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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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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회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지
2014년 04월 08일 20시 02분  조회:4879  추천:0  작성자: 김성룡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과 무장선전을 진행하던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은 선후로 두차의 치렬한 전투를 치렀다. 1941년의 호가장전투와 1942년 5월의 반포위토벌 전투이다. 이 두차의 전투에서 모두 조선의용군의 영웅적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의 피는 중국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소박하고 근면한 태항산의 인민은 중국군민과 어깨겪고 싸운 조선의 혁명선렬들을 잊지 않고 있다. 조선 혁명선렬들의 두려움 모르는 항쟁정신과 국제주의정신은 중국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하북성 섭현 석문촌 련화산기슭의 렬사릉원을 나와서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섭현의 고마운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선전부 일군과 리사화로인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에 많은 내용들을 짧은 시간내에 완수할수있었던것이다. 우리의 차는 계속 달려 산서 경내로 들어갔고 섭현의 고마운 분들은 우리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바래주었다.

 

10여분 뒤 우리는 하북성 섭현 경내를 벗어나 산서성 좌권현 경내에 들어섰다. 우리는 좌권현 마전진(麻田鎭) 운두저촌(雲頭底村)의 조선의용대 주둔지옛터로 찾아갔다. 맹진나루터로 황하를 건넌 조선의용대 주력은 태항산으로 진격했으며 좌권현에서 재정비를 거쳐 유력한 항일무장대오로 성장했던 것이다.

207국도를 따라 넓은 들을 지나니 멀리 병풍같이 둘러선 산이 보였다. 산기슭에는 숲이 우거진 작은 마을이 있었고 마을 앞으로 맑은 청장하가 흐르고있었다. 길가는 농민들은 그 마을이 바로 운두저촌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잡초가 무성한 들을 지나 청장하에 놓인 쇠사슬과 나무판으로 만든 다리를 거쳐 마을에 들어갔다. 운두저촌은 300여 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진 비교적 가난한 마을이였다. 마을 동북쪽에는 해묵은 홰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흰 담으로 둘러싸인 3합원(三合院) 구조의 옛집 한채가 있었다. 그리고 건물에는 《조선의용군구지(朝鮮義勇軍舊址)》라고 밝힌 작은 간판이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조선의용대 주둔지 옛터였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과 량켠에 낡은 단층집이 있었으며 아직까지 주민이 살고있었다. 정면 건물의 기와나 기둥을 보아서 옛 절이라는것을 알수있었다. 현지인들은 이곳은 옛날 피향묘(皮香廟)라는 사당이였다고 하였다.

봄 깃든 운두저촌(2008)

운두저촌 마을길

운두저촌의 조선의용군 주둔지 옛터

옛터의 낡은 건물은 후에 수선을 거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운두저촌 입구의 문루에 새겨진 조선글 구호

조선글 표어가 지금도 선명하다

마을어구 문루

 

항일전쟁시기 김학무가 거느린 조선의용대는 1941년부터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지휘부는 사당에 설치했고 기타 대원들은 마을 민가에 산재해 거주하였다. 현지인들은 당시 조선의용대가 80여명에 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1942년 이후 항일전쟁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근거지의 팔로군 전사들의 식량배정은 하루 한근이였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한근 두냥을 배정 받았으며 대원들은 그 두냥을 절약하여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다고한다.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진입한 조선의용대는 대적선전과 정보수집, 포로교양, 간부양성사업을 진행하였고 때로는 전투에 참가하거나 생산운동을 진행하였다. 운두저촌에는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바람벽에 써놓은 표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운두저촌 서남단의 마을 입구에는 작은 문루(門樓)가 있다. 현지인들은 남각(南閣)이라고 했다. 밑부분은 큰돌로 쌓아 만든 아치형 문이고 웃부분은 벽돌과 기와로 지은 작은 루각이였다. 루각에는 토지신(土地神)이나 재물신(財物神) 소상(塑像)이 있었다. 태항산 지역 대부분 마을 입구에 모두 이와 같은 문루가 있다. 마을사람들의 출입이 모두 무사하기를 비는 이 지역 민속이였다.
운두저촌 문루의 바람벽에는 항일전쟁시기 이곳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써놓은 표어가 지금도 남아 있다. 남쪽 벽에는 《왜놈의 상관(上官)을 총으로 쏴죽이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라고 씌여있고 북쪽 벽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전지원병(前志願兵)》이라고 씌여있다. 우리 글로 씌여진 표어들은 많은 시간속에서 퇴색되여 잘 알아볼수 없었지만 지금 새롭게 새겨놓아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문루 처마밑에는 《조선의용군옛터》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좌권현 정부가 이곳을 현급 문화재 보호지로 정하고 잘 보수했던것이다. 조선의용대의 항일 사적지를 보호하려는 현지 정부의 노력을 알수 있었다. 60여년의 비바람속에 그냥 남아있는 표어들, 이를 아끼고 보존한 현지인들에게 절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해서 우리는 운두저촌을 떠나 좌권현으로 출발하였다. 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려 태항산 대협곡을 지났다. 길가에는 키 높은 백양나무가 줄지어 있었고 량옆으로 태항산의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스쳐지났다. 우리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다양한 산봉우리들을 쳐다보면서 감탄을 련발했다. 산의 웅장함과 기이함에 저도 몰래 탄성이 터져 나왔던것이다.

답사팀의 촬영기자는 차를 멈춰 세우고 그 아름다운 산들을 렌즈에 담자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차는 계속 달렸다. 태항산 대협곡은 이튿날 팔로군 총부나 동욕진 상무촌(上武村)을 답사할 때 다시 와야했기때문이였다.

날이 어두워져서 우리는 좌권현 소재지에 들어섰다. 산서성 중부에 위치한 좌권현은 5개 진, 10개 향에 16만 인구를 가지고있다.

현성은 춘추시기 료양읍(僚陽邑)이라 했고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상당군(上黨郡)에 귀속되였다. 동한시기 이곳은 료양(遼陽)으로 불리웠으며 항일전쟁시기 좌권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좌권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좌권현은 민요와 《소화희(小花戱)》가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민요를 곧잘 불렀으며 또 창작하기도 하였다. 《소화희》는 춤 형식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좌권현의 독특한 무극(舞劇)으로서 명성이 높다.

현정부 뒤편에 괜찮은 초대소가 있어 찾아갔는데 현에서 대형 회의를 소집하고 손님을 모두 이곳에 배치했기때문에 빈방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근에서 호텔을 찾아 투숙하였다. 이곳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했지만 조건은 그렇지 못했다. 좌권현은 빈곤현이였다. 정부청사를 중심으로 괜찮은 건물 몇 개가 있을 뿐 대부분 낡은 주민집들이였다. 거리에는 행인이 별로 없었고 다만 희미한 가로등만이 어렴풋이 길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거리엔 택시가 하나도 없어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 성을 구경하러 나왔지만 택시가 없어 어디든지 갈수 없었던것이다.

10월 24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최룡수교수와 함께 좌권현 정부를 찾아갔다.

전에 현장과 서기를 만난적이 있었기때문에 직접 찾아갔지만 공교롭게도 두사람 모두 일보러 나가고 없었다. 할수없이 선전부에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선전부에서는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선전부의 소개로 우리는 좌권현의 《수재》로 불리우는 형효수(邢曉壽) 연구원을 알게 되였다.

 

태항산 언던에 보이는 관제묘(무신 관우를 기리는 절당)

태항산의 기이한 산봉들

좌권현 정부 청사(원 료양현)

좌권현의 형효수 당사 연구원

형효수연구원은 당사연구실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한후 좌권현정부에서 출간하는 《금일좌권(今日左權)》신문 주필로 사업하고있었다.

60세가 넘은 형효수연구원은 태항산에서의 조선의용군에 관련한 저서를 집필하고있었다. 우리는 조선의용군에 관련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뿐만아니라 그에게서 조선의용군 무명렬사 묘지를 60년간 지켜온 조은경(趙恩慶)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효수연구원은 동욕진으로 가면 조은경로인을 만날수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날 오후, 선전부에서 차를 마련해 우리는 형효수연구원의 안내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차는 207국도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전날 자세히 보지 못했던 태항산 대협곡을 다시 보게 되였다. 차는 대협곡의 중심인 신가교(申家峧)에서 멈춰섰다. 주변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우뚝 솟아있었고 벼랑에는 굴을 파고 만든 제단이 있었으며 제단에는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충의신(忠義神) 관공(關公)상이 있었다.

형효수연구원은 제단의 바른편 산 너머에는 북조시기 축조하기 시작한 고환운동(高歡雲洞)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일찍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류수(劉秀)가 총애한 금팽(芩彭)장군이 이곳에 병영을 세웠다 한다. 동한 개국공신인 금팽장군은 류수의 명을 받고 이곳 험한 지세를 리용해 병영을 세우고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웠다. 지금 병영의 흔적은 찾을길 없고 고환운동이라는 동굴 하나가 있을 뿐이다. 고환(高歡)은 북위(北魏)시기 승상을 지내면서 국권을 틀어쥐었던 인물이다. 그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고 하여 고환운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은 위나라 황제를 퇴위시키고 북제(北齊)를 세웠다. 그는 고환을 신무제(神武帝)로 추앙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은 바로 태항산의 이처럼 험악한 지형을 리용하여 일본침략자들을 유력하게 타격했던것이다.

차는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태항산은 돌로 된 산이라기보다는 찰흙이 굳게 다져 이루어진 산이라고 할수 있다. 그만큼 삐죽삐죽 모난 괴석이나 바위는 많지 않았다. 두터운 황토가 수천년이란 긴긴 세월 속에 돌 보다 더 굳게 다져져 형태가 독특한 산봉우리와 벼랑을 형성했던것이다. 선녀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신녀봉, 거부기와 토끼의 모습을 닮은 귀토봉(龜兎峰)이 있었다. 귀토봉은 마주한 두 산봉우리가 하나는 거북과 같고 하나는 토끼와 흡사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 산봉우리는 거부기와 토끼의 경주를 련상시켰다.

한시간 지나서 우리는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 이르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을 설명해주는 형효수 연구원(왼쪽)

조선의용군 주둔지 옛터

한국에서 세운 순국선렬 전적비

 

상무촌은 작은 산간마을이였다.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촌 정부를 찾아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촌 정부는 큰 마당을 가진 단층 집이였다. 동욕진 왕세수(王世秀)서기 겸 진장이 통지를 받고 거헌충(巨獻忠) 촌주임과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마을에 낡은 흙집들이 많은것을 보아 이곳 주민들의 빈한한 생활을 짐작할수있었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에돌아 마을 뒷산에 도착하니 커다란 비석이 나타났다. 검은 대리석 비석에는 《순국선렬전적비(殉國先烈戰績碑)》라고 새겨져있었는데 비석은 흰 대리석으로 된 큰 거북의 등에 세워져있었다. 비석은 현지 정부가 2003년에 한국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세웠다한다. 비석 뒤에는 축구장만큼 넓은 평지가 있었으며 아담한 단층집 한채가 있었다. 집 주변에는 나무들이 무성했으며 뒤로는 웅장한 산이 멀리 보였다. 이곳이 바로 상무촌 홍복사(洪福寺) 옛터였는데 조선의용대는 1940년 8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거헌충촌주임은 홍복사는 큰 사원이였지만 후에 일제가 불살라 버려 지금은 작은 단층집 하나만 남았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작은 흑판하나가 있었으며 그 옆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비석에는 홍복사는 당나라 정관(貞觀)년간에 축조되였고 명나라시기 다시 보수를 거쳤다고 밝혀있었다. 그리고 항일전쟁시기에는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가 있었으며 조선의용군과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총부 요원들이 거주하였다고 적혀있었다.

1938년 10월말 무한이 함락되자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서성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호남성 제9전구로, 제2구대는 호북성 제5전구로 이동하였다. 이때 최창익은 리익성이 거느린 제2구대와 함께 호북에서 활동하다가 황하를 건너 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성지 연안으로 갔다. 당시 30여명 조선청년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1940년초에 전방으로 나갔으며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진출하였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동욕진 상무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결성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이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창립대회에는 중공중앙을 대표한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참가했다. 그는 조선청년련합회의 성립을 축하하고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지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 그는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전승할 때까지 싸울것을 조선혁명가들에게 희망하였다.

당시 각지에서 모여온 21명 대표들이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팔로군 포병퇀 제1임 퇀장으로 있던 무정을 련합회 회장으로 선출하고 진동남 항일근거지 선전극단의 단장으로 있던 진광화를 부회장으로, 리유민을 조직부장으로, 장진광을 선전부장으로, 한득지(韓得志)를 경제부장으로 선거하였다. 최창익은 련합회 위원을 맡았다. 조선혁명가들은 열렬한 토론을 거쳐 계급과 당파, 종교를 불문하고 전 민족이 하나로 단결된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화북망명청년의 단합과 항일무장대오를 결성하며 전반 조선민족해방전쟁의 발동과 중국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고 일제구축과 조국광복 대업을 완성한다는 등 내용의 련합회 강령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때 무정은 팔로군 포병퇀의 사무가 많았기때문에 진광화가 실제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지도사업을 맡았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의 팔로군 지구로의 이동을 추진하였다. 련합회의 회원인 리극(李克), 로민, 왕극강(王克强) 3인은 국민당지구인 락양과 중경으로 파견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항일을 시도하였고 드디어 조선의용군 창설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결성을 보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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