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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장례문화 이어간다.
2013년 08월 23일 17시 57분  조회:4727  추천:0  작성자: 玄盛元
장백현 우량한 조선족장례문화 이어간다
편집/기자: [ 최창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12-31 08:33:38 ] 클릭: [ ]
 

향도계지도일군 교체의식

해마다 거의 한번씩 열리게 되는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성조선족향도계 계원대회가 새해 양력설을 계기로 12월29일, 장백허씨네 식당에서 소집되였다.
회의는 지난 1년간의 향도계사업과 3년간의 향도계 리사회사업을 총화한 기초상에서 기바꿈선거로 새로운 지도부를 내왔다. 그리고 새해의 장례직책을 짊어질 리사회 리사장, 총도감, 도감, 총무와 유사명단을 공포함과 동시에 교체의식을 진행했다.
회의는 또 장백조선족들의 사망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존재하는 문제와 부족점을 찾고 금후 우리 민족의 장례를 보다 문명하고 간편하게 치를데 대해 연구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장백현당위와 현인대, 현정부, 현정협의 지도일군들과 전임 현장들이 회의에 출석, 다년간 조선족향도계가 장례를 아주 문명하게 치르고있는데 대해 높이 찬성하고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장례문화를 세세대대로 이어나갈것을 요구했다.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성조선족향도계는 장백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를 계승발양하고 세세대대로 이어 나가기 위해 설립한 군중성적인 민간조직이다.
자치현성립과 더불어 5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장백현성 조선족향도계는 시종 문명하게 장례를 치르고 사망자가족을 위해 돈을 적게 쓰고 그들의 뒤근심을 크게 덜어주어 사회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고있다.
알아본데 따르면 장백현은 지금까지 향도계조직에 가입한 호수가 무려 2568여세대에 달한다.

 

새해 총도감 남경호씨


새해 리사장 김성원씨


기여가 많았던 선배님들


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장례문화 이모저모

 (원문)중국조선족상장문화의 변천에 관하여
염송심
 
들어가는 말:
   상장문화는 인간이 사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련의 사회활동 즉 사망관 臨終배려 喪葬儀式 造墓 立碑 祭祀 등 제반활동을 의미한다. 상장문화는 민족전통문화의 중요한 내용으로써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한다.
   조선족은 19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의 100년간에 자연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선반도에서 중국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월경민족이다. 그들은 중국동북지역에 이주한 후 주로 압록강 도문강 송화강 목단강 등 하천의 유역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하면서 점차적으로 크고 작은 집거구역을 형성하였으며 비교적 온정하게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존하여 왔다. 하지만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부동한 지역에서 이주하였기에 그들의 풍속습관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함경도식 경상도식 평안도식으로 규납할 수 있다. 조선족상장문화의 기본내용과 형식은 조선반도에서 유래 되였지만 부동한 시기 중국의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특히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중한수교 등 중대한 역사시기를 거치면서 생사관 가치관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내용으로부터 형식까지 비교적 현저하게 변화 되였다. 총체적인 추세는 번잡하고 봉건미신적인 내용과 형식이 많이 사라지고 현실적 문명적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본문에서는 조선족상장문화 관련문헌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한 기초위에서 필자가 다년간 동북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조사연구 자료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조선족상장문화의 변천 및 그 원인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Ⅰ 20세기 60년대 이전 조선족의 상장문화
   조선족은 예로부터 상장례의를 중시하여 왔는데 이것은 영혼불멸관념과 조상숭배사상의 반영이고 또한 전통儒學孝사상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60년대 이전 조선족은 기본상 조선반도 민족의 전통적 상장예의 습관을 지켜 왔다. 그 현저한 특점으로 상여계와 토장을 들 수 있다.
1. 상여계
   상여계는 조선족들이 상장儀式을 치르는 민간조직이다. 20세기 6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마을들에는 거의 모두 상여계가 있었는데 18세 이상의 남성들은 모두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작은 마을에서는 몇 개 마을이 공동으로 하나의 상여계를 형성하였다. 상여계에는 尊位 都監 執事 所任 등 직무와 喪具를 보관하는 건물 喪輿房이 있었다. 존위는 마을에서 덕망이 높은 어르신이 맡는데 명예상으로는 가장 높은 권위자이지만 상장의식의 구체사무를 처리하지는 않는다. 도감은 상장의식을 지도하는 사람이고 집사는 구체적인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며 소임은 도감의 심부름을 듣는 사람이다. 마을에 상사가 발생하면 먼저 존위에게 보고하고 존위가 도감으로 하여금 상가에 가서 상장의식를 지도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出殯하기전에는 집사가 상가에 가서 구체적으로 지도하고 도감은 오직 출빈하는 날에 상가에 가서 친히 지도한다.
   상여방은 상구와 장례식에 쓰는 그릇들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보통 마을에서 5~6리 떨어진 위치에 짓는다. 상여는 관을 운반하는 도구로서 길고 짧은 나무토막과 包帳 仰章 등으로 구성 되였는데 보통 12명에서 18명이 메는데 상여군들은 상여의 양쪽에 서서 어깨로 상여를 메여 내간다.
한마을에 상사가 발생하여 장례식을 치를 때 상여계 계원들은 반드시 모두 참가하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참가하지 않는 자는 벌금을 받는다. 상여계는 매년 년 말에 총결회의를 열고 일년간의 사무를 총결 짓는 동시에 존위와 도감을 改選한다. 20세기 60년대까지 조선족들은 대부분 상여계에서 장례식를 치렀다.
   청말 부터 1931년 만주사변 전 까지 시기에는 중국조선족마을의 행정조직이 건전하지 못하였기에 상여계는 일면으로는 마을사람들의 상장의식를 치르는 호조합작 조직으로 공동체의 단결과 화목에 크게 기여하였고 일면으로는 마을사람들의 공덕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마을 사람들 중에 분쟁이 일어나거나 어느 가정에 불효자가 나타나면 상여계에서 해결하고 처벌 교육을 하였다. 일제가 동북을 점령한 후 상여계는 다시 상장의식만 치르는 민간조직으로 전환 되였다.
2. 토장습속
    토장은 예로부터 조선족들이 시체를 安置하는 주요 방법 이였다. 조선족들은 마치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조상을 땅속에 정중히 모셔야 자손들의 안녕과 번영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20세기 60년대 이전시기 조선족들은 상사가 발생하면 모두 토장을 하였는데 그 장례식의 구체적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장례식을 치를 때 우선 먼저 喪主 主婦 護喪 祝 司書司貨 등 인물을 확정한다. 상주는 상제의 주요 대표인물로서 장례식의 전부 과정을 주관한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장자가 상주로 되고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 承重하여 상주의 역할을 한다. 아내가 사망하면 남편이 상주로 된다. 초혼이 끝나면 상주는 상복을 입는다. 父喪이면 왼팔 소매를 끼지 않고 母喪이면 오른팔 소매을 끼지 않는다. 주부는 장례나 제사 때 상주를 협조하는 여성을 말한다.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 초상에는 死者의 부인이 주부고 虞祭후에는 상주의 부인이 주부역할을 한다. 사자나 상주가 모두 부인이 없을 때에는 同姓친척중에서 選任한다. 호상은 장례식 때 상가집을 대신하여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하고 지도하는 총책임자인데 사자의 이웃이나 친구 중에서 장례의식에 익숙하고 성품이 믿음직한 남성을 선정하여 맡긴다. 축은 장례 때 각종 축문을 읽는 사람이고 司書는 訃告나 銘旌을 쓰는 사람이며 司貨는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관리하고 賻儀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20세기 60년대 이전까지 조선족의 장례절차는 臨終 招魂 襲 小殮 大殮 成服 弔問 遷棺 發靷 出殯 安葬 등과 같았다. 臨終은 자식들이 부모님의 임종 시 신변에서 지키면서 유언을 듣고 사망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招魂은 사망이 확인되면 死者의 혼을 불러오는 의식이다. 사자의 먼 친척이나 친구가 사자의 옷을 가지고 지붕위에 올라가거나 집 앞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사자의 이름을 부르고 服- 服- 服-을 세 번 반복하여 웨치는것을 말한다. 초혼에 사용했던 옷은 지붕위에 올려놓았다가 출빈하는 날에 태우거나 대염을 할 때 관안에 넣는다. 초혼 후 상제들은 머리를 풀고 哭을 한다. 상장의식에서 사자의 부인 아들과 딸 며느리 장손 등을 喪制라 하고 그 외 친척들은 服人이라고 한다. 상제와 복인이 哭을 하는 방식은 좀 다르다. 상제는 "애고- 애고-" 하고 복인은 "어이- 어이-" 한다. 초혼부터 출빈까지 상가집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것을 금지하며 상제들은 세수를 하거나 이발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襲은 사자를 목욕시킨 후 壽衣를 입히는 절차이다. 보통 사자가 결혼 때나 환갑 때 입었던 민족전통복장을 입힌다.
   小殮은 힌 천으로 사자의 몸을 싸고 동여매는 절차이다. 천을 싸기 전에 먼저 飯含의식을 치르는데 사자의 입에 물에 담가놓았던 쌀 3술과 동전 3매를 넣는 것을 가리킨다. 쌀을 넣을 때 "백석, 천석, 만석" 이라고 웨치고 동전을 넣을 때는 "백냥, 천냥, 만냥" 이라고 웨친다. 그 다음 솜으로 눈 귀 코 입을 막는다. 그 후 사자의 두 손을 교차시켜 배위에 얹혀 놓는데 남성은 왼 손을 위에 여성은 오른 손을 위에 놓는다. 시체를 동여맬 때 세 곳 또는 다섯 곳 또는 일곱 곳을 동이며 가장 많기는 열두 곳까지 동인다. 보통 사망당일에 초혼을 하고 그 다음날에 소염을 한다. 소염 후 시체를 七星板 위에 올려놓는다. 칠성판은 보통 넓이 40 센치메터, 길이 170 센치메터의 나무 반자인데 표면에 북두칠성과 비슷한 7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다 하여 칠성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체를 屛風 또는 包帳으로 막아놓고 식탁 위에 술 과일 고기 등 식품을 차려올린 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낸다. 소염부터 출빈까지 제사상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을 올리는데 이것을 上食이라고 한다.
   大殮은 시체를 관에 넣는 절차이다. 조선족의 관은 보통 장방형인데 위부분에 "上"자 밑부분에 "下"자를 써놓거나 또는 화살표를 그려 앞과 뒤, 머리와 발 부분을 구별한다. 평안도식 관은 梯형으로 머리 부분이 넓고 다리부분이 좁다. 그리고 앞면에 "上"자를 쓴다. 보통 관의 길이는 1.8메터 넓이는 1.4메터 높이는 30센치메터이다. 조선족의 관은 지역과 관계없이 색을 칠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을 崇尙하는 민족특성이라고 본다.
   成服례는 대염이 끝난 후 사자의 자녀들과 기타 친척들이 상복을 입고 치르는 의식을 말한다. 성복례 전에는 상주만이 상복 즉 힌 색 두루마기를 입었다. 성복례 때 상복은 남 상제는 머리에 힌 모자와 벼짚으로 만든 屈巾을 쓰고 몸에 소매가 넓은 麻布두루마기를 입고 왼쪽가슴에 麻布오래기를 꼽고 허리에 마포치마를 두르고 작은 다리에 脚絆을 치고 발에 마신을 신었다. 여 상제는 풀었던 머리 가락을 다시 올려 얹은 후 머리에 힌 천 오리를 매고 마 또는 벼짚을 꼬아서 머리를 동이고 머리위에 麻布片을 덮고 몸에 소매가 좁은 마포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 마끈을 매고 발에 마신이나 짚신을 신는다. 喪杖은 사망자가 남성이면 참대막대기를 짚고 여성이면 버드나무막대기를 짚는다.
    성복례 후 弔問객을 접대한다. 조문객을 맞을 때 남상주는 마당에서 哭을하고 여 상제는 방안에서 곡을 한다. 성복례 전에는 조문객을 접대하지 않고 다만 사자와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問喪을 할 수 있다. 문상은 술도 붓지 않고 절도 하지 않는다. 조문객은 문상 시 靈座앞에 술 한 잔을 부어 올리고 절을 세 번한 후 상주 및 복인들과 맞절을 한번 한다. 그 시기 조문객들이 가지고 오는 부의금은 보통 酒 초(臘) 挽章 등 이였다. 조문객의 조문이 끝난 후 성복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절차는 焚香 初獻 告祝 亞獻 終獻 侑食 등과 같았다.
   遷棺은 관을 실내에서 상여에 옮기는 절차이다. 경상도와 평안도식 장례식은 관을 옮길 때 문턱 또는 창턱에 바가지나 사발을 엎어 놓고 관으로 눌러 깨뜨린다. 이런 풍속은 두 가지 상징의미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사자는 다시 이집의 밥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자는 저승에 가면 완정한 食器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관 시 문틀에 부닥치는 것과 문턱 두개를 넘는 것을 금지한다. 조선족의 전통가옥은 안 방문으로 천관할 수 있기에 문턱 하나만 넘는데 세 칸짜리의 만족 또는 漢族식 가옥은 문턱 두개를 넘어야 하기에 창턱으로 천관한다.
   出殯은 관을 상여에 실고 묘지로 운반하는 절차이다.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發靷제를 지낸다. 靈柩를 상여에 실은 후 상여 옆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상제들이 男女老少 순서로 술 한 작씩 붓고 靈柩를 향하여 절을 세 번씩 한다. 제사가 끝난 후 상여가 출발하는데 상여가 집을 떠나는 것을 발인이라고 한다.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도감이 큰 소리로 축문을 읽는데 대체 그 뜻은 "靈柩는 지금 출발하여 幽宅으로 향한다. 낡은 것과 받은 선물을 모두 가지고 영원히 떠난다." 축이 끝나면 喪輿隊는 동시에 상여를 메고 앞으로 나간다. 조선족전통장례는 나이 많은 사람이 사망하면 好喪이라고 하여 출빈할 때 喪輿歌를 부른다. 상여를 안내하는 사람이 상여의 위 또는 앞에 서서 손에 銅鈴이나 힌 수건을 흔들면서 상여가를 두 마디를 부르면 상여대 회원들이 함께 副歌를 불러 호흡을 맞춘다. 주요 내용은 사자가 인간 세상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마음과 고향산천과 가족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기대 사항를 반영하였다. 길림지구 경상도식 장례의식의 상여가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引唱: 친인들아 나는 가노라. 우리는 지금부터 영별이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여기를 떠나 어디로 가는가? 북망산천이 나의 거소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저승까지 가는데 몇천리냐? 문밖을 나서니 咫尺에 있구나.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애들아 비통해하지 말아라. 생사병로는 인지상정이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후사는 너희들게 맡기노라. 화목하게 잘 지내다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내말 명심하고 잊지말아라. 내 몸은 이미 쓸모없는 존재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달도 盈缺이 있고 별도 移轉하노라. 제비는 秋去春回하노라.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래년 청명과 추석이 오면 산소를 모시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
   상여는 때론 세 발작을 가고 두 발작을 후퇴하고 때론 걸음을 멈추고 가족과 친척들게 路費를 빌었다. 상제나 복인들이 상여 앞에 가서 절을 하고 돈을 낸 후에야 다시 앞으로 나가군 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식 장례식은 상여가 나갈 때 종이돈을 뿌리였다.
安葬은 관을 묘지에 묻는 일을 말한다. 묘는 보통 장례식 전일에 파 놓는다. 묘지는 통풍이 좋은 양지 즉 "左靑龍 右白虎" 이고 머리는 산계를 이고 발은 하천을 향한 곳을 선호한다. 묘지를 파기 전에 먼저 開土祝文을 읽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维岁次干支,几月干支朔,几日干支.幼學某姓名,敢昭告於土地之神.今為學生某姓名(女性則寫某籍貫某氏)營建宅兆,神其保佑,俾無後艱.謹以清酌脯醢,祗薦於神.尚飧.>>
    묘지의 깊이는 보통 70센치 좌우이다. 관을 묻을 때 산에 있는 묘지는 머리가 산정을 향하게 하고 평지의 묘지는 머리가 북쪽을 향하게 한다. 관을 땅 밑에 안치한 후 銘旌을 덮는다. 명정은 보통 넓이 40센치 길이 1메터의 붉은 천에 먹으로 사자의 籍貫과 姓氏를 쓴 것을 말한다. 명정을 덮은 후 상주가 옷섶에 오방토를 떠서 관의 사주와 중간에 뿌린 후 모든 일군들이 삽을 들어 흙으로 관을 묻는다. 한족들은 묘를 뾰족하게 만드는데 반하여 조선족들은 묘를 饅圓형으로 다진다. 함경도식 묘는 祭壇과 后土제단을 만드는데 경상도와 평안도식 묘는 후토제단을 만들지 않고 묘 오른쪽 2메터 거리에 소나무 한 그루 심거나 납작한 돌을 山神제단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는 보통 출빈 후 3일제를 지내고 사자의 생일 사망일 청명 단오 추석 그믐에 제사를 지냈다. 생일제사 기일제사와 그믐 제사는 집에서 지내고 청명과 추석 제사는 산소에 가서 흙을 올리고 벌초한 후 지낸다.
Ⅱ 20세기 80년대 이후 조선족상장습관의 변천
    1966~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시기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장례의습관은 봉건미신으로 간주되여 파괴 되였으며 민간상여조직 상복제도 상장절차 등이 거의 사라졌다. 개혁개방 후 특히 중한수교 후 조선족과 한국의 교류가 빈번하게 진행됨에 따라 어떤 전통적인 상장례의습관은 회복 되였지만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내용으로부터 형식까지 많은 변화를 보인다.
1. 상여계와 토장습관의 변화
    20세기 80년대 이후 동북3성의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여전히 토장을 하고 민간장례조직 상여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장례조직의 명칭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길림성장백조선족자치현의 상여계를 예로 토장을 하는 조선족지구의 상장례의 의식의 변천에 대하여 약술하려 한다. 필자는 2010년 초에 장백현조선족사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장백현에서는 상여계를 향도계라고 하는데 만주국시기에 설립 되였다고 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페지되였는데 개혁개방 후 다시 회복 되였다. 원래는 農戶위주였는데 1986년부터 職工위주로 변하였고 1996년부터 농호와 직공을 구별 하지 않고 모두 가입할 수 있는 상여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지금 계원의 수는 2300여호에 달하는데 이는 장백현조선족호수의 거의 전부 라고 한다.
   입계비는 시대의 발전과 물가의 상승에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추세인데 최초의 50전으로부터 1원 5원 10원 20원 50원 100원으로 2010년부터는 150원으로 올랐다. 호를 단위로 입계비를 받는데 한사람이 내면 전체 가족성원들이 계원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장백현 향도계는 조선족의 장례식을 치르는 독립건물 장례당이 있는데 면적은 120평방메터에 달하다. 이 건물은 1996년 계원들이 모금하고 민족사무위원회 민정국 등 현 정부기관에서 지원을 받은 기초위에 향도계 책임자들의 노력으로 석회 모래 목재 등을 구해다가 지었다고 한다. 장례당을 짓기 전에는 어느 민족이나 구별 없이 현 병원의 太平房에서 상사를 처리했는데 풍속습관 위생 등 여러 면에서 많은 불편이 있었다고 한다.
    장백현 향도계에는 도감 3명 총무 1명 유사 4명 등 구체적으로 상사를 처리하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군들이 있는데 이 8명에게 매년 수고비 1000원씩 준다고 한다. 조선족장례당에서는 평균 매년 60여 차례의 장례식를 치르고 있다. 상여계의 회원계원가정에 상사가 발생하면 시체를 직접 장례당에 옮겨 오고 상여계일군들이 상가집의 협조 밑에 모든 장례식을 치러준다. 이를테면 수의를 입히고 시체를 싸고 입관하고 명정을 쓰고 영당을 설치하고 부의금을 받고 묘지를 선택하고 출빈 안장까지 모두 책임지고 처리한다.
   관을 운반하는 방법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변하였는데 상여를 쓰지 않고 대신 화물차로 운반한다. 장례비용은 사자가 계원가정의 성원일 경우 장례비 400원을 내고 타향사람이 장백현에서 객사하였거나 농촌사람이 현 병원에서 사망하여 조선족상여계 장례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 계원보다 200원을 더 받는다. 곤난한 가정이나 저 수입 계원들은 무료 또는 장례비를 절감하여 받는다. 그러나 현성에 사는 비계원조선족가정에 상사가 발생하여 조선족 장례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에는 벌금으로 1500원을 내야 한다.
    2001년부터 향도계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조직기구 理事會를 설립하였는데 7명의 前任도감으로 구성 되였다. 그 중에는 이사장1명 비서장1명 재무독감1명 등 3명의 상무이사와 4명의 이사가 포함 된다. 이들은 향도계 전체계원회의에서 선발된다. 이사회가 설립된 후 자금을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2만원에 달하였다. 이 자금은 주요하게 喪具구입 장례당수리비 전기세요금 물세요금 상여차 임대요금 등 지출과 일군들에게 주는 수고비에 쓰인다.
   현성 외에 장백현 경내 촌마을들에도 크고 작은 향도계가 있는데 그 운영방식이 현성의 향도계와 같지는 않았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마록구진 2도강촌 향도계에서는 3년에 10원의 입계비를 받고 상가집에서 100원을 받는다. 동촌에 사는 한족들도 향도계에 가입할 수 있다. 다만 자기민족의 습관대로 장례식을 치를 따름이다. 농촌마을에는 현성의 향도계와 같은 조직기구와 관리절차도 없고 장례당도 없다. 오직 매년 촌에서 추천한 당번도감이 상가집에 가서 향도계 계원들을 지도하여 장례식을 치른다. 계원들은 모두 무상으로 일을 돕는다. 개혁개방 후 조선족농촌의 대량적인 인구유동으로 지금 남아 있는 인구는 거의 노약자와 환자이기에 상여계가 있어도 인력부족으로 독립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마을에 상사가 발생하면 조선족 한족을 가리지 않고 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향도계가 없는 마을에서는 상가집에서 장례식 절차에 익숙한 사람을 모셔다 그의 지도하에 장례식을 치른다. 부의금은 모두 현금으로 하는데 농촌에서는 20~50원이 보통이고 관계가 가까운 사이면 100원을 낸다. 현성에서는 100원이 보통이고관계의 원근에 따라 200원~ 500원 부동한 금액을 한다.
장백현 향도계는 중국정부의 상장제도를 준수하고 移風移俗을 제창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묘지를 선택할 때 경작지와 인공림 그리고 도로에서 3키로메터 이내의 땅을 차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형사범죄자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봉건적 미신활동을 페지 시켰다. 소염 시 사자의 입에 쌀과 동전을 넣는 구습을 취소하였고 상여가도 부르지 않는다. 옛날과 같은 상복을 입지 않고 힌 천을 허리나 팔에 매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명정을 쓰는 방법도 변하였다. 이전에 남성은 學生某公之柩, 여성은 孺人籍貫姓之柩 라고 쓰던 것을 지금은 남성은 學生姓名之柩, 여성은 孺人姓名之柩 라고 고쳤다. 상복도 이전의 효모나 굴건을 쓰지 않고 麻로 만든 두루마기도 입지 않는다. 喪杖도 짚지 않는다. 보통 힌 천을 허리나 머리에 동이는데 상제일 경우 남자는 허리에 여성은 머리에 힌 천을 동인다. 복인일 경우 남자는 왼팔에 여성은 오른팔에 힌 천을 동인다. 다만 상제와 복인이 쓰는 힌 천의 길이와 넓이가 같지 않을 따름이다. 상제의 것이 길고 넓으며 복인의 것이 짜르고 좁다.
   그리고 현재 토장을 하는 조선족들은 대다수가 묘 앞에 비석을 세우거나 소나무를 심어서 표기한다. 어떤 집에서는 묘위에 잔디를 移植하고 또 아주 개별적인 현상이였지만 콩크리트와 벽돌로 묘지주위에 호성을 쌓은 사례도 보였다.
   총적으로 필자는 장백현의 향도계는 조선족의 호조협작의 우량전통을 발휘하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안정과 조화로운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혁개방 후 조선족 인구 출생율이 낮고 인구유동이 빈번한 사회 환경 속에서 향도계는 조선족구성원들의 심리적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2. 화장제도와 조선족 상장예의 절차의 간소화
    20세기 80년대 후 중국정부에서 화장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함에 따라 교통이 불편한 산골을 제외한 대부분지방에서 모두 화장을 하게 되였다. 화장의 절차는 보통 초혼 염 출빈 화장 등과 같다. 일반 2일장 즉 사망 후 다음 날에 출빈을 하지만 간혹 사망당일에 출빈하는 현상도 있다. 습 소염 대염 성복례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염이라고 통칭한다.
    화장방식은 성시와 농촌이 차이를 보인다. 성시에서는 관을 빈의관에서 마련해둔 簡易棺을 사용하는데 빈의관의 차를 불러 직접 시체를 실어다 보관하고 상가집에다 영당을 설치하고 벽에 명정과 유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고 조문객을 접대한다. 출빈하는 날 상제와 복인 그리고 모든 빈객들이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화장터에 가서 遺體고별의식에 참가한다. 고별식에 참가할 때 빈객들은 힌 종이로 만든 작은 꽃을 가슴에 단다. 고별식이 끝나면 빈의관의 일군들이 시체를 화장터에 밀고 가서 태운다. 농촌에서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나무반자로 관을 만든다. 대염 후 시체를 온돌위에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시체를 막은 후 영당을 설치하고 조문객을 접대한다. 출빈하는 날 관을 상여차에 실은 후 밖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발인제를 지낸다. 어떤 지방에서는 관을 상여에 실어서 마을 밖 2~3리까지 메여 내간 후 다시 차에 실고 화장터에 간다. 보통 화장터가 촌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에 있기에 교통적인 불편과 경제적 부담으로 남 상제와 몇몇 일군들만 화장터에 가고 다른 사람들은 대문 밖 까지만 바랜다. 화장터에 도착한 후 이미 집에서 발인제를 지냈기에 유체고별식을 하지 않고 직접 화장한다. 화장을 할 때 경상도식은 장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버지 (또는 어머니) 집에 불이 붙었어요. 빨리 나오세요!>>라고 웨친다. 시체를 태울 때 관 칠성반 초혼의 등 사자의 유물과 상제의 상복을 모두 같이 태워버린다.
   길림 요녕 흑룡강지구의 대다수 조선족들은 시체를 태운 후 화장터 부근의 산이나 강가에서 제사상을 차려 놓고 산신제 또는 降神祭를 지내고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린다. 기독교신자들은 골회를 직접 연통을 통해 하늘로 날려 보낸다. 사자의 영혼을 천당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화장 후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기에 묘도 비석도 없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연변함경도식장례식은 화장한 후 골회를 먼저 화장터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산에다 매장하거나 또는 화장 후 직접 산에다 매장한다. 매장 전 먼저 후토제를 지내고 묘를 판 후 벽돌로 작은 집을 짓고 골회함을 안치한 후 콩크리트로 덮개를 만들어서 덮은 후 흙을 올리고 비석을 세운다.
   조선족의 대다수 사람들은 제사를 취소하는 것은 자손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혁개방 후 조선족인구의 유동성이 커서 대부분 청장년들이 외국이나 큰 도시에 가서 생활하고 있기에 고향으로 자주 돌아올 수 없어서 묘를 세운다 해도 옳게 관리할 수 없고 또 정성껏 제사를 모실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산소를 옳게 모시지 못하여 자손들 자신이 심리부담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묘지를 잘 못 선택하면 도리어 자손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기에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면 그런 걱정이 없다고 한다. 다른 일면으로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생사관과 효도관이 변하여 靈魂不滅論 來世論 등을 믿지 않기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가서 절을 하고 기복하는 것은 심리적인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생전에 실제적으로 효도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묘를 멋지게 장식하고 제사를 잘 모시는 방식으로 효도를 드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위적인 효도라고 생각한다.
   화장제도가 실시된 후 조선족 상장문화의 많은 번잡한 절차와 형식이 간소화 되였다. 이는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른 자연발전 추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일면으로 빈의관과 화장터의 비용이 너무 비싸기에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는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화장터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원래부터 경제조건이 좋지 않은데다 화장비용에 교통비용까지 너무 부담이 크다고 한다. <<살기도 힘들지만 죽기가 더 힘들다.>> 또는 <<죽어도 시체 묻을 곳이 없다>>라는 怨聲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다른 일면으로 대다수 조선족들은 시체를 화장한 후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기에 모든 제사가 취소 되여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제사를 이유로 함께 모여서 정을 나누고 혈연의식과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기회가 점점 적어지기에 친족들사이의 관계가 갈수록 희박해지고 멀어지고 있다.
결 론:조선족상장문화변천의 원인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장문화는 영혼불멸 조상숭배관념과 효사상의 산물이며 그 기본내용과 형식은 조선반도에서 유래 되였지만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상응하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총적인 추세는 현실적이고 문명하고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간소화 되였다. 조선족상장문화 변천의 주요원인을 규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국 상장제도의 영향이다. 20세기 80년대 이후 화장제도의 보급으로 하여 산림지구를 제외한 대다수의 조선족들은 시체를 화장한 후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고 묘지를 만들거나 비석을 세우지 않기에 아울러 제사도 취소시켰다. 다만 원래조상의 산소만 청명 추석 그믐 등 전통명절에 고향에 돌아가서 전통대로 제사를 지낸다.
   둘째는 거주문화의 영향이다. 현재 조선족의 거주문화는 아주 크게 변화하였다. 연변지구의 소수 농촌마을을 제외한 기타 지방의 조선족마을에서 새로 지은 벽돌집은 거의 만족이나 한족식의 세 칸짜리 집이다. 때문에 출빈할 때 관이 문턱을 두 번 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문으로 나온다. 시내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층집에서 살기에 환자가 병원에서 사망한 후 시체를 직접 빈의관 또는 장례당에 옮겨가서 장례식을 치른다. 때문에 천관식 같은 절차는 없어졌다. 그리고 농촌 성시를 물론하고 상여로 출빈을 하지 않고 일률로 차로 출빈한다. 장례식이 끝나면 보통 식당에 가서 손님을 접대한다. 이것은 여성일손이 부족한 원인도 있겠지만 집의 면적이 작고 구조가 변하였기에 손님접대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구유동의 영향이다. 조선족농촌청장년인구의 대량적인 유동으로 상여계조직이 있더라도 인력부족으로 장례를 치르기에는 너무 어렵다. 하기에 잡거지역의 조선족마을에서는 조선족 한족을 가리지 않고 어느 집에 상사가 발생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또한 외지나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자손들이 제때에 고향에 돌아와서 산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낼 수 없기에 화장 후 묘지도 비석도 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면 당일부터 상복을 벗고 청명 추석 그믐 등 전통명절의 제사를 제외한 기타 제사를 모두 취소한다.
    넷째, 외래문화의 영향이다. 중한수교 후 한국교회의 지원으로 조선족거주구역에는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도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신자의 가정에 상사가 발생하면 목사나 집사를 모셔다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사자의 영혼을 천당으로 보내기 위해 화장할 때 골회를 연통을 통해 직접 하늘로 날려 보낸다.
   다섯째, 생사관 가치관 변화의 결과이다.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조선족의 생사관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귀신이나 내세 같은 것을 믿지 않고 현실생활에 충실하고 부모생전에 효도를 드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무덤을 장식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한족문화의 영향이다. 조선족은 장기간 한족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족상장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조선족들도 한족의 상장금기습관을 따른다. 예를 들면 출빈 전에 부의금을 전달하며 장례가 끝난 후에 전달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것은 상가에 또 상사가 발생하게 된다는 혐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춘절기간에 상사가 발생하였을 때 외부에 소식을 퍼뜨리지 않고 직계 친척들이 모여서 조용히 입관한 후 시체를 殯儀館이나 장례당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정월5일이 지난 후 부고를 전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또한 상가집의 사람들은 상사가 발생한 해에 출생축하잔치 혼례식 환갑잔치와 같은 경사에 참가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은 불길한 소식으로 명절이나 경사의 분위기를 파괴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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