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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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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화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4렬사
2014년 02월 04일 19시 58분  조회:3552  추천:0  작성자: 김성룡

피비린내와 화약내가 풍기던 처절한 호가장전투는 끝났다. 적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수류탄을 터친 손일봉과 한청도, 적과 육박전을 치르다가 총창에 쓰러진 박철동......이들의 영웅적 행동과 자아희생정신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호가장전투가 있었던 호가장마을은 중국 화북대지의 작은 마을로서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고장이다. 마을 구석구석에는 옛날 사용했던 우물이며 석마가 보였다. 단풍든 마을 뒷산으로 오불꼬불한 산길이 하나 있었다. 룡팔채로 통한다는 바로 이 길로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철수하였던 것이다.

호전증서기는 1941년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 몇 명이 이 마을에서 희생되였다는 것을 마을 로인분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마을뒷편에 묻혔다가 후에 다른곳으로 이장하였다한다.

호전증서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후에 로혁명가들이 이 마을에 찾아 온적이 있습니다. 로혁명가들의 자손까지 두차례 찾아왔습니다. 당시 의용대는 동남구로부터 왔다가 서산으로 철수했습니다.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룡팔채로 통하는 좁은 산길입니다. 그들은 뒤편 산길로 철수했습니다”

 

 

호가장 뒷산길,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곳으로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창립되여서부터 수많은 크고작은 전투를 겪었지만 대부분 경우는 주로 선전과 정보탐지와 전문해독임무를 맡았기때문에 일선 전투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가 겪은 가장 치렬한 혈전의 하나였다. 전투에서 네명의 대원이 장렬히 희생되였고 대장 김세광이 중상을 입었으며 대원 김학철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현지인들이 희생자들을 찾아 마을 부근에 매장하였다. 담사팀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철수하였다는 호가장 마을 뒤산, 룡팔채로 통하는 전적지를 보고나서 다시 마을에 들어왔다.

마을 뒤편에 크지 않은 평지가 있었는데 말린 옥수수대를 가득 쌓아놓고있었다. 호전증서기는 평지를 가리키면서 호가장전투에서의 희생자들은 일차로 이 평지에 매장하였다가 다시 찬황현의 황북평(黃北坪) 마을로 옮겨갔다고 소개하였다.

1995년부터 조선의용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호가장 마을을 수차 방문하였다. 호전증서기가 소개한데 의하면 의용군 자녀들도 호가장에 왔었다 한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묻혔다고 하는 호가장마을 평지부근을 여러차례 파보았지만 유감스럽게 아무런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현지인들은 박철동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유체를 찾아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옮겨갔던것이다. 호가장은 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때문에 팔로군 진기로예변구(晉冀魯豫邊區) 제1분구 사령부가 있었던 황북평마을에 정중히 이장하였다.

(권립교수) “전투가 있은후 1942년 2월 27일, 중경에서 추도회를 가졌습니다.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이 대련()을 드렸고 주덕, 팽덕회도 만련을 보냈습니다."

1941년 12월 15일, 조선의용대 대원, 찬황현 각계 인사 수백명이 황북평마을에 모여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이듬해 2월 7일 중경에서도 성대한 추도회가 있었다.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주덕, 팽덕회 등이 모두 추모의 글을 썼다.

하북성 찬황현 황북평향 황북평촌은 한단시 이북에 위치하였다. 차로 약 3시간 거리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팔로군 제1분구 사령부 옛터가 있고 마을 뒤편에는 2002년경에 잘 보수해 놓은 조선의용대 렬사 묘소가 있다.

마을 뒤산으로 가면 세멘트로 잘 닦아 놓은 평지와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에 낮은 담으로 둘러놓은 4명 렬사들의 묘소가 있다. 묘소와 비석은 박철동, 손일봉, 리정순(일명 왕현순), 최철호(일명 한청도) 순으로 되여있다. 렬사묘소는 동향으로 되었는데 고향인 조선을 그리는 렬사들의 마음을 헤아려서라고 생각되였다.

황북평마을의 렬사묘소를 새로 보수할 때 당시 의용대 대원들이 사용하였던 잉크병과 조선의용대 휘장을 비롯한 소중한 유물도 발견되였다 한다.

(권립교수) "손일봉동지는 중앙군사학교 락양분교를 졸업하고 또 광주군사학교에 가서 포병기술까지 배우고 로구교사변후 포병련장으로 있다가 1940년에 락양에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청년이였습니다."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손일봉(1912-1941)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여났다. 의주에서 공립일반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동안 목재공장에서 일하다가 1931년 중국 청도에 건너왔다. 청도에서 반일투쟁을 전개하려던 그는 일제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지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갔다. 그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하고 독립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3월 3일에 손일봉은 기타 애국청년들과 함께 폭탄으로 상해에 있는 일본대사와 륙전대(陸戰隊) 사령을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비밀이 루설되여 실패하고말았다. 행적이 적 밀정에게 발각된 손일봉은 할수없이 상해의 전우들과 작별하고 하남성 락양으로 떠났다.

상해를 떠난 손일봉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청년들을 교양하는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군사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또 많은 조선혁명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935년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를 졸업한 그는 광주에 가서 계속 공부하기로 하였다. 광주에서 그는 1938년까지 중앙륙군군관학교 광동분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그는 중국군 포병련장의 신분으로 1939년 9월에 있은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과 1940년 6월에 있은 신양회전(信陽會戰)에 참가하였다. 1938년 무한을 점령한 일본침략군은 수차에 걸려 호남성 장사를 포위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 군민의 완강한 저격에 부딛쳐 번번히 실패하였다. 장사대회전에서 중국군민들은 수만명 일본침략군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민당군 포병련장이였던 손일봉도 이 회전에 참가하여 중국 군민과 함께 일제를 유력하게 타격하였으며 그후 신양회전에도 참가하였다. 장사회전과 신양회전에서 싸우던 시기 손일봉은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의 신분으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으며 후에는 조선의용대 주력과 함께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진입하였고 호가장전투를 겪게 되었던것이다.

일본침략자들과의 육박전에서 총검에 찔려 희생된 박철동(1915-1941)은 충청북도 사람이였다. 그는 일찍 충주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1년에 중국 심양에 건너와 활동하였다. 그는 심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한편 밤이면 야학에 다녔다.

야학에서 그는 조선혁명당의 소개로 중국 관내에 들어와 활동하게 되였고 1934년 1월에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기에 입학하였다. 1935년 7월, 그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고 당의 파견을 받고 화남으로 가게 되였다. 남하도중 그는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일본밀정들에게 체포되여 3년간 일본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출옥한 박철동은 다시 중국 화북에 들어와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활동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기 위해 락양에 모였을 때 이들과 회합한 박철동은 정식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그후 1941년 호가장전투에 참가했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일본침략군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마지막 수류탄을 터쳤던 한청도(1915-1941)의 원명은 최철호였다. 그는 조선충청남도 대전(大田) 사람으로서 1935년부터 중국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8년 5월, 제6기로 중국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하고 무한에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던중 그는 새로 창립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해 중국 제5전구와 제1전구를 전전하면서 대적 선전공작을 진행하였다. 1940년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담한 한청도는 의용대의 파견을 받고 서안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해말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와 함께 찬황현 황북평마을에 매장된 조선혁명 렬사 왕현순(王現淳 1918-1941)의 원명은 리정순이다. 평안북도 벽동(碧潼)에서 태여난 그는 1933년에 중국 남경에서 김원봉중심으로 운영된 조선혁명군정학교(朝鮮革命軍政學校) 제2기를 졸업하였다. 그후 1938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한후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편입되여 싸웠다. 그는 조선의용대를 따라 호남에서 대적선전공작을 하다가 화북으로 진출해 형대(刑臺)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중국의 관련 자료에는 호가장전투라는 어구를 찾아볼 수 없고 형대전투라는 표현이 있다. 호가장은 너무나도 작은 마을이기때문에 직접 호가장전투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호가장이 소속되여있던 형대현의 지명을 따서 형대전투라고 개괄하고 있다. 1941년말 형대부근에서 호가장전투를 포함한 수차의 전투가 있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형대전투라고했던것이다. 이로하여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희생소식을 보도한 당시 기사들도 다소 혼란을 보이고 있다.

호가장전투에 직접 참전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회억에 의해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의 희생과정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만 다른 두 조선의용대 렬사인 왕현순과 주동욱(朱東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있다. 조선의용대 대원 왕현순, 주동욱이 현대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 당시 보도를 보아서도 왕현순과 주동욱 렬사는 호가장전투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호가장 부근에서 진행된 다른 전투에서 희생되였고 이들이 함께 형대전투 조선의용대 희생자들로 보도되였던것으로 추측된다.

1942년 2월 19일호 《신화일보》에 형대전투에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신문은 1941년 12월 26일 화북 형대부근의 한차례 혈전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고 쓰면서 제3지대의 손일봉, 최철호, 왕현순, 주동욱 네 동지가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약력을 적고있다. 손일봉은 중앙군관학교 제12기를 졸업하고 최철호는 중앙군관학교 특별반 제6기를 졸업하였으며 왕현순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졸업, 주동욱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3기 졸업이라고 밝혀졌다.

기사에서 밝힌 12월 26일로 보아서 호가장 전투와 형대부근의 전투를 종합해서 보도한것이 분명하다. 기사에서 지적한 제3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말한다.

전쟁년대였던 당시 보도의 정확성에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호가장전투를 포함한 형대전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용감히 적과 싸웠으며 또 장렬히 희생되였다. 황북평 마을에 묻힌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왕현순 렬사 그리고 아직 희생지마저도 찾지 못한 주동욱렬사 이들은 모두 우리민족의 훌륭한 아들이였고 자랑찬 청년들이였다. 

 

호가장 마을의 옛집

호가장 마을의 옛집

마을의 옛 우물

방과한 호가장 소학교 어린이들

화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4렬사를 기리는 사람들

답사팀이 호가장마을 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할때는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저녁녘이였다. 석양에 비낀 호가장 마을은 더없이 적막하였고 금빛 단풍은 노을속에서 더욱 빛났다. 이따금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에 수류탄을 들고 적을 향해 달려가는 영웅적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멸적의 함살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우리는 호가장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소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다소나마 생기를 보태주었다.

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산간마을 호가장을 떠나 차는 다시 석가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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