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우리의 신부(新婦)다.
너는 우리의 운명이다.
너는 우리의 호흡이다.
너는 우리의 전부이다.
아하, 내 사랑 내 희망아, 이 일을 어쩌리.
네 발등에 향유를 부어 주진 못할망정,
네 목에 황금의 목걸이를 걸어 주진 못할망정,
도리어 네 머리 위에 가시관을 얹다니,
가시관을 얹다니......
아하, 내 사랑 내 희망아, 세상에 이럴 법이...
우리는 못났구나, 기막힌 바보로구나.
그러나, 그렇다고 버릴 너는 아니겠지, 설마.
아하, 내 사랑 내 희망아, 내 귀에 네 입술을 대어 다오.
그리고, 다짐해 다오, 다짐해 다오.
(김동명·시인, 1900-1968)
+ 훈민정음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세종대왕의 말씀
세계 60여국에서
400여개 대학에서
배우는 과학적이고 뛰어난
대한민국 글자
얘들아!
자음 모음 합해서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아름다운 글로
아름다운 동시를 쓰자.
우리말, 우리 글이 있는 나라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얘들아!
땅, 하늘, 바다, 산
꽃, 토끼, 개, 물고기
자유로운 한글로 표현해보자.
(박선자·시인, 전남 고흥 출생)
+ 한글
한글은
우리말의 집이다.
하늘의 뜻을 받아
우리말의 집을 지으신 분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를 드린다.
영혼의 말을
적는 글은 한글이다.
내가 살아온
평생
나는 한글에서
우리들의 얼을 찾았고
겨레의 음성을
또 거기에서 들었노라.
지금 그는 어찌되었을까
43년 동경 신지꾸
작은 우리의 책방에서
최현배님의 '우리말본'을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성도, 이름도, 고향도 모르면서
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그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알고 싶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주시던
한글
그 글자 속엔
어머님의 음성과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도 숨쉬고 있다.
한글의 모국어의 집이다.
(황금찬·시인, 1918-)
+ 한글 이름
쓰기 좋고
읽기 좋은
과학적인 글
우리 한글
한글을 사랑해서
아들 이름도 한글로
큰 소나무처럼 자라
늘 푸르라고 "한솔"
우주처럼 큰마음의 사람 되라고 "한울"
이름 예쁘다고
누가 지었냐고
할 적마다
어깨가 으쓱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한글 이름
한글날 맞아
더욱 자랑스럽네.
(이문조·시인)
+ 모국어
징용으로 끌려간 동포들이 일본 땅 탄광 합숙소 벽에다
'고향에 가고 싶어요'라든가 '배가 고파요'라고 모국어로 쓴 말들이
언뜻언뜻 와 닿으면서 동포들의 탄 묻은 얼굴에 맺힌 눈물방울이
구주 하늘 아래 얼어붙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마음이 몇 안 되는 글자를 벗어나
마구 가슴 벅차게 소용돌이치는 것은
내 가슴이 식지 않은 화로처럼 다독일수록
살아나는 불씨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까
내가 수없이 뱉어내는 말들이
그들의 절실한 말에 비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서투른 붓끝으로 밝히는 내 가슴은
아직 모국어의 깊은 맛에 닿지 못하고
껍질만 벗기고 있는 것인지
(강영환·시인, 1951-)
+ 말의 빛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모국어
엄마(母)가
생명의 근원이듯이
모국어(母國語)는
겨레의 뿌리.
남의 나라 말이 아닌
순수한 우리말로
갖가지 감정을 표현하고
시를 쓸 수 있다는 것
크나큰 기쁨이다
놀라운 축복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아가들의 첫말
'엄마'라는 두 글자는
또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가.
(정연복·시인,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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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일본식 이름: 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슈[*]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생애 초반
1.2소년 시절
1.2.1중학 시절
1.2.2연희전문 시절
1.3일본 유학
1.3.1창씨개명
1.3.2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1.4투옥과 최후
1.5사후
2작품
3경향 및 평가
4학력
5상훈 경력
6기념관과 기념물
6.1기념관
6.2기념물
7가족 관계
8기타
9대중 문화에 나타난 윤동주
9.1방송
10같이 보기
11주석
12참고 자료
13바깥 고리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2]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3]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기숙사인 핀슨홀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는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소년 시절[편집]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4]
중학 시절[편집]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편집]
연희전문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유학[편집]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4]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5]
창씨개명[편집]
서시 육필 원고 (1942년)
윤동주의 원고 원본
창씨개명, 서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6]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7][8] 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참회록을 썼다.[9]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편집]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10]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편집]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향년 29세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 말기에 있었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11]
사후[편집]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의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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