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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
2006년 01월 11일 00시 00분  조회:5157  추천:62  작성자: 황유복
가슴속에 새겨진 할머님의 초상

황유복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적셔지는 일이 있다. 대여섯 살 때 일로 기억된다. 하루는 마을 어느 집에서 잔치에 나오시라고 할머님께 기별이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잔칫집에 가서 떡 하나 얻어먹는다는것은 지금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홍콩미식성(香港美食城)에 가서 800원짜리 랍스트 한 마리 대접받는 것보다 더 큰 유혹을 받게 되던 시절이였다. 물론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의 손을 떼여 놓으면서 못 따라나서게 했다. 울고불고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때 흐느끼고 있는 나를 타이르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다. 너를 잔칫집에 데리고 가면 남들은 〈저 할멈은 얻어먹이려고 손자까지 데려왔다〉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거지로 보는것과 별 다를것 없다. 가난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겨낼수 있지만, 그러나 가난하다고 자기의 인격과 자존심마저 지킬줄 모른다면 너는 구제불능의 정신장애자로 될것이고 그럴수록 영원히 가난해질수밖에 없다.》

할머니 말씀의 참 뜻은 내가 초중 3학년 다닐 때, 할머니께서 세상 뜨시면서 더욱 절실히 깨달을수 있었다.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과 싸우면서 자랐지만, 자존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타이르고 걱정해주신 할머니의 사랑이 항상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자신으로 클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Yates)는 인간은 멀어져 가는 과거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내 가슴속에 찡하게 남아있는 그리운 할머니의 초상은 조금도 멀어져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리해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것이다. 언제나 엄격하면서도 때로는 너그러운 위대한 부성의 사랑과 자애로우면서 항상 강인한 모성의 사랑을 함께 읽을수 있는 초상이 바로 내 가슴에 새겨진 할머니의 초상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권위와 도덕적인 기준, 강한 자부심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 그리고 기본적인 가치 판단기준들이 해체되고 있는 가치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할머니의 초상은 나에게서 결코 멀어지지 않는다.

일년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음력으로 정월 초닷샛날이 아닌가 싶다. 장백에서 무한으로 출장간다는 낯모를 사람이 훈이라 하는 아홉살짜리 애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그 사람은 훈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청에서 살던 훈이 부모가 리혼하면서 훈이는 아버지쪽에, 훈이 형은 어머니쪽에 맡겨졌다. 그런데 훈이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훈이의 불행은 점점 켜져갔다. 계모는 훈이를 심하게 구타하고 학대했다. 어느날 아버지는 훈이를 데리고 장백현으로 갔다. 그리고 속임수를 써서 훈이를 어느 집에 떠맡기고 돌아갔다. 훈이는 낯선 집에 버려져 학대 받다가 장백 교회에 옮겨졌다. 그때 마침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어린이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몇 사람들과 함께 우리 대학 부설소학교에 조선족 기숙반을 설치했던 터라 잡지에서 그 소식을 접한 장백교회는 훈이를 나에게 보내 온 것이다. 내가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 낯선 사람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떠버렸다.

어린 훈이는 오랜 기차려행끝에 멀리 낯선 집에 맡겨졌다는 사실에도 별로 충격받은 기색이 없었다.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후 이집 저집 옮겨지는 일에 습관된듯 했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해버린 무감각 상태였다. 어린 훈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먼저 할머니를 생각해 보게 되였다. 할머니는 이런 일을 어떻게 처사하셨을가? 나는 훈이를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훈이의 죽어버린 기를 살려주고 자존심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에게 돈을 넉넉히 맡기면서 옷과 신발, 그리고 학용품에 이르기까지 주변 학생들이 갖고있는 그대로 훈이에게 사주라고 부탁했다. 어린 훈이 가슴속을 꽉 메우고 있는 자비심(自卑心)부터 말끔히 가셔버려야 했기때문이였다. 그러면서 담임선생님은 친어머니 못지 않게 훈이에게 사랑을 쏟아부었다. 두달정도 지나면서 훈이 얼굴에는 생기가 되살아났고 전에 볼수 없던 웃는 모습을 가끔 볼수 있게 되였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부모가 없는 시대를 살고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의 어린이들이 여기저기 버려지고 있기때문이다. 그것도 어린애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10년간 출산아 수가 4분의 3이 감소된 시점에 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높은 리혼률때문에 훈이와 같이 버려지는 애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돈벌이라는 미명아래 애들을 할아버지 할머니나 친척집에 맡겨놓고 한국으로 가거나 도시에 몰려가는 사람들도 갈수록 흔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부모가 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그것은 얼마나 많은 사랑이 몰부어져야 하는것이며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저 애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만 안겨주면 좋은 부모로 될수 있는것인 줄 알고 있는가 보다.

훈이를 학교에 입학시키는 동시에 나는 훈이 부모들을 찾기 위해 《길림신문》사 와 《연변일보》사 기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 학기가 지나 훈이 부모들을 가까스로 찾을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훈이의 보호자인 아버지는 기자의 련락을 받자마자 잠적해버렸고 기별을 받은 훈이 엄마는 지체 없이 북경으로 쫓아왔다. 두 아이를 키우기 힘들면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더니 어려워도 자기 힘으로 키우겠다면서 훈이를 데려갔다. 시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순박한 아줌마인 훈이 엄마와 엄마의 품에 안긴 기쁨에 도취 되여 엄마의 손을 꼭 쥐고 따라가고 있는 훈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할머니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20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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