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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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2015년 12월 31일 00시 13분  조회:5513  추천:2  작성자: 박문희
 

길림신문 초창기의 추억


 

1. 감구지회

 

1983년 봄부터 《길림신문》 창간에 대한 보고얘기가 나오더니 이듬해 8월에는 길림성위에서 정식 비준했다는 말이 나왔다. 당시 나는 《연변일보》 총편집판공실 편집으로 있었는데 그때 주임은 남인순, 부주임은 윤효식이였다. 그러다가 또 몇달이 지나 그해도 막가는 12월의 어느날 윤효식부주임이 《길림신문》 창간주비소조 조장의 신분으로 2층짜리 옛 신문사 자리의 한 자그마한 사무실에 김경욱, 림웅길, 김영오 등 예닐곱 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전반 길림성 조선족을 대상한 《길림신문》 이 나오게 됐는데 이미 길림성위에서 비준이 내렸고 주비사업을 우리가 해야 하며 시간이 긴급하니 서둘러야 한다고 력설했다. 비준된 시간은 1984년 8월 7일인데 몇달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야 시급하게 움직이게 된것은 길림성 관련 부서와 운영자금 등 구체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였기때문이라고 했다. 실지로 신문허가증도 이듬해(1985년) 1월 15일에 받아 그날로부터 불과 보름만인 2월 1일에 첫 시험호를 냈고 그뒤로 보름에 한호씩 시험호를 도합 4호 출간했다. 《길림신문》 창간호는 1985년 4월 1일, 드디여 발간됐다.

 

그때 연변울타리를 벗어난 신문의 창간에 직접 참가한다니 자랑과 긍지를 느꼈었고 그게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을 넘겼다. 감구지회에 젖어 자칫 잊혀질 옛 기억을 되살려본다.

 

2.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일 자체가 대단한 거요.”

 



《길림신문》 의 창간작업은 처음부터 《연변일보》 의 오태호총편집이 맡아 추진했다. 길림성위에서 연변주위에 위탁한 일을 연변주위에서 다시 《연변일보》 에 책임지웠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시초에 리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산재지구를 대상한 신문인데 왜 연변에서 출판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길림신문》 창간시 발행과업을 수행했던 《연변일보》 의 김주철선배님(길동군정대학 출신으로 《동북조선인민보》 창간이나 조선문 《참고소식》 창간에 두루 참가했던분임)은 길림에서 발행회의를 열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 시말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선배는 발행회의에서 반영된 그런 의견을 못들은척 묵과해 넘길수 없었던지라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부주임이자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던 옛 상급인 최채(최채가《연변일보》 초대사장을 지낼 때 김주철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공청단 선전위원이였음)를 곧바로 찾아가 반영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최채주임이 하는 말씀이 “ 《길림신문》 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현재 산재지구에서 직접 꾸리기는 여건상 시기상조이니 우선 신문을 잘만 꾸려라. 그러면 신문사는 아무때건 장춘에 들어오게 돼있다.”고 하시더라는것이다.

 

실지로 《길림신문》 은 전 성 120여만 조선족군중, 특히 산재지구 40여만명 조선족군중의 강렬한 요구와 당시 길림성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최채, 길림성위 부서기 겸 길림성군구 정위 조남기, 길림성정부 고문 최림 등의 강력한 유세하에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여 중공길림성위에서 마침내 비준하였던것이다. 길림성위에서 우선 연변에 이 일을 맡기게 된것은 당시 관리나 경제 등에서의 막부득이한 사정이였다. 사실 최채주임의 말은 조금도 그른데가 없었다. 신문이 생기고보면 명색이 《길림신문》 인 이상 성소재지에 들어가게 되는건 시간상 문제라는것이다.

 

어쨌거나 중공연변주위에서 과업을 《연변일보》 에 일임한후 당시 《연변일보》 총책임자이자 중국조선문신문의 권위자인 오태호총편집이 모든 일을 맡아 추진했는데 이는 어느모로 보나 당연한 일이였다. 더군다나 《길림신문》 의 창간은 1979년에 길림성 6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됐던 오태호선생이 대표임직기간 장춘조선족중학교의 최일교장 등 동기(同届) 조선족대표들과 함께 거의 매년 련명으로 《길림신문》 창간을 제안한 노력의 결실이기도 한바 오태호총편집은 깊은 감정과 드높은 열성으로 이 작업을 추진해왔던것이다.

 

3. 신문풍격의 민족성 주창자 오태호총편집님

 

돌이켜보면 시험호를 구상할 때부터 오총편집은 이 신문에 민족적독창성을 부여하고저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것이다.

 

《길림신문》 창간을 전후해서 개추렴이요 하는 명목의 모임이 여러번 있었다. 그런 모임에는 꼭 이야기판이 벌어지군 했으니 화자는 항상 오총편집이였고 우리는 모두 그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김삿갓, 론개, 서산대사 등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으면서 우리가 탄복했던것은 그의 이야기재주와 비상한 기억력이였다. 례컨대 김삿갓이야기를 한다 하면 김삿갓의 풍자시가 빠질수 없었는데 “일출원생원(日出猿生原) 묘과서진사(猫过鼠尽死) 황혼문첨지(黃昏蚊簷至) 야출조석사(夜出蚤席射)” 등 풍자한시 여러수를 거침없이 외우면서 풀이해나가는 재주에 우리는 이야기에 끌려들어가는 한편 탄복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고 게다가 웃지도 않고 “서당내조지(书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생도제미십(生徒诸未十) 선생래불알(先生來不谒)”을 외우는 대목에 들어가서는 우리는 배를 끌어안고 웃어제꼈다.

 

 

오총편집은 좌중을 웃겨 환심이나 사자고 이런 이야기를 한것이 결코 아니였다. 그 리면에는 《길림신문》 의 짙은 민족성구현을 위한 구상의 한 부분으로 신문을 산재지구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게 꾸리자는 깊은 속셈이 깔려있었던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중 일부는 바로 우리 신문의 련재물로 실려나가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산재지구 독자들이 애독하는 우리 신문의 갈피갈피에는 분명 오총편집님의 고심과 땀이 녹아들어있는것이다.

 

산재지구에 취재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한 부탁에서도 그의 당시 생각이 더듬어진다. 통화지구로 가게 된 나에게 오총편집은 통화지구에서 이 몇년 사이에 고구려문물이 꽤 출토되였다던데 이번 기회에 알아보라고 했다. 통화현에 취재를 간 나는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김춘삼을 만나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근년에 들어 특히 올해 이 지역에서 고구려무덤이 여러기 발굴되였다면서 현문화관의 한 관원을 소개해주는것이였다. 당시 지식이 짧아 취재를 깊이 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정황은 파악하였고 옛무덤과 발굴된 문물의 사진도 몇장 얻어왔다. 연길로 돌아와서 원고를 바친 그날 오총편집은 나를 이층 사무실로 불러 고적발굴 상황을 묻고 원고와 사진 배치를 직접 하면서 이렇게 배치하는게 어떤가고 했다. 나는 너무 고맙고 황송해서 취재를 잘하지 못했다고, 후에 기회를 봐서 보충하겠다고 결심발표를 했다. 그후 수차에 걸쳐 리원철, 허철룡 등과도 취재차로 통화현에 간적이 있으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적당한 취재기회를 내내 찾지 못하고있다가 사학계에서 분규가 생기는 통에 종당에는 원래의 계획을 접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많은 사연을 통해 민족의 뿌리와 전통에 대한 오총편집님의 진정을 통감함과 아울러 우리 신문에 짙은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는 깊은 속심도 읽을수 있었다. 《길림신문》 으로 볼 때 짙은 민족성을 주창한 첫 사람으로 우리는 오태호총편집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말은 오태호총편집이 당보의 당성원칙을 불문에 부쳤다는 얘기가 아니다. 민족특성의 구현이 잘되지 않던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한 첫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4. 창간대회의 취재이야기

 



《길림신문》의 창간대회는 1985년 3월 30일, 당시 연변주위 소속인 문화극장에서 열렸다. 이날의 창간소식보도조에는 문상호주임, 촬영부 전창식과 내가 배정이 됐는데 보도조의 조장은 내가 상당히 흠모하던 문상호선생이였다.

 

내가 농촌부에 있을 때 한번은 우리 부의 부주임이였던 문상호선생을 따라 삼합관개수로공정성과 보도취재를 내려간적이 있었다. 오전 내내 취재를 하고 오후에 보도기사를 쓰는데 쓰는 방식이 놀라왔다. 문주임은 팔짱을 끼고 방가운데에 앉아서 자기가 기사를 부를테니 나더러 받아쓰라는것이였다. 그는 취재수첩을 들고 가끔 들여다보면서 내가 받아적을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불렀는데 중간에 쉼이 없었다. 원고 받아쓰기를 끝내고보니 자그만치 4000자도 넘는 장편통신이였다. 용어나 철자가 틀리는데 있으면 고치면서 한번 정서해서 래일 직접 홍춘식주임에게 갖다바치라는것이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장편기사가 어떻게 기성된 문장을 읽듯 한번 불러서 완성되는지를 물었더니 취재준비를 할 때부터 전반 취재과정에 시종 기사를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목적성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되는 문제의 답이 완성되면 취재도 끝나는 셈이라는것이다. 그만큼 취재의 목적성이 뚜렷하게 벼려져야 하며 맹목성은 삼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후 문선생의 취재방법론을 조금씩 터득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취재를 끝내는 때이자 기사가 완성되는 시간”이란 경지에는 시종 이르지 못했다. 아니, 여러번 고쳐쓰며 발표한 기사도 항상 유감을 남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삼합에서의 그 체험을 《길림신문》창간대회기사를 쓰면서 다시한번 겪게 될줄은 몰랐다. 그날도 그렇게 원고를 베껴서 그대로 오태호총편집에게 바쳤고 오총편집은 원고를 고치고나서 (아마 오총편집 자신의 연설 한토막을 잘라냈던것 같다) 리덕수서기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해서 리서기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연변주당위는 신문사 바로 서쪽의 농업은행자리에 있었고 리덕수서기는 2층에서 사무를 보고있었다. 나는 문상호스승외에도 복잡한 일도 재치 있게 개괄해내는 뛰여난 함축력의 소유자 박경섭선생, 취재대상이 누구든 취재중 주요단서만 쥐면 대방이 진땀을 뺄 정도로 깡치를 내려 드는 남민옥녀사 등 스승 여러분이 있어서 행복했다.

 

5. 《길림신문》의 “인쇄공장”

 

신문이 창간된후 새 사원을 매일같이 받아들이는 형편에서 우리는 연변군분구 초대소로 이사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사옥자리에 있었던 원《연변일보》사옥은 사무실과 복도 바닥에 널판자를 깐 제정때의 2층짜리 낡은 건물로서 그러찮아도 비좁던터라 도무지 새로 나온 우리 신문사를 용납할 상황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비여있던 2층짜리 연변군분구 초대소(지금의 백산호텔 자리)의 웃층을 빌려들었는데 싸리나무 등 땔나무를 사다 난로불을 피워 겨울을 났다. 초대소 옥상은 평평한 세멘트바닥으로 되였는데 쉼터나 소풍장소로 딱 안성맞춤이였다. 편집을 하다 손이 저리면 줄레줄레 올라가서 담배도 피우고 해빛쪼임도 했으며 어느해 봄에는 가무단의 어느 무용선생을 모셔다 한 보름가량 사교무도 배웠다.

 

 

지금은 상상도 잘 안 가는 일이지만 신생한 《길림신문》은 가족의 직업문제도 해결할겸 길림성에서 주는 제한된 돈을 좀더 유용하게 쓸 료량으로 인쇄공장도 자체로 꾸렸다. 신문사 마당 동쪽켠에 줄 지어선 막사나 다름없던 좁고도 낮은 가건물의 한칸을 차지하고서는 “우리 인쇄창(공장)”이라고 불렀는데 말이 인쇄공장이지 기실은 2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조판실이였다. 그처럼 작은 칸을 또 문선실과 식자실로 나누었다. 문선공이 원고를 보면서 활자케이스에서 활자를 뽑아 손바닥만한 문선상자에 순서대로 배렬해 담은 뒤 그것을 식자공에게 넘기면 식자공은 원고배치도에 따라 판을 짜 맞추군 했다. 이렇게 조판의 교정까지 끝마치면 우리측의 일은 다 끝나는 셈이였다.

 

《연변일보》인쇄공장측에서 그 완성된 식자판을 넘겨받아 지형 뜨고 연물을 부어 연판을 뽑고 그것을 륜전기에 걸어 신문을 찍어냈다. 그다음 절차는 당연히 발행이였다. 창간된 첫해 우리 《길림신문》은 발행도 자체로 했는데 발행원들이 여간 수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 신문사의 김영오, 김규범 등 선배님들외에도 김경욱, 김주철, 김수국 등 림시로 우리 신문에 배치된《연변일보》의 선배님들이 새벽에 나와서 신문을 지역별로 나누어 묶어서는 전문 기차역에 내다 부쳤는데 기차역과의 관계처리 등 일들이 겹치여 그 사업량이 만만치 않았다. 드높은 책임감으로 열심히 《길림신문》발행을 위해 땀을 흘리던 그분들을 생각하면 고마웠던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아무튼 자체로 활자조판을 하던 일은 1989년 7월 중순까지 몇년간 지속되다가 문선식자실은 인쇄공장에 돌려주고 인원들도 모두《연변일보》복무공사에 넘김으로써 인쇄업무는 전부 《연변일보》공장에 위탁하게 되였다. 어찌 보면 《길림신문》은 초창기에 중국의 모든 구식신문이 걸어왔던 길을 모조리 경험해본 격이였다.

 

6. 《길림신문》의 “문풍백성티” 와 윤효식선생님

 

화룡현 서성 태생인 윤효식선생은 1951년에 사업수요로 연변일보사에 배치받은 뒤 근 40년간 조선족 번역계와 신문편집계에서 굴지의 성과를 쌓아올린분이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취재와 집필에 참여할수 있게 된것은 개혁개방을 맞아서부터였다. 그것은 윤효식선생이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인해 “통제사용인물”로 지목받고 탐구열에 들끓던 열혈청년시절, 그처럼 쓰고싶었던 자기의 글도 쓰지 못하고 근 10년간 시사번역만 해오다가 1963년에 비록 지방원고편집을 하게 되였지만 원고를 편집만 할수 있었을뿐 직접 취재해서 글을 쓸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선생은 조금도 의기소침하거나 일에서 탕개를 늦춘적이 없이 자기에게 부과된 과업에 시종 충직하고 편집에 진력하는 한편 체계적인 자습으로 실제상 언어의 대가로 되여 후일의 집필사업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는 그를 조직에서는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조직의 의도된 지지밑에 그는 《붉은 해》, 《찬란한 길》, 《룡담의 물결》등 여러부의 장편소설, “변형기”, “가정문제”, “1918년의 레닌”,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등 소설, 산문, 씨나리오와 같은 다양한 체재의 국내외 단편명작 수백편, 그외 대량의 시사번역작품까지 무려 1000여만자에 달하는 번역작업을 수행하여 번역계의 선두주자로 활약해왔던것이다.

 

이러한분이였으니 개혁개방을 맞으며 선생의 보도열정은 분수처럼 터져나오지 않을수가 없었다. 더구나 때를 맞추어 태여난 《길림신문》은 그로 놓고 말하면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아 새롭게 꽃피우는 활무대에 다름아닌것이였다.

 

 

《길림신문》을 초창기부터 맡아 책임지고 꾸려오면서 윤효식선생이 시도한것은 독자가 읽어주는 신문을 만들자는것이였다. 이를 위해 주창한 구호는 “우리 신문을 백성티가 물씬 풍기게!”였다. 조선족의 주류문화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있었던 산재지구 조선족독자들에게 이것으로 가깝게 다가가자는것이였다.

 

우선 개혁한것이 회의소식이였다. “회의취재를 가면 회의재료만 베끼지 말고 눈에 쌍불을 켜고 새로운 정보를 파내라.” 이것이 그의 당부였다. 한 회의에서 유용한 정보를 한가지씩만 추려내서 발굴해도 값이 있는 성과라고 기자들 귀에 못이 박히게 강조했다. 그렇게 깊이 파서 쓴 소식은 신문 가치가 있는 톱소식이 되군 했다. 결국신생한 우리 《길림신문》 에서는 당팔고식 장편회의소식과 지방지도자들의 연설로 판면을 도배하던 일이 기본상 사라지고 필요한 회의보도는 짧게 알맹이만 다루었다. 지어 제목뉴스란것을 만들어 제목한줄로 회의소식을 전하는 때도 있었다. 당시 그것은 실로 파격적인것이였고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신문은 내용과 형식의 결합체인바 좋은 내용이라 해도 좋은 형식의 맛갈진 표달방식이 없다면 효과를 최대한 낼수 없다면서 보도내용들은 되도록 조선족의 생활을 조선족의 마음에 드는 형식에 담아 보도하였다. “농가보감”, “흥부박”, “노다지곬”, “우리 마을”, “인생의 꽃철”, “주부생활”, “이 얘기 저 얘기”, “아리아리랑”, “60청춘닐리리”, “장백의 메아리”, “장생불로 원하시면”, “오는 말 가는 말”, “반디불”, “진담록”, “회초리”, “꽃망울”, “산들산들 보슬보슬” 등 다양한 코너를 개발했는데 이런 코너들은 모두 짙은 민족적정서를 담고있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창간 5주년을 맞아 그간의 코너를 통계낸적이 있는데 각종 전문란과 부간이 50여가지나 되었다.

 

 

사설, 론평원의 문장이나 단평 등 신문평론은 불가결의 신문쟝르이다. 이런 쟝르의 글이 농민, 시민과 기층간부 등 《길림신문》의 독자층에 잘 읽힐수 있게 하고저 윤효식선생은 역시 개혁을 시도했다. “오늘의 화제”가 그 실험의 하나였다. 가급적으로 알기 쉽고 생동한 언어로 당의 주장과 지침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군 했는데 심지어 시의 형식과 언어로 언론을 쓸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독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그의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창간때부터 민족성, 지방성 특성을 선명하게 살린 풍부한 내용과 생동활발한 문풍을 바탕으로 하나의 독특한 신문 문풍을 형성하였고 와중에 편집기자대오를 키워내여 특유의 《길림신문》풍격과《길림신문》정신을 창조해냈다. 그 정신과 풍격의 영향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길림신문》초창기에 신문의 백성티를 주창한 윤효식선생의 동기와 실험정신을 높이 사야 할것이며 그를 《길림신문》풍격개혁의 개척자, 나아가 《길림신문》풍격의 정초자라고 평가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것이다.

 

7. 《길림신문》 의 일터책임제

 

초창기에 편집기자들에게 고무와 편달이 되는것은 평보(评报)였다. 복도에 평보란을 만들어 걸어놓고 책임평보원이 평보를 하군 했는데 모든 편집기자가 자유로 평보를 할수 있고 반론도 허용되여 평보활동이 꽤 활약적이였다. 그러나 그러는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년말장려에 우수원고 몇건씩 표창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것을 일상화하지는 못하고있었다.

 

당시 전국보도계에서 솔선적으로 대담하게 신문개혁을 하여 소문을 크게 놓은 신문이 있었다. 호북성 효감지구의 《효감보(孝感报)》였다.

 

 

1989년 3월 중순경 나와 림웅길은 윤효식선생과 함께 무한으로 《효감보》고찰을 떠났다. 주로 《효감보》에서 일터책임제를 제정,실시한 내부관리경험을 배웠는데 그들의 생신한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계발을 주었다. 내친 걸음에 우리는 무한의 《장강일보》와 기자협회도 순방했다. 그들도 《효감보》의 관리방법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많이 듣고 감정교류를 했으며 가끔 책임제의 일부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순방을 끝내고 돌아온후 윤효식은 나더러 “길림신문사 취재편집, 행정인원 일터책임제” 초안을 짜보라고 했다. 《효감보》의 책임제도는 매우 세밀하게 제정됐으나 우리는 자체의 실제에 비추어 되도록 중점을 살리고 실제 락착에 편리토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렇게 기본임무, 상벌규정 등을 내용으로 책임제를 성문화한 다음 의견청취를 하고 몇번 수정을 거쳐 그해 6월부터 2개월간 시험실시하고 8월부터 정식 실시에 들어갔다. 그때를 시점으로 다달이 원고료를 지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시초에는 년간 원고료 합계가 2~3만원 좌우 되던것이 그후 매 2~3년에 책임제를 원래의 토대우에서 점차 조정을 하고 한번씩 수정하면서 원고료가 갈수록 늘어나 신문사본부가 장춘에 들어온 뒤에는 년간 7~8만원 선에서 여러해 지급되였던것 같다.

 

이 조치는 전체 임직원, 특히 편집기자들의 사업열성 향상에 유조했다. 질을 따져 우수한 원고에 대한 원고료를 후하게 책정했으므로 보도질을 높일수 있었다.

 

(《길림신문사 사람들》연변출판사 20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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