역사도 모두 한국사로 되어있고,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도 인입한 것이든, 자생한 것이든 일률로 한국고유문화로 점찍고, 고수하고 있다.
그럼 韓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먼저 韓國國名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중국 《後漢書》에는, 기원전 194년에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韓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에 반도 중남부에는 각기 馬韓, 辰韓, 弁韓이라는 세 개의 부락연합체가 있었으니, 이를 “三韓”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韓”이란 결코 우리민족의 발원지가 아니며, 우리민족 대표성 역사사건의 발생지도 아니며, 단지 고대 모 역사시기의 모 지역에 불과하다.
 
누가 조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마한의 伯濟國이 백제로, 변한의 狗邪國이 고구려로, 진한의 斯盧國이 신라로 이어진다는 설도 있기는 한데, 하여튼 이 三韓설이 바로 大韓民國 국호의 최초의 어원인 것만은 확실하다.
 
다른 역사사건들은 잠시 제쳐놓고, 韓의 유래에 상관되는 근대 역사사건들만 살펴보자.
 
1894년 2월 10일날, 조선에서 동학농민폭동이 일어난다. 따라나선 사람들이 20여만이나 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임금인 고종은 동학농민폭동군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종주국인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청나라에서는 호위군사 2800명 보내 준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도 청나라와의 해상전쟁을 구실로 8000명의 군사가 조선에 들어온다. 그때 벌어진 전쟁이 바로 청일갑오전쟁이다. 결국 부패하고 쇄약해진 청나라가 해전에서 패배하고 조선 땅에서도 패배하여 쫓겨 가면서, 일본과 “시모노세끼협약”을 맺는다. 이 협약에서 청나라는 처음으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고 써 넣었다. 이제 조선은 더는 청나라의 종속국이 아니므로 일본이 점령하든 말든 청나라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명성황후가 나선다. 명성황후는 로씨야에 구원을 요청한다. 로씨야는 “조선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일본에 경고한다. 분통이 터진 일본점령군은 1895년 10월 8일에, “여우사냥”이란 명목으로 명성황후를 경북궁 건청궁에 끌고 가서 집단모욕하고 불에 태워 살해한다. 고종임금은 너무도 놀랍고 무서워서 로씨야 공관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로씨야 보호를 받으며 조마조마하게 지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임금은 로씨야 공관의 사촉을 받고, 朝鮮의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바꾸는 사건이 있었다. 청나라가 이미 조선을 버린 형편에서 중국 년호를 폐지하고, 자기 년호를 “光武”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도 인젠 떳떳한 독립국가로 되는 시작이 아니라, 새 상전인 로씨야의 뜻에 따른 해프닝이었다. 이것이 후기에 韓國국명의 계기가 되였다.
 
1904년, 함흥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역시 서로 조선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운 것이다. 결국 일본이 이기고, 러씨야가 패배한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은 “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간다. 그 후 5년간 조선에서는 별로 큰 반항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日朝倂合條約”이 강제 체결되고, 공포됨으로써 조선은 국권까지 완전히 빼앗겼다. 이로써 조선은 35년간의 치욕적인 일본식민지시대가 시작된다.
 
새 시대가 열릴 때마다, 나라의 興亡盛衰는 주로 통치자에게 달린다. 조선이 망국한 것은 그 주요책임이 고종의 무능함에 있었지만,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자기 책임을 다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다. “乙巳勒約”이 체결되고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경기도 용인에서 이익삼이라는 의병장이 나서서 “나라를 건지자! 따라나서라!”하고 외쳤는데, 겨우 15명이 따라나셨다. 너무도 무능한 조정을 보면서, 백성들은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나라를 건질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싸움에서 800명 일본군이 4만명 농민군을 살해하였는데, 일본군은 한명의 죽음도 없었다. 농민군의 무기는 창과 칼, 기껏해야 화승총이었지만, 일본군의 무기는 기관총과 대포였다. 그것이 그 당시 조선과 일본의 현실적 차이었다.
 
당시 반도에서 망국노를 원치 않는 민족의 많은 유지지사들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중국조선족 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대오에 가담하여 중국인들과 어깨 겯고 전 중국을 누비며 일본군과 싸웠고,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에 건너가, 처음에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동북항일련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후에는 자체로 빨지산 항일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홍범도, 김좌진 등 기개가 있는 조선의 민족주의자들도 중국에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중국의 봉오동, 청산리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그해 9월 15일에 김 구를 대표로 하는 조선의 민족독립 운동가들은 중국上海에 가서 “大韓民國”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당시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견지하였다. “大韓民國”국명이 이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와 반면에 박정희(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를 대표로 하는, 일본에 굴복한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징병되어 일본군에 편입되었으며, 일본군을 따라 대동아전쟁과 중국침략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리고 많은 조선의 유부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모집되어 갔고, 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이 노동자로 모집되어, 일본을 위하여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중국군과 쏘련군 미군에 의해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고, 8월 15일 반도 땅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을 반도에서는 광복이라고 한다. 당시 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 지역은 쏘련군, 이남 지역은 미군이 진주한 것을 계기로, 1948년, 북남에 각각 쏘, 미 군정에 의한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이북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수립되고, 이남에 大韓民國이 수립되면서, 광복 이후 자주독립 통일국가를 지향한 민족의 염원은 좌절되었고, 분단은 고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이북과 이남의 두 정권의 성분를 각기 분석해 보면, 이북정권은 철저한 항일세력들로 무어진 정권으로서 독립의 의의가 아주 크고 민족색채가 돌출하지만, 이남정권은 일본에 굴복했거나, 일본에 충실했던 친일세력들이 대거 등용된 혼잡한 정권으로서 그들에게 있어서 독립의 의의는 그리 크지 않으며, 상전 국이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 한국은 우리민족의 정통을 계승하고 발양한 나라가 아니고, 우리민족의 국제적 대표가 될 수 없으며, 중국조선족에 대하여 더구나 대표자격이 없다. 우리민족은 근대에 와서 대국들의 분쟁에 의하여 분열된 민족으로서 아직까지도 국제적으로 통일된 호칭이 없다.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조선민족”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인다. 이는 습관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고, 현대에도 한국과 조선으로 분단되어 서로 국명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에, 분단되기 이전 명칭인 “조선”이라는 말이 그나마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조선을 “북한”이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남의 정권이나 북의 정권에서, 모두 자기의 헌법에 반도는 하나의 나라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조선”이란 말은 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북의 조선만 가리킬 땐 “북조선”이라 부르며, 이남을 가리킬 땐 “남조선”, 혹은 “한국”이라고 부른다. 민족을 호칭할 경우 아예 영어로 “코리안(Kore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백의민족", "배달민족" 등 호칭이 있지만 공식호칭은 아니다.
 
세계에서 우리민족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총 8,000여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세계인구의 약 1%를 차지한다. 대한민국에 5,000여만 명, 조선에 2,500여만 명 있으며, 이외에도 미국에 약 250여만 명, 중국에 약 180여만 명, 일본에 약 80여만 명, 원 쏘련지역에 약 50여만 명... 등, 한국과 조선 이외에도 근 500만 명좌우의 계례들이 산재하여 있다.
 
중국조선족은 조선왕조말기부터 일본식민지시기를 거쳐 중국에 건너온 조선인들의 후손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민족법전에 “조선족”으로 명명되어 등록 되었다. 그들의 중국 국적은 당국에 입적신청을 올려 비준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중국의 漢族들과 어깨겯고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크나큰 희생을 냈고,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공화국 창건활동에 직접 참여한 결과이다. 중국의 조선족 집거구에는 마을마다 진달래 피는 곳에 렬사비가 있고, 렬사비마다 적어서 몇 십 명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가 급 노래인 “中國人民解放軍軍歌”도 조선족 음악가 정율성선생이 지운 것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부끄럼 없이 당당한 開國民族이다. 中華人民共和國은 중국조선족이 중국의 漢族,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공동히 손잡고 건립한 완전 자기나라이다. 중국에서는 헌법상 모든 민족이 공동한 주인이고, 공동한 권리가 있다. 민족이 크고 작고 상관없이 일률로 평등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자기언어를 쓸 권리가 있고, 자기문자를 쓸 권리가 있으며, 자기민족복장을 입을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전통문화를 계승 발양할 권리도 있다.
 
소위 “한복”이라는 것은 우리민족 전통복장에 대한 한국식 명칭이다. 이 복장은 결코 한국의 독점衣裳文化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공동한 전통衣裳文化이다. 전 세계의 우리계례들은 모두 이 복장을 입을 권리가 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건만, 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 복장은 한국에서만 입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민족복장을 입고 베이징동계올림픽개막식에 출현하였는데, 이것은 원래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현상이건만, 한국은 마치 대단한 것을 도둑이나 마친 듯이 온 나라가 떠들 썩 한다. 그런데 한국은 기실 크게 잘못알고 있다. 중국조선족이 입은 옷은 결코 “한복”이 아니라 전통 “조선족 복”이다. 한국은 과대망상에 빠져 상식을 혼돈 하고 있다. 이렇게 이웃나라의 트집만 호시탐탐 노리며 사는 것이 피곤도 하련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도리어 기본정치인 것 같다. 그리하여 하찮은 기자의 황당한 기사 하나로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전국의 뜻을 따라야 하는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취약하고 기형적인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중국의 道德經에는 “海納百川”이란 말이 있는데, 바다가 천하의 하천을 용납하듯이, 너른 흉금으로 천하의 인심을 포용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개인 GDP가 비교적 높은 한국은 중국조선족을 포함하여 세계에 흩어진 우리 계례들에게 얼마간 흡인력은 가지고 있지만, 우리 계례들을 마음으로 포용할 만큼 그렇게 너른 흉금이 없다. 중국동포들은 무한한 동경을 안고 한국에 왔다가, 한국이 많은 방면에서 확실히 선진국가임을 실감하면서도, 중국동포들에 대한 너무 편파적인 사회민심과 너무 인색한 국가정책 때문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물론 한국도 체제적 당파 간 싸움으로 자기의 어려운 사정이 있겠지만, 현재의 한국은 자기를 대표할 뿐이지, 우리민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자연히 그 답안이 나오는데, 너무 높은 기대는 접어야 한다.
 
중국조선족들에게 있어서 韓國은 한때 민족의 성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현재 중국의 GDP가 미국을 바싹 따라가면서 G2로 부상하여 한국보다 훨씬 높아졌지만, 개인 GDP는 한국이 많이 더 높으므로, 많은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노무하고 있다. 한국노무는 여전히 중국조선족들이 치부하는 중요한 선택의 하나이다. 이제 멀지않은 내일에, 중국이 G1이 되어 세계최대 부강국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의 추세이다. 그때에도 중국조선족은 한국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분쟁은 분쟁이고 계례는 계례이다. 한 계례간의 분쟁은 상호 욕설로 해결할 수 없다. 역사가 해결해 줄 것이다. 조급해 마라. 현재 한국이 중국과 중국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중국이 쾌속 부상하는 과정의 작은 에피소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많은 일들은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곳까지 노력을 하여 역사에 유감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용수 서울왕십리 2022-2-12 초고
현용수 서울중랑천 2023-9-20 수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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