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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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가 남긴 교훈
2016년 04월 20일 17시 54분  조회:4042  추천:1  작성자: 김정룡

  육룡이 나르샤가 남긴 교훈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방원 덕분
 
여말선초(麗末鮮初) 역사를 다룬 사극이 여럿 있다. <용의 눈물>, <정도전>, <뿌리 깊은 나무>, 얼마 전 성황리에 방송된 <육룡이 나르샤> 등등이다.

<육룡이 나르샤> 제목은 본래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부터 세종대왕까지 여말선초 이 씨 왕가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에 있는 구절이며 육룡은 목조(이성계의 고조부), 익조(이성계의 증조부), 탁(도)조(이성계의 조부), 환조(이성계의 아버지), 태조(이성계), 태종(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등 조선 왕조의 조상 넷과 왕을 지낸 두 인물을 뜻하는 말이다. <육룡이 나르샤> 사극에 등장하는 육룡은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분이, 무휼 등 개국 주역이며 이 중에서 정도전과 이방원이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

만약 정도전이란 역사인물이 없었다면 고려의 수명이 더 길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도전이란 인물이 나타나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새로 세웠다.

우리는 조선개국을 주도한 정도전이란 인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려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는 종교적으로는 불교 천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귀족세력이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강했다. 958년 광종이 귀족세력을 약화하려고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세력을 키웠으나 귀족들이 여전히 나라의 지배세력이었다. 최씨 일가 무신정권 80여 년 동안 왕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을 그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여말(麗末)에 이르러 정몽주와 정도전이라는 두 걸출한 유학자가 배출되었고 이 두 거목은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정몽주(1337~1392)는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한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한편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機智)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정도전(1342~1398)은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고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해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둘 다 총명과 재질이 뛰어나 여말 가장 주목 받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이라면 정몽주는 온건파, 정도전은 급진파였다. 오늘 한국정치에 비유하자면 정몽주는 보수이고 정도전은 진보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유교사상이 골수까지 침투된 인물들이지만 추구하는 길이 달랐다. 정몽주는 유교사상의 가장 근본인 역성혁명불가를 목숨 바쳐 지켜가려는 반면에 정도전은 썩어빠진 고려를 버리고 백성을 위해서라면 역성혁명도 불사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정도전이 오로지 백성이 편안하고 잘 사는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는 나라를 구상하고 백성을 중히 여겨 계민수전(計民授田) 같은 개혁을 밀어붙인 것은 그의 유배생활에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왕권을 약화하고 대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군신조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등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이상주의자였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서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에 비춰보면 본래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씨조선 개국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건국 후 왕권강화에 가장 큰 벽인 정도전을 살해함으로써 이씨조선의 정착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성계가 가장 아끼던 인재였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그를 끝까지 설득하여 함께 새로운 조선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오히려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를 무너뜨리려고 하자 이방원은 아버지 문병 왔다가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방원은 이씨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과 한 배를 탔다가 정도전이 너무 안하무인으로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들자 두 사람은 갈등이 극에 달했다. 정도전은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백성을 위하고 종묘와 사직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눈에는 정도전도 역시 권력에 눈이 어두운 대신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이 하면 정치고 내가 하면 사심이냐? 너무 자신을 합리화하여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야망을 내가 박산 내 줄 것이다.” 이방원의 말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경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고집하다가 결국 목숨을 이방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방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책동하여 책봉한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죽여 버리고 자신은 손에 너무 피를 많이 묻혀 직접 왕위에 등극할 수 없음을 알고 둘째 형을 왕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둘째 형은 자신도 언제 이방원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주동적으로 왕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다.

이방원은 재위 시에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셋째 아들 이도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도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총명이 뛰어나고 재주가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정적이 많으면 그에 휘둘리다 보면 정사는 엉망일 것이고 새로운 업적은 꿈도 꿀 수가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선왕인 아버지 이방원 덕분에 걸림돌이 없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문화 분야에서 집현전 설치, 훈민정음 창제하였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발명하였다. 경제사회 분야에서 조세의 공평화, 노비의 지위를 개선하였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국가주권 확립, 영토 확장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위대한 군주로 칭송되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은 나름대로 당시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고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종의 업적은 선왕 이방원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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