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다섯 번째 원리와 여섯 번째 원리는 지도제작술과 전사술(轉寫術)의 원리이다. 여섯 번째 원리에 해당하는 전사술의 원리는 모사(模寫)나 재생산의 논리에도 맞는데 이는 수목체계의 위계 모델에서도 발견되듯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나타낸 모상(模相)에 다름 아니다. 모상(模相)은 항상 동일한 것, 말하자면 통일적인 것, 위계적인 것, 중심적인 것과 만나며 그것을 흉내 낸다. 책과 연관시켜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내용물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을 베껴내는 것이며 책을 복제하는 것, 즉 같은 내용의 책을 적게 혹은 많이 찍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리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지도는 전사술 혹은 모사와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망상(網狀)조직, 그물(網, 네트)과 한 족속으로서 항상 열려있으며, 거의 무한한 다수의 입구를 가지며, 모든 차원들과 접속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분해할 수 있다. 리좀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다, 사본의 문제는 언어능력의 문제라고 할 때, 지도는 언어수행의 문제 즉 실천문제인 것이다. 모사는 노상 복제를 일삼는 반면 지도는 항상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다수의 입구'로 들어가는 실험을 향해 있다.
네트(網)는 컴퓨터들 사이에 수많은 링크(链接)와 라우터(路由器)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접속자는 사이버공간을 넘나들면서 모상이 아닌 새로운 지도를 제작한다. 예컨대 노트북을 가지고 그 어떤 장소든 관계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모뎀(调制解调器) 접속을 통해 네트안에 다양한 입구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리좀의 의의는 통일되고 고정된 이미지로 정형화할 수 없는 운동들의 특성을 통해 이른 바의 불가침의 영역을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는데 있다. 실지 자율적 전자공간으로 일컬어지는 네트의 특성과 리좀적 특성은 상당히 유사하다.
지도의 원리는 비선형적, 수평적, 탈중심적 사고방식과 통한다. 이들은 무의식과 한집안이기도 하다.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의식을 활용하면, 의식은 받아들이는 정보를 단순화시킨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깊은 바닷물속의 거대빙산’과도 같은 존재인 무의식은 의식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따라서 정보가 과도하게 많은 상황이라면, 무의식에게 넘길 때 좋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은 ‘선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하다면 ‘선형적 사고’란 또 뭔가? 일종의 직선적이며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단방향적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한 두 개의 변수 사이 고정된 인과 관계만을 고려하고 이러한 함수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를 맹신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출발하였으며, 정해진 공식을 통해 운동의 결과를 사전에 알 수 있다는 세계관이다.
이러한 선형적 사고에 해당 분야에 깊은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미혹되기 쉽다. 1더하기 1은 2 다 란 식으로 명쾌하게 논리적, 인과적으로 설명을 하며 근거를 제시하는데 어떻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 인간이 사는 사회가 선형적이라기보다는 비선형적이며 인과적이라기보다는 확률적이라는데 있다. 물질도 극미시 세계(極微視 世界, 極巨視 세계의 반대)로 가면 기계적 인과론이 통하지 않는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이 되며 전자의 운동 같은 경우 관찰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변하는 확률로서만 예측이 가능한 세계에 놓여 있다. 기계적 인과론보다는 상호 반응 관계이며 너무나 많은 변수로 인하여 예측만 할 수 있을 뿐 예언이 불가능하다. 극미시 세계뿐 아니라 구름의 형성, 날씨, 물의 흐름 등 또한 비선형 운동의 전형적 예이다. 물질도 이런데 인간 사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너무나 많은 변수가 인과 관계가 아닌 상호 반응관계로 얽혀 있으며 그래서 단일 공식으로 도출될 수 있는 필연적 결과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종합하고 수치화 하여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참고만 할 수 있을 뿐. 그래서 책임성이 있는 전문가들은 절대로 서뿔리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한 척척박사이지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단지 여러 가지 방향성에 대한 가설만 지극히 조심스레 내놓을 뿐이다. 만약 세상이 이렇게 비선형적이며 예언이 불가능한 복잡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대중들에게 함부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한다면 이는 양심불량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게 아니고 본인도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공부를 잘못해서 走火入魔에 빠진 반풍수나 선무당에 다름없을 것이다.
수평적 사고와 수직적 사고. 영국 에드워드 디보노의 저서 <수평적 사고방식>에 나오는 개념들이다. 한 구덩이를 계속 파고 들어가거나 적목을 계속 높게 쌓아올리는 것이 수직적 사고방식이라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보거나 적목을 마구 흩어놓는 식이 수평적 사고방식이다.
디보노에 따르면 수평적 사고란 상황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때 기존에 전통적인 논리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면을 바라볼 수가 없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평적 사고를 하여 문제를 바라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창의적인 문제해결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수평적 사고의 반대되는 개념이 수직적 사고이다. 수직적 사고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기존에 오랫동안 해온 이미 검증된 방식이라서 이 방식을 취하면 위험은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어떠한 문제에 닥쳤을 때 누구나 생각할 수 있거나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은 대부분 수직적 사고의 결과이다. 좋게 보면 논리적 사고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관행에 의존한 사고방식이다.
수직적 사고만을 하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기존에 보아왔던 한 면만 보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사고나 다양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방식만을 고집하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으며 문제를 해결할 때 새로운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창의성의 시대이다. 때문에 수직적 사고보다는 수평적 사고가 더 중요하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경험자들은 제안하기도 한다. 그들의 제안내역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수평적 사고를 연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을 의도적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습관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다른 원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해 본다. 그래도 다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 최초의 생각대로 행동해도 늦지 않다. 의도적이고 거듭되는 수평적 사고는 창의성을 높여준다. 새로운 접근을 함으로써 생각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백두산은 술이랍니다
흰 술에서도 독한 술이랍니다
아침 문이 열리던 날
곰할머니께서 고아놓은 술이랍니다.
이 땅이 열 번 다시 썩었어도
이 제 또 다시 열 번 백번 썩는대도
변치 않는 술
영원히 다 먹지 못할 술이랍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이 술 한잔 먹고 태여난
내 몸에서 푸르러 있답니다.
에밀레종소리가
내 몸에서 뛰여다닌답니다
리순신 장군의 호령이
내 몸에서 향기로 흐른답니다
훈민정음 자모가
내 몸에서 터지고 있답니다
장백산 줄기줄기 마다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나는 그것들에 취하여
발가락 끝까지 빨갛게
오리오리 머리마저 파랗게
고주망태가 되여 살아가고 있답니다.
이제는 죽어가도
산야에 짙푸른 풀 한 이파리
이제 다시 태여나도
첩첩 산을 헤치고 사품치는 강물 한 줌
오오! 백두산 나의 독주여!
최룡관 시인의 시 <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 전문이다.
사상 백두산을 노래한 시는 주지하다시피 많기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성산 백두산을 ‘독한 술’로 표현한 시는 어쩌면 이 시 한수뿐이 아닐까 싶다. 혹시 이 시가 바로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습관적으로 반응했던 것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표현방법은 정말 없을까?'라고 거듭 의심해 본 결과가 아닐까”고도 생각해본다.
위에 예든 새로운 사고방식들을 우리의 시 창작에 이용해도 안 될 것 없겠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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