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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잊혀있던 독일 시인 - 프리드리히 횔덜린
2016년 12월 10일 22시 28분  조회:6314  추천:0  작성자: 죽림

프리드리히 횔덜린


 
 
 
프리드리히 횔덜린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년 3월 20일 ~ 1843년 7월 6일) 은 독일의 시인이다. 넥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출생하였으며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당시 철학자 헤겔·셸링 등과 사귀었다.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설 《히페리온》, 미완성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하이델베르크>, <라인강>, <다도해>, <빵과 포도주> 등이 있다.

 

출생일 1770. 3. 20, 뷔르템베르크 라우펜암네카어
사망일 1843. 6. 7, 튀빙겐
국적 독일

요약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시인 실러의 격려에 따라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1779년 어머니는 다시 남편을 잃고 혼자서 프리드리히와 그의 누이 하인리케,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카를을 부양해야 했다. 교구목사의 딸로서 단순하고 다소 편협한 신앙심을 가졌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직자 지망생들은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는데,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소년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는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의 '수도원학교'(종교개혁 이전 시기부터 그렇게 부름)에 보내졌고, 이어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는 했어도 성직에 몸담을 수는 없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쉽지 않은 타협이었던 당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결코 그의 영혼을 안전하게 기대도록 해주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의 몰두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몰두하면서 그리스 신들을 해와 땅, 바다와 하늘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력들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념 대상의 양분에서 오는 긴장이 횔덜린에게는 존재의 영원한 조건으로 남았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직업에 대한 의식은 대단히 강해서, 그에게 시인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하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처음으로 가정교사직을 얻었다.

그후 여러 번 가정교사를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실러는 다른 방식으로도 횔덜린을 도와주었다. 그가 만드는 〈신(新)탈리아 Neue Thalia〉라는 정기간행물에 횔덜린이 쓰기 시작한 시 일부와 소설 〈히페리온 Hyperion〉의 일부를 실어주었다. 〈히페리온〉은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던 전사의 환멸을 그린 비가조 이야기로 미완성에 그쳤다.

횔덜린은 실러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는 1794년 예나로 가기 위하여 가정교사직을 그만둘 때 다시 실러를 만났다. 횔덜린의 초기 시에는 실러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그가운데 여러 편은 프랑스 혁명이 초기 단계에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던 새로운 세계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는 자유·인간성·조화·우정·자연 등에 대한 찬가들도 포함된다.

1795년 12월 가난 때문에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정다감한 젊은 가정교사는 주인의 부인 주제테에게 깊이 빠져버렸으며, 대단히 아름답고 감수성 있는 이 여인은 그의 애정에 응답했다. 1797년 2월 친구 C. L.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서 정말 헤매고 있던 존재와 맺어진 영원하고 행복한 성스러운 우정"이라고 묘사했다. 주제테는 그의 시와 1799년에 나온 소설 〈히페리온〉 제2권에서 '디오티마'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그녀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을 의미했다.

그들의 행복은 짧았고 주제테의 남편과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은 다음, 횔덜린은 1798년 9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야 했다. 육체적·정신적 동요 속에서도 그는 〈히페리온〉 제2권을 완성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이라는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첫번째 원고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2번째 단편과 3번째 원고도 아직 남아 있다. 이즈음 그에게 아주 민감한 신경증 징후들이 나타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1798~1801년은 맹렬한 창조력이 발휘된 시기였다. 많은 고귀한 송시(頌詩) 이외에도 위대한 비가 〈디오티마에 대한 메논의 비탄 Menons Klagen um Diotima〉·〈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가 씌어졌다.

1801년 1월 하우프트빌에서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지만 주인의 사정이 바뀌어 결국 횔덜린은 같은 해 4월 집으로 돌아갔다.

실러의 영향력으로 예나대학교에서 그리스 문학 강사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한 다음, 그는 다시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1802년 6월 주제테 곤타르트가 죽고, 같은 해 여름 횔덜린은 갑자기 보르도를 떠나 걸어서 프랑스를 통과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그가 뉘르팅겐에 도착했을 때는 돈 한푼 없고 정신도 혼란스러웠다. 정신분열증이 더욱 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간호를 받은 결과 다소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평화의 축제 Friedensfeier〉·〈유일자 Der Einzige〉·〈파트모스 Patmos〉 같은 1802~06년의 시들은 미치기 직전의 정신에서 쓴 작품들로 비할 데 없이 장엄한 묵시록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Antigone〉·〈오이디푸스 왕 Oedipus Tyrannus〉을 운문으로 완역하여 1804년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헌신적인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를 위해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라는 한직(閑職)을 얻어주었다. 싱클레어 자신도 온당한 급료를 주었으며 그의 보살핌과 동료애 속에서 횔덜린의 정신상태는 현저하게 좋아졌다. 횔덜린이 정신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던 싱클레어는 1805년 반체제활동을 했다고 무고를 당해 5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횔덜린의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고 튀빙겐의 병원에서 한차례 발작을 일으킨 다음에는 어떤 목수의 집으로 옮겨졌으며, 정신착란의 그늘 아래 이후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횔덜린은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기 2년 전에 〈고향 Die Heimat〉이라는 송시의 결말부에서 자신의 운명을 요약했다. "하늘의 불을 우리에게 빌려준 저 신들은 성스러운 슬픔도 같이 주었다네/두어라.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받도록 태어난 듯하구나."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이다. 격렬한 열정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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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 (Hölderlin, Friedrich)
횔덜린은 괴테, 실러와 함께 최고로 손꼽히는 독일의 시인입니다. 릴케와 첼란과 같은 시인들은 횔덜린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여겼으며,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횔덜린은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했습니다. 이런 그의 사상은 그가 남긴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에도 잘 반영되어 있는데요. 이 소설은 서정적 문체와 폭넓은 주제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횔덜린의 작품으로는 소설 『휘페리온』과 시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운명의 여신들에게」 등이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에게

여신들이시여, 제 노래가 완전히 무르익도록
한 철의 여름과 가을을 더 허락하소서.
제 노래의 달콤함을 마음껏 누리고 나서 
기꺼이 죽으리다.

살아서 거룩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 영혼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성스러움이 충만하면
시는 결실을 맺으리다.

그때가 되면 암흑세계의 정적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제 노래를 두고 떠나야 하더라도
결코 불평하지 않으리다. 적어도 한번은
신들처럼 살아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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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770년 03월 20일
사망일 1843년 06월 07일
국적 독일
대표작 《히페리온》,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등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의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프리드리히 횔덜린

횔덜린은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를 '가장 독일적인 시인',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했다.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상생하던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삼아 시를 쓴 대표적인 고전주의자로, 단순히 그리스 고전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평생을 정신질환자로 보낸 불우하고 광기에 찬 천재로도 유명하다.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1770년 3월 20일 독일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에 있는 라우펜 암 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수도원 관리인으로, 그가 2세 때 돌연사했다. 4세 때 어머니가 라우펜의 서기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와 재혼했고, 고크는 그로부터 2년 후 뉘르팅겐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크마저도 3년 후 피로와 폐렴으로 사망했다. 횔덜린의 형제로는 친여동생 하인리케와 이복동생 카를 크리스토프 고크가 있었다.

횔덜린은 6세 때 뉘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서 교양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4세 때 덴켄도르프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이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16세 때에는 마울브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헤르만 헤세가 14세 때 입학하여 7개월 만에 자퇴한 곳으로도,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수도원 학교로도 유명하다.

18세 때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훗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는 헤겔, 셸링 등과 교유했다. 또한 시인 동맹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히페리온》을 구상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횔덜린은 혁명이 부르짖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심취하였다. 여기에는 '경건한 자코뱅당원'으로 불리던 헤겔의 영향도 있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사건을 논평하는 정치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지만,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 이후 유혈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면서 혁명에 회의를 느꼈다. 또한 이 시기 루소, 칸트, 스피노자 등의 사상을 접하면서 점차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 졸업시험을 보고 나서 약 10년간 가정교사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횔덜린 자필 방명록
횔덜린 자필 방명록

1794년 6월, 대학 졸업시험을 치른 뒤 횔덜린은 12월부터 1년간 발터스하우젠의 샤를로테 폰 칼프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곤타르트의 아내인 주제테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주제테는 이후 《히페리온》을 비롯해 횔덜린의 많은 작품에 '디오티마'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디오티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794년에 횔덜린은 실러에게 〈히페리온 단편〉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낸 적이 있는데, 주제테를 만난 뒤 그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797년 《히페리온》 1부가 출간되었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은 《히페리온》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 철학, 정신을 비롯해 국가와 투쟁 문제, 사랑, 선(善), 미(美), 민중, 신(神)적인 것에 대한 전 방위적인 통찰이 담긴 작품으로, 그리스적인 형식미와 독일적인 사상이 융화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풍부한 리듬감, 운율법으로 소설의 형식미를 뛰어넘은, 장편소설의 관례를 따르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스 독립전쟁 전야에 히페리온이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글로, 자아와 세계 속에서 여러 모순을 경험하고 신적인 것과의 일체감 속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청년의 내면적 발전이 주요 제제이다. 이 작품에서 디오티마는 히페리온에게서 시인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의 내적 여정을 이끄는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1799년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와 《히페리온》 2부를 발표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는 5세기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로 에트나 산의 화구에 투신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시인이 세계에서 경험한 신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여 쓴 단편비극이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이는 군주제 아래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고, 민중은 지배층에 대한 예속과 그로부터의 탄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대를 말한다. 이에 신성(神聖)보다 권력을, 정신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시인이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자라고 여겼으며, 인간, 자연, 신이 조화를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사고에 의해 쓰인 대표적인 작품이 《히페리온》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다.

횔덜린은 32세 때인 1802년경부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죽을 때까지 정신병으로 불우한 생을 보냈다. 여기에는 그해 6월 주제테가 사망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1806년 튀빙겐의 아우텐리트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할 때까지는 작품 활동을 하고,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의 주선으로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806년 정신병원에 수용된 이후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횔덜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횔덜린 탑
횔덜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횔덜린 탑

1807년 《히페리온》에 크게 감명을 받은 목수 에른스트 짐머가 횔덜린을 네카 강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횔덜린은 이후 죽을 때까지 그의 집에 칩거하며 정신병자로 남은 생을 보냈다. 이 집은 후일 '횔덜린 탑'이라고 불린다.

생전에 횔덜린은 시집을 단 한 권도 내지 못했지만, 정신착란에 빠지기 전 〈그리스〉, 〈운명〉, 〈디오티마〉, 〈에테르에게〉 등 70여 편의 시와 〈시적 정신의 수행 방법에 관하여〉, 〈엠페도클레스에 대한 이유〉 등의 문학론들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또한 정신병이 발발한 초기에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비롯해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작품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짐머의 집에 칩거해서도 계속해서 시를 썼는데, 이 작품들에는 본명 대신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정신병이 발발한 이후의 작품들은 '정신병자의 시'로 여겨지며 무시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횔덜린의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1843년 6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튀빙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 릴케, 첼란 등에 의해 재발견되어 선구적인 시인으로 여겨지면서 독일의 위대한 현대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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