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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2019년 02월 24일 20시 56분  조회:1160  추천:0  작성자: 강려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이미지의 4원소론
 
바슐라르는 이러한 이미지의 물질성에 착안하여, 모든 이미지들을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라는 기준에 의해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네 가지 원소의 이미지들을 기준으로 5권의 책을 썼는데 —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대지의 휴식의 몽상』 — 이 5권의 물질적 이미지에 대한 연구를 흔히 '이미지의 4원소론'이라 부른다. 『물과 꿈』의 서문에서 바슐라르는 다음과 같이 물질적 상상력에 의한 시학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상상력의 영역에서 불, 공기, 물, 흙의 어느 원소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적 상상력을 분류해주는, 4원소의 법칙을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모든 시학이 물질 본질의 구성요소 — 그것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 할지라도 — 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시의 영혼들을 가장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원초적인 물질 원소에 의한 분류임엔 분명하다. 하나의 몽상이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 충분한 항구성을 가지고 계속되기 위해서, 또한 그것이 단순히 덧없는 무위(無爲)의 시간이 아니기 위해서는 자신의 물질을 찾아야만 하며, 어떤 물질 원소가 자신의 실체, 규칙, 또는 특별한 시학을 몽상에 제공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 원소의 조합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4원소론은 사실 바슐라르가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4원소론은 원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이래로 서구에서 널리 확산되어 온 인식론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저서 『자연에 대하여』에서 만물의 근원을 흙, 물, 불, 공기라고 주장했다.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4원소가 '사랑'과 '미움'에 의해 결합하거나 분리하여 세계의 여러 가지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물과 포도주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잘 섞이는데 비해 물과 기름은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잘 섞이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는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기에는 4원소가 혼합된 구형(球形)의 물체가 만들어지고, 미움의 지배가 커지는 시기에는 세계와 생물이 만들어지고, 미움이 완전히 지배하는 시기에는 4원소가 각각 분리된 4개의 덩어리가 만들어지고, 사랑의 지배가 커지는 시기에는 세계와 생물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생각을 발전시켜 더욱 구체적인 4원소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는 모든 원소는 따뜻함과 차가움 그리고 건조함과 축축함의 네 가지 기본 성질 중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4원소는 기본 성질의 조합이 달라지면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원소 전환설의 내용을 포함하였다. 예를 들어 물에 불이 작용하면 공기가 되고, 불이 식으면 흙이 된다는 식이다. 이 세상의 물질은 4원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물질도 인위적으로 조합을 바꿔주면 물질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착상은 훗날 중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4원소론은 동양의 오행설(五行說)과 유사한 점이 많다. 오행이란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 원소를 뜻한다. 동양에서는 자연현상을 이 오행의 원리로 설명하였다. 오행 사이에는 서로 도와주는 성질과 다른 것을 이기는 성질이 있어서, 물질을 이루거나 물질이 변하는 데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물을 먹고 사는 나무는 불에 타버리고, 불은 흙의 모태이며, 흙은 금의 뿌리이다. 또 금속에서는 물이 나며, 물은 나무가 살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흙에서 양분을 취하는 나무는 흙을 이기지만 금속에게는 지며, 나무에게 지는 흙은 물을 이긴다. 또 금은 물을 이길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서로 서로 연결되면서 영원한 순환의 고리를 이룬다.
 
4원소론은 과학적 진실의 차원이 아니라 서구적 세계관의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을 객관적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사상체계로 이해하듯이, 서구의 4원소론은 서구인의 상상계를 구성하는 체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4원소론의 네 원소는 네 개의 원소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원소를 뜻한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이 네 원소의 결합이므로 4라는 숫자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숫자이다.
 
역으로 5번째 원소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소를 뜻한다(뤽 베송의 「제 5원소」라는 영화를 상기해 보라.). 이 4원소론은 고대의 우주론이나 중세의 연금술 이외에도 폭넓게 서구인들의 상상계를 차지해 왔다. 이와 같은 4원소론을 바슐라르가 자신의 이미지 연구에 적용시킨 것은 그것이 과학적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서구인의 상상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이기 때문이었다.
 
4원소론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인간 정신의 '오류'이며, '인식론적 장애물'이지만, 상상계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꿈, 즉 인간의 몽상의 틀을 보여준다. 과학적 오류인 4원소론은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진실인 것이다. 이 이미지의 4원소는 각기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알코올이 들어있는 음료인 '펀치'는 물과 불의 결합이고, 진흙은 물과 대지의 결합이다.
 
바슐라르는 문학 이미지를 연구하면서, 문학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가들도 이 4원소들 중의 하나의 원소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인은 자신이 애호하는 원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반영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프만의 작품에는 불에 대한 이미지가 주로 나오며, 에드가 포우나 스윈번 같은 작가들은 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다. 또 대기의 이미지가 강한 작가로는 니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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