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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이정우
2018년 02월 21일 14시 54분  조회:1946  추천:0  작성자: 강려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 이정우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독창적인 독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틀을 만들어나갔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사 이해와는 상반되는 독해를 내놓음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에 대한 니체와 베르그송,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구조주의와 푸코 등,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사 독해를 통해서 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실은 『차이와 반복』(1968)과 『의미의 논리』(1969)에 나타나 있다. 

1969년 전투적인 정신의학자이자 정치적 투사이기도 한 펠렉스 가타리와 만나 들뢰즈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이른바 ‘욕망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활기찬 사유를 『안티오이디푸스』(1972)에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는 그 속편이라고 할 『천의 고원』에서 이른바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여러 뛰어난 연구들을 남기기도 했다.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의 극복: 리좀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상은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 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어가면서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주하는 장(場)이다. 들뢰즈는 책 자체도 이런 리좀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곧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기초 개념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사유를 만들어나갔다. 이 개념들은 매우 난해하며, 때문에 꼼꼼한 이해를 요한다. 이제 개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알아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분절화는 잘라(分)-붙임(節)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잘라-붙임이기에 분절은 늘 이중분절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homogène)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될 때 ‘층화(層化=stratification)’가 성립한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선들이 무너지고 다질적(多質的=hétérogène)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은 ‘탈기관체(脫器管體)’를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혼화면(混和面)’에 존재하게 된다. 층들이 혼효면을 향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탈층화(脫層化=déstratification)’가 이루어진다.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고,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 기능할 때 ‘영토성(territorialité)’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되고, 동시에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다.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déterritorialisation)’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된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différentiation)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세계인 것이다. 

기계(machine) ― ‘기계(機械)’는 ‘메카닉(mécanique)’과 구분된다. 메카닉은 일상어에서의 기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sôma’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가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그러나 매우 복잡하게 큰 기계가 배치/다양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배치와 다양체 




배치(agencement) ― 사물들 ―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에서의 ‘기계들’ ― 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기계’)도,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과 언표들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고 듣고 사유하고, ... 하는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 다시 반복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경기규칙들 등을 비롯한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복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 가 ‘배치’이다. 

배치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다양체(多樣體)’로 부를 수도 있다. 다양체(multiplicité) ― 배치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수학적-자연과학적인 보다 복잡한 맥락을 함축한다.(뒤에서 다시 설명된다) 다양체는 개체도,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도, 유기적 전체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다양체는 질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접속, 일탈, 통합, 분지(分枝), ...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장(場)이다. 다양체는 항구적 존재도 일시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기도 하지만 늘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예컨대 ‘야구 경기’라는 다양체). 전통 존재론(개체들, 유기적 전체, 추상적 존재들, ...)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그러나 우리 삶의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존재론, 그것이 ‘다양체’의 존재론이다. 프랑스어 ‘multiplicité’는 ‘복수성(multiplicity)’과 ‘다양체(manifold)’로 분화시켜 번역할 수 있다.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이는 곧 탈기관체(body without organs) 개념의 도입과 맞물린다. 다음 구절이 탈기관체 개념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 말할 때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 말할 때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의 이러한 사유는 보다 깊은 곳에서는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 사유의 핵심인 차이의 존재론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차이 자체’에 대한 파악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재현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의적]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론의 기본 문제들 중 하나이다. 이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핵심 개념이 제시되었다: 다의성, 일의성, 유비. 들뢰즈의 논의는 이 중세철학의 개념들에 뿌리 두고 있다. 

존재의 다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를 통해 확립되었다: “존재는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언표는 존재론적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 “존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언표가 개의 존재방식, 물의 존재방식, 神의 존재방식, ...이 다 다르다는 평범한 관찰 결과를 언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언표는 최상위 유들의 불연속성, 통약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 불연속성은 곧 범주들의 존재방식을 뜻한다.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그 이름은 그것이 결코 하나로 용해시킬 수 없는 다의성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들뢰즈는 범주의 사유, 즉 유와 종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낸다. 달리 말해 차이는 동일성에 종속된다. 즉 하나의 유가 유지됨으로써만 종차(種差)를 통해 대립하는 술어들이 그 유를 잔여(殘餘) 없이 나누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큰 장르, 즉 최상위 유들이 곧 범주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범주들은 ‘존재’의 하위 개념들로서 포섭되는가. 아니다. 이들은 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가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범주들은 전적으로 불연속을 형성할 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의 개념을 통해서 이들 사이에 보다 높은 연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는 다의성과 일의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부활한다. 중세 시대에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난항을 겪는다. 신은 ‘존재’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전자와 같이 일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신의 위상에 관련해 거대한 추문이 발생한다. 반면 후자처럼 다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우주의 통일성은 무너진다.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두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봉합한다.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통약 가능하다. 즉 존재는 유비적이다. 

들뢰즈는 유비의 사유가 한편으로 존재를 공통의 유로 놓지 못하고(즉 존재의 보편성을 단지 의사 동일성으로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개체들의 개별성을 구성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자는 초월철학에 대한 비판이고, 후자는 일반적/추상적 사유의 비판이다. 그래서 유비의 사유는 진정한 보편도 또 진정한 개별성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사성의 그물 안에서의 일반성이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개별화하는 차이들의 놀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일의성의 입장이 이런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일의성의 테마는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서구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는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일의적이다. 즉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다. 달리 말해, ‘존재’라는 말에 관련해 제시된 의미들 사이에는 어떤 범주적 차이도 없다. 존재는 그것이 말해지는 모든 것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지는 것이다. 범주의 차이, 종과 유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론, 즉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이런 존재론을 스피노자와 니체에게서도 발견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비적 사유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외부적 시선읕 통해서, 즉 범주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일의적 사유에서의 차이는 각 존재들 내부에서 즉 역능(potentia=puissance)에 의해서, 강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능의 정도들로서의 차이이며, 유와 종의 위계(이런 위계는 ‘포르퓌리오스의 나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에 입각한 차이(즉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일의적인 존재의 표현들이며, 그들의 차이는 역능의 정도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도 동일성은 남아 있다. 실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동일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순수하게 양태적인 우주, 또는 차생적인(différentiel) 우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표면의 사유, 사건의 사유이다.1) 그러나 존재가 완벽하게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개별자들은 역능의 상이한 표현이 되며, 사물들에 대한 파악은 질적 본질(존재의 유비)에서 양화 가능한 역능(존재의 일의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곧 한 사물의 ‘임(esse)’에서 ‘할 수 있음(posse)’에로의 옮겨감을 말하며, 이로부터 여러 실천철학적 함의들이 전개된다.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로부터 들뢰즈가 ‘일자’의 철학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는 일자의 사유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자의 바다의 물방울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디우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을 바로 들뢰즈의 사유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univocitas’에서의 ‘uni’를 차이들을 보듬는 일자로 보는 한에서이다. 이것은 들뢰즈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오독을 함축한다. 이런 유의 일자의 철학은 오히려 존재의 다의성을 함축한다. 일자와 다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일자의 철학과 일의성의 철학을 혼동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오히려 일자를 제거하는 것, ‘n - 1’로 만드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일자의 사유로 보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일의성과 차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적 동일성마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리고’밖에는 없다. 즉 남는 것은 “존재, 일자, 또는 전체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에서의” 관계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들의 ‘배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역능은 배치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며, 때문에 철학사 연구에서 얻어낸 역능 개념과 역사 연구에서 얻어낸 배치 개념이 하나로 융합되며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원숙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는 외적 多도, 라이프니츠-베르그송적 연속성을 함축하는 일즉다(一卽多)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고’로 이어진 사물들의 ‘패치워크’이다.(‘그리고’는 단순한 외적 접속 이상의 접속의 경우들까지 포괄한다) 더구나 이 다양체는 영토화/탈영토화 운동을 통해 변해간다. 이 다양체는 곧 ‘배치’이다. 그리고 무한한 다양체들/배치들의 그 어디에도 굵직한 선들은 그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 같으면 다 같고 다르면 다 다르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의 의미이다. 




들뢰즈와 현대 철학 




들뢰즈가 남긴 사유의 진동은 거대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은 들뢰즈 사유의 자장(磁場)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전반을 내내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선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기반한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철학사에 대한 계속적인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남긴 ‘노마디즘’의 사유는 오늘날 네그리와 하트의 유명한 저작인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의 핵심적인 정치철학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노마디즘과 꼬뮤니즘의 관계를 규명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실천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인물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의 대결이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부산남구문인협회 
http://cafe.daum.net/yes56do/FH4t/298?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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