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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1954. 9. 27 충북 청주에서 출생.
도종환 시 모음
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읍니다
저녁숲
-스콧니어링을 그리며
모란꽃도 천천히 몸을 닫는 저녁입니다
같은 소리로 우는 새들이 서로 부르며
나뭇가지에 깃드는 걸 보며 도끼질을 멈춥니다
숲도 오늘은 여기쯤에서
마지막 향기를 거두어들이는 시간엔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어제 심은 강낭콩과 감자에게도
다람쥐와 고라니에게도 편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
흩어진 장작을 추녀 밑에 가지런히 쌓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주류사회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난 뒤
버몬트 숲 속으로 들어갈 때는
진보에 대한 희망도 길도 잃었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지만
그 대신 거대한 광기와 파괴와 황폐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이마를 씻고
바위 위에 앉아 생각해 보니
당신처럼 오늘 하루 노동하고 읽고 쓰고
자연과 사람의 좋은 만남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나무토막과 잔가지들을
차곡차곡 쌓듯 내 삶도 이제는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가 잡힐 것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그리고 간소하게 저녁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둠이 숲과 계곡을 덮어오자
땅 위에 있는 풀과 나무들이 일제히 별을 향해
손을 모읍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명을 지닌 한 가족이며
크고 완전하고 넓은 우주의 품에 들어
넉넉하고 평온해지기를 소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밤은 아직 구름에 가린 별들이 많고
내 마음에도 밤안개 다 걷히지 않았지만
점차 간결한 삶의 단순성에 익숙해지고
일관성을 잃지 않으며
내 눈동자가 우주의 빛을 되찾으면
별들이 이 골짜기에 가득가득 몰려올 것임을 믿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것들 중에
빠져나갈 것은 빠져나가고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은 돌아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얼굴도 웃음도 제 본래 모습을 되찾고
의로움도 선함도 몸속에서 원융하여
당신처럼 균형 잡힌 인격이 되어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여름 산도 가을 숲도 다 기뻐할 것입니다
생의 후반에 당신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생사의 바다를 건넌 곳에서도 편안하시길 빕니다
숲 속에서도 별 밭에서도 늘
완성을 향해 가고 있을 당신을 그리며
퇴계의 편지
일찍이 저보邸報를 보고서
고비皐比를 걷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믐께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정했다니
축하할 일입니다
저는 지난 해 돌아와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 받지 못했습니다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글을 올려
이 소원 이루어지면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지며
글은 더욱 맛나고 가난은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 깨끗하고자 의리를 어지럽혀선 안 되지만
의를 잊고 벼슬만 좇아서도 안 된다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때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몸을 깨끗이 하고 의를 행할 뿐이지
화복은 논할 바 아닙니다
다만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데 용감했던 것이 실패한 까닭이니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니고
담금질해 발뒤꿈치 땅에 단단히 붙어
허명과 이익과 위세에 넘어가지 않길 바랍니다
원컨대 밝은 덕 높이는 노력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하기로 약속합시다
삼가 편지를 올려 이별을 대신합니다
경오 맹춘 스무 나흘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 고비를 걷었다는 건 스승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성균관 대사성의 직분에서 물러났음을 가리킨다.
* 경오년은 157이문재 시인은 이 시집의 발문에서 모든 시집에는 문이 있으며 이 시 「산경」이 바로 그 일주문이라고 했다.
이 서시는 매우 단정하며 ‘뼈의 언어’가 범종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산 아래 낡은 언어, 오래된 언어, 병든 언어를 내려놓자, 자연이 ‘나’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
낡고, 오래되고, 병든 언어가 곧 도종환 시의 “뼈의 언어”가 아니던가. 여기서 “뼈의 언어” 언표가 되어야 옳다.
이 “뼈의 언어”는 단지 침묵의 형식을 통하여 말의 시위를 자연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에서 뼈의 언어는 무엇일까?0년 선조 3년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고봉 기대승에게 쓴 편지이며 황은 퇴계선생 자신의 이름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 개 햇살을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 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빨래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머물던
비구름이 몸을 풀어 올라갔다가는 다시
산허리를 감싸 안고 낮게 내려오길 이레 째
선방 뒤를 돌아 개울물이 소리치며 흘러간다
먹물 묻은 손을 씻어 낸 뒤
옷가지를 물에 담가 헹군다
동백꽃 붉은 꽃송이가 머리 째 툭 떨어진다
아직 고운 자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꽃이
땟물과 섞여 떠내려간다
내가 지은 업이 물에 씻겨 가길 바라며
비누칠을 하다가 아름답던 날들까지도
흘려보내야 함을 안다
선업도 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자만과 욕심과 허영의 얼굴이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속옷을 빨아 다시 향기롭기를 바라기보다
선업도 악업도 햇빛에 다 날아간 뒤
그저 물 마른 냄새만 남길 바란다
다만 지워지고 씻기어 텅 빈 우주의 흔적이
거기 와 머문다면 좋겠다
나마저도 씻겨 내려가
마음자리에 허공만 남는다면
고요히 비어 있는 충만 가운데
바람소리 물소리 소리 없이 스민다면
종이배 사랑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을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낮선 섬의
감탕받에 묶여 있는 시간이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 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처처불상
수펑나무 뿌리가 석굴을 덮으며
천천히 폐허가 되어 버린
따프롬 사원 무너진 회랑 한 귀퉁이에
잘려진 돌부처의 발 두 개를 주워다 놓고
발 아래 촛불과 향을 피워 놓은 채
늙은 보살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처처불상
발목도 그녀에겐
부처의 전부인 것이다
무너진 절 틈에서 걸음을 멈춘 채
오랜 적멸에 들어 있던 부처의
발을 주워 가슴에 안고
보살은 얼마나 간절하였을 것인가
사랑하면 부처 아닌 게 없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빈 방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먼 산이 어둠을 천천히 빨아들이는 것이 보일 때
저녁 하늘이 어둠의 빛깔을 몸 가득 머금는 것이 보일 때
늘 가던 길에서 내려 샛길로 들고 싶다
어디 종일 저 혼자 있던 빈 방이 나를 좀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면 좋겠다
적막함이 낯설음을 말없이 받아주는 방
적막의 서늘한 무릎을 베고
잠시 누워 있게 해주면 좋겠다
그동안 살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였으므로
말없이 입을 닫고 있어도 불편해 하지 않고
먼저 지쳐 쓰러진 적이 있던 그가
오늘 지친 모습으로 들어온 하루치의 목숨을 위해
물 끓이는 소리를 들려주면 좋겠다
처음엔 모두들 이렇게 어색한 얼굴로
쭈뼛거리기도 하다가 사랑을 알아 가는 것이므로
문 밖으로 천천히 내려오던 어둠이
멋쩍어 하는 우리의 얼굴을 잠깐씩 가려주기도 하고
우리가 늘 타향을 전전하며 살고 있으므로
고향을 너무 멀리 떠나왔으므로
고향이 어딘지 묻는 것만으로도 말문이 트이고
비슷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 하나 추억처럼
꺼내놓아도 서로를 즐겁게 긍정하고
내 몸을 꽁꽁 묶으며 나를 긴장시키는 게 일이던
끈들을 느슨하게 풀고
비슷한 사투리만으로도 익숙한 입맛을 만나는 저녁시간
몇 잔의 편안함이 술 향기로 번져오는
순간 순간을 나누어 마시며
웃음이 번져 가는 사람 하나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어둠 속에서 만나는 객창감이 좋고
낯선 시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른 팔로 팔베개를 하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면
잠시 사라수나무 그림자 몸에 와 일렁이고
내 겉옷을 들어 잠든 나를 덮어주는
이름 모르는 사람 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비둘기
양식을 하늘에서 찾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광장의 돌바닥 위에 먹이가 뿌려지면
새들은 일제히 날개를 펴고 지상으로 날아든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먹이는 푸석푸석하고 따듯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긴장과 저항도 없고
씨앗을 지키는 떫고 시큼한 과육도 없는
밋밋한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부리를 쪼아대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깊이 배었다
부피는 작지 않지만 허기를 메꾸기엔 부족한
지상의 양식들을 입안에 넣었다가 목이 메어
뱉어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순간들을 자주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발갛게 언 발로 땅을 차곤 하지만
그것이 날아오르기 위한 발돋움은 아니다
오늘도 상가 옥상에 재푸른 몸을 기대고 있거나
가등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지만
날개는 오르는 일보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비행에
길들여져 있다 하늘을 다 잊은 건 아니라고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어 보지만
비대해진 몸은 지상에 던져지는 먹이를 향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의 건물 아래쪽 허공만을 제 영토로 축소시킨 채
크고 푸른 하늘은 접어버린 비둘기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 비둘기떼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여도
내 가슴속에 비가 내리고 있는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지
금방 알아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노랫소리를 듣고는
내가 아파하고 있는지
흥겨워하고 있는지
금방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 마음의 음색과 빛깔과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나를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내 안의 시인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 소리
풀잎 위로 뛰어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끌려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려가던
맑은 귀를 가진 시인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소리에 묻혀 사는가
바알갛게 물든 감잎 하나를 못 버리고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 두던 고운 사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 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속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 1행, 18-19행은 S. Freud가 한 말을 인용한 것임
전 재산
-김군자 할머니 말씀
외로운 거 그게 제일 힘들지 뭐
어려서 부모 잃고 열일곱 살 때 일본 군대 끌려가
악몽 같은 삼 년을 위안소에서 보냈지
행인지 불행인지 사랑한다는 사내 하나 있더니
저 먼저 목을 매고 딸은 다섯 해를 살다가 죽고
술집 식모살이 막일 단추 끼우기
그렇게 살았어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뼈 마디마디가 저려오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살이 시리고 힘이 드는지
나만 힘든 건지
남들도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픈지
돈을 왜 다 내어놓느냐고?
나도 그애들처럼 고아였잖아
정선에서 장사할 때 모은 돈하고
지원금.....
안 쓰고 모은 건데
나무 적은 돈이라 미안해
전 재산이랄 게 있나
요란 떨 거 없어
지금도 아프지 별 차도가 없어
시간도 얼마 안 남은 것 같고
.............혼자 살았으니까
외로운 거 그게 제일 힘들었지 뭐
자작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못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별
새벽하늘에 들어가지 못한
별 하나 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가장 고요해지는 때를 기다려
우리들 가장 가까운 곳까지 내려온 별인지도 모르지요
오손도손 사랑하고 가슴 아파도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다
모두들 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돌아갈 때에
너무도 가까이 내려와 오래오래 혼자 눈물짓다가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진 별인지도 모르지요
남들보다 늦게까지 한 사람을
사랑하던 마음인지도 모르지요
길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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