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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의 시인.
본명은 Eugne Grindel.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20세기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 독일군 점령, 레지스탕스, 공산당 투쟁, 연애, 시사 동향, 만남, 우정, 꿈 등 자신의 인생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919년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38년까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첫번째 주요작품인 〈고통의 수도 Capitale de la douleur〉(1926)에서는 새로운 언어기법을 실험했고, 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적용했으며,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뒤이어 〈대중의 장미 La Rose Publique〉(1934)·〈풍요로운 눈 Les Yeux fertiles〉(1936) 등을 발표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3권의 책에 실린 시들은 초현실주의 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시기에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무염시태(無染始胎) L'Immaculée Conception〉(1930)에서 정신불안증세의 진행과정을 연구했다.
스페인 내란 뒤에는 초현실주의 실험을 그만두었다. 후기 작품에는 정치적 투쟁 성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독재를 반대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 입장이 더 확고해졌다. 1942년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인간의 고통과 동지애를 다룬 작품 〈시와 진실 Poésie et vérité〉(1942)·〈독일군의 집합소에서 Au rendez-vous allemand〉(1944)·〈살 만한 가치 Dignes de vivre〉(1944) 등은 제2차 세계대전중 비밀리에 유포되어 레지스탕스의 사기를 높였다.
특히 〈시와 진실〉에 수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시 〈자유 La Liberté〉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발표한 〈모든 것을 말하라 Tout dire〉(1951)·〈불사조 Le Phénix〉(1951) 등은 시어가 간결하고 표현이 생생하여 프랑스의 대표적 서정시로 꼽히고 있다.
폴 엘뤼아르 (Paul Éluard, 1895년 12월 14일 ~ 1952년 11월 18일) 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 (Eugène Émile Paul Grindel)이다.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하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생각했다. '자유'라는 시로 유명한 시집 《시와 진실》, 《독일군의 주둔지에서》 등은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1]
파리 북쪽 생드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폐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요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2] 1911년 ~ 1913년 요양소에 있을 때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휘트먼 등 미국 시인들에 자극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가 독가스로 폐를 다쳐 평생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인 안내 갈라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하게 돼 1924년에 그를 떠났다. 1934년 마리아 벤즈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다.[3] 전후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과 쉬르레알리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때 인민 전선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로서 활약하였다. 1952년 11월 18일 과로와 협심증으로 숨을 거뒀고,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대표 시집은 《고뇌의 수도 (首都)》(1926년), 《사랑, 그것은 시(詩)》(1929년), 《정치적 진실》(1948년) 등이다. 그의 시는 불연속으로 뜻밖의 이미지와 논리를 무시한 교묘한 비유로, 쉬르레알리즘의 강한 특징을 보이면서 어휘는 점차 투명해지고 내면적인 속삭임을 상기시키는 가락으로 변했다. 불안과 고뇌, 또 연애와 전쟁을 주제로 했어도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라고 그가 읊은 바와 같이 미와 사랑과 인생의 여명에의 신뢰를 언제나 잃지 아니하였던 희유(稀有)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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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저명한 문학평론가가 시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표절 작품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과 맞물려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평론가 황현산은 지난 7일 자기 트위터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폴)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온전하게 살린 것은 이성현의 작곡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와 문학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으로 유명한 황현산은 현재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유명 평론가다. 그가 트윗에서 언급한 엘뤼아르 작품은 '자유'. 황현산의 지적대로 '타는 목마름으로'와 '자유'는 주제는 물론이고 어투 등에서도 빼다 박을 정도로 닮았다.
'내 학생 때 공책 위에/ 내 책상이며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도 눈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어본 모든 책상 위에/ 공백인 모든 책상 위에/ 돌, 피, 종이나 재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숯칠한 조상들 위에/ 전사들의 무기들 위에/ 왕들의 왕관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밀림에도 사막에도/ 새 둥지에도 금송화에도/ 내 어린 날의 메아리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과 밤의 기적 위에/ 날마다의 흰 빵 위에/ 약혼의 계절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하늘색 누더기 옷들에/ 곰팡 난 해가 비친 못 위에/ 달빛 생생한 호수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들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은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또 배들 위에/ 넋을 잃은 멧부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구름들의 거품 위에/ 소낙비의 땀방울들 위에/ 굵은 또 김빠진 빗방울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형상들 위에/ 온갖 빛깔의 종들 위에/ 물리적인 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잠깨어난 오솔길들 위에/ 뻗어나가는 길들 위에/ 사람 넘쳐나는 광장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켜지는 램프 불 위에/ 꺼지는 램프 불 위에/ 모여 앉은 내 집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겨울의 또 내 방의/ 둘로 쪼개진 과실 위에/ 속 빈 조가비인 내 침대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주접떠나 귀여운 내 개 위에/ 그 쫑긋 세운 양쪽 귀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축복 받은 넘실대는 불길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사이 좋은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내미는 손과 손마디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놀란 얼굴들의 유리창 위에/ 침묵보다도 훨씬 더/ 조심성 있는 입술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은신처들 위에/ 허물어진 내 등대들 위에/ 내 권태의 벽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나는//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 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다시 돌아온 건강 위에/ 사라져 간 위험 위에/ 회상도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리고 한 마디 말에 힘입어/ 내 삶을 다시 시작하니/ 너를 알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네 이름지어 부르기 위해// 오 자유여'(폴 엘뤼아르의 '자유' 전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조국은 하나다/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사람들이 주고받는 모든 언어 위에/조국은 하나다라고/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조국은 하나다라고/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최초의 말/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최초의 행동/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조국은 하나다 라고/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기쁨과 슬픔을 나눠가지는 인간의 길/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레의 양식이여///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라고///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조국은 하나다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올린/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 /조국은 하나다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가진 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전문.
=《덧글들》=
박남철 (2007-**-08 23:15:10)
내가 남주 형을 처음으로 본 것은 남주 형이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작가회의'의 무슨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인가였다. 더 정확하게 얘기해보자면, 인사동 '학고재화랑' 위쪽의 어느 호프집에선가였을 거다.
더욱 정확하게 얘기해보자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는---나는 어느 선배에게든, 후배에게든, 처음 보는 선후배들에게는 일부러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하지 않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시건방진 처사였다고 아니 반성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남주 형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그저 먼발치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화장실에 먼저 와서 소변을 보고 있던 남주 형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남주 형의 왼편의 소변대로 다가가서 내 힘없이 질질질 흘러내리는 소변을 잠시 보다가, 문득, 내 오른편 소변대에서 세찬 오줌발 소리로 소변을 보고 있던---저 오줌발 소리가 캄캄 감옥에서 10년씩이나 썩은 사람의 오줌발 소리일 것이란 말인가!---남주 형 쪽으로 고개를 들어 가만히 한마디 던져보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남주 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고개만 바로 들어 나를 바라보며, 소년처럼 수줍게 웃기만 하던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보는 듯한, 그 거만하지 않던 눈길! 남주 형의 눈길은 이미 나를 잘 인지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눈길이셨던 것이다!
박남철 (2007-**-09 10:26:23)
위 본문에다 인용해본, 세계적인 세 시인들의 대표시들 중에서, 지하 선생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창조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변용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에 속할 것이다.
'FREEDOM'도 아닐, 'LIBERTY'로서의 '자유', 프랑스 적인, '불란서 영화 같은', "불란서 흰빵 같은 자유"를, 바로 저 우리의 6, 70년대의 처절한 현실이었던 "타는 목마름의 민주주의의 자유"로 변용시켜놓은 경우(?)일 것이다.
박남철 (2007-**-09 14:03:47)
그리하여, 지하 선생의 바로 저러한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되었기에, 남주 형의 저 타는 듯한 아지프로로써의 「조국은 하나다」라는 통일 시의 데마고기도 성립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주 형도 명백히 그 자신의 시의 서두에서부터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라고, 바로 '공산당선언'적인 어투로, 지하 선생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공공연하게 비판하면서도, 수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주 형도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잘 의식하면서, 미친 듯이, 작품을 써내려갔을 것이지만, 만약 지하 선생의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남주 형 역시 「조국은 하나다」를 쓰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하 선생의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남주 형의 저 "위대한 반동적 통일 시" 「조국은 하나다」는 한낱, 불란서어의 콧소리 가득 섞인, '슬로건' 아닌, 음색들을 너무나도 불란서적으로 잘 표현해놓고 있을, 폴 엘뤼아르의 세계적인 대표작 「자유」에 대한, 지루하고도 지루한, 열거법과 반복법만이 뒤섞인, 한낱 표절작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박남철 (2007-**-09 14:29:17)
그리하여, 이제와, 우리의 문학 작품, 특히 시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그 창조적 변용", 또는 "그 창조적 비판 및 그 변용의 확산" 및 "'포절'이냐, 표절이냐" 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그 문학사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매우 중차대한 문제들이 되어주고 있다고 아니 말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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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의 대표 시인인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쓰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정치색을 강하게 품은 작품을 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다. 평화와 자유, 정의를 관통하는 엘뤼아르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자유'다. 1942년 영국 공군은 엘뤼아르의 시집 '시와 진실'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뿌리기도 했다. 이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이 '자유'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가 엄혹한 유신시대의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한 작품. 숨이 막힐 듯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절규하는 문체로 풀어낸 한국문단?대표적인 사회참여시다.
사실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주장은 진작 제기됐다. 시인 노태맹은 올 초 한 지방지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시가 워낙 유명한 만큼 시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왜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전태흥 미래티앤씨 대표가 2013년 1월 한 지방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며칠 전 페이스 북에서 친구가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저항시인(무엇에 저항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불린 김지하의 대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교한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김지하의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를 베낀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자유'라는 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이 김지하가 그 시를 표절한 것을 알면서 침묵한 것은 표절의 명백한 공범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 친구는 우리가 그동안 김지하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주저해 왔던 것은 젊은 날 자신이 지켜왔던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와 같다고 썼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에 모두들 표절인 걸 알고서도 침묵했다는 황현산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한 문인은 "표절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는 이응준의 지적은 김지하의 사례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은 최근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란 글을 기고해 신경숙의 소설 '전설' 중 한 문단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憂國)'의 한 문단을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찬미 기자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김민기 곡, 양희은 노래 '상록수'
문학작품에 관해 이런 것이 표절이 성립하는 지는 내가 잘 모르겠다. 단언할 수 있는 건 패러디라는 것도 그렇고 일부 따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드는데 그렇게 하면 저자가 그런 사실을 다른 방법을 통해 알리는 것이 망신을 피하는 길이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대로 따온 구절도 있지만 새로 덧붙여 놓은 것도 있으니 청출어람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단, 이것이 김지하의 대표작이라면 그것 역시 사기의 일종이라는 것까지는 나도 인정할 수 있다.
또, 폴 엘뤼아르의 "자유"도 시인의 대표작으로 2차대전 중 지어져 영국항공기로 뿌려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외국에서 이렇게 널리 알려진 게 한국사람들만 모른다는 이유로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다. 모르는 한국사람들에게는 사기일 수 있겠다. 한 작가의 대표작이 일종의 패러디(?)라는 것은 뭔가 우스워 보이고, 그가 한국문학의 대표작가라면 솔직히 "국격"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다. 문학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일개 독자인 나로 김지하를 기억하는 것은 최인호 작가가 몹시 칭찬하던 시인이라는 것 뿐이다. 또한, 일본 같이, 얄밉고 한편으로 증오스런 노릇이지만,1분명 문화적으로는 한국이 넘볼 수 없는 동양의 대표주자2인 나라에서 그를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해왔다는 점도 내가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다.3 적어도 한 때 한국문화예술인들이 그렇게도 베껴왔던 일본 것은 그가 베끼지 않았다는 증거겠다. 하긴, 주작업이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시였으니 그런 일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거의 드물게도 현대적 풍으로 쓴 대표적 하나가 그런 쪽이라니 실망이 되는 건 사실. 앞으로는 이 시에 대해 작가나 소개하는 사람들이나 폴 엘뤼아르의 "자유"도 함께 언급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폴 엘뤼아르도 엘뤼아르지만,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도 비슷하다. 마지막에 도데의 소설에서 하멜 선생은 마지막으로 목이 메인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크게 쓰는 장면이 있다.
문학도 좋고 뭣도 좋지만 우리는 먼저 우리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아직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해 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누구누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한국문학도 덩달아 대단해 진 줄 생각하지만 정말 아직까지는 우리 문학 수준이 이 정도 밖에는 안된다. 아니 수준이라기 보다는 이것은 혼탁함의 척도에 더 가까운데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지 않는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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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엘뤼아르 시모음
엘뤼아르 1895~1952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또한 열렬한 저항시인으로 비교적 다양한 문학적 생애를 보낸 엘뤼아르는
1936년 스페인 내란 이후 뒤늦게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전쟁 중 항독운동에 가담 하였다.
하지만 다른 참여시인들 보다는 훨씬 너그럽고 온건하여, 순수한 시인으로서의 기질과 천분을 가졌고
스페인 내란 이후 매우 전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어딘가 체념의 여지가 깃들여 있고, 초현실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요작품: 고뇌의 수도(Capitale de Douleur)1926, 직접적인 인생(La Vie Immediate)1932, 시와 진실(La Poesie et la verite)1942 등
경쾌한 노래
나는 앞을 바라보았네 군중 속에서 그대를 보았고
밀밭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나무 밑에서 그대를 보았네.
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내 모든 고통의 밑바닥에서
물과 불에서 나와 내 모든 웃음소리가 굽이치는 곳에서
여름과 겨울에 그대를 보았고 내 집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두 팔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꿈속에서 그대를 보았네.
나 이제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
한 순간의 거울
그것은 빛을 분산시키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외모와는 다른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방심할 여유를 앗아가버린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다,
형태가 없는 돌, 움직임이 있고 시각이 있는 돌처럼,
그리고 그것의 섬광은 그 어떤 갑옷이나 그 어떤 가면도 일그러질 만큼 찬란하다.
손에 잡혀 있었던 그것은 손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는 바람과 뒤섞이고, 하늘은 진리와
사람은 현실과 뒤섞인다.
자유
국민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어늬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그리고 미소를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듯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나이는 없이
숲속을 향하여 우리는 가까이 간다
아침의 거리를 지나서폴 엘뤼아르, 안개의 계단을 올라보라
우리가 가까이 가면
대지의 가슴은 파르르 떨고 여전히 다시 태어나는 하루
하늘은 넓어지리라 잠은 폐허 속에서
휴식과 피로와 체념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산다는 일은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까 대지는 싱싱한 육체의 모습을 회복하고
바람은 가라앉아 우리의 눈 속에 태양과 어둠은
변함없이 흐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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