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많은 일요일이지만 정말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들과 함께 보낸 일요일은 손꼽을 수 있다. 내가 틈이 있어 집에 있으면 아들애가 또 친구나 친척집에 놀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들애와 약속하고 뜻있는 일요일을 보내기로 하였다. 물론 오늘 활동의 선택권은 아들애에게 있었다. 아들애는 연을 띄우자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을 사가지고 부르하통하강변에 나갔다.
연은 풍연 또는 지연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어로는 풍쟁(風箏)이라고 한다. 연은 연, 연줄, 얼레로 구성되였는데 우리가 어릴때에는 대가지를 가로 세로 또는 모로 엇맞추어 고정해 놓고 그 위에 문풍지종이를 붙이고 실로 꿰메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풀라스틱으로 색상도 아주 곱게 맞추어 파는데 일잡상점에 가면 쉽게 살수 있다. 우리는 여러종류의 연중에서 나비연을 선택하였다.
때는 봄이라 바람이 잦고 건조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연을 띄우기에 분주하였다. 나는 어느새 아들애를 따라 완전히 동년으로 돌아갔다. 연을 띄우는데는 재주가 필요했다. 그저 올리뿌려서는 연이 잘 뜨지 않는다. 우리는 연을 띄운 경험이 별로 없었으므로 아들애가 얼레와 연줄을 쥐고 앞에서 뛰면 나는 연을 쥐고 따라가다가 연이 솟구치는 힘이 생길때 연을 놓는다. 그러면 연은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때면 바람으로 생기는 부력으로 손에 쥔 실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다.
어떤때는 연이 불시에 떨어 질때도 있다. 무턱대고 달리기만 해서 되는것도 아니고 수요에 따라 당기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여야 한다. 마침내 우리는 연을 높은 하늘에 뛰워보냈다. 맑은 하늘에도 우리의 나비연이 하늘에 또 하나의 풍경을 그려가며 날아옌다. 나의 시선도 연을 따라 움직이다가 결국에는 마음까지도 연을 따라 하늘에서 둥둥 떠다녔다.
사람의 마음은 어찌보면 저 연과 같다. 연이 얼레를 못떠나는것처럼 얼레도 연을 못떠난다. 사람의 마음도 사람의 육체를 떠나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이 육체를 떠나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육체도 마음을 떠나지 못한다. 마음이 떠난 육체는 식물인이다. 이점에서 보면 사람과 마음, 그리고 연과 얼레 사이에 떨어지지 못할 의뢰성이 있는 것이다. 몸은 저 얼레와도 같이 마음이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끔 꼭 잡고 있고 사람의 마음은 또 연처럼 육체를 중심으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칠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영혼이 없다고들 한다. 영혼과 마음의 구별은 그것이 육체를 떠나 존재할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데서 구별이 된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이러한 가설은 모두 허망한것으로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마음이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완전히 죽는것이 아니라 일부는 살아있다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유전자다. 사람은 자기가 죽기 썩 이전에 혹시나 자기가 죽을것을 대비해 후대를 배양한다. 즉 자기의 유전자를 배양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사람이 완전히 죽는다는데에 대하여 수긍할수 없다. 또 현실적으로 이는 성립이 될수 없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음과 영혼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뿐만아니라 많은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마음이 연과 같은 또 다른 이유는 둥둥 떠다니며 자유스럽다는데 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로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하나로 즉 일심으로 집중하는것을 수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떠돌아 다니는 마음이 만약 자리를 잡지 못하면 이때는 아주 위험하다. 이때에 사람들은 마음을 걷잡지 못하는데 우리는 고독이라고도 한다. 남자와 여자는 마음을 걷잡기 위해 결혼을 하고 맹세도 한다. 나그네의 마음이 계속 돌아치는것은 집에 마음을 잡아둘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때는 고독을 달래기 위해 껨에 정신을 팔리거나 도박에 정신에 팔리거나 연구에 정신이 팔리거나 수행에 정신이 팔리거나 한다. 이를 나는 연이 얼레를 찾는 과정이라고 본다.
연이 없는 얼레는 그러면 무엇이냐? 그것은 돌멩이와 바위와도 같다. 그는 그저 얼레일 뿐이지 아니 연이 없는 얼레는 얼레라는 이름조차도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연이 없는 얼레라고 부를수도 없다.
아들애는 연을 띄우면서 계속 신나게 놀고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애의 환락에 찬 모습이다. 참으로 부모의 마음이란 미묘하다. 아들애가 즐거워하면 어쩔수 없이 즐거워지는 것을! 자식을 키워본 이는 모두 경험해보았겠지만 정말로 온 가족의 희로애락은 자식한테 달려있다. 자식이 행복하면 부모도 행복하고 자식이 불행하면 부모도 불행하고, 자식이 즐거우면 부모도 즐겁고 자식이 슬프면 부모도 슬퍼한다. 자식, 자식이 뭐길래? 아무리 째지게 곤난한 집일지라도 자식만 있으면 희망이 있고 웃음이 있다. 우리말에 “소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다. 농군에게 소는 생명처럼 귀중하다지만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그런 생명같이 귀중한 소도 팔아서 희생시킬수 있다. 나는 자식만 필요 된다면 자신의 그 귀중한 생명도 바칠수 있는 부모가 적지 않다고 장담한다. 그렇다면 조상과 후손의 사이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것인가?
나는 연을 띄우고 있는 아들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연과 얼레가 바로 조상과 자손의 관계가 아닌가고 생각하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다. 무슨 영혼이고 조상이고 있겠는가” 하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상님은 생전에 자신의 영혼이 담겨진 유전자를 자식의 몸에 심어줌으로써 무한의 생명을 꾀한다. 이런 관계로 조상님은 분명 수많은 자손들의 몸속에 살아 계신다. 그것도 물질적으로 즉 유전자의 방식으로 살아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상과 후손은 유전자를 이 연줄에 의하여 연과 얼레처럼 긴밀히 얽혀져 있다고 본다. 결국 조상님은 바로 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레를 잊지 못하여 얼레의 주위에 둥둥 떠돌며 맴돌아치고 있는것이다.
나는 문득 저세상에 가신 아버님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일본놈의 감옥에 끌려갔다가 모진 고문에 불치의 고질병을 얻고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끝내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15세의 어린나이에 호주가 되여 모친과 동생들을 거느리고 용케도 8.15광복과 새중국의 창건을 맞고 토지혁명, 합작사, 대약진, 문화대혁명도 용케버텨내시고 그 바쁜 살림에도 일곱자식이나 키워내시고 나의 대학공부까지도 마감시키신 아버님이시다. 지금의 말로 하면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이전에는 제 혼자 몸 거두기도 바쁜 세월에 열식솔을 거느리고 억세게 살아오신 그 이유가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면 아버지가 그렇게 살아오신 이유가 이해될뿐만 아니라 아버지야 말로 진짜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님들의 대를 있는 임무를 원만히 완수 하셨을 뿐만아니라 그 뿌리를 일곱갈래로 확대하여 뿌리와 가지가 더욱 건실하고 무성하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훌륭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아들 하나밖에 두지 못한 자기가 아버님께 부끄러워 보였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란 일종의 사명일뿐 목적은 아니라고 본다. 전반 삶의 여정과 목적에서 보면 인생은 하나의 절차 혹은 과정으로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애정에 빠져 사는 사람, 재부에 빠져 사는 사람, 권세에 빠져 사는 사람, 허영에 빠져 사는 사람은 진정한 인생을 즐길수가 없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최고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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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호호
날자:2005-06-06 02:58:20
인간이 생태계에서 왕으로 군림하는것이 인간의 유전자의 우월성이 아니라고 말할수 없지요. 결국 인생이든 어떠한 생물이든 모두 유전자의 진화 스피드싸움입니다. 제일 빨리 달리는 종이 우승을 하겠지요. 물론 인간사회도 마찬가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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