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che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김성룡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프로필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2007년 05월 27일 18시 06분  조회:3858  추천:123  작성자: 김성룡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1935 12월 메마른 겨울 찬바람이 세찬 섬북의 작은 도시 와요보에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있었다. 문밖에서는 참바람이 계속 세차게 불어치고있었지만 널찍한 토굴집에 모인 사람들은 뜨거운 열의로 중국의 전도와 운명을 거론하고있었다.

    중앙홍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후 당중앙에서는 이곳을 전국혁명의 대본영으로 만들었다. 섬북혁명근거지는 지역이 넓어 홍군이 얼마든지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전개할수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적고 경제가 락후하며 교통이 불편하여 홍군을 확대하고 부대공급을 하기에는 곤난이 많았다. 게다가 아직 장정을 마치지 못한 홍군부대도 적지 않았다. 장국도가 거느린 제4방면군이 계속 사천경내에서 방황하고있었고 하룡이 거느린 홍군 제2군단,  6군단과도 련락이 두절된 상황이였다.

직라진전투가 있은후 와요보에 도착한 모택동, 장문천, 주은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12 17일부터 25일까지기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해야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전면 서술하였다. 북평에서 발생한 12.9애국청년학생운동은 중국인민 항일구국민주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형성하였다. 중일간의 민족모순이 격화되고 항일민주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중국력사도 토지혁명전쟁으로부터 민족혁명전쟁으로 전변되고있는 길목에 놓이게 되였다. 이러한 정세에 비추어 와요보회의에서는 국내전쟁과 민족전쟁을 결부시키고 직접적인 대일작전을 위해 힘을 키우며 홍군의 력량을 확대할것을 결의하였다.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은 양림은 각부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쏘베트근거지 확건사업에 뛰여들었다. 그는 군중들을 발동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적극 선전하는 과업을 맡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와요보를 위협하는 적들을 저격하였다. 그는 75사 전사들을 거느리고 락생진 부근에서 적 3개퇀의 공격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1936 1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동진항일과 매국역적 염석산을 토벌할데 관한 명령을 하달했다. 홍군 제1방면군은 신속히 동정편대로 재조직되였다. 팽덕회가 총사령을 맡고 모택동이 총정치위원을 맡았으며 염검영이 총참모장을 맡은 중국인민항일선봉군이 조직되였다. 동정항일선봉군은 홍군 제1군단과 제15군단으로 무어졌다. 양림은 계속 15군단의 주력인 75사 참모장을 맡았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소식을 접한 염석산은 홍군을 막기 위해 황하와 황하기슭 려량산의 지세를 리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10만 병력을 모아 수비진을 쳤다.

 

     1936 2 18일 전사들을 거느리고 일망무제한 황토고원을 가로질러 동으로 내달리던 양림은 새로운 명령을 접수하였다. 홍군의 첫 작전임무는 동으로 황하를 건너 확고한 진지를 마련한 다음 계속 려량산맥의 각현들을 공격하여 점령하라는것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홍군 1군단은 제2사를 선두로하였고 15군단은 75사를 선두부대로 하였다. 게다가 모택동과 홍군총지휘부가 모두 제15군단과 함께 도하한다고하였다. 양림은 사장 장소동과 토의한후 직접 223퇀을 거느리고 하구나루터를 확보하기로 하였다. 금사강의 천험을 돌파하고 대도하를 건넌 양림은 풍부한 도강작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2 20일 양림은 선견대를 거느리고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에 이르렀다. 마을앞으로는 누런 황하가 사품치며 흐르고있었고 강대안은 절벽이 가로막혀있었다. 강폭은 근 천메터에 달했고 강에는 갇 풀린 얼음쪼각이 흘러내리고있었다.

홍군전사들은 양림의 지휘하에 하구촌 곁으로 흐르는 무정하에서 엄격한 도하훈련을 진행했다. 큰 벼랑이 막혔기 때문에 적들은 홍군의 행동을 알수없었다. 그들은 황하의 물살과 도하에 수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였고 선견대가 탈 나무배도 대기시켜 놓았다. 배는 작은 목선 5척과 큰 나무배 2척뿐이였다. 한편 양림은 농민 차림을 하고 황하 기슭에서 적들의 수비 상황을 자상히 정찰하였다. 염석산은 황하 천험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천리 황하를 빈틈없이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예로부터 군사요새이고 유명한 황하 나루터였던 하구를 수비하기 위해 놈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갖춘 100여명 적을 일선에 배치하였고 하가와촌 부근에 수시로 지원할 수 있는 한 개 영의 병력을 포진했다. 적은 또한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산정에 크고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양림은 선견대에서 수영에 능한 40명 돌격대 대원을 선발하였다. 모두가 공산당원이거나 공청단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전투의 승리만은 의심치않았다. 사 참모장인 양림이 직접 도하작전을 지휘한다기에 전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그들은 중앙홍군 장정시 금사강나루터를 탈취하고 통안진을 습격하는 전투 지휘자인 양림을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2 20일 밤 하늘에는 별도 달도 다 보이지 않았다. 양림의 명령에 따라 40명 돌격대원들은 5척의 작은 배를 타고 먼저 강을 건넜다. 그들은 팔에 흰천을 두르고 등에도 흰천을 댐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아군이 쉽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양림은 직접 기타 전사들과 함께 2척의 큰배를 몰고 뒤를 따랐다.

    돌격대는 대안과 수십메터 거리를 둔 곳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황하기슭을 순라하던 적이 홍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산정의 적 보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토하였다.

 

    양림은 기관총 부대를 조직하여 적의 화력을 제압하게 하고 선견대 전원에게 강행도하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 전사들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한편 앞장선 돌격대원들은 신속히 황하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적 보루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보루를 까부셨다.

    두려움 모르는 홍군전사들은 적 수비진을 헤치고 순조롭게 강을 건너 하가와촌을 점령하였다. 후속으로 더욱 많은 홍군 부대가 강을 건너왔고 홍군 전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부근의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선견대와 함께 도하한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하가와촌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길목의 적 보루를 제거하고 하가와촌을 수비하는 적 한개련을 소멸하였다. 부대는 계속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도하작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경위원과 함께 전장을 점검하면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군에게 제거된 적 보루에 숨어있던 놈이 총을 쏘았다. 적탄은 양림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선견대 영장과 경위원이 달려와 그를 구호하였다. 전사들은 그를 부근의 요동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공화국 상장인 주사제는 회억록에서 홍군의 동정과 동정에서의 양림에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양림의 오랜 전우인 주사제는 당시 홍군 제15군단 참모장으로 전반 동정작전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양림이 불행히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주사제는 급히 전선으로 달려갔다. 하가와촌에 도착한 그는 마을에서 병치료하고있는 양림을 찾아보았다.

    양림은 얼굴에 피기가 없었지만 주사제를 보자 전투상황부터 다잡아 물었다. 주사제는 지금 홍군 75사는 의첩진을 공격하고있고 78사와 군단부도 의첩진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튿날이면 석루현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도 이미 황하를 건너 전투를 지휘한다고 알려주었다.

    양림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전선에 나가 싸우라고 주사제를 억지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양림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적시적인 치료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그는 38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드넓은 황하가 거침없이 흐르고있고 천길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 한 가운데 위치한 이름 없는 하가와촌, 조선혁명가 양림은 바로 이  편벽한 마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청산리 전투와 국민혁명군의 동정, 북벌전쟁, 2 5천리 장정, 홍군의 동정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훌륭한 군사지휘자로 중국 력사무대에서 활약했던 양림은 끝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러보지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었던것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자식을 잃은 그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항쟁한 그였지만 희생된후 묘소 하나도 명확히 남기지 못하였다. 두터운 황토가 깔린 무연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그의 뼈가 묻혔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정하게 흐르고 흐르는 강물뿐이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황토뿐이다.

    그러나 양림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한 청산리 골짜기에 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홍군대학의 조련장에 그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사강 천험인 교평 나루터에 그의 영웅적 위훈이 남아있고 황하 하구 나루터에 그의 혁혁한 전과가 남아있다. 그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중국혁명의 승리와 결부시켜 전반 약소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피어린 항쟁을 계속 해왔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걸출한 군사가로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그의 빛나는 항쟁의지와 헌신적인 국제주의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며 우리의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될것이다.

 

    양림이 희생된후 홍군 주력부대는 양림이 개척해 놓은 하구나루를 통해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25일에 석루현을 점령하고 천 2백여명 적들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3월 하순 홍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려량산 내지로 진격하였다. 염석산의 잔여부대를 소멸한 홍군은 지주와 토호를 타도하고 빈곤한 백성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면서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19365 5일 예기한 군사목적에 도달한 홍군주력은 다시 황하를 건너 섬북으로 개선하였다. 75일간 지속된 홍군의 동정은 정치와 군사적인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국민당군 7개 퇀을 소멸하고 4,000여명을 포로했으며 실전에서 홍군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산서 수비에 급급한 염석산이 섬북으로 진출한 부대를 철수했기때문에 섬북근거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수 있었다. 홍군은 동정에서 8,000여명의 병사를 새로 흡수하고 30여만원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홍군과 근거지의 력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선서성 20여개 현에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의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고 일부 항일유격대와 유격구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후 려량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밑걸음으로 되였다.

이해 하바기에 들어서 전국각지를 전전하면서 싸우던 기타 홍군주력부대도 선후로 섬북에 모여오기 시작하였다. 4방면군은 당중앙의 거듭되는 명령에 따라 사천을 벗어나 북상길에 올랐고 하룡이 거느린 홍군 제2군단, 6군단과 회합하였다.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하룡부대는 홍군 제2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두 방면군은 감숙, 녕하로 진출하여 섬북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1936 11월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팽덕회 사령원의 인솔하에 서부로 진격하였다. 홍군 1방면군과 2방면군 그리고 제4방면군은 산성보에서 공동작전하여 추격해오는 적 주력을 통쾌하게 섬멸한후 승리적인 대회합을 이루었다.

1936 11 23일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2방면군, 4방면군 산성보에서 회합하였다. 이는 만리장정을 거친 홍군의 대회합이며 또한 홍군장정의 철저한 승리를 의미하는 순간이였다. 중국로농홍군 총사령인 주덕은, 세 주력홍군의 대회합과 산성보전투는 장정이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장정은 우리의 승리와 적들의 실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홍군은 섬감쏘베트근거지에 발을 붙이고 전국 항일구국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맞이해야한다고 강조했다. 

2 5천리 대장정은 드디어 홍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위대한 전투에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가하였고 또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이들이 남겨놓은 빛나는 발자취는 장정정신과 함께 인류력사에 기록될것이며 그들의 드높은 혁명정신은 마냥 우리를 격려할것이다.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1 ]

1   작성자 : 강룡운
날자:2007-06-09 06:44:44
김성룡님이 큰 일을 해냈습니다. 님의 글을 통해 많은 자료들을 접할수 있었고 이전에 모르고있던 적지않은 력사적사실들을 알수있게 됐습니다.이렇게 훌륭한 글을 써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Total : 1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0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2007-05-27 123 3858
9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2007-05-27 61 3069
8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2007-05-27 65 3289
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⑦ 2007-05-27 94 3372
6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⑥ 2007-05-27 53 3080
5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⑤ 2007-05-27 61 2748
4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 ④ 2007-05-27 76 3255
3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2007-05-27 65 3056
2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 ② 2007-05-27 81 3284
1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① 2007-05-27 107 353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