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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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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7당 통합대회 사적지
2012년 11월 30일 22시 37분  조회:4788  추천:3  작성자: 김성룡

항일전쟁시기 중경지역에 모인 조선 독립지사들과 혁명가들은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자체무장을 갖추었지만 대원 다수가 국민당 부대에 흩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전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국공 량당간의 암투가 자못 치렬하여 조선반일지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관계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많이 신뢰하였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 가운데 사상이 좌적이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점차 이들을 신뢰하지 않기 시작하였다. 도리여 김구와 림시정부를 정통으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지원을 주려하였다.

장개석은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의 중경 진입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통합을 전제조건으로 내 세웠던 것이다. 중국내 조선인 지사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하고 통합된 당파를 만들어야 계속 지원을 줄수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구와 리청천을 비롯해 한국림시정부 요원들은 대부분이 사천성 기강에 머물게 되었고 각 당파간의 단합에 고심하게 되였다.

2004년 11월 19일, 새벽부터 보슬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약속시간을 맞추어 우리는 가경해 관장을 만나 함께 기강으로 떠났다.

중경시 동남부에 위치한 기강현은 귀주와 린접하고 있다. 인구는 92만여명에 달하고 면적은 2,000여㎢이다. 중경으로부터 귀주의 준의(遵義)로 가는 고속도로가 기강으로 통하여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였다. 40여분 달리니 기강현 경내에 들어섰다. 기강은 경내로 기강하(綦江河)가 흐르면서 생긴 이름이다. 귀주성에서 발원하는 기강하는 북으로 흘러 기강현을 지나 장강에 흘러든다. 때문에 기강현의 수상운수도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달리는 차에서 가경해 관장은 사천과 중경의 인문특점을 자랑삶아 이야기해주었다.

중경지역을 포함한 사천은 산이 많고 습한 고장이다. 산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도보로 언덕을 오르내려야했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키가 작고 내력이 강하다. 또한 안개가 많고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습하기 그지없는 날씨로하여 이 고장 사람들의 인내력은 더욱 강하다. 뼈를 에이는듯한혹한이나 볕이 강한 혹서가 아니라 일년내내 미적지끈하게 덥고 습하기 때문에 수천년간 이곳 사람들의 지구력과 근면성을 키워냈던 것이다. 가경해 관장은 또, 사천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는 보잘 것 없지만 일단 사천을 벗어나 활동하면 대부분 명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등소평과 같은 위인도 사천사람이고 공화국을 일떠 세운 10대 원수중 주덕, 섭영진, 류백승, 진의 네사람이나 사천사람이라고 하였다.

가경해 관장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는 사이에 차는 어느덧 기강현에 들어섰다. 우리는 우선 기강현의 상승가(上昇街)로 찾아갔다. 거리목에 이르니 커다란 작업장이 나타났다. 일군들이 한창 길을 닦고있었다. 작업장에서는 누런 흙을 파헤치고 있었고 량쪽으로는 민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승가는 가면 갈수록 지형이 점점 높아진다고 하여 가진 이름이다. 새로 닦고 있는 길 량쪽으로 좁은 석판길이 있었고 현지인들은 지게에 여러 가지 물품을 지고 석판 길을 따라 상승가를 오르내리고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길을 닦기 위해 상승가 입구의 많은 가옥을 허물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기강의 한국 림시정부 옛 건물들도 포함되여 있는데 지금은 작은 옛 건물 하나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이제 곧 허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있었던 기강의 한국 림시정부 자리는 지금 도로 건설장으로 변해 버린 셈이다.

우리는 석판 길로 건설공지를 지나 계속 걸어갔다.

빗물이 석판에 떨어져 귀 맛 좋은 소리를 냈고 석판 길은 비에 젖어 한결 빛났다. 길을 따라 한동안 가다가 상승가 107번지에 멈춰 섰다. 거기에는 4합원 구조의 낡은 옛집 한 채가 있었다. 1939년 기강에 온 림시정부 의원과 조선청년들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한다.

(가경해관장) “이 집의 구조는 비교적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벽도 가운데 나무쪼각을 하고 거기에 흙을 발라 만든 벽입니다. 이쪽은 벽돌로 되었는데 후에 지은건물이고이 정면을 보면 기둥의 조각이라든가 계단 조각을 보면 당시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리청천은 이쪽 낡은 건물에 살았습니다. 그리고2,30명 조선인 임정요인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중경시 기강, 건설장으로 변해버린 상승가의 입구

곧 허물어 버릴 상승가 입구의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의 부분적 건물

비가 내리는 기강의 상승가 석판길

지게로 물건을 나르는 중경시 기강 사람들

상승가 107번지, 리청천과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곳

 

문을 들어서니 정면과 오른편에 벽돌기와 건물이 있었고 왼편에는 낡은 흙집이 있었다. 집은 모두 2층 건물이였는데 왼편의 흙집은 옛 건물 그대로이고 벽돌건물은 후에 보수한 건물이였다. 집은 현지의 염상(鹽商)으로 있던 부자의 집이였다. 중경부근은 천연 소금이 나는데 천연 소금은 바다 소금에 비해 맛이 독특하다. 그러므로 옛날 이곳에는 소금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한다.

당시 이곳에 20, 30명 조선인이 거주했고 1940년 광복군 총사령으로 된 리청천과 부인도 이곳에 거처를 잡았다고 한다. 림정의원으로 있던 손일명(孫一鳴)은 이곳에 거주하다가 병사하였는데 그의 묘지가 부근의 산언덕에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묘지를 찾지 못했다. 가경해 관장은 그 묘를 다시 확인하고 증인을 찾기 위해 기강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로인분들을 찾아 문의해 보았지만 끝내는 확인하지 못했다.

상승가 입구의 림시정부 청사 옛집을 허물 때 옛집을 복원하기 위해 측정작업을 하였는데 그때 현지 로인이 손일명의 묘지가 있다고 증언하였다한다. 그리고 리선자 부관장을 비롯해 묘지를 이미 확인하였고 지금 남은 사항이라면 증언자의 싸인을 받아 가는 일이라고 가경해 관장이 소개하였다.

비는 그냥 내렸다. 갈피를 잡을수 없이 여러 로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도 퍼그나 지났다. 그러나 묘 자리와 증언하는 로인은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보슬비는 그냥 멎지 않았다. 상승가를 본 다음 우리는 차를 돌려 기강현 타만진(沱灣鎭)에 갔다. 기강하 기슭의 언덕에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이 곧 타만진이였다.

타만 65번지에 가니 비탈진 곳에 낡은 가옥이 보였다. 빈터에 다 망가지고 나무 기틀만 약간 남아있는 집이 바로 1939년 김구가 머물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근에 림시정부 요원이였던 리동녕(李東寧)과 조소앙(趙素昻)의 거처가 있었다. 모두 헐망한 가옥이였는데 지금은 집주인들이 창고로 쓰는 듯 하였다. 때문에 번지수도 명확하지 않아 관련 연구일군들만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기강하는 큰 굽이를 지며 흘렀다. 강폭은 100여m 정도였고 물은 자못 깊었다. 이따금 화물을 가득 실은 배가 강에서 오고갔다. 기강에 머물 때 조선인 청년들은 체력을 증강하고 전장에 나가 싸울 일념으로 기강하에서 수영훈련을 하기도 하였다한다. 그리고 한 독립지사는 기강하 기슭을 거닐며 망국의 한과 고향에 대한 사무침에 시달리다가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유감스럽게 그 의사의 명함에 대해 가경해 관장은 명확히 밝혀주지 못했다.

타만에서 멀리 산봉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루각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비가 내리기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산으로 올라갈수 없었다. 가경해 관장은 그곳엔 관음묘가 있었고 부근에 또 동굴하나가 있었는데 일찍 조선인 청년공작대가 거기에 거주하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음묘는없어지고 새로 지은 루각 하나가 있을뿐이라고 했다.

타만에 머물면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은 다당련합회(多黨聯合會)를 준비하였고 조선인 각 당파와 혁명단체의 통합을 이룩하려 했다. 국민정부의 장개석은 조선인 내부의 불화와 분렬을 지적하면서 통합이 여의치 않으면 재정지원도 고려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통합이 이룩될때까지 림시정부의 중경진입을 허락하지 않고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기강의 타만 거처에서 여러가지 고민에 빠져있었고 후세에 남긴 《백범일지(白凡逸志)》을 집필하고있었다. 그는 각 당파와 단체의 요인들과 만나 독립과 민족해방을 이야기했고 투쟁방향을 두고 치렬한 론쟁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세월속에 사라져 가는 타만의 유적지를 보노라니 가슴이 아파났고 비속에 하염없이 흐르는 기강하 물결을 보노라니 마음은 슬퍼지기만 하였다. 중외를 진동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국림시정부와 김구는 국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시국은 갈수록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지대한 희망과 기대를 걸었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공격앞에 너무나도 무력하였고 드디어 중경이라는 오지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상해, 항주, 무한, 장사, 광주의 련속되는 함락을 겪으면서 헐벗고 굶주린 피난민 신세로 기강에까지 온 한국림시정부의 상황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각 파벌의 언쟁은 끊기지 않고있었다. 현실은 모든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모든 항쟁의욕을 말살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수없었다. 수십년간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이끌어온 독립투쟁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강의 타만진

리동녕, 조소앙의 기강 타만진 거처로 추정되는 곳

김구가 백범일지를 쓰면서 7당 통합대회를 준비하였던 곳, 지금은 몇개 집 틀과 허물어진 담만 남음

기강 타만진의 중산로소학교 입구

7당 통합대회 옛터를 가르키는 가경해 관장

 

중경시 기강현 중산로(中山路) 18번지에 이르면 작은 소학교 하나가 있다.

길거리에서 보면 잘 알리지 않지만 길가의 광고판들을 자상히 살피면 그속에 중산로소학교(中山路小學校)라고 쓴 작은 간판아래 교문이 보인다.

교문으로 들어가니 3층 교수청사가 있고 운동장이 있었다. 교수청사 바른편으로 새 아파트와 낡은 2층 건물이 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그쪽을 가르키면서 당시 이곳에는 옛 사원이 있었고 그 곁에 영산빈관(迎山賓館)이 있었는데 조선혁명가들의 7당 통일회의가 바로 영산빈관에서 진행되였다고 하였다.

1939년 8월 27일,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민족주의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기강의 영산빈관에 모여 통일회의를 열었다. 중국 내 반일단체의 대통합을 위한 또 한차례 좌우합작 노력이였다.

중국내 조선 독립운동진영은 두 개 큰 정당이 주도하였다. 하나는 김규식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고 다른 하나는 김구와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이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을 핵심으로한 조선민족통일전선련맹이 형성되여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도 서로 주장이 달랐기 때문에 통합과 분렬을 거듭하는 상황이였다. 기강에 도착한 김구와 림시정부는 우익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운동단체련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사천성 기강에 머물고있을 때 장개석 국민당은 이들에게 다소 랭담한 태도를 보였다.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통합된 당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림시정부의 중경 진입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합작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비상시기에 열린 기강의 7당 통합대회는 중국 내 조선반일투쟁 력량을 집중, 통일하고 중국 국민정부와의 협동을 강화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각 당파간의 모순과 분쟁은 도저히 극복되지 못했다. 우선 개인중심의 통합을 반대한다는 리유로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탈퇴하였다.

9월에는 기타 5당 대회가 속개되였지만 김원봉과 김구, 조선민족혁명당과 림시정부간의 모순이 극복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이 리탈하였다. 결국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한 전통적인 김구세력만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1940년 5월 조완구, 엄항섭을 대표로하는 한국국민당, 리청천, 최동오(崔東旿)를 대표로하는 조선혁명당, 조소앙, 홍진을 대표로한 한국독립당이 새로운 한국독립당으로 합병하였다. 새로운 한국독립당은 사실상 한국림시정부의 집권당 역할을 하게 되였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저들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국민당과 장개석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선의용대와 경쟁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 창립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기강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은 장개석의 허락을 받고 중경으로 본거를 옮겼고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을 창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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