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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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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2007년 05월 27일 18시 01분  조회:3289  추천:65  작성자: 김성룡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사천성 북부의 송반초지는 평균 해발 3천여메터의 고원습지로서 예로부터 이곳은 인적하나 없는 죽음의 수렁으로 알려져있었다. 남북으로 약 2백킬로메터, 동서로 약 백킬로메터되는 송반초지는 사천성과 감숙, 섬서의 린접한곳에 위치했다. 만수천산을 넘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곳에 당도한 홍군은 또 한차례의 생사를 다투는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야했다. 장정을 시작해서부터 홍군이 이겨낸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 악렬한 자연환경으로 인한 시련을 놓고볼때 아마도 송반초지의 시련이 가장 컸다고 할수있다.

    초지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집없었다. 아침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며 찬비가 후둑후둑 내리다가 점심에는 갑자기 맑게 개인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군 하였다. 폭우로하여 초지의 강물이 급격히 불었고 도저히 도섭할수없었다. 홍군선견대는 할수없이 비가 멎고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가 계속 전진하군 하였다.

    초지 한가운데는 작은 산등성이가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초지의 물줄기는 남북으로 갈려 수천갈래로 흐른다. 남으로 흐르는 강들은 민강과 합쳐 장강으로 흘러들고 북으로 흐르는 강들은 북으로 마곡강과 합쳐 황하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국의 두갈래 큰 강인 장강과 항하를 나누는 분수령이기도 하였다.

     초지에 들어선 이튿날부터 많은 홍군 장병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내의 마지막 한가닥 열량까지 모조리 소모하고 소리없이 흙탕속에 잠겨버리군 하였다. 어떤 사람은 저녁까지만 하여도 빗속에서 전우들과 함께 서있었지만 이튿날 날이 밝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섰던 자리에는 이따금 거품을 뿜는 검은 흙탕물뿐이였다. 계속 전진하고있는 사람들의 얼굴색도 검푸르러 있었다. 모진 추위와 기아로하여 많은 전사들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 간부퇀 참모장인 양림, 중앙종대 제3제대 책임자인 무정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도 기타 홍군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간고한 송반초지의 어려운 행군을 진행하였다. 험악한 대자연은 인간 정신력과 의지력의 극한을 강요하고있었던것이다.

 

    1935 5월 참모장 양림이 거느린 간부퇀 전사들의 빛나는 전과로 금사강을 건넌 중앙홍군은 승리적으로 제4방면군과 회합하여 좋은 국면을 개척할수있었다. 그러나 제4방면군의 장국도가 중앙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딴전을 부렸기 때문에 홍군은 이 불모지인 송반초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금사강을 승리적으로 건넌 중앙홍군은 회리부근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한편에서는 양림을 비롯한 간부퇀이 제3군단과 함께 회리현성을 공격하는 치렬한 접전을 치르고 한편에서 지도간부들이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회리회의에서는 군사작전에 대한 총화를 진행하고 계속 북상하여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할 계획을 세웠다.

    양림은 간부퇀과 함께 회리로부터 출발하였다. 홍군 참모장 류백승이 거느린 홍군 선견대는 순조롭게 소수민족지역을 통과했으며 슬기롭게 대도하기슭에 당도하였다. 홍군은 안순장 나루에서 배한척으로 강행도하하여 대안의 적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안순장에는 홍군을 도하시킬 나무배가 고작 4척뿐이였다. 적 주력부대가 곧 추격해 왔기 때문에 홍군은 여기에서 며칠씩 도강할 여력이 없었다. 류백승과 섭영진은 즉각 홍군 1군단과 간부퇀을 거느리고 대도하 북쪽기슭으로부터 로정교방향으로 공격해갔고 1군단 2사와 홍군 5군단이 림표의 지휘하에 대도하 남쪽기슭으로부터 로정교탈취작전에 나섰다.

    양림은 홍군들과 함께 대도하 북쪽기슭에서 행동했다. 부대는 안순장을 지원하러 온 사천군과 부딛쳤다. 홍군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적들과 싸워 하나하나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로정교로 향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양림과 전사들은 일주야를 적들과 계속 치렬한 접전을 치르면서 로정교에 당도하였다.

    대도하 남쪽기슭으로부터 전진하는 홍군들은 적들과 큰 전투를 겪지 않았다. 선견대는 하루 120킬로메터를 달려 남먼저 로정교에 이르렀다.

    대도하로부터 로정에 이르는 이곳은 해발 7천여메터되는 대설산과 해발 3천여메터의 이랑산이 마주한 곳이다. 대도하 강물은 두 산사이에 깊은 협곡을 형성하면서 벼랑사이를 사품치며 흘러내린다. 청나라 강희 44년에 서장의 라싸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이곳에 다리를 가설하게 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다리는 13개의 굵은 쇠사슬로 량쪽벼랑을 이어주고 거기에 널을 펴서 만든 다리였고 그 길이는 101.6메터였다. 홍군을 막기 위해 적들은 대안에 사격진지를 구축했고 다리의 널판을 죄다 뜯어버렸다. 로정교는 오직 13개의 굵은 쇠사슬만이 허공중에 걸려있을뿐이였다.

    홍군은 22명 돌격대원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추호도 주저없이 쇠사슬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였다. 그들의 뒤로 다른 전사들이 부지런히 널판을 깔아 다리를 만들면서 전진했다. 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홍군전사들은 기관총을 집중해 적진을 향해 사격하였으며 사기를 돋구기 위해 나팔수들을 모아 공격나팔을 울리게 하였다. 나팔소리가 천년의 협곡을 진동하였고 콩볶듯한 총성이 그칠사이 없었다.

    두려움 없이 공격해오는 홍군전사들 앞에 더럭 겁에 질린 적들은 진지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였다. 22명 돌격대원들은 용감히 불속에 뛰여들어 길을 헤치고 로정교를 점령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영웅적 22명 돌격대원들은 한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날이 저물무렵 적들과의 치렬한 접전을 거친 양림도 홍군전사들을 거느리고 로정교에 당도하였다. 강 량안의 전사들은 부근의 적들을 소멸하고 로정교를 완전히 확보하게 되였다.

 

    로정교를 탈취한 홍군은 대설산인 협금산을 넘어 드디어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중앙홍군과 홍군 제4방면군이 회합한후 홍군 간부퇀은 제4방면군의 홍군대학과 합병하여 새로운 홍군학교를 편성하게 되였다. 간부퇀 퇀장인 진갱이 악예환혁명근거지에서부터 장국도와 모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홍군 1군단 사장으로 조동되였다. 그리하여 예지량이 새로운 홍군학교 교장을 맡았다. 합병한후 홍군간부퇀은 홍군학교 특과퇀으로 편성되였다. 특과퇀의 대리퇀장은 위국청이였고 조선혁명가 양림은 계속 특과퇀의 참모장을 맡았다.

     1935 6 26일 중공중앙 정치국회의가 량하구에서 소집되였다. 회의에서는 금후의 작전방향을 토의했으며 계속 북상하여 섬북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순조롭게 사천을 벗어나 섬북으로 전진하기 위해 송반을 점령하는 송반전역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6 29일 중공중앙정치국 상무회의에서는 새로운 조직구성을 내왔다. 장국도, 진창호, 서향전을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충선거하였다. 하지만 두 주력홍군의 회합은 새로운 모순을 야기시켰다. 장국도는 당중앙에서 이미 결정한 북상로선을 반대하면서 홍군은 남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구실을 대면서 북상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군의 송반전역도 무산되고말았다. 국민당의 주력부대인 호종남군이 이미 송반을 점령하고 막강한 병력으로 수비하고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홍군은 장국도의 주장에 따라 두갈래로 나뉘게 되였다. 홍군 5군단, 9군단과 제4방면군의 부분적 부대로 좌로군을 편성하고 1군단과 3군단, 홍군 4방면군 부분적 부대로 우로군을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거느리던 중앙홍군은 둘로 나뉘여지게 되였고 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던 주덕도 좌로군을 거느려야했기때문에 모택동을 떠나게 되였다.

    1935 8 21일 모택동은 우로군을 거느리고 당중앙과 함께 일망무제한 송반대초지에 들어섰다. 만약 병력을 분산하지 않았다면 두 주력홍군은 얼마든지 송반의 적진지를 돌파할수있었다. 하지만 적이 한발 앞써 유리한 지세를 차지했고 홍군도 두갈래로 나뉘여 병력이 약화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죽음의 초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었다.

양림이 소속된 홍군학교도 우로군에 포함되였다. 그는 특과퇀 장병들을 거느리고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과 함께 초지에 들어섰다. 선견대가 가면서 길을 표시해 놓았지만 비바람에 씻겨 대부분 알아볼수없었다.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길잡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풀뿌리가 무성한곳을 밟으며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검은 빛갈을 띤 초지의 물은 독성이 있어서 그냥 마시면 배가 붙다가 죽게 된다. 그리고 상처난 자리에 물이 묻으면 곧 썩어버리군 하였다.

    찬비와 희박한 공기 그리고 죽음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수렁에 비해 더 큰 위험은 식량부족이였다. 사천북부 척박한 곳으로부터 송반초지에 들어왔기에 홍군전사들은 충족한 식량을 장만하지 못했다. 일부 대오는 초지에 들어선 이틀날부터 쌀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수시로 쓰러지는 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내의 마지막 한가닥 열량까지 다 소모하고 숨졌다.

    양림은 여러 군관학교에서 철같이 굳세게 다져온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전사들을 도와주고 앞장서서 길을 내면서 전진하였다. 간부퇀 전사들은 양림이 낸 발자욱을 따라 손에 손잡고 한걸음한걸음씩 따라 나섰다. 전반초지는 습하기 그지없었고 마른땅 한쪼각도 찾을수 없었다. 불을 피우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전사들은 겨우 피워놓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온기를 보충하면서 밤을 지내야했다.

 

     뭇별이 초롱초롱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양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몸은 마냥 추워들고 배도 굶주렸지만 종시 그리운 고향과 안해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장정을 시작한뒤로 이미 소식이 끊긴지 오래되였다. 동북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하고있는 안해 리추악의 환경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일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고향산천은 계속 일제에게 짓밟히고있을것이다. 씻은듯 맑은 밤하늘에는 사랑하는 안해의 얼굴이 나타나 웃어주는것만 같았다. 양림은 끊없는 향수에 잠겼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하늘에는 다시 먹장구름이 지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곳에 계속 주저해 있을수는 없었다. 해야할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보고 해방된 조국에 갈려면 우선 초지의 죽음의 고비를 꼭 전승해야했다. 전세계 무산자들과 함께 모든 죽음과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의 그날을 맞이해야했다.

    양림은 정신을 가다듬고 전사들을 격려하면서 걸음을 재우쳤다. 폭우로 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빗물에 잠겨 어느곳이 수렁이고 어느곳이 초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였다. 양림은 곁의 전사들과 함께 서로 팔을 끼였다. 이렇게 하면 수렁에 빠진 사람을 곁에서 쉽게 구할수있었다. 홍군장병들은 한마음으로 뭉친 강철의 집단적 힘으로 죽음의 초지를 정복하려했다. 수백명 전사들이 서로 팔을 겯고 어깨나란히 줄지어 망망한 초지를 향해 전진하였다. 그들은 인터나쇼날을 높이 부르면 드높은 열의로 전진했다.

7주야의 간고한 행정을 거쳐 우로군 홍군들은 드디어 죽음의 지대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승리적으로 정복하였다. 홍군이 절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찾아 송반초지로 가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하고있던 국민당군 호종남은 드디어 자기의 오판을 알게 되였다. 그는 뒤늦게 나마 포좌에 부대를 파견해 홍군을 막게 하였다. 이를 미리 파악한 홍군은 포좌를 포위하고 지원부대를 매복습격하는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홍군의 위기를 가셔지지 않았다. 당중앙에서는 신속히 북상할것을 좌로군의 책임자 장국도에게 촉구하였다. 하지만 장국도는 물이 불어 부대가 전진할수없다는 리유로 이를 거부하였고 주덕의 권고도 물리치고 계속 남하하려 시도하였다. 게다가 당중앙과 함께 우로군에 포함되였던 홍군 제4방면군의 일부 고위간부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35 9월 장국도는 드디어 당중앙의 북상로선을 거부하고 단연히 남하할 명령을 내렸다. 우로군 책임자의 한사람인 진창호도 장국도의 명령에 따르기로 하였다. 모택동과 당중앙은 할수없이 파서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장국도의 작법을 비판하면서 북상을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팽덕회가 거느린 제3군단과 중앙종대에 명령을 내려 밤도와 북상하도록 하였다. 부대는 신속히 행동하여 이미 아계로 전진한 홍군 제1군단과 회합하려 떠났다. 우로군의 홍군대학은 새벽 3시에 출발명령을 받았다. 명령서는 모택동과 주은래가 공동으로 서명했다. 특과퇀의 정위 송임궁은 부대를 소집하고 연설했다. 그는 북상과 남하의 로선투쟁을 설명하고나서 북상하려는 사람들은 중앙홍군을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양림과 특과퇀은 원래부터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해온 터이므로 두말할것도 없이 부대를 따라 나섰다. 원 간부퇀의 대부분 간부와 전사들은 홍군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고 학원들은 대부분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들이였다. 그러므로 양림을 비롯한 원 간부퇀의 장병들이 일제히 북상할것을 주장하고 떠나자 학원들도 따라나서게 되였다.

 

1935 9 10일 밤, 중앙홍군은 6시간의 밤길을 달려 아서에 이르렀고 날이 밝자 계속 아계로 전진하였다. 모택동과 장국도의 북상과 남하분쟁은 군사적인 쟁론이면서도 의지의 대항이기도 하였다. 중앙홍군은 홍군 1군단까지 합쳐 겨우 8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주덕, 류백승을 비롯한 주요장령이 장국도 부대에 남아있고 제5군단과 9군단도 제4방면군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북상의지는 무엇보다도 강했다. 그는 이 8천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중국혁명의 새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려했다.

우리는 꼭 승리해야한다. 아니 우리는 꼭 승리할수있다!”

    굳은 혁명리상과 정치적 신념은 더욱 굳은 의지를 낳았고 그 의지는 그무엇으로도 정복할수없었다.

    긴긴 밤이 지나고 동방이 희쁨히 밝아왔다. 피빛의 아침노을이 붉게 비추고있다. 죽음의 수렁으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지난 홍군은 두터운 황토가 쌓인 섬북으로 진군하였다. 람루한 옷차림에 무기도 보잘것 없는 대오였지만 이 대오는 그 무엇으로도 정복할수없는 강철의 대오였다.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인민의 운명을 짊어진 이 대오는 서서히 중국서북대지를 향해 움직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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