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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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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북벌에 참가한 리용
2007년 07월 18일 22시 56분  조회:4140  추천:61  작성자: 김성룡

   1925년 광주국민정부가 수립된후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북양군벌 통치를 타도하며 중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수억 중국인민의 공동한 념원으로 되었다. 한편 국공합작후 두차례 동정과 군벌반란을 진압함으로써 혁명기반이 더욱 굳어졌고 북벌할 조건이 성숙되여갔다.

  국민당은 손중산의 서거로 좌파, 우파로 갈려 벌써 권력쟁탈의 기미를 보이고있었지만 손중산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을 할 것을 요구하는 의지가 우세를 차지하였다. 국민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고있던 공산당은 1926년 4월 중앙특별집행위원회 림시회의를 소집하고 신속히 북벌을 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민정부의 쏘련고문이였던 보로딘(鲍罗廷)도 중국공산당과 함께 국민당내 진보인사들을 단합하여 광주국민정부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드디어 광주국민정부는 1926년 6월 5일, 북벌출사표를 내고 전국동원령을 내렸고 7월에는 <북벌선언> 발표와 더불어 각 혁명군은 선후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중국 중부지역인 호남, 호북, 하남, 하북에는 오패부(吴佩孚)가 20만 군대를 거느리고있었고 동북과 경진(京津)지역에 웅거한 장작림(张作霖)은 35만 부대를 가지고있었으며 장강 하류의 강소, 절강, 안휘, 북건, 강서를 비롯한 동남부지역을 제패하고있던 손전방(孙传芳)도 20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국민혁명군 10만 정규군이 세갈래로 나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리제심(李济深)의 4군, 리종인(李宗仁)의 7군, 당생지(唐生智)의 8군으로 구성된 제1로군은 중부지역의 오패부를 상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담연개의 2군, 주배덕(朱培德)의 3군, 정잠(程潜)의 6군으로 편성된 제2로군은 강서의 손전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직계부대인 하응흠(何应钦)의 1군을 동남부에 배치하였다. 한편 혁명사상을 받아들인 풍옥상(冯玉祥)이 서북군을 거느리고 장작림을 공격함으로써 북벌군을 유력하게 도왔다.

북벌초기 도합 8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북벌군에 참가하여 싸웠다. 그 대표적 인물은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산두포병련의 련장으로 있던 리용과 광주에 있던 박영이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재학생들은 중국인 재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생군에 편입되였다. 10월에 졸업식을 가진 4기생들은 곧 사관으로 임명받아 광주시 수비와 일선전투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의렬단의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교관으로, 박효삼(朴孝三)과 강평국(姜平国)은 입오생부 교관으로, 리기환(李箕焕)은 관리부 요원으로 학교에 남아있었다. 그들은 후속 입교생들속에서 더욱 많은 의렬단 단원들을 모집할 의도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200여명 조선청년들은 제4군 장발규(张发奎)부대와 엽정(叶挺) 독립퇀에 가담하였고 기타 2군, 3군, 6군을 비롯한 혁명군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중국 동북과 쏘련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고 훌륭한 군사지식을 습득한 조선혁명자들도 이시기 북벌전에 참가하였다.

  씨베리아 고려의용군 사령관을 력임했던 리용(李镛)은 국민혁명군 동로군 총지휘부의 포병대 교관직을 맡고 참전하였고 동북의 조선독립군부대 지휘관이었던 김홍일(金弘壹)도 동로군 총지휘부의 참모가 되었다. 1927년 1월 18일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모스크바 사관학교 출신인 쏘련군 조선인 장교 15명도 홍의표(洪义杓)의 인솔하에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였으며 그중 네명은 무창(武昌) 공략전에서 지휘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리용(1888.4.7--1954.8.18)은 <헤그밀사>의 한사람이였고 유명한 애국자였던 리준(李准)의 장남이다. 명문가족에서 태여난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룡정으로 온 후 동성 장흥동에서 살았다. 1907년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델란드 헤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의 고종황제는 헤그대회에 밀사를 파견하려 했다. 그리하여 리상설과 리준, 리위종은 헤그로 가서 <을사조약>은 일본의 무력으로 강제 체결된것임을 설명하고 기타 제국주의 렬강의 동조를 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헤그대회는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리유로 이들의 대회참석과 발언마저 거부하였다. 밀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데다 망국을 눈앞에 둔 리준은 다른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연히 몸에 불을 부치고 분신자결하였다.

아버지 리준이 헤그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리용은, “너의 몸은 반드시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 독립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나 여러파벌로 나뉘여 언쟁에만 여념없는 독립군에 실망한 그는 중국 관내에 들어가 항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그는 상해 림시정부에 몸을 담고있다가 공산주의자 리동휘의 주선으로 1918년 5월 다시 중국 동북에 왔다가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경신년토벌 때 그는 부대를 따라 로씨야로 후퇴하여 쏘련홍군에 참가하였다. 쏘련에서 그는 조선혁명가들을 이끌고 쏘련홍군의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웠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26년 중국혁명이 고조되자 쏘련 군사학교 포병과에서 전공하던 리용은 쏘련홍군 고문단 일원으로 광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뛰여난 군사지휘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후 산두시(汕头市) 혁명군 포병영 영장을 맡게 된다. 이때 리용은 로씨야에 있는 전우 박영에게 편지를 보내 광주에 와서 혁명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편지를 받은 박영은 동생과 부인을 데리고 광주에 와서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였다. 이들은 모두 용약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장개석을 총사령으로하고 리제심을 총참모장으로, 등연달(邓演达)을 총정치부 주임으로, 쏘련인 까룬(加伦)을 군사고문으로 한 국민혁명군은 병력을 집중해 각 군벌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전술을 짰다. 우선 력량을 집중해 오패부를 타격하고 풍옥산 부대와 장작림의 싸움을 관망하고만 있는 손전방을 잠시 놓아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제1로군이 북벌의 주력으로 되었고 호남, 호북 전선이 주요전장으로 되었다.

  1926년 7월 상순, 싸움에 능한 지휘원들인 장발규, 엽정, 채정개(蔡廷铠), 리종인의 지휘하에 여러 북벌군 부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7월 10일부터 예릉(醴陵), 주주(株洲), 상담(湘潭)을 련이어 격파하고 호남성의 중심도시인 장사(长沙)를 공략하였다. 8월에는 평강(平江), 악양(岳阳) 등지를 점령하고 호북경내로 진격하였다.

  전투가 호북경내에서 벌어지자 크게 놀란 오패부는 본거지인 무한을 사수하기 위해 주력군을 무한 남부에 포진하였다. 정사교(汀泗桥)와 하승교(贺胜桥)는 무한으로 통하는 중요한 문호였다.  

  제1로군은 서로군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부대에는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많았기에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또한 중국공산당이 일찍부터 부근에서 로농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기 때문에 북벌군은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북벌군 선견대로 선정된 엽정부대에는 160명으로 된 조선인 련대(连队)도 있었다. 조선인 사관들은 뛰어난 통솔력과 정치공작 능력으로 중국 군정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벌군은 4군 두 개 사단과 엽정독립단을 정사교 정면공격에 내세우고 7군과 8군의 부분적 부대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무한에서 광동으로 통하는 월한철도(粤汉铁路)가 지나는 정사교와 하승교를 사수하기 위해 오패부는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렬차에 사령부를 정하고 “칼잡이”부대를 조직해 퇴각하는 자들의 목을 치게 하였다.

  8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였다. 북벌군 수만명과 2만 수비군이 정사교에서 접전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진지는 빼앗기고 다시 빼앗으면서 거듭되는 반복을 거쳤고 시체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팽팽한 대치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철군(铁军)>으로 소문난 엽정부대는 우회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6군의 기관총부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기관총련의 교관을 맡은 조선인 군관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의 기세를 제압했다. 기관총부대의 준확한 명중률과 집중사격으로 적 진지의 적들은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엽정부대는 신속히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였으며 천여명 적을 격살하고 천 4백여명을 포로하였다.

  29일에는 당지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북벌군은 드디어 정사교 천험을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무한의 마지막 문호인 하승교로 진격하였다. 전투에서 뛰여난 지휘력과 전투력을 과시한 김준섭은 군공을 세워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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