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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같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여인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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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에는 그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예술도시 빈에 새바람이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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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시절,
청년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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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걸작<베토벤 씨리즈> 역사속에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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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분리파에서도 분리된 자유인,
고집과 뚝심으로 혼자의 길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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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법학>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II>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의 이면에 존재한
영원한 소년이되고 싶었던 "피터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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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 숨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게 된다. 20세기의 세기말이 19세기의 세기말과 비슷해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하여, 넥타이, 열쇠고리, 도자기, 게임용 카드, 퍼즐 등으로 다시 나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다가오는 그의 생애와 예술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긴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인상파 풍경
오스트리아 빈 만큼 유명인이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유럽의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가 이외에도 음악계에서는 모차르트, 미술계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대표적이다. 클림트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일 것이다. 오스트리아 기념품 가게에는 클림트의 그림이 새겨진 물건들이 부지기수다. 오스트리아의 빛낸 세기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 또한 흥미롭다.
빈가에서 태어나 자수성가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자서전도 없으며 그 흔한 자화상도 그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자료에 따르면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Baumgarten)에서 태어났다. 체코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이름 없는 가난한 금 세공사이며 판화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지만 여섯명이나 되는 자식들로 인해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14세(1876년)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1886~1888)이었다.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에 등장하는 초상화는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프란츠 요세프 국왕에게 특별 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게 됐다. 그때부터 빈의 유명인사가 됐고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왕궁의 벽, 체코슬로바키아의 온천 천장화까지 주문을 의뢰받게 된다. 그러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적인 공황에 빠졌다. 1895년, 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그의 화풍도 달라져 오히려 자기만의 색깔을 넣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도, 타협하는 것도 원치 않던 그의 작품 세계는 확실해진다. 특히 금을 사용한 것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가 금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키스’(1907~1908),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907), ‘다나에’(1907~1908), ‘아담과 이브’(1917~1918) 등 황금의 대작을 만들어낸다. 1918년(56세) 1월11일, 클림트는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었고 그 해 2월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됐다.
‘키스’의 주인공은 누구?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의 그림 ‘키스’의 주인공은 현재까지도 누구냐에 대해서 의견만 분분하다. 그 첫번째 추정자는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ege, 1874~1952)다. 클림트보다 열두살 어린 그녀는 클림트의 남동생 부인의 여동생으로 즉 사돈이다. 글쓰기를 그리도 싫어했던 그가 그녀에게는 약 400통의 편지를 보냈단다. 거기에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그녀부터 찾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줬다.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고 재산을 정리해 클림트의 자식들을 낳은 여인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기도 했다.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두번째 후보는 클림트의 아이까지 낳았던 짐머만(Zimmermann)이 있다. 유대인이었으며 가구공의 딸이었던 그녀는 클림트를 찾아와 모델이 됐고 두명(혹은 세명)의 아이를 낳았다. 클림트가 자기 아들의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 자식을 좋아했던 것 같으나 자유를 원해서였든, 마마보이였든, 변화를 싫어했든, 클림트는 결혼은 하지 않았다. 짐머만은 두번째 아이가 죽고 나서 사라져 버렸고 행방은 알 수 없다.
세번째는 클림트 그림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다. 유대인인 그녀는 돈 많은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이 그녀의 초상화를 원했다고 한다. 정신적인 사랑만 한 에밀리 플뢰게와는 달리 그녀와는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짐작한다.
빈에서 클림트 그림 찾기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 ‘유디트’ 그리고 인상파 화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빛도 그림자도 없는 아름다운 전원을 그린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또 제체시온(Secession, 1898년)의 지하엔 클림트의 프레스코화인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가 있다. 건물은 금색 장식 때문에 눈에 확 띈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했는데 클림트의 조언에 따라 금빛 찬란한 둥그런 월계수를 올렸다. 그래서 ‘절인 양배추 바구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외에도 빈 미술사박물관에서는 천장화나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화, ‘구 왕궁극장의 관객석’(1888년) 등을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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