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운
동경대학 수학과 수료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한국일보 초대 과학부장, 외신부장,
대우 서울신문 문화부장
현 한국일보 과학부장
한국SF작가 협회회장
번역한 책: 버로우즈 작 「화성의 미녀」
지은 책: 항공 기상의 과학, 세계를 움직인다 등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일학
철학 박사 양 옥용/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차례>
태풍 경보···················· 4
과학 논쟁··················· 11
괴물의 출현·················· 22
괴물의 정체·················· 35
우주선의 출현················· 44
납 치····················· 53
화성의 지하 기지················ 61
프록시마의 비행 대장실············· 68
작업 예정표·················· 75
에덴 동산··················· 85
박 진나의 노랫소리··············· 90
노이로제의 치료················ 98
운하 지대의 휴양소·············· 102
사무한과의 협상················ 111
은하계 탐험·················· 121
오메가 9호 성에 착륙············· 129
학술 탐험··················· 132
뜻밖의 소식·················· 137
반란 진압 작전················ 143
드디어 지구로················· 156
SF 단편: 달로켓 실종 사건··········· 170
작품 해설··················· 185
태풍 경보
거센 바람이 창 밖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상대의 태풍경보가 들어맞은 듯 뚝 위의 수양버들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인다.
"김군, 태풍이 대단한데."
"996밀리바의 태풍치라는 예보였습니다."
권 박사는 이 말을 들은 것인지 안 들은 것인지 전자 계산기의 조작 석에서 일어서서 창문 가까이 걸어갔다.
그리고선 창 밖의 나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군, 나 임업 실험지까지 다녀오겠네."
"박사님, 이 태풍 속을 무리하시면……"
"능금나무가 아무래도 걱정거리야."
권 박사는 연구소 로크를 열고 비옷으로 갈아입고 문 밖을 나섰다. 조수 김 철수는 박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시선을 돌려 다시 책상 위의 그래프 작업을 계속했다.
임업 실험지는 분지에 자리 잡은 50만 평의 넓이로 무수한 나무들의 생명을 태풍의 희롱에 맡긴 채였다. 연구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과나무 밭 언덕 위에 선 권 박사의 눈에는 50만 평의 대지와 20만 주의 나무들이 대낮처럼 똑똑히 보였다.
그 한 그루 한 그루엔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쏟았던 정성이 이제 마지막 그 결실을 보려는 즈음 996밀리바의 태풍 15호는 어려운 고비를 몇 차례고 넘어온 권 박사의 마음 속에 또 한번 형언할 수 없는 근심의 그림자를 얼룩 지우는 것이었다.
태풍과 태풍이 연결하는 인연이란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도 있는 것일까. 권 박사는 찬바람에 도리어 생명력을 느끼면서 홀로 회상에 잠겼다.
20년 전의 가을에도 심한 태풍이 분 적이 있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기독교 신도인 애인과 어쩐지 서먹서먹해진 끝에 서로 이별하기로 선언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럽게 태풍을 만났었다.
마음의 공허 때문이었을까. 강풍에 못 이겨 오들오들 떠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문득 느낀 일이 있었다.
저렇게 모진 바람에 휩쓸려 지면서도 왜 나무의 가지들은 어지간히 그 잎사귀까지 나무 줄기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몹시 시달리면서도 되돌아오는 나뭇가지의 유연성을 다만 생물학적인 세포 섬유의 탓으로 돌려야 옳을 것인가.
그는 더 강한 생명력이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를 굳게 연결하고 있는 것만 같은 상상에 사로잡혔다. 사과나무 가지를 배나무에 접목해서 새로운 품종의 과일을 얻는 궁극의 비밀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씨앗의 문제를 넘은 더 강력한 생명력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을 것 같다. 그는 이런 생각 끝에 보통 때의 나무줄기와 가지 사이의 모양이 마치 자석의 자력선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유사성을 발견해 냈다.
나무줄기가 자석이고, 나무의 뿌리나 가지와 잎은 뿔뿔이 발산하는 자력선과 방향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들은 이런 착상을 영감이라고 했지만 당시 비바람에 흠뻑 젖으면서 되돌아가는 그의 가슴은 뜻밖의 발상에 오히려 침울할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어느덧 흘러 권일송 박사의 나이도 52세를 새겨 놓았다.
"자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권 박사는 오랜 수수께끼를 또 한 번 자문해 보았다.
언덕 위엔 동남풍이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는데, 어둠 속을 때아닌 그림자 하나가 접근해 온다.
알고 보니 바로 그의 부인 문 여사였다. 권 박사는 밤늦게 자기를 찾아 나온 아내를 도리어 나무라면서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통보를 연구소에 연락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다음다음 날이었던가, 연구소의 제 1 차 종합 브리핑이 권 소장실에서 열렸다.
18명의 각 부 반장이 옵서버로 참석한 가운데, 자력선 부장이 맨 먼저 보고했다.
"구체적인 데이터는 상부에서 정리 중이므로 연말의 제 3 차 브리핑 때까지는 완결된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오늘 브리핑의 요점을 말씀드린다면 식물의 자력선이 하늘과 땅의 상하 방향에서 수평축에 대하여 160도의 자유 방위를 갖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구의 광물성 자장이 남극의 직선 방위 외에는 작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식물 자력선 발전을 여간 저해해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 부는 지구 자장의 방향을 없애고 식물 자력선만에 의한 식물의 생장 과정을 실험해 본즉 식물의 재래식 자력선의 강도는 나뭇가지의 생장 비율인 황금률의 자승의 대수에 정비례한다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옵서버들은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당부는 이 법칙에 따라 식물의 재래식 자력선을 약 12배 강화할 수 있는 실험을 계속 중에 있습니다."
자력선 부장의 설명은 차츰 학술적인 문제를 다루더니 한 시간 남짓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달의 중력이 식물의 뿌리에 대해 밤중에 미치는 영향까지 브리핑했다.
차례에 따라 원예 부장이 일어섰다.
"원예부로선 토마토 재배를 위해 자석을 뿌리에 함께 심어 줌으로써 재래종보다 5배의 다수확을 올렸고 수박은 과일이 익기 시작한 일정한 기간 자력선을 보강함으로써 일 년 내내 맛이 변하지 않는 특수 품종을 개량해 냈습니다. 당부가 결론을 얻으려는 것은 일년생 식물을 그 특징을 변경함이 없이 다년생 식물로 성전환을 시키려는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과나 귤의 경우도 재래식 방법은 종이로 과일을 싸서 보호하는 방식인데, 이를 지양하여 100분의 1밀리의 플라스틱 막을 과일 표면에 액체로서 살포하면 자력선과의 균형 하에서 반드시 구형이 아닌 4면체 또는 3면체 등의 이른바 임의의 다면체 재배에 착수했습니다."
이 날 아침 회의는 두 부장의 보고로서 끝나고, 하오에는 임업 부장이 브리핑에 나서 참나무 등의 가지에 전기 코일을 감아서 전자기 유도에 인한 수목의 생장 시험 결과 약 5배의 생장 성과를 보았으며, 지금 실험 중인 데이터가 완결되면 뜻밖의 새로운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고했다.
해양 생물학 부장은 미역과 전복 등에 자석의 힘을 적용한 결과, 바다 속의 유기물의 소화도가 훨씬 높아져서 미역은 종래의 5배의 영양가를 갖게 됐고, 진주의 크기는 조건에 따라 자두 만한 것이 생산되었다고 실물을 제시하면서 보고했다.
예정한 시간이 넘은 까닭에 이론부의 보고는 후일로 미루고 이 날의 브리핑은 끝났다. 권 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소장실의 벽에 이런 액자가 걸려 있었다.
<과학의 영광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다만 틀린 것을 찾아 내서 이것을 정정하면서 전진할 따름이다.>
권 박사의 관심이 바다로 향한 것은 4년 전부터였다. 땅 위에서의 자력선 연구는 어지간할 때까지 해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력선의 근원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3년 전에 남쪽 바다의 고도인 우도에 해양 생물학 분실을 만들어 놓고 바다 속의 식물 연구를 계속해 온 것이다.
내년 4월로 예정된 종합 기술학 외에 식물 자력선의 입체적 활용과 그 근원에 관한 보고를 내놓으려면 연말까지 모든 결론을 지워 놓아야만 한다. 10월 6일 권 박사는 단신 비행기편으로 우도로 떠났다. 예정은 20일간이었다. 비록, 소장이 출장 중일 망정 브리핑을 계속하는 것은 자력선 연구소의 관례이다. 10월 8일, 전날의 브리핑이 속개되어 이론 부장이 보고를 했다.
키가 후리후리한 그는 이 날 따라 보우 타이를 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온갖 나무들이 저마다의 자력을 갖고 있는 사실을 좀 더 살펴 볼 때, 개개의 나무가 생장하는 과정에 따라 자력도 커지느냐, 또는 본래 일정한 자력이 식물의 성장 운동에 따라 발전할 따름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이론부로서는 후자의 경우를 중시할 때, 그렇게 되면 개개의 자력의 상한을 규정해야 되며, 거기서 인공적으로 보강할 수 있는 최대치를 구해야 될 것입니다."
"원예적 실험에 의한 이런 관계의 본질은 중수소가 뚜렷이 작용하고 있는 듯한 예증을 주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중수소에 의해 자력의 역량이 설명된다면 지구상의 식물 자력의 총화는 간단히 밝혀질 것이나, 북극과 남극에 있는 자장과의 관련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집트로부터 도착한 문헌에 의하면, 모타칸 박사는 지구의 자장이 옛부터 매몰된 큰 나무들의 자력이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각각 적도를 한계로 해서 남북으로 집결한다는 믿을만한 근거가 있다는 새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학설을 믿는다면 중수소와 지구 자장의 구성 분자 사이에 어떠한 치환이 있었을 법도 한 연구의 실마리가 나타날 것입니다만……"
이론 부장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론부 소속으로 있는 조수 김 철수가 일어서서 자기의 상정이라고 하며 대략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력선 센터는 모든 간접적인 것을 배격하고 직접적인 원인 규명에 나서고 있습니다. 지구 자장의 자력과 식물 자력 사이의 관계는 다만 음양의 그것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마치 전극을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시키면 전열기가 되고 마이너스 방향으로 작용시키면 냉장기가 될 수 있는 원리처럼 지구 자장의 자력은 생명력이 가사 상태에 놓인 식물 자력의 반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기물이 무기물로 치환된 것을 화석이라고 하지만, 화석에도 생명체가 깃들여 있듯이 지구 자력과 식물 자력을 단순한 공존 상태로부터 통합 상태로 끌어올린다면, 그 에너지야말로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식물 자력은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서정시라도 읊는 듯한 철수의 보충 설명도 45분으로 끝났다.
"'이로써 제 1 차 종합 브리핑을 일단락 짓겠습니다."
부소장을 겸하고 있는 자력선 부장의 인사가 끝나자 모두들 서류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침 소리 마저 없는 회의란 여간 심각하지 않은 법이다. 허나 시계의 두 바늘은 말없이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학 논쟁
전화가 걸려 왔다.
"자력선 연구소입니다."
철수는 수화기를 손에 쥐자 먼저 대답했다. 전력 회사에 있는 떠버리 친구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자네 오늘 토요일인데 약속이 있나? 없겠지.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으니 1시 반까지 제 3 영양 센터에서."
"글쎄, 일이 남아 있는데……"
"쌍둥이 호박 만드는 일 말이야. 하하, 결혼한 친구들에게 맡겨 놓으면 되지 않아."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렇다면 가급적……"
"가급적이 뭐야. 꼭 기다리고 있겠네."
미스터 강은 학생 시절부터 일방 통행처럼 말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철수는 전투 중에 잠깐 쉬는 기분이었으나 떠버리와 만나면 기분 전환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흥 가까이 자리잡고 있는 3층 건물의 제 3 영양 센터는 여전히 만원이었다.
"전력 회사의 미스터 강이 와 있을 텐데, 어디 있습니까?"
"네, 2층 26호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소이다."
안내계의 젊은 여자가 무척 친절하게 일러 준다. 층계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벌써 26호실로 연락이 된 듯 미스터 강이 문을 열고 나와서 있었다.
"넥타이나 좀 매고 다니지 않고……"
강윤식은 대뜸 따지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소녀들이 음식을 날라왔다. 방은 시간제로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만사가 기계적이었으며, 제 3 영양 센터의 자랑은 닭볶음이었다. 술은 없었다.
"강, 일부러 할 말이 있어 오늘 불렀는가?"
"이 사람아, 할 말은 무슨 말이 있겠나. 그저 친목을 도모하자는 것뿐이지."
그는 자기가 맡고 있는 전력 회사의 발전국 일에 관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열다섯 군데나 되는 조수 발전소의 건설이 날씨의 탓으로 예정보다 좀 늦어지고 있다는 둥, 유성에 처음으로 만든 지열 발전소의 성적이 역시 예상대로 잘 되나간다는 둥, 그대로 두면 말문이 언제 닫힐는지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잘 알겠네. 그건 그렇다고 하고 결혼 날짜를 언제로 잡았는가?"
신나게 말하던 윤식의 말문이 급정거했다.
"아직은 모르겠어. 아마도 내년 봄쯤일 거야, 신부 왈 국가 시험을 치른 다음으로 하겠다나."
"그 여의사의 주장 대로군."
철수는 얘기 끝에 요즘 자력선 연구소에서 새로운 법칙이 발견된 경위와 식물 자력선이 완전히 규명되면 그렇게 속썩이던 로켓 연료를 어느 정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윤식은 그 얘기를 무심히 듣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렇게 훌륭한 일을 왜 국민에게 안 알리느냐고 눈을 흘긴다.
"아직 발표할 시기가 아니야."
하고 철수는 가볍게 응수했는데, 이 짧은 얘기가 온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게 되리라고는 철수도 윤식이도 미쳐 몰랐다.
윤식이가 이 날의 철수 얘기를 지나가는 말로 대륙 신문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귀띔해 준 것이 화근이 됐다.
며칠 후, 신문이 배달되자 자력선 연구소는 발칵 뒤집어졌다.
'자력 혁명! 자력선 연구소에서 무한 동력을 발견! 과일의 다면체 재배도 대성공!' 이라는 큰 제목 아래 과학 면의 톱기사로 대략 다음과 같이 보도 됐기 때문이다.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기술진은 13년의 연구 끝에 자력선을 해방시킴으로써 자력 혁명의 제 1 차 작업을 완성했다.
식물의 열매를 이루는 궁극적인 힘을 중수소라고 생각하는 동 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이 에너지를 재생산함으로써 장차는 우주 로켓의 추진력까지도 생산해 낼 가능성을 검토 중에 있다고 한다.
동 연구소의 기본 방침은 식물의 생장과 결실을 광선의 합성에 의한 간접적인 신진 대사를 초월하며, 식물 생명체의 직접적인 궁극의 효소를 찾아 내서 이것을 유도하려는 데 있다. 옛날, 고 우장춘 박사에 의하여 육종된 이른바 씨앗 없는 수박은 단순히 씨앗의 교배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자력선 연구소가 그 동안 식물 자력선의 적절한 적용으로 맛이 변치 않는 수박을 만들어 낸 것은 널리 보도된 바 있다.
이런 연구를 기초로 해서 엷은 플라스틱 막을 과일에 살포함으로써 세모꼴, 네모꼴의 사과, 배, 포도 등의 과일 생산이 가능해 진 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 풍토와 아울러 과학진의 커다란 승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순장 김 일송 박사는 출장 중인 우도의 해양 생물학 본실에서 이번 연구의 결론은 아직도 종합된 것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식물 자력의 완전 해방은 동 연구소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원예 부장이 가져 온 신문을 읽고 난 자력선 부장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세상에 알려 주는 것은 고마운데, 내용을 똑바로 써줘야지, 원……"
"난 아무래도 과학원에 제출한 제 1 차 종합 브리핑의 보고서를 읽고 적당히 쓴 것 같은데요?"
원예 부장 추측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철수는 혹 윤식이가 남에게 발설하지는 않았나 하고 혼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발설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문 보도가 상세하지 못하고 요령부득이었기 때문에 빗발처럼 연구소에 조회해 오는 문의 때문에 연구 계획이 지연되었다는 데 있다.
그 날 저녁, 당장에 외국 신문의 특파원이 소장을 찾아서 회견을 청했다. 나이 50세가 넘어 보이는 외국 기자는 특히 해양 생물부에서 양식한 자두 만한 진주에 더 관심을 갖고 사진까지 찍어갔다.
국내 학회에 보고한 다음 해외의 관계 학회 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던 자력선의 종합 보고였던 만큼 그렇다면 ①식물 자력선의 발생을 태양력 이외의 '자료'에서 찾고 있느냐 ②자력선에 의한 로켓의 연구는 어느 정도의 진전을 보고 있느냐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부소장이 진땀을 뺐다.
과학청에서도 이튿날 보고서를 일곱 통 더 작성해 달라는 지시였고, 우주 물리 연구소에서도 조회가 오고 엽록소 연구소에서는 일부러 사람을 보내왔다.
회색 양복을 입은 서른 대여섯 살로 보이는 청년의 명함에는 '국립 엽록소 연구소 식물 화학 반장 박한수'라고 적혀 있었다.
용건은 임업 실험지에 있는 여러 가지 나무의 잎을 백장쯤 얻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한수는 철수의 안내로 분지의 넓은 실험지를 거의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토마토, 사과, 배, 수박, 오동나무, 삼나무 등의 잎과 과일 백여 개를 골라 모았다.
"미스터 김, 고맙습니다. 우리 연구소에선 다배체 연구가 한창이어서 자력선의 영향을 비교 아니할 수 없게 됐어요."
"아무튼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서로 힘을 모을 날이 오지 않겠어요."
철수와 박한수는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학구심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엽록소 연구소에서 분명히 도전해 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엽록소 연구소 측은 공문으로서 필요한 협조를 청하면 되는 것이었다.
"엽록소 연구소 놈들이 당황했군."
한수가 돌아가자 철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부장님, 이번 테마는 화학반의 책임 아래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좋소, 그러나 너무 서두르진 마시오."
식물 화학 부장은 평소에 박한수가 덤비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한수는 당장에 7명의 임원들과 회의를 열고 식물 자력선의 모순점을 찾아 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만일 자력선에 의해서 식물이 생장이 5배 늘어날 수 있다면, 그 나무의 잎사귀의 세포들은 그 만큼 빛의 합성 작용을 활발히 해야될 겁니다. 우리는 자력선 연구소의 잎의 세포 구조를 분석해서 염색체를 분류해야 겠습니다. 국립 연구소의 권위와 전통을 위해서 여러분의 분발을 기대하겠습니다……"
계획에 따라서 10여 년 전에 미국이 월남의 게릴라전 때 사용한 적이 있는 '호지돌'과 인(P) 화합물을 선정된 잎에 붙여 놓았다. 이 약은 낙엽제 또는 고초제로 알려진 것이다. 화학반은 그럼으로써 수분이 없어질 때의 인 형질의 상태를 우선 파악해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수박의 염색체가 2배체와 4배체를 교배시켜서 씨 없는 수박과 똑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1주일 동안에 상당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부장님, 실험 결과를 보니까 자력 연구소의 잎이나 과일들의 염색체는 차원이 낮아서 말이 아니군요. 지금 우리 연구소에서 착수 중인 밀농사의 경우, 밀의 염색체가 56쌍과 70쌍에 달한 것을 실용화하려는 단계인데, 이 비율로 따지자면 자력선 연구소의 것은 평균 40쌍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고나 할까요……"
화학 부장은 한수의 보고서를 들여다보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거린다. 납득이 가는 그 무슨 새로운 사실이 반증된 셈일까?
이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엽록소 연구소 소장 이갑노 박사는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화학 반장 한수가 권한 것이다. 프레스 인터뷰는 30여 명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연구소 강당에서 열렸다.
"먼저 개략을 설명하겠습니다. 지구상의 온갖 생명은 태양의 에너지를 근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식물이 섭취하고 있는 에너지와 총량은 전 세계의 하늘에서 날려오는 것의 불과 2.5% 밖에 안됩니다. 이렇게 미미한 양입니다만, 그 중에 농토가 섭취하는 에너지의 양은 겨우 3%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97%가 이용되지 않은 채 입니다. 까닭에 본 연구소의 사명은 이렇게 남아 돌아가는 태양 에너지를 더 많이 빨아들이기 위해서 잎이 넓은 식물을 만들어 효율을 높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박사는 근엄한 어조로 문제점을 지적해 나갔다. 씨앗의 교배로서 염색체를 다배체로 만들기 위해 저온 작용 외에 초음파를 이용하고 있다던가 벼의 알이 재래종의 2배나 되는 씨앗을 개량 해냈다던가 하는 설명이었다. 회견이 근 한 시간 계속 되는 동안 기자 중에는 자력선 연구소의 업적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한 사람도 있었다.
"본 연구소는 식물 증식의 문제를 화학적인 면에서 탐구하고 있고, 자력선 연구소는 물리학적 면에선 접근하고 있는 까닭에 서로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날의 회견 내용은 다음 날 조간마다 대서특필되어 '국립 엽록소 연구소에서 쌀과 밀의 다배체 재배에 성공'이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반도 일보만은 식물 자력선 연구소와 엽록소 연구소가 내년 봄 학회를 앞두고 시소 게임을 벌리고 있다는 단평까지 실어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뜻밖에 벌어진 과학 논쟁을 세상 사람들은 먼 산의 산불 구경처럼 대했을 뿐이다.
한동안 자력선 연구소의 권일송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의 수상자 후보에 올랐다는 외국 통신의 보도도 있어 떠들썩했지만 호수에 던진 돌의 여파가 가시듯이 세상은 다시 잔잔해졌다.
12월로 접어든 어느 날 하오, 권 박사와 자력선 부장은 소장실의 소파에 기대어 보기 드물게 환담하고 있었다.
"이번에 들은 얘기인데, 우도의 섬 사람들이 요즘 과일은 그전 것보다 맛이나 향기가 덜하다고 불평해요. 이론상이나 실제로 지금 것이 더 맛이 있을 텐데. 역시 사람이란 소년 시절이나 자기 과거를 사치스럽게 생각하는 면이 반드시 있는가 봐."
"너무나 자기 중심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인구가 천 만을 넘어섰는데 과일의 크기나 수량을 대량 생산하지 않으면 요즘 꼬마들은 사과 맛도 알지 못하게요. 옛날 옛날 하지만 그 때의 재래종으론 어디 차례가 돌아올 것 같습니까?"
"그 이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란 말이야. 이론부의 조수를 하고 있는 철수 군만 해도 정열만으로 독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소장이 평소에 철수를 아끼고 있는 것은 연구소 직원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철수는 철수대로 나이는 젊지만 식물 자력선에 의한 우주선의 추진력을 꼭 해결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김군을 장차 나이로비에 있는 원시 식물 연구소에 유학시켜 보면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력선 부장도 김철수를 아끼고 있는 눈치였다.
철수는 이날 밤 숙직에 걸려 있었다. 차를 타고 신공덕리의 연구소까지 오는 연도의 가로수들은 벌써 나뭇잎이 낙엽을 지우고 있고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지켜보는 듯이 북두칠성의 어미별인 북극성은 36도의 높이에서 변함 없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유성이 많은 밤이군."
저도 모르게 유성 수를 손꼽고 있던 철수는 다섯 개나 목격한 일을 이상스럽게 여겼다.
임업 실험지의 나무들만이 초겨울에도 푸릇푸릇한 잎사귀를 자랑하는 듯 푸른 바다를 이루고 있는 사실이 마음 든든했다. 철수는 숙직 요령대로 이날 밤은 소나무 잎의 총수와 자력의 평균치를 전자 계산기로 처리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이웃 마을의 멍멍개 소리 마저 멈춘 새벽 3시쯤이었다. 마치 번개가 반짝이는 듯 야광탄을 터뜨리는 듯 창 밖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고요 그대로였다.
"이게 웬일일까? 소리도 없는 야광!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수는 연구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상한 빛의 정체는 아무리 돌아다보아도 찾아 낼 수 없었다. 유독 밝아야 할 광원이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철수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동안 약 3분이 지났을까. 야광은 천천히 꺼지기 시작하여 분지의 남쪽에서 마지막 불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군대의 훈련도 아니겠고 이게 무슨 신호일까?"
철수는 연구실로 들어오자 바로 전화기를 붙들었다. 단추에 적힌 번호만 누르면 그만인 전화기였으나 소장 관사에서 되돌아오는 호출 신호가 더딘 것만 같았다.
"웬일이요. 이 밤중에. 뭐? 이상한 광채를 보았다고. 김군! 이 일을 경찰국에 연락하고 당장에 연구소원 전원을 비상 소집 해주게."
김철수는 소장의 흥분한 말을 듣자 비로소 그 무엇인지 긴장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권일송 박사는 자기대로의 예감에 취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를 한참 동안 생각하며 서 있었다.
괴물의 출현
급히 연구소로 달려온 권일송 박사는 철수로부터 이상한 광선에 관해서 자세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나는 지난밤에 우도의 해양 생물학 분실에 들렀을 때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단 달이야. 어떤 날 밤에 북극성이 반짝이는 쪽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코발트 빛깔엔 윤색한 듯한 밝은 비행체가 서쪽을 향해서 지나가지 않아. 우도의 위도로 보아 북극성은 30도 쯤의 높이에 보이는데, 그 광채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이란 눈을 깜박할 사이거든. 맨 처음에는 비행접시의 환상인가 싶었는데, 그렇다면 다른 관측소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게고 그 때부터 마음 한 구석이 공연히 놓이지 않았었지."
오른손으로 안경을 만지면서 말하는 권 박사의 눈이 이 날밤은 유난히 깊어 보였다.
거의 총동원되다시피 연구소원들이 차례를 다투면서 모여들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기에 한 밤중에 비상 소집이야. 그런데, 박사는 왜 안경을 벗고 있소?"
"앗, 잊어 먹었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른 게 잘못이야. 책상 위에 놓은 걸 그대로 두고 뛰어 나왔지."
임업 부장 박시영이 한바탕 웃어 넘겼다.
"밤중에 여러분을 비상 소집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 오늘 당번을 맡은 김군이 이상한 광채가 임업 실험지 변두리에서 빛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대로 넘길 수도 있겠는데, 태양의 자기 활동이 가장 최소로 떨어진 요즘의 일이고 또한 나로선 우도 여행이래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한 일이 있어 여러분과 의논하려는 것이오."
권 소장의 설명을 들은 연구소인들은 다시 한 번 긴장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들은 정찰반과 기동반과 연결반의 세 가지 반을 짜기로 했다.
정찰반은 평소에 감각이 예민하고 관찰력이 발달한 사람들을 잡아 제 일선에 배치했는데, 김철수도 정찰반에 소속되었다. 기동반은 일종의 관측반으로서 여러 측정기로 장비하고 현장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온갖 준비를 갖추었고, 연락반은 경찰 또는 군대의 물리 화학반과 협동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총지휘는 역시 권 소장이 맡아서 정찰 반장을 겸임했다.
정찰반이 임업 실험지를 헤매면서 이상한 광채를 찾았을 때는 벌써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고 있었다.
"송영철 경위올시다. 저 유지 같은 이상야릇한 괴물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한참 동안 대낮처럼 밝은 빛을 냈다고 신고를 받았는데, 지금은 별로 밝지도 않습니다. 권 박사님 어찌된 셈일까요?"
송 경위가 먼저 거수 경례를 붙이고 권 박사에게 설명하면서 혹 폭발물이 아닌가 싶어 접근 못하도록 새끼줄을 쳐 놓았다고 말했다.
"과연 이상한 물체로군. 저것은 광물성일까 식물성일까?"
권 박사는 혼자 중얼거렸다.
괴물체는 마치 아네모네 꽃나무를 수백 배나 확대한 것처럼 유리 같은 촉수를 수없이 뻗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든 밤송이나 다름없지 않아. 도대체 동물일까? 식물일까?"
갸우뚱거리면서 생각해 보았으나 도저히 속단할 수 없었다.
괴물의 촉수는 결코 투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리처럼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반투명이었고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런 물체에서 백조처럼 밝은 빛이 나타났단 말이야. 발전할 수 있는 기능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저 반투명의 둥근 몸체에 그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
권 박사는 홀로 생각에 잠기면서 괴물에 접근하는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맨 먼저 돌을 던져 보았다. '폭' 하는 소리가 났을 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저것이 광물성이라면 더 크게 울리는 소리가 나겠지. 광물성은 아닌 모양이다. '
권 박사의 지시에 따라 정찰반은 이번에는 경찰견을 그 쪽으로 접근시켜 보았다. 개가 철없이 그 물체를 보고 컹컹 짖다가 촉수를 물어뜯자 돌연 변화가 일어났다.
"앗! 저것 보아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숨이 꽉 막히는 순간, 순식간에 경찰 개는 그 유리 같은 촉수에 붙들려 뼈와 가죽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드라큘라처럼 괴물체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경찰 개를 미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권 박사님? 저 물체는 분명히 생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경찰개 토니가 가엾게도 희생되고 말았는데 총을 쏘아서 잡아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송 경위는 복수심에 가득 찬 사내처럼 권총을 빼들고 괴물체를 쏘아댔다. 그러나 괴물체에 맞은 총알은 유리 같은 몸체로 들어간 채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했다.
괴물체는 깨어지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여전히 땅에 뿌리가 박힌 듯 요동조차 하지 않았다.
송 경위는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이 일을 일단 본서에 보고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뛰어가 버렸다.
이미 동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현장에는 몇 감시원을 남겨 두고 우리도 일단 연구소로 되돌아가서 대책을 세워야겠군."
권 박사는 이렇게 정황을 판단하고, 김철수 외 다섯 사람을 감시원으로 남겨 놓고 일단 연구소로 철수해 버렸다.
"저 물체는 분명히 지구 위의 생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로봇이라면 동물을 해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동물의 피만 빨아먹는다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소장! 저의 소견은 이렇습니다. 만일 저 괴물이 지구상의 생물이라면 총알을 맞으면 그 세포가 파괴되어 죽기 마련입니다. 총알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점은 기필코 괴물이 마치 연체동물처럼 특수한 세포 조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동물의 피만 빨아먹는 점으로 보아 괴물은 수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안경을 벗어 놓고 뛰어나온 임업 부장 박시영이 이러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현장에 연락해서 소방차로 물을 퍼부어 보면 어떨까. 수분에 대한 반응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권 소장은 수분에 대한 반응을 알고 싶었다.
연락반은 워키토키로 현장의 김철수를 불러 내고 소방차의 물을 쏘아보도록 지시를 전달했다. 대기시켜 놓은 소방차는 당장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헬멧을 쓴 소방대원이 호스를 들이대고 용감하게 물을 쏘았다. 그러나 괴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물을 빨아들이지도 않고, 더구나 움직이지도 않아 이번에는 무슨 광물체처럼 생각되었다. 감시원들은 다시 겁을 집어먹으며 서로 불을 던져 보았으나 괴물은 꿈쩍도 않았다. 불에 대한 반응도 전혀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권 박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이 사태를 어떻게 단정하고 귀결을 지어야 할 것인가? 일단은 지구 외의 우주 생물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났지만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공포의 막이 내려 있어 어쩔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현장 감시원의 당황한 보고가 전해왔다.
"소장 큰일났습니다.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어, 이쪽을 향해서 걷고 있습니다."
김철수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시간은 여덟시 오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괴물은 이제 보니까 몸 속에 무수한 렌즈 모양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괴물은 혼비백산하여 뛰어 도망가는 사람들을 결코 쫓아가지는 않고 소리 없이 임업 실험장으로 향했다.
"소장, 괴물이 임업 실험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느티나무 아래서 잠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김철수는 시시각각으로 괴물의 동정을 연구소에 보고했다. 괴물은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무수한 촉수로 나무 뿌리 근처를 감았다. 과연 거창한 느티나무가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사귀로 차례차례 시들기 시작하지 않는가!
느티나무는 순식간에 마치 시래기처럼 바싹 마르고 말았다.
이 놀랄만한 사건이 과학청에 보고되어 그 뉴스는 당장에 호외로서 퍼지고 라디오도 임시 뉴스로 이 일을 보도했다.
우주인이 한국에 내습하여 동물과 식물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는 뉴스는 온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말았다.
권 박사는 괴물의 정체가 이번에는 알쏭달쏭 해졌다.
'옳지. 저 놈이 느티나무의 생기를 빨아먹는 것으로 보아 식물 내의 수분이 필요한 모양이다. 보통 물은 빨아 드리지 않고 동물의 피를 빨아 먹는 것도 틀림없이 혈액 속의 수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상태에 있는 동물성 수분과 식물성 수분이 필요하다는 점은 그 수분으로 그 무엇인가 합성하려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권 박사는 혹시 괴물이 순수한 수분을 흡수해서 중수소를 만들 작정이 아닌가 하고 짐작도 해 보았다.
괴물이 밤중에 백열처럼 밝은 광선을 발산한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듯 했으나, 권 박사는 아직은 속단하지 않았다. 괴물과 직접 대결해 보지도 못함은 아직도 그 괴물과의 통신 방법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의 문을 열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엽록소 연구소의 식물 화학 반장 박한수였다.
"우주인이 임업 실험지를 헤매고 있다지요. 큰일났군요. 도와 드리려고 왔습니다."
박한수는 권 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의 옆엔 22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 대학생이 따라와 있었다. 여학생은 영리하게 보이는 미인이었다.
박한수는 여동생이라고 권 박사에게 소개했다.
박한수가 여동생과 함께 현장으로 뛰어 가본즉, 느티나무의 수분을 빨아먹은 괴물체의 몸은 불어 있었다.
멀리서 이 괴물을 처음으로 본 한수는 동생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마치 말미잘이 둔갑할 것 같구나. 저 적갈색 촉수의 끝이 노랗고 흡반의 눈부신 녹색은 말미잘과 비슷하단 말이야."
"오빠, 말미잘이 무엇이지? 처음 듣는 이름인 것 같아"
한수는 워키토키를 들고 있는 철수를 발견하자,
"설명은 나중에 할게."
하면서 그쪽으로 다시 뛰어갔다.
키가 철수보다 큰 한수는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 괴물은 어찌된 셈입니까?"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철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시선만은 결코 괴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다.
괴물은 사람의 존재를 전혀 무시하고 차례 차례로 촉수를 뻗어 감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씩 빨아들일 때마다 몸집이 점점 커졌다.
이제는 코끼리만하게 비대한 괴물은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은 꼴이었다.
그러나 머리며, 눈을 가려 내기 어려워 그 놈이 과연 잠들고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저놈을 생포할 수는 없을까요? 아무래도 걷는 속도가 느린 것을 보니까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 같소."
어느새 부하들을 데리고 되돌아 온 송영철 경위가 철수에게 의논했다. 멀리서 괴물을 포위하고 있는 경관들은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생포요? 생포해서 뭘 할 작정이요. 결코 손을 대서는 안됩니다. 저놈의 정체도 모르고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무슨 보복을 당할는지 책임지겠어요?"
박한수가 나서서 송 경위를 도리어 나무라려고 한다. 철수는 송 경위에게 말을 했다.
"한수씨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송 경위님, 좀 더 동정을 살핀 다음에 우리가 취할 행동을 통일합시다."
권일송 순장의 지휘 본부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철수 역시 저 괴물이 혹 중수소를 먹고사는 동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 중수소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의문은 풀리지 않는 채였다.
"오빠, 소금을 뿌려 보면 어때요? 보통 생선을 절일 때처럼 소금으로 처리해 보면 기적이 일어날 것 같아."
한수의 여동생이 뜻밖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녀는 유난히 검은 눈썹 아래서 반짝이는 두 눈을 철수의 얼굴로 옳기면서 말한 것이었다.
"저 분은 누구십니까?"
철수가 물어 보자,
"참, 소개를 안 했군요. 내 누이동생입니다. 금강 여대 3 학년이지요. 수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수는 여동생을 철수에게 인사시켰다.
"박진나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이번에는 침착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미스 박의 의견은 그럴 듯 합니다. 그러나 소금에서 나트륨(Na)이 추출되는 사실을 잊었나요, 소금으로 생선은 절일 수 있지만 글쎄 저 괴물이 가만히 있을까요?"
철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이 여대생이 괴물을 장난감으로 생각하나 싶었다.
아직은 괴물이 난폭하지 않아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소금을 뿌려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철수는 한수를 쳐다보면서 설명했다.
"만일 저 괴물의 몸 속에 소립자만으로 되어 있는 물질이 있다면 소금 속의 나트륨 핵이 반응하여 당장에 폭발할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수소탄이 아니라 눈앞에서 나트륨 탄에 불을 붙일 위험성을 도외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괴물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괴물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별안간, 워키토키가 떠들기 시작하여 철수를 비롯한 감시원은 임업 부장 일행과 교대한다는 지시가 전해왔다.
"박형, 교대하게 되었으니 연구소로 돌아가겠습니다."
한수는 현장에서 괴물의 동태를 더 관찰하고 싶은 눈치가 엿보였다.
철수가 감시원을 보아서 철수하자, 박진나는 뒤따라 왔다.
"연구소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스커트 대신에 통이 좁은 하늘색 바지에 분홍색 잠바를 입은 진나는 쑥스러운 웃음을 띄우면서 철수 옆으로 쫓아왔다.
이제는 긴장이 풀린 철수는 배가 고픈 생각이 갑자기 몰려 왔다.
그러나 연구소에 도착해 본즉 아직도 회의는 계속하고 있어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회의의 초점은 괴물이 어떻게 해서 의사를 소통해 보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고 있었다.
마침내 자력선 부장은 주장했다.
"괴물이 실험지의 나무 물을 빨아먹는 것으로 보아 전자 반응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자파를 이용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글쎄, 전자파 송수신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파장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해 야 옳을까?"
권 박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파장의 선택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괴물은 지구 위의 생물이 아닌 만큼 음파를 이용한 음성으로 소통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빤한 일이다.
그간 여러 사람들이 괴물을 둘러싸고 떠들어 보았으나 아무 반응이 없는 것도 다만 언어가 다른 까닭만이 아닐 것이다. 이론 부장은 맨 처음에는 적외선으로 통신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본즉, 적외선은 지구의 스케일에서나 효과적이지 우주적인 통신 방법은 못될 것이라는 결론에 부딪치고 말았다.
"소장님, 아무래도 미국에서 착수했던 수소파를 써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파장도 센티미터로 고정되어 있어서 전파 천문학계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론부들은 수소파가 적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우주의 모든 물질의 기원은 수소에 있으며, 수소가 결합 반응해서 헬륨으로 변하고 헬륨이 반응해서 산소, 네온, 질소 등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 우주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가스 모양의 성운이나 허공에 먼지처럼 부서진 우주진 역시 수소로 구성되어 있다.
까닭에 가장 공통적인 수소의 파장을 이용하는 길이 적당하다.
더구나 수소는 온도가 낮을 때는 발광하지 않지만 적합한 조건 아래서는 수소 원자의 회전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기도 한다. 원자가 플러스 방향에서 마이너스 방향으로 회전을 바꿀 때 발산하는 에너지의 차가 바로 파장 센티미터의 광양자의 에너지에 해당한다.
미국의 그린벤크에 있는 국립 전파 천문대에서 드레이크씨가 우주인과의 통신 방법으로 쓰고 있는 파장도 바로 이 수소 센티 파장인 것이다.
이론 부장은 21센티 파장에 괴물이 동조하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권 소장에게 이를 우겼다.
철수가 생각하기에도 이론 부장의 주장이 가장 적당한 해결책일 것 같았다.
전우주에 공통된 것을 이용하는 일이 쉬울 것이다.
"그러면 제 1 차로 이론 부장의 의견에 따라 수소의 21센티 파장으로 통신해 보기로 정합시다."
권 소장은 연락 반장에게 이 회의의 결론을 과학부에 보고하고 필요한 지원들 얻도록 지시했다.
괴물의 정체
박진나는 회의의 결론은 알쏭달쏭했으나 연구소원들이 무슨 신호로서 괴물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21센티 파장에 맞추어 덮어놓고 너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어 볼 작정일까?'
"사람이 쓰는 말과 우주 생물이 쓰는 말 사이의 빈도 수가 달라 서로 통하지 않을 텐데……"
사실이지 한국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아, 어, 발음처럼 영어에서는 E, O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들은 아, 어의 빈도 순서로 된 말로서 어떻게 우주 생물과 대화할 작정일까? 박 진나의 이런 걱정도 아랑곳 없이 괴물과 통신하기 위한 장비 동원은 착착 진행되었다. 상오 10시를 기하여 권 박사를 비롯한 과학진이 현장에 도착하여 1백 미터 떨어진 언덕 위에 수소 전파 송수신기를 장치했다.
괴물은 비대한 몸을 움츠린 채 여전히 잠들고 있는 듯 요동하지도 않고 있었다.
"이론 부장! 송신해 보시오."
권 박사의 신호로 이론 부장은 마이크를 한 손에 들고 괴물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구에 사는 인간이다. 우리는 지구에 사는 인간이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
확성기를 통해서 들리는 목소리는 바로 수소 전파와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괴물에게도 전파로서 들릴 것이다.
괴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알았다. 그러나 이론 부장 꾸준히 호출을 계속했다.
"너는 인간을 해칠 작정이나? 또는 도우려는 생각이냐? 무슨 용건으로 지구 안에 나타났느냐? 언제 떠날 예정이냐?"
두서 없이 마구 방송하는 동안 갑자기 일어서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흐느적흐느적 하는 촉수의 세 개를 마치 안테나처럼 꼿꼿하게 세우고 주의를 모으려는 자세를 보였다.
"소장님, 분명히 신호를 포착한 듯한 눈치입니다. 수소 전파가 동조하는 모양입니다."
철수는 권 박사의 옆으로 다가서면서 괴물의 배꼽 둘레에 있는 수많은 렌즈 모양의 혹을 가리켰다.
"아마도 몸 안에서 발광한 광채를 저 렌즈 혹을 통해 발산시키는 모양입니다."
"음, 그것도 그럴 성 싶군. 그런데, 수소 전파가 일부 밖에 동조하지 않는 모양이지, 어찌 된 일인가?"
권 소장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박 진나가 방자하기 나서서 말했다.
"소장님, 보통 말을 신호하면 저 괴물은 마치 암호처럼 들리지 않겠어요? 어느 정도의 인텔리인지 몰라도 혼자서 아무 기구도 없이 지구인의 말을 해독한다는 것은 무리일 거에요. 차라리 소수 신호를 보내 보내세요."
어이가 없는 순간이었으나 아무도 진나의 발언을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저는 수학을 전공하고 있으니까 생각이 났어요. 1, 2, 3, 4, …… 이 정수대로 신호하면 4와 6은 2로 나눌 수 있고. 3으로 나눌 수도 있지 않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해석할 때, 나눌 수 있는 숫자는 뜻이 많은 것 같아 혼선을 일으키기 쉬울 거예요. 절대로 혼선이 일어나지 않고, 한 가지 뜻밖에 없는 숫자가 바로 소수가 아니겠어요."
"소장님, 진나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는 듯 합니다. 소수표를 가져와서 순서에 따라 송신해 보면 어떨까요?"
철수가 찬성하는 바람에 권 박사도,
"그래, 그렇게 해 보지. 아마도 원예부에 소수 표가 비치되어 있을 거야."
연락반원이 뛰어가서 가져 온 소수표를 놓고 방송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괴물은 어리둥절했던 자세를 풀고 언덕을 향하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괴물을 포위하고 있던 경관이며, 구경꾼들은 깜짝 놀라서 저마다 길을 비키며 도망쳤다.
괴물은 신호 소리를 따라서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공연히 소수 얘기를 했나 보다. 괴물이 저렇게 발신기 쪽으로 걸어가면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진나는 마음 속으로 불안을 감추지 못했으나, 용감한 이론 부장은 태연스럽게 소수 표를 읽고 있었다.
철수는 재빨리 달음박질해서 이론 부장 옆으로 다가서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소수표가 111에 이르렀을 때, 괴물은 웬일인지 걸음을 멈추었다.
괴물에게는 총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관은 모두 총을 겨누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이 멈추자 소수표의 방송을 일단 중지했다.
사실은 아슬아슬 했던 순간이었던 만큼 괴물이 주저앉자 사람들도 이마의 식은땀을 씻어 냈다.
철수는 3미터까지 가까이 온 괴물을 지켜보면서 이론 부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저 괴물의 지능 지수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부장께서 읽어 내린 소수 표는 말하자면 음악의 도, 레, 미, 파, ……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음악에서는 도에서 도로 한 옥타브가 끝나는데 저놈이 별안간 멈추는 것을 보니 소수표의 111로서 저놈들의 한 옥타브가 끝나는 모양입니다. 오늘 아침 경찰 개를 잡아먹는 솜씨로 보아 분명히 로봇은 아닌데 도대체 IQ의 정도를 정확히 알아 낼 수가 없군요."
"조금만 더 생각하면 풀릴 것도 같아. 소수에 이번에는 0을 붙여서 호출해 보겠어."
이론 부장 이번인 02, 03, 05, 07, 011, …… 등의 신호를 보냈다.
괴물은 다시 일어서더니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하고 갈팡질팡이다.
"옳지, 저놈의 감응도를 알 수 있겠다. 소수 신호에 0을 붙일수록 활동은 델리케이트하게 되고, 소수 자체는 기호로서 언어 감응을 나타내는 걸 거야."
이론 부장 착상에 따라 전자 계산기로 해답을 내본 즉 그럴듯한 용어표와 행동표가 작성되었다.
송 경위가 작업 중에 살며시 물었다.
"그 소수란 무엇이오. 아까부터 소수 소수 하던데 알 수가 있어야지."
철수는 자기가 대답하는 대신에 발신기 옆에서 다이얼을 들여다보고 있는 박 진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수 말씀이에요? 보통 숫자 중에서 1하고 자기 자신의 수로 밖에 나눌 수 없는 숫자지요. 예컨대 2, 3, 5, 7, 11, 13, …… 등과 같은 소수를 쓰면, 혼동하지 않으니까 통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에요."
"알고 보면 별다른 것이 아니군요. 채소만 먹으면 소증이 생기듯이 소수란 깨지지 않는 수로군."
송 경위는 뻔한 일을 공연히 물어 보았구나 하는 표정을 애써 지으면서, 그들의 곁을 떠났다.
새로 작성된 신호표에 따라 이번에는 철수가 교대해서 괴물과 대화했다.
"너는 어디서 온 생물이냐?"
마이크 소리는 징징 울렸으나, 괴물의 대답 소리는 끼이 하는 벙어리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수신기로 해독된 대답은 훌륭한 문답으로
"나는 프록시마 별에서 사는 생물이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록시마 별이 어디에 있는가 알아다오."
철수는 반원에게 부탁하고 질문을 계속했다.
프록시마 별인즉,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항성인데 광속으로 지구까지 도달하자면 4백 27년이 걸린다.
"너는 무엇하러 지구에 왔느냐? 그리고, 언제 떠날 작정이냐?"
철수의 질문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괴물 쪽으로 집중되었으나, 끼-끼 하는 벙어리 소리 때문에 당장 이 대답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해독된 대답은,
"그 사명은 나도 모르겠다. 다만 비행 대장의 명령으로 낙하했을 따름이다. 언제 떠나느냐고? 그것은 알 수 없다. 비행 대장이 일방적으로 호출하기로 되어 있을 뿐이다."
"너는 왜 오늘 아침에 동물의 피와 나무의 수분을 빨아먹었느냐?"
"배가 고파서 그랬다. 그러나 나는 결코 지구인과 적대적은 아니다. 왜냐 하면 나나 여러분이나 프록시마들의 노예나 다름없다. 우리는 노예끼리 싸우지 않는다."
노예라는 말을 듣자 철수는 권 박사와 이론 부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노예라니 무슨 뜻이냐?"
"두고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자, 괴물은 돌연 그 자리에서 벌벌 떨더니 마치 전기 쇼크라도 받은 듯이 임업 실험장의 한 지점을 향하여 나무를 파헤치면서 헐레벌떡 뛰어갔다.
소수 방송으로 가까스로 괴물과의 통신에 성공한 감시 반원들은 별안간 허둥지둥 도망가는 괴물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 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송 영철 경위가 지휘하는 경관대는 마치 범인을 추격하듯 당장에 그를 뒤쫓아 괴물과 함께 숲 속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소장님, 이게 웬 일일까요?"
철수는 한 손에 붙잡고 있던 마이크를 내려놓으면서 권 박사에게 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걸. 웬 일일까. 순조로운 대화 끝에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은 혹 우주로부터 무슨 지령을 받은 게 아닐까? 우리가 쓰고 있던 파장은 우주 통신의 가장 기본적인 전파니까 상대방에도 통했을는지도 몰라."
과연 상대방의 송수신 장치에 방수되었을까. 중성 수소의 21센티 파장은 정말로 우주의 에스페란토 말과 비슷한 것일까? 괴물과의 도깨비 장난 같은 대화를 듣고 모두 신통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파장이 과연 전 우주적인 통신 방법이라고까지는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권 소장이 호령조로 말했다.
"우리도 뒤를 쫓아가 보자. 코끼리 만하게 커진 괴물이 또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지 않아."
자력선 연구소원들은 무전기며, 마이크 장치를 걸치고 괴물이 도망간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한편, 후닥닥 자리를 뜬 괴물은 임업 실험장의 나무를 헤치고, 정신 없이 제자리로 뛰어와서 주저앉았다.
괴물은 숨도 헐떡이지 않고, 또랑또랑 주위를 살펴보더니 렌즈 비슷한 눈을 깜박거렸다.
다부지게 뒤쫓아온 송 경위는 가쁜 숨을 억누르면서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괴물을 멀리서 포위하고 여전히 경계 태세를 취하였다.
"이건 맨 처음에 괴물을 발견한 장소가 아닌가. 저 놈이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구나."
누구보다도 먼저 뛰어온 철수가 숨을 헐떡이면서 중얼거렸다.
소수 통신을 제안한 여대생 박 진나도 날쌔게 뒤따라와서 철수 옆에 서자 생긋 웃어 보였다.
비로소 관심을 가진 철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느 대학에 다니세요?"
"금강 여대에 재학하고 있어요. 시시하지요?"
"수학을 전공한다니 퍽 희한합니다. 장차 학교 선생을 할 작정인가요?"
"글쎄, 그건 두고봐야겠어요."
철수와 진나가 괴물을 지켜보면서 얘기하고 있는 동안 권 박사 일행이 옮겨왔다.
전파 장치를 풀어놓고 그들은 또 다시 괴물과 통신하기로 했다.
그러나 철수가 마이크를 대고 아무리 숫자를 불러대도 괴물은 못 들은 척 아무 대답이 없다.
마음만이 초조한 가운데 이럭저럭 한나절이 지나자 권 박사는 다시 감시반 몇 사람을 남기고 연구소로 일단 되돌아 가버렸다.
철수는 이날 새벽처럼 대여섯의 감시반원과 남게 되자 참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진나도 서성거리다가 남기로 작정했는지 참나무 근처의 땅 위에 덜렁 주저앉았다.
엽록소 연구소의 화학 반장 박한수는 여동생을 남긴 채 괴물이 물을 다 빨아먹어 버린 느티나무의 가랑잎을 한 묶음 들고 권 박사와 함께 가버렸다.
"이제는 지구전으로 옮겼는 걸. 손으로 생포할 수 없는 것이 분하다."
철수는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혼자 말로 한탄했다.
"저 놈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남의 땅에 와서 낮잠을 자다니 뱃심이 이만저만한 놈이 아니군."
서로 괴물을 욕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전만 같아도 이상한 괴물체가 나타났다면 소문만 듣긴 여기 저기서 구경오는 사람들이 운집하여 뒤끓겠지만, 이제는 세상이 저마다 할 일을 갖게 되어 자기와 직접 관계 없는 일은 넘겨다보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까닭에 이웃 마을 사람들도 아침에 잠깐 구경하고 되돌아가 버려서 괴물과 현장은 한적한 가운데 감시원들의 쉴 새 없는 경계의 눈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우주선의 출현
감시 반원은 연구소의 구내식당에서 배달해 준 도시락을 먹고 저마다 큰 물 주전자를 기울여 더운 숭늉을 따라 마시며 잡담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늘에는 벌써 별이 총총 내보이며 반짝이기 시작하고 북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된 하늬바람은 이따금 찬 기운을 휘몰아치어 오슬오슬했다.
주위가 어두워질수록 괴물만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서치라이트의 눈부신 흰 광선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철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저 괴물이 과연 프록시마 별 사람들의 노예일까? 노예 정도의 존재로서 팔다리의 빨판으로 짐승이며 식물의 물을 빨아먹을 수 있으니, 프록시마 별 사람들의 실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더구나 굉장한 빛을 낼 수 있는 발전 장치를 몸 속에 갖추고 있으니 지구 위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문명이 발달한 것은 틀림없다. 만일 우주인이 여기에 나타난다면 인류를 적대시할까? 또는 친구처럼 반갑게 대할 것일까 아무튼 두고봐야 하겠지만 밤도 캄캄해 졌으니 저 여대생을 우선 돌려보내야 한다.'
한편, 박진나는 그녀대로 묵상에 잠겨 있었다.
'밤이 오면 왜 사람들은 외로운 생각이 드는 것일까. 하늘에는 해보다 훨씬 크고 밝은 별이 은하계만 해도 1천억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왜 지구의 사람들은 태양만을 의지하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 다른 별에서 온 생물이 잠들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가까이 가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평소에 온 우주를 다 아는 척하고 있지만 막상 일을 당하면 사람의 힘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이 있어서 모든 섭리를 지배하고 있다지만 이 경우에는 하느님의 전지 전능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염없이 쫓고 있을 때 철수가 가까이 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미스 박, 이제는 날도 어두워지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집에도 걱정하고 있을 거요. 우리는 여기서 밤새도록 놈을 지켜봐야 하니 미스 박이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요."
"김 선생,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우주 생물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의문이 샘물처럼 솟아 나와서 그래요."
박진나는 방긋 웃으면서 자기가 있고 싶을 때까지 있겠다고 우겼다. 여자가 고집하는 일을 구슬러 본 적이 없는 철수는 더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남쪽 하늘 쪽에 유성이 떨어지듯 아무 소리 없이 코발트색의 불빛이 하나 나타났다. 밤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의 빨갛고 파란 불빛보다 훨씬 빠른 그 불빛은 이쪽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괴물을 지키던 사람들은 경관이고 감시반이고 할 것 없이 갑자기 불안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혹 우주인이 나타나는 것이나 아닐까? 송 경위는 재빨리 소리쳤다.
"일단 후퇴해야 한다. 경관은 빨리 언덕 너머로 후퇴해서 집결하라."
불안을 감추지 못한 경관들은 후다닥 후다닥 일어서서 언덕을 목표로 달음박질을 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임업 실험장 상공에 다다른 불빛은 하늘 높이 별안간 멈추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불빛의 모양이 비행접시처럼 둥그런 것인지 로켓처럼 그 끝이 뾰족한 것인지 아직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철수도 급히 감시반원을 언덕 너머로 피난시키고 코발트 불빛의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저게 무슨 불빛이냐?"
연구소의 권 박사가 워키토키로 물어왔다.
"아직은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철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권 박사가 아직도 언덕 아래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제기랄, 가라고 할 때 돌아갔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공연히 돌아와서 말썽을 부리는구나.'
철수는 어둠을 뚫고 이상한 괴물체를 응시해 보았으나 무슨 모양인지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저 우주선도 역시 투명체로 만들어진 것일까? 모습을 짐작할 수 없다니 말이 되나. 더구나 고요 그대로 공중에 정거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철수는 이럴 때일수록 더 침착해야 된다고 자기 자신에 타이르면서 우주선의 동정을 주시했다. 함께 지켜보던 동료들을 되돌아보니 그들도 두 눈을 부릅뜨고 공중에 정지한 코발트 불빛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소수 전파 수신기에서 끼이 끼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어 있다시피 몸을 움츠리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괴물 쪽으로 돌렸다.
어둠 속에 서치라이트의 밝은 광선이 둥그렇게 점찍고 있던 괴물은 돌연 몸을 가볍게 흔들더니 발광하기 시작하지 않는가!
괴물의 푸르스름한 몸빛은 차츰 밝아져서 마침내는 수천 룩스에 달할 만큼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이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그 중에는 엎드려서 고개만 내밀고 놀라움에 떠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공중 높이 떠 있던 우주선은 괴물의 신호 불을 알아보았는지 거의 불을 끄다시피 컴컴한 모습으로 쑥 내려와서 괴물이 서 있는 근처의 보리밭 위에 착륙했다.
헬리콥터처럼 요란스러운 프로펠러의 폭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로켓처럼 굉장한 분사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우주선은 마치 무성 영화의 화면처럼 싱거운 까닭에 사람들은 더욱 신경을 날카롭게 긴장 아니할 수 없었다.
철수는 나지막한 소리로 권 박사에게 보고했다.
"소장님, 방금 우주선이 착륙했습니다. 우주선의 모양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둥그렇게 보일 뿐, 그 똑똑한 형태는 짐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괴물이 우주선 쪽으로 걸어갑니다. 층계처럼 보이는 사다리를 괴물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몸집이 코끼리만 한데도 빨려 들어가듯 출입문을 넘어서니까 그렇게 밝던 불이 꺼진 듯이 보이지 않는군요.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지켜 볼 작정입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하고 우주선 쪽을 살피고 있었다. 진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고 처음으로 보는 기적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불끈 쥔 두 손에서는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우주선의 문이 다시 열려 불빛이 새어 나왔다
괴물 비슷한 그림자가 서너 개 보일까 말까할 때, 돌연 휑! 하는 소리가 들리자. 철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치 현기증에 휩쓸린 듯 철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 저기서 앗! 엇!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 역시 발목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송 경위도 진나도 나머지 경관들도 모두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철수의 손에 꽉 쥐인 워키토키만이 홀로 외치고 있었다.
"감시반! 감시반! 김철수 없느냐?"
권 박사의 초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현장의 사람들은 마취제라도 마신 듯 모두 쓰러지고 아무 대답도 헐었다.
괴물들은 우주선으로부터 걸어나와 사람이 깔려 있는 언덕 근처에서 한 사람씩 살펴보더니 그 중 세 사람을 끌어안고 되돌아 가버렸다.
권 순장이 급히 현장에 출동했을 때는 우주선은 그림자조차 없고, 언덕 너머 여기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새로 나온 연구소원들이 붙들고 흔드는 바람에 졸도한 사람들은 하나 둘씩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권 박사는 맨 먼저 철수를 찾았으나 아무리 전등으로 비추어보아도 철수는 없고, 다만 워키토키가 땅 위에 뒹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송 경위 없어졌고 박진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소장님! 아마도 세 사람이 납치되어 간 듯 합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임업 부장 박시영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큰일 났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야. 여보게, 그 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어떻게 됐단 말인가?"
권 박사는 의식을 되찾은 감시반원을 붙들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글쎄요. 휑 소리가 나자 발목의 기운이 쑥 빠지고 머리가 아찔하더군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써 보았으나 온몸의 밸런스가 무너져서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아 저절로 쓰러지자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 연구원은 아직도 얼빠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설명했다.
"음! 마취제도 전개 쇼크도 아니고 하물며 광선이 번쩍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레이저 광선의 작용은 아니겠고 도대체 무슨 쇼크를 받았을까?"
권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워키토키를 주어들고 우주선이 내려앉았다는 지점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권 박사는 걸으면서 마음 속으로 여간 후회하지 않았다.
'괴물을 감시시키지 않았던들 이런 사고가 생기지 않았을 것을 내가 너무 꼼꼼했나 보다. 그렇지만 과학자로서 모처럼 대하는 우주 생물의 생태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진리를 캐내는 일에 충실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생기고 또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진리에 접근할 수 없으니 진토를 위한 이율배반은 어느 시대나 고역이란 말이야……
열댓 명의 사람이 우주선이 내렸던 보리밭으로 와서 밝은 서치라이트로 우주 물체의 자취를 비춰 보았다.
무슨 실마리라도 잡아서 도깨비 장난 같은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리의 푸릇푸릇한 새잎은 군데군데 가볍게 밟혀 있을 뿐 이렇다 할 증거나 단서를 잡을만한 물건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소장님, 괴상하군요. 프록시마 별의 생물들이 어떤 문명을 갖고 있길래,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먼 곳에서 우주 공간을 내왕하려면 최소한 광속을 이용한다더라도 무슨 흔적쯤은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임업 부장의 의문은 바로 모든 사람의 의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우주인들이 혹 중력을 좌우할 수 있는 새로운 소립자 장치를 갖추고 있지나 않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지구 위를 오갈 뿐만 아니라, 사람의 균형을 방해하여 실신케 하는 일은 중력 통제 장치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인데……"
권 박사 일행이 우주선의 기능을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있는 동안 철수와 진나와 송 경위는 우주 생물에 납치된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납 치
우주선은 여전히 비행하고 있는데 송 경위의 손목 시계는 똑딱똑딱 하는 소리를 거의 멈추고 하오 8시 10분을 가리킨 채 좀처럼 초침이 돌지 않고 있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송 경위가 맨 먼저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누운 채 둘레둘레 주위를 살피니 철수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으며, 여대생도 엎드린 채 잠들고 있었다.
송 경위는 기어가서 철수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김형! 김형! 정신차리시오. 어서 일어나요."
철수는 꿈속에서 멀리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의식하자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어이구. 송 경위 아니요.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도대체 여기는 어디요?"
"나도 모르겠소. 우선 정신이나 차리고 나서 살펴봅시다."
사람의 말소리를 듣자 진나도 몸을 꿈틀거렸다. 세 사람은 의식을 회복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 어쩔 줄을 몰랐다. 제정신을 되찾은 세 사람은 오직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셈이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찔하더니 이 모양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요."
송 경위는 갇혀 있는 방의 둘레를 샅샅이 살피면서 중얼중얼했다. 그는 손으로 바닥이며, 벽을 만져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폭신폭신한 스펀지 같기도 하고 우유 빛깔의 생고무 같기도 한데 무엇으로 만든 물건일까?"
송 경위가 혼자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 김철수는 떴던 눈을 다시 감고 아까부터 일어난 일의 경위를 정리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진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귀속의 삼반규관에 이상이 생긴 탓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쓰러질 리가 있나. 우주선의 출입문 쪽에서 반짝하더니. 삼반규관이 마비된 일은 그놈들이 레이저 광선을 사용한 까닭은 아닐 것이다. 만일 레이저 광선을 썼다면 그 빛에 쪼인 사람은 한 사람뿐이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쓰러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들은 혹 중력을 좌우하는 중력총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소리도 냄새도 빛도 없는 중력총일는지도 모른다.'
철수가 이런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박진나는 이제야 정신을 가다듬어 철수가 누워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 와서 철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철수는 내심 깜짝 놀랐다.
"김 선생! 정신을 차리세요. 걱정할 건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아요. 무슨 수가 꼭 생길 거에요."
철수는 두 눈을 뜨고 물끄러미 진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순간에 진나는 마치 자기 집 안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연할 뿐더러 생글생글 웃음을 띠고 있지 않는가. 철수의 가슴이 도리어 아파졌다.
'이 여학생은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는데 데 또 공연히 앙탈을 하더니 기어코 납치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누구의 속을 썩히려고 이러는 걸까.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철수의 마음은 결코 놓이지 않았다.
"김형?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요? 우리 세 사람을 어쩌자는 작정일까요?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요."
송 경위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설마 죽일 리야 있겠어요. 죽이려면 벌써 몰살 시켰을 거요. 오늘 아침에 괴물이 일러주지 않았어요. 자기는 물론이지만 사람도 장차 프록시마 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상대방의 실력이 우리보다는 월등히 훌륭하니까 덤벼본들 아무 소용이 없겠소. 그저 처분을 바랄 뿐 순종하는 것은 도리어 이롭다는 것은 송형이 경찰 경험으로 더 잘 알텐데……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는지 모름지기 기다려 봅시다."
철수는 모든 일을 운에 맡긴 듯 이렇게 말하고 나서 또 다시 두 눈을 감아버렸다.
방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아 저마다 누워 천장을 바라 볼 밖에 신통한 생각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는 낙담의 전주곡이기도 하다.
박진나는 고요 그대로의 방안이 환하게 비치는 광원이 무엇일까 하고 천장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타원형처럼 길다랗게 둥그런 천장은 마치 반투명의 유리처럼 밖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천장 자체에서 발광하는 것도 같아 알쏭달쏭한 꿈 속만 같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밖으로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들이 들어있는 방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과연 방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정지하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김 선생, 기다려 보는 것도 좋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되나요? 어떻게 해서라도 도망해 볼 생각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진나가 먼저 서두르기 시작했다.
"도망해 보시구려. 문고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탱크 속에서 무슨 수를 쓸 수 있단 말이요. 가만히 기다려 봅시다."
철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말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종잡을 수 없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송 경위는 송 경위대로 재빨리 괴물들로부터 후퇴하지 못한 일이 후회가 되었다.
"아휴!"
송 경위가 긴 한숨을 내리 쉬었을 때, 방 안의 어디선지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과 목소리라기 보다는 마이크 소리 비슷하게 전기를 입은 듯한 굵은 소리였다.
"너희들은 이제 화성에 도착했다. 여기는 지구와는 달라 너희들 마음대로 살 수 없는 환경이다."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얼이 빠진 세 사람은 서로 얼굴과 눈을 지켜보면서 마이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희들은 지금 우주인의 포로가 된 것이다. 지구 위에서는 기쁘다든지, 슬프다든지 하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겠지만, 우주 세계에서는 오직 이성만이 있을 뿐이다. 너희들은 쓸데없는 생각은 다 멀리 버리고 지금으로부터는 우주의 율법과 지시에 따라야만 한다. 스스로를 지키는 자는 살 것이요, 스스로를 반역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오는 듯한 말소리가 끝나자, 세 사람은 도깨비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서로 상대편의 얼굴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까까지의 기억이 생생하고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마이크 소리는 화성에 도착했다고 일러주지 않는가!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고 과학 정신을 믿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단 십여 분 사이에 화성에 도착하는 가능성을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철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다리를 꼬집어보았다.
틀림없이 다리는 아프고 정신은 말똥말똥하지만 마치 몽유병자나 다름없는 심경을 속일 수가 없었다.
아무도 말이 없고 휘둥그레진 두 눈은 간신히 초점을 가누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무리 원자력을 쓴 우주선이라 할지라도 지구를 떠나려면 얼마만큼의 동요이라든지 폭음 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가만히 누워 있던 그대로 아무 충격도 없이 화성에 도달했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자, 이쪽으로 내려오게!"
방의 왼편 벽에 장치해 둔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말미잘 같은 괴물이 나타나 서 있다.
철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 위에서 맨 처음에 본 괴물의 크기는 큰 문어처럼 생기고, 그 놈이 나중에 피와 나무 액을 빨아먹고 코끼리 만하게 커지더니,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괴물은 낙지만 하게 오므라들고 있지 않는가?
그 조그만 생물이 사람의 말을 써가면서 내려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진나는 몸이 오싹해지자, 철수의 팥을 붙들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문 밖의 눈부신 광선을 배경으로 서 있는 조그만 괴물이 마치 커다란 왕거미 같기도 하여 철수의 이마 위엔 진땀이 송글 솟아났다.
"나오라면 나가 봐야지요."
송 경위는 핏기 없는 얼굴로 철수를 되돌아보면서 눈짓으로 재촉했다.
세 사람은 죄인처럼 초라한 자세를 겨우 가누면서 입구를 향하여 걸어갔다.
"여보, 놀랠 것은 없소. 내가 지구에 내려갔던 우주 가족이요. 내 이름은 오후레족 33호요. 당신들을 지하 도시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맨 앞장을 선 송 경위는 이 괴물이 아까까지 지구에 있던 그 놈이라고 하는 말을 듣자 얼마간 마음이 풀어진 듯 했다.
그런데 말소리는 들리지만 눈이 어디에 있고, 입이 어디 붙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어 징그럽기만 했다.
송 경위의 꽁무니를 따라 나가면서 철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화성이라면 이대로 나가도 될까. 산소도 부족할 테고 지구와의 중력 차이로 몸이 휘청휘청할 텐데……'
그러나 삽시간에 꿈처럼 일어난 사건이어서 이러쿵저러쿵 자기 생각을 내세워 볼 겨를도 없을 뿐더러, 괴물에게 대꾸해 볼 용기조차 잃어버린 채였다.
세 명의 포로는 한 발자국씩 소리 없이 출입구 쪽으로 접근해 갈 따름이었고, 괴물은 잠자코 인간의 동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드디어 문 밖으로 나왔다.
아! 지구 위의 그림에서 본 그대로 나무 하나 없는 평광지가 한없이 눈에 띄고, 저 멀리 강물이 흐르는 듯한 풍경이 아닌가!
사막 같기도 하고 홍수에 휩쓸린 평야 같기도 한 이 땅이 바로 화성이란 말인가!
그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보라색 하늘 저 편에 낯익은 지구가 떠있고, 그 곁에 붙어있는 것처럼 떠 있는 것이 바로 달이었다.
서로 손목을 붙잡은 채, 넋을 잃고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이들은 우주 생물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구나하는 실망에 사로잡혀 감개무량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내려갑시다. 당신네 지구 나라 구경은 천천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요."
오후레 33호는 독촉한다.
마치 비행기의 트랩을 내리는 것처럼, 그들은 또박또박 사다리를 내려서 땅위에 섰다.
땅은 딱딱하고 잔디 비슷한 풀이 엷게 군데군데 돋아 있었다.
그들은 지구 위에서나 다름없이 걸을 수 있었으며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호흡에 아무 지장이 없고, 약간 발이 가벼운 듯한 촉감을 빼놓고는 걸음도 마음 대로였다.
"김 선생, 참 이상한데요. 마치 요술에 걸린 듯해요. 아무리 지구 위의 과학자들이 엉터리라고 할지라도 수십 년을 두고 관찰한 화성의 실태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어요. 학교에서 배운 과학 지식이 모두 거짓말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 보세요. 발걸음이 이렇게 자유스러우니, 첫째 질량의 법칙이라든지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 무색할 지경이에요."
진나는 흙 위를 깡충깡충 뛰어 보면서 과학 지식을 비웃었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어. 도깨비에 홀린 것만 같아, 흑 내가 미치지는 않았나 하고 아까부터 볼을 꼬집어보고 있어요."
화성의 지하 기지
그들은 5백 미터쯤 걸어갔을까.
오후레 33호는 앞장서서 둥근 지붕을 한 플라스틱 집 안으로 세 사람을 인도했다.
송 경위는 속으론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망측스러운 오후레 33호와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지금부터 어디로 가자는 것이요? 공연히 애 먹이지 말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면 빨리 처치하시오."
송 경위는 반 농담조로 오후레에게 말했다.
"여보 잡아먹기는 왜 잡아먹어요. 비행 대장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요. 비행 대장은 지금 화성의 지하 기지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소."
가까이서 보니, 오후레의 눈은 셋이었다.
둘은 사람처럼 입 근처에 나란히 있고 제 3의 눈이 둥그런 머리 꼭대기에 붙어 있어 하늘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입보다는 주둥아리라고 하는 편이 적합할 정도로 뾰족한 문어 모양의 입이 있고 콧구멍은 마치 하모니카 칸처럼 구멍이 여러 개 있고, 팔 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촉수에는 흡반과 같은 액체 흡수 구멍이 무수히 붙어 있으며, 배와 허리에 상당하는 부분에는 마치 탄띠처럼 수많은 렌즈가 몸에 박혀 있었다.
송 경위는 또 물어 보았다.
"당신은 지구 위에 있을 때 사람의 말을 이해도 못하고 발음도 못하더니, 어떻게 말할 수가 있소?"
"그 동안 화성까지의 비행 중에 지구인의 말을 분석해서 전자 계산으로 해 줬을 따름이오. 일정한 문법만 발견하면 단어의 뜻은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는 법이오."
송 경위는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철수와 진나를 쳐다보았다.
오후레 33호는 앞장을 서서 반 투명체의 플라스틱 비슷한 뚜껑이 덮여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랐다.
세 사람은 차례로 의자에 앉았다.
오후레는 마치 자동 엘리베이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한 촉수로 단추를 눌렀다.
자동 에스컬레이터는 아무런 요동도 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주선의 밀실과는 달리, 이번에는 창문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열 대여섯이나 될까? 기차의 레일처럼 나란히 줄지어 깔려 있는 지하 철도는 지금 오후레가 운전하고 있는 것만 이 아마도 시속 3백 킬로미터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하 기지로 가니까, 에스컬레이터의 진동이 다른 곳에 번질까봐 천천히 운행하고 있는 거요. 여기는 지구보다는 훨씬 간결하고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소."
오후레의 설명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진 철수는 정말로 지구와는 다른 문명을 실감하자 처음으로 물어 보았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십 몇 분에 비행해온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요?"
"그것은 간단하지요. 중력을 이용했을 따름이오. 알고 보니까 지구의 문명은 겨우 알파 문명에 지나지 않소. 이제 원자력을 손대고 있으니 중력을 활용하기까지는 아직도 수 백 년 걸릴 것이오. 태양의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려면 불과 8분밖에 걸리지 않지 않소. 중력의 속도는 광선이나 마찬가지오. 다만 중력을 본질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구인의 신비 사상이 원시적일 따름이오. 중력은 가까운 최근 점에서 가장 강력하고 멀리 떨어질수록 기운이 약해져서 극 원점에서는 차츰 제로에 가까워지지 않소. 모든 물질이 극대와 극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중력 역시 맥시멈과 미니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질인 것이요. 물질은 또한 에너지인 까닭에 중력 에너지를 전환시키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법이오."
오후레의 모양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론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럴듯하다고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 우주선은 중력을 이용해서 자유자재로 우주를 여행하고 있지 않는가!
"중력을 어떻게 전환시킨단 말이오."
철수는 귀를 기울이며 질문을 계속했다.
"중력은 언제나 두 물질 사이에 수직으로 작용하고 있소. 까닭에 물질과 물질은 밸런스를 취하고 있는데, 중력이 서로 잡아당기는 실 모양의 선형이라고 생각하는 지구인과 지식은 잘못이오. 중력은 모래알처럼 깔려 있는 장형인 것이오. 그래서, 우주인들은 공간 속에서 수직으로 깔려 있는 중력을 마음대로 그 작용 반응을 바꾸어 동력으로 삼을 수 있소."
자력선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처해오던 철수였지만, 오후레의 설명은 알 것도 같고 꿈만 같기도 하여 갑자기 침울해졌다.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화성에 내렸을 때도 우리는 그 통로에 미리 지구와 똑같은 중력장을 만들어 적합한 산소와 중력을 마련한 임시 공간을 가설해 놓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무 불편도 느끼지 않았을 거요. 지구인들은 공간의 최소 단위인 시간에만 사로잡혀 아직도 모든 것을 시간이 해결하는 것으로 믿고 있소. 풍선 속에 공기를 불어넣을 수 있듯이 공간의 테두리로서 그때그때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오. 뭐라고요? 산소가 도망가버릴게 아니냐고요? 그것은 염려 없소. 일정한 곡률을 가진 공간을 만들어서 그 가장자리나, 둘레에서 중력을 가속하거나 증폭하면 그만이오."
송 경위는 흥미 없는 얼굴로 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고 있었으며, 철수는 머리 속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스파크를 느끼고, 진나는 혹 우주인이 질의 수학 세계에 살고 있지나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오후레가 이윽고 일어선다.
"여러분 지하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또 한 번 꿈속에서 깨어난 듯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차에서 내린 오후레는 뚜벅뚜벅 앞장서서 걸어갔다. 보도는 스펀지를 깔아 놓은 것처럼 폭신폭신하고 지하도의 천장에는 형광 도료를 발라 놓았는지 보라색 빛이 밝았다.
송 경위, 박진나, 김철수의 순서로 세 사람은 오후레의 뒤를 따르고 있는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그림자가 없을 때는 불안하거나 허전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비행 대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송 경위는 오후레의 어깨 너머로 물어보았으나 목소리는 어딘가 메마르게 들렸다.
"당신네들 시간 단위로는 아마도 10분쯤 걸릴 겁니다. 별로 멀지는 않아요."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해 주는 오후레의 걸음은 기계적으로 옮겨지고 있을 뿐이다.
세 사람이 뒤따라 걷고 있는 시간은 사실상 짧은 것이었으나, 침묵은 그들이 걷고 있는 거리를 수 킬로나 되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박진나는 철수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나란히 걸으면서 한풀 가신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김 선생님 미안해요.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공연히 우겨서 미안해요. 이제는 고집을 부리지 않겠어요."
진나는 자기 때문에 모두 뜻하지 않은 황변을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요. 만사를 운명에 맡길 도리 밖에 없지 않소. 기운을 내서 다가올 시련을 이겨내야만 되겠소."
철수는 철수대로 앞으로 어떤 일에 부딪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으나, 침착한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이르고 있던 것이었다. 사람은 흔히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생각을 남에게 말로서 나타내는 법이다.
지하 보도는 한없이 뻗어 있었으나, 오후레는 한참 걷다가 이윽고 오른 쪽 골목길로 접어 들어갔다.
거기에는 문이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문을 열고 오후레는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라탔다.
그들이 차례로 탄 에스컬레이터가 아마도 3m 높이쯤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오후레는 다시 내려서 이번에는 양쪽에 방문이 가지런히 서 있는 복도로 들어갔다.
'이제 비행 대장이라는 작자의 사무실에 가까워진 모양이구나. 도대체 우주선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철수는 마음 속을 전류처럼 흐르는 흥분에 도리어 긴장을 느꼈다.
오후레가 잠자코 어떤 방문 앞에 서자, 세 사람도 한꺼번에 걸음을 멈추고 방문을 쳐다보았다.
무한대의 마크가 셋 붙어 있는 표지판이 마치 빌딩의 호수를 나타내는 숫자처럼 걸려 있었다.
오후레가 노크를 하니까 방문은 저절로 열렸다.
방안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응접 세트가 놓여있고 벽 위에는 기차 시간표보다 더 복잡한 숫자 표가 걸려 있었다.
"다 왔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비행 대장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오후레는 나지막하게 일러주면서 방안의 저편 옆문을 열고 들어갔다.
프록시마의 비행 대장실
세 사람은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앉는 자리가 지구상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마음 한구석에 안도감이 우러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심장의 맥박은 뛰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꿈 속의 일인 것만 같아. 화성의 지하 대륙 속에 이런 호화판 사무실이 있을 수 있을까?"
송 경위가 두 팔을 위로 뻗으면서 기지개를 켜고 침묵을 깨뜨리자 또한 상냥스러운 말소리가 뜻밖에 들렸다.
"있을 수 있지요. 있고 말고요."
눈이 휘둥그래진 세 사람은 일제히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앗! 하는 놀라움이 거의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진나는 한 손을 입에다 대고 가까스로 막아댔다.
우주인이 거기 서 있지 않는가!! 우주인은 우뚝 서 있었다.
온몸이 파랑으로 빛나는 우주인!
세 사람은 등뼈가 머리 끝으로 달음박질하는 고통에 못 이겨 피하려고 애써 보았으나 다리의 기운이 쑥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카메라의 렌즈가 순식간에 붙잡은 영상처럼 그들의 두 눈에 비친 인상은 차디찬 녹색 인간이었다. 놀라 자빠지다시피 당황하여 얼굴이 굳어진 세 사람의 얼빠진 꼴을 보자 프록시마의 별사람은,
"호호호호……"
한바탕 웃어댔다. 옥으로 만든 구슬을 굴리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 철수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헷갈리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몸부림치고 싶었다.
그 모양은 마치 침팬지가 그 무엇인가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평소에 이른바 문명의 탈을 쓰고 있지만, 워낙 큰 놀라움을 당했을 때는 원시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우주인은 소파 저 편에 따로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자 세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씩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놀랄 것은 없어요. 어떤 의미에선 여기가 지구보다 차라리 안전하고 편할 거예요. 참, 오후레. 차를 끓여 와요."
프록시마의 별 사람은 참으로 태연스럽게 말하면서도 사람의 몸 냄새가 몹시 못마땅한지 이마를 찌푸리면서
"여러분 몸에서 산소 냄새가 심하게 풍기는군요. 역시 산소권에 사는 사람은 어딘지 다르군. 여러분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는 눈에는 여러분이 마치 원시 동물처럼 비칩니다. 우리 별나라로 데리고 가면 동물원의 인기 짐승이 될 거예요. 하하하하"
우주인은 고갯짓을 하면서 세 사람의 기이한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후레가 차를 날라 왔으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겁이 얼마간 풀리자 세 사람도 우주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주인은 미국 영화배우 율 브린너처럼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이랴, 눈썹도 수염도 없는 까까중 그대로의 대머리 위에 다시 똬리를 얹어 놓은 양 살덩이로 된 불룩한 테두리가 하나 끼어 있었다.
두 눈은 얼굴 깊숙이 들어박히고 눈썹 대신에 가느다란 뼈가 튀어나와 있었으나, 해골처럼 보기 사납지는 않았다.
귀와 코와 입은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으나 다섯 손가락 중 엄지손가락이 둘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보통 대로였다.
발은 신을 신고 있어 당장에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온몸의 푸른 빛깔이 차가운 인상을 던져주고 이마 위의 이른바 똬리 살만이 불그스레한 빛을 띄고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불과 3, 4초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서로 처음으로 마주 보는 마음의 시간은 주마등처럼 흘러 며칠을 두고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이 느껴졌다.
송 경위가 큰기침을 하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 먼 곳까지 납치해 왔소?"
질문하려던 말꼬리가 어느덧 따지는 목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태양계 탐험대의 제 3 비행장이요. 이름은 삼무한, 발음하기 쉽게 사무한이라고 해 둡시다. 나는 여러분을 납치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의 문명을 보여 주려고 안내해 온 것이요."
사무한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난 뒤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고 있던 지구의 문명은 우주적인 규모와 표준에서 볼 때, 알파 문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소의 환원 상태로부터 생명이 생긴 지구 위에선 아직도 산소 없이는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과학자들은 원시적인 막대기 대신에 총알이 튀어 나가는 총을 겨우 만들어 냈고, 그러한 물리적인 원리를 반복해서 요즘은 프로톤 프로톤(p-p)사이클을 해방시키려는 핵실험에 겨우 성공했을 따름이오. 지구의 문명은 아직도 화학 원리에 매달리고 있는 중이오. 화학 반응을 토대로 하는 문명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희랍 문자를 빌리자면 알파 다음에 베타(β) 문명까지 발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의 도수가 더 높아져서 만유 인력을 이용하게 됨 때부터는 감마 문명으로 옳기고,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델타 문명 시대요. 우리들 프록시마 별 사람들은 지금 델타 문명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사무한의 설명을 듣자 세 사람의 머리 속은 어리둥절해졌다.
철수는 오후레가 우주선의 원리를 설명했을 때보다 더 큰 쇼크를 느끼면서 사무한의 구슬 같은 말소리에 안 홀릴 수 없었다.
"그 까닭에, 실례의 말씀 같지만, 송 영철 경위가 갖고 있는 권총은 한낱 어린아이의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요. 그 총알로 프록시마 별 사람들이나 우주 생물들은 결코 상하지 않습니다. 호호호호……"
사무한은 또 한바탕 큰 소리로 웃어댔다.
사무한은 웃어댈 때마다 얼굴의 혈관을 흐르는 푸른 피가 유난히 눈에 띄어 지켜보는 사람의 살갗을 오싹 움켜쥐는 듯한 냉혈동물의 감촉을 발산하고 있었다.
철수는 그네들의 문명이 소위 델타 단계까지 발달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미미한 지구인이라 할지라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이 생각했다.
"정작 당신네들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면, 거기에는 더욱 순화된 도덕률이 있을 게 아니요. 우리의 의사도 묻지도 않고 사람을 일방적으로 납치하는 짓은 분명히 틀린 일이요.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행동을 강요한다는 것이 이른바 델타 문명의 도덕률이란 말이오?"
철수는 기운을 내서 덤벼 보았다.
그러나 사무한은 빙그레 웃으면서 철수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양 힐끗 그의 눈을 엿보고 나서 말했다.
"그럴듯한 말씀이요.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한 일은 강요할 수 없으며 억지로 시켜본들 오래 갈 수 없는 법이오. 우리의 세계에도 확실히 그러한 사회 통념이 있었소. 그러나 그것은 역사책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도덕률이지 지금은 전혀 차원이 달라 여러분과 같은 하급 생물에 적용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소. 말을 바꿔서 쉽게 말하자면, 지구인의 경우 아직은 진정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합의라든지 동의라든지 하는 행동이 성립될 여건이 없을 거요. 다만 거래의 조건만이 문제될 것이오."
사무한은 박진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앉아 있는 진나 양은 여자요. 나도 프록시마의 여자이지만 예컨대 사랑의 조건을 비교해볼 때, 우리의 세계와 지구인의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를 거예요. 우리의 경우, 우주를 이 곳 저곳으로 여행해야하는 까닭에 그때 그때의 환경에 지배를 받기 쉽소. 가령 산소권에 들어간다든지, 탄소권에 들어간다든지 할 때, 우주선 밖의 환경이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주 사회학은 최고는 5대까지의 배우자 계보를 예정표로서 미리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동의한다든지, 합의한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존재 이전에 이미 그 존재는 장의 원리에 따라 규정되고 있는 것이오. 인류의 경우는 사랑의 법칙을 따지자면 마음이 착하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마음이 허영에 날뛰기 쉬운 불확정성 원리 비슷한 상황 때문에 언제나 상대방과 사랑을 거절하기 쉬운 것이오. 미스 박도 내 말을 알아차릴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진나는 제멋대로 지껄이는 사무한을 마음 속으로 여간 미워하고 있지 않는 참에, 그 역시 여자라는 말을 듣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행 대장! 우리는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끌려 온 것은 아니에요.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그리고 우리를 납치해 온 목적이나 조건이 있다면 속시원하게 이 자리에서 말씀해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서 해치우고 돌아가야 될게 아니오."
진나의 히스테리가 폭발한 셈이다. 그러나 사무한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책상 옆에 매달려 있던 스위치를 꾹 눌렀다. 그러자 숫자표가 걸려 있는 반대편 벽 위에 해가 떠오르듯이 스크린이 나타났다.
작업 예정표
화면은 점점 뚜렷해지고 거기에는 밀림이 보였다.
"잘 보시오, 이 밀림에서 어떠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해 보시오."
화면은 한없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 있는 밀림을 조금씩 클로즈업시키더니 대여섯 사람이 귤을 따먹고 있는 장면에 고정시켰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인류에 틀림없고 다만 두 서넛은 오후레와 똑같은 말미잘 모양의 생물이었다.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으나, 세 사람의 귀에는 낯설어서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뙤약볕 밑에서도 밀짚모자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세 사람은 화면의 밀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 물끄러미 쳐다 볼 따름이었다
"저 화면 속에서 얼굴이 약간 젊어 보이는 사람이 바로 이집트의 모타칸 박사요. 방금 왼손으로 귤을 따들고 있는 분이오. 이 곳에 온지 한달 쯤 되었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예정표에 따라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오."
사무한의 설명에서 모타칸 박사의 이름을 듣자 철수의 두 귀는 솔깃해졌다.
'모타칸 박사라면 식물 자력선과 광물성 자력선의 통합 비전을 내세운 학자인데, 어찌하여 이 곳까지 납치되어 왔을까?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은 어떤 무서운 계획을 진척시키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디 잠자코 있어 보자. '
철수만이 아니었다. 화면에서 목격하듯 세 사람 외에도 지구인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사무한은 다시 스크린의 스크린을 끄고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감상이 어떠냐는 듯 눈초리로 보았다.
성급한 송 경위는 당장에 외쳤다.
"그 농장 같은 숲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지구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어서 말해 보시오."
"조건이요? 조건은 아니오. 다만 여러분이 탄산가스를 최대한도로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른바 에덴의 화원과 같은 동산에서 즐기는 동안에 우리의 목적은 달성될 것입니다."
사무한은 넌지시 웃는 얼굴로 얘기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업 예정표를 갖고 오겠다는 것이다.
철수는 뜻밖의 조건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탄산가스가 어떻단 말인가. 원 이런 일도 다 있을까? 여보, 송 경위, 탄산가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우."
철수는 송 경위의 오른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확실히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탄산가스를 만드는 법을 알아야지. 아무나 무턱대고 만들 수 있나!"
송영철은 놀림을 받고 있지나 않나 하고 생각했다.
"뭘, 그까짓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당분으로 분해되어 맨 나중에는 산소와 결합해서 에너지로 불타버릴 때, 저절로 탄산가스와 수분으로 분해되지 않아요. 아마도 무슨 속셈이 있을 거에요."
진나는 거리낌없이 단정하면서도 공연히 복받쳐 오르는 외로움을 씻어낼 도리가 없었다.
사무한은 응접실로 되돌아와서 세 사람에게 작업 예정표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탄산가스가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던 지구의 여러 나라의 문자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른바 헌법 제 1 조의 규정이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산다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는다로 요약됩니다. 간혹 두 가지를 절충해서 사람은 먹기 위해서도 살고 살기 위해서도 먹는다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델타 문명을 자랑하는 프록시마 별사람들이 헌법을 말한다면 우리는 생물을 개조하고 합성하기 위해서 산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세계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고 양의 세계가 아닌 질의 세계에 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예정표를 잘 읽어보면 저마다 해야할 일이 스스로 판단될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서 얘기합시다."
비행 대장 사무한은 사무적인 말투로 지시하고 나서 오후레를 불러 세 사람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명령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세 사람은 오후레의 뒤를 또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오후레가 앞장서서 안내해 준 방은 호텔의 객실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네모진 방이 아니라 벽의 한 쪽이 반 호형이어서 그들은 이 건물의 원통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안에는 푹신푹신하게 보이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사무용 책상 위에 놓인 텔레비전은 아마도 텔레비전 전화인 듯 지구 위의 그것보다는 거추장스럽지가 않았다.
텔레비전 외에 왼 쪽 벽 위에 세계지도 만한 크기의 스크린이 매달려 있는 것이 특히 철수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 방에서는 송 경위가 쉬시오. 다른 분들도 이와 똑같은 구조의 옆방에서 한 분씩 쉬게 될 겁니다. 저 책상 위에 텔레비전 전화가 있으니 서로 연락하려면 번호가 적힌 단추를 한 번만 누르면 됩니다. 저마다의 번호는 아까 받은 작업 예정표에 다 적혀 있습니다."
오후레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은 손에 쥐고 있던 예정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0707이 내 번호요?"
송 경위가 반문하자
"그렇소. 잘 기억해 두시오."
오후레는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김철수의 번호는 2828이었고 박진나는 3232번이었다.
오후레는 송 경위를 남겨 놓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뒤따르면서 철수가 돌아다보니 송 경위는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억지로 지워 보였다.
진나는 송 경위의 옆방을 차지하게 되고 철수는 다시 그 옆방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후레, 잠깐 앉아서 설명해 주시오. 저 벽에 걸린 스크린은 뭘 하는 거요?"
철수는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는 기왕에 이질 문명에 접하게 됐으니 될 수 있는 대로 온갖 지식을 알아 두고 싶은 충동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스크린? 벽에 걸린 저것 말이오?"
"그렇소."
"저건 독서판이요. 우주인들의 책인 셈이지요. 여러분도 지구에서 이제 마이크로 필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우주의 책은 알기 쉽게 말해서 마이크로 필름을 스크린에 사영하는 방법을 쓰고 있소. 자기가 읽고 싶거나 찾으려는 자료를 저편 박스의 전자 계산기와 상의하면 곧장 마이크로 필름의 번호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번호에 따라 필요한 필름을 찾아 내서 다시 영사 장치에 넣어주면 자동적으로 한 페이지씩 큼직하게 영사됩니다. 마이크로필름에는 수백 권의 책이 송두리째 압축되어 인쇄되어 있으니까요. 여러분의 영화와 전축의 원리를 합한 것이나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철수는 오후레의 말대로 영자 스크린을 움직여 보았다.
알맞게 큰 글씨가 한 페이지씩 비췄으나, 처음으로 보는 프록시마 문자를 철수가 이해할 리 만무했다.
다만 그는 글자의 첫 인상이 대체로 타원형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주무시오. 다시 연락하겠소."
오후레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 방안에 홀로 남은 철수의 마음은 갑자기 긴장이 풀어졌다.
그는 까무러치듯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보는 우주 문명이며 우주인과의 대화는 자기의 명이 나중에는 어떻게 될 망정, 우선 철수로서는 커다란 놀라움에 얽힌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철수는 유리창이라곤 한 장도 없는 방안에 누워서 어느덧 명상에 잠겼다.
옛날 사람들은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어왔다. 7세기쯤 중국의 풍도 사람이 목판 인쇄를 시작한 뒤, 그 기술이 서양으로 건너가 15세기에 비로소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쇄를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는 이조 이전부터 한국에서 발달되었다. 책도 맨 처음엔 종교 서적이었으나, 차츰 문학과 과학 기술서로 발전해 갔다. 사람들은 책을 대량 생산하려고 활자를 점점 작게 만들다가 책의 종류가 너무 많아지자, 이번에는 분류의 필요상 마이크로 필름이 생겼다. 이처럼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 중에서도 시청각에 중점을 둔 스크린 영사가 등장하여 사람들은 한자리에 앉아서 집단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책과 사람의 눈의 거리가 30센티쯤이면 가장 이상적이라더니 이제는 수 미터 내지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스크린을 통해서 글을 읽게 됐구나. 이렇게 발전해 나간다면 독서법은 장차 어떻게 변할 것인가?'
철수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만 잠들고 말았다.
어쩌면 호흡 작용을 이용한 장치일까? 방안의 전등이 얼마 후에 저절로 꺼지고 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컴컴한 방안에 텔레비전이 밝아지자 진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김 선생님, 주무세요?"
그녀는 한두 번 철수를 부르다가 대답 없는 첫날밤이 싱거워졌는지 텔레비전 스위치를 끈 듯 서서히 화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철수는 푹 쉬고 난 뒤 잠에서 저절로 깨어났다. 멀리서 차량이 굴러가는 듯 가벼운 진동이 전해 올 뿐, 밖을 내다 볼 유리창조차 얼어 새벽인지 낮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습관대로 일어나 변소에 다녀와서 세수를 하려고 세면대의 물 꼭지를 틀어보고 깜짝 놀랬다.
거기서는 시원스러운 물이 흐르지 않고 찐득찐득한 우유 빛깔의 액체가 나오지 않는가!
철수는 어리둥절한 채로 내민 손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건 없어요. 그대로 세수하면 됩니다. 이 액체는 식물에서 추출한 영양수니까요. 피부에 바르면 그대로 흡수되어 신진 대사가 더욱 활발해 집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오후레가 뒤에 서서 넌지시 일러 주었다.
철수는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듯 마음 속으로 불쾌한 기분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이 액체 속에 손을 담가 보았다.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그 액체는 매우 시원했다.
더욱이 얼굴에 바르자 살갗 속으로 스며드는 상쾌한 기분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산들바람을 맞는 듯 했다.
철수는 세수하고 나서 비로소 아침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얼마 후 오후레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흔히 볼 수 있는 지구의 식당 구조와는 달리 방의 한 가운데에 기다란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어 마치 회의실 같은 인상을 던져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당은 오락실과 회의실을 겸하고 있었다.
송 경위와 박진나는 아미 와서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그들은 철수를 보자 몇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친구를 대하는 양 무척 반가운 말투로 인사했다.
오후레는 약장 비슷한 반투명의 상자 속에서 소시지며, 알약을 물에 녹인 국물이며, 떡 같은 빵을 꺼내와서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식사는 셀프 서비스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만은 내가 웨이터 노릇을 하겠지만, 다음 차례부터는 저마다 먹고싶은 음식을 집어와서 잡수시고 치우십시오."
무표정한 오후레는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송 경위는 배고픈 김에 먼저 손을 내밀어 빵을 덥석 쥐어 입에 넣었다.
스펀지 케이크처럼 슬슬 입 속에서 녹는 맛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구미를 당겼다.
"굉장히 맛있는 맛이로군.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샤보뎅 비슷한 빵나무에서 만든 것입니다. 씹을수록 싫증이 안 나는 게 이 양식의 특색이지요."
한 입을 깨문 진나도 과연 그 상쾌한 맛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 샤보뎅을 빻아서 찌는 겁니까? 굽는 거예요?"
진나는 요리법을 알아 두고 싶었다.
"빻아서 만들다니요? 빻아서 가루를 내면 다시 이겨서 만들어야 되지 않아요, 과정이 귀찮아서 손이 더 가게 됩니다. 알아보니 지구 위에서는 과정을 복잡하게 해서 그 때마다 이익을 취하려는 풍조가 있는 모양인데, 문명 단계로서는 퍽 원시적이지요. 여기서는 벌써 그런 단계를 극복하여 과정을 최대한으로 간략하게 하고 있습니다. 샤보뎅 빵도 식용 샤보뎅의 껍질을 벗겨서 찌는 동시에 방사선 처리만 해 놓으면 백 년이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후레의 유창한 설명을 듣고 있는 사이에 세 사람은 이럭저럭 식사를 끝냈다. 철수는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자기도 꼭 식용 샤보뎅의 비밀을 알아 두어야겠다는 마음의 충동을 느꼈다.
그들은 식당에서 나와서 지난번에 타고 내려온 차를 타고 지상으로 나왔다. 송 경위는 햇볕을 쪼이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구, 땅위로 나오니까 살 것 같구나. 사람은 역시 훤칠한데서 살아야지 두더지처럼 땅 속에서 살기에는 알맞지 않아. 김 선생도 이제 얼굴색이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송 경위의 심정은 또한 세 사람의 심정이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까 더 시원한 것 같아요. 어제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아직은 지구가 보이지 않는구나."
진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넓은 하늘을 쳐다보며 지구를 찾고 있었다.
에덴 동산
오후레는 여전히 앞장을 섰다. 그들은 움직이는 도로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른 쪽 벌판을 횡단하고 있었다. 평지에 깔아 놓은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는 시속 60킬로쯤 될까, 관광 여행에 비기자면 최악의 관광 지대처럼 살풍경한 화성의 표면 대륙을 에스컬레이터만이 씩씩거리면서 질주할 따름이었다. 철수는 아마도 남쪽 지평선 위에 떠 있는 화성의 위성 포보스를 목격할 수 있었다.
"미스 박, 저 지평선 위에 떠 있는 달 모양의 천체가 바로 화성의 위성 포보스일 거요. 지구의 과학자 중에는 저 포보스가 화성의 생물에 의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햇빛을 반사하는 모양이 어딘지 금속성 같은 느낌도 주지요?"
"글쎄요. 그럴듯하기도 하는데 아무리 저렇게 큰 물체를 인공적으로 만들었을까 꼭. 김 선생님도 웃기지 마세요."
이럭저럭 두 시간은 앉은 채 굴러왔을까. 그들은 양편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계곡 길을 따라 들어가자 마치 비행장의 격납고처럼 보이는 돔형의 건물을 보았다.
"저기 보이는 온실이 바로 여러분의 작업장이요. 온실의 넓이는 20만 평쯤 될 거요. 기온은 언제나 아열대 지방과 똑같이 유지하고 있으니까, 약간 더울는지 모르나 익숙해지면 그런 대로 지내기 편할 것이오. 예정표에 적힌 대로 여러분은 저 처마에서 3개월 동안 일해야 됩니다."
오후레가 수많은 촉수 중의 하나를 쳐들고 가리키면서 설명을 끝내자, 에스컬레이터 도로는 작업장 문 앞에서 일단 멈추었다.
요령이 생긴 그들은 차례대로 내려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 모양의 작업장의 지붕은 지하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투명의 셀레핀이라는 물질로 덮여 있었다.
철수가 나중에 알게된 셀레핀이라는 물질은 플라스틱도 알루미늄도 아니면서 마치 반도체 작용처럼 바깥 온도와 내부 온도를 조절해주고 내부의 화학 원소의 비율을 일정하게 조정해 주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
"이제 예정표대로 여기 머무르고 있다가 저 사무용 게시판에 스크린에 나타나는 지시를 읽고 시간이 되면 숙소로 돌아오시오.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갑니다."
오후레는 이내 돌아가고 말았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우두거니 서 있었다.
작업장이란 말뿐이지 온실 속은 마치 남양의 무인도를 방불케 할 만큼 갖가지 열대 식물이 무성하고 있었다.
코코아․파파야․망고․바나나․파인애플․오렌지 등등 주렁주렁 나무 위에 열린 과일은 여간 탐스럽지가 않았다.
화성의 대륙 위에 이렇게 훌륭한 열대성 온실이 있다니 지구 위에선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세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가 처음으로 무인도의 정글 속을 헤매던 것처럼 조심조심 밀림 속을 파헤치고 전진해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질서 없는 정글 같았으나, 속으로 들어갈 수록 식물의 재배 구역이 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구나 돔형의 천장 위에 여기 저기 붙어 있는 둥근 렌즈 모양의 거울은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텔레비전 장치일까?
"김 선생, 예정표에 적힌 대로라면 이 과수원의 열매를 얼마든지 따먹어도 상관없는 걸로 되어 있는데…… 어디 바나나를 하나 시식해 볼까요?"
송 경위는 바나나를 여러 개 꺾어서 먼저 입맛을 본 뒤 철수와 진나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저놈들에게 언제 붙잡혀 죽을는지도 모르는데 먹을 수 있는 대로 먹고 봐야지. 미스 박 그렇지 않아요?"
송 경위는 이번엔 입맛을 다시면서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너무나 많이 잡수면 배탈이 나서 토해내야 되니 몸조심 해야죠."
진나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 온실이야말로 이른바 에덴의 화원이나 다름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 곳이 한국의 어느 곳이어서 여기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은 진나의 마음을 도리어 감상 속으로 이끌어 갔다. 이 사치스러운 과수원 안에서 먹고 싶은 과일을 마음대로 따먹으면서 소풍하라는 지시를 그들은 액면대로 납득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탄산가스 생산에 협조해 달라고 하더니 이게 무슨 수수께끼일까? 사람은 쉬고 있을 적엔 한 시간에 약 반 입방 피트의 산소를 호흡하고 중노동을 할 패는 그 10배쯤 되는 산소를 소모하는데, 이 때 생기는 탄산가스의 양은 그보다 약간 적을 따름이다. 도리어 사람은 들이마시는 공기 속의 탄산가스의 양이 3% 이상이면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6%가 넘으면 헐떡이게 되기 마련인데,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의 속셈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식물이 탄산가스를 호흡하여 산소를 방출한다고 해도 식물과 사람 사이에 탄산가스를 에워싼 무슨 궁극의 비밀이 있을까?'
철수는 과수원의 새파란 잎사귀들을 응시하면서 신공덕리의 임업 실험장에 못지 않은 의문에 빠져 들어갔다.
'혹 모타칸 박사를 만나게 되면 물어봐야겠다.'
그는 마음 속으로 자문자답하면서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노란 오렌지 한 개를 따들었다.
껍질을 벗겨보니 웬일일까 과육의 칸이 반달 모양으로 막혀있지 않고 중심을 향하여 석류처럼 각추 모양으로 칸이 막혀 있지 않은가!
철수는 뜻밖에 마주친 색다른 과실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를 발견한 듯한 자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에덴의 화원이나 산책하듯이 여기 저기를 돌아보았으며, 모처럼 걷는 기분은 한편으로 마음의 여유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박진나의 노랫소리
진나는 과수원 안이 이제는 답답해졌다고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온실 밖에서 어느덧 지은 즉흥시를 노래에 맞추어 부르고 있었다.
분홍빛 얼굴이 저기 떠 있네
오목한 보조개 방실거리며
그 무엇인지 눈짓하건만
화성인 돌아서니 철이 없구나.
낯익은 내 고향 우리네 지구
내 다시 언제나 되돌아가리.
태양을 따라 도는 젖줄이련만
불러도 대답 없는 인류들이여.
진나의 목소리는 그다지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눈물을 뚝뚝 흘려가면서 목메어 부르는 노랫소리는 처량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김 선생, 아무래도 미스 박이 돌기 시작한 게 아니요?"
송 경위는 귓속말로 철수에게 물었다.
"설마? 그러나 모르지요."
진나의 동정을 무심하게 보아온 철수의 신경이 이내 곤두섰다.
"나가 봅시다. 미스 박이 간 곳으로."
두 사람은 밖을 향하여 쏜살 같이 달음박질했다.
철수와 송 경위가 다가선 줄도 모르고 박진나는 염치없이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물결치듯 흔들면서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진나의 모습은 도리어 두 사내에게 소외감을 던져 줄뿐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철수는 미스 박! 하고 꾸짖을 수도 있고 타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슬픔의 세계 속에 온갖 감정을 적시고 있을 때, 감히 그 세계 속으로 함께 뛰어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는 법이다.
주춤하던 생각을 뿌리치고 철수가 말을 걸었다.
"미스 박! 울어서 뭘 합니까. 운다고 가엾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비행 대장이 미리 일러 준 말을 잊으셨나요. 감상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지구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당분간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소. 어서 정신을 차리고 이성으로 돌아가요."
송 경위도 무슨 말을 해보려다가 진나의 어깨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보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흐느껴 울던 진나는 잔잔한 연못에 던진 돌의 파문이 저절로 사라지듯 어느덧 슬픔을 거두고 말았다.
손수건을 꺼내서 한참 동안 눈물을 씻은 진나는 이제야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방긋 웃어 보였다.
순간 세 사람의 마음 속에는 또 다시 태양이 떠오른 것 같은 안도감이 되돌아 왔다.
"어린애처럼 울어서 미안해요. 지구를 바라보니 공연히 슬픈 생각이 치솟아 오르지 않겠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까? 우리가 살아 있는 사실을 지구에 전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유난히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말하는 진나의 태도는 아직도 어디까지나 학생다운 순진함이 넘치고 있었다.
"왜 없겠어요. 기회를 봐서 오후레에게 부탁하든지 또는 통신사를 매수하든지 무슨 묘안이 있을 거요. 미스 박! 이제는 제발 울지는 마세요. 아까는 진나 씨가 미친 줄 착각했단 말이다. 핫하하하……"
송 경위의 너털웃음은 화성의 계곡을 메아리치듯 유쾌하게 울렸다.
"자, 모두 기운을 차리고 온실 안으로 되돌아가야지. 거기에는 우리가 배울만한 식물의 새로운 지식이 많아요. 미스 박도 다시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구……"
철수의 말에 세 사람은 걸음을 온실 쪽으로 옮겼다.
철수는 어느덧 세 사람의 반장 격이 되고 만 것이다.
'여자란 어디를 가거나 염치가 없단 말이야. 자기 감정과 세계 속으로 모든 것을 끌어넣으려고 하니 되는 말인가. 마치 요술사 모양으로 울음으로 사람을 홀리려고 들거든……'
철수는 마음 속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적엔 호통을 쳐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좀전의 온실 안으로 되돌아오자, 진나는 언제 내가 울었더냐 하는 식의 명랑한 표정으로 앵두 열매를 따먹기 시작했다.
철수는 철수대로 지구상의 식물을 발전시키는 이 온실의 비밀을 밝혀 보려는 욕심으로 나무의 뿌리 근처를 파헤쳐 보기도 했다.
고도로 발달된 식물의 과실들이 과연 잎파랑이의 광합성에 중점을 둔 것인지, 또는 뿌리에 전자력을 작용시킨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성의 식물의 비밀이 하루 사이에 풀어질 것으로 손쉽게 생각하지는 않고 다만 잘 익은 열매의 씨를 입수해 놓기로 작정했다.
언젠가는 지구로 되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도록 철수는 오렌지의 씨앗을 발라 옷 속에 감추어 두었다.
세 사람은 첫날의 작업을 이럭저럭 마친 셈이다.
몇 시간 후에 벌써 저녁이 된 것인지 텔레비전 스크린은 지하 기지로 되돌아오라는 지시를 전해왔다.
"정말로 미치겠는 걸. 차라리 포로답게 중노동을 시키면 시켰지, 과수원에 소풍 보낸 것도 아니고 나무 열매만 먹고 어디 살 수가 있겠나."
송 경위는 투덜거리면서 온실을 나와 에스컬레이터의 맨 앞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철수와 진나가 자리에 앉자 송 경위는 스위치를 눌렀다.
에스컬레이터는 아침에 오후레가 운전할 때와 마찬가지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태양의 그림자를 길게 끌고 돌아가는 화성의 살풍경한 평야를 바라보면서 묵묵히 자기 생각에 잠겼다. 지하 기지로 내려가는 정류장에서 그들은 차를 갈아타고 개미 한 마리 없는 지하철도를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3개월 동안 이따위 일정을 되풀이해야 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저놈들은 무슨 수작이 있기에 우리들에게 속시원하게 계획을 밝혀주지 않을까? 아무리 문명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인간성을 무시하는 생활은 싫증이 나는 걸."
송 경위는 만사가 답답할 뿐이었다. 크게 하품을 하면서 한 손으로 입을 막는 꼴이 진나의 눈에는 여간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송 선생은 그래도 무던하군요, 오늘날까지 사모님이나 애들 걱정을 입밖에 내지도 않으니 훌륭한 인격자 같아요."
박진나는 웬일인지 송 경위가 앉아 있는 뒷자리에 그의 가족들이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미스 박도 농담하시네. 그래 내가 우리 집 옥희 이름을 부르면서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단 말이오? 불러도 대답 없는 시늉을 나타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래도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나중에 증언할 수 있지 않아요. 언젠가 사모님을 만나는 날엔 송 선생이 천하 태평이었다고 꼬아 바쳐 드릴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은 만사가 귀찮소. 구워 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하시오."
진나는 공연히 말을 해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구와 화성의 거리가 수억 만리나 떨어져 있는데도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마치 서울서 인천이라도 가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물리적으로는 머나먼 거리가 심리적으로는 무척 가깝게 여겨지고 물리적으로는 요 수삼 일간에 일어난 일들이 심리적으로는 몇 년 동안 겪은 듯이 느껴지는 판단의 동기와 척도는 무엇일까? 비슷한 모양에서 연역되는 연상 작용의 탓일까, 콩알만한 것이 태산처럼 보이고 태산 만한 것이 주먹에 잡힐 듯 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역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공존하는 좌표의 원점 같은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는 거겠지.'
진나는 제자리걸음으로 결론 없는 공상 속에서 숨박꼭질 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차에서 내려 사무한이 있는 빌딩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없는 빌딩의 식당을 찾아들어 식사하기로 했다.
'어서 저녁을 먹고 이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면서 화성의 식물과 동물과 광물 사이의 엔트로피를 계산해 보아야지. 언제까지나 우물쭈물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
철수는 마치 미륵불 같은 혼자만의 생각을 되씹으면서 이날도 샤보뎅 빵을 소리 없이 되씹었다.
송 경위는 철수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밥을 먹고 있는 것을 힐끗 힐끗 쳐다보면서 그가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혼자서 짚어보았다.
'아무리 그가 과학자라고 해도 미스 박의 머리가 차츰 돌고 있는 상태를 알 수 있을까? 분명히 박진나는 신경과민으로 노이로제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을.'
송 경위는 주스를 마시면서 이번에는 진나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짝 보았다.
진나의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커져 보였다.
빵을 씹는 입의 움직임이 불규칙하고 마치 동물과 식물이 투쟁하는 모양의 야성적인 제스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식당에서 나온 후, 저마다의 방에 들어갈 때까지 서로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벌써 공통된 화제를 잃고 있었고, 세속적인 인사말을 가식할 기운조차 없었다.
지구 위에서 흔히 쓰이는 인사말은 그런 대로 전통적인 환경의 굴레 속에서 어딘지 자기 방위를 취하려는 심정을 격식화시킬 따름이다.
화성의 지하 기지 안에서 눈에 안 보이는 환경의 압력 때문인지 그들은 서로 인사말도, 교제의 외교 사례적인 말도 해볼 필연적인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히들 주무세요. 오늘밤에는 꿈속에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런지……"
진나는 언짢지 않는 표정으로 애원하다시피 간신히 인사말을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을 대지 않아도 방문은 극초단파 식인지 자동적으로 열리고 닫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서로 눈만 쳐다보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방향을 각각 바꾸고 기운 없는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누가 보고 있어야만 기운을 차리는 것이 지구상의 인간의 습성인 것일까?
철수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 옷을 벗고 전자 계산기를 일일이 살피면서 프록시마 문자를 해독해 보려고 마이크로 필름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혼자 있다는 것처럼 쑥스러운 일은 없는 모양이다.
철수는 스크린에 사영되는 우주 문자의 공통성을 분석해 보려고 지켜보았으나 혼자서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문턱을 넘어 설 아무런 여건이 없는 것을 깨닫자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워 버렸다.
개인이 온 누리의 역사를 혼자의 힘으로 넘어설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일까?
노이로제의 치료
철수는 어느덧 잠들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송 경위와 철수가 식당에서 만났을 때, 한 사람이 없는 일을 맨 처음에는 그다지 걱정하지 못했다.
"김 선생, 미스 박이 아마도 늦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지요. 전화를 걸어 볼까요?"
송 경위는 경찰에서 여러 사람을 대해보던 경험 때문에 어딘지 석연치 않은 박진나의 행동이 걱정스러웠다.
"글체, 고단했던 모양일까? 빨리 불러 내야지. 우리끼리만 아침밥을 먹을 수도 없고……"
철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송 경위는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올리고 3232에 맞추었다.
그러나 스크린에는 방 속의 정물 환경만이 나타날 뿐, 침대 위에도 세면대 앞에도 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웬 일일까? '
송 경위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육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김철수는 송 경위만큼 놀라지는 않은 듯했다.
송 경위가 아무리 호출해 본들 박진나는 그림자도 대답도 없었다.
(실인즉 진나는 간밤에 비행 대장 사무한의 지시로 정신병원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밤중에 가위에 눌린 듯 잠꼬대인지 헛소리인지 알 수 없는 신음 소리에 놀랜 사무한은 3232의 지구인을 병원으로 이송시켜 버렸다.
지구 위라면 동료들에게 밤중의 돌발 사고를 알려 줄 불문율의 관습이 있으나, 여기는 전혀 차원이 다른 화성일 뿐더러 녹색 사람들의 생활 습성은 지구의 그것과는 딴판이었다.
포로의 탓은 아니겠지만 한 사람의 운명을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걱정한다는 지구 위의 습성은 사무한의 수준에서 볼 때, 초 원시적인 공동 운명체의 발생학적 단계에 지내지 않는 것이었다.
철수와 송 경위가 잠들어 있을 때, 진나는 오후레의 시중을 받고 모타칸 박사가 쉬고 있는 과수원 쪽의 병원으로 이송되고 말았다.
진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모든 일이 이미 끝나고 난 뒤였다.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단 안경을 쓴 노인이 옆의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진나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랬으나 슬그머니 두 눈을 다시 감고 이게 웬 일인가? 자문해 보았다.
분명히 꿈 속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은 바꿔지고 만 셈이다.
사람의 의식이란 결국 선입감을 수정하는 연속 작업이 아닐까?
자기의 선입견을 수정하지 않거나 순간적으로 수정하지 못할 때, 놀라움이라는 뜻하지 않는 생각이 감전화되는 모양이다.
진나는 감은 두 눈을 뜨지 않고 의식의 단층을 이어보려고 마음의 연속성을 숨가쁘게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가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는 자각이 없는 까닭에 심리적인 그래프의 선을 이을만한 공통된 바탕을 발견할 리가 없다.
'모르겠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난번에 스크린에서 보던 사람인데, 철수 씨는 그를 이집트의 유명한 모타칸 박사라고 일러 준 적이 있다. 왜 모타칸 박사의 방에 내가 있는 것일까? 차라리 솔직하게 물어볼까? 모른척하면서 상대방의 설명을 들어볼까?'
진나는 마음 속에서 마하 3쯤 되는 속도로 사태 판단을 서둘렀다.
그러나 신통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같은 지구 위의 인류인데 설마 자기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예감만이 진나의 눈을 뜨게 했다.
"미스 박이랬지요. 의식을 회복했으니 기쁩니다. 나는 이집트의 식물 물리학자인 닥터 모타칸이요. 놀랄 것은 없습니다. 미스 박은 신경 과민증에 사로잡혀 사무한의 지시로 어젯밤에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요. 사무한을 비롯한 우주인들은 마치 벌레의 운동 법칙을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사람의 운동 법칙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감정이라는 개개인의 불확정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스 박이 향수에 사무쳐 마음의 분열이 일어난 행동을 그들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당분간 미스 박을 위해서 운하 지대의 휴양지에 다녀오라는 분부요. 그의 뜻을 잘 따라야지 우리는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모타칸 박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조용히 일러주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웃음이란 어느 시대의 어디서나 적의가 없다는 표시인 것이다.
진나는 나이 먹은 외국인 앞에서 후다닥 일어서서 대꾸할 수도 없어 똑바로 누운 채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나는 전혀 모르겠어요.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그 동안 흥분 상태가 계속된 모양이지요. 쉬라면 쉬고 일하라면 일해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어요. 사무한은 여자라고 자청했으니까 설마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요. 그래 박사님하고 운하 지대로 가야 하나요? 우리 동료들과는 아무 연락도 못한 채?"
진나는 상냥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모타칸 박사는 어딘지 어질게 보여 마치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암, 진정하셔야지. 함께 온 철수 군과 송 경위에겐 나중에 사무한이 직접 설명하겠지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 인간들은 프록시마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수준으로 볼 때, 마치 원시적인 짐승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 정도밖에 인류가 발달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자 일어나서 함께 운하 쪽으로 가봅시다."
모타칸 박사가 재촉하는 대로 진나는 머리를 손으로 다듬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섰다.
운하 지대의 휴양소
모타칸 박사는 벌써 밖에서 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는 마치 쪽배처럼 길다란 모양이었으나 바퀴가 하나도 없었다.
'자동차 마저 중력을 이용한 것일까?'
진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리하여 모타칸 박사와 함께 넓은 바다와 같은 운하 지대의 휴양지에 도착하니 새하얀 모래사장에는 수많은 오후레 족들이 마치 대천 해수욕장에서처럼 자외선을 쪼이고 있었다.
진나는 차에서 내리자 이 진기한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보지."
모타칸 박사는 재촉했다.
모타칸 박사의 뒤를 따라 진나 양이 들어선 집은 거의 반투명체로 된 셀로판 가옥이었다.
그 집은 언뜻 보기에 2층인지 3층인지 아리송했다. 마치 소라 껍데기 모양의 구조였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여기서 몸조리를 해야됩니다. 나는 맨 꼭대기 방을 쓸 테니, 미스 박은 그 아랫방을 쓰십시오. 이 집은 밤이 되면 나선형을 따라서 자동적으로 땅속에 파묻히고 해가 뜨면 저절로 땅위로 솟아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답니다. 아무래도 내가 윗방을 사용하는 것이 예의일 거요."
대머리가 반들반들한 모타칸 박사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두 팔을 펼쳐 시늉해 보이면서 말했다.
"오늘은 우선 쉬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해수욕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풀릴 겁니다. 그럼 나는 올라갑니다.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부르세요."
모타칸 박사는 회전 층계를 밟으면서 위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진나는 아휴 하는 한숨을 내리쉬면서 가까운 의자에 몸을 던졌다.
분명히 바닷가까지 왔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머리 속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였다.
혹, 프록시마 인들이 자기만은 격리해서 무슨 인체 실험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오후레와 같은 무지막지한 동물에게 감시하도록 맡겼을 것이다.
'모타칸 박사와 함께 있도록 한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정말로 나는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이 그렇게 약한 여성이 되고 말았을까?'
진나는 요리조리 상환 판단을 서둘러 보았다.
얼마 후 퉁 동 당 하는 가벼운 음률이 들리더니 방이 송두리째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해변가에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진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는 밝은 해가 이미 눈부신 광선을 번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운하 지대의 아침은 빠른 것인지 벌써 물에 들어가는 꼬마 오후레 족들이 많았다.
진나가 여고 시절에 오빠 박한수를 따라 만리포 해수욕장에 놀러갔던 즐거운 추억을 더듬고 서 있을 때, 모타칸 박사가 층계를 내려 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박사님, 먼저 내려가세요. 아직 세수도 못했어요, 곧 내려갈게요."
"허허, 잠꾸러기시군. 그러나 잘 쉬었다니까 마음이 놓이는군."
모타칸 박사는 미소를 띄우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진나도 부랴부랴 세수를 마치고 머리를 빗고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모타칸 박사는 코오아 수프를 마시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이 운하 지대에는 먼지도 없어 자외선 기운이 여간 강하지 않소. 지구 위에선 보통 파장이 2천 9백 옹스트롬 이하의 자외선은 공기 중의 먼지에 흡수되어 지표까지 도달하지 못하는데, 여기에는 2천 9백 옹스트롬 정도는 능히 도달 할 수 있소. 지구 위에선 2976 옹스트롬의 자외선을 쪼이면 살갗이 타서 벗겨지는 선번(Sunburn)현상을 일으키지만, 오후레 족은 더 짧은 자외선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후레 족들은 대낮의 해수욕을 피하고 아침과 저녁에만 물에 들어가고 있소. 살갗이 벗겨지면 그만큼 신경을 더 써야 하니 미리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죠."
"그런데 박사님, 저는 여기서 얼마 동안 휴양해야 되나요? 함께 온 친구들과 제가 합류할 수 있을까요?"
"글쎄 사무한은 미스 박을 걱정해서 이 곳으로 보낸 것이니까 좀 쉬고 있으면 다른 동료들과 만나게 해 주겠지요."
그러나 진나는 어쩐지 앞일이 까마득한 것만 같았다. 모타칸 박사는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 바다 저 편의 섬까지 드라이브하자고 권했다. 그들은 여기까지 타고 온 쪽배 모양의 바퀴 없는 자동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 자동차는 물위로 들려서 마치 호버 크래프트처럼 수면 위에 살짝 뜨면서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장치 때문인지 요란스러운 엔진이나 분사기 소리가 나지 않아 머리를 스쳐 가는 바람만이 질주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미스 박! 화성의 운하에서 한 여름을 즐긴다는 것을 전에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일 거요. 그러나 바로 이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오."
모타칸 박사는 더듬더듬 말문을 열고 지구의 현실과 화성의 현실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일러 주었다.
"이 운하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6천 미터 가량 될 거요. 지구 위의 바다는 해면으로부터 10미터 내려갈 적마다 수압이 1기압씩 늘어갑니다. 그래서 보통 잠수부는 수심 40미터까지 내려가서 작업을 할 수 있고 특수한 경우, 깊이 90미터까지 내려갈 수도 있으나,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2분에 지나지 않소. 지구는 이러한 조건에 비하면 화성의 경우는 중력 관계로 깊이 3백 미터까지 넉넉히 내려갈 수 있지만 프록시마 인들은 굳이 바다 속으로 내려가지 않고 필요할 때는 일정한 해면과 물을 물리적으로 증발시켜 버리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더 많은 열량의 에너지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점이 우리들 지구인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소."
진나는 날개가 돋친 듯 달려가는 수상 자동차 위에서 말해주는 모타칸 박사의 설명이 척척 머리 속에 들어가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람의 말이나 설명은 그 때와 장소가 완전히 일치할 때, 아무 장애물 없이 100%로 상대방의 대뇌에 새겨지는 것일까?'
진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만일 모타칸 박사의 이러한 설명이 무더운 교실에서의 강의였다면 따분해서 머리에 들어갔을까?'
노 박사는 말을 이어갔다.
"아까 물가에서 본 오후레 족을 보면 남녀의 구별이 없지 않아요.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면 아마도 자기 관리가 잘 되어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다만 형식적인 심벌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라는 통일 상으로 합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타칸 박사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지구의 현실을 살펴 볼 때 이런 점에 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의 몸에 비교해서 말하겠습니다. 수많은 정자 중의 엘리트 하나가 난자와 결합해서 세포 분열을 시작할 때, 맨 처음에 소화 기관이 되는 것을 내배엽이라고 부르고, 다음으로 근육과 뼈가 되는 것을 중배엽이라 하고, 맨 나중에 신경계통과 뇌를 구성하는 것들 외배엽이라고 칭하지요. 내배엽 - 중배엽 - 외배엽의 형성 과정은 퍽 흥미가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를 인간의 역사의 발전 과정과 비겨 볼 때, 비슷한 점이 많이 나타납니다. 원시 시대에 사람은 식생활을 해결하려고 무척 애써왔고 지금도 애쓰고 있는데, 이것은 내배엽 대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지요. 다음으로 인간은 스스로의 근육과 팔다리를 해방하려고 산업 혁명을 일으켰는데, 중배엽 시대라고 일컬을 수도 있겠지요. 그 다음에 사람은 스크린을 통한 매스컴을 발달시켰고, 최선을 유행시키고, 전자 계산기를 개발하여 이른바 중배엽 시대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포의 분열 과정과 역사의 발견을 이렇게 비교해 보면, 맨 처음에는 농업 혁명이, 다음에는 산업 혁명이 두 번째로 두뇌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경제학 분야에서도 비슷하게 해석하여 제1차 산업을 수산과 농업에 두고, 제 2 차 산업을 제조업에 두고 제 3 차 산업을 상업이나 정보․교육․서비스업에 두고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스 박! 어떤 학자는 인류의 발전 과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 속에서 재현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일을 기억하시겠지요. 그러나, 나는 거꾸로 사람의 개체의 발달이 인류의 역사의 진도를 규정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와 개체는 레시프로칼 하지만 처음의 주체는 역시 사람이니까요."
모타칸 박사는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불은 보이지도 않은 채 연기만 풍기기 시작했다.
벌써 수상 자동차는 섬에 다다른 것이다.
"외배엽 시대로 접어든 인류의 역사가 크게 혼란을 일으키고 또한 개인의 도덕이 흐리멍덩해져 가는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섬으로 차를 몹시다."
나는 모타칸 박사가 일러주는 역사 발전의 구름다리에서 깨어난 듯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가서 앞을 내다보았을 때, 시커먼 괴물들이 우글우글 하는 것을 목격했다.
"앗! 저것은 또 무엇일까?"
깜짝 놀라면서 진나는 모타칸 박사의 왼팔을 잡았으나, 박사는 당장에 아무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사무한과의 협상
한편, 식당에선 박진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철수와 송 경위는 아무리 3232를 찾아도 찾아 낼 도리가 없어 오후레의 사무실을 불렀다.
오후레도 방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오후레가 미스 박을 납치해 간 것이 아닐까? 김 선생, 오후레를 찾아봅시다."
송 경위가 후닥닥 일어서면서 재촉했다.
"송형, 진정해요.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먼저 사무한에게 이 일을 보고해야 되지 않겠오. 사무한의 사무실로 함께 가봅시다."
철수는 어디까지나 침착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송 경위 못지 않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딜 가게 되면 찍소리라도 연락은 있을 텐데…… 무슨 급한 일이 생겼을까?"
철수는 혼자 말을 하면서 앞장서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그리하여 5층에 있는 사무한의 사무실에 와 보니 무한대 대 기호가 셋 여전히 붙어 있었다.
송 경위가 다짜고짜 노크를 했다.
문은 노크를 안 해도 저절로 열려지는 것을 방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이 앉아 있으니 사무한이 의젓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웬 일이시오. 두 분 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김철수가 나서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함께 납치 되어온 박진나 양이 어젯밤 중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렸소. 귀하는 혹 그 행방을 모르나요."
"호호호호? 그런 일로 그렇게 새파랗게 흥분하십니까? 진나 양에겐 아무 일도 없소. 어젯밤에 꿈 속에서 갑자기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경련하는 것을 오후레를 시켜 모타칸 박사에게 보냈습니다. 의사와 상담하나마나 노이로제가 심하니 모타칸 박사에게 부탁하여 지금 운하 지대의 휴양지에서 당분간 쉬도록 했소. 무슨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사무한의 상냥스러운 목소리는 결코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하 지대가 어디이며, 멀쩡한 사람을 병자라고 따돌리는 심보가 무엇인지, 두 사람에겐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운하 지대로 가서 진나 양과 만날 수 있게 해 주시오. 그녀의 심정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니까,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면 노이로제는 하루 사이에 해소될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와 대등한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 좋은 알고 있겠지요.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 화성입니다. 여러분은 프록시마 별 사람들의 포로라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어느 틈에 오렌지 주스가 날라져왔다.
사무한은 두 사람에게 차를 권하면서 자기가 먼저 컵을 들었다.
아무리 큰 소리를 해 본들 철수와 송 경위는 자기들이 포로라는 벽에 부딪치고 보면 할 말이 없다.
포로! 그것은 우주이건, 지구이건, 동물 세계이건, 생물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슬픈 대명사가 아니고 뭐냐.
철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지구인의 문명이 지지부진한 원인이 원망스러웠다.
'지구 위에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능력이 희망과 소원대로 달성되지 못한 까닭에 그만큼 진보가 늦어질 따름이다. '
이런 생각은 비단 철수뿐만이 아니란 월등하게 훌륭한 우주인 앞에서 송 경위도 참을 수밖에 없는 굴욕이었다. 사무한은 두 사람을 위압적으로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비행대가 화성을 개발해 온지 오래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구나 금성의 식물 씨앗을 화성에 옮겨 심어 개량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심지어는 여러분 이외에도 동물과 식물의 천연적인 열 교환을 시도해 보았으나 기대에 어긋났고 까닭에 탄산가스를 대량으로 만들려던 당초의 계획이 예정대로 진전되지 않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태양계의 쩨쩨한 별보다는 1친 억 개를 헤아리는 은하계의 넓은 별 중에서 쓸만한 씨앗을 구하려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철수 씨는 다소 식물 발전에 관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씨앗 계획에 관심을 갖겠지요. 어떻습니까? 말해 보시오."
눈을 똑바로 뜨고 깜박거리지 않은 채 사무관의 입을 주시해오던 철수는, 그녀가 도리어 자기에게 의견을 묻자 마음 속으로 당황했다.
무슨 의견을 내세우면 무식이 폭로될까봐 주저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씨앗 계획의 내용을 알고 싶은 반작용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철수는 어떻게 해저라도 사무한의 기분을 잡아당겨 행방불명이 되다시피 한 박진나를 찾아 내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
"왜 말이 없습니까? 나는 프록시마 별의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식물과 동물을 개조하는 사명을 띠고 있소. 스스로 개조를 거역하는 자는 멸망이 있을 뿐이오. 철수 씨라 송 경위도 지구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런 것쯤은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어서 대답하시오."
사무한은 엉뚱한 요구를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새로운 씨앗 계획은 몇 해나 걸립니까? 또 우리 두 사람이 꼭 참가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탄산가스를 대량 생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철수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다가 도리어 사무한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세 가지 질문을 내세우고 맞서 보았다.
"불과 6개월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두 분이 화성에 남아 있어 본들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은하계 원정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탄산가스가 필요한 이유는 아직은 묻지 마십시오."
사무한은 철수의 말을 냉큼 받아서 슬슬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화성에서의 식물 재배가 한계점에 달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식물이 자라기 일해서 포지티브 프레셔와 네거티브 프레셔의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압력이 작용해야 합니다. 지구의 경우 한동안 네거티브 프레셔가 압도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공룡시대의 식물처럼 거대한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지구뿐만 아니라 화성의 경우도 포지티브 프레셔가 압도적이어서 전자력이나 화학비료에 의한 재배가 제각기 한계에 달했다고 봅니다. 까닭에 새 씨앗 계획은 그러한 네거티브 프레셔가 아직도 남아 있는 별에서 우선 씨앗을 도입하여 세포의 배추체를 적절히 유지시키면서 새로운 품종을 발전시켜야 됩니다."
사무한은 식물에 관한 설명은 더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고 철수와 송 경위가 화성에서 은하계로 떠나는 여행에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아무리 우리의 입장이 약하다고 해도, 덮어놓고 데리고 갈 수야 없겠지요. 사무한이 만일 인간의 포로가 되었다고 입장을 바꿔보십시오. 우리는 결코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송 경위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면 어쩌자는 거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송 경위는 의견을 내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철수는 재빨리 송 경위를 제지하면서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박진나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기왕이면 함께 가보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그런 약속쯤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한은 가볍게 0K했다.
송 경위는 처음으로 김철수를 올려보았다. 6개월 후에 지구로 되돌려 보내달라는 조건을 붙일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모레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사무한은 두 사람을 응접실에 남겨 두고 옆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철수와 송 경위는 착잡한 표정을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볼 따름이었다. 은하계 탐험에 참가하는 대가는 너무 값 싼 것이었다. 송 경위는 마음 속으로 과학자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것이구나 하고 삭여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미스 박과 만나면 그만이라니 김철수의 감정을 따지고 들떠간다면 필경은 송 경위와 철수 사이에 대립이 생겨 서먹서먹하게 될 것은 뻔하다.
송영철은 지구로 송환될 수 있는 언질을 잡아 낼 수 있었던 최초의 기회를 전송해 버린 셈이다.
"이 다음에 그런 호기가 찾아오면 이번에는 싸워서라도 꼭 내 주장을 고집해야겠다."
송 경위는 침대 위에 누워 모양 없는 천장을 쳐다보면서 혼자 다짐했다.
화성의 지하 도시의 밤은 바스락 소리 하나 없는 고요 그대로의 적막 속에서 잠을 청하는 숨소리들이 바둥거리는 격이다..
며칠 후, 철수와 송 경위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오후레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무한이 보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랴부랴 밥을 먹고 나서 사무한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날 따라 유난히 파랗게 보이는 사무한은 기다리고 있던 의자에서 일어서서 철수와 송 경위를 웃음으로 맞이하면서 소파에 앉도록 권했다.
이제부터 진나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말하겠거니 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철수는 사무한을 바라보았다.
송 경위는 저 자가 또 무슨 소리를 할 것인가 불안한 생각이 맴돌았다.
사무한이 사무실에서 먼저 나와 기다리는 적은 일찍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급히 부른 이유는 태양계의 회전 조건으로 보아 내일 낮에 출발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곧 출발 준비를 해야겠는데, 약속대로 미스 박을 텔레비전으로 불러 내어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스크린을 통해서 만나 보십시오."
사무한의 말은 천만 뜻밖의 얘기였다. 화성의 슬픈 포로들이 서로 얼싸안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체념으로서 달래 보려던 그들의 욕망은 산산조각이 되고 만 셈이다.
철수는 그것은 약속 위반이라고 항의하려 했으나 벽에 걸린 스크린에는 벌써 미스 박의 얼굴이 큼직하게 나타나 있었다.
수심에 잠긴 듯 여위어 보였으나, 그래도 건강한 박진나의 얼굴을 보니 두 사람은 반갑기 짝이 없었다.
"미스 박! 어떻게 된 일이요?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이 많았소. 지금 어디에 있는 거요."
철수의 초조한 물음에 진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기운을 차려서 말을 해야지, 우리는 내일이면 6개월 간의 은하계 여행을 떠나야 됩니다. 어서 얘기를 해야 속이 풀리지요."
송 경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재촉했다.
"은하계 여행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가게 되면 나도 함께 가야지요. 오늘날까지 세 사람이 생사를 같이 해 왔는데 ……"
진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야무지게 대들었다.
"몸이 아픈 사람이 멀리까지 가서 뭣해요. 미스 박은 당분간 모타칸 박사와 화성을 지키고 계세요. 말이 6개월이지 우주적인 시간의 단위에 맞추면 잠깐이니까요."
사무한이 나서서 얘기를 가로막아 버렸다.
"아무래도 운명의 별이 함께 있지 않는 모양인가 보오. 미스 박!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돌아올 테니 당분간 꾹 참고 있어요. 시련을 이겨 낼 줄 알아야지요."
철수는 이 이상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사무한에게 속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대꾸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걱정할 건 없어요. 다행히 모타칸 박사가 도와주고 한다니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 같소. 아무리 은하계 여행을 한다고 해도 서로 연락할 길은 있을 거요."
송 경위도 진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진나는 말이 없었다.
그들이 은하계까지 여행하는 목적을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프록시마의 율법은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맨 처음에 일러 두었을 텐데…… 미스 박은 몸조리나 잘 하세요."
사무한은 표정 하나 까딱도 않고 이렇게 말하고 나서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껐다.
흔히 얘기하는 싱거운 이별이라기 보다 오히려 마음을 주름잡은 구겨진 이별이었다.
박진나는 그녀대로 스크린이 꺼지고 난 다음에야 그럴 바에는 걱정 없이 다녀오라는 한 마디를 못한 것이 여간 분하지 않았다.
세 사람에게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가 다시 한 번 굴러갔을 따름이었다.
은하계 탐험
다음날 화성을 떠나게 되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온 화성의 발진 기지엔 비행접시 모양의 타원형의 우주선이 아닌, 로켓 모양의 송곳같이 뾰족한 우주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무한은 평소와 다름없는 복장으로 앞장을 서서 델타 3호라는 표지가 빨갛게 적혀 있는 우주선의 입구의 문을 열었다.
철수, 송 경위 그리고 오후레의 순서로 층계를 뒤따라 올라서 비행체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한이나 오후레에게 아무 감개도 없듯이 철수에게도 송 경위에게도 은하계로 간다는 새삼스러운 실감이 들지 않았다.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3만 광년 변두리에 떨어진 채, 그 중심을 맴돌고 있는 태양계의 존재는 주먹만하게 굵직굵직한 별들에 비할 때 콩알만한 미존에 지나지 않다. 철수와 송 경위는 밀실의 의자에 자리잡는다. 사무한과 오후레는 아마도 조종실에 자리잡은 듯 녹색, 인간과 황색 인간 사이에는 헐지 못할 벽이 가로 막혀 있었다.
"김 선생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말이 없소, 은하수를 탐험한다니 나는 꿈 속에서 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거짓말만 같아 우습기 짝이 없소."
송 경위는 철수보다 서너 살 위였지만 침묵이 계속될 때마다 으레 먼저 말문을 여는 버릇이 있었다.
"꿈이라니요? 우리는 완전히 홀린 것이오. 은하계의 직경만 해도 약 8만 광년인데 저 거대한 성운 속으로 여행하다니 일찍이 아무도 상상 못했을 거요. 가만히 두고 봅시다."
철수는 길다랗게 자란 손톱을 들여다보면서 말할 뿐이었다.
그 동안 한두 번 깎기는 했으나, 그들의 손톱은 어지간히 길어서 그 위에 색칠만 한다면 지구상의 여성들의 매니큐어 손톱이나 다름없이 보였을 것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라는 반달의 노래를 로켓이라는 쪽배로 달리는 셈이로군."
송 경위는 입술에 쓴웃음을 띄어 보였다.
도넛형의 은하계의 옆얼굴인 별들의 띠를 은하수라고 부르는 것을 송영철은 미처 모르고 아직도 은하계와 은하수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델타 3호가 이륙했는지 몸의 양감이 얼마간 다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구에서 화성까지 단 10여 분 사이에 납치되어 온 체험에 비추어 프록시마의 초문명을 부정할래야 해 볼 길이 없었다.
"몸이 조금 가뿐해진 것도 같은데, 송 경위는 어떻소?"
"마찬가지올시다. 밖이 안보여 도리어 답답하기 짝이 없소."
"창문도 없고 천장의 스크린은 여기서 조종할 수도 없으니 곡간차에 타고 있는 기력이라는 거지요. 핫하하"
송 경위도 따라서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 지는 듯 했다.
그러자, 별안간 앞 천장의 원형 스크린에 스위치가 들어간 듯 바깥 모양이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 선생 보십시오. 태양이 벌써 저렇게 멀리 보이지 않습니까. 빠르기도 하군. 제 아무리 뛰어난 요술꾼도 저렇게는 못하겠지요."
송 경위는 눈이 휘둥그래 해지면서 자꾸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태양을 중심으로 좁쌀 만한 아홉 개의 항성이 한 주먹만하게 보면 채 시시각각으로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수는 머리 속으로 '어이없이 간단하군‘ 하는 소리만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림으로 보는 태양계 그대로 델타 3호는 간단하게 그 굴레를 벗어난 것이었다.
"기분이 어떻소?"
어느새 사무한이 나타나서 빙그레 웃으면서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는다.
"기분이라니요?"
철수가 반문했다.
"감상 말이에요. 은하계 여행의……"
"언제 우리들이 기분으로 좌우된답니까? 우리는 좀 더 이성적인 지구인을 자처하고 있소."
"말이 빗나갔군요. 여러분은 태양계를 처음으로 벗어나 본 사람들이니 한 마디 물어 보았을 따름이오."
사무한은 이내 냉정한 어조로 되돌아갔다.
서로 화목하게 은하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처지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문명의 우월 의식과 열등 의식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창호지 만하게 얇은 반투명의 벽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그러한 벽 위를 동짓달 달빛 모양의 차디찬 적의를 은근히 스쳐간 것이었다.
사무한은 생각을 다시 하듯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편의상 우리라고 해 둡시다. 지금 우리는 파섹의 속도로 은하계의 변두리 별 사이를 비행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1파섹 3.26광년을 일컫습니다. 광년이라는 거리의 단위가 너무 짧아 파섹이라는 거리의 단위를 취한 거요. 이 델타 3호의 속도는 킬로 파섹까지는 가속할 수 없으나 그래도 웬만한 속도는 다 낼 수 있습니다."
사무한은 스크린의 화면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의 태양은 매초 220km의 속도로 은하계의 중심을 미분 회전하고 있어 태양이 은하계를 한 바퀴 공전하려면 2억 5천만 년이 걸립니다. 알기 쉽게 10억 년에 4회전하는 셈이지요. 지구의 나이를 60억 년이라고 할 때, 지구가 태양계에 태어나서 벌써 24회나 은하계를 공전했다는 계산이 성립됩니다. 이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팽이 장난 같지요. 그러나 은하계 안에는 태양보다 수백 배 수천 배나 더 큰 별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만큼 더 강한 방사선이나 우주선을 발생하는 장소를 태양계가 통과하고 있다는 뜻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스크린 속의 태양계의 자취는 이미 사라지고 이름 모를 다른 별들이 멀리 바라다 보였다. 사무한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옛날에 지구 위에서 여러분의 선조들이 겪었던 공룡 시대의 공룡들은 어느 날 태양계가 강력한 우주선이 깔린 은하계를 통과할 무렵부터 위축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종하다시피 없어진 거요, 그 뿐이랴, 지금으로부터 85만 년 전만 해도 지자기의 극성은 오늘의 남극과 북극이 서로 바뀌어 있었으며 240만 년, 335만 년 전에도 자기 변동이 있었소. 그러한 현상은 또 하나 태양계가 은하계의 궤도를 돌 때 다른 강력한 별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오."
철수는 사무한의 파란 눈이 반짝이면서 일러 주는 새로운 얘기에 넋을 잃고 이끌려 들어갔다.
"태양계나 지구의 원시적인 발달 과정을 설명하려면 또 한이 없겠소. 다만 포지티브 프레셔와 네거티브 프레셔의 관련이 식물 개조에 중요하기 때문에 미리 일러둘 따름이요.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은 뒤늦게 그러한 두 가지 프레셔의 상관 관계를 발견하여 상대성 이론이라고 주장한 모양인데, 파섹 단위의 은하계나 성운 세계에 있어서는 네거티브 프레셔와 허력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이 흥미진진합니다. 우리가 머지 않아 도착할 오메가 9호 별은 말하자면 네거티브 프레셔와 허력의 밸런스가 알맞은 전형적인 별입니다. 아직도 화학 원소의 구성은 지구보다 안정되어 있진 않지만 은하계의 허시점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동물보다는 식물이 전지표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요, 오메가 9호 별은 그러한 환경의 수많은 별 중의 하나입니다."
사무한은 그러면서 네거티브 프레셔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을 자랑했다.
자기의 머리에 둘러진 링 모양의 살이 바로 1백 년의 나이를 뜻하며 네거티브 프레셔의 세계에서는 보통 6백 년이면 장년층에 속한다고 말했다.
철수도 송 경위도 사무한은 여기를 듣고 있는 동안 대꾸해 볼 아무런 건더기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오직 교단 앞에 짝지어 앉은 학생처럼 사무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볼 따름이었다.
"그럼, 다시 연락할 때까지 쉬고 계세요. 오메가 9호 별까지 3일은 걸릴 거요."
사무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선 조종실로 가 버린 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네거티브 프레셔가 과연 무엇이며 허력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알쏭달쏭 했으며 더구나 은하계의 용궁과 같다는 오메가 9호 별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신비스럽기만 했다.
철수와 송 경위가 미스 박을 걱정하고 찾아 볼래야 찾아 낼 수도 없는 아득한 허공의 저편에 반짝이는 별들을 밤낮으로 바라보곤 있는 동안 지루한 시간은 72시간이라는 공간을 날랐던 모양이다.
"자, 스크린을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노란 별이 우리가 찾고 있던 오메가 9호 별이요. 머지 않아 착륙하게 될 테니 마음의 준비를 갖추시오."
사무한은 조종실 쪽에서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보이면서 일러 주었다. 화면에는 과연 울퉁불퉁한 땅덩어리가 쏜살처럼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여 눈알이 어지러웠다. 어느새 델타 3호는 수평 비행으로 옮겼는지 몸에는 다시 양감이 생긴 듯 묵직한 중량감이 팔다리에 감돌았다.
오메가 9호 성에 착륙
"송형, 왜 꾸물꾸물하고 있습니까? 내려서 식물만의 세계로 된 별천지를 구경합시다."
철수가 아무리 권해도 송 경위는 핼쑥하게 빠진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눈으로서 좀 쉬어야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웬 일이시오. 이 신기한 세계의 탐험을 앞두고 기운을 잃다니. 송 경위도 마음이 약하군."
사무한은 지쳐버린 송 영철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말로만 동정하는 척 할 뿐이었다.
"그럼 여기 남아 있어요."
"여기서 죽기 전에 화성에라도 빨리 돌려보내 주쇼."
송 경위는 사무한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 곳에서 성과만 좋으면 곧 돌아갈 테니 걱정 마시오."
오후레가 조종한 듯 델타 3호가 땅에 내리자 송 경위만 남긴 채 세 사람은 우주선의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송 경위는 여태까지의 시무룩했던 자세를 버리고 벌떡 일어서서 조종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흠! 모든 것이 자동식이구나. 숫자도 단위도 전혀 다르구나."
송 경위는 수백 가지 계기판을 그래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무전 장치였다. 송 경위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어떻게 해서든지 신공덕리의 자력선 연구소나 경찰 본부에 자기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싶었다. 보고라기 보다는 단 한 마디라도 알리고 싶은 욕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정작 일을 해 보자니 지식이 모자라는구나."
송 경위는 혼자서 마음 속으로 한탄하면서 필사의 눈초리로 무전 장치를 찾아 조종실을 뒤졌다.
초조한 시간의 흐름… 그 시간은 연속해서 흐르지 않고 띄엄띄엄 흐르는 불연속의 시간이었다.
"옳지! 이것일는지도 모른다."
송 경위는 무수한 계기판 중에서 사인 커브와 코사인 커브가 교차되고 있는 전류의 보라색 빛깔을 찾아 냈다.
그리하여 한 손으로 아래쪽 다이얼을 약간 돌려본즉 삑삑 소리나는 귀에 익은 전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그 전파가 중성 수소파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파장 21센티미터의 이 수소파만이 우주 통신총으로 사총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 경위는 마이크를 입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 댔다.
"신공덕리, 신공덕리의 식물 자력선 연구소! 경찰 본부! 경찰 본부!"
송영철은 잠깐 멈춘 다음 다시 호출을 계속했다.
'자력선 연구소! 경찰 본부! 여기는 김철수, 송영철, 박 진나. 여기는 은하계!"
송 경위의 음성은 점점 높아갔다.
송 경위는 애절한 목소리로 고국의 사람들을 불러댔다. 신공덕리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권일송 박사를 부르고 경찰 본부도 불러봤으나 당장에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은하계의 오메가 9호 별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몰래 송신기를 붙잡은 송영철은 꾀를 부리면서까지 스스로 붙잡은 단 한 번의 호기를 놓칠 수가 없었다.
'힘이 자랄 때까지 우선 송신이라도 해 놓아야지. 소식이라도 전해 듣고 봐야지.'
송 영철의 가슴은 점점 두근거리면서 숨소리는 마침내 목소리를 압도하고 말았다.
'신공덕리! 경찰 본부!'
송 경위의 대뇌 속에는 기록되었을는지도 모르나, 기진맥진한 채 조정실 밑바닥에 쓰러진 그의 마음의 고함을 들어주는 자 아무도 없었다.
송 경위는 멀고 먼 은하계의 또 하나의 별 속에서 그래도 자기의 신념과 의무를 다해 보려고 온갖 힘을 기울인 끝에 졸도하고 만 것이다.
학술 탐험
한편 오메가 9호 별에 내린 김철수는 사무한의 뒤를 따라 밀림 속을 헤치면서 언덕바지로 향해 갔다.
오후레는 사무한을 안내나 하듯이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철수 씨, 동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별인데 소감이 어떠하오? 이 널찍널찍한 잎사귀나 거칠 것 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키가 부럽지 않아요?"
"글쎄요."
철수는 마음 속으로 지구 위의 숲과 이 곳의 기기묘묘한 나무들을 비교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구 위의 숲에선 지금도 전나무와 백양나무가 수만 년 이래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전나무는 그늘을 좋아하지만 그와 반대로 백양나무는 빛을 좋아한다.
전나무의 숲에선, 백양나무는 조그만 싹인 채로 발아래 숨어 있다. 그늘이 많은 전나무가 진로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전나무를 베어 버리면 백양나무는 밝은 빛을 받아서 금방 생생해지고, 며칠만이 아니라 몇 시간마다 커진다.
어미의 전나무가 살아 있던 무렵에는 넓은 초록의 스커트 덕택으로 애송이 나무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햇빛을 막아 주던 어미 전나무가 없어지자 애송이 나무들은 지나치게 밝은 빛을 받고 약해져서 마침내는 죽어 간다.
그 대신 백양나무는 쑥쑥 자란다. 이전에는 우연한 기회에 그 적수인 전나무가 땅위에 떨어뜨리는 가느다란 빛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양나무가 주인이 되어 어두웠던 전나무 숲 뒤에 밝아 보이는 밝은 백양나무의 숲이 마련된다.
그리하여 시간은 또 흐른다. 시간이란 위대한 일꾼이다.
백양나무의 키는 차츰 높아지고 그 정상은 점차로 밀집해진다.
처음에는 밝고 드문드문했던 그 발치의 그늘은 차츰 짙고 어두워져 간다.
백양나무는 승리자가 되었지만 그 승리 속에 바로 자멸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백양나무의 그늘 밑에서 이번에는 그늘을 좋아하는 전나무가 자란다.
몇십 년이 지나면 전나무 꼭대기는 백양나무의 꼭대기를 쫓아오고 숲은 서로 뒤섞인 잡색으로 바뀐다.
백양나무의 밝은 녹색은 끝이 뾰족한 어두운 전나무 꼭대기에 눌리고 만다.
전나무는 점점 높아져서 이번에는 그 울창한 가지나 잎이 백양나무의 떼를 햇빛에서 가리고 만다.
이리하여 백양나무의 종말이 온다. 전나무가 짓는 그늘 속에서 백양나무는 쇠약해지고 대신 전나무가 생존의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글쎄라니요. 오메가 9호 별에서 우리들이 찾아 내어 할 새로운 씨앗은 반드시 화성의 사막을 푸른 녹지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 넓은 잎사귀는 이 별이 지니고 있는 네거티브 프레셔의 작용으로 퍼진 것이지 결코 광선의 잎파랑이가 발달한 때문은 아닐 것이오. 어서 따라 오세요."
사무한은 철수를 힐끗 쳐다보면서 마치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 앞장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비행 대장, 오늘은 아무래도 정찰 정도로 끝내고 자료 수집은 내일부터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오후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무한의 눈치를 살펴보고 있다.
"아니야. 일을 후일로 미룰 수는 없지 않나. 오늘 가능한 한 자료 수집을 위한 기초 조사는 해 놓아야지. 오후레는 문명인으로서의 사명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가를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전 우주를 프록시마의 문명으로 통일해서 생물 개조의 혜택을 주자는 것이 우리 비행대의 임무가 아니었는가!"
사무한은 오직 전진밖에 없다는 꿋꿋한 자세를 취하면서 한 손으로 숲의 잡목을 비키고 갔다.
철수는 철수대로 뒤따르면서도 수많은 수수께끼를 삭이고 있었다.
도대체 녹색 인간들은 무엇 때문에 탄산가스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또한 오메가 별의 정글을 내다 볼 때, 지구 위의 전나무와 백양나무 사이의 투쟁과 비슷한 밀림의 암투가 이름 모를 진귀한 나무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오메가의 밀림에서는 지구와는 달리 낮과 밤의 주기가 고르지 않기 때문인지 온도차로 식물의 분포가 판이하게 달라 보였다.
잎사귀가 넓은 나무들은 산마루에 더 많이 집결하고 잎사귀가 뾰족한 나무들은 계곡 쪽에 더 집중하여 무성하고 있었다.
이 별의 식물들은 분명히 복사열 자체보다는 네거티브 프레셔의 작용을 더 많이 받고 있는 듯 보였다. 철수는 마음 속으로
'녹색 인간들의 핏속의 활력소는 산소와 결합하는 헤모글로빈과 달라 탄산가스와 결합하는 이질적인 그 무엇이 있나보다. 저 자들이 탄산가스를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식물을 찾고 있는 것은 탄산가스를 화학적으로 합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합성의 단계를 끊고 나서 이제는 자연의 소산을 소중히 여기려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철수의 이와 같은 명상은 또 한 번 사무한의 히스테릭한 음성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철수 씨, 자 이 네모진 열매를 따 넣으세요. 새로운 품종을 이제 발견할 것도 같소. 핫하하하."
오후레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따온 파란 열매를 사무한은 한 손으로 철수에게 넘겨주었다.
철수는 등에 짊어진 셀레핀 배낭에 열매 일곱 개를 받아 넣었다. 철수는 열매를 운반하는 인부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세 사람은 첫 날 수십 리의 산과 들을 헤매면서 주목할만한 열매를 열댓 종류 따 모아 가지고 우주선이 있는 장소로 되돌아 왔다.
송 경위는 졸도한 지 몇 시간이 흐른 후 저절로 의식을 회복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세 사람을 태연히 맞이했다.
"송 형, 얼굴색이 몹시 나빠 보이는데 아직도 시원치 않아요?"
철수의 걱정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송 경위는 마음 속으로 철수에게 털어놓아야 할 얘깃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영철 씨는 이 약을 더 잡수세요. 내일이면 함께 자료 수집을 해야 되니까요. 몸을 조심해야지. 지구인들은 몸이 약해서 탈이야."
사무한은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송 경위와 철수만이 밀실에 남게 되자 송 경위는 철수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김 선생! 실은 오늘 낮에 21센티 중성 수소 파장으로 지구를 불러 보았오. 신공덕리의 연구소와 경찰 본부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던 끝에 졸도하고 말았는데 언제쯤 대답이 돌아올까?"
송 경위의 검은 두 눈동자는 흑 산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나지막한 귓속말은 철수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지구의 권 박사와 연락을 취해야지. 그렇구말구."
철수는 새삼스럽게 생각난 듯이 지구에의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뜻밖의 소식
네 사람의 탐험가들은 오메가 9호 별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사하고, 그 다음엔 남쪽에서 북쪽으로 자료를 수집해 갔다.
근 한 달이 지날 무렵의 일이다.
네 사람이 로켓을 북쪽으로 이동시키려고 작업에 착수하는 순간 우주선 속에서 요란스러운 경보가 비명처럼 울렸다.
"찌리링 찌링 찌리링!"
난데없이 울리는 경보에 깜짝 놀란 사무한은 곧바로 조종실로 달려갔다.
출입금지가 되다시피 한 조종실이었지만 날카롭게 긴장된 분위기에 휩쓸려 철수와 송 경위도 조종실로 뛰어 들어갔다.
"음! 그래 ? 반란을 일으켰다고? 음, 음! 알았어. 주모자는 오후레 13번이라고. 알았어요. 곧 떠나지."
리시버를 귀에 대고 얼굴빛 하나도 변치 않은 채 사무한은 지시를 내린다.
"797 방정식을 원용하도록, 오후레 13번의 간뇌 속 세 번째 세포가 이상을 일으킨 것이겠지. 797 방정식에 따르면 거기에 동조한 자의 간뇌 3호 세포가 모두 동결될 거야."
옆에서 이 일을 지켜보는 오후레 33번의 표정은 까딱도 않았다.
송 경위는 혼자서 짐작컨대,
'오후레 족들이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어 선 모양인데 여기 서있는 오후레는 태연자약하니 여간이 아니군, 문명이란 이렇게 생물의 감정을 고갈시키는 것일까?'
그는 마음 속으로 도리어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긴장된 분위기는 쉴 새 없이 그 당장에서 로켓의 진로를 화성으로 돌리고 말았다.
눈 하나 끄덕하지 않고 로켓을 오메가 9호 별의 중력권 밖으로 몰고 올라온 사무한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면서,
"철수 씨, 영철 씨, 언제까지 조종실에 앉아 있을 작정이요? 사무실로 돌아갑시다. 어서 일어서요."
두 사람을 독촉하는 한편 조종석을 오후레에게 비워 주었다.
로켓은 사실상 자동 조종 이행을 하고 있었지만 어지러운 계기판을 감시할 인원은 한 두 사람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세 사람은 조종실에서 나와 사무한의 사무실로 옮겨왔다.
"자아. 거기 앉으세요. 우매한 오후레 족들이군. 자기 종족의 개조를 과학에 의존하지 않고 집단적인 감정에 의존하여 발산시키다니, 문명의 과정은 언제나 그런 곡절을 다 해야 하는 것인지 프록시마의 베타 문명의 수준으로 볼 때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기회에 내가 어릴 때 들은 프록시마의 전설을 두 분에게 말해 드리지요."
사무한은 침을 꿀꺽 실키고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죠. 옛날에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이 다른 별을 찾아갔을 때, 짧은 시간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는 아무 난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우주선으로 비행해서 새 천지에 도달해야 할 때는, 한 세대를 30년으로 쳐서 3세대가 같은 우주선에서 생활해야만했답니다. 그래서 당시의 우주 사회학자들은 장차 백 년 동안에 우주선에서 일어날 여러 가지 사건과 일들을 전자 계산기로 예측하여 미리 예정표를 짜놓았습니다. 두 쌍의 젊은 남녀가 함께 결혼하는 시기와 거기서 태어난 어린아이의 배움 문제, 그리고 다시 어린아이들이 성장해서 결혼하는 시기와 배우자 문제를 일일이 예정표대로 진행시켰다고 합니다. 프록시마의 문명은 이와 같이 일단 극한 상황에서 재검토되어 서로 감정적인 - 아니 - 비이성적인 면을 탈바꿈할 수 있게 짜여갔습니다. 백 년이라는 세월을 소수의 인원만으로 여행해야 된다는 것은 초기와 선조들에겐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늘 보는 얼굴이 언젠가는 보기 싫어져 감정의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따라서,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표대로 율법을 엄수하지 않는다면 우주 개발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 헌법 제 1 조를 우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제정하고 그대로 지켰답니다. 그 후 문명의 진도에 따라 율법의 내용도 차츰 바뀌어졌지만 우주 사회에선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정신은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한은 테이블 위의 컵을 들어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더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면, 우주선 안에서 돌아간 자기네 부모들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할머니는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주의 개척자들은 예정표에 따라 시체를 여러 화학 원소로 분해했답니다. 몸 속의 수분은 수분대로 칼슘은 칼슘대로 인분은 인분으로 온갖 원소로 분해해서 그것을 고스란히 이용했다더군요."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하면서 얼마간 이마를 찌푸렸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몸인데 그 아까운 화학 원소를 버릴 아무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시대처럼 클로렐라와 같은 식량으로 백 년 간의 우주 여행을 계속하려면 산소 1mg 일망정 아주 소중한 자산이니까요. 그러한 눈물겨운 우주 개척사의 뒤를 이어 프록시마의 별 사람 사이에선 미신이라든지, 종교라는 심리적인 부담이 아주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두 분이 언젠가 미스 박을 꼭 만나 봐야겠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문득 프록시마의 전경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감정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순수하고 합리적으로 순화된 것이 바로 과학 정신이 아닐까요? 두 분이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하겠어요."
사무한은 할 얘기는 이제 다 끝났다는 듯이 손으로 악수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무한은 아무리 감정을 청산했다고 자처하고 있지만 화성의 반란 사건이 그를 다소 긴장시키고 흥분시킨 것 같았다.
"자, 우리는 돌아갑시다."
철수는 멍청하게 사무한의 얼굴을 아직도 쳐다보고 있는 송 경위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거 근사한 전설인데……"
송 경위는 중얼거리면서 철수의 뒤를 따랐다.
밀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김 선생, 아까 그 전설, 그럴듯한 대목이 맞은데요. 우주 사회학이라는 것도 있는 모양이지요?"
송 경위의 물음이 이 시점에선 도리어 귀찮았다.
철수는 사무한의 얘기보다는 어찌하여 화성과 오메가 별 사이의 통신이 마치 직통 전화처럼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혹, 그것은 오후레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얘기해 준 도약파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전파가 빠르다고 해도 보통 공간에선 광속보다 빠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화성이란 멀고 먼 파섹의 거리를 마치 직통 전화처럼 이용할 수 있는 사실은 공간이 비틀어진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광속보다 따른 도약파를 이용하고 있을 게다.
또 한 가지의 수수께끼가 철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이다.
네 사람이 화성으로 급행하고 있는 우주선은 마치 큰 바다의 고기 모양 유유히 소리 없이 한없는 공간을 홀로 비행하고 있을 뿐이다.
우주선 속에서의 지루한 하루하루가 그래도 밖에서는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어느 날 저녁이라고 해두자. 사무한이 우주선의 조종실로 들어갔다.
"김 선생, 아마 화성에 가까워지는 모양이죠. 사무한이 직접 조종실로 들어가데요."
송 경위는 재빨리 눈치채고 자고 있는 철수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얼마 후에, 우주선 내의 마이크 소리가 모처럼 울렸다.
"한 시간 후면 화성에 도착합니다. 지금 막 태양계의 중력권 내에 들어갔습니다. 내릴 준비를 해 주십시오."
사무한의 특징 있는 목소리였다. 철수와 송 경위는 또 한번 얼굴을 맞대고 할 말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다. 미스 박은 어떻게 되었을까? 반란은 도대체 어떤 규모일까? 두 사람의 마음 속은 서로 달랐다. 우주선이 마침내 화성의 비행기지에 도착하자 사무한은 허둥지둥 조정실의 문을 열고 층계를 총총히 내려갔다.
반란 진압 작전
긴장의 빛을 감추지 못한 오후레 33번과 송 경위와 김철수도 뒤따라 화성의 땅을 밟았다.
"남의 일인데도 덩달아 신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 선생, 우주 생물들의 반란은 어떤 규모일까요?"
송영철 경위는 철수의 시선을 살피면서 물었다.
물어본다기보다 오히려 자문자답하고 있는 듯도 했다.
"송 형은 싸움이라니까 역시 신이 나는 모양이죠. 오후레 13번이 주동이 되어 반항한다니까 포로 신세인 진나 양에게는 큰 위험은 없을 게요. 이런 기회에 사무한을 도와 주면 그도 우리의 협력에 감사하는 무슨 표시라도 할게 아닌가 생각하오."
철수는 냉정하게 앞을 내다보면서 화성의 싸움터에서 어부지리를 얻을 계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야 물론이지요, 나도 그 동안 쭉 생각해 왔지만 이 기회에 사무한의 앞장을 서서 논공행상을 바랄 작정이었오. 언제까지 납치된 채 여기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기야 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이 하늘의 이치지만 우리의 입장에선 종족이 다른 자들의 싸움 속에서 실리를 취할 도리밖에 없을 거요. 그리하여 진나를 구하는 것이 선결 문제 같소."
철수와 송 경위는 나지막한 소리로 소곤거리며 사무한의 뒤를 따랐다.
사무한은 그 길로 지하 기지의 자기 사무실로 급행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사무한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차가 나선형의 건물 앞에 도착하자 사무한은 맨 먼저 내려서 먼저 층계를 올라갔다.
"철수 씨와 송 경위는 저마다의 방에서 쉬고 계세요. 반란의 전모를 파악하는 대로 필요할 땐 연락을 해 드리겠소."
"비행 대장, 언제라도 불러 주십시오. 언제나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송 경위는 대뜸 사무한을 안심시켰다.
오후레 33번을 데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사무한은 모자를 벗어 던지고 당장에 텔레비전 스크린의 스위치를 켰다.
반란 장소는 바로 운하 지대였다. 수많은 오후레족 남녀노소들이 스크린을 압도하다 시피 화면 전체에 크게 비췄다.
그들의 표정은 노기에 가득 차 있는 자가 있고, 문어 다리 모양의 팔을 여러 개 뒤흔들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그 무엇인가 힘차게 외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도리어 슬픔에 잠긴 침울한 얼굴을 짓고 있는 자도 있었다.
오후레의 반란족들은 운하 지대의 건물을 때려부수거나 불을 지르는 난폭한 행동은 취하지 않은 듯 보였다. 주모자로 알려진 13번의 큰 얼굴이 화면에 투사되어 그 표정을 낱낱이 알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군중들보다 얼마간 높은 장소에 자리 잡고 서서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또렷또렷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13번은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나! 감마 문명의 압도적인 차이를 아직도 실감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을 얕보고 하는 수작이구나. 오후레 33번, 니키타 박사에게 797 방정식을 빨리 적용하도록 해요."
사무한은 가느다란 시선을 화면에 집중시키면서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오후레 33번은 대꾸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비행 대장님, 797 방정식의 적용 명령은 대장님이 직접 니키타 박사에게 내려 주십시오."
"뭐라고?"
"입장이 난처해서 하는 말입니다. 같은 동족을 억눌러야 되는 명령을 저는 전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억누르다니, 누가 억누른단 말이야. 13번과 머리에 고장이 난 것을 고쳐 주겠다는 것뿐이지. 오후레, 그래서 항상 얘기하지 않았나. 감정은 우주 사회에선 절대 금물이라고. 우선 13번을 체포해 놓고 무엇 때문에 소란을 일으켰는지, 또 요구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할 게 아닌가! 나로서는 아직도 13번의 머리의 전두엽 세포 하나가 고장을 일으킨 것 같아요."
사무한은 언성을 높이면서 오후레 33번을 꾸짖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직접 지시하지."
사무한은 니키타 박사의 사무실을 불러 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니키타 박사는 온후한 표정으로 먼저 사태 진전 상황을 슬슬 보고했다.
"비행 대장님, 오후레 13번은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이 이 이상 화성의 오후레 족속의 문명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프록시마 별의 생물이었지만, 이제 화성에 안착, 이 곳을 독립지로 삼아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고 모의한 듯 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오메가 9호 별의 탐험에서 돌아온 후에 상의해야 할 일이지. 나도 없는 사이에 제멋대로 흉계를 꾸민다는 것이 말이 되오? 니키타 박사는 797 방정식에 따라 오후레 13번을 당장에 체포해 오시오."
사무한의 명령이 떨어지자 니키타 박사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사무한이 스위치를 끈 것이었다. 그 후, 니키타 박사는 단신 중력총을 손에 들고 반란 현장으로 출동했다. 녹색 인간 사회에서는 일단 명령이 내리면 즉석에서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이 겉보기에 비대한 니키타 박사가 마치 지구상의 화염 방사기처럼 등에 탱크를 지니고 발사 호스를 가진 모습은 로봇을 연상시킨 것이었다.
급히 출동한 차에서 내린 니키타 박사가 반란 본부의 건물에 접근하자 무수한 오후레 족들은 환성을 올리면서 니키타 박사 앞으로 육박해 왔다.
이 때 니키타 박사의 중력총이 아지랑이처럼 아른하게 투명한 기운을 뿌리면서 발사되었다.
순간! 앞질러서 쫓아오던 오후레들은 서리맞은 풀인 것처럼 번번이 축 늘어지고 만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얼었다.
마치 현기증에 걸린 듯 발걸음이 휘청거리다가는 쓰러지고 마는 광경은 고요 그대로 외마디 소리 하나 외치지도 못한 채였다.
"나는 니키타 박사다. 오후레 13번! 어서 항복해라. 비행 대장이 너의 요구를 듣기를 원하고 있다. 어서 건물에서 밖으로 나오라!"
니키타 박사의 말이 마치 마이크 소리처럼 쨍쨍 울려 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성서성하던 주위의 공기가 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다.
"오후레 13번은 공연히 희생자를 낼 생각을 삼가야 한다. 우주 세계에서 생명이 얼마나 존중되는지 잘 알고 있을 게 아닌가! 어서 항복하라."
박사는 권유를 되풀이했다.
"797 방정식을 적용하기 전에 어서 나오라."
수많은 오후레 족의 시선이 니키타 박사의 일거 행동을 응시하다가 이번에는 13번이 서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말없는 시선의 집중을 받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오후레 13번은 한참 두 눈을 감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나가서 사무한의 처벌을 받는 것이 오후레 족을 위해 유리할 것이냐? 또는 끝까지 버티어서 죽음으로서 오후레 족의 희망을 인식시키는 것이 유리할까?' 주모자 13번은 핼쓱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자문자답해 보았다.
"죽음으로써 주장을 관철하느니 보다 역시 사무한과 만나서 내 주장을 내세우고 난 후에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
13번이 단상에서 내려 걸어가자 오후레 족의 차가운 시선이 마치 교수대로 이끌려 가는 죄수를 전송하듯 뒤쫓아 따랐다.
주모자는 아무 말 없이 건물 밖으로 나와 터벅터벅 니키타 박사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니키타 박사는 이제야 마음을 놓은 것인지 중력총의 총구를 내리고 주모자를 마중하는 시늉을 취했다.
"오후레,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지 말고 빨리 사무한을 만나러 가세. 어서 차에 올라타요."
니키타 박사가 운전하는 전자 에스컬레이터 차에 13번이 타자 자동차는 고속으로 현장을 떠나고 말았다.
오후레 13번은 내내 말이 없었다.
주모자가 사무한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한은 텔레비전 전화로 니키타 박사의 도착을 확인하자 이번에는 철수와 송 경위에게 자기 사무실로 오도록 연락을 취했다.
니키타 박사와 오후레 13번이 사무한의 응접실에 들어와서 13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얼마 후에 송 경위의 뒤를 따라 철수도 그 방으로 들어갔다.
비행 대장은 엄숙한 말투로 따지기 시작했다.
"13번은 무엇이 답답해서 내가 얹는 동안 소란을 일으키오? 오랫동안 함께 우주 탐험을 해오다가 어찌하여 말썽을 일으켰소. 어디 설명을 들어 봅시다."
"네, 서슴지 않고 대답하겠습니다. 아무리 오후레 족이 생물 개조의 과학력으로 진화했다고 해도 우리의 머리와 생리는 도저히 프록시마 별의 문명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분에 알맞은 문명이 필요합니다. 도저히 비약할 수 없는 모든 여건하에서 우리는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의 노예로 만족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의 가난한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비행 대장의 우주 정복의 이상은 너무 방대하여 우리의 규모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비행 대장 사무한님, 제발 오후레의 문명 수준에 개입해 주지 마십시오. 오후레는 오후레로서의 생명을 다 할 수 있는 진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의 현 생리로선 화성이 가장 적합한 거주지라고 생각됩니다. 오후레는 중수소를 흡수해야 되는데 화성의 운하 지대는 중수소가 많은 해류로 구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장님! 우리의 희망을 들어주십시오."
주모자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애원했다.
"그런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소.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은하계를 탐험하고 있는 동안 소란을 피운 것이요?"
"그건 이렇습니다. 우리 생각으로선 오메가 9호 별까지의 거리로 보아 비행 대장이 언제 돌아올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소. 그 동안이나마 화성의 독립을 확보해 보려고 애써 봤을 뿐, 결코 나뭇가지 하나 상처를 입히거나 불지르거나 하는 난동은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반역이 평화적이라고 하더라도 반역 행위 자체는 나와의 약속 위반임엔 틀림없소. 오후레 13번은 우주선에서 태어난 후 내가 기르다시피 한 생물이요. 어찌 나와의 정의와 약속을 저버릴 수 있겠소. 나는 13번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줄 생각하오."
사무한은 주모자의 해명을 들은 척 만 척 사뭇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는 눈치가 엿보였다.
"비행 대장님! 오후레 13번의 요구는 그 시기가 나빴을 따름이지 내용 자체는 지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뜻밖에 송 경위가 오후레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섰다.
"우리가 맨 처음에 서울의 신공덕리 임업 실험장에서 오후레 족을 목격했을 적에 그 말미잘 같은 기묘한 모양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기묘한 생물이 또다시 식물의 물줄기를 다 빨아먹는 현장을 보고 우리는 두 번 다시 놀랐습니다. 이제 오랫동안 겪고 보니 오후레 족은 선량한 생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운명에 따라 생명을 자결하겠다고 주장하니 이 일을 막을 자 어디 있겠습니까? 오후레 족이 화성에 안주의 땅을 정하겠다고 하면 이것을 꾸짖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권장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사무한 님은 이 일을 심사숙고해야 옳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송 경위의 열변은 굳어졌던 사무한의 표정을 다소 풀리게 했을까? 얼음장같았던 방안에 공기가 약간 풀리는 것 같은 촉감이 저마다 스며들었다.
"송 경위의 뜻도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프록시마의 율법은 생물의 개조를 거룩한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낙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과학은 과거의 진리를 수정함으로서 새로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지 결코 오늘에 만족하여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반역 사건은 과학 생활에 있어서 심벌을 취하느냐, 시스템을 취하느냐 하는 낡은 논쟁을 재연시킨 것입니다. 오후레 13번은 니키타 박사와 함께 근신하고 있으십시오. 니키타 박사, 13번을 데리고 먼저 나가 계시오.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곧 알아 내겠습니다."
니키타 박사와 주모자가 문 밖으로 사라진 후의 방안의 공기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이따위 반역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유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인지 오후레의 경우 1세대를 30턴으로 잡아 3세대에 한 번씩 비슷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할아버지 때 억누르면 아버지 때는 참고 아들 때는 기운을 얻어 폭발하는 것일까요? 할아버지 때 잘 지내면 아버지 때는 겨우 유지되고 아들 때는 망해서 어쨌든 1백 년을 주기로 불만의 언밸런스가 터지는 것 같아요."
사무한은 아직도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비행 대장님, 그런 심각한 얘기보다는 오메가 9호 별로 떠나기 전의 약속을 이행해 주십시오. 미스 박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반란 사건의 소용돌이 틈에서 혹 다치지나 않았는지? 이제는 노이로제도 다 나았을 텐데 우리들과 만나게 해주십시오."
철수가 비는 듯한 목소리로 사무한에게 부탁했다.
"김철수 씨는 아무래도 큰 학자가 못될 것 같아요. 미스 박의 행방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내가 알기로는 모타칸 박사가 곧잘 보호하고 있을 겁니다. 그 점은 안심하세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입니다. 사람은 텔레비전 스크린이 아닌 실제의 피부를 육감할 때만이 안심이 되는 법입니다.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은 지구보다 몇 단계 앞선 문명을 호흡하고 있으니까,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경지에 도달했겠지만 지구인의 경우는 아직은 추상적인 숫자보다는 육감할 수 있는 실물이 모든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오후레 족보다 조금 앞섰을지도 모르나, 그들의 심정과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김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프록시마의 문명이 그렇게 엄청나게 발달되었으면 구태여 태양계의 쩨쩨한 땅덩어리보다는 더 시원 훤칠한 은하계의 새 행성계를 찾아서 새 계획을 세우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미스 박이 병에 걸리든 말든 그것은 지구인인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송 경위도 옆에서 덩달아 거들었다.
"오후레 13번도 그렇고 여러분도 똑같이 낮은 문명의 그대로를 구제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얘기인데…… 구제한다는 것과 해방시킨다는 것 본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나는 오후레 족은 물론 언젠가는 지구의 인류 자체도 더 높은 차원의 베타 문명으로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한 일은 없는 법이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 나도 그 동안의 일을 정리해야 되겠어요."
사무한은 먼저 일어서서 두 사람을 문 밖으로 내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쏭달쏭 합니다. 사무한은 미스 박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겁니까?"
"송형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면 안되요. 오후레 13번의 처벌 문제를 먼저 해결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과학의 상징주의와 체계주의 사이의 모순을 다시 해결해야 되고 또한 구제냐 해방이냐 하는 문제도 곁들여 귀결된 다음에 비로소 미스 박의 문제가 저절로 풀릴 거요."
"그럼 지금 사무한은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단 말이죠?"
"그렇구말구. 그 사람 말대로 6백 년은 산다지만 자기 모순은 환경의 1백 년 주기에서 점화될 수도 있겠죠, 내일까지 아무 소리말고 기다려 봅시다."
"내일까지 ? 또 내일까지 ……"
송 경위는 입 안에서 중얼거리면서 층계를 내려갔다. 철수는 철수대로 내일이라는 말이 던져 주는 막연한 뉘앙스를 마음 속으로 되씹으면서 송 경위를 뒤따라 내려갔다. 사무한은 자기 마음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태양계를 찾아서 화성의 지하 대륙에 기지를 마련한 지 불과 7년도 못되어서 오후레 족들의 마음이 변하리라는 것은 일찍이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사무한은 홀로 사무실을 나와서 차를 몰고 땅위의 운하 지대로 향했다. 밖의 공기는 오존이 풍부한 지하 도시의 공기에 비하여 얼마간 서늘했다.
드디어 지구로
그녀는 지금까지 가장 신임해온 모타칸 박사를 만나서 장차의 일을 상의해 볼 작정이었다.
녹이 쓴 것처럼 황토가 빨갛게 산화한 화성의 지표 여기 저기에 그 동안 가꿔 놓은 푸른 녹지대와 숲이 지금의 외로운 심정을 풀어 주는 듯 했다.
그러나 식물은 여전히 식물에 지나지 않아 동물의 움직이는 감정과의 대화에는 알맞지 못했다.
사무한은 그대로 차를 몰고 운하 속으로 들어갔다.
화성에서와 차량은 모두가 수륙 겸용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차는 마치 모터보트처럼 제트 엔진을 요란스럽게 울리면서 수면을 스치듯 달려갔다.
프록시마의 별 사람들은 이러한 제트 엔진과 연료를 농축된 탄산가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철수와 송 경위가 돔형의 과수원에서 탄산가스 증산을 위해 작업하고 있을 때,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무척 애써 보았지만 탄산가스 엔진에까지 그들의 작용이 미치지는 못했다.
지구인보다 월등하게 높은 문명을 자랑하는 프록시마의 녹색 인간들은 이른바 멘델레프의 원자 주기율과 순서에 따른 원자량이 가벼운 원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 위에서는 아직도 원자량이 무거운 우라늄과 같은 원소 개발에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프록시마의 우주인들은 그러한 원소 개발을 한 두 바퀴 돌아서 어디서든지 쉽게 입수할 수 있는 가벼운 원소 개발에 문명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우주인들은 합성 가스보다 생기(生氣) 가스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곡물을 건조함으로써 식물원 자체를 일종의 원소 생산 공장으로 조직해 왔기 때문이다.
사무한이 탄 차는 어느덧 모타칸 박사가 머물고 있는 섬에 다다랐다.
사무한이 다시 육상으로 차를 몰고 달리자 저 멀리 달팽이 집 모양의 빌딩이 몇 개 서 있는 넓은 광장에 검은 점이 하나 보였다.
그 점은 차가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져 마침내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바로 모타칸 박사가 마중 나온 것이었다.
차는 소리 없이 모타칸 박사가 서 있는 곳에서 멈췄다.
"비행 대장님, 웬 일인데 혼자 오셨소?"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박사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찾아 왔지요."
"상의할 일이라니요?"
모타칸 박사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글쎄, 내가 새로운 씨앗을 얻으려고 은하계의 오메가 9호 별을 탐험하러 잠깐 화성을 비워놓은 사이에 오후레 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반란? 처음으로 듣는 소식인데…… 그래서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요?"
눈이 휘둥그래진 박사는 대뜸 물었다.
"큰일이야 일어나겠어요. 주모자 13번을 잡아서 가둬 놓았는데, 그들의 요구인즉 자기네들만이 화성에서 살아 보겠다는 거요."
"아니 화성에 무엇이 있기에 여기서 영주하겠다는 것일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차원의 생물이니까 말이 통해야지요……"
"음, 저차원은 저차원이지."
두 사람은 나란히 층계를 올라서 모타칸 박사의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을 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비행 대장, 우리는 전 우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따위 것이 문제가 되겠어요. 우선 앉으십시오.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오겠습니다."
모타칸 박사가 옆방으로 사라지자 혼자 남게 된 사무한의 머리에 문득 박진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참, 박사님, 그 미스 박이라는 애의 상태 어떻습니까? 그 동안 좀 안정이 됐나요?"
"네, 처음에는 감상에 사로 잡혀 말도 잘 않더니 요즘은 말도 곧 잘하고 명랑해졌지요. 만나 보겠습니까?"
"만나 볼까요?"
모타칸 박사는 사무한이 주스를 마시는 동안 탁상의 텔레비전 전화로 진나 양을 불러 내어 사무한이 일부러 집까지 찾아온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금방 이 곳으로 오도록 일러주었다.
"나도 어렸을 적엔 그랬지요. 같은 친구들이 외국에 간다면 혼자만 낙오된 것 같이 몹시 외로울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니 그저 그러려니 하는 생각뿐이지 과학의 진리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진나 양도 동료들이 오메가 9호 별로 떠나게 된 소식을 듣자 미칠 듯이 괴로워하더군요. 이제는 가라앉았을 거요. 핫하하하……"
모타칸 박사는 제자리에 앉자 거침없이 웃어댔다.
모타칸 박사의 거짓 없는 설명을 듣고 사무한은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지구인이란 겉모양보다 순진하기 짝이 없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일로 희로애락에 사로잡히는 버릇은 아마도 수명이 짧은 생활 환경이 비좁은 탓임에 틀림없다. 모타칸 박사란 해도 나이 겨우 쉰 둘인데 벌써 높은 사람 행세를 하고 있으니, 내 나이 백 살에 비하면 아직도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은 것을……’
‘나이로 보나 문명의 수준으로 보나 지구인들과 이 문제를 상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일은 아무래도 나 혼자 해결할 문제에 속한다.’
얼마 후에 진나 양이 문을 활짝 열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미스 박의 숨소리는 아직도 거칠었다.
"사무한님,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빨리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을 나는 무척 걱정하면서 슬퍼했어요. 밤에 잠도 잘 못 잤는 걸요. 그래 철수 씨와 송 경위도 무사하나요?"
"두 분 다 무사하니 그런 걱정은 이젠 그만해요. 마음이 얼마간 가라앉았다니 반가운 소식이요. 건강은 괜찮아요?"
"모타칸 박사가 옆에 있어 주어서 요즘은 완쾌되었어요. 아주 건강합니다."
진나 양은 마치 큰 언니나 만난 것처럼 사무한과 다정스럽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철수 씨와 송 경위는 지금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궁금하기 짝이 없어요……"
"지하 도시에서 오메가 별의 새 씨앗을 분류하고 있지요. 그렇게도 궁금하다면 어디 모타칸 박사, 함께 지하 도시에 가볼까요? 오후레 족의 처리 문제는 아무래도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럼, 비행 대장님, 그 곳으로 가서 나도 직전 오후레 13번을 만나서 얘기를 해보고 싶군요. 서로 얘기해보면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그럴까요?"
"그렇고 말고요. 지구의 문명을 원시 시대로부터 자연의 섭리를 믿는 대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여 불가지론으로 돌리기도 합니다마는 자연 과학의 발달은 서로 공통된 수학이라는 용어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왔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든지 합리적인 해결이 발견되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전통을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문명의 발달이 반드시 플러스의 방향만으로 진보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 않아요. 때로는 마이너스의 방향에서 도리어 더 큰 비약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요. 박사님, 그러한 유치한 의논은 그만두고 일단 지하 기지로 되돌아갑시다. 어서 서두르게요."
세 사람은 차를 몰고 섬을 떠났다. 맨 앞자리에서 모타칸 박사가 운전했다.
진나 양이 철수와 송 경위가 만난 시간은 저녁 때였다.
사무한의 '그럼 내려가 보라'고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나 양은 층계를 두개씩 뛰어내려 식당 옆의 작업장으로 돌진했다.
미스 박의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은 가속되어 갈 뿐!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선 진나 양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뒤돌아보는 철수와 송 경위의 시선을 순식간에 뒤덮고 말았다.
"김 선생…… 송 경위!"
고함소리는 작업장의 벽마다 이중 삼중으로 메아리쳐 삽시간에 소프라노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말았다.
이제껏 참고 참아 온 감정의 둑이 무너진 미스 박은 철수와 송 경위의 두 어깨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철수와 송 경위는 예고 없는 재회에 어리둥절 어쩔 바를 몰랐다.
철수는 진나 양이 어떻게 해서 작업장에 뛰어들어 왔는지 머리 속에서 그 경위를 짐작해 보려고 애썼으나 어깨를 흘러오는 그녀의 뜨거운 맥박은 모든 생각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다시 모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스 박, 진정해요, 어떻게 된 영문이요?"
철수가 가까스로 물었다.
"흣흐흐흐……"
"백주몽이라더니 이게 정말로 꿈이 아니요?"
송 경위는 진나 양의 팔을 어깨에서 내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나는 정신 잃은 사람 모양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말했다.
"모처럼 반가운 순간을 울음으로 메우다니 될 말이요. 어서 눈물을 거두시오."
철수가 호령하니까 박진나는 조금은 제정신이 났는지 수건을 끄집어냈다.
"이러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옮깁시다."
송 경위는 앞장서서 문을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식당의 테이블에 마주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뚫어지게 번갈아 볼 때, 서로 살아 있는 보람을 실컷 느낄 수 있었다. 온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검은 눈동자들은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참, 반가워요. 나는 그 동안 두 분과 영영 못 만날 것 같았어요. 아아 이젠 소원이 풀어졌다."
진나는 난데없이 팔짱을 끼고 윗몸을 의자 뒤로 가누었다.
"어찌 된 일이요. 갑자기 이 곳에 온 경위는?"
진나는 그 동안 모타칸 박사와 함께 운하 지대에서 휴양해 온 일, 집에서 오후레 족의 동정을 산 일, 그리고 반란이 일어난 후 갑자기 사무한이 모타칸 박사의 방에 나타나서 지하 도시로 함께 온 일등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음? 곡절이 많았구나. 아, 모타칸 박사도 이 곳에 와 있군."
철수는 모타칸 박사의 소식을 듣자 어쩐지 만나보고 싶어졌다.
"박사는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내 생각 같아서는 사무한이 박사와 무엇인가 의논한 것 같아요."
철수와 진나의 대화는 차츰 정상적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김 선생, 난 잠깐 볼 일을 보고 오겠어요. 나는 나대로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할 일이라니요?"
"그건 나중에 공개할게요."
송 경위는 혼자 식당 문을 열고 나갔다.
다음 다음날 아침, 사무한은 오후레 문제를 마지막으로 해결하겠으니 자기 사무실로 모여달라고 통지해왔다. 철수와 송 경위와 박진나는 나란히 사무한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벌써 모타칸 박사는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니키타 박사가 오후레 13번과 함께 나타났고 사무한은 오후레 33번을 데리고 옆방으로부터 들어왔다.
"여러분 편히 앉으세요. 그 동안 화성의 반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한 끝에 비로소 어젯밤에 한 가지 결론을 얻었습니다. 나로서는 퍽 괴로운 일이지만 과학의 발전과 우주의 조화라는 넓은 견지에서 해결을 짓자는 것이니 미리 양해해 주십시오."
방 안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도가니 속 같았다.
사무한은 자기 결론을 문서로서 작성한 것인지 파란 종이를 손에 들고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레 13번이 주축이 된 화성의 반란 사건은 분명히 프록시마 별사람에 대한 반역이다. 이 일은 아직도 알파 문명 이전의 생물이 차원이 높은 감마 문명을 자기 수준에서 판단해 보려는 무모한 모험이며 동시에 이 일은 우주의 온갖 생물을 개조하려는 본연의 노선에 대한 중대한 배반이다. 발전하는 온갖 문명의 속도를 화성이라는 조그마한 별의 테두리 속에 동결시켜 서로의 교류를 거부하려는 의도는 그것이 비록 저차원의 오후레 족에게 타당할지라도 더 저차원의 식물에 있어서는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교류에 따른 이질적인 요소의 충돌 없이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으랴! 까닭에 나는 화성의 현황을 당분간 이대로 지속하되, 오후레 13번을 문책하고 더 높은 과학 수준까지 훈련시키기 위하여 일단 프록시마 별의 본부로 송환하기로 정했다. 13번의 송환은 나 스스로가 맡겠다. 따라서, 내가 화성에 없는 동안 김철수, 송영철, 박진나의 세 지구인이 화성 안에 남아서 탄산가스 실험에 종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까닭에 이 세 사람을 프록시마로 떠나는 길에 지구에 송환해 주겠다. 나머지 모타칸 박사와 니키타 박사의 행동은 자유 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이상."
사무한의 판결은 뜻밖의 것이었다.
오후레 13번의 얼굴엔 죽음을 면한 안도의 빛이 감돌았고 철수와 영철, 진나는 생각지도 않던 사건 때문에 저절로 지구에 생환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사무한은 문서를 낭독하자 무표정하게 옆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식물 자력선 연구소의 권일송 박사의 제자입니다. 일찍이 박사님의 연구 논문을 많이 읽었습니다. 화성에서 인사드리게 되니 이 이상의 영광이 없습니다."
철수는 모타칸 박사에게 자기를 소개했다.
모타칸 박사 역시 반갑다고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박사는 자기 연구가 아직도 계속 중이므로 화성에 남아야겠다고 말하고 니키타 박사 역시 중력에 관한 수치 계산이 덜 끝났으므로 계속 남아 있겠다고 잔류하기를 택했다.
세 사람은 사무한의 방을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오자 문 밖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모두 살았다! 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사무한은 화성을 출발하는 시간을 통고해 주었다. 철수는 화성의 과수원에서 얻은 열매와 오메가 9호 별에서 얻은 새 씨앗을 한 보따리 싸놓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나는 화성의 색다른 돌을 주워 주머니에 담아 놓았으나 송 경위만은 화성의 식물과 광석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씨앗이야 가지고 가서 잘 키워 보세요. 지구의 대기권 내에서 어느 정도 자랄 것인지…… 실험을 계속해요."
철수의 물음에 사무한은 쾌히 반출을 허가해 주었다. 떠나는 날, 사무한의 방에는 말끔히 차린 지구의 세 사람과 아무렇게나 옷을 입은 오후레 13번과 33번 그리고 전송 나온 두 박사가 모였다. 사무한은 마지막으로 두 박사에게 인사했다.
"머지 않아 되돌아 올 작정입니다. 잘 부탁해요."
그리하여 일행은 차를 타고 지하 도시로부터 지상으로 나왔다. 마침 태양의 밝은 빛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아 서 있는 우주선에 가는 사람들은 차례로 올랐다. 철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타칸 박사의 모습이 로켓의 창 너머로 비췄다.
어느덧 소리 없이 이륙한 중력선은 먼저 지구에 들를 예정이다.
"아휴, 이제는 지구로 가나보다. 여보 김 선생, 이것 좀 보시오. 중력총의 발사 장치를 훔쳐 갖고 가오."
송 경위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중력총의 발사 장치를? 여보 경관이 도둑질을 한단 말이요?"
"도둑질은 무슨 도둑질이요. 자기 조국을 위해서 애국하는 거지……"
미스 박은 선실 안의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낯익은 아시아 대륙의 모양이 점점 크게 눈 안에 들어온다. 한반도가 보인다. 철수가 창 너머로 화성의 저쪽을 바라본즉 우주 공간의 저 멀리 낯익은 북극성이 방실거리고 있었다.
<끝>
달로켓 실종 사건
피보고자 : 대장, 제임스 케어니
보 고 자 : 의학박사, 아모스 P. 파인맨
보고내용 : 우주비행사, 폴 데이븐포트 대위가 최면 상태에서 진술한 사실과 그에 대한 평가
등급 : 일급 비밀
존경하는 케어니 장군.
여기 약속한 바와 같이 달로켓 발사 도중과 후에 일어난 일, 그리고 최초로 성공한 달세계 일주 비행을 마치고 지난 주 돌아온 우주 비행사 폴 데이븐포트 대위가 깊은 최면 상태에서 들려 준 기이할 진술을 그대로 적어 보냅니다.
케어니 장군의 급한 연락이 있은 뒤 나는 패트릭 공군기지에서 프린드 대령의 브리핑을 들었다. 그는 로켓 발사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데이븐포트 대위도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에야 자기가 행운의 비행사로 선정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달 우주선 새턴 C-ll은 48시간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완전 정밀한 검사를 받았고 아무 이상도 없음이 확인되었다.
데이븐포트도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필요 없는 흥분을 보이는 일 없이 캡슐 안의 운전대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새턴은 그 궤도로 매끄럽게 솟아 올라갔다. 달까지는 굉장한 고속도로 달리기로 되어 있어서 34시간 이내에 닿을 것이고 캡슐이 달에 접근하면 한 번 회전하면서 역 로켓을 쏘는데, 그 것은 달 주위에 밀접해 있는 궤도로 진입하기에 알맞도록 속도를 늦추기 위한 것이다. 달의 이면 쪽으로 우주선이 돌아 들어가기 시작할 때 우주선은 찬란한 기체 소듐의 섬광 신호를 내 쏠 것이다. 51분 동안 저편 쪽을 돌고 나서 다시 섬광 신호와 함께 지구의 시계 속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리고 나서는 캡슐은 지구로 돌아오는 60시간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모든 단계가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신호가 크고 똑똑하게 들려왔고 지구상의 수신소마다 신호를 잡기에 바빴다. 슈가그로브에 있는 강력한 방사능 망원경은 돌고 있는 51분 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접촉을 가질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아무 이상 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계획이 딱 들어맞아 정확히 발사 후 34시간 14분이 되자 찬란한 섬광이 보였고 2초 늦게(거리 관계로) 데이븐포트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 없이 달의 이면 궤도로 들어가고 있다는 말과 다른 기술적인 상황 보고를 보내왔던 것이다. 그런 목소리는 차츰 사라지고 49분 20초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침착하고 크고 똑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구가 보인다. 섬광을 발사한다."
그러자 찬란한 섬광이 모든 망원경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전속력으로 돌진!"
하고 말하더니
"헬로, 새파란 아름답고 정다운……"
하고는 말소리가 뚝 끊겼다. 그와 동시에 그로브의 망원경과 다른 모든 수신 장치에서 온 우주선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우주선과의 연락을 다시 가져보고자 갖은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인 우주선의 순간적인 산화로 밖에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여간 어떤 자그만 신호라도 모두 포착할 수 있게끔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5시간 54분 간의 실종 뒤에 별안간 우주선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의 여섯 시간 전에 뚝 끊겼던 데이븐포트의 말도 끝을 맺으며 들려 왔다.
"헬로, 새파란 아름답고 정다운 지구여. 이제 내가 간다."
곧 데이븐포트에게 질문이 퍼부어 졌었으나 수수께끼는 점점 깊어만 갔다. 그는 절대로 신호를 중단한 일이 없었고 귀환 비행은 예정된 그대로 진행이었다고 우겼던 것이다. 6시간 동안 사라졌었다는 얘기에 그는 그저 놀랄 따름이고 아무 설명도 해 주진 못했다. 그는 줄곧 단 일분 간도 지구와의 접촉이 끊기지 않았다고만 우겨댔던 것이다.
60시간 후에 지구에 무사히 착륙한 데이븐포트는 조사를 받았으나 60시간 전의 우주선의 실종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며 알아듣지조차 못한다. 꾸준한 조사 끝에 패트릭의 기술자들은 캡슐이 어떤 종류의 전립자의 폭우에 휩싸여 6시간을 보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이 폭우는 밀도를 매우 높아서 모든 전기 장치 - 데이븐포트의 두뇌까지를 포함한 - 의 기능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 후 해리 윌로프라는 필름 기술자가 이상한 발견을 했고 이것이 나를 이 사건에 개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 캡슐 안에는 캡슐 내부를 완전히 포착할 수 있게 장치된 고속 촬영기가 있었고 주기적으로 자동 촬영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윌로프는 이 필름을 현상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필름은 처음부터 다른 장치의 자료들과 일치해 나가다가 어떤 지점에서 뚝 끊어지고 다시 훨씬 뒤의 자료와 일치되는 사진이 갑자기 작동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결과 필름이 끊겨졌고 그 절단 부분이 너무나 능숙하게 이어져 있어 육안으로는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다시 필름을 몹시 느리게 돌려보았더니 절단 부분 바로 앞의 필름 네 토막에 데이븐포트의 모양이 없는 텅 빈 캡슐 내부가 찍혀 있었다는 것인데.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상부에 이것을 보고했다.
캡슐에서 나오자면(더구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캡슐 안에서) 비행사는 바깥의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네 토막의 필름은 확실히 텅 빈 캡슐의 내부 사진이었다. 그리하여 공군 당국은 나에게 데이븐포트 대위에 대한 최면 시술을 의뢰했다.
첫눈에 데이븐포트 대위는 시술이 쉬운 환자 같아 보이지 않았으나 암시를 시작하니까 곧 순응해 들어왔다. 최면 경험이 없다고 그는 말했지만 전에 최면 받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첫번 혼수 상태에 쉽사리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몇 분 후에 '손댐불' 이라고 알려진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에서 그는 내 암시에 따라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캡슐 안에 들어앉아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곧 캡슐 안에 앉아 있던 모습으로 자세를 고쳤다. 비행사에게 지시하는 여러 항목이 적힌 것을 내가 읽자 그에 따라서 그는 단추를 누르고 여기저기 만지고 잡아당기고 비틀고 하면서 발사 직전의 우주 비행사의 행동을 재현했다.
"발사!"
폭발 순간에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이 하애지더니 아랫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면서 천천히 일어나 앓았다.
"뭔가, 데이븐포트?"
"아파요. 압력 때문에 여기가."
그는 오른쪽 아랫배를 가리켰다.
캡슐이 치솟아 오름에 따라 고통도 낫는 모양. 그는 차츰 회복되어 기쁜 얼굴로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오케이, 이상 없음."
이런 따위 신호를 보냈다.
나는 손짓을 해서 그의 말을 멈추게 하고 말했다.
"35시간 뒤에야 자네는 달의 이면을 돌고 두 번째의 섬광을 발사했네. 지구가 보여, 이제 어떻게 되지?"
그는 다시 민첩하게 손발을 움직여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계들을 만졌다.
"전속력으로 돌진!"
하고 내가 말했을 때, 그는 앞을 내다보곤 싱긋 웃었다.
"헬로, 새파란, 아름답고 정다운……"
그는 공중을 올려다보며 놀란 표정이 되어 몸이 빳빳해졌다.
"무슨 일인가?"
나는 성급하게 물었다.
"중력입니다."
그는 중얼거렸다.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지구와 연락이 끊어졌어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앞을 내다보며
"아니요. 아냐." 라고 말했다.
"무엇이 보이나? 데이븐포트!"
"저…… 배에요, 바로 앞에 있어요. 내가 저걸 따라 가나 본데요, 그리고 지금……"
그는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맹렬히 갈기고 있었다.
"엔진이 꺼져요."
그는 목이 꽉 막혔다.
"엔진이…… 꺼져요."
라고 그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나는 배 쪽으로 끌려가요."
그는 절망한 얼굴로 캡슐 창 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쪽문이 열리고 우리는 배 갑판 위에 들어왔어요."
그는 뻣뻣해진 채 기다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한편으로 돌렸다.
"그 쪽문을 열지 말아!"
하고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는 가냘픈 외침에 불과했다. 그는 공포에 가득 차서 무엇이 - 아마도 쪽문이 - 캡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우주 비행복을 벗는 듯 천천히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만지지 말란 말이다…… 내 산소란 말야."
그는 숨쉬기가 힘드는지 잠깐 뻣뻣해지더니 한두 번 숨을 쉬어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공기다. 이 배엔 공기가 있다."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지?"
하고 나는 가만히 물었다.
"커다란 우주선이요. 격납고 같은 거예요. 텅 비었냐구요? 아뇨, 저것들은 사람인가요?"
이 마지막 말은 묻는 투였다.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나?"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머리를 저으면서
"안 보여요. 눈이 부셔서."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는 양손을 들고 무엇을 떨어버리려는 몸짓을 했다.
내가 손짓을 하니까 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지? 대위."
"나를 캡슐 밖으로 끌어내고 있어요."
그는 놀란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다른 우주선 위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겁에 질려 있었다.
"아이구! 이게 우주선이란 말야?"
그는 둘레둘레 바라보았다.
"이건 금속으로 된 산더미에요, 굉장한데요, 굉장해요, 무슨 종류의 동력을 쓰는 걸까? 왜 등록이 안 되어 있을까? 아무리 이렇게 큰 것이…… 아서요, 아서!"
대위는 물 속에서 움직이듯 허우적거렸다.
대위는 눈을 감고 몸서리를 쳤다.
"만지지 말란 말야. 제발, 제발."
그는 또 허우적거리다가 점차 안심이 되는 듯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이야, 폴?"
"저것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요. 가만 가만히, 그리고 한 사람이 내 머리를 다독거립니다. 무슨 개가 고양이를 어루듯이 내 머리를 다독거립니다. 무슨 개나 고양이를 어루듯이……."
"자네를 다독거려? 그럼 그것들이 보이겠지? 어떻게 생겼어?"
그는 천천히 걷는 시늉을 하며
"안 보여요."
"여보게 데이븐포트, 천천히 보게, 똑똑히 보이지, 보이지?"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아뇨, 그것들말고는 다 보입니다. 이 벽은 금속입니다. 따뜻합니다. 그리고 이 방…… 낮은 탁자, 밝은 등불, 실험실인가 보죠? 무슨 도표인지 그래프가 있어요. 그런데, 그놈들은 안 보여요. 희미한 게 움직이기만 하구……."
그는 몸을 움직이며 땀이 비오듯 했다. 이 때,
"놈들이 내 옷을 벗겨요. 발가벗기고 있어요."
그러자 덜덜 떨면서 말했단.
"아이 추워, 추워 죽겠구나, 이놈들아! 나를 벽에 세워놓고, 벽에서 빛이 나옵니다. 전기 냄새…… 오존 냄새."
그는 또 팔을 들고 손가락을 펴고 다리를 벌리고 섰다.
"이놈들이 나를 재고 있어요, 내 몸의 내부 조직을 사진으로 찍고 있어요."
"그게 누군가?"
나는 손짓을 하며 물었다.
"폴, 잘 들어 그놈들을 봐, 똑똑히 보란 말야."
그는 자세히 쳐다보는 시늉을 했지만 눈이 부신 듯한 얼굴로,
"안 보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 사지를 세고 있어요. 손가락 발가락 이빨…… 야, 이게 뭐야!"
그는 이와 같이 정밀한 신체 검사라고 보이는 과정을 주욱 설명했다. 외적인 것은 무엇하나 남김없이 다 검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인지 몸이 꽉 눌리고 나서 대위의 주형을 때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스펀지 고무 같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자 대위는 갑자기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수술실이에요, 놈들이 나를 눕히고 있어요, 안 돼, 안 돼!"
"폴, 무슨 일인가?"
"놈들이 내 관자놀이에 무얼 갖다 댑니다. 전선이에요."
"전기가 또……"
나는 그를 찬찬히 보았다. 머리털이 갑자기 뻣뻣이 곤두서고 이마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실신 상태로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전기가 완전히 통한 모양이었다. 그는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배 근처가 이상하게 경련 하는 것 같아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웃옷을 벌려 보았다.
가느다란 붉은 줄이 갈비뼈에선 아랫배로 흐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그것은 하얗게 변하고 차츰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데이븐포트는 다시 생기를 찾고 눈을 떴는데, 눈동자가 커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은 내가 그를 혼수 상태에 빠뜨리던 때와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데이븐포트!"
나는 날카롭게 말했다.
"빨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놈들이 나보고……"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 끌어내는 듯이 보였다.
"내 우주선으로 돌아가면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타이르고 있어요…… 나는 기억하지 않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는 한쪽 팔을 짚고 일어나듯이 기쁜 빛을 띄었다.
"내 비행복, 비행복을 입혀 주고 있어요. 오케이. 오케이."
그는 옷을 꿰어 입고 단추를 끼고 나서 헬멧을 쓰는 시늉을 했다.
"조심해야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좌우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되었다."
"폴?"
"네, 이놈들이 날 캡슐로 데리고 갑니다. 여긴 꼭 항공모함의 격납고 같은 데요. 만일에 이렇게 큰 항공모함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죠. 글쎄. 패트릭 기지의 활주로 같은 걸요."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나 폴?"
"캡슐에 돌아 왔어요. 이놈들이 우리들의 장치를 썩 잘 알고 있는가 봐요."
그는 한숨을 들이쉬고 의자에 주저앉아 있더니 마치 발사 직후처럼 차츰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자넨 지금 어디에 있지?"
내가 물었다. 그는 힐끗 보더니 앞을 내다보고 말했다.
"캡슐 안에 있죠, 60시간 있으면 도착합니다."
"그 커다란 우주선은 어떻게 됐지?"
하고 내가 말했다.
"수술실은 또 어쩌구?"
그는 스위치들을 건드려 보고 다이얼을 들여다보곤 하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는데요?"
분명히 그 기이한 체험이 이젠 끝난 것이었다. 그는 다시금 캡슐 안에 태워져 날기 시작하고 있으며 모든 것은 무의식의 저 밑바닥에 파묻혀 버렸던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셋을 세면 데이븐포트, 자네는?"
나는 천천히 명료하게 말했다.
"지구로 돌아와 있을 테고 여기서 말한 걸 한 가지도 기억 못할 거야 알겠지, 하나, 둘, 셋……."
그는 꼼짝 않고 앉아 있더니 잠시 후에 말했다.
"다 끝났어요? 이상하군요, 나는 하나도 기억이 없으니 말씀이에요."
"뭐, 기억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던 걸."
후에 나는 프런드 대령과 만나 최면 시술 결과를 얘기했다. 그 자리에선 나는 데이븐포트가 우주 비행 후 투시선 검사를 했는가 물었는데 프런드 대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복부 내장 검사를 해 주시오."
"왜요? 데이븐포트가 어디가 불편하다고 투덜댄 일이 있나요?"
"아니오, 불편하다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란 말씀이오, 의당히 아프다고 했어야만 해요."
데이븐포트는 내장이 X광선에 나타나게끔 하는 특별한 약을 먹고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두 가지 기이한 일이 나타났다. 갈비뼈부터 아랫배까지 길고 가느다란 줄이 빛나고 있음이 눈에 띄었다. 또 오른쪽 아랫배 한 부분이 같은 종류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데이븐포트의 진료 기록표에는 맹장 수술 혹은 그밖에 어떤 외과적 수술도 받았다는 기록이 없었다.
데이븐포트에게 꼬치꼬치 캐물은 결과, 그는 우주 비행을 하기 직전에 오른쪽 아랫배가 퍽 아팠었다고 대답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맹장염의 징조가 보였던 것이지만, 그는 흥분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로켓이 발사된 직후에는 굉장히 아팠었지만 달 주위를 돌고 난 뒤에 지구가 보이는 지점에 와서부터는 고통이 싹 가셔 버렸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정밀한 탐색 검사를 해 보았다. 그 이상한 빛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 조사에서 우리는 데이븐포트의 맹장이 탁월한 솜씨로 전단 수술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 냈다. 그것도 분명히 최근에 말이다. 분홍 빛깔의 새 살이 절단 부분에 나 있었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일은 맹장이 있던 바로 위의 내장 거죽에 삼각형이며 반점이며 선으로 된 지도 같은 모양이 흐린 하늘색으로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르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일종의 문신인 것 같다.
빛의 근원은 아마도 새 살을 나게 하고자 사용한 무슨 방사능 과정에서 남은 결과라고 짐작된다.
데이븐포트의 복부 안쪽에 아직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어서 복부를 절개한 일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준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데이븐포트는 그가 내 앞에서 재현한 모든 일을 실제로 체험했다는 것이다. 어떤 알지 못한 종에게(그것이 화성(?)인지 또는 무슨 별에 사는 괴물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로켓이 내 쏜 소듐 섬광에 이끌려 왔을 것만 같다) 납치되었다가 놓여났을 것이다. 그놈들은 데이븐포트를 그 우주선(틀림없이 정찰 임무를 가진 우주선 일게다.)을 납치해 놓고 생리학적인 검사를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때 데이븐포트의 맹장염을 발견하고 절단한 다음, 내장에 이상한 문신을 새겨 넣었다. 복부의 절개는 아마도 무슨 전자 메스로 한 것이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히 희미한 흔적 밖에는 남기지 않았다. 수술 후 그는 문자 그대로 순간적인 작용으로 새 살을 나게 하는 어떤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납치 순간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버리는 최면의 암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놈들은 무슨 발광체로 된 옷을 입었던가, 그런 장치를 가졌던가 해서 데이븐포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여야겠다. 동물학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어떤 야생 동물을 몇 마리 잡아서 조사한 뒤에 그 동물의 어떤 부분에 특별한 표시를 새겨 놓고 놓아 준다. 어느 기간이 지난 뒤 그 학자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이라도 그것을 다시 잡으면 그 동안의 성장 혹은, 다른 학술적인 자료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낙인이 찍힌 동물을 '컨트롤'이라고 부른다. 내 생각 같아서는 데이븐포트의 배 안의 문신은 바로 이 낙인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면 누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우리는 다만 기다려 보는 수밖에는 없겠다.
<끝>
작품 해설
서 광 운
지구 위의 인구는 나날이 늘고 식량 생산은 더디다. 어떻게 해서 넉넉한 식량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농학자들은 온갖 열매를 크게 만드는 방법으로 씨앗 개량에 온갖 힘을 다하고 있다.
참으로 농업 개량은 큰 문제임에 틀림없다. <북극성의 증언>은 이러한 농업 개량을 도마 위에 놓고 사람과 식물의 관계를 우주의 특수한 공간을 무대로 살펴보려는 시도라 하겠다. 좀더 능률적인 생산 방법이 없을까 하는 모색 끝에 식물 자력선 연구소가 설정된 것이다. 이를테면 토마토를 재배하는데 우리에 가까운 땅 속에 자석을 심어 두면 땅 속의 철분을 좀더 많이 이끌어 낼 수가 있어 토마토 열매는 더 실하고 옹글지게 마련이다. 식물과 자력의 상호관계를 확대하면 식물 자체 특히 나무의 경우 자식과 자력선의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무의 뿌리는 자석의 핵이요, 줄기를 거쳐서 하늘 높이 가지와 잎사귀를 매다는 모습이 자력선과 비슷하다는 뜻이라 하겠다. 우리의 조상은 일찍이 나무 가운데서도 느티나무와 같은 단정한 나무를 숭상했다. 뿌리는 다리요, 줄기는 몸통이요, 가지는 팔이라고 생각한 끝에 거기에 하늘로 통하는 기운이 있다하여 곧잘 신주로 모시기도 했다.
식물을 신비롭게 여기는 일은 비단 이것뿐이 아니라, 영하의 온도에서도 살아 남는 한대 지방과 툰드라, 사시사철 잎사귀가 짙푸른 상록수, 겨우살이를 하려고 넘은 잎을 떨어뜨리는 활엽수 등은 물론 한 해 동안에 열매를 맺는 식물에 이르기까지 신비스럽지 않는 게 없다.
이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좀더 식물을 개량해서 식량을 넉넉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길러 보려고 무대를 화성 오메가 9호 별로 옮긴 것이다.
우리의 태양계에 가장 가까운 별 중에 프록시마 별이 있다. 이 곳 우주인들은 식량을 합성해서 먹던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역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활로를 찾게 된다. 녹색 인간의 녹색은 대자연을 상징하고 있으리라.
그들은 새로운 품종의 과실을 얻으려고 우주 공간의 여기저기서 실험을 계속하게 된다. 탄산가스를 흡수하여 산소를 내뿜는 식물의 특성 때문에 사람을 식물의 보조 기구로 쓰게 된다. 즉 사람은 식물과는 정반대로 산소를 호흡하여 탄산가스를 내뿜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도로서 플러스 방향의 압력 대신에 마이너스 방향의 압력이 식물의 성장과 관계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상에서 육면체의 열매, 사면체의 열매의 연구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열매들은 수송할 때나 포장할 때 극히 편리하기 때문이다. <북극성의 증언>은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가상이며 여기서 지구의 문명을 희랍 말로 알파 문명이라고 규정할 때, 만유인력을 사용하게 되면 감마 문명, 그러니까 프록시마 별의 문명은 이보다 한발 앞선 델타 문명으로 본다. 광선이 물질인 이상 중력도 물질이어야 된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흔히들 무한 동력을 모르고 있지만, 장차 물질로서의 중력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면 우리의 에너지원은 무한히 해방 될 것이다. <북극성의 증언>에서 화성 여행을 하게 되는 사람의 수는 3명이다. 이 작품은 1966년에 쓰인 만큼, 세 사람의 우주 비행사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1969년 7월 21일보다 3년 앞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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