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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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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연안의 사적지
2015년 08월 05일 10시 30분  조회:4356  추천:1  작성자: 김성룡

섬서성 북부의 중요도시 연안시는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을 마친 홍군부대를 재편성하고 연안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개척해 나갔다. 중국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된후 연안은 각지 항일근거지를 령도하는 중국항일전쟁의 중요한 지휘중심의 하나로 되었다.

연안의 당중앙의 령도하에 여러 항일근거지의 군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배후에서 투쟁을 견지하였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근거지의 인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적의 수송선을 공격하며 근거지를 확대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혁명성지를 찾은 조선혁명가들도 이 위대한 항쟁에 동참했고 연안에서 그리고 여러 항일근거지에서 두려움 없이 싸워왔다.

연안시 서북쪽으로 3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가령(楊家嶺)은 1938년 11월 20일부터 1947년 3월까지 중공중앙 소재지였다.

1935년 10월 모택동이 거느린 홍군 제1방면군과 중공중앙은 승리적으로 장정을 마치고 섬북의 오기진(吳起鎭 오늘의 吳旗縣)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기타 홍군부대도 선후로 섬북에 도착함으로써 2년간 지속된 홍군의 장정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섬북에서 중공중앙은 홍군을 재정비함과 동시에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할 전략적 준비를 다그쳤다. 1935년 12월 섬북에 도착한 중공중앙은 자장현(子長縣) 와요보진(瓦窯堡鎭)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정세와 당의 과업에 관한 중앙의 결정》을 채택하고 국내전쟁을 민족전쟁과 결부시켜 대일작전을 위해 홍군을 크게 확대할 군사방침을 확정하였다. 대회의 방침에 따라 1936년 2월 모택동은 먼저 섬북에 도착한 홍군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동정을 진행하였다.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1937년 8월에 중공중앙은 락천현(洛川縣) 풍가촌(馮家村)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정세와 당의 과업에 관한 결정》과 《항일구국 10대 강령(抗日救國十大綱領)》을 채택하였다.

1937년 1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중공중앙은 보탑산과 이웃한 봉황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그후 적의 폭격을 피해 연안 시교의 양가령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공중앙과 주요 지도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고 중앙기관과 부서들도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다.

 

양가령, 모택동 거주지 옛집

당중앙 소재지 옛건물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개최지 강당

 

양가령 사적지는 지금 관광자들에게 개방되여있다.

넓은 정원에는 2층으로 된 건물이 보였는데 건물에는 중앙대례당(中央大禮堂)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곳에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중앙대례당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산언덕에 오르면 동향으로 된 아담한 움집이 보인다. 세 개 요동으로 된 이 토굴집이 바로 모택동이 거처하던 곳이다. 가운데 방은 사무실이고 왼편의 방은 침실이였는데 두방은 서로 통했다. 그리고 다른 한 방은 사무일군의 거처로 사용되였다. 방에는 간소한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낡은 책장이 있었다. 모택동은 바로 이처럼 검소한 곳에서 항일전쟁의 승리와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냈던것이다.

양가령에서 모택동은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를 소집하였다.

1942년 5월 당중앙에서는 문예사업일군들을 모아 연안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모택동이 좌담회에서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을 발표하였다. 좌담회는 당의 사상을 바로 잡고 문예의 계급성을 거론하였으며 무산계급 문예관(文藝觀)을 수립하였다. 얼마후 모택동의 연설은 당풍, 학풍, 문풍을 바로잡는 성세호대한 정풍운동으로 확대되였고 연안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통제하고있는 해방구와 항일근거지로 신속히 확대되였다. 간부에 대한 엄밀한 심사에서 부분적인 억울한 사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조선혁명가 김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양가령에서 모택동과 당중앙은 생산자구운동(生産自救運動)을 전개하였다. 대규모적인 생산운동으로 하여 당중앙과 팔로군은 극심한 곤란을 극복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는 튼튼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였던것이다.

산언덕에 자리잡은 양가령 모택동의 옛집을 보고 다시 중앙대례당을 찾아보았다.

문을 들어서니 습기가 안겨오는 커다란 대청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 걸상들이 줄줄이 늘어선 대청 바른편에는 강당이 설치되여있었다. 정면무대는 《모택동의 기치 밑에 승리적으로 전진하자》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그 아래에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라는 프랑카드가 걸려있었다.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는 중국혁명사에서 아주 중요한 대회였다. 1945년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연안 양가령 중앙강당에서 소집된 이 대회는 모택동사상을 전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였다. 맑스레닌주의 리론과 중국혁명의 실천을 통일한다는 사상이 바로 모택동 사상이다. 대회는 대중을 발동하여 인민의 력량을 장대하며 공산당의 령도하에 일본침략자를 타도하고 전국인민을 해방하며 신민주주의 중국을 건립한다는 정치로선을 제정하였다.

 

(최룡수 교수) “위대한 중국인민해방사업을 이끄는 제7차 대표대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참석한 박일우 동지는 대회 연설에서 지난 력사를 회억하면서 백색지구에는 리철부 동지가 희생했고 쏘베트지역에서는 양림동지가 희생되였구 항일전쟁시기는 주문빈 동지가 희생되였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공산당 계열에서 조선족으로 가장 유명한 분은 바로 이 세분 리철부, 양림, 주문빈을 꼽을수 있습니다.”

 

조선혁명가 박일우(朴一禹)도 이 대회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지난 력사를 회억하면서 국민당 통치구에서 투쟁했던 리철부동지가 희생되고 쏘베트지역에서는 양림동지가 희생되였으며 항일전쟁시기에는 주문빈동지가 희생되였다고 하면서 이 세사람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한 가장 유명한 조선혁명가라고 말했다.

박일우(1904―?)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중국 동북으로 이주하였고 길림성 룡정에서 공부하였다. 룡정에서 교원으로 지내던 그는 중국 관내에 들어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항일전쟁초기에는 진찰기변구 계현(薊縣), 평서현(平西縣) 현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0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기관 일군들이 몸소 축조한 중앙강당 건물은 1942년에 준공되였다. 건물은 대청과 무도청, 휴계실 3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중앙강당 뒤편에는 3층으로 된 중앙판공청 건물이 있었다. 1층은 회의실과 작전연구실로 사용되였고 2층은 사무일군 집무실이였으며 3층은 정치국회의실이였다.

강당에 서있노라니 항일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신민주주의 새로운 중국의 창건을 기대하면서 벅찬 가슴으로 대회에 출석했던 수많은 대표들의 진지한 모습이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았다. 거기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혁명가들도 있었다.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중국 대지에서 피흘려 싸운 전우들을 그리면서 그들은 조국을 찾고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려는 새로운 열의로 불타있었을것이다.

1937년 9월 연안에 섬감녕 변구(邊區) 정부가 설립되였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장정을 끝낸 후 섬서성 북부지역과 감숙, 녕하를 포괄한 섬감녕 지구를 통제하고 튼튼한 본거지를 만들어나갔다. 섬감녕지구는 서북으로 쏘련과 통할 수 있는 반면 남에는 황토고원이 있고 동쪽으로는 황하가 있기때문에 국민당 군대나 일본군을 방어하기 쉬운 등 지리적인 우세를 가지고있다.

 

동방 반파쑈 대회가 열렸던 연안 참의회 강당건물앞에서 최룡수 교수(좌)와 인터뷰 

동방 각민족 반파쑈 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참의회 강당

 

연안에 도착한후 당중앙에서는 섬감녕 변구정부를 수립하고 연안에 참의원 대례당(大禮堂)을 축조하고 중요한 대회의 소집지로 하였다. 그리고 참의회(參議會) 소재지로 사용하였다. 강당건물은 1941년 10월에 축조되였는데 보수된 건물은 지금도 연안시 남관가(南關街)에 남아있다.

연안시 남관가에 위치한 대회개최지 연안대례당은 지금 재 보수를 진행하고있었다. 강당 건물은 1947년 해방전쟁시기 국민당에 의해 엄중히 파괴되였지만 1949년에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있다.

남향으로 된 강당은 1,200여명을 용납할 수 있다.

(최룡수 교수) “1941년 10월 26일 연안에서 열린 동방 반파쑈대회가 여기서 열렸습니다. 한국 림시정부의 김구, 조선의용대 무정이 주석단 명단에 올랐습니다. 무정이 대회 페막사를 했습니다. 대회당건물은 보시다싶이 지금 수건중에 있습니다.”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참가했던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표대회(東方各民族反法西斯代表大會)가 바로 이 강당에서 소집되였다. 1941년 9월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연안의 각 민족 대표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서는 동방 여러 민족이 반파쑈 대동맹을 결성할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동방 각 민족 반파쑈 대표대회가 갖 축조된 섬감녕변구 참의회 강당에서 소집하게 되였다. 무정을 비롯해 연안에 체류하고있던 조선혁명가들은 윁남, 필리핀, 타이, 인도, 일본, 몽골, 회족, 장족 등 각국, 각민족 대표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대회소집을 창도한 단체의 하나였고 조선의용대는 대회에 축전을 보냈다.

대회는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지미뜨로브, 깐디, 장개석, 모택동, 주덕과 더불어 한국림시정부의 김구를 대회 명예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이 대회 주석단 성원으로 되였다. 대회에서는 반파쑈 대동맹을 결성하고 37명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이였던 무정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고 후에는 집행위원회 13명 상무위원의 하나로 선거되였다.

무정은 28일에 대회 보고를 하였다. 그는 대회보고에서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민의 혁명투쟁을 이야기하면서 반일투쟁의 중요한 전략적 지위에 있는 조선은 조선인민의 조선으로 될것이라고 하였다. 30일 대회 페막사도 무정이 하였다.

대회에서는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동맹이 결성되였다. 동맹 본부는 연안에 두고 각지에 분맹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대회는 동방 각민족의 항일의용군종대(抗日義勇軍縱隊)를 조직하고 화북전선에 나가 항일투쟁에 참가할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동방 민족학원을 만들어 간부양성에 진력하기로 하였다.

주덕, 오옥장, 림백거, 채창, 파소화(巴素華), 무정, 초삼(肖三), 리연록(李延祿)이 동맹의 지도성원으로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방 여러민족 반일력량을 전부 동원하여 결성된 동방 각민족 반파시스트 대동맹은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특히 중국에서 싸우고있는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에게 있어서 대동맹은 정치면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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