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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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춘의 절정기-대학시절
2012년 11월 24일 09시 59분  조회:3576  추천:7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8.
청춘의 절정기-대학시절
 
1981년 9월에 나는 북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21년간 살아온 추억많은 고향을 떠났다. 그것이 영원한 리향(離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 때는 그저 공부하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시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되던 시기였고 농촌에는 아직도 인민공사가 남아있고 생산대가 남아있었으니 나를 포함한 대부분 중국사람들은 아직도 기본상 모택동시대의 의식과 사유방식속에 있었다. 농촌에서는 개혁개방이 무었인지 말은 들어보고 신문은 보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농촌을 떠난 후에 농촌에서는 땅을 나누고 농기구도 나눈다는 말을 듣고 중국사회가 무너지는 줄로 알았다. 어떻게 우리가 만든 인민공사가 해체될 수 있는가? 중국이 무슨 길로 가고 있는가? 북경에 금방 간 촌놈으로써는 도저히 리해할 수가 없었다.

북경에 가 봐도 아직 물가는 국가 통제하에 있었고 식량이나 채소 육류도 공급제였다. 한달의 배급은 량표(식량배급권) 30근(15킬로그램)이였는데 그중 세량(細糧-입쌀과 밀가루)과 잡량(雜糧)이 일정한 비례로(5:5)  되여있는데 조선족은 입쌀을 주로 먹는 민족이라하여 조선족 학생들한테는 7:3으로 특수한 배려를 해주었다. 난생처음으로 조선족으로 태여나서 다행이라고 생각되였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족이란 무슨 의미인지 민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깜깜부지였다.

그 때 당시에는 집이 가난해도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입학만 하면 학비전액면제 (면제라기보다는 학비라는 개념이 없었다)이고 숙비전액 무료제공이며 한 달에 18원(元)씩 식비를 제공받았고 그 외에도 용돈으로 보조금2원,소수민족 특수보조금2원, 그리고 집이 가난한 학생은 의복(여름,겨울복장으로 나누어서) 도 신청하면 배급받았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군인의 대우와 기본상 같았다. 우리집에서 받은 돈이라면 북경으로 가는 렬차비와 축하금으로 받은 돈 20원이 전부였다. 북경으로 가는 대학생이라고는 하나 위 아래 옷 단벌에 신 한 컬레여서 한번은 축구를 하다가 바지가 동강나니 돈이 없어서 친구한테 5원을 빌려서 바지 한쪽 사서 입어야 했다.

우리반급은 학생이50명이고 전국20여개의 성과 민족자치구에서 23개 민족이 모여와서 하나의 공동체로 되였다. 학교의 관리방식은 군인식 관리방식이므로 수업하거나 여러가지 문화체육 활동을 해도 기본적으로는 한개 반급을 위주로 하고 그 외에는 정치계의 학부적 집단활동이였다. 정치계에는 철학전공반과 정치경제학 전공반 두개 반으로 나뉘여졌으나 같은 학년이면 같이 활동할 때가 많았다.

나는 철학전공반이였으며 나와 귀주성에서 온 여학생이 제일 연상(21세) 이였고 제일 어린학생은 16세였다. 남방에서는 5세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16세면 고중졸업이 된다는 것이였다. 우리반급에는 조선족이 2명뿐이고 그 외에 23개 민족이 4년동안 공동생활하게 되였다. 동북지역에서는 몽골족,만족,오른촌족,조선족 등 민족이 오고 서북지역에서는 회족,장족(티베트족),하사크족(타지크족),러시아족,동족,토가족 등 민족이 왔으며 서남지역에서는 이족,쫭족,묘족,부이족,타이족,백족,나시족 등이 왔기에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학생들이였다. 언어도 다양하고 방언도 많아 처음에는 중국말로 해도 의사소통이 잘 않되였다. 거기에다  중국말을 능란하게 구사할 수 없었고 수업강의를 들을 때에는 노트(필기)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어 수준이였다.      

학교생활이 시작되자 반주임선생(귀주성 출신의 묘족)은 나한테 반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이유는 내가 반급에서 입학점수도 제일 높고 나이도 제일 많기 때문이였다. 중국말도 변변치 못하고 조직경험도 전혀 없는 나에게는 큰 난제였다. 또한 나는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어 남의 앞에 나서는 것을 아주 꺼려했다. 허나 거절할 수도 없고 (그때는 당의 지시나 상급의 지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상급의 지시대로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또 실제상에서 열심히 뛰여다니며 반급생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4년동안의 반장직경력과 공산당원 입당 및 당지부 조직위원직 경험이 그 후의 나의 조직력과 통솔력 등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워주는 기초수업이였다고 생각된다.

비록 대학입시에서는 당시 전교적으로 장원급이였으나 한어(중국어)가 따라가지 못하여 첫2년동안은 고생을 많이 했다. 중국에서는 대학시험에서 민족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나는 100% 조선어로 시험을 치고 한어과목이 추가되였으며 조선어문 시험과 한어문 시험의 평균점수가 어문시험(국어) 점수로 평가되였다. 도시에 살면 그래도 중국말을 배울 기회가 있었으나 농촌에서는 특히 연변지구에서는 온 마을이 조선족이고 학교도 선생과 학생이 전부 조선족이기에 중국말을 쓸 기회가 전혀 없었다. 물론 한어과목이 소학교 3학년부터 설치되여 있으나 누구하나 한어를 잘해서 장래 중국에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경우와 똑 같았다. 그래도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지금의 중국에서는 학생들은 영어를 잘 배워서 장래에 세계에서 활약하거나 미국에 유학간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다. 당시에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여서 대학시험 제도가 페지되여 있고 외국유학이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완전히 바깥세상을 모르는 상황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중국말을 배우는 의미를 몰랐고 외국어란 수업과목은 더욱 없었다.

중국어수준이 빈약한데다 대학 첫학기부터 영어가 외국어로 필수 과목이였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먹기로 그래도 A,B,C부터 시작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되였다.내가 중국에서 배운 영어라면 대학에서 2년동안 초급정도 밖에 안된다. 그러니 영어회화는 겨우 ‘굿모닝’ 정도였다. 반급학생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였다. 1978년에 등소평이  복귀되면서  교육제도 정비를 시작해서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외국어를 도입하기 시작했기에 나보다 어린 학생들은 영어를 3,4년동안 배웠다. 또한 소수민족의 많은 지역에서는 본 민족의 문자와 언어가 없고 민족교육이 발전되지 못한 탓에 소학교로부터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기에 대부분은 나처럼 중국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였다. 그러니 나는 두개의 큰 언어부족을 보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기에다 이제까지 자습해온  일본어도 버릴 수 없기에 일어자습도 해야 했다.

유일한 방법은 남보다 두세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놀음시간을 없애고 휴식시간(수면시간)을 남보다 할애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모자랐다. 거기다 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으니 시간이 더욱 딸렸다. 용돈도 없었기에 밖에 나가 술마시고 놀음질할 시간도 없었다. 대학시절의 하루동안 활동범위는 숙소로부터 식당, 식당으로부터 교실(아니면 도서관) 로 되여 있어 3점1면에서 뱅뱅 돌아치는 것이 일수였다.

한어수준이 약하니 ‘고대한어(古代漢語)’를 1부터 4책까지 통독했다. 여름방학에는 고향집에 돌아 갈 때 홍루몽(紅樓夢) 소설책3권을 휴대하고 가서 한어사전을 번져가면서 통독했다. 그리고 또한 시간을 짜내서 당송시사300수(唐詩宋詞300首) 중에서 100수이상 외워냈다. 이렇게 노력한 보람이 2년 후에 나타났다. 한어에 완전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 때문에 4년째에는 치열한 대학원 시험 경쟁에서 중공북경시위당교의 연구(석사)생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또한 외국어인 영어도 같은 방법으로 공략했다. 매일 아침체조(군인식으로 아침6시에 기상하여 집단적으로 반급끼리 대열을 서서 운동장에 나가 달리기를 해야 했다. 나는 반장이기에 솔선적으로 하지않으면 안되였다.)가 끝난뒤에는 영어책을 들고 캠퍼스에서 공부했다. 그 외 일어공부도 열심히 했다. 형이 일본에 연수로 갔다가 돌아올 때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교과서를 갖고 왔는데 그것을 빌려가지고 자습시간에는 일어 공부를 했다. 이토록 자기가 이제까지 사용해온 조선어는 거의 쓸모가 없고 외국어 3개를 동시에 공부해야 했다. 매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24시간으로 평등하나 나에게는 24시간이 언제나 부족했다. 유일한 방법은 휴식이나 수면시간을 줄이는 수 밖에 없었다.

왜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던가? 어떤 이상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허나 그 때는 솔직히 말해서 명확한 이상이나 목표가 정립된 것은 아니였다. 하도 가난하고 또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대학에 가고 싶었고 그것을 위하여 부지런히 공부해야 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자기의 실력이 박약한 부분을 열심히 보완해야 된다는 일념 뿐이였다. 때문에 목표라고 하면 그것은 자기의 지적결함을 보충하여 보통인간으로 남한테 뒤지지 않고 부모형제들께 부끄럽지 않는 보통대학생으로 되는 것 뿐이였다.

대학을 졸업할 4학년이 되자 장래의 선택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물론 그 때 당시에는 대학에서 직업을 알선하고 정부에서 분배해주는 형식이였으나 일정한 선택은 가능 했다. 첫 선택은 고향에 돌아가느냐 아니면 북경에서 취직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학급의 간부이고 공산당원이니 당연히 북경에서 직업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도 고향인 연변에 돌아 가려는 생각도 있었다. 또한 고향인 연길현 현장(知事)의 명의로 온 초대의 편지에 ‘나무가 3척 커도 잎은 뿌리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고향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힘내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그 편지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했다. 그 때 북경에 있는 졸업생들은 장래에 관한 담론에서 계두우미 즉 닭 대가리가 되느냐 아니면 소 꼬리가 되느냐라는 의미로 대도시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고향이나 지방의 소도시에서 리더로 성장하느냐? 하는 직업선택의 생각방식이 주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두개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한 층계 더 올라 가는(更上一层楼) 대학원의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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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111
날자:2012-12-03 13:07:42
그적에 대학다니는 학비 등이 면제였고 보조금도 받았지만, 그것이 나라에서 주는것이 아니고 어느 조직에서 주는것두 아니구,중국 만백성들이 내주는것입네다. 이런걸 후대들에게 깨끗하게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   작성자 : 장백소나무
날자:2012-11-25 18:38:43
젊은 세대들에게 지침으로 될수 있는 훌륭한 교양서라고 보는데 련재주기가 너무 길어 기다리기에 지친다. 주기를 더 짧게 할수는 없는지,혹시 단행본이 출간된다면 더 좋겠는데.....
1   작성자 : 애독자
날자:2012-11-25 09:36:00
처절하던 시기의 회억체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 련재해 주십시오. 건강하시고 복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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