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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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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해방전쟁시기 공적
2012년 09월 04일 23시 04분  조회:11486  추천:3  작성자: 김성룡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집거지인 연변조선족자치주도 이젠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였다. 자치주 창립을 경축하면서 조선족의 혁명투쟁사를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조선지사들이 중국경내에서 광범한 조선민족을 이끌고 중국군민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공산당을 따라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간 빛나는 력사적 공적은 대체로 세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있다. 하나는 중국 대혁명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전쟁시기이며 또 해방전쟁시기이다.
 
해방전쟁시기의 공적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입하였고 8일에는 쏘련군이 동북으로 출병하였다. 대세가 기울렀음을 판단한 일본천황은 라지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9월 3일 태평양 미군 군함 미수리호에서 일본은 정식 항복서에 서명함으로써 동맹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제6호 작전명령을 하달해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과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에게 제6호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즉 소속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동북으로 진출하는 팔로군 각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해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함으로써 조선인민의 전적인 해방과업을 완수하라고하였다.

명령에 따라 기동의 주연이 가장 먼저 조선의용군 백여명 대원을 거느리고 팔로군 기열료 부대를 따라 출발하여 9월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연도에서 계속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입대시켰는데 심양에 도착할때 이미 4백명 정도 되였다. 심양에서 이들은 심양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쳐 천여명 규모의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편입하였다. 관내 연안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주력 그리고 신사군의 조선의용군들도 선후하여 심양에 도착하였다.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은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을 경축하고 성대한 군인대회를 열었다. 대회 결의에 따라  김두봉, 무정, 최창익, 한빈을 비롯한 소수간부들이 먼저 조선에 가고 기타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계속 중국 동북에 남아 조선주민을 보호하고 단합시키기로 하였다. 군인대회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군은 3개 지대로 나뉘여 남만, 동만, 북만으로 진격하였다. 김웅과 방호산이 2천명 규모의 조선의용군 제1지대를 거느리고 남남에 남아 투쟁하기로 하고 박일우와 리익성이 천명에 달하는 조선의용군 제5지래를 거느리고 동북의 조선인이 가장 많이 집거해있는 동만(연변)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북만은 이미 군창건 기반이 닦아졌기 때문에 주덕해를 비롯한 19명 간부를 파견해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군하고있는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대원들
 

심양에서 군인대회를 열고있는 조선의용군(력사사진)
 

조선의용군의 호소에 따라 동북각지 조선청년들이 용약 공산당부대에 참가하였다.
 

심양 오가황소학교의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개최지 옛터 기념비
 

할빈부근 배극도, 조선의용군 제3지대 편성지를 설명하고있는 할빈 사학자 서명훈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 주덕해(연변 초대 주장 겸 주당위 서기)


항일간부 김응삼(하북 로태농장에서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에 온후 련지도원을 담임)
 

항일간부 강재렬(하북 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에서 근무)
 

항일간부 최명세(북평에서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에 온후 련장직을 맡음)
 

항일간부 김현태(상해에서 신사군의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진출후 선전사업)
 

항일간부 최강(연변으로부터 관내에 가 조선의용군에 입대, 동북에 온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 퇀급 간부로 사업)
 
한편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들어온 88려단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었다. 9.18사변후 동북에서 간고하게 항일하던 동북민주련군은 조직적으로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철수하였으며 그곳에서 쏘련 원동방면군 제88려단으로 편성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출신의 이들은 동북각지에 아주 익숙하였기 때문에 부분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직접 조선으로 가지 않고 동북에 남아 중국공산당을 도와 사업하였다. 조선인 강건(강신태)는 연길로 가서 쏘련군의 도움으로 연변경비사령부를 설립하고 조선인 경비부대를 창설하였따.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고려경찰대를 조직하여 목단강군구 창설사업을 시작하였다.

국민당 장개석은 공산당의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그냥 지켜볼수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중쏘조약에 따라 쏘련군의 손으로부터 동북 행정대권을 그냥 접수하면 될줄 알고있었지만 공산당은 이미 동북에 발을 들여놓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있엇던것이다. 그는 급히 두률명을 시켜 국민당 최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동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동북에 도착한 림표는 동북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통솔하였지만 부대가 너무 흩어져 전투력을 일시 전투력을 형성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동북의 한족들은 대부분 국민당군을 정부군으로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공산당은 갑자기 군중기반이 없게 되였다. 림표는 할수없이 얼마안되는 부대롤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한걸음한걸음 철수하였다.
 
리홍광(1910~1935), 리홍해, 리의산이라고도 한다. 조선경기도 룡임군 단삼동에서 태여났다. 리홍광은 남만 항일유격대의 주요 창시자이며 동북항일련군 지휘부 참모장으로 있었다. 1935년 5월 12일, 불행히 전사하였다.
 
허형식(1909~1942), 동북항일련군 고위 지휘자로서 리희산이라고도 한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겸 제12지대 정치위원을 맡았고 송눈평원에서 유격전을 진행함으로써 란서 풍락진 전투의 승리를 거두기도하였다. 1942년 8월에 경성 청봉령에서 일제와 싸우던중 불행히 희생되였다.
 

주보중(가운데)을 따라 동북에 온 강신태(좌)와 김광협(우)
 

항일련군의 호소하에 적극 동북민주련군에 입대하고있는 동북의 조선청년들
 
국민당 정예부대가 동북에 들어오자 쏘련 주둔군은 심양을 국민당 행정관원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심양을 내주게 되였다. 제1지대는 심양을 떠나 남만 각지의 조선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열혈청년들을 선동해 적극 부대를 확대하여 통화에 이르렀을때 이미 만명규모를 갖춘 대부대로 되였다. 장시기 일제의 시달림을 받아왔던 동북의 조선인들은 조선의용군을 보자 “우리의 군대”라고 하면서 크게 신뢰했으며 젊은 자녀들을 다투어 조선의용군에 입대시켰던것이다. 1지대는 남만에서 비교적 완정한 민족사업과 요육체계를 형성하였고 공산당을 도와 각곳에 민주정권을 세웠다. 통화 일본잔여세력의 폭동을 진압한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리홍광지대로 개칭하였으며 자질이 좋은 대원들을 한개 중대 한개 중대씩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인 제3종대에 보냈다.

주덕해는 할빈에 도착한후 배극도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하고 팔로군 359려를 도와 목란, 방정, 연수, 상지 등지에서 싸웠으며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뽑아 359려에 보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연변에 도착한후 동북항일련군 간부들이 조직해놓은 조선인부대와 합쳐 동만군구 경지 제1려를 편성하였다. 제1려는 산하에 제1퇀, 제2ㅊ퇀, 제3퇀을 두었다. 한편 이들은 민주정권을 세우는 한편 토비숙청을 진행하여고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연변 광범한 조선인 군중들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항일련군 간부들의 두리에 굳게 뭉쳤기 때문에 연변은 신속히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한 근거지의 하나로 건설되였다. 그리고 제5지대가 길림을 지날때 일부 간부를 남겨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건립하도로 하였다. 이들은 길림보안총대의 조선인대대와 함쳐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했다. 박훈일이 7지대 대장을 맡았고 또 화전현에 군정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학습시켰다.

동북의 조선인부대는 동북민주련군 서렬에 포함된후 조선쪽의 수요로하여 대량의 고위간부들이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독립동맹도 민주동맹으로 개칭하고 동북경내 조선인 민중들을 이끌고 공산당을 따라 토지개혁을 통해 땅의 주인이 되고 가각적으로 중국적을 가진 조선족으로 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의 통계에 따르면 동북경내 조선족인구는 당시 110만이였다.

조선족인구의 80%이상이 동만 연변에 집중되여 있었기에 연변의 군중기반은 아주 좋았다. 왜냐하면 20세기초 공산당조직이 생기면서 항일련군과 반일조직들은 줄곧 동만에서 활동하였기에 당은 줄곧 광범한 조선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때문에 일제가 투항한후 동만의 공산당조직은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는데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연변 2057명 당원 중 1120명 조선족 당원이 있어 반수이상을 차지하였다. 1948년, 연변의 3175명 당원중 조선족 당원수는 2579명으로서 총수의 80%를 차지하였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족 군민들은 동북에 방금 발을 들여놓은 팔로군과 신사군의 가장 믿음직한 뒷심이 되였고 연변을 비롯한 조선인 집거지는 공산당의 가장 훌륭한 후방근거지로 되였다.

1946년 미국제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은 사평까지 공격해와 민주련군과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사평전투에 배합하기 위해 북만과 동만 각부대는 쏘련군의 철군 기회를 빌어 신속히 할빈과 장춘을 차지하려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 점령군속의 조선인부대를 봉기하도록 설득하였고 또 조선인 로동자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공산당부대는 별로 힘 드리지 않고 할빈을 차지할수있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위주로 편성한 조선퇀은 하경적이 지휘하는 동남종대에 편입되여 조리회가 거느린 동북종대, 양국부가 지휘한 서남종대와 함께 장춘을 공격하였다. 장춘을 쟁탈하는 혈전에서 조선퇀의 박락권 퇀장과 고생호 부퇀장이 선후로 희생되였다. 하지만 전사들이 두려움없이 잘 싸웠기에 동북민주련군 각 부대는 괴뢰만주국 중앙은행을 점련하고 장춘쟁탈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장춘쟁탈전에 참가한 김응삼 로인이 괴뢰만주국 중앙은행 청사를 공격하던 전투를 설명하고있다.
 

장춘쟁탈전을 앞두고 련지도원 김응삼(좌)이 겸위원과 통신원과 함께
 
적아쌍방의 력량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기에 민주련군 주력은 한개원 남짓이 싸우다가 결국 사평에서 철수하고말았다. 팽팽하던 대치국면이 무너지자 상황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였다. 림표는 련속 장춘시와 길림시를 내주면서 송화강 이북으로 주력을 철수시켰다. 길림성 당위와 정부도 신속히 로야령을 넘어 연변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조선족 인구가 80%이상을 차지한 연변은 동만의 정치, 경제, 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4차의 림강보위전시기 남만의 리홍광지대는동북민주련군 독립 4사로 편성되여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와 제4종대에 배합해 간고한 적후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각지 정부기구를 보호하고 적 거점을 제거하였으며 적의 유생력량을 분산해 하나하나 적을 격파하였다. 1947년 3월에 독립 4사는 민주련군 제3종대 8사 22퇀과 함께 휘남현성을 해방하였다. 이 싸운에서 조선족 전투영웅 조성두는 폭약을 안고 적의 화점을 폭파함으로써 자아희생적인 폭파영웅으로 되였다.
 

폭파영웅 조성두의 묘소(료녕성 휘남)
 

림강 렬사릉원에 모셔진 조선족 렬사의 묘비
 
동만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동만의 군민들은 일치 단결되여 영용히 싸웠다. 조선족 장병을 위주로한 동만독립제1사(조선퇀), 동만 독립 3퇀과 독립 6퇀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한 72퇀은 길림과 장춘주변에서 간고한 유격전, 대치전을 진행하면서 국민당 60군을 견제하였다. 이로써 국민당군은 줄곧 로야령을 넘어 연변쪽으로 공격하지 못했고  연변의 백성들은 전력으로 생산에 열중해 대량의 쌍과 탄약, 피복을 끊임없이 전선에 수송하였으며 전선의 부상자들을 연변에 실어다 치료해주었다.

림강보위전과 강남 직격작전이 끝난후 동북민주련군은 대규모의 반격을 시작하였다. 하기, 추기, 동기 동세가 련속 펼쳐졌으며 광범한 조선족 인민들은 생산을 발전시켜 유력하게 전선을 지원하였을뿐만 아니라 우수한 자녀들을 다투어 부대에 입대시켰다. 통계를 보면 해방전쟁시기 63000여명 조선족 청장년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조선족 17명당 한명이 입대한 셈이다. 특히 연변 5개현은 34855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연변 참군총수의 85%를 점한다.

197년 9월 10일,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중 조선족 장병이 가장 많은 제10종대가 정식 편성되였다. 북만 조선의용군 제3지대가 수송한 조선청년들로 제10종대 28사를 편성하고 서란, 영길, 유수, 교하 등지 조선족 보안부대로 제10종대 29사를 편성하였으며 조선족 장병이 반수이상인 동만독립사로 제10종대 30사를 편성하였다.

1948년초, 조선족 장병이 다수를 차지하는 동만 독립 3퇀과 6퇀, 71퇀으로 독립 6사를 편성하였다. 1958년 4월에는 길남 73퇀 1700명 조선족 장병과 송강군구 제8퇀, 목단강군구 제14퇀의 2200명 조선족 장병을 합쳐 독립 11사를 편성하였다.

동북에서 국공량당의 대결전인 료서전역때 독립 6사와 독립 11사는 기타 독립사단과 함께 길림, 장춘부근에서 싸우다가 장춘을 포위하여 최종 장춘을 해방하였다.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는 흑산, 대호산에서 료요상 병촨을 성공적으로 저지함으로써 료서 대섬멸전을 담보하여 불후의 공적을 쌓았다. 이 가운데 10종대 28사 조선족 반장 최성걸은 적의 포화에 찢겨진 자기의 왼다리를 절단해버리고 계속 적과 싸움으로써 “계급의 강골”로 불리웠다. 그의 사적은 오늘까지도 료심전역 기념관에 전시되여있다.

줄곧 심양주변에서 적을 견제해 싸우던 독립 4사의 조선족 장병들은 신속히 남하해 기타 부대와 함께 심양을 공격하여 심양을 해방하는데 기여하였다.

동북이 해방된후 독립 11사는 장춘 수비임무를 맡았고 독립 4사는 심양 보위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독립 6사는 주력부대인 제6종대에 편입되여 중국인민해방군 156사로 되여 관내로 진입해 전국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사평해방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족 렬사 김동원(사평 렬사기념관)
 

흑산 저지전의 101고지 기념비
 

10종대 28사 강철8련 명세서(김교진 지도원 정리)
 

료심전역 기념관의 최성걸 렬사의 동상
 

최성걸렬사가 사용했던 기관단총
 

료심전역기념관의 강인복 렬사 동상
 

우수한 호사장 강인복 렬사 유상
  

료심전역기념관 렬사담벽에 새겨진 조선족렬사들 명단(일부분)
 

연변의 혁명렬사기념비
 
동북이 해방된후 제4야전군 조선족장병들은 선후로 평진전역, 장강 도하작전,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전역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공화국 창건을 위해 마멸할수없는 공적을 세웠다. 조금도 과장이 없이 연변은 그야말로 산마다 진달래꽃이 피고 마을마다 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영원한 발전과 번영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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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일견 조언
날자:2012-09-06 15:26:09
집권 합법성과 권위성 국민감정 논리인데 예전하구 많이 다르다오.
제일 합법성있는것은 중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일본침략자를 때려부시는데 공로가 있다는점이요.공산당과 국민당이 모두다 항일전쟁을 주장하고 적극 하였으니.
하지만 조선족이 얼마나 용감하게 국민당군을 소멸했다하면 좀 예전과 달리 복잡해지는거요.같은 중화민족이고 중국남방사람들 가운데 국민당군의 가속후손이 대부분이깐요.
동북의 토비가 국민당의 허울을 쓰고 조선족농민들을 살해하고 토지를 빼앗고 괴롭혔기에 해방군에 적극 참군해 싸웠다는것이 누구나 납득할수있는 올바른 해석일거요.
항미원조했다하면 조선족 한민족 한국민 모두가 갑갑해지고 답답해지는 복잡한 심정과 마찬가지란 말이요.
그러니까 시대의 흐름과 눈치를 보며 바른 글과 말은 하기요.
1   작성자 : 영생
날자:2012-09-06 14:44:56
력대 중국혁명에서 회생된 조선조렬사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생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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