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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 ②
1934년 11월말 장정길에 나선 중앙홍군은 가장 처절했던 상강전역을 치르게 되였다. 상강과 소수 두갈래 강을 사이두고 홍군의 북상길을 차단하기 위해 국민당 군대는 남북으로 협공해왔다. 홍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이 남북을 차단하고 우세한 적들과 치렬한 접전을 거듭하고있을때 홍군주력은 상강을 건너야했다. 하지만 번중한 물건들을 지고 로약자들을 부축하며 움직이는 홍군주력의 행군은 굼뜨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저격을 맡은 홍군부대는 수많은 희생을 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홍군은 적의 포위를 뚫고 상강을 건넜지만 막대한 희생을 냈다. 장정출발시 8만 6천여명이던 홍군부대는 3만여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민간에 흩어졌던 것이다.
홍군부대가 귀주성에까지 이동하였을 때 앞에는 설산이 가로막혔다. 부대의 령활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무기는 버려야 하였다. 따라서 포병부대도 다른 부대에 편입되여야 했다.
중앙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를 맡았던 조선혁명가 무정은 자기의 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가 지휘하던 포병부대도 대포를 버리고 새로운 전투부대에 편입되였다. 무정은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더욱 막강한 포병부대를 건립할 결의를 다지면서 포병부대를 떠나 지휘부에서 일을 보게 되였다.
대도하(大渡河)를 건느고 설산을 넘어 사천성의 파서(巴西)에 도착한 중앙홍군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였다. 홍군은 사천성에서 미리 이곳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있던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제4방면군의 당, 정, 군 책임은 모두가 장국도가 맡고있었다. 그는 10만을 헤아리던 강대한 중앙홍군이 수만명밖에 남지 않은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홍군 제4방면군은 수적으로 중앙홍군보다 퍽 더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부대의 우세로 자기의 립지를 높이고 중앙의 지도권을 차지할 생각을 하게 되였다.
당시 당중앙과 모택동은 계속 북상하여 섬감녕근거지를 창설할 전략적 방침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장국도는 이를 극구 반대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남으로 진격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강(川康)변경으로 퇴각하려 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이 홍군4방면군을 이끌고 남하길에 올랐을뿐만 아니라 홍군의 무전암호를 모두 거두어 들였다. 그것은 각 군과 당중앙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 제3군단을 남하하도록 강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사실 전반 홍군에 대한 통제가 장국도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당중앙과 모택동은 부대를 지휘할수없는 고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공화국 원수 팽덕회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이번 북진에서 3군단은 우익종대의 가장 뒤에 섰고 홍군 제4방면군의 4군, 30군, 9군과 전적총지휘부가 가운데 섰다. 그때 나는 장국도가 야심이 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 아직 이를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다. 모택동과 당의 총적 책임자였던 장문천은 전적지휘부 한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3군단은 아서, 파서지구와 하루, 이틀 거리를 두고있었고 전적지휘부와는 15리쯤 떨어져있었다. 나는 숙영지에 이르러 곧바로 전적지휘부와 모택동이 머문 곳으로 갔다. 사실 나는 모택동을 만나기 위하여 전적지휘부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때 주은래와 왕가상은 병으로 제3군단에 있었다. 파서에 며칠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전적지휘부로 갔으며 비밀리에 제11퇀을 모택동의 거처에 은밀히 음페시켜 만일의 사태를 막으려했다. 얼마후 전적참모장 엽검영에게서 홍군 제1군단이 아계(俄界)지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아계의 제1군단과 련계를 확보하고 북진하여 홍군 제1군단과 합치려해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우선 길잡이를 찾을수 없었고 길을 물을 곳도 없었으며 더구나 지도도 없었다. 망망한 초원에서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아계인지 분간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아계의 제3군단의 주요간부인 양상곤이 이미 다른 부문에 조동됐고 나의 곁에는 3군단 정위를 맡은 리부춘만이 있었다. 나는 조선동지인 무정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그에게 지북침을 주면서 꼭 제1군단의 종적을 따라 무전암호를 제1군단에 전해줄것을 요구했다.”
장국도의 시도를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군단과 무전련계를 가져야 했다. 그러자면 새로 만든 무전암호를 홍군 제1군단에 보내주어야 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팽덕회장군은 자기의 가장 믿음직한 전우인 무정을 제1군단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길도 없고 지도도 없었다. 무정은 지남침으로 방향을 확정한 다음 드넓은 초지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언제 어느 은페된 소택속에 깊숙히 빠져 다시 헤어나오지 못할수도 있었고 뜻하지 않게 적의 기병이나 순라대를 만날 위험도 있었다. 무정은 조금도 지체없이 내처 달리기만 하였다. 얼마를 달렸는지 앞에는 불타다 남은 나무쪼각들이 무져져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누군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기에서 휴식하다 떠난것이 분명하였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떠난지 별로 오래된것 같지 않았다. 분명 제1군단의 전사들이 남겨놓은 흔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신심가득히 걸음을 재우쳐서 끝내는 제1군단을 찾아냈다. 그는 숨 돌릴사이도 없이 곧추 지휘부로 달려가 무전암호를 넘겨주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모택동은 위험을 무릅쓰고 팽덕회의 제3군단 지휘부에 찾아와 새로운 무전암호로 전보를 보냈다.
《림표, 섭영진 앞: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으니 원지에서 대기할 것.》
제1군단 비휘부에서 새로운 암호의 전문이 번역되여 나오는것을 보자 무정은 그제서야 시름을 놓았다. 드디어 중앙홍군의 2개 주력부대인 제1군단과 제3군단이 련락이 되였고 두 군단은 모택동의 지휘밑에 당중앙에서 확정한 북상항일의 길을 떠나게 되였던것이다. 무정도 이 부대를 따라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1936년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그해 6월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 제1기 고급간부과에서 학습하였다. 고급간부과는 주로 홍군 사급이상의 간부를 양성하는 곳으로서 학원이 도합 36명이였다. 고급간부과의 학원들은 모두가 8년 이상의 투쟁경력이 있어야 하며 전투중에서 3번 이상 부상을 입은 공헌자라야 했다. 학원중에는 림표(林彪), 라영환(罗荣桓), 라서경(罗瑞卿), 막문화(莫文骅), 진광(陈光) 등 홍군고급간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령도이면서 학원이었다.
12월, 홍군대학을 졸업한 무정은 계속하여 홍군총부의 작전과장직을 담임하고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강대한 홍군포병부대를 이끌어낼 결의를 다지면서 그는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시기로 들어서게 되였다. 홍군도 팔로군으로 개편됐다. 1937년말, 항일전쟁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조선혁명가 무정을 팔로군총사령부의 포병주임으로 임명하고 포병부대 건설사업을 맡게 하였다.
해방후 전국정협주석이였던 원광은 당시 포병퇀 제1임 정치부주임이였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림분에 도착한후 우리는 지대의 700여명 전사들을 4개 련으로 재편하였다. 또 그곳에 있던 두 개 련을 합하니 천여명에 가까웠다. 퇀장은 팔로군총부 작전과 과장인 무정동지가 담임하였는데 그는 조선사람이였다. 그는 일찍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했으며 홍군대학의 특과영 영장을 지냈고 또 홍군의 포병사업을 지도하였다.
1938년 1월 28일, 림분(临汾)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창건대회가 성황리에 열리였다.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풍이 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장을 선포하였다. 팔로군 포병퇀 퇀장에 조선혁명가 무정, 정치위원에 구창성, 정치부 부임에 원광이 임명되였다. 중앙북방국 책임자 양상곤이 팔로군 포병퇀 창건대회에서 축사를 하였으며 국민당 제2전구 사령인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하여 축하를 드렸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에 포병부대가 있게 되였다.
피어린 장정길에서 할수없이 대포를 버리고 포병부대를 해산해야만 했던 무정에게 있어서 이는 더없이 격동된 순간이였다. 포병퇀이 건립된 후 무정은 단기 훈련반을 꾸리고 그가 직접 교관을 담당하고 전사들에게 사격원리와 포 다루는 요령을 가르쳤다.
당시 상황을 로홍군 원광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림분에 있을때 우리에게는 대포 몇문밖에 없었다. 전퇀의 천여명이 모두 모여도 포병기술을 아는 사람이 몇이 없었다. 기술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집중강습을 시키고 다시 분산하여 전퇀전사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을 취했다. 그리하여 먼저 련장, 배장급 간부들을 집중해 기술강습을 시켰다. 퇀장인 무정동지와 9련 련장인 조장성동지를 비롯한 이들이 직접 지도원을 맡고 사격원리와 조작기술을 가르쳣다. 또 주은래동지가 후방으로부터 포술전문가들을 보내 우리에게 강의해 주었다. ”
이처럼 일찍 무정이 직접 양성해낸 많은 포병간부들은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제2포병부대의 고급지휘원으로 성장됐다. 무정은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항일전쟁의 제일선에서 백퇀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일본침략자들을 힘있게 타격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장정길에서 다진 결의를 드디어 실현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 2만 5천리 위대한 장정에 참가하여 굴할줄 모르는 투쟁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했으며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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