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후 항일무력은 광활한 화북지역에서 예리한 비수마냥 일본침략군의 심장부를 겨냥하면서 산서와 차할, 하북을 포함한 진찰기(晋察冀)항일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진찰기항일근거지는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이 가장 먼저 창설한 적후할일근거지로서 중국의 항일군민들은 이곳에서 일본침략군과 괴뢰군 35만여명을 소멸하였다.
해방후 진찰기는 화북군구(华北军区)로 개칭하였으며 이 위대한 업적과 항일투쟁에서 희생된 진찰기항일근거지 렬사들을 기리기 위한 화북군구렬사릉원이 하북성 성소재지인 석가장에 세워졌다.
화북군구 렬사릉원에는 우리민족이 낳은 우수한 아들이며 기동항일유격대의 창시자중 한사람이며 기동항일유격투쟁의 코기러인 주문빈 렬사의 기념동상이 모셔져 있다.
화북군구렬사릉원
주문빈렬사 기념흉상 앞에서
기념비에 새겨진 렬사 약력
렬사의 묘소
묘소의 약력
주문빈(1908-1944)의 원명은 김성호(金成镐)로서 1908년 9월 23일, 조선평안북도 신의주 홍남동(洪南洞)에서 태여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건너온 그는 중국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개란(开滦)탄광 로동자들의 대파업을 조직하였고 항일전쟁시기에는 기열료변구(冀热辽边区) 특별위원회(热别委员会) 조직부장을 맡고 직접 항일대오를 거느리고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그의 확고한 공산주의 사상과 위대한 국제주의 정신은 화북대지에 우뚝 솟은 기념비 마냥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관내지역 우리민족 반일투쟁사를 답사하던 지난 2003년에 북경시 해정구청하진(海淀区清河镇)에 계시는 렬사의 막내 녀동생 김신정(金信正) 로인을 만나볼수있었다. 지금은 세상 뜨고 안계시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90세 고령으로 비교적 정정하셨다.
김신정 로인은 색바랜 가족 사진 한장을 내놓으면서 파란만장한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문빈렬사의 가족사진(앞줄 오른쪽 두번째 주문빈)
주문빈렬사의 일가는 1914년에 반일지사였던 아버지 김기창(金基昌)을 따라 조선의 의주(义州)로부터 중국 북평(오늘의 북경시)의 통현으로 이주해왔다. 아버지 김기창, 어머니 홍기주(洪基柱1962년 90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 큰 누이 김신경(金信庆), 큰 오빠 김승호(金承镐), 둘째 오빠 김영호(金永镐 공산당원), 셋째 오빠 김성호(金成镐 주문빈), 막내 오빠 김상호(金祥镐) 그리고 막둥이 김신정이였다. 가족사진은 오래된것이여서 그때만 하여도 막둥이 김신정은 사진에 없었다.
1914년, 아버지 김기창은 처음 중국에 건너와 북평시 통현의 복흥장(复兴庄)에 자리를 잡았다. 김기창은 천진의 남개학교(南开学校) 교장인 장백령(张伯龄)을 알고있었다. 일찍 장백령교장이 조선 평양을 방문 할때 김기창이 통역을 맡아주었던 인연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김기창 일가는 장백령의 도움으로 천진을 거쳐 북평에 오게 되였던것이다.
북평에서 공부하는 기간 주문빈 형제는 모두 혁명을 지향하면서 비교적 진보적인 사상을 접하게 되였다. 그리고 20세기 20, 30년대,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주문빈 일가의 도움을 받아 중국내에서의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초기에는 반일지사였던 아버지 김기창을 찾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녔고 후에는 공산주의를 신앙하였던 주문빈 형제들을 찾아오는 젊은 혁명자들이 많아졌다.
김신정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안창호, 김구를 비롯한 신민회 요원들이 많이 다녔고 후에는 량명(梁明), 한위건(리철부), 무정 등 공산주의자들이 다녔다.
주문빈 형제는 후에 모두 제각기 혁명에 참가하였는데 그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김신정도 잘 모르고있었다. 심지어 주문빈렬사의 희생소식도 일본이 항복한후에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조선독립과 혁명을 위해 모든것을 다 희생한 렬사가족이였다.
주문빈의 아버지 김기창은 어려서부터 조선팔도를 다니며 시야를 넓혔다. 룡천군의 한 부자집 서동(书童)으로 있으면서 한자를 익히고 주산을 배웠던 그는 조선 어디에서든지 환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집 사랑채에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조선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어린 김기창은 시야를 넓혔고 빈궁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가슴에 큰 뜻을 품게 되였다.
이때 조선의 많은 지사들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면서 민족자각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도산(岛山) 안창호의 발의에 따라 량기택(梁起鐸)을 총감독으로 설립한 비밀결사였다.
안창호, 리동휘, 최광옥(崔光玉), 리승훈(李昇薰), 리회영, 김구, 박은식, 신채호 등을 요인으로 전국 800명 회원을 확보한 신민회는 각지에 련락원을 두었다. 김기창은 신민회의 회원으로서 신의주의 력락원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한민족의 독립운동사 윤병상 등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P131,132]
김신정 로인은 아버지가 신의주에서 조선혁명자들의 압록강 도하를 도와주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김신정로인(왼쪽)
(김신정) “아버님은 북방의 주요 련락원이였던것 같습니다. 그는 조선의 유명한 인물인 최광옥으로부터 통지를 받고 활동하셨는데 최광옥은 양실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곳을 다녀본 학식이 대단한 사람이였습니다. 최광옥의 통지를 받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 압록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아버지는 체력이 약했고 수영도 잘 몰랐고 자전거도 못 타셨습니다. 처음 8명정도를 도와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희생될 각오를 하시고 미리 가족을 숙부님에게 부탁해두셨습니다. 그때 숙부님은 가만히 도하하는 일행을 미행하여 전 과정을 알고있었습니다.”
신민회 북방 련락원이였던 김기창은 선후로 많은 혁명자들을 압록강을 도하시켜 중국내에 들어오게 하였다. 한번은 신민회의 최광옥이 련락이 왔다. 8, 9명 혁명자들이 압록강을 건느는것을 도와주라는것이였다. 김기창은 체력이 약했고 수영도 잘 몰랐으며 자전거도 못 탔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는 약속장소에서 도강할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의주와 신의주 사이에 있는 중주도에 가서 웃통을 벗고 강을 건넜다. 때는 초겨울이라 얼음이 밴 강물은 뼈를 에이는 듯 차거웠다. 김기창의 동생 김기홍(金基鸿)이 이들을 미행해 강을 건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혁명자들은 모두 안전하게 강을 건너 동북의 관전현(宽甸县)으로 갔다.
김기창은 신민회 요원인 리승훈을 통해 안창호와 김구를 알게 되였으며 그들의 지시에 따라 비밀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초, 김기창은 신민회의 다른 한 요원인 리윤각(李允珏)과 함께 김구를 만나러 황해도로 떠났다. 군자금을 받아 의주에서 무기를 사라는 련락이 왔기 때문이다. 도중에 리윤각은 다른 일로 가지 못하고 김기창만이 김구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김구는 없고 김구 아버지가 그를 맞아 주면서 무기를 살 군자금을 꺼내 주었다. 그러나 김기창은 맹동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가서 일을 마무리한 후 꼭 다시 와서 무기 사는 일을 돕겠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김구를 직접 만나지 못한것이 미심쩍었던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때 일제 경찰은 이미 황해도에서 신민회 요원들을 대거 검거하고있었던것이였다.
1911년 9월까지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무려 800여명 신민회 회원을 체포하였다. 비인간적인 일제의 고문으로 2명 회원이 숨지고 다수 회원들이 불구가 되였다.
1912년 8월 일제는 체포자 중 105명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유명한 신민회 《105인 사건》이다. [윤병상 등 한민족의 독립운동사 P190~191]
(김신정) “아버지는 그때 취조를 받았습니다. 일본경찰은 고추물을 먹이고 채찍으로 때리고하면서 갖은 혹형을 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아버지가 혁명자들을 강을 건네 준 일을 알고있었습니다. 변절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유죄판결을 받게 되어 외딴 섬에 류배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탈주한 아버지는 중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김기창은 일제의 갖은 고문을 이겨내면서 비밀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반일지사들을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네 주던 일이 폭로 되여 그는 판결을 받아 지도(智岛)에 류배 되였다.
1914년에 수감중 탈출한 김기창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평 통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않아 가족을 통현 복흥장에 데려왔다.
그후 그는 림시정부를 찾아 상해에 가 보았다. 상해에서 활약하고있던 김구나 로백린 등 독립운동가들과 익숙한 사이였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상해 독립운동가들사이에 파쟁이 너무 많아 김기창은 큰 실망을 안고 다시 통현에 돌아오고말았다.
1933년에 김기창은 조선기독교의 초청을 받고 조선에 갔다가 그곳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를 당해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때로부터 몸을 쓰지 못한 그는 침대에 그냥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민회의 일원으로 일찍부터 반일투쟁에 몸 담아왔던 김기창은 비록 몸져누웠지만 그의 강의한 반일의지와 진보적인 사상은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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