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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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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 조선혁명가들의 연안 대 집합
2015년 10월 21일 10시 15분  조회:4185  추천:1  작성자: 김성룡

1944년에 들어서서 일본제국주의는 더욱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잃었고 동맹군은 막강한 공격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하나 수복하고있었다. 한편 일본과의 축심동맹을 맺었던 독일도 유럽전선에서 궁지에 몰려있었다. 동맹군과 쏘련홍군은 동서량측으로 독일을 협공하였고 독일 파쑈의 패망은 눈앞의 일로 다가서고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침략자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있었다.

이해 4월 일본침략군은 중국에서 대규모의 공격작전인 예상계전역을 벌였다. 일본침략군은 중국대륙의 중부지역을 거의 전부 석권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술적으로 남북 교통선을 관통하는 전과를 가져왔지만 전략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전선이 더없이 확장됨에 따라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전쟁물자도 많이 부족하였다.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계속 후방을 교란하고 교통선을 차단하면서 적들을 타격하고있었다.

이시기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대 집합장소였던 섬북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점차 하나의 전투적 보루를 형성해 나갔다. 미래 조국해방을 위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조선혁명가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군사훈련을 진행하였으며 혁명사상을 키웠다. 독일파쑈들의 멸망에 이어 일본파쑈들의 패망도 오라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권립 교수) “1943년 중공중앙은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박일우, 박효삼, 주덕해 등 로동지들을 조직하여 조선혁명군정대학 창건 준비사업을 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중공중앙의 지도하에 학교의 지점문제, 학생래원문제, 교사건축문제, 학교기구 인사배치문제를 둘러싸고 방안을 짜고 행동에 옮겨야했습니다.”

 

중국의 혁명성지인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해 미래 조국해방에 진력하기 위해 조선혁명가들은 학교창설에 나섰다. 그들은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간부들을 학원으로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각지로부터 조선 열혈청년들이 연안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용군 대원이였던 리화림이 회억한데 의하면 의용군과 독립동맹은 1944년에 와서 각지의 조선의용군 대원들을 비교적 안전한 연안에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정치학습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의 해방을 이룩하려면 자체의 부대가 있어야 하고 더욱 많은 간부가 필요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1944년 1월말 태항산의 의용대 대원들과 학원 근 200명이 연안으로 향발하였다. 그들은 박효삼의 인솔하에 2천여리를 행군하여 1944년 4월 7일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연안에 있던 조선혁명가들과 합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설립을 이룩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의용군 기동지대의 리대성이 30여명 대원을 거느리고 첩첩한 봉쇄를 뚫고 4개월간 행군하여 1945년 2월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여러 항일근거지에서 온 조선의용군 대원, 쏘련과 동북에서 연안에 온 주덕해, 주춘길, 방호산 그리고 최창익, 정률성, 리유민을 비롯한 조선독립동맹 섬감녕 분맹 맹원들이 합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조선혁명력량을 재정비하게 되였다.

포연탄우속에서 청춘을 불태우던 우리민족 청년들은 곧 설립하게 될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기쁨과 희명을 안고 일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자력갱생한다는 혁명정신을 발양하여 스스로 학교건물을 짓고 토굴집을 팠다.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소개비

조선혁명군정학교 김두봉 교장이 거쳐했던 토굴집으로 추정하는 곳

연안의 토굴집

 

(권립 교수)“ '물레를 돌리며 손님을 접대하는 주덕총사령을 따라 배우자.' 이것이 그때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들은 벽돌 기와 굽기를 조직하였습니다. 로신예술학원의 벽돌공장을 빌어 벽돌을 굽고 기와를 구웠습니다. 그들은 토굴집 건축조를 무었습니다. 먼저 야장간을 꾸려서 곡괭이나 삽을 만들고 토굴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7,8명으로 구성된 한 개 조가 하루에 토굴집 하나를 파내기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 개조를 무어 결사대의 정신으로 토굴집을 팠습니다. 그들은 또 황무지개간대를 조직하여 연안에서 70리나 떨어진 산중에 들어가 수백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44년 8월에 이르러 이곳에는 수백명 조선청년들이 모였다. 300여명이 앉을수 있는 식당과 강당이 있게 되었고 15개 토굴집이 생겨났다.

중국군민들과 함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을 발양한 조선혁명가들은 자체로 학교 터를 정했고 벽돌을 구워 교사를 지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부지런한 조선혁명가들의 두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4년 10월 1일 드디여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이 성대한 개학식을 가지게 되었다. 팔로군 총사령인 주덕이 직접 개학식에 참가해 축하연설을 하였다. 처음 200여명 학원을 가진 이 학교에서는 군사과와 정치과를 배우는 한편 각가지 혁명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권립 교수)“조선용사들의 놀라운 건설속도는 연안 각계를 놀래웠습니다. 더욱이 이해 가을이 되자 조선용사들의 땀의 열매가 연안 각계 인사들과 연안인민의 찬탄을 자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화를 따서 실을 뽑고 실을 뽑아 천을 짜고 통일적인 군복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들은 두손으로 가꾼 채소로 로신예술학원을 지원했고 해방일보사를 지원했다. 엿공장을 만들었고 주덕해는 이를 최채를 통해 태원에서 팔았습니다. 이것으로 약과 건전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는 280여명 학원이 있었다.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의 편의를 위해 학원들은 4개 구대로 나누었다. 제1구대는 조렬광과 방호산이 책임지고 학원은 33명이였다. 왕자인이 구대장을 맡은 제2구대는 54명 대원을 가졌고 전우와 홍순관(洪順官)이 책임진 제3구대는 23명, 김극(金克)과 윤공흠이 책임진 제4구대는 29명 대원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에는 김두봉이였고 박일우는 부교장 겸 서기를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은 부교장 겸 대장을 맡았고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는 주춘길, 허정숙, 정률성이 있었다. 그리고 259려단에서 사업하던 조선혁명가 주덕해는 이시기 조선혁명군정학교 총무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원들로는 허정숙, 한빈, 최창익 등이 있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김두봉(1889-1961)의 호는 백연이다. 그는 1889년 경상남도 동래군(東來郡) 기장면(機張面) 동부리(東部里)에서 태여났다. 17세에 서울에서 중앙고보(中央高普)의 전신인 기호학교(畿湖學校)와 배재학교(培才學校)에서 공부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후 배일사상과 애국사상에 들끓던 그는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였다가 체포되였다. 1913년 배재학교를 중퇴하고 최남선(崔南善)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가했고 또 조완구와 함께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이시기 그는 또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현대조선어 학습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1919년 김두봉은 한위건(리철부)과 함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4월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그는 신채호가 주필을 맡은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의 편집으로 일했고 후에는 김규식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였다. 1920년에 김두봉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상해에서 김두봉은 인성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조선어연구를 멈추지 않고 《정해조선어사전(精解朝鮮語辭典)》을 펴내기도 하였다. 1928년 12월, 고려공산당이 해체된후 그는 홍남표, 조완구와 함께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를 조직하였고 1935년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중앙 상무위원으로 되였다. 그는 조선의용대 창립시 주요간부로 활약하였고 1939년 조선혁명당과 함께 중경에 갔다.

1942년 4월, 김두봉은 중경으로부터 연안으로 갔다. 그해 그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추대되였고 후에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으로 되였다.

혁명의 성지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되여 조선혁명가들이 집중되였을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통제하고있던 각지 항일근거지에도 조선혁명군정학교 분교가 설립되여 부근의 조선혁명가들을 규합시키고 훈련과 교양을 진행하였다.

태항산의 조선혁명가들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연안으로 떠난후에도 산서성 섭현 남장촌의 조선혁명군정학교는 계속 남아있었다. 무정과 조선의용군 주요간부들은 화북의 조선청년 모집과 교양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초에 이르러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수는 다시 293명에 달했다.

교장을 맡았던 무정은 하북성 섭현 남장에 있던 학교 학원들을 두 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무정이 대장을 맡고 한경과 리익성이 중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학교에는 93정의 소총과 3정의 경기관총외에 많은 수류탄과 지뢰를 가지고있었다.

1944년 10월 1일 산동에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가 설립되였다.

교장은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을 책임진 리명이 맡았는데 학원은 근 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시기 신사군 통제하의 화중에도 100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에 집중하여 교육을 받았다. 화중의 조선인 책임자는 왕신호(王信虎 원명 김웅)였다.

그리하여 항일전쟁 승리를 앞두고 중국 관내 조선혁명자들은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집결되고 재편성되였다. 이는 항일전쟁 승리후 중국 동북으로의 진출과 조선으로의 진격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간부양성과 군력 보강을 적극 시도한 노력이였던것이다.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에 모였던 조선혁명자들은 이곳에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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