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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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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회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2015년 09월 18일 14시 55분  조회:4178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섬서성 연안시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가면 연하기슭의 천주교회당과 수십개 돌로 만든 토굴집이 보인다. 교아구(橋兒溝)라고 하는 이곳이 바로 전국 중점문화재 보호단위인 로신예술학원 옛터이다.

항일전쟁시기 가렬처절한 포화를 뚫고 연안에 모인 혁명청년들을 규합시키고 이들 가운데서 미래 중국을 이끌어나갈 훌륭한 예술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로신예술학원을 특별히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민족이 키운 천재적인 예술가인 정률성도 대부분 시간을 이 학원에 몸을 담보 하나하나의 불후의 명작을 창작해 냈던 것이다. 그의 음악은 포화의 시련을 받고있는 중국인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고 수많은 애국청년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교아구 천주교회당

연안 로신예술학원 기숙사들

연안 로신예술학교 밤자습하고있는 학생들

 

답사팀이 연안에 도착한 이튿날인 2003년 10월 28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하였다. 양가령의 중앙강당과 남관가에 위차한 동방각민족 반파쑈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사적지를 보고나서 정률성이 다닌 로신예술학원과 유명한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찾아갔다.

연안시 교아구에 도착하니 우선 정원에 우뚝 솟은 천주교회당이 눈앞에 띄였다. 1934년에 축조된 이 서양식 건물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중앙당학교 강당으로 사용되였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는 로신예술학원 강당으로 사용되였다. 당시 이곳에서 여러차례 대회와 음악회가 있었다. 특히 1938년 9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중국공산당 제6기 6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여 더욱 주목된다. 대회에서 모택동은 항일전쟁 새 단계론을 발표하였다.

천주교회당 곁에 커다란 운동장과 돌로 만든 수십개 토굴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로신예술학원 교실이였다. 지금도 학생들이 공부하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툼한 솜옷을 입은 학원들은 난로를 피워놓고 조용히 앉아서 열심히 책을 보고있었다.

문학과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연안의 로신예술학원은 1938년 4월 10일에 설립되였다. 초기에는 봉황산에 자리를 잡았다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교아구에 있었다.

섬북공학과 로신예술학원 1기를 졸업한 조선혁명가 정률성은 졸업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한동안 사업하다가 1939년 12월에 다시 로신예술학원에 조동되여 음악학부에서 성악을 가르쳤다. 그때로부터 정률성은 태항산 항일전선으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교아구 로신예술학원에서 교원사업을 하면서 많은 노래를 창작하였다.

 

(권립 교수) “정률성은 먼저 섬북공학에서 공부하다가 1938년 5월 연안 로신예술학원이 서자 거기에서 공부하면서 유명한 불멸의 가곡 연안송을 창작하였습니다. 1939년 1월에 연안항일대학에서 입당하고 이 대학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불후의 팔로군 대합창 8개 부분을 창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군가로 되었습니다.”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시인 공목(公木)과 협조하여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창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팔로군행진곡(八路軍進行曲)》은 경쾌하고도 기백이 넘치는 선률로 팔로군의 영웅적 형상을 잘 부각하여 광범한 군민들이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공화국 창건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였다.

이시기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 녀학생대 대장으로 있던 정설송(丁雪松)을 알게 되고 그와 사랑하게 되였다. 1940년,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했던 조선혁명가 무정의 담보로 정률성은 정설송과 결혼을 하게 되였다.

1942년 정률성은 연안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의 연설을 직접 청취하였다. 그후 그는 더욱 훌륭한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 항일전쟁 최전선으로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해 8월 그는 무정과 함께 태항산으로 갔다.

태항산에 간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을 맡으면서 조선의용군 전사들과 함께 적극적인 무장선전활동과 대생산운동을 진행하였다. 한편 음악창작을 늦추지 않고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가로 된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이 시기에 창작해 냈다.

1944년 4월 정률성은 명령에 따라 다시 연안에 왔다가 연안에서 항일전쟁 승리를 맞이하였다.

해방후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서 작곡사업에 전념하던 정률성은 1976년 12월 7일 뇌일혈(腦溢血)로 세상 떴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연안송》, 《팔로군 대합창》(이 가운데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개명하고 공화국 군가로 확정), 《조선인민군행진곡》,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이 있다.

연안시 중심에서 2, 3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면 연하기슭의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연안시 보탑구 교구진(橋溝鎭) 라가평촌(羅家坪村)이다.

라가평마을 전경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의 기념비

조선혁명군정학교 기념비의 소개글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의 옛집들(학교 교실로 사용되였던 건물로 추정)

 

로신예술학원을 보고난 답사팀은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 라가평촌으로 갔다.

라가평촌 마을 입구에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우리가 찾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바로 이 마을에 있었던것이다.

관리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비석 아래에는 벽돌무지가 있었고 자전거 수리하는 사람이 거기에 낡은 자전거 바퀴 같은것을 걸어놓고 있었다. 우리는 촬영을 해야한다면서 자전거 수리하는 사람을 밀쳐 버렸다.

비석의 소개를 보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2년 11월, 화북 태항산구에서 설립되였다. 1944년 1월에 학교기관은 태항산구를 떠나 3개월의 행군을 거쳐 4월 7일 연안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천구촌(川口村)에 머물렀다가 9월에 이곳 새로 지은 학교 교사(校舍)에 옮겼다. 학교는 12월 10일 준공되였다.

1945년 2월 5일, 성대한 개교식이 있었다. 주덕, 림백거, 오옥장, 서특립(徐特立)이 개교식에 출석해 축하를 표했다. 학교 교장은 백연(白淵) 김두봉이고 부교장은 박일우였다. 학교는 간부양성과 조선민족의 해방을 취지로 하였다. 맑스주의철학과 정치경제학, 군사학, 일본문제, 조선문제를 비롯한 과목을 설치하였다. 박일우는 초청에 의해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에 렬석하였고 5월 21일 전체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하순 학교기관은 연안을 떠나 조선북부로 옮겨갔다. 지금 옛터에는 돌로 된 토굴집 4개와 부분적인 흙 요동이 남아있다.

비석은 1996년 7월 1일 연안지구문물관리위원회(延安地區文物管理委員會)에서 세웠다고 밝혀져 있었다.

라가평촌 입구로부터 비탈진 흙길을 따라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작은 골짜기에 오붓하게 모여 사는 마을이였다. 산비탈에는 아직도 토굴집이 많았지만 대부분 새로 지은 단층집이였고 간혹 2, 3층으로 된 새 벽돌집도 보였다.

비탈길을 따라 한동안 가노라니 학교 옛 건물이 나타났다. 벽돌로 만든 아치형 요동입구 6개가 있는 집이였다. 문앞에 쓰레기 무지가 있고 대부분 토굴집은 인가가 살고있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조선혁명군정학교 주 교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교사 옛터로부터 조금 더 올라가면 바로 산밑에 이른다. 산 한가운데는 흙 요동 몇 개가 보였는데 지금도 인가가 살고있었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설명한데 의하면 이곳은 교장 김두봉과 서기 박일우가 생활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최룡수 교수) “여기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입니다. 1944년에 완공한 라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입니다. 이 바로 이 마을에 저쪽에도 있고 우에도 군정학교 동굴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앞에 보이는 시냇물은 학교에서 쓰는 물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은 운동장입니다. 이 마을에 조선군정학교에 근 300명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항산에서 3개월 걸어서 이곳에 왔고 또 바로 이곳에서 8.15광복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방송을 듣고 광복을 알고 홰불을 들고 대단히 경축했답니다.

 조선의용군 행진곡을 부르고 아리랑을 부르며 밤을 새면서 경축했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문정일 로인이 한번 왔다갔다고 들었습니다. 문화대혁명 전이겠습니다. 그후 나는 95년에 항일전쟁승리 50주년 할때 이 마을에 와 보았습니다. 그때는 마을 입구에 군정학교 비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로인분도 만났는데 당시 일을 기억하고있었습니다. 맨 꼭대기에 가본 동굴엔 김두봉 대장과 박일우 서기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 고증은 못했습니다.”

 

산밑으로는 한줄기의 맑은 샘이 솟아 나고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물통을 가지고 와서 그 물을 긷고있었다. 일찍 조선의용군들이 이곳에서 생활할 때도 샘이 있어 늘 이 물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산밑으로 솟아나는 맑은 물, 그 물을 마시며 학습하고 생활했던 조선혁명가들을 그려보았다. 사실 조선혁명군정학교를 만들때는 이미 항일전쟁 승리를 앞둔 시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곧 패망할것이라고 확신하고있었다.

1910년 나라를 잃고 중국대지를 전전하면서 끝없는 항쟁을 진행해왔던 조선혁명가들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미래 조국건설을 그려보면서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사업했던것이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의 대 집합장소였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맞이하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싸우던 조선혁명가들이 조직적으로 연안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주요간부들을 비롯하여 드넓은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일제와 싸운던 조선혁명가들이 연안에 모여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중심으로 재정비를 거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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