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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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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보정과 석가장에서의 답사
2014년 01월 20일 14시 04분  조회:4290  추천:0  작성자: 김성룡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중국의 국공합작이 이룩되여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였지만 중국의 위기는 더욱 커갔다. 야망의 일본침략군은 흔구전역에서 국민당국을 격파한후 태원을 함락하였고 송호회전을 거쳐 상해, 남경, 항주를 련이어 강점하였다. 일제는 장개석과 국민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남경에서 30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피비린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의 만행앞에서 군민들은 일떠났지만 정면전쟁에서의 국민당군의 실패는 거듭되였다. 비록 리종인이 서주에서 대아장전역의 국부적인 승리를 이룩했지만 전세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급급히 무한으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장개석은 황하의 언제를 폭파하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하였다. 이는 비록 일제의 공격을 잠시 제지시키기는 하였지만 황하류역 수많은 농가와 밭들이 물에 잠겼고 천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가옥을 잃고 류리걸식하게 되었다. 화북, 화동, 화중의 광활한 국토가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고 수억 중국인민이 일제에게 짓밟힐 위기의 시각이 닥쳐왔다.

 

(권립 교수)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은 화북과 화동지역에서 새로운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을 유력하게 타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피어린 항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연안으로부터 온 수많은 조선혁명자들과 국민당 통치구를 떠난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제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계속 국민당 각 전장에서 싸웠고 도시에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하늘을 치받고 솟은 태항산의 장엄한 뭇봉과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의 두터운 황토, 편벽하고 검소한 마을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씩씩한 모습이 비껴있고 그들이 남긴 력력한 자욱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피어린 항쟁을 한 조선혁명자들의 행적을 찾아 태항산으로부터 연안까지의 답사를 시작한 것은 2003년 10월 20일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때라 날씨는 쾌청하고 하늘은 한결 맑았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기획부의 서봉학주임, 중앙인민방송국 박군기자 그리고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와 함께 오전 8시 북경을 출발하였다. 우리는 북경 서역에서 기차를 리용하여 보정으로 향했다.

하북성 중부에 위치한 고도 보정시는 항일전쟁시기 하북성 성 소재지였고 줄곧 하북성의 물류중심이고 교통중추였다. 동으로는 유명한 항일전적지 백양전(白洋澱) 담수호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항산에 린접해 있는 보정시는 북경의 남대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보정시의 볼거리는 많았지만 우리가 답사해야할 곳은 보정사범학교(保定師範學校)와 보정륙군군관학교(保定陸軍軍官學校) 옛터였다.
북경에서 보정까지는 130킬로메터, 기차로 두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보정사범학교는 기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정시 서하관가(西下關街)에 위치하였다. 검은 담과 기와로 정교하게 만든 학교 옛 교문은 많이 낡아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관리일군을 찾아 교문을 열어보니 아치형 교문 너머로 정원에 세워진 정교한 조각상 하나가 보였다. 하얀 대리석으로 된 녀대생의 모습이였는데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책을 든 모습이었다.

 

 

보정녀자사범학교

원 사범학교 교장 동금의(오른쪽 두번째) 로인

고풍적인 학교도서관

학교기념관에 전시된 학교혁명사-김산(장명)의 행적이 밝혀있다

 

학교 력사교원인 왕병강(王炳剛) 부교수가 우리를 안내 해 주었다.

학교 정원으로부터 시작해 우리는 학교의 옛 도서관 전시실, 7.6렬사기념관(七六烈士紀念館)을 참관하였다.

사범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동금의 로인이 우리의 답사를 돕기 위해 모처럼 학교에 나와 학교관련 력사를 설명해 주었다.

1904년에 설립된 보정사범학교는 유구한 력사를 가진 학교다. 옛날에는 직예 제2사범학교로 불리웠고 후에는 하북성립사범학교로 불리다가 지금은 보정사범학교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아직도 이사(二師)로 불리우고 있다. 1923년 학교에 중국공산당 당조직이 있었고 많은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들이 이곳에서 학습하였다. 《9.18사변》후 교원과 학생들은 일본침략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당국에 항의하여 투쟁하였다.

1932년 7월 6일, 보정사범학교에 공산당원이 많다는 것을 탐지한 국민당 당국에서는 일제밀정과 함께 학교에 돌입하여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을 체포하려 하였다. 당시 학교에는 80% 사생들이 공산당원과 공청단원, 반제대동맹, 좌익작가련맹에 참가한 진보 인사들이였다. 이들은 학교를 보위하고 공산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국에 대항하여 싸웠다. 당국에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들의 투쟁을 진압하였는데 진압과정에서 36명이 체포되고 9명이 피살되였다. 이들을 7.6렬사라하고 학교에는 이들을 기념하는 7.6렬사기념관이 있었다.

동금의 로인은 학교의 관련자료를 찾아 조선혁명가 장명(김산)이 학교에서 활동했던 사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당시 김산은 장명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력사교원으로 있었다. 당 대표의 신분으로 당 조직을 발전시키던 그는 적이 추적해 오자 진보적인 교장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학교자리에는 2층으로 된 교수청사와 학생기숙사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그리고 학교정원에는 학교 초창기에 심었다는 고목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해묵은 나무 그늘아래 학생들과 모여 앉아 지식을 론하고 혁명사상을 전하는 조선혁명가 김산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보정사범학교에 대한 답사를 마쳤다.

 

사범학교를 보고나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다른 한 답사지인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로 향했다.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있었던 조선혁명가 무정이 다녔다는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는 보정시 동북교외인 위생로(衛生路)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5, 6층 낡은 주민아파트와 가로수가 늘어선 좁은 거리, 편한 모습으로 거리를 걷는 행인들...보정시는 번화한 상업도시라기보다는 비교적 조용한 소도시였다.

주민구를 벗어나 동북쪽으로 가니 널찍한 거리가 나타났고 봉건시대 관아의 문(衙門)과 흡사한 건물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라면 문 앞에 위엄을 부리는 돌사자가 없을 뿐이였다. 붉은 기둥에는 보정군교기념관(保定軍校紀念館)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보정군관학교 상무당

학교를 졸업한 명사들을 소개하는 담벽

 

보정군관학교 기념관앞에서 최룡수(오른쪽) 교수와 함께

붉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정면에는 상무당(尙武堂)이 있었고 주변에 단층집 몇 채가 줄지어 있었다. 단층집은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상무당 뒷벽에는 군관학교 1기부터 9기까지 졸업생들의 상황을 밝히고 또 명단을 적은 도표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보아도 무정이라는 이름을 찾을수 없었다.

최룡수교수는 아마도 무정은 변성명을 했을 가능성이 많고 원적도 중국 동북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비슷한 것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보정사범학교 왕병강부교수는 륙군군관학교에 관련한 력사를 많이 연구한 분이였다. 그에게서 제공받은 자료에는 륙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전부 명단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무정이라는 이름을 찾아볼수 없었고 또 무정이라고 추정할만한 이름도 없었다.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안고 륙군군관학교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기념관은 아직 준비단계여서 본격적으로 개방되지 않고있었다. 더욱 상세한 자료를 찾을수도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시기 무정은 보정륙군군관학교 혹은 산서의 북방군관학교를 졸업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가 분명하지 않다. 보다 유력한 증거인 무정의 친필 약력을 보면 무정은 1923년초에 중국에 들어왔다가 1925년 장가구에서 입당하였다. 그러므로 무정이 륙군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는 시간은 1924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북성의 장가구에서 입당하였다니 멀리 산서성의 북방군관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라 같은 하북성에 위치한 보정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유력한 추측이다. 더욱이 무정이 팔로군 포병퇀 퇀장을 맡았을 때 포병퇀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던 중국인 원광(袁光)은,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한 증언이 있다.

보정륙군군관학교는 1912년부터 1923년까지 도합 9기로 학생들을 졸업시킨 당시 중국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근대적인 군사학교였다. 학교전신은 원세개가 1902년에 설립한 륙군학당이다. 륙군학당은 근대적인 군사교육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했지만 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하면서 대부분 학원들이 부대에 돌아갔기때문에 학교 운영이 중지되였다가 1912년부터 다시 보정륙군군관학교로 출범하였다. 이때까지 학교는 3기에 거쳐 240여명을 졸업시켰다.

1923년, 학교는 군벌혼전을 겪은데다가 또 운영경비마저 부족한 탓으로 일년간 중지되였는데 그때까지 도합 5기로 510명 학원을 졸업시켰다. 1924년에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7기 입교생을 받았다. 그뒤 다시 북벌전쟁이 일어나는 등 많은 혼잡이 빚어졌기때문에 1924년후의 졸업생 관련자료가 자상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정은 1924년 제7기(1912년부터 계산)로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서 수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정륙군군관학교는 장개석, 진성, 류치(劉峙), 설악, 장치중, 부작의(傅作義), 도치악, 엽정, 동진당(董振堂), 하기풍(何基豊)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고위장령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엽정, 동진당, 하기풍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하였고 장치중, 부작의, 도치악도 선후로 중국공산당쪽으로 넘어왔다.

장개석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가 입교할 때 절강성에서만 하여도 천여명이 보정륙군군관학교에 지망하였는데 합격되여 정식 입교한 자는 겨우 14명 뿐이였다한다. 그만큼 입교가 어려웠고 엄격한 시험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북경에 온 무정은 입교시험을 통과해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고 꾸준한 학습을 거쳐 우수한 포병전문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를 떠나면서 우리는 무정에 관련한 더욱 유력한 증거를 찾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더욱 많은 연구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보정륙군군관학교를 답사한 다음 서둘러 보정시를 떠나 석가장으로 갔다. 우리는 뻐스를 리용하기로 하였다. 뻐스역에는 석가장으로 가는 소형 관광뻐스가 많았다. 우리는 자리를 정하고 오후 4시가 넘어서 하북성 소재지인 석가장시로 출발하였다.

 

차는 북경에서 석가장으로 통하는 경석(京石) 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후에 석가장에 도착하였다. 성 소재지인 것만큼 석가장은 보정시 보다 퍽 번화했고 상업적인 분위기도 다분하였다. 우리는 석가장의 굉원대주점(宏苑大酒店)에 입주하였다. 비교적 괜찮은 호텔이였다.

저녁에 호텔을 나와 발 가는 대로 거리를 거닐다가 한식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10월 21일 아침, 석가장에 있는 화북렬사릉원(華北烈士陵園)으로 가 보았다. 석가장시 중심부의 중산서로(中山西路) 343번지에는 남향으로 축조된 거대한 릉원이 있다. 검은 대리석판으로 된 정문에는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 렬사릉원이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넓은 광장에 키 높이 솟은 렬사기념탑이 보였다. 광장 주변의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속에 기념관 건물이 몇 개 있었다. 기념탑 뒤로 걸어가니 푸른 잔디밭이 있었고 거기에는 기념동상들이 3줄로 배렬되여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앞자리에 조선혁명가 주문빈 렬사의 반신 동상이 있었다. 동상을 받쳐주는 기념비에는 주문빈 렬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문이 적혀있었다.

《주문빈 1908-1944. 원명은 김성호, 조선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 사람. 원 중공 기열변(冀熱邊) 특구 조직부장. 항일전쟁전에는 로동운동에 종사. 1944년 가을 풍윤현 양가포 전투에서 희생.》

우리민족의 자랑인 주문빈 렬사가 하북성 동부에서 항일하다가 희생된 후 그의 유해는 당산에 있는 기동렬사릉원에 모셨다가 격이 더 높은 이곳으로 이장하였던 것이다.

정원 한쪽에 렬사들의 묘지가 있었다. 흰 돌로 정교하게 만든 묘지가 줄 지어있었는데 가운데 주문빈 렬사의 묘소가 있었다.
답사팀 일행은 묘소 앞에 묵도를 드리면서 일본침략자들과의 피어린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된 주문빈 렬사의 빛나는 한생을 그려보았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되자 팔로군 115사는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을 중심으로 적후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주문빈 렬사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하북성 동북부에서 싸웠다. 8년간의 피어린 항쟁을 거쳐 근거지는 료녕성 금주(錦州)이남 발해(渤海)서부 산서, 차할, 하북의 광활한 지역을 포함한 진찰기 해방구로 확대되였다.

석가장 화북렬사릉원

주문빈렬사의 동상

동상비석의 비문

 

부지면적이 21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은 화북전장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우다가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축조한 릉원이다. 항일전쟁 승리후 1948년, 주덕 총사령은 석가장에 렬사릉원을 만들어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할 것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렬사릉원은 1953년에 준공되여 이듬해부터 대외로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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