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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한글본
2012년 07월 16일 16시 07분  조회:2664  추천:0  작성자: 백화상조

삼국사기 한글본

고구려 본기

백제 본기

신라 본기

연표(29~31)

잡지
(32~40)

열전(41~50

삼국사기(원문+한글)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연표(29~31)

잡지(32~40)

열전(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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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다. 우리는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긍정과 부정 양측면을 다 가지고 있는 삼국사기를 연구 할수밖에 없다. 우리 고대 사서의 소멸로 인하여 삼국시대의 정사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서로는 삼국사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가슴 찌뿌등하고 답답함을 느낀다.자신의 나라를 비하하고 중국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고구려 백제는 폄하하고 신라는 높이면서 편중되어 있다.본기 곳곳에 기술한 저자의 견해는 김부식의 사상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과연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스럽다.아무리 중국의 눈치를 본다고는 하나 너무 심하다.혹자는 그렇게 썼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오늘날 까지 살아남을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현실적으로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하게도 되지만 이나라 역사 왜곡의 단초를 삼국사기가 제공했다는걸 생각하면 차라리 없었던 편이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면 다른 사서들이 존재 했을 것이고 역사 왜곡 또한 그리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삼국사기를 이유로 다른 사서들이 모두 멸실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우리민족의 얼과 혼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반도 구석으로 몰아넣어 몸과 마음을 작은 나라에 약소국민으로 전락시켜 버려 사대주의가 당연시되는 관념의 틀을 고정시켜 버렸다.발해 멸망이후 1,000년동안 북벌을 주장한 사람은 묘청과 효종 두사람 뿐이다(TV 드라마 왕건에 나오던 궁예도 있었다).정신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고토회복의 기치는 고사하고 감히 중국을 넘본단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비교해 보자 중국은 춘추기법으로 저희는 높이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상대방은 낮추고 간략하게 적는다.일본은 어떤가.이건 순 날조다.고대부터 현재까지 저희가 최고라고 우기고 거기에 필요한게 있으면 무엇이던지 조작, 날조, 훼손을 한다.그리고 철판 깔고 우긴다.아주 천재적이다.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두나라와는 반대로 내것도 우리것이 아니라고 하고 상대는 높이고 우리는 낮춘다.예의바른 민족이라 그런가 겸손이 미덕인 나라라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 금할수 없다.

지난주 KBS 역사스페셜 5월26일 방송된<중국속의 고구려인 이정기 왕국>편을 보면 이정기 장군이 불과 10만명의 군사로 당나라와 전투를 벌인다.아주 정벌해 버릴 작심으로 그리한 것이다.무릇 기가 살아 있어야 한다.기가 죽어있으면 아무리 군사가 많아도 질 수 있고,기가 살아 있으면 적은 인원 불리한 상황도 극복하고 승리할수가 있는 것이다.우리민족의 기가 죽은데에는 문인중심의 유교숭배사상과 사대주의와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크다하겠다.하루속히 올바른 우리 역사를 복원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불편 부당한 요소를 몇가지 들면

첫째 그당시 여러 우리 고대사서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과 가야 발
해의 역사의 기사를싣지 않음으로서 우리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오늘날
날 까지도 제모습을 찾지 못하게 한점.

둘째 전편에 걸쳐 중국을 숭상하고 우리를 비하하는 내용이 넘쳐나고 중국의 연호
호를 써야만이 연대를 알 수 있는양 빠짐없이 기술하였고 저자 견해라는 난을
통해 전편 곳곳에 중국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우리를 비하한점.

셋째 아시아 최강의 광개토대왕을 별볼일 없이 기술하고 연개소문을 난폭한 반신
으로만 묘사하고 중국의 동해안 일대 대부분을 지배하여 동이강국으로 까지
부상하였던 구태백제의 흔적을 없애버린점.

넷째 열전의 인물 50인 가운데 고구려인(7명)과 백제인(3명)은 10명뿐이고 나머지
지 40명을 모두 신라인으로 채우고 거기다 김유신편을 열전 열권중 3권에 걸
쳐실어 형평을 잃고 있으며 신라왕들에겐 문무대왕,신문대왕등의 대왕호칭
을 사용하면서 고구려나 백제의 왕들에겐 그런 호칭을 쓰지 않은점.

등 전체적으로 사대주의에 몰두하고 승자의 역사로 신라를 합리화 하고 있다.그리고 조공의 역사로 그리고 있다.삼국 공히 수백차례 조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무역활동이라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외교활동이라고 두둔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 할 수 없다.무역은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상행위 이지만 조공은 안바치면 복속을 거부하는걸로 간주하여 쳐들어 오는 것이다.독립적인 외교활동이라고 보기도 힘들다.우리만 거의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고 지나족은 거기에 약간 답례를 할뿐이지 지나인들이 먼저 바치러 온적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그러나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보면 하.은.주 시대에 지나족들이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기사가 여러번 나오지만 중국역사서에는 한번도 안나온다.지나족들은 저희들이 불리한 것은 다지워 버렸다.우리는 바본가 너무 솔직한건가 모두다 기재해놓고 있다.그런데 고구려 20대 장수왕조에 보면 재위기간 79년에 조공한 기사가 47회나 나온다.아주 도배하다 시피 했다.
(遣使入<魏>朝貢)이 40회
(遣使入<宋>朝貢)이 3회
(遣使入<南濟>朝貢)이 1회
그밖에원년 진나라에 한번,13년, 23년,43년 위나라에 3번더 나온다.조금 다른 문구로.장수왕 64년 에서67년 4년동안은 백제장군 연신이 투항한거 빼고 8차례에 걸쳐 조공한 기사로만 채워져 있을정도이다.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던 광개토대왕에 이은 장수왕조에서 곧바로 그렇게 허구한날 조공을 갖다 바쳤을까? 비하하기 위한 과장기사는 이닌지 의심이 간다.

그리고 民饑相食이란 기사가 나온다.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걸믿어야 할지 의심이 간다.고구려 14대 봉상왕 8년7월,17대 소수림왕 8년 9월, 18대 고국양왕 6년 봄등 3회.백제 시조 온조왕33년,3대 기루왕 32년,11대 비류왕 28년 7월,24대 동성왕21년 여름등 4회 등장한다.신라엔 없다.문무왕 11년 당나라 설인귀의 표문에 대한 답장속에 한건 비칠뿐이다.신라엔 없는일이 더 강하고 더부강했던 고구려 백제에서는 여러번 있었단 말인가? 동물들도 제종족은 먹지 않는다.아무리 굶주려 굶어 죽을지언정 제종족을 잡아먹는 일은거의 없다.하물며 인간이 그것도 대동방예의지국이요 군자의 나라 대단군의 자손들이 배고프다고 사람을 잡아먹었을까? 아마도 이기사도 제민족을 비하시키기 위해서 김부식이 자의적으로 삽입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이 믿을 수 없는 민기상식 기사와 단순 조공기사(작전상 조공이거나 전후 사연이 있는 조공 기사는 제외)와 김부식의 정도에 넘치는 사대 독소는 삭제하였다.그게 오히려 사실에 부합되는 기록 일지 모른다.원문+한글본엔 그대로 실어 놨으니 궁금한 독자는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삼국사기엔 메뚜기떼에 관한 기사가 여러번 나온다.우리나라에 메뚜기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삼국사기엔 왜 이렇게 메뚜기떼가 자주 출몰하는 것일까? 중국을 무대로하는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그어마어마한 메뚜기떼가 삼국사기엔 고구려 8회 백제 5회 신라 25회 출현하고 있다.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는 것이다.그것도 추수기인 8,9월(음력)이다.또 4,5월(음력)에 서리가 내려 추수기인 보리를 해쳤다는 기사도 나온다.음력 4,5월이면 양력 6,7월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나라엔 늦가을에나 서리가 내리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삼국시대엔 초여름에 서리가 내렸단 말인가?서리에 관한 기사도 고구려3회 백제 6회 신라 26회 나온다.이밖에도 대해 즉 홍수가 나는 계절이 우리 한반도와 다른점등 우리강역의 기후 풍토와 부합되지 않는 자연 현상들이 너무도 많다.김부식이 사대주의에 절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 이었지만 지금의 이 한반도가 우리의 강역이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우리 후손들에게 주고 있는건 아닐까?

실제로 서울대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의 일식 현상에 대한 연구로 그당시 관측위치를 연구 검토한 결과를 발표한적이있다.그의 결론은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 장소는 삼국 모두 현재의 중국으로 나왔었다. -삼국시대 위치 연구 박창범-

이상 제시한 사항들과 함께 더욱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기대한다.역사에는 교수가 따로 없다.역사앞에는 모두가 학생이다.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우리 모두의 것이다.각자 전공에 맞추어 미스테리한 부분을 밝혀 내는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또한 기대한다.

2001년 5월28일多慧 吳成泳




삼국사기(三國史記) 개설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진삼국사기표〉에는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 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구성은 크게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본기】신라 12권(신라 5, 통일신라 7),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신라에 그렇게 편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부문은 축성(築城)과 순행(巡幸), 관제 정비와 인사 이동,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종교 관례 등이 서술되어,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성은 백제가 가장 많아 늘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순행은 1 2월에 많이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수렵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신라는 구휼과 권농 및 수렵 등 다양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인사 이동은 신라에서 가장 빈번하였으며, 종교 관례는 백제에서 많이 하였다. 천재지변 부문은 혜성 유성 일식 가뭄 홍수 등 600여 회의 천재와, 지진 화재 등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을 예언하는 기능을 하였다. 전쟁 부문은 전체 440여 회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고구려는 이민족, 백제는 신라와 전쟁하였다. 외교 부문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이 있는데 주로 조공(朝貢)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외교가 많았다. 물론 삼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며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연표】 상 중 하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다. 상(上)은 BC 57년(박혁거세 즉위)부터 274년(미추왕 13), 중(中)은 275년(미추왕 14)부터 608년(진평왕 30), 하(下)는 608년(진평왕 30)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의 멸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 제1권은 제사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 지리, 제6권은 고구려 백제 지리, 제7~9권은 직관(職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지리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일 뒤에 넓혀진 영토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사지는 5묘(廟) 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지는 악기 가악(歌樂) 무(舞) 악공, 직관지는 중앙관부 궁정관부 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열전】기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열전이 빈약한 편이다.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은 김유신 열전이고, 제4권은 을지문덕 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强首) 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官昌) 계백(階伯)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率居) 도미(都彌)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 창조리(創助利)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 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것은 사론(史論)의 성격을 지닌 논찬(論贊)이다. 논찬은 신라본기 10개, 고구려본기 7개, 백제본기 6개, 열전 8개 등 모두 31개가 있다. 내용은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신채호 등이 비난한 것처럼 사대적인 악서(惡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편찬된 시기와도 관련된다. 즉 이 책은 고려 귀족문화가 최고로 발전하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런 시대는 대체로 전 시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때인데, 특히 당시에는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전근대 역사서의 특징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성을 유지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및 김대문의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과 《삼국지》 《후한서》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첫째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다섯째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잘 나타난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1394년(태조 3)에 3차 간행, 1512년(중종 7)에 4차 간행이 있었다. 4차 간행은 현재 완질의 형태로 옥산서원과 이병익(李炳翼)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것이 있는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5년 서울대학 허성도(許成道)가 25년의 노력 끝에 CD-ROM책을 출판하였다.

삼국사기(권1∼50)(三國史記(卷一∼五十))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에 관하여 김부식(金富軾)이 찬진(撰進)한 역사서.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 중 제1권부터 50권까지의 목판본. 50권 9책. 20.7×30.2`cm. 서울 종로구 동숭동 이병익(李炳翼) 소장. 1512년(중종 7) 중간(重刊)된 간본(刊本)으로, 고려시대 처음 새긴 원판과 그 후 조선 태조(太祖) 때 개각(改刻)한 것과 중종(中宗) 때 또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서로 다른 판이 섞여 있다. 원판이 이미 닳아서 복구불능이 된 것, 오자 탈자 등의 결점이 있으나, 현존하는 책 중 가장 완전하고 오래된 유물의 하나이다.

삼국사기(권44∼50)(三國史記(卷四十四∼五十))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에 관하여 김부식(金富軾)이 찬진(撰進)한 역사서. 보물 제722호. 《삼국사기》 중 제44권부터 50권까지의 목판본. 영본(零本). 7권 1책. 19.5×25`cm.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조병순(趙炳舜) 소장. 초각본(初刻本)에 의거한 복각본(覆刻本)으로, 비록 영본이기는 하나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 중종조(中宗朝) 간본(刊本)의 와오(訛誤)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각본(原刻本)에서 닳아 없어진 자(字)를 그대로 새겨서 글자 모양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상당히 많으며,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각판(刻板)한 곳도 있어, 원각본이 나온 후에도 오랜 연대가 지난 뒤에 복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판본을 고려 말기에 간각(刊刻)했을 것으로 보이며, 또 자획이 닳은 곳이 많아 간각 후 오랜 뒤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로서는 가장 오래 된 유일한 진서(珍書)이다.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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