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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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과 하이퍼시 창작
2017년 08월 13일 10시 42분  조회:2236  추천:0  작성자: 박문희


무의식과 하이퍼시 창작

 

□박문희 

 

 

"하이퍼시 창작론 간담회 및 하이퍼시 세미나"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주최로 연길에서 열렸습니다. 최룡관선생의 <하이퍼시 창작론> 은 <이미지시 창작론>에 이은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현재 한국 <자유문학>지에서 연재중입니다.

 

최선생은 <하이퍼시 창작론>의 머리글에서“하이퍼시는 서양시문학의 최신 조류”이며 “하이퍼시를 하는것은 국제적인 시와 연변의 시를 접목하는 대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 시문학전통(중국시 문학전통은 우리 시 문학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대사”이기도 하다면서“21세기의 시문학은 무의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것이며 시문학에서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며 시문학발전을 이끌고 나갈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나는 시 쓰기를 시작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공부를 하면서 최선생의 주장에 상당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시쓰기를 하면서 <이미지시창작론>과 <하이퍼시 창작론>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최룡관선생은 <하이퍼시 창작론>에서“시는 무의식으로 쓴다. 하이퍼시는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하이퍼시의 산모이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이 주장은 피뜩 보기에 리해가 잘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이란 개념으로부터 깊이 파고들면서 시창작 실천과 결부시켜 해득을 한 결과 이 주장에 도리가 있으며 실제 창작에서도 막대한 도움을 받을수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이퍼시 창작론 간담회 및 하이퍼시 세미나"에 참가하여 나의 학습체득을 발표했는데 원래 계획했던 <천개의 고원> 학습을 잠시 뒤로 미루고 <하이퍼시 창작론>학습체득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학습속도가 매우 늦으므로 체득발표 시간간격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점에 널리 양해 바라며 기탄없는 비평(부동한 견해 포함) 을 기대합니다.

------<동인독서회> 발문

 

 

시는 무의식으로 쓴다.

하이퍼시는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하이퍼시의 산모이다.   

                                             -----최룡관의 <하이퍼시 창작론>에서

 

무의식----깊은 바닷물속의 거대빙산

 

프로이트 이전의 서구적 사고방식은 의식중심으로 특히 이성(理性)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의식에서 벗어난 모든 요소는 망상이나 광기로서 비정상적 영역에 불과했고 연구 대상이기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배제 대상이었다. 모든 인간 행위는 의식에 따른 계획적 성격을 지녀야 했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발견은 당시에, 인간이 모든 행동을 자신의 의지와 의식 하에 한다는 기존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려, 철학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버렸다. 특히 우리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대개의 모든 상념과 기억들은 저 깊은 바닷물 속의 빙산처럼 무의식 속에 깊이깊이 내장되어 있으며 그러나 '무의식'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임상사례를 통해 증명되었을 때 그것이 서방철학계와 기타 모든 학술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과시 원자탄 폭발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무의식이 의식과 갈등하면서 사고와 행위를 규정한다는 문제의식은 인간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는바 철학을 비롯하여 학문 활동 전 영역에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고 또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표현 욕구와 표현 방법을 자극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여기서 각별히 특기할 것은 무의식이 의식의 자아와는 다른, 자율성과 창조적 조정능력을 가진 완전한“객체정신”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 학설의 제창은 수년간 프로이드와 함께 연구 활동을 하다가 프로이드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칼 융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융의 분석심리학의 가장 큰 특징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칼 융은 경험론자로서 다 같이 살아 있는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내용과 작용에 대하여 상당히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무의식이란 융에 의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의 정신의 모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그것이 무의식이다.

 

융의 정신분석학에“무의식의 발견”이란 개념이 있는데, 뜻인즉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즉 발견)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무의식의 두 가지 층----“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

 

융은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층이 있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개인 생활에서의 체험 내용 가운데서 무슨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 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억압된 여러 가지 내용으로서 반드시 성적(性的)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 밖의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눌러버린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그 자극의 강도가 미약한 문턱 및 지각의 내용 등의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이 태어난 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들을 융은“개인적 무의식”이라 하였다.

  

융은 더 나아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원초적인 무의식이 심층에 깔려있다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융은“집단적 무의식”이라 했다.

 

의식의 뿌리, 정신생활의 원천, 창조의 샘

 

이 “두 가지 층의 무의식”에 언급하면서 융은, 무의식은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녔으며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는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무의식은 충동의 창고, 의식에서 쓸어낸 쓰레기장이거나 병적인 유아기 욕구로 가득 찬 웅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성숙케 하는 창조의 샘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학설을 말하는 마당에 주로 칼 융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은 그의 주장에하이퍼시의 창작에 직접 관련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무의식이 개발되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임을 알았다. 그러한 무의식을 하이퍼시창작의 대상으로 하면, 우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理性), 도덕 등에 억눌린 욕망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겠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맹목낙관을 가로막는 언덕

 

하지만 이점을 앎으로 해서 오는 맹목낙관은 절대 취할 바가 못 된다. 일단 창작과 연계시키면 수많은 실제 문제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무의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말하자면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이라는 언덕이 금방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창작에 이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앞에는 개발되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인 무의식을 창조에 도입하자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나서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1. 시창작의 원천으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인식작업

 

우선 무의식은 창조의 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강대한 무의식의 지배 앞에서 시인은 피동에 처하게 되어 그것을 활용할 수가 없게 될 터이니.

 

무의식은 개인생활의 경험자료 뿐 아니라 인류의 태곳적부터 끝없이 반복되어 경험되는 일정한 인간적 체험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은 수많은 신화적 상징으로 표현되고 경험된다. 이 모든 것은 무진장한 창조의 원천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인지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인지하는 그 순간, 무의식은 바로 의식으로 전환되는 길 어구에 서게 된다. 이때 깨어난 무의식은 원동력으로 되어 모든 의식된 마음에 활력을 주고 그 기능을 조절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통일을 완성하는 작업에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지어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여전히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뿐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2. 무의식 세계의 발굴 작업

 

바로 상기의 문제가 제기되는 까닭에 무의식이 의식으로 전환되는 길 어구에 서게 되었을 때, 시인은 반드시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발굴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소에 무심코 나타나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번뜩이는 계시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꾸준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발굴시의 무의식은 몽롱한 상태일 수가 있다. 이를 테면 영감(靈感) 같은 것이다.

 

● 영감과 주의력

 

[영감] 

영감(靈感)이란?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번득이는 착상이나 자극이며, 무의식중에 갑자기 일어난 신묘한 능력이다.

 

▲영감은 초의식(超意識) 또는 무의식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감이 자의식(自我意識)의 반대라는 것이다. -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영감은 완강한 노동으로 얻어진 포상이다.--바딤 레핀

▲영감은 게으름뱅이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손님이다.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 

▲영감은 무의식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영감의 기회는 적어진다.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항상 의식하고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 모기 켄이치로

 

고로 영감은 의식적인 노력을 행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으로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수련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소리”를 계시 받게 되는 것이다.

 

[주의력] 

위에서 언급된 의식적인 노력이 바로 주의력이다.

 

하이퍼시의 창작은 실제로 봐서 영감과 주의력을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는 것, 이 두 가지가 혼연일체로 이루어져야 훌륭한 시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날마다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에 대한 이러한 평범하고 세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모든 것에 미치는 '창조적 발견'을 할 수 있는 마음눈(心眼)과 신비한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3.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적 창작의 세계로 비약시키는 작업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시종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지어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며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의 무한정한 확장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의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이 각기 독립성을 가지며 그런 이미지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어 하이퍼시의 전체적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 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는 것이다. 시인이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지만, 가상현실은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상상력,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운동

 

“'영감'과 '주의력'이 협동하는 창조적 무의식”을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은 심상(心象)을 의식 위에 비추는 작용, 다시 말하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기능”이다. 눈앞에 없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드는 정신 능력, 즉 상상력은 하이퍼시를 창조하는 근원적 능력이다. 여기서 수동적 상상력이 능동적 상상력에 포섭되고 언어를 빌어 소생할 때 영감과 주의력은 일체를 이루고 상상력이 실현되어 우리는 비로소 한수의 하이퍼시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 바의 합리적인 사고체계와 자아의식 범람의 거세

​ 

이성(理性)과 자아의식의 범람을 막아야 시 창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머릿속에서 자아의식이 지나치게 살판 치면 그를 지배하는 뇌리 속에는 합리적인 사고체계 이외의 다른 어떤 특권도 들어앉을 수가 없게 된다. 이 경우 그가 관심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이 시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혹은 없는 것인가?

--이 시는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

--이 시에 반영된 현상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이 시는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무슨 깊이라는 것이 없다.

 

“죽은 개가 짖어댔다.”

 

이른바 의식(意識), 이성(理性)의 눈빛으로 보면, 이런 묘사는 어처구니없는 병문(病文)일 것이다. 그 눈빛에 죽은 개는 죽은 개일 뿐일 것이다. 그런 고로 어떤 의식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이 갖는 자체내의 의미를 통해서 의식의 권한을 몰수해야만 하이퍼시 창작의 길은 비로소 트이게 되는 것이다. ♣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문고(5)
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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