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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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일본땅에서 새로 개척하는 인생의 길
2013년 01월 28일 08시 57분  조회:2362  추천:4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3.
일본땅에서 새로 개척하는 인생의 길
 
1991년 4월에 일본에 가는 비자를 받고 5월11일의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출국한다고 해도 유학비용이 준비되지 않았다. 그때 나의 월급은 겨우 150여원이여서 아끼고 아껴서 저축을 한다고 해도 출국비용 마련은 불가능 했다. 일본에 가는 편도 항공권이 2400여원이였고 일본어 학원학비 50여만엔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해가 출국할 때도 여러 친척들한테서 돈을 빌렸다. 나까지 출국하자니 나의 월급의 50배내지 100배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는수 없이 또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손을 내밀어 출국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끝내 일본에로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으로 되는 출국이라 흥분된 기분이였다.

    일본의 나리타(成田)공항에서 반년만에 안해와 만났다. 새로운 일본생활이 시작되였다. 안해는 동경신쥬큐의 헐어빠진 목조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일어학원은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 있어서 자전거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아파트는 침실한 칸에 작은 부엌 한 칸이 있었는데 낡아빠져서 밤이면 쥐가 천장에서 살판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던 일본이라는 선진국에 왔으나 나의 눈에 들어오는 첫 인상은 자전거가 생각밖으로 많았다. 일본에서는 모두 자가용차를 쓰고 있다고 상상했기에 북경의 자선거 세계로부터 선진국의 자동차 세계로 들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동차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자전거가 많다는 것은 상상밖이였다. 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원에 가면 홈레스()가 많이 있었다. 왜서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 집없이 유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거기에다 동경의 중심에서 쥐가 살판치는 주택에서 사니까 선진국이라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북경이 좋다고 생각들 때도 가끔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암흑면에 지나지 않지만.

    오전에는 일본어학원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알바 찾기에 열중했다. 금후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안해는 시부야의 라면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으니 일단 밥먹고 살 수는 있었으나 다음학기의 학비를 벌어야 하고 나중에는 친척들과 친구들의 빚도 갚아야 했다. 무슨 일이나 상관없이 돈벌이를 할 수 있으면 뭐나 다 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나로 말하면 일본어학원은 일본에 올 수 있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나한테는 일본어 공부가 거의 필요 없었다. 최고급 일어반에 배치되여도 교실에서 배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업만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알바정보책을 찾아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루에도 몇 십번씩 전화하여 찾았더니 드디어 청소공으로 일거리가 생겼다. 신쥬쿠(新宿)의 동경도청과 마주한 곳에 있는 NS빌딩의 청소였다. 아침6시부터 8시까지 오피스청소이니 일찍 일어나서 자전거를 10분정도 타고 갈 수 있었기에 편리했다. 시급과 교통비를 포함해서 2시간에 2500엔이니 괜찮은 알바였다. 또 저녁에도 6시부터 8시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 오후시간에도 알바를 찾았는데 포장 폐지를 회수하는 일이였다. 매일 트럭을 타고 상점거리 등을 돌아 다니면서 일했다. 시급은 900엔이였는데 만족되지 않아 또 새로운 일을 찾았다. 이번에는 부동산광고를 배부하는 일이였는데 시급은 1500엔에 하루에 4시간씩 할 수 있었다. 4시간 동안에 광고지6000장을 동경도내의 집집의 우편통에 포스팅하는 것이였다. 때는 삼복철이라 날씨가 무더워 말이 아니였으나 배낭에 10여킬로그램 되는 광고지를 넣어서 메고 걸어다니면서 4시간내에 6000장이나 배부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허나 시간급이 높았기에 이를 악물고 해나갔다. 정오12시면 일어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다음 일장소로 향해야 했으며 4시간동안 달아 다니다 싶이 광고지를 배부하고 그길로 또 저녁 청소일 장소로 달려가야 했다. 그것도 신체장애자의 몸으로. 이렇게 삼복계절에 한달동안 올리뛰고 내리뛰고 했더니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가 터졌다. 그래서 오후의 알바는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신체가 약해졌으니 당분간 오후시간은 휴식하였다. 허나 오래동안 휴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알바 찾기를 시작했다.

어느 일요일에 형의 집에 놀러 갔다가 신문지에 따라온 알바 정보에 나에게 합당한 알바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국제 택배회사에서 해외에 보내는 서류를 포장하고 주소를 붙이는 일이였다. 시간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다. 전화한통에 이튿날 면접하니 곧 오케가 내렸다. 오피스에서 일하고  시급은 1000엔이니 괜찬은 일거리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회사는 TNT Express Co. Ltd.라는 외국회사로써 미국, 영국, 오스토라리아, 홍콩 등에 거점이 있었다. 여려가지 화물이나 서류들을 국내의 회사에서 받아가지고 그것에 수출서류를 작성해서 공항까지 운송하도록 하는 일이였다. 즉 국제무역과 관련된 일이였다. 영어도 필요하고 중국어나 한국어도 필요할 때가 많았으니 나에게는 아주 적합한 일이였다. 결국  이 회사에서 5년정도 알바로 근무했는데 회사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시급도 1200엔으로 오르고 하니 재미있었다. 회사의 인사부장으로부터 취직의향이 있는가고 문의가 있었으나 일생동안 직원으로 일하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허나 여기에서 열심히 일하니 생활하고 공부하는 학비에 빚을 갚고 애를 기르고 할 수 있었다. 안해와 둘이서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나중에는 저축도 되였다. 이 몇년간에 어느정도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닦아 놓았다.
 
 인생의 목표와 선택    
   경제적으로는 자립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어떤 목표를 정해야 하는가? 나이31살에 북경에서 대학교수까지 했다고 하나 자기의 인생설계는 되여 있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다. 대학원으로 가서 공부하는가? 아니면 취직하는가? 어느 길도 선뜻 선택하기 힘들었다. 공부를 계속하자니 대학교수까지 한 사람이 더 이상 무슨 공부를 할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박사과정까지 공부했다고 해도 일본에서는 사회과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기는 매우 힘들다고 들었다. 대학교수를 몇 십년 한 후에 박사론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박사공부를 해도 곧바로 목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취직할 것인가? 기실 취직활동도 해보았으나 나처럼 학력이 높고  사업경험이 있어도 일본회사에서는 중국에서의 경험을 적절하게 평가해주지 않으며 월급 대우도 일본의 대졸생과 같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제일 이상적인 선택은 중국과 무역을 하거나 중국진출 일본회사에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모로 활동해 보았으나 그런 기회도 아주 적었다. 즉 베스트(最佳的) 선택은 가능성이 거의 제로였다. 그렇다면 아무튼 대학원으로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다른 기회를 찾아보는 길 밖에 없었다.

    일본에 온지 4개월만에 대학원 연구생의 길을 선택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정치학을 전공할 생각으로 동경대학 법학대학원의 연구생을 신청했으나 서류의 선고(選考)에서 떨어졌다. 처음 일본에 와서 일본식으로 서류작성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주위에서 누군가 지도해 줄 사람도 없었다. 불합격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반년 후에 또다시 동대연구생을 신청하려고 하니 제도적으로 일년내에 두번씩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제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접수하는 사무원의 태도가 너무나도 마음에 안들었다. 그러니 ‘그까짓 동대에 다시는 발길을 안돌릴 것이다’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다음의 선택을 생각했다.

    일어학원의 상해출신 친구가  요코하마(横浜)국립대학에 찾아간다니 그럼 나도 그 대학에 가보자고 생각하고 서류를 작성하여 가지고 대학교 사무국에 가서 문의했더니 연구생 신청을 하려면 지도교수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럼 노동경제학 전문인 코우시로(神代)교수를 찾아 달라고 했다. 예약이 없이 교수면담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비상식적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도 사무국에서는 교수한테 연락해 주었다. 내가 노동경제학교수를 선택한 것은 경제학전공을 하려고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국제경제를 배워보려는 생각은 대학입학전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철학전공보다도 경제학전공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기에 추상적 이론으로 일관된 철학공부를 하는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와서 경제학을 배우려고 해도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연구생을 지망한다고 해도 실머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노동경제학이였다. 중국에서 공회학 (노동조합)론을 교수한 경험이 있기에 노동과 관계되는 경제학부터 들어가보자는 타산이였다.

코우시로교수가 마침 연구실에 계시였기에 만나주었다. 당장에서 면접하였다. 나의 이력서와 연구계획서를 보고 첫 질문이 “너는 공산당 간부냐?”라는 것이였다. 왜냐하면 공산당대학원의 학력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런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관한 연구를 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내가 중국에서 사업한 중국공운학원의 상황을 소개하였다. 그랬더니 교수는 당장에서 사무국에 전화하여 서류를 접수하라고 지시했다. 생각밖으로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연구생이란 일본에서는 대학원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위한 전단계 지도를 하는 과정이였으며 학력으로는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업료도 대학원생의 절반정도로 아주 싸게 받는다. 나에게는 이상적인 선택이였다. 왜나하면 일본에 온지 1년도 되지않기 때문에 경제상에서 부담이 적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연구생공부는 학점이 없기에 지도교수의 수업만 출석하면 되는 것이다. 자비유학하는 가난한 나로써는 알바를 하는 시간이 확보되였기 때문이다. 매 주일 지도교수의 수업에 한번 참가하고 그외 시간은 알바에 전력으로 투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안해의 체류자격을 가족체류로 바꿀 수 있었다. 그 후부터는 부부둘이서 전력으로 알바를 하여 자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국내에서 진 빚을 갚고 부모의 생활비를 송금하고 가족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2년동안 이렇게 ‘연구생 공부’를 했다. 허나 연구생자격은 2년이상 연장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대학원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본에 체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해의 요코하마국립대학원의 경제연구과 입학시험을 보려고 원서서류를 사무국에 제출하였다. 며칠후에 사무국에 갔더니 생각밖의 결과를 알려 주었다. 시험자격이 없다는 것이였다. 이유는 대학원에 들어가는 조건은 ‘16년이상의 정규교육을 받은자’로 되여있기 때문이였다. 나는 대학은 졸업하였으나 소학교로부터 고등학교를 다닌 기간이 10년밖에 않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의 교육체제 때문이였다. 나는 학부장을 찾아가 “중국에서는 이런 체제였기에 어떻게하면 좋은가?”고 상의 했으나 이력서대로는 시험자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이였다. 일본의 제도는 이렇게 딱딱하구나 라고 생각하였으나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대학원을 찾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력서 작성방법도 일본의 제도에 맞추어 거짓말 절반 16년으로 고쳐 버렸다. 이것은 이력서위조행위로써 발각되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허나 문서주의(文書主義)에 집착하는 일본의 제도이기 때문에 서류상에서 부족하거나 전후 모순이 없다면 순조롭게 통과되는게 또한 일본의 제도이다.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대학원에 들어가는데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려면 영어시험을 보아야 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구미에서 도입된 학문이기에 영어나 독일어로 원전(原典)을 독해(讀解)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게 그 이유였다. 나의 영어지식이라면 대학에 입학해서 2년간 A,B,C,부터 시작한 기초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어시험이 없는 대학원을 찾았으나 마땅한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영어공부에 또다시 도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영어독학(獨學)을 시작한 것이다. 서점에서 영어책과 CD를 구입해서는 전차에서 공부했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알바가 많기에 영어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시간이 전차에서만 왕복으로 2시간정도 걸렸다. 그러니 전차가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여유 시간이였다. 그리고 공부결심을 크게먹기 위하여 투자를 한다는 의미에서 영어사전(Randam House)을 1만4천엔 주고 사기로 했다. 이것을 계기로 나의 인생에 꼭 영어라는 관문을 돌파한다는게 나의 결의였다.  

나중에 립교대학 경제대학원에 시험을 보았는데 무사하게 통과되였다. 석사과정 에서 박사과정까지 그대로 줄달음쳐서 달렸다. 
 대학원의 입학통지를 받았을 때는 안해가 임신하여 출산이 가까이 닥쳐온 때였다. 1993년 12월29일에 첫 아들이 출생하여 나는 아버지로 되였다.

대학원입학과 아들의 출생은 두가지 경사가 겹친 것으로써 기쁜 일이였다. 허나 직업도 없이 공부하는 몸으로 어떻게 가족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 새로운 과제를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출생한지 3개월 밖에 되지않는 아들을 고향의 외가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연구테마로 결정된 인생의 목표
방황중에서 대학원에는 들어갔으나 무엇을 공부하고 연구할 것인가? 어떤 장래의 인생설계를 할 것인가? 하는데 관하여서는 여전히 목표가 설정되지 않았다. 일단 노동경제학을 공부한다고 입학계획은 세웠으나 대학원에 입학하고 보니 내가 선택하려고 했던 교수의 연구방향이 나의 생각과 맞지 않아서 지도교수를 바꿀 생각을 하고 국제경제학에서 유명한 쿠보타 쥰(久保田 順)교수를 찾아가 부탁드렸더니 허락해 주었다. 기실 그 교수는 맑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였다. 강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였다. 중국에서 맑스주의 철학과 ‘자본론’ 등을 배웠으니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 가서는 맑스주의와는 이별하고 자본주의 경제학이론을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일본에 와서도 맑스주의 경제학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유닉한 일인가?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의 대학에서는 전후에 맑스주의 경제학이 주도적 위치에 있었으며 많은 교수들이 사회주의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1950-60년대의 일본의 주요대학들(례를들면 토쿄대학, 쿄토대학등)에서는 대부분 대학생들이 맑스의 ‘자본론’을 공부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이 사회주의 중국보다 더 평등한 분배제도와 복지사회를 실현한 것은 당시의 대학엘리트들이 정부의 관료로되여 정책을 제정할 때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일본의 지성인들한테서 들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제눈으로 보고 친히 체험한 일본사회는 평등을 중시한 복지사회였고 자본주의 사회라는 감각이 크게 없다.  

국제경제학에서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부하게 되니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학부생들과 함께 마크로경제학과 미크로경제학 강의를 듣고 나아가서는 경영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일본의 대학원은 강의를 듣는게 위주가 아니라 자체로 책을 읽고 리포트를 발표하고 원생들이 함께 토론하는 형식이 많았다. 또한 자기의 연구방향과 석사론문 계획을 반년간에 결정해야 한다.

무었을 연구할 것인가? 많이 망설이고 있는데 경영학을 교수하는 한 교수님이 아시아경영학회가 있는데 그 학회의 회장 노구치(野口)교수 (게이오대학; 慶応大学)가 두만강개발에 관심이 많아서 그것에 관한 보고회가 있는데 학생이 연변에서 왔으니 두만강지역의 상황을 보고해 줄 수 없겠는가고 요청을 하였다. 대답은 하였으나 두만강개발에 관한 상황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왜냐하면  연변의 시골에서 태여나 농민의 자식으로 농촌에 관한 체험은 있었으나 그 이상 연변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때는 연변을 떠나 북경에서 10년간 생활하다가 일본에 왔기에 연변과의 인연은 부모친척외에는 거의 없었던 상태였다. 북경에는 인맥관계도 어느정도 형성되고 북경에 관한 지식은 어느정도 있으나 연변에 관해서는 부끄럽지만 아는게 너무나 없었다. 아니, 요해하고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아 봤으나 당시에는 연변에 관한 자료가 일본의 도서관에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내가 체험한 연변의 상황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조선족이 많고 조선어가 중심이며 조선과의 교류가 많다는 점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어릴 적에는 개산툰의 누나집에 놀러 갔다가 두만강에서 수영하고 건너편 대안의 조선땅에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야기 정도였다.

이 보고회가 있은 후 나는 두만강개발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자신의 고향과 관계가 깊고 또한 나의 언어우세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두만강개발문제를 연구과제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나중에는 두만강개발과 더불어 동북아지역 경제협력문제를 나의 일생의 연구과제와 인생목표로 결정했다. 허나 당시 일본에서는  특히 동경권에서는 두만강개발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일본해(동해) 연안의 니이가타 (新潟)나 토야마(富山)등 지역의 대학에는 연구자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경의 생활기반과 대학원을 포기하고 그 쪽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도 현실적이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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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네티즌
날자:2013-01-29 09:11:36
잘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추구는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게도 귀감이 된다고 봅니다.
2   작성자 : 此心安处是吾乡
날자:2013-01-29 04:16:0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경력이 인상이 깊슴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새 해 복많이 받으세요.
1   작성자 : 진실추구
날자:2013-01-28 15:41:30
왜! 80년대,90년대 중국 조선족대학생들은 이런 피땀나는 고학도 마다하고 외국행을 선택했을가? 그들의 공동한 추구는 무엇이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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