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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들면
- 함기석
사전은 책상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간다 소파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긴다 제 육체를 구성한 말들에 갇혀 죽어가는 자신을 반성하며 담배를 핀다 내가 잠들면
달력 속의 여자는 밤마다 외출을 한다 죽은 애인을 만나러 묘지로 나간다 무덤을 파헤친다 관뚜껑을 연다 달빛아래 밤늦도록 해골의 그와 함께 춤을 추다 새벽녘 울면서 돌아온다 내가 잠들면
시계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책상과 의자는 싸움을 시작한다 책상의 두개골이 깨지고 의자는 코피를 흘린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의 존재소멸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내가 잠들면
책들은 물고기가 되어 방안 가득 푸른 알을 낳고 양초는 밤새도록 자학하며 시를 쓴다 병든 제 육신을 불태워 춥고 어두운 나의 방을 밝혀준다 계단은 계단에서 고독과 추위에 떨며 아파하고 옥상의 옷들은 빈 껍데기뿐인 자신의 일생과 먼저 죽은 친구들의 생을 생각하며 불면에 시달린다 내가 잠들면
거울은 악몽을 꾼다 검은 모래 토해낸다 검은 꽃 검은 나비떼 토해내며 고통과 반란의 검은 시간 토해내며 악몽에 시달린다 내가 잠들면 거울은 피를 토하고 거울 속의 나는 거울을 빠져나와 지붕 위로 올라간다 굴뚝에 앉아 나팔을 분다 구름과 달과 초록별들이 쏟아져 나오는 나팔을 분다 머나먼 우주 암흑의 행성에 사는 어린 난쟁이들을 생각하며 쓸쓸히 나팔을 분다 내가 잠들면
창밖 상처입은 은행나무는 창문을 열고 들어와 내 곁에 눕는다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 어린 나무 왼팔이 잘려나간 그 착한 나무 떨고 있는 은행나무를 끌어안고 나도 고열에 시달린다 나 점점 지워지고 은행나무 따뜻한 꿈꾼다
아침에 깨어보면 사물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나는 안다 밤새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얼마나 방황했고 얼마나 고독했는지 나는 안다 그들도 살아있음을 치열하게 숨쉬고 번민하고 사랑하고 아파한다는 것을
* 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한양대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에 "新고린도전서식 서울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며 문단데뷔.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 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등.
시창작 지도를 하다 보면 창의적 발상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면 마치 큰일 날 것처럼 기존을 붙들고 한 치도 안 떨어지려 바들바들 떠는 형국이랄까. 그러면 이런 고정관념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나.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자아분리 연습을 시켜보는 거다. 자신을 나와 내 자아 두 사람으로 분리해 각각 따로 행동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인용시 ‘내가 잠들면’은 나와 내 자아, 사물과 사물의 자아 이렇게 분리한 상황을 기본 바탕으로 한다. 내 자신은 방에 잠들어 있는데 내 자아는 잠깨어 있다. 방안의 사물들은 잠들어 있는데 사물들의 자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싸우기까지 한다. 하여 잠들지 않은 내 자아가 잠들지 않은 사물들의 자아에 관심을 갖고 이를 묘사하는 게 시의 주 내용이다.
인용시를 쓴 함기석 시인은 이처럼 활유적(活喩的) 어법의 시로 시단에서 주목을 받고 독특한 위치를 확보한다. 자신의 전공인 수학을 시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융합적 상상력의 시인이랄까.
///김영남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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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누(Nu) 16/함기석-
제7인공수면실 Time Captives 나는 16940시간째 동면상태다 내 우측 수면캡슐엔 힌두우주인 마야(maya), 출입문의 붉은 눈이 빔을 뿜으며 빠르게 깜빡이자 투명체 유리캡슐들이 열린다
등에 파란 촉수가 달린 파동생물 카이가 들어온다 긴 혀로 내 얼굴과 마야의 눈을 핥는다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나는 깨어난다 긴 터널 같은 환몽에서 마야도 깨어난다 우린 키스한다
카이가 가늘고 긴 촌충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마야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간다 누가 실명한 신의 눈을 뜨고 응시한다 마야의 살이 파랗게 변한다 머리칼은 죽은 버드나무 줄기처럼 흐늘거리고
유방은 한 쌍의 흑조가 되어 북두의 하늘로 날아간다 내가 손을 뻗어 마야의 뺨을 어루만지자 그 녀의 눈 속에서 내 눈을 태울 듯 노려보는 카이의 눈, 내가 주춤주춤 물러서자 누가 나를 부른다
나는 무명(無名)인데 귀조차 녹아내려 없는데 누가 계속 내 멸실된 이름을 부른다 그때마다 수축 하는 잠 팽창하는 꿈, 마야의 눈 속에서 거대한 말미잘 촉수가 뻗어 나와 내 목을 휘감아 들어간다
순식간에 나는 마야 속에 갇힌다 꿈을 깬 육체 속에 남겨진 꿈처럼, 이곳은 망각된 시간의 외계 (外界)일까 누구의 삭제된 슬픔이고 누구의 망실된 기억일까 미친 눈썹들이 흩날리는 해저 같다
나를 흡입한 마야의 몸이 풍선처럼 부푼다 나는 수평파를 따라 종이배처럼 피 속을 떠내려간다 죽은 아기들의 울음이 울리는 에코의 방을 지난다 살 속은 전자회로망이 실핏줄처럼 깔려 있고
나는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거미줄 모양의 신경망을 지나 후두부로 간다 자율신경 계단을 오르자 주름진 방들이 보인다 마야의 뇌다 종양처럼 검은 꽃들이 피어 있다 망자처럼 떠도는 달
감금 이틀째, 척추 속이다 뼛속에 고인 구름을 따라 흉부로 간다 폐엔 파란 물이 고여 있다 죽은 자의 입술 닮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누가 음경(陰經)을 들고 태양에게서 불을 훔치고 있다
그것이 내 유실된 주검이라는 듯, 나는 척수를 타고 방광 쪽으로 방류된다 검은 음모로 뒤덮인 아 름다운 해안이 나타난다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누가 검은 해변에서 다섯 개를 풀어놓고 있다
나는 모래언덕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본다 내 실종된 귀가 돛단배처럼 떠다니는 바다, 내가 물속으 로 뛰어들자 내 몸은 시퍼런 핏물로 뒤덮이고 수평선 너머에서 밀항선처럼 검은 간이 떠온다
절벽에서 누가 외치고 있다 마야! 마야! 날 내보내줘! 나도 따라 소리친다 소리칠수록 우리의 몸은 밀랍처럼 녹고 사방에서 카이의 웃음만 싸늘히 커진다 내 모든 기연(其然)이 불연(不然)인 이곳
감금 나흘째, 나는 마침내 항문에 도착한다 괄약근이 꽃처럼 오므라져 있다 나는 온힘을 다해 그녀 의 몸을 빠져나간다 바깥은 이형의 외계다 지구로부터 108광년 떨어진 암흑우주 아이엠Iam
해마처럼 생긴 생물들이 반투명 액체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색색의 시간들이 기나긴 해초가 되 어 파동을 따라 출렁이고 있다 수면 위로 동면중인 내가 든 유리캡슐들이 무수히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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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한 과부가 부과한 책자 /함기석 ㅡ전대미문의 문미대전
회문(回文)국 국왕 론의 주검을 뒤집어 검시하자 굴이 발굴됐다 굴은 총길이 416m 창자, 기나긴 악몽의 해협이었다 야음에 비밀잠수함이 지나가는
론의 눈에서 독 묻은 탄환 나왔다 탄환은 웃으며 자기는 론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론의 찢긴 목구멍에선 푸른 가시벌레들이 계속 기어 나왔다 항문에선 죽은 흰개미들이 쏟아졌고
신하들은 국왕의 죽음을 미화할 전대미문의 문미대전을 대대적으로 작란하기 시작했다 굴에선 계속 흡혈박쥐들이 날아올랐고 왕국의 하늘은 황량한 노을로 뒤덮인 위조지도가 되어갔다
검시관이 론의 입에 손을 넣었을 때 처음 닿은 것은 물컹한 혀, 그것은 흑갈색 파도가 문신된 13cm 페니스였다 론의 성기는 죽어서도 웃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말뚝웃음 저편 까마득한 저승의 서해에서
몰살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밀물로 울려왔다 바로 그때 왕국의 수도 바위산 아래 론의 일가가 살던 푸른 기와의 궁궐이 보였다 궁은 나풀거리는 회문(回文)의 책자였고 13부로 되어 있었다
1부 건조할 조건 빨간 속눈썹 달린 개 두 마리가 거울 앞에 선 여왕의 궁둥이를 킁킁거리며 살살거렸다 호호 Madam I'm Adam 호호 밥그릇처럼 무덤만 즐비한 벌판을 바라보며 여왕은 독백했다 꽃도 염문도 법도 역사도-다들 잠들다
2부 위대한 대위 웃는 백치여왕 adada 목엔 두 개의 장식용 머리가 달려 있었다 여야처럼 좌우처럼 전쟁은 불길이 끝나지 않고 정치적 섹스는 계속되었다 오래전 아버지 론이 대공조사실에서 어린 열사들의 눈을 태워 빨강괴물 그림자놀이를 즐길 때처럼
3부 다 모호한 호모다 왕은 왕이어서 왕왕 Cooing과 Babbling 혼자만 놀았다 그리하여 <나>라는 <나라>는 항문 가득 파리가 알을 슨 변사체 그리하여 역사는 발작 중인 회문(回文)의 회문(會文) 입과 꼬리가 뒤바뀐 하마처럼 뇌물 먹다 뇌에 물이 괸 코 없는 코끼리처럼 끼리끼리
핏기 없는 꿈들이 날마다 서해로 흘렀다 굴을 다시 뒤집자 론의 텅 빈 폐에 백야의 어둠이 가득했다 론의 사체에서 독재자 론(Lone)이 대를 이어 부활했고 회문(回文)국의 모든 음악과 춤과 시는 검은 감옥에 투옥되어
어두운 회문(回問)이 되어갔다 거리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여자들이 실성한 버드나무처럼 거닐었다 그들은 모두 무덤을 빠져나온 핏덩어리 구름들 불구의 땅이 낳은 불구의 해와 달과 별
<나>라는 <나라>는 눈알이 검게 썩어들었다 그리하여 아홉의 검시관은 전대미문의 시체사건을 최종 판결했다 대지엔 론의 기나긴 악행이 음담의 패설로 새겨졌고 땅의 곰팡이들이 빠르게 하늘로 번져갔다
곰팡이들의 미친 웃음소리 따라, 야사의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죽어서도 눈이 감기지 않는 아이들은 모두 물새가 되어 굴의 폐쇄된 해저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마침내 굴의 반대편이 나왔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촛불이 타는 반도였다 반도는 자책한 과부가 부과한 거대한 피의 책자였고 또 다른 전쟁으로 4부 5부 6부 이후의 모든 서사는 불타 있었다
/<현대시> 2017년 4월호. |
하나병원 장례식장 뒤편 소각장
함기석
불타고 있다 누군가 쓴 일기장 누군가 신던 기린 양말 누군가 선물 받은 아름다운 목도리 눈 속에서 불타고 있다 누군가 발이 되어준 지팡이 누군가 불면 속에서 쓰다듬던 장난감 펭귄 누군가 비운 빨간 약병 첫눈 속에서 모두 불타고 있다 누군가 잃어버린 벙어리장갑 누군가 아기를 안고 칸나처럼 웃던 창문 누군가 잃어버린 청춘 열쇠 없는 일요일 아침, 자물쇠 닮은 갑작스런 죽음 누군가 머물다 떠난 빈 벤치 누군가 죽은 숲 누군가 울면서 걸어간 눈길 모두 젖은 물고기처럼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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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당연한 의미를 믿지 않고 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며 새로운 말과 논리를 꿈꾸는 사람이 시인이다. 언어 혹은 언어의 자율적 논리 자체를 중시하게 되면 명백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보조적 수단으로 동원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언어를 정교하게 조직하여 현실을 재배열하고 시간이 정지된 유희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따라서 이 계열의 작품들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인상이 강하고, 보편적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은데 함기석(49)은 드물게 자기 색깔을 인정받으며 이 계열을 대표해온 시인 중 한 명이다. 센스가 아니라 난센스, 2차원의 문장과 3차원의 현실을 뒤섞는 상상력, 기하학에서 대수학과 위상수학, 무한(∞)과 영(0) 등 수학의 다양한 개념과 공리를 시의 전위적 가능성으로 흡수하여 펼쳐내는 실험은 지금 한국 시단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고 그만큼 매력적이다. 그런 함기석의 시가 최근에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작품 곳곳에 ‘고통 받는 인간의 얼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영향에서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인간적인 아픔이 짙다고 할까. 예심위원들은 이 변화에 주목했다. 어찌 보면 함기석은 그동안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학문제를 풀듯이 언어논리의 발명에 몰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언어의 자율성을 현실에 붙들어 맬 때, 장례식장의 소각장에서 사물들은 비통하게 불탄다.
박상수(문학평론가)
◆함기석=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오렌지 기하학』 등. 박인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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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 <현대시>, 10월호
황홀한 아파니시스aphanisis를 위하여
시인에게 자의식은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병소이다. 시적 자의식의 출현 시기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보면 우문 일 수 있는 것이, 시의 출발은 인간의 자의식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인간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자의식이야말로 예술이 탄생하게 되는 기원이 아닌가 말이다. 영원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죽음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되기 마련이므로, 이미지(예술)의 탄생은 소멸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에 맞닿은 자의식은 본질적으로 자기분석적이다. 그리고 라깡이 말했듯이, 자기분석의 종결은 주체의 소멸이다. 라깡에 있어서 소멸은 단순한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주체에 빗금을 침으로써 주체란 근원적으로 균열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했던 라깡이 자기분석의 최종단계로서 주체의 소멸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달리 생각하면, 라깡의 작업은 시적작업의 궁극과도 닿아 있는 셈이다. 시적 자의식은 결국 주체의 죽음을 불러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까이 말하는 주체의 소멸은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상징계의 붕괴를 의미함을 애써 환기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소멸의식은 구체적 이미지(육체의 죽음)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소멸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는 것이다. 하여 죽음(소멸)을 향한 욕동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육체를 끊임없이 해부할 것을 강요한다. 육체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해부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은 현대 시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함기석의 시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역시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시선이 뚜렷하다. 육체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의 시는 육체를 매개로 하여 주체의 소멸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해부는 곧 주체가 소멸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주체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욕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함기석의 시에서 새로운 점이 있다면, 육체의 소멸이 곧 주체의 소멸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주체의 소멸은 곧 실재계로의 진입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는 주체의 소멸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 초월일지라도 뚜렷한 출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기타에 붙은 두 손이/흰 새가 되어/숲의 적막으로 무한히 날아간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육체를 매개로 한 초월의 감성은 육체와 주체를 지움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정신적 풍경인 것이다. 초월의 감성이야 그다지 새로운 시적 주체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초월에 이르는 시적 형상화의 방법이 문제다. 함기석은 육체를 악기로 비유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동통을 무거운 음향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시각적 이미지로 변주해낸다. 그것과 대비되는 초월의 적막 역시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악기화한 육체의 소멸은 청각과 시각을 통해 매우 감각적으로 형상되고 있다. 죽음에서 초월에 이르는 육제(악기)의 연주가 이 시의 주체인 셈인데,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감각적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늙은 몸을 조율하"는 풍경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여자의 흉부에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이이 심장을 지나고 있다. 핏줄은 물론 기타줄이다. 늙은 몸을 조율하는 행위는 육체에 대한 자의식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것도 '팽팽한' 핏줄들이고 보면, 육체는 자의식의 긴장으로 인해 곧 터질 것만 같다. 여자는 팽팽한 핏줄의 육체를 '조율'하며 죽어갈 순간을 가늠한다. 그것은 육체의 소리를 듣는 동시에, 죽음의 깊은 음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한다. 악사 여인은 늙은 몸을 조율하며, 그윽한 육체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첫번째 줄을 끊는 순간 "핏물이 저음으로 흐르"기 시작하며, 기억과 망각은 동맥과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텅 빈 자궁으로 흐른다."두번째 줄을 끊는 순간, "음의 물결 사이로/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돈다. 세 번째 줄, 네 번째 줄, 다섯 번째 줄에 이어 마지막 줄을 끊을 때, 여자의 몸은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이와 같은 비유는 주체의 소멸을 감각적으로 조형하는 데 성공한다. 육체가 악기라니, 그것도 기타줄이 심장을 지나는 핏줄이라니! 함기석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미세한 떨림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핏)줄을 끊는 순간, 육체 사이로 비치는 허공의 이미지이다. (핏)줄이 끊어질 때마다, 새들이 날아오르거나(2연), 구름이 흘러나온다.(4연) 해체 되어가는 육체는 '무無'로 환원되어가며, 죽음에 대한 자의식은 시간의식을 필연적인 한 쌍으로 끌고 나온다. "시간이 타버린 얼굴," 이 얼굴은 시인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이미 허공이 되어버린 악사 여인은 새로운 줄을 퉁기는 것이다. 여섯 줄을 다 끊고 난 뒤 발견하는 "0번 줄"! 거기서는 침묵이 흘러나온다. 이 침묵은 우리가 한번도 들은 바 없던, 들을 수도 없는 타자의 소리다. 0번 줄은 침묵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한다."기타에 붙은 두 손이/흰 새가 되어/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가"는 "0시의 바깥 세계"! 시인은 주체 너머 황홀한 적막의 세계를 꿈꾼다.그러나 꿈은 미적 형식에서나 가능할 뿐, 악사 시인은 여전히 "시간이 타버린" 몸을 조율할 뿐이다. 그 소리는 지금도 내 몸속에서 울린다. 심장을 지나가는 여섯 개의 붉은 현絃! 그렇다면, 내 몸은 초월을 꿈꾸는가. 꿈꿀 수 있는가. 시의 적막(초월) 끝에 남은 것은 비루한 현실의 육체 일 뿐이다. 초월과는 무관한 이 남루한 육체야말로 우리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초월은 언제나 그렇지만, 비참한 현실의 다른 얼굴이다. 그러니 악사 여인에게 애도를! <박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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