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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처럼’
한영남
- 자 오랜만에 이렇게 상 둥글게 모였는데 우리 ‘그 날처럼’ 한잔 멋지게 해볼가요?
- 그 날이라니, 언제? 누구와 무슨 일 있었는데?
- 그런 건 몰라도 되니까… 그냥 그 날처럼…
- 그래요. 그럼 ‘그 날처럼’ 마십시다.
필회에 가서 젊은 패들이 모여앉은 상에서 내가 술 한잔 권하며 쓸데없는(?) 제스처를 섞으면 가장 센스 있게 맞장구를 쳐주는 친구가 바로 주향숙이다. 굳이 ‘그 날’이 언제냐고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은 대개 소설쟁이들이다.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에 더 관심이 많은 족속들이니깐.
그렇다고 시인들마다 다 알아먹는 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인들은 약간 뚱한 기색이다가 주향숙의 맞장구 또는 엉너리에 대뜸 그 내막(내막이랄 것도 없지만)을 간파해버리고는 곧 화제에 섞여주기도 한다. 끝까지 몰라버리는 시인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 술상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중심에는 주향숙이가 있었다.
내가 주향숙을 알게 된 것은 벌써 20년도 넘는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어느 한번 술상에서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받게 되였는데 아주 어린애를 글쎄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시인? 이렇게 어린 시인도 있었나? 그것도 녀류시인이?
그런데 이름을 들어보니 그 어린애(?)가 바로 주향숙이라는 것이였다.
주향숙이라면 내 또래 알 만한 시인들은 다 안다. ‘오월시사’였다가 나중에 ‘연길시청년시회’로 개명된 시모임의 초기 멤버였던 주향숙. 어린 나이에 비해 속 깊은 아픈 시를 곧잘 쏟아내서 선배들을 놀래웠던 주향숙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간히 놀랐고 약간은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되였고 그 무렵 자주 열리군 하던 어떤어떤 문필회에서도 단발머리의 주향숙이를 볼 수가 있었으며 게다가 한동네에 살고 있었던 연고로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아직 결혼 전이였고 다방에서 술을 오래 마셔도 괜찮을 때였다. 그 때 주향숙에 대한 인상이라면 녀자가 좀 너무 똑똑하다는 느낌이였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누구의 말이나 그 속뜻까지 헤아릴 줄 알았고 내색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같이 아파해줄 줄 아는 시인이였다.
그런 주향숙을 문인으로서 정식 대우해주기 시작한 것은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에 참가해서부터이다. 물을 보면 코등살을 찡그리며 소녀처럼 깔깔거리고 떨어지는 나무잎 하나를 주어들고도 쇠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그 모습에서 진정한 시인적인 모습을 엿본 까닭이리라. 술상에서만 만났던 향숙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고 그래서 그런 시들도 나올 수 있었구나 싶은 모습들이 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는 순간이였다.
그 때로부터 나는 주향숙을 문인대우 해주었다. 하긴 나보다 선배 격인데 내가 대우를 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등 떠밀려서 나 역시 차츰 평론이라는 장르를 터치하기 시작했고 잡지사에서 주향숙의 작품에 대한 평론글을 의뢰해오기 시작했다. 때론 시를, 때론 수필을.
그런 그녀의 시와 수필들을 비벼보면서 나는 거기에서 풍겨오는 상큼하면서도 풋풋한 인간향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제 주향숙이라는 이름은 내게 문우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같이 시상대에도 서보고 서로의 수상을 향해 박수도 보내주면서 우리는 문학이라는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기도 했다. 일년 가야 한두번이 될가 말가 하지만 만나면 언제나 아껴두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꺼내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향숙이의 글에서는 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강한 느낌으로 나를 울컥이게 만들기도 하고 순수 문학을 위한, 순수 예술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조차 엿보여서 그런 그녀의 작품을 보는 나는 은연중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알찬 문학행보에 감탄을 보내기도 했다.
잠간 그녀의 시 한수를 읊고 지나가자.
당신은 아름다운 한수의 시입니다
-주향숙
다정한 입김으로
씨앗 하나하나를 피워주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초록의 고운 숨결을 만져온
당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온 들판이 알아버리고
이 가을 금빛의 행복으로 설레입니다
이 땅의 아름다운 것들
그들 모두를 감동시킨
당신은 아름다운 한수의 시입니다
부모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는 시이다. 그리고 부모님한테서 받아안은 사랑에 늘 감사해할 줄 아는 향숙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이다. 내가 애송하는 그녀의 시 가운데 한수이기도 하다.
나는 주향숙이 우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시를 읽게 되면 그 가슴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과 고독이 고여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참말이지 그냥 짐작일 뿐이지 다는 알 수도 없고 알아버려서도 안되는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주향숙이라는 그릇은 겉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과도 통한다.
언젠가 향숙이는 나한테 롱반진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제가 이래 뵈도 참 못된 녀자랍니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리는듯하다. 못되다는 것을 내 식으로 풀이하면 못돼먹은 나쁜 녀자가 아니라 당차고 꼼꼼하며 추호도 곁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향숙이는 그런 녀류시인이다.
상큼하게 찡그려 웃을 줄 아는 조용히 휘여든 코마루를 가지고 있고 타인의 아픈 사정을 들어줄 줄 아는 하얀 귀를 가지고 있으며 눈물 그렁이는 사연에 부드럽게 공감하는 사슴의 그것 같이 섬세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이의 한마디 말에 오래오래 상처를 받거나 두고두고 환희를 느낄 줄 아는 그런 빛나는 가슴의 소유자인 주향숙, 늘 아줌마라고 자조하지만 아직도 유리구슬처럼 부서지기 십상인 여린 심성을 가진 주향숙, 그녀의 좋은 시를 얼른 만났으면 좋겠다.
향숙아, 부탁한다. 좋은 시와 수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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