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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전통상례풍속 해석--초상편3
2013년 06월 20일 18시 37분  조회:6608  추천:1  작성자: 玄盛元


현성원(무형문화재<조선족 장례풍속>대표전승인)

 
명정(铭旌)명정이란 망자의 신분을 써 넣는 기발입니다. 명정의 재료는 반폭으로 두메터 좌우 길이 되는 붉은천으로 하며, 그 우에 흰글로 망자의 시호(諡號), 본관, 성씨 등을 써 넣습니다. 고대에 명정이 망자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필요하였다면, 지금은 단지 하나의 장례문화로 남아 있을 뿐이므로, 쓰는 방법도 보통 통일시호, 통일격식을 사용합니다.
조선족 남성 망자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學生”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이라고 쓰고, 녀성 망자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명정을 쓰는 격식은 남성 망자의 경우에 만약 그의 성이 金씨였고 본관이 金海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金海金公之柩》라고 쓰고, 녀성 망자의 경우에 만약 그의 성이 李씨였고 본관이 全州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라고 씁니다. 다른 성씨, 다른 본관도 모두 이 격식에 맞추어 써 넣으면 됩니다.
諡號란 일찍 중국 주나라때부터 사용되여 왔는데, 원래는 제왕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관리, 혹은 명류들이 죽은후에 조정에서 그들 생전의 공덕에 근거하여 붙여주는 칭호입니다. 그리하여 제왕이나 명류들이 죽은후 보통 시호로 사책에 기록 됩니다.
후에 일반인들에게도 죽은후에 상류의 시호법을 본따 사사로히 소위 시호를 붙여 주는 관습이 생겼는데, 私諡, 혹은 民諡라고 합니다.
 조선족 남성 망자들에게 붙여지는 “學生”이란 시호는 民諡에 속하는데, 이 칭호는 원래 고려시대에 서당을 다녔거나 또 다니고 있는 사람만이 쓸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벼슬이 없는 하층 兩班집 자제나, 상층 常民 자제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쓸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學生”은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들에게 폭넓게 쓰였으며, 그후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일반 서민중에서 보편적으로 쓰게 되였습니다.
현재 중국의 조선족들은 남성 망자의 시호를 일률로 “學生”으로 쓰는데, 중국 조선족의 겸손한 낮은 자세 처세원칙에 부합됩니다.
 “孺人”이란 칭호는 원래 宋徽宗때에 通直郎부터 承议郎까지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는데, 명나라때에는 7품, 청나라때에는 9품부터 7품까지 별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으며, 고려, 조선시대에서는 9품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습니다. 비록 말단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였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學生” 안해들의 아무런 품계도 없는 것 보다는 한차원 높은 셈입니다. 상징적으로 “孺人”은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부인에 대한 존칭이였습니다.
《石窟一征》이란 중국 지방지 기재에 의하면, 월동객가 지구에서는 본토인이나 객가인이나 부녀의 묘비에 모두 “孺人”이란 시호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전설이 있습니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赵昺(일설에서는 송나라 명장 文天祥 )이 몽골군의 추격을 당하여 월동객가 산구에까지 왔었습니다. 마침 집체적으로 나무하려 떠나 가는 당지의 부녀들이 저마다 기다란 멜대를 어깨에 메고, 자연적으로 길게 한줄로 늘여서서 호호탕탕하게 산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창을 메고 행군하는 병사들의 대오 같았습니다. 몽골군들은 멀리에서 그 광경을 보고 대부대 구원병이 오는 줄 알고 창망히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후 송나라 황제는 객가지구 부녀들의 그번 행동이 너무나 고마워, 특별히 황제의 명의로 객가지구 부녀들에게 일률로 “孺人”이란 시호를 하사한다고 선포하였답니다. 그 어명이 오늘까지 전하여 내려 오면서, 오늘도 그 지방의 부녀들의 묘비에는 모두 시호를 “孺人”이라고 쓴다고 합니다.
송조 마지막 황제때가 되면 고려에서는 25대왕 충렬왕 시기가 되며, 왕실에는 이미 9품 벼슬아치 안해의 품계로 “孺人”이란 칭호가 있었습니다.
이상의 전설이 비록 우리민족의 전설은 아니지만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가 바로 중국 송조때에 大儒家 朱熹의 《주자가례》라는 것을 감안할때, 오늘 날 우리민족이 녀성 망자의 명정에서 시호를 일률로 “孺人”이라고 쓰는 그 유래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명정을 써서는 령구를 가리운 병풍에 걸어 놓는데, 출상할때 기발을 만들어 상여앞에서 들고 길을 인도하며, 하관할때 관우에 덮어서 함께 묻습니다.
지금도 이 풍속은 의연히 성행하는데, 화장을 실시하는 성진에서는 이미 명정을 기발로 쓰지 않습니다. 지금 쓰는 명정의 규격은 너비 30cm좌우로 하고 길이 150cm좌우로 하는데, 쓰는 격식은 위와 같고 흰 석필이나 흰 분필로 써서는 이미 렴습을 끝낸 유체우에 덮었다가 함께 화장합니다.

 
성복(成服)조문(吊唁)대렴이 끝나면 주부와 상제들도 상복을 바꿔 입는데, 남자 상제들은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굴건과 상관을 쓰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주부(主妇, 고인의 안해, 혹은 상주의 안해)와 녀자 상제들은 머리와 몸의 장신구들을 풀어내고 머리에 베천으로 만든 수질을 두르고, 몸에는 베천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벼짚과 베천오리로 꼬아만든 요질을 두르고, 발에는 초신을 신습니다. 복인들은 일률로 상장을 다는데 남자상에는 왼쪽에, 녀자상에는 오른쪽에, 남자들은 팔에, 녀자들은 머리에 답니다. 상복을 바꿔 입고 일동이 제사상 앞에서 한참 곡을 한후 성복제를 올립니다.
전통적으로 상복은 다섯종으로 나누고 복상기는 삼년부터 삼개월 까지 모두 여섯급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중국 조선족들은 보통 상제와 복인으로만 나누는데 상제만 삼년 복상기를 규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복인으로 취급하고 복상기가 따로 없습니다. 복상기란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기한입니다다.
성복제가 끝나면 조문객들을 접대하기 시작합니다. 남자 상제들은 모두 마당에 나가 상장(상사에 쓰는 지팡이)을 짚고 머리 숙이고 가지런히 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합니다. 부상일 경우에는 대나무 지팡이, 모상일 경우에는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습니다. 대나무는 성품이 곧고, 굳으므로 남성을 상징하고, 버드나무는 성품이 유연하고, 번식력이 강하므로 여성을 상징합니다. 조문객들이 뜰안에 들어서면 남자 상제들은 곧 소리내여 곡을 합니다. 조문객들은 정문으로 집안을 들어 가는데, 문앞에 도착하여 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면, 집안에서는 일동이 모두 일어서서 곡을 시작합니다. 상주와 주부, 그리고 녀자 상제들은 웃방에 서서 곡을 하고, 복인들은 아래 정지에 서서 곡을 합니다. 조문객은 집안에 들어선후 묵묵히 제사상 앞까지 걸어가서, 고인의 신위 혹은 유상을 향하여 세번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상주와 가속을 상대로 한번 맞절을 하고는 안위의 말을 합니다. 조문객은 물러 가면서 부의금을 상가에 주는데, 상가에서는 받은 부의금을 일일히《조객부》에 기록합니다.
  
  
상식전(上食奠)아침에 해뜨는걸 기준하여 조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아침진지도 올리며, 저녁에 해지는걸 기준하여 석전을 올리면서 겸하여 저녁진지도 올립니다. 그 뜻인즉 생시와 마찬가지로 고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제사상에 먼저 밥과 국, 반찬을 올리고 수저를 놓습니다. 곡소리 가운데서 집사가 밥두껑을 열고 제사상 앞에서 고인의 식사 시중을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는 옆에 시립하고 서 있는데 그 뜻인즉 고인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양치물 한그릇 떠서 올리고 삼배하고는 밥과 국, 반찬을 물립니다. 이것으로 그번 상식전은 끝납니다. 매번의 상식전 절차는 기본상 같습니다. 매번에 올리는 음식 종류는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기준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사람을 산사람 모시듯 한다는 장례의 기본원칙입니다.

 
문상(聞喪)분상(奔喪)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았다면 즉시 목을 놓아 곡을 해야 하며, 한참 곡을 한후에 곡을 끊고 사망 연유를 물어보고는 또 계속 곡을 합니다. 부모가 사망했다는데도 곡을 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망칙한 일이 없다고 여깁니다. 만약 장례에 가지 못할 형편이면 본지방에서 날자를 맞추어 성복제를 지냅니다.
타지방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고 급히 부모의 장례에 가는것을 분상이라고 합니다. 멀리 목적지가 보이면 곧 곡을 시작하는데, 곡을 하면서 집으로 달려가며, 문앞에 가서는 곡소리를 더욱 높이고, 부모를 부르며 집안으로 엎어질듯 달려 들어 갑니다. 이때 집안에서도 곡소리로 맞이하며, 일동이 함께 령구앞에서 목을 놓아 통곡합니다.
전통적으로 상가에는 반드시 곡소리가 있어야 하며, 곡소리가 높을수록 효자가문이며, 슬피 우는 사람일수록 효자, 효부라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행이 그 가문의 흥성발전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며, 불효는 필연적으로 천벌을 받아 후대가 끊기게 된다고 보편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부모에게 좀 소홀했던 자손들은 자기들에게 차례질 소위의 천벌이 두려워 장례에서 수단을 다하여 효성을 표연함으로써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거날에 장례가 특별히 사람들의 중시를 받게된 원인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시대에서는 유물론적 과학적 교육을 주체로 하여 많이 받아 왔고, 문화적 교육은 인위적이로 의식형태의 제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하여 사람의 죽음을 대함에 있어서도 한 생명의 영구한 결속으로만 인식하고, 령혼의 승화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사람의 경우에는 특별히 절망스럽고, 고통스럽게 되고, 가속의 경우에는 죽는 친인이 두려워져 멀리하게 되며, 장례를 근근히 불결해진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으로만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인과보응"에 대해서도 종교의 설교일뿐 실제생활에서는 과학적 도리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불효를 범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적 과학적 생사관이 죽음이란 특수 과제 앞에서 상대적으로 문화적 생사관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점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과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문화도 필요하고, 종교도 필요하며, 또 인정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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