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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⑤
1935년 1월 28일 귀주성 서북지역의 작은 진인 토성부근에서 치렬한 접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적아쌍방은 한 진지를 놓고 거듭 빼앗고 빼앗기면서 싸웠다. 나무들이 불타고 전쟁터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피말리는 전투는 세시간 남짓이 계속 진행되고있었다. 일반전사들이 쓰러졌을뿐만 아니라 앞장서 달리던 지휘원들도 수없이 쓰러졌다. 팽팽한 전투상황은 타개되지 않았고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있었다.
수천리길을 걸어 귀주성에 도착한 홍군은 귀주와 사천 린접부근인 이 토성에서 또다시 피어린 전투를 겪어야했던 것이다. 홍군 3군단과 5군단이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 힘겹게 적들을 막고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지원군까지 합세하여 더욱 기승스럽게 공격해왔지만 적수하 기슭을 따라 북상하고있는 홍군 1군단은 3시간 후에야 도착할수있다.
적들은 이미 토성에 위치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지휘부앞까지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조속히 위기의 국면을 돌려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토성진지가 무너지면 홍군은 적수하를 등에 두고 싸우는 절경에 빠지게 된다. 홍군의 주덕총사령도 더 참을수 없었다. 그는 총을 잡고 직접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모택동은 중앙홍군 간부퇀을 전투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간부퇀 집합!”
“나가서 적들의 기세를 제압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천여명의 씩씩한 홍군전사들이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적진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용맹한 장병들은 두려움 없이 공격했고 또 지혜롭게 적의 허점을 잘 노려 치명타를 안겼다. 이 무적의 강철대오에는 조선인 혁명가 양림도 있었다. 그는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전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공격도중 적의 지휘부를 발견한 양림은 특과영의 박격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4영 위국청 영장과 함께 전사들을 지휘해 몇발 안되는 박격포로 준확하게 적 지휘부를 까부셨다.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싸울 신심을 잃은 적들은 드디어 뿔뿔이 철수했다.
홍군부대에서의 양림은 명망이 높은 고위 지휘원이였다. 그는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독일인 리덕을 제외하고는 홍군시기 유일하게 군구사령원 직무를 맡았던 외국적 고위장령이였다. 양림이 이처럼 중임을 뛰여나게 잘 완수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산계급 신형인민군대의 고위지휘원으로 된것은 그의 풍부한 경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그는 선후로 6차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문무가 겸비하고 군사와 행정이 모두 뛰여난 군정간부로 성장했다.
양림은 1898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김훈(金勋)이였고 자는 지원(志远)이였으며 사업의 수요로 양주평(杨州平), 양녕, 삐스티, 양림 등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던 양림은 아버지가 일제에게 살해되자 1919년 늦가을에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왔다. 그는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웠다. 이는 그가 다닌 첫 군사학교였다.
1920년 5월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림은 왕청현(汪清县) 서대파(西大坡) 반일무관학교에서 교관사업을 하였다. 그러므로 서대파조선인반일군사학교는 그가 다닌 두번째 군사학교이다.
동북에서 힘을 키우고있던 조선인 반일유격대들은 서로 단합하여 일제와 싸울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洪范图), 김좌진(金佐镇)을 비롯한 동북지역 반일유격부대가 길림성 연변지역에 집중되였다. 양림은 한개 중대를 거느리고 대부대와 함께 화룡현(和龙县) 청산리 백운평(白云坪)에 매복해 있었다. 반일유격대가 이미 준비하고있는줄을 모르고 이곳저곳 방화하면서 추적해 오던 일본침략자들은 청산리에서 유격대의 매복에 들었다. 반일유격대는 적들에게 일치하게 불벼락을 안겼다.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반일유격대는 청산리대첩을 이룩하여 전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청산리, 봉오동(凤梧洞)전투가 있은후 양림은 무력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그는 더욱 선진적인 군사지식을 배우고 민족해방의 진리를 찾고싶어 중국 관내로 향했다.
1921년 4월 상해에서 한동안 머문 양림은 운남에 군사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곤명으로 떠났다. 그는 광주, 향항, 윁남을 거쳐 도보로 1,000리 길을 걸어 곤명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곤명에서 양주평이라는 이름으로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세번째로 군사학교에 들어온 양림은 침식을 잊어가며 군사리론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지휘기능을 련마하였다. 그는 매일아침 등에 벽돌을 지고 10리길을 달리며 몸을 단련하였으며 훌륭한 서적을 접촉하면서 혁명진리를 적극 탐구하였다. 1924년 양림은 학과와 기술과 모두 전교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였다. 그의 뛰여난 재능을 언녕 눈여겨본 학교 교무장은 학교에 남아 사업할것을 요구했지만 혁명에 뜻을 둔 양림은 학교측의 요구도 마다하고 단연히 광주로 떠났다.
광주에서 양림은 ≪민족해방대동맹≫에 참가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고 중국공산당과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신앙하게 되였다. 1925년 양림은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황포군교에 들어가게 되였고 주은래의 천거로 교학부 학생총대사업을 맡아보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양림은 학생들과 함께 늘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인식하게 되였으며 주동적으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청년군인련합회(中国青年军人联合会)에 참가하였다.
1925년에 양림은 학생대를 거느리고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1차동정에 참가하였다. 그의 기동령활하고 과단하며 적의 허점을 찌르는 전술은 교관들과 학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해 6월에 승리적으로 광주에 돌아온 양림은 다시 양희민,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제2차동정에 참가하였다.
포술전문가인 양림은 쏘련 고문 갈렌(加仑)과 함께 적사령부를 포격하기로 하였다. 세심한 관찰을 거친후 양림이 직접 대포를 조준하여 곡선포격을 가했다. 포탄은 민가들을 지나 곧추 적사령부를 강타하였다. 적의 지휘체계가 파괴되자 혁명군은 신속히 돌진하여 적들을 소멸함으로써 제2차동정의 승리를 거두었다.
두차례 동정을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중좌 기술주임 교관으로 승직하였다. 그는 교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계속 우파와 투쟁하여 공산당의 신임과 관심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5년 6월에 양림은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얼마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1925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엽정독립퇀이 광주시 조경에서 설립될 때 양림은 주은래의 배치에 따라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파견되였다. 이 시기 그는 이름을 양녕으로 고쳤다. 그는 제3영 영장 겸 공산당소조 조장을 겸임하였다.
국공량당의 군사인재 양성요람인 황포군관학교에서는 이시기 좌우대립이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조직에서는 다시 양림을 황포군관학교 중좌 기술주임 교관으로 배치하였다. 교내 혁명자들을 더욱 많이 단합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에게 열심히 군사기능을 가르치는 한편 정확한 혁명사상을 전수하기에 힘썼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드디여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였다. 그는 군대를 풀어 도처에서 공산당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인재를 보호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양림을 쏘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안해 리추악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양림은 삐스티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에 들어가 군사과학을 배웠다.
3년후 귀국한 양림은 상해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선후로 만주성 당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로 사업하였다. 그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의 인민대중들을 동원하여 세개의 로농적위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 만 5천여명 군중들을 조직해 반일대회를 열고 반동지주들을 진압했으며 몰수한 량식과 재물을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9.18사변이 있은후 양림은 다시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로 반석로농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부대는 만주로농의용군 제4군 제1종대로 개편되였고 산하에 3개 소대를 두었다. 후에 이 부대는 남만유격대,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성장하였다.
1932년에 동북 3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 전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 국민당은 중앙쏘베트지역 홍군에 대한 토벌에만 전력하였다. 당시 크게 확대된 중앙쏘베트지역에는 많은 인재들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상해 군사회의에 참가하던 참에 강서성의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조동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에서 그의 재능은 더욱 크게 발휘되였다. 그는 선후로 로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 중화쏘베트중앙정부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 강서군구 산하 회창-순우-안원군분구 사령원, 홍군 23군 군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 참모장 등직을 담임하였다. 로농홍군 총정치부 위원 겸 로동및전쟁위원회에서 사업할때 그는 주임인 주은래의 지도하에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제반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주은래를 도와 10개 보충퇀을 새로 편성했으며 직접 새전사들을 훈련시켰다. 훈련받은 전사들은 홍군 주력부대로 수송되여 전선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또 쏘베트정부를 도와 군중들과 함께 다리와 도로를 수리하고 량식과 군수품을 전선에 보냈다. 뿐만 아니라 60여만원을 모금하여 전선에 보냈다.
1933년 4월 강서군구 제3군분구와 제5군분구를 합병하여 월감군구로 만들었다. 양림은 월감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산하의 제23군과 독립2사, 독립3사 그리고 많은 독립퇀을 거느렸다. 하지만 두달후 홍군부대는 재편성을 진행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홍군 제1방면군이 편성되였다. 주덕이 총사령을 맡고 주은래가 총정치위원으로 되였다. 홍군 제1방면군은 홍군주력인 림표의 제1군단, 팽덕회의 제3군단, 제5군단이 포함되였다. 양림은 이때 일년간 홍군제1군단 참모장으로 사업하였다. 홍군 제1군단 군단장은 림표였고 정치위원은 섭영진이였으며 라영환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양림이 참모장을 맡았다. 그러므로 이시기 양림은 후에 공화국 원수로 되였던 림표, 섭영진, 라영환 등과 함께 모두 군단급 간부로 있었다.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 제5차 포위토벌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뛰여난 지휘재능과 세밀한 사업작풍, 과감한 결단력은 주덕총사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고 근거지 군민들의 애대를 받았다.
이해 중앙쏘베트지역에서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양림은 외국인 대표로 대회에 출석하였고 당중앙의 지명에 따라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50여명 위원들 가운데서 오직 양림과 윁남인 홍수만이 외국적 위원이였다.
대회이후 양림은 수요에 따라 제1군단 참모장을 후임인 좌권에게 넘겨주고 홍군대학 총교관으로 사업하였다. 홍군대학은 수많은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으며 많은 사람들은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공화국 장군으로 되였다.
1934년 10월 10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주력홍군의 대이동을 결정하였다. 중앙홍군총사령부와 산하 직속부대로 군사위원회 제1종대를 조직하였다. 염검영이 이 부대의 사령원을 맡았고 박고, 리덕, 주은래, 모택동, 장문천, 주덕, 왕가상을 비롯한 이들이 모두 이 부대에 편입되였다. 군사위원회 1종대는 4개 지대로 나뉘였다. 제1지대는 팽설풍이 책임지고 제2지대는 라빈이 책임졌으며 제3지대는 조선인 혁명가 무정이 책임졌다. 그리고 제4지대는 진갱이 책임졌다. 제4지대 정위는 송임궁이였고 참모장에 조선혁명가 양림이였다.
장정에 나선 홍군은 8만 6천여명이였다. 여기에 민부들까지 합치면 거의 10만에 달하는 인파가 서서히 혁명근거지 서금을 떠나 험난한 장정길에 나섰던것이다.
토지를 분여받고 사람마다 평등하게 살아가던 근거지의 인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홍군을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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