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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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송몽규 탄생 100돐 기념답사에 나선 이들
2017년 12월 30일 21시 25분  조회:3060  추천:2  작성자: 상공

 사진 촬영 리광평 등 (이하 모두)
 
위챗동아리ㅡ력사동네 민속동네에서는 지난 8월 3일 화룡경내 항일유적지 제1차 현지답사에 이어 12월 15일, 제2차 현지답사로 윤동주, 송몽규 탄생 100돐 맞이 윤동주, 송몽규 발자취 기념답사에 나섰다. 이날의 기념답사는 연변대학과 여러 매체 등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력사애호가 근 20명 참가속에 력사동네 민속동네 부회장인 연변인민방송국 문체부 남철주임이 까근히 짜고들었다.
 
이날 현지답사의 첫걸음은 달라자학교로 잡았다. 달라자학교는 이미 새 교사를 짓고 나갔고 원 달라자학교 자리는 텅비어 밭으로 되여있었다. 학교의 앞마당으로 추정되는 곳에 늙은 나무와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돌로 되여있는 울바자안에 있어서 그 위치를 찾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었다. 룡정 3.13기념회 리광평회장의 안내로 우리는 아직 나로서는 모르는 진실을 알게 되였다.
 
 

1931년 3월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서 남으로 10리 떨어진 그 시절 화룡현 현립1교로 불리운 달라자학교 6학년에 편입되여 1년간 다니였다. 이 학교는 조선사람과 중국인들로 구성된 혼합학교였는데 윤동주는 이 학교에서 중국말을 배웠다고 한다. 또 이 학교에서 1년을 다닌 윤동주는 은진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된다.
 
두번째로 찾은 곳은 윤동주, 송몽규가 1925년 4월에 입학한  명동학교이다. 마을의 관리자를 찾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바로 기와이다. 교장실벽에 걸려 있는 사진에는 기와가 들어있었다.
 
윤동주의 외할아버지인 김약연선생은 참으로 대단한 원견을 갖고 있었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약연은 청정부에 국적을 신청해서 허가 받았다. 이때 청나라국적 신청을 받은 사람은 김약연을 포함한 그 일대의 5대가족이 망라된다. 이 다섯가족은 그 지역의 땅을 대량 구입하여 어지러운 세상과 다른 새로운 리상향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들은 기와공장을 만들어 자체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팔기도 하고 또 뽕나무를 대량 재배하여 비단을 짜서 사용하기도 하였었다. 그때 자체로 생산한 비단옷이 지금도 남아있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졌고 기회가 없어 보지는 못했지만 깊은 흥취를 자아냈다.
 
김약연은 학교를 만들어 교육을 통해 "신민"을 만들려 작심했는데, 기와에 그 글이 적혀있었다. 참으로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신민은 "대학"에서 나오는 구절로 사람을 새롭게  개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패한 정부로 인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대한민국정부에 대한 실망과 새로 나라를 개척하여 명동 즉 동쪽을 밝힐 인간을 만들어내겠다는 웅심이 함께 보여진다.
 
필자도 후사모를 꾸려서 새로운 교육을 통해 신민을 만들어 내려 작심하고 장학기금을 설치해 장학생을 배양해 냈지만, 내가 키워낸 장학생은 내가 바라는바와 너무 거리가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약연선생은 얼마나 원견이 있고 학식이 있고 조치가 완벽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세번째로 찾은 곳은 윤동주생가이다. 윤동주생가는 수차 찾은 곳인데다가 모두에게 익숙한 곳이여서 더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한다.
 
일행은 달라자학교와 명동학교, 윤동주생가 현지답사에 이어 룡정 동산의 옛 중앙교회묘지의 윤동주묘소와 송몽규묘소로 향했다. 송몽규묘소에 대한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 송몽규묘소는 원래 장재촌 동쪽 언덕가에 있었는데 1990년도에 이장되여 현위치로 오게 된다. 이장할 때 무덤을 파헤치니 뼈가루를 묻은 골회함과 자루가 나왔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다. 송몽규의 아버지가 일본행에서 뼈가루를 갖고간 그릇에 다 담았는데 량이 많아서 다 담을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쑤의 땅에 자식의 뼈 한점이라도 남겨둘수는 없다고 하면서 자루를 찾아서 모두 담아왔다고 한다.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측면으로 보아내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윤동주가 다녔던 룡정은진중학교이다. 이 학교는 설립당시는 기독교학교여서 은진중학으로 만들어졌는데 쏘련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조가 들어오면서 기독교를 버리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집단으로 대성중학교로 전학을 가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은진중학교의 운영이 어려워지게 된다. 김약연은 기독교로 리상향을 만들려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기독교가 아닌 사회주의 새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날 력사동네 민속동네 회원들은 윤동주와 송몽규 연구가인 박용일선생과 룡정3.13기념회 회장 리광평선생의 안내하에 윤동주, 송몽규의 발자취 어린 달라자학교 자리와 명동학교, 윤동주생가, 윤동주묘소 등지를 현지답사하면서 많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되였다며 분분히 속셈을 터놓았다. 리광인 선생과 박용일선생의 이날 저서선물ㅡ “광복전 겨레 작가론”과 “고향으로부터 윤동주를 찾아서”는 이들의 시야를 보다 넓혀 주었다. 윤동주, 송몽규 탄생 100돐 맞이 또 한차례 뜻깊은 행사였다.
 
2017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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