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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빛> 시모음
2018년 01월 09일 20시 13분  조회:2393  추천:0  작성자: 죽림

<햇빛에 관한 시 모음>  


+ 허락된 과식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나희덕·시인, 1966-) 


+ 햇빛이 말을 걸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시인, 1962-) 


+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승·시인, 1950-) 


+ 햇빛 바람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윤동주·시인, 1917-1945) 


+ 햇살의 분별력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하고요 

장닭 벼슬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벼슬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안도현·시인, 1961-) 


+ 햇살은 어디로 모이나 

눈도 녹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양달을 잘 아시는가 
나물을 뜯으려고 바구니를 내려놓은 자리 
거기다, 그곳이 햇살의 곳간이다 
갈퀴 손으로 새순을 어루만지자 
오물거리던 햇살이 재게 할머니의 등에 오른다 
무거워라 포대기를 추스리자 
손자 녀석의 터진 볼에 햇살이 고인다 
엄마 잃은 생떼의 입술이 햇살의 젖꼭지를 빤다 
햇살의 맞은편, 그러므로 응달은 
할머니의 숯검댕이 가슴 쪽에 서려 있다 
늘그막에 핏발 서는 빈 젖꼭지에 있다 
항아리 숫돌에 녹물을 지운 나물 칼 
응달은 자신의 남은 빛을 그 칼날에다 부려놓고 
방금 새순을 바친 풀뿌리로 스며든다 
우글거리던 햇살의 도가니, 그 밑자리로 
응달은 겨울잠 자러 가는 실뱀처럼 꼬리를 감춘다 
양달은 지금 어디에다 아랫목을 들였나 
아기가 갑자기 제 트림에 놀라 운다 
아기의 뱃속 어딘가에서 
빙벽 하나 무너져내렸는가 
(이정록·시인, 1964-) 


+ 몇 줌 시린 햇볕에도 

지난밤 바람이 몹시 불더니, 하느님이 다녀가셨는가? 
옆집에 마실 오듯 슬쩍 다녀가셨는가? 

이파리들 다 떨구고 
차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떠꺼머리총각처럼 서 있는 저 감나무 
몇 줌 시린 햇볕에도 
한없이 떨며 깊어지는 
극빈의 그늘 속에 

새소리, 새소리들 
발목 붉은 새 울음소리들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맑고 높게 
반짝이고 있으니 

이런 날 내 공부는 
경전이고 나발이고 읽던 책 탁 덮고 
밖으로 나가 
빨랫줄에 빨래를 널거나 마당을 쓸거나 아니면 빈둥빈둥 구름을 쳐다보며 
눈 밑 점이 이쁜 
한 사람을 생각하거나! 
(전동균·시인, 1962-) 


+ 햇빛에 대하여  

먼 길 걸어온 햇빛 반기는 것인지 
넘치고 넘쳐나는 햇빛이 아까웠는지 

생의 아래쪽으로 움츠려 있던 나무들이 활짝, 
살림살이 그릇 죄다 꺼내어 펼쳐놓는다 
저 많은 그릇에 넘쳐나는 햇빛의 둥근 기억들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짜고 비린 기억의 햇빛들 
햇빛은 그 맛의 기억을 찾아서 내린다 

햇빛의 그릇들을 높이 걸어놓는 
저기 저것 좀 봐 
햇빛 어루만져 매달아놓은 과실들 
햇빛 읽어 반짝반짝 소금이 자라는 바닷물 
둥글게 햇빛을 깎아놓은 높다란 방에서 
아늑하게 삶이 데워지기도 한다 

햇빛이 닿으면 닿기 무섭게 
꽃들이 향기를 타고 올라 생의 널 뛰고 
곡식들이 절로 고개 숙인다 
햇빛은 그 밝기만으로도 얼마나 겸손한 것인가 
열매처럼 매달린 내 머리도 끄덕인다 

어느 늦은 저녁 
햇빛의 시장기가 몰려오는 것인지 
나는 어질머리 흔들며 집으로 돌아간다 
제 생의 햇빛을 다 담아냈던 
그릇들이 달그락 달그락 소리내는 

사과밭 지나 배밭 지나 
(최창균·시인, 1960-)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이문재·시인, 1959-) 


+ 이분법에 대한 일상의 소견 

햇볕에 빨래를 내다 건다 
햇살에 걸린 빨래들, 
너무 오만하게 지쳐 섰던 영혼이 
햇살에 오징어처럼 
타 없어질 때까지 
일광욕중이다 

몸과는 사이가 나쁜 영혼에게 
영혼이라는 말에 갇혀 영영 우울한 영혼에게 
가을 하늘, 햇살에 걸린 빨래들에 섞이어 
제 순수를 잃어버릴까, 
잔뜩 겁먹은 영혼에게 
개살궂은 사내처럼 
간지럼 태우다 

깔깔, 
영혼도 웃다가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진다 
웃다가 오줌도 새는 줄 모르고 
눈물이 쏙 빠지고 
혼이 달아난다 
영혼에 영혼의 얼룩이 빠지고 
영혼은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지 않고 
평범해졌다, 깨끗해졌다 

햇살 참 좋다, 
(조하혜·시인) 


+ 담북장 햇살 

한겨울 할머니 묘소엘 가면 
겨울 햇살에서 담북장 냄새가 난다 
고드름 굵게 쳐진 처마 아래 
김장철부터 시름시름 말려놓은 무청 시래기 
듬뿍 넣고 끓인 담북장에선 
할머니 곰삭은 팔십 평생 속울음 냄새가 난다 
대청마루 밑에 넣어둔 보랏빛 씨감자 
부엌 한 편에서 싹을 틔운 푸른 대파 
끓어 넘치는 뚝배기에서 송송 끓으면 
겨울 햇살도 입맛 다시며 
한 술 뜨는 숟가락에 서둘러 내리꽂힌다 
둥근 상 빽빽이 둘러앉아 수다 피지 말라고 
눈치 주던 어머니 앞에서 분주한 형제들 입질 
일 년 내 거둬들인 쌀가마랑 잡곡 가마랑 
새봄 서울로 공부 떠나는 아이들 
꽁무니에 붙여 딸려 보내고 나면 
꼭두새벽부터 소여물 끓이는 
할머니 이마에 식은 땀 쉴새 없지만 
한 뼘씩 커진 손자들 쑥대머리 너머로 
창창한 뭉게구름이 달리기를 한다 
굼뜬 겨울 햇살 끼어 든 침침한 아랫목에 
눈감으신 허리 굽은 할머니 
팔십 평생이 저토록 곰삭았을까 
(김금용·시인) 


+ 할머니의 봄날 

볕 아깝다 
아이고야 고마운 이 볕 아깝다 하시던 
말씀 이제사 조금은 알겠네 
그 귀영탱이나마 조금은 엿보겠네 
없는 가을 고추도 내다 널고 싶어하시고 
오줌 장군 이고 가 
밭 가생이 호박 몇 구덩이 묻으시고 
고릿재 이고 가 
정구지 밭에 뿌리시고 
그예는 
마당에 노는 닭들 몰아 가두시고 
문이란 문은 다 열고 
먹감나무 장롱도 
오동나무 반닫이도 다 열어 젖히시고 
옷이란 옷은 마루에 
나무널에 뽕나무 가지에 즐비하게 내다 너시고 
묵은 빨래 일손으로 처덕처덕 치대 
빨랫줄에 너시고 
그예는 
가마솥에 물 절절 끓여 
코흘리개 손주놈들 쥐어박으며 끌어다가 
까마귀가 아재, 아재! 하고 덤빈다고 
시커먼 손등 탁탁 때려가며 
비트는 등짝 퍽퍽 쳐대며 
겨드랑이 민둥머리 사타구니 옆구리 쇠때 다 벗기시고 
저물녘 쇠죽솥에 불 넣으시던 당신 
당신의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렸네 
당신 산소에서 내려다보이는 기슭에는 
가을에 흘린 비닐 쪼가리들 지줏대들 태우는 연기 길게 오르고 
이따금 괭잇날에 돌멩이 부딪는 소리 들리겠네 
당신의 아까운 봄볕이 
여기 절 마당에 내려 저 혼자 마르고 있네 
(장철문·시인, 1966-)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정진규·시인, 1939-) 


+ 햇살 

하늘에는 
태양의 햇살 

내 마음에는 
님의 햇살 

광활한 대지는 
태양의 햇살에 잠을 깨고 

내 작은 영혼은 
님의 햇살에 잠을 깨어요 

하늘에는 
따스한 태양의 햇살 

내 마음에는 
따스한 님의 햇살 

대지는 
태양의 햇살에 따스하고 

내 마음은 
님의 햇살에 따스합니다 
(정연복, 1957-) 

 



인도 뭄바이의 아라비아해 해변에서
한 남자가 갈매기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 2018년 1월 9일, /인도 뭄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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