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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시와 닫힌 시 /윤기한 요즈음 ‘열린’이라는 낱말을 자주 만난다. 정치, 사회, 문화 등 온갖 분야에 이 말이 등장한다. 웬만한 행사에 오르내리는 이 ‘열린’의 형용사는 ‘열린 정치’니 ‘열린 사회’니 ‘열린 뉴스’니 하면서 그 의미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 바람에 KBS의 ‘열린 음악회’라는 방송프로그램이 인기종목으로 정착했다. 이 말의 위력을 실감한다. 바로 이 ‘열린’의 범주가 20세기 중반에 미국 시인들의 작품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1969년에 ‘봅스-메릴’이라는 출판사가 펴낸 『벌거숭이 시 Naked Poetry: Recent American Poetry in Open Forms』라는 앤솔로지에 케네스 렉스로스(Kenneth Rexroth)를 비롯한 18명의 미국시인들 작품이 실렸다. 그것이 곧 ‘열린 시’의 사화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시인들은 ‘새내기 시인들The New Poets’로 불렸다. 시선집의 편집자들이 서문에서 “로렌스가 절필하고 죽은 후 영국시단에서는 테드 휴(Ted Hughes)를 빼놓고 달리 새로운 게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이 새내기 미국시인들이 휴를 계승했다. 즉 그들이 새로운 시 형식을 추구하고 실천한 ‘1917년 시인그룹’이었다. 그들의 시는 한 마디로 운율이나 각운에 얽매이지 않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휴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영국의 젊은 시인 중 ‘1960년대 영국시의 목소리’라고 격찬될 만큼 필립 라킨(Philip Larkin)과 쌍벽을 이루는 신예 거장시인이었다. 그는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와 결혼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영국문학을 존중하면서도 로렌스(D. H. Lawrence)와 상통하는 관능적 체험을 평이한 영어의 어법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선배 시인들과 달리 독자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의
시「돼지를 바라보며」가 그만큼 쉽게 읽혔다.
돼지가 누워 있다 손수레 위에 죽은 채로 세 사람만치의 무게가 나간다고들 한다 돼지는 눈을 감고 있다 희붉은 속눈썹에 다리를 마냥 쭉 뻗치고서 ㆍ ㆍ ㆍ ㆍ ㆍ 이제 가엾이 여기기에는 완전히 죽어 있구나 그 지나온 일생, 꿀꿀대던 소리, 집요했던 이승의 쾌락을 회상하는 것은 단지 헛된 노력 요령부득처럼 생각되누나 -제1, 5연
이런 점에서 미국의 시인들은 휴의 난해하지 않은 시를 선의로 환영하고 수용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의 시인들이 선호한 신화 원형적 제재사용을 탈피하고자 했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분야까지 관심을 가졌던 이전의 시인들과 달리 자기 고백시를 시도했다. 앨런 긴스버그(Allen Ginsberg), 실비아 플라스, 시어도어 로테크(Theodore Rothke) 같은 시인들이 이에 속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의 시를 보기로 한다.
어둠이 어둠을 불러대고, 치욕이 이 잘 마련된 보스턴의 바벨탑 우리의 창문을 밀치고 다니는데 여기에 우리의 돈이 큰 소리 치면서 동정녀 마리아가 거니는 예비의 땅에 어둠을 크게 늘리고 있구나. 장미는 마리아의 광택어린 얼굴에 소용돌이 치고 물 뿌리지 않은 길 위에 떨어져 부서지누나. 바빌론의 부인이여, 가시라, 지나가시라, 한때 당신의 눈에 내가 간절했지만 플라탄 나무 위에, 길 위에 파리들이 우글대는구려. -「물가의 플라탄 나무처럼」제1연
이 새로운 시인들은 새로운 시의 형식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형식은 중요하다. 시의 형식은 시의 내용을 운반하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이 확대되면 시인의 비전도 확대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휴의 시를 존중하며 새로운 형식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은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수확한 그들의 소득이 곧 ‘열린 시’인 것이다. 이 ‘열린 시’는 무엇보다도 작시과정의 기법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기에 ‘닫힌 시’의 형식적 통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했다. 형식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자유로운 시’로의 전향을 시도한 것이다. 로텍이 말(馬)에서 떨어져 죽은 제자를 위해서 쓴 「제인을 위한 엘레지」가 그 좋은 예이다.
나는 기억한다 덩굴손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목덜미 곱슬털 그리고 그녀의 민감한 얼굴 생김새에 슬며시 띤 곤들매기 미소 그리고 언젠가 얘기하다 깜짝 놀란 만큼 경쾌한 말(言語)이 어떻게 그녀에게 튀어 올랐는지 그리고 그녀가 자기 생각의 환희 속에 어떻게 균형을 잡으며 행동했는지 ㆍ ㆍ ㆍ ㆍ ㆍ 만일 내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그대를 팔꿈치로 슬쩍 건드릴 수 있다면 나의 불구가 된 연인, 나의 수줍어하는 비둘기 이 축축한 묘지 위에 내 사랑의 말을 전하는 도다 이 문제에서는 내가 아무 권리도 없으니 나는 아버지도 애인도 결코 아니어라 -제1, 끝 연
사랑하는 제자의 생전 모습을 그리며 묘지 앞에서 그리움을 억누르고 슬픔을 삭이는 화자의 솔직한 심정을 담담하게 피력하는 내용에는 과도한 지성의 과시나 고매한 지적 유희가 없다. 까다롭지 않고 수수한 일상어로 자기감정을 토로한다. 소탈한 자유시로 독자의 이해와 공감을 편안하게 유도한다. 초사실적인(Supra-realistic) ‘벌거숭이 시’의 요체 그대로 충실한 자기고백을 들려준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이 ‘열린 시’의 원조는 195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페인의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즈(Juan Ramón Jiménez)이다. ‘어린 아이처럼 귀여운 시인, 자연과 연애하며 그 자체를 지극히 사랑한 낭만시인, 하나님과 절대자를 찾는 형이상학 시인이며 인간적 숙명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서 절망하고 파탄에 이른 모더니스트 시인'이라고 불린 그는 취향이 다양하고 다재다능했다. 그의 ‘열린 시’ 한편을 읽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가 볼 수 없지만 내 곁에서 함께 걸으면서 때때로 내가 만나려고 애를 쓰지만 여느 때에는 내가 잊어버리고 지내며
내가 말할 때 조용히 듣고만 있는 사람 내가 미워할 때 상냥한 마음으로 용서하는 사람
내가 집안에 있을 때 산책하러 나가는 사람 내가 죽을 때 내 곁에 서서 남아 있을 사람 -「나는 내가 아니다」전문
히메네즈는 현대시에 ‘관계가 전혀 없는 외래적 사항’을 배제함으로써 보다 자연스러운 자유시인 ‘벌거숭이 시’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듯이 이 시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이원구조를 수정처럼 군더더기 없이 마련해 놓고 있다. 음악에서도 그의 영향은 엄청나다.
조용히 해요 울지 말아요 그대 눈의 눈물을 닦아요 그대는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잖아요 그대 머릿속에 맴도는 건 아주 나쁜 꿈이에요 인생의 게임을 그만두라고 누군가 그대 가까이에서 그대 마음이 고통을 느끼게 속인 것이라오 여기에서도 그래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그날을 마주 보아요 그대 꿈은 사라지고... 아니면 시작이었던가? ㆍ ㆍ ㆍ ㆍ ㆍ 나는-그를 지켜볼 거야 나는-그대가 그걸 꿰뚫어 보게 해 줄 거야 나는-밤에 그대를 보호할 거야 나는-그대 옆에서 웃을 거야... 조요히 맑은 정신으로 -「조용한 제 정신」제1, 끝 절
미치광이가 제 정신을 차리고도 비록 말없이 있을지언정 사랑의 힘은 삭으러들지 않고 인생을 왕복 여행하듯 다시금 시작하자며 서로를 갈라놓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찾자고 권유한다. 솔직한 욕망의 토로가 아무런 장식이나 변용이 없이 진술되어 있다. 정녕 ‘열린 시’의 솔직성을 인식하게 된다. 한편 아메리칸 인디언의 한 종족인 수우족(Siouxsie)이 믿는 전설적 요정, 가족 중에 죽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통곡소리로 예고해 준다는 ‘레아리즈(가정의 수호신)’라는 뮤직 비디오의 가사 역시 ‘열린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당신은 시간을 벗어나 달려가고 있었다 산 밑에 황금빛 샘 당신은 레아신의 제단에서 기도하고 있었나? 하지만 오오 오 당신의 도시는 먼지 속에 있구려 친구여 오오 오 당신의 도시는 먼지 속에 있구려 친구여
우리는 당신이 숨어 있는 걸 알았어요 당신이 먼지 모래 위에 숨이 차서 누워있는 걸 알았어요 당신의 옛 영광과 모든 이야기가 끌려나와 희망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의 손으로 씻겨졌구려 ㆍ ㆍ ㆍ ㆍ ㆍ 당신의 콧구멍에 뜨겁게 타오르면서 당신의 크게 벌린 입에 퍼부어 내리고 있어요 당신의 녹아버린 육체는 쇠 찌꺼기 이불 심한 고통에 사로잡혀 있으니
오오 오 당신의 도시는 먼지 속에 있어요 나의 친구여 오오 오 당신의 도시는 먼지 속에 있어요 나의 친구여 오오 오 당신의 도시는 먼지 속에 있어요 나의 친구여 오오 오 당신의 도시는 먼지 속에 있어요 나의 친구여 -「먼지 속의 도시들」제1, 2, 5, 6연
현대문명의 황폐성을 질타하고 조롱하면서 현대인의 고통을 강렬하게 각인해 놓고 있다. 정녕 숨 막히는 생활주변이 온통 쓰레기투성이고 보니 그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몰골이 화장장의 녹아버린 시체와 다름없지 않은 것을 실측적인 팩트로 제시하고 있다. 현실고발과 더불어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화상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탈 규제, 탈 장식, 탈 정형의 ‘열린 시’를 그대로 모창하고 있다. 그럴진대 ‘열린 시’의 신진시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미국의 보수주의시인이며 신비평가로 종교적 상징주의에 경도되어 풍자와 지성과 고전을 엄격히 다룬 테이트(Allen Tate)와 역시 같은 시인이며 신비평가로 형이상학시의 영향을 받아 과거의 향수, 남부귀족주의사회를 동경한 랜섬(John Crowe Ransom)을 깔보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엔가 좋은 감옥이 없는가 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녔다”고 비아냥했다. 즉 ‘닫힌 시’의 수호자들에게 적지 않은 저항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실제로 낭만주의 시인의 선구자이며 신비사상가로 상상의 힘을 과시한 블레이크(William Blake)를 시인의 연상능력을 확대한 업적에 비추어 시인 제1세대로 꼽는다. 도서관이나 교실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고식적 시문학과 작별한 미국의 ‘민주주의 음영시인’ 휘트먼(Walt Whitman)은 현대시인의 제2세대로 분류된다. 제3세대시인은 엘리엇(T. S. Eliot), 파운드(Ezra Pound), 윌리엄즈(William Carlos Williams)로 그들은 자유시를 통해서 시를 해방시켰다. 그러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그다지 고통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 과업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엇과 파운드는 싸움하기를 싫어했다. 기성세대와의 다툼을 회피한 것이다. 블레이크는 자유의 땅을 벗어나 다시금 스스로를 ‘닫힌 시’의 세계에 감금했다. 그랬기에 테이트나 랜섬은 여기저기 헤매면서 자기들이 안주할 자리를 찾고자 한 것과 다름없는 시인들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20세기후반에 들어서면서 파운드나 엘리엇과 같은 주지적인 계열의 시를 공격하고 휘트먼이나 윌리엄즈와 같은 계열의 시를 옹호하며 그 후예임을 자인하는 새로운 시인들의 동향이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신비평(New Criticism)’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즉 주지적인 형이상학시의 전통을 통박한 것이다. 일정한 규범에 구속되어 조성되는 운율과 형식에서 해탈하고 새로운 리듬과 장단을 마련하는 자유시를 선호했다. 이런 추세에 영합한 시인들의 작품이 ‘제4세대의 시’로 명명되었다. 그 내용이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벌거숭이 시』에 참여한 현존시인들의 선언에 일관해서 나타난 말은 ‘탈 포럼’, ‘탈 테크닉’이다. ‘탈 포럼’의 지향점은 곧 ‘열린 형식(open form)’이다. 그래서 ‘연상(association)에 의해 영혼에 다가가는 새로운 회랑(回廊)을 계속 열어 제치는 것’이라면서 ‘열린 형식’을 ‘반 포럼’으로 표현하고 ‘자유시’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아주간단하다. 이 말 자체가 테크닉을 암시하지 않고 갈망(longing)을 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육성을 자기가면(persona) 속에 밀어 넣었던 엘리엇이나 파운드에 비해 이 말은 정말 ‘평온하고 소박한’ 시심(詩心)의 발성이다. 마치 중산계급의 테크닉숭배처럼 역사적인 문맥에 사로잡힐 말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탈 포럼’, ‘탈 테크닉’이야말로 신선하고도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 같은 시이면서 왜 ‘열린 시’와 ‘닫힌 시’가 되는가. 단순히 형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닫힌 시’가 반드시 정형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가 가는 길 앞에는 언제나 문명이 가로막는다. 사회가 존재한다. 이 가로막는 것들의 비판자로서 나 자신을 정립시키고자 할 때 시가 그 받침대로서 기댈 수 있는 게 상징으로서의 언어이거나 자신의 몸뚱이다. 이 ‘기대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격렬한 시적 고통이요 고민이다. 창작의 격랑을 헤쳐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단순히 ‘몸뚱이’가 아니고 ‘언어’라는 표면적 전망으로 볼 때 언어 자체가 고통이나 고민을 겪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잡 미묘한 사회에서 시인의 ‘몸뚱이’가 공중부양으로 지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낙천적인 미국식 혁명의식이라 해도 그렇다. 따라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이 시의 체재에 직접 파고 들어 갈 때 그 시가 ‘열린 시’가 된다. 시인이 시의 건너편에 떨어져 있을 때 그 시는 ‘닫힌 시’가 된다. 자신이 시의 체제 속에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만큼 안락한 경지는 없다. 사실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기상(conceit)같은 것이 배양되는 텃밭은 그렇게 평온한 곳이 아니다. 문명에 의해서 사회가 발전을 해도 시가 언어를 죽어라 하고 등을 돌리면 그 시는 ‘닫힌 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형이상학 시는 르네상스정신을 부정했다. 역사의 비판자로서 ‘시의 언어’라고 할 기상의 성쇠는 예술의 성쇠였다. 그런 의미에서 파운드와 엘리엇이 확대재생산식으로 받들었던 형이상학 시의 문제성은 오히려 더 새로워지는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마치 오늘의 우리나라 젊은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종횡무진 과잉 노출된 지적 방황의 ‘닫힌 시’, 얄궂은 로코코 형태의 ‘모조명품 핸드백’을 보듯이 말이다.
그러기에 시의 독자들이 체감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불행을 감수해야하는 우리 시단의 운명이 측은하기 이를 데 없다. 그 까닭은 어설픈 언어의 공기놀이에 있다. 부질없이 떠벌리는 바벨의 말장난에 있다. 시적 주제나 시적 진실이 결여된 데에 있다. 다시금 ‘열린 시’의 공간 확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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