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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족의 사회문화 현실 진단
2008년 10월 19일 10시 36분  조회:3914  추천:61  작성자: 곽승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3. 사회문화적 측면


0. 인구감소 문제

중국은 급격한 인구감소 문제로 새로운 고민에 쌓여있다. 1970년대 이후 인구의 과잉증가를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인 산아제한정책을 취해왔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는 부메랑이 되어 급격한 인구감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에 따른 사회경제적 환경변화가 가져온 결과이다.

조선족사회 역시 이러한 현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인구감소의 속도와 내용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족의 급격한 인구감소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광복 무렵 중국동북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약 2백16만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 2천5백만 명의 10%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그러나 일제의 항복 이후 절반 정도가 귀국하고 1940년대 말 중국거주 조선인은 대략 1백11만 명 정도로 추정됐다.(이재달, 2004) 연변지역에도 70만 여명이 살았으나 수십만 명이 한반도로 귀국하였다. 그 결과 조선족자치구가 수립된 1952년 연변지역의 조선족인구는 약 53만 명으로 자치구 전체 인구의 62퍼센트를 차지했다.

이후 조선족 인구는 점점 증가하여 1987년에는 80만 명을 돌파하였다. 호구조사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았던 해는 1995년으로 86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04년에는 82만 여명으로 줄었다.

전체 조선족인구 수는 1995년 이후 감소하였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내 조선족 비율은 1952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조선족 인구증가에 비해 한족 등 타민족의 유입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1952년 62퍼센트에서 1975년에 40.18퍼센트로, 1995년에 38.55퍼센트로, 그리고 2004년에 37.68퍼센트로 낮아졌다. 길림성 인구 및 계획생육심사조가 조사한 한 통계에 따르면 2007년 9월 현재 조선족자치주 인구는 2백23만 3천1백44명이고 조선족은 82만6백92명으로 전체인구의 36.75%를 기록했다. 37%대가 깨진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인구감소 추세는 중국 내 조선족 인구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한중수교이전인 1990년 중국 제4차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조선족인구는 2백9만7천,9백2명이었다. 그러나 2007년 2월 중국 소수민족 인구통계는 조선족인구를 17만7천여 명이 줄어든 1백92만5백97명으로 기록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지만 주된 이유는 조선족의 출생률이 낮은 때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통계연감에 따르면 1990년 연변 조선족의 출생인구는 1만1천6백여 명으로 출생률이 13.83퍼센트였으나 2003년에는 2천9백여 명으로 3.53퍼센트에 불과했다. 자연출생인구와 사망자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인구자연증가율은 1996년부터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출생률이 낮은 이유는 조선족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중국당국이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의 일환으로 아이를 2명까지 낳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여성들은 대부분 한명만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문제를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경제력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중국사회의 풍조에 따라 경제적 여건을 따져 아이 낳는 것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임여성들의 해외로의 혼인이주 증가도 인구감소의 주된 원인의 하나이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한국으로 혼인이주를 떠났다. 2006년 6월 흑룡강신문이 중국 관련부서의 통계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5년 한해 동안 한국남성과 결혼한 중국여성은 2만6백35명에 이른다. 한국남성과 외국인 여성 간 전체 결혼건수의 66퍼센트에 해당한다. 물론 대부분이 조선족여성이다. 1990년부터 2005년 4월까지 한국으로 혼인이주한 조선족여성은 무려 7만여 명이 넘는다. 가임여성의 해외 혼인이주가 늘어남에 따라 연변에는 장가를 가지 못한 조선족 노총각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변 조선족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인구감소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연변 조선족동포들 중에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국열풍의 과실을 맛보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쪽에서는 충만한 과실을 맛보며 흥청망청 낭비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 빈곤인구의 58퍼센트에 이르는 14만2천6백82명이 조선족동포이다. 이는 연변의 전체 조선족의 17.39퍼센트나 되는 수치이다.

조선족동포들이 혼인을 위해서든 돈을 벌기 위해서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자본주의화 된 사회에서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로서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1970년대 말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취한 이후 1천8백만여 명의 중국인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세계 1백50여개국가로 떠났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 손쉽게 중국인을 만날 수 있는 이유이다. 또 한족 자본가나 농민들이 투자할 곳을 찾아 또는 일거리를 찾아 연변을 찾는 것 역시 자연스런 현상이다. 인구 13억의 중국에서 약 2억여 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는 통계가 이를 반증한다. 인구이동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수요가 있는 한 이를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서 조선족 인구비율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계획과 2010년 전망계획에 따르면 두만강 하류지역의 개발과 관련해 연변지역 인구는 2010년에 250만 명, 2020년에 280만 명, 2050년에 380만 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조선족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인구증가는 한족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조선족 자치주에서 조선족 인구비율은 2010년에 대략 25%, 2020년에 20%, 2050년에 15%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조룡호·박문일, 1997)

0. 사회적  일탈  문제

조선족사회는 지금 너무 많은 상처로 신음하고 있다. 당장은 상처가 눈에 띄지 않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얼마나 중병인지 모르고 희희낙락하고 있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만큼 심각하다. 그 심각성을 반영하듯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조선족사회의 중병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한 동포들의 사회적 일탈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사회적 일탈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하나는 청소년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가정문제이다. 두 가지 문제는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부부 또는 부모의 노동 이주와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양자 간에는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연변대학 채미화 교수와 김선화 전임연구원은 2007년 11월 2일 이화여대대학이 부설 한국여성연구원 설립 3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연변 조선족사회가 코리안드림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앓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채미화‧김선화, 2007) 특히 이 논문은 부모가 돈을 벌러 외지로 나감에 따라 자녀들과 격리됨으로써 청소년들의 일탈이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발표한 논문 “재한 중국조선족 이주 노동여성의 자녀 조사연구”에 따르면 조사대상 학생들의 부모 중 한명이상이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난 결손가정 자녀가 무려 38.68%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학습능력 저하는 물론 갖가지 탈선의 유혹에 노출되어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돈과 가정을 맞바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일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나가 청소년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데 따른 문제와 연변의 교육환경 문제가 그것이다. 두 가지 문제 모두 중요하지만 전자의 경우 훨씬 심각하다. 채미화교수팀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결손가정 자녀가 무려 38.68%에 이른 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출국한 것이 전체 조사대상 학생의 26.18%에 이르러 조선족 학생 4명중 한명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 이들 결손가정 청소년은 대부분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져 양육된다. 이외에 이모나 고모에게 맡겨진 경우도 있다.

결손가정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동안 부모와 아이가 상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은 방황하게 되고 일탈의 과정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자녀들과 떨어져 있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비교적 넉넉하게 용돈을 주게 되는데 이 또한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탈선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정문제는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등 외지로 나가는 경우 흔히 발생한다. 이 보다 전 단계로 돈을 벌러 가기 위해 가정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즉 돈에 대한 가치를 크게 둠에 따라 가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돈을 벌려는 동기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경우 돈을 벌러 간 사람의 일탈과 함께 현지에서 돈을 쓰는 사람의 일탈 두 가지 경우가 다 문제이다. 심각한 것은 어느 경우에도 가정해체로 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조선족동포들의 이혼율은 30%선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사회의 이혼율은 이미 1990년대 초에도 한족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당시 연길시 이혼자 가운데 조선족이 72.4%, 한족이 25.5%, 기타 민족이 2.1%였다.(박민자, 2000) 인구구성 비율로 따지더라도 조선족의 이혼율이 현저히 높다.
 
0. 민족교육 문제

중국이 소수민족정책 차원에서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선양함에 따라 소수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언어로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해방이후 60여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한국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소련권의 고려인들과 달리 우리의 말과 글을 오롯이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민족교육을 통해 조선족은 한족을 포함한 여타 민족에 비해 문화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으며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소통의 시대를 맞아 한국과의 새로운 관계맺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출생률 감소현상 및 조선족 동포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인식변화 등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의 민족교육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있다. 학령아동의 급격한 감소와 함께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용이하다는 이유로 조선족동포들 가운데 자녀를 한족학교에 보내려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듬에 따라 조선족학교는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농촌지역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연변지역 소‧중학교 수의 변화추이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박금해, 2001) 1989년과 1999년 사이 농촌의 소‧중학교 수의 변화추이를 보면, 소학교는 188개교에서 43개교로 무려 1/4 이하로 줄었으며 중학교는 52개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흑룡강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에 소학교 382개, 중학교 77개였지만 1997년에는 소학교 51개, 중학교 15개로 대폭 줄었다.

농촌지역의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소학교부터 객지로 나가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기거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도 하지만 그중에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다. 변화된 상황에서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족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증가하는 것은 자식들이 중국의 주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라는데서 비롯된다. 학부모들이 민족의식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학교에 다녀서는 한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어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연변에서는 희한한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아빠는 한국말로 아이는 중국말로, 그리고 엄마는 한국말과 중국말을 번갈아 사용하는 광경이다. 아빠는 중국말이 서툴고 아이는 한국말이 서툴어 엄마가 중간에서 통역 아닌 통역을 하는 셈이다.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현상은 지식인사회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0. 정체성 문제

해외이민자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국가의식과 민족의식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보통이다. 국가의식은 스스로를 어느 나라 국민으로 간주하느냐의 문제이고 민족의식은 자신의 종족적 내지 문화적 귀속의식을 뜻한다.(권태환, 2005)

개인의 자아의식 또는 정체성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집단 내 상호작용과 집단 간 상호작용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성원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대상 집단은 어떻게 정의하고 그 집단에 대해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상황적 인지는 어떠한가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인식은 결정된다.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은 여러 번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단순한 월경민에 불과했으며,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데 이어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연변지역에 살던 조선인은 중국인 또는 만주인과도 구분되었다. 조선인의 신분은 형식적으로 일본인과 만주인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나 실제로는 양쪽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계인의 처지였다.

조선조 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친 기간에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은 대부분 스스로 영주 이동자로 규정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이주한,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관념적으로 ‘디아스포라 정체성’ 또는 ‘나그네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발생한 귀환이동 물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2백16만여 명으로 추산되던 조선인이 1940년대 말 절반 가까운 1백11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연변에 정착해 조선족으로 불리며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위상이 바뀌면서 점차 중국국민 의식이 자리잡아갔다. 이렇게 된 데는 한반도의 정치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중국 형성 직후 실시된 토지개혁과 이를 통한 토지분배였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로서는 중국공산당이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 주는 것에 대해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조선족 정체성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조국과 모국의 분리이다. 이는 전통적인 혼인의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족은 자기집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중국은 그들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이를 혼인에 비유하면 중국은 시집이고 조선은 친정에 해당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아버지집이 되고 조선은 어머니집이다.

조선족의 중국국민으로서 국가의식은 다른 해외한인들의 그것보다도 강하다. 그 배경에는 이주 1세대들의 신중국에 대한 고마움이 저변에 깔려있다.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조선족이 함께 집거하며 민족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문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민족의식과 함께 국가의식을 병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다.

조선족의 민족의식을 규정하는 모국은 한반도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해방 후 남과 북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이해관계도 완전히 달랐다. 따라서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북한(조선)을 모국으로 인식해 왔다. 지금도 적지 않은 조선족동포들이 북한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이같은 역사의 결과이다.

탈냉전적 상황에서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며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에 대해 모국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경제건설에 매진하던 중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전된 남한은 집나간 아버지가 떼돈을 벌어온 것과 같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상황은 많은 조선족동포들로 하여금 정체성 혼란을 겪게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새로운 관계맺기가 기대만큼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들은 한국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됐고 이로 말미암아 다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사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면서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보다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려 하고 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해 뒤늦게 중국의 소수민족 대열에 합류한 조선족동포들은 이중 또는 다중 정체성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에 더해 중국 국내정치상황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1960년대 중반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조선족동포들은 특별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족 최대 집거지인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피해가 더 컷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리고 한중수교로 조선족 동포와 한국국민 간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중국당국은 이 지역 동포들의 사회적 동요를 의식해 동포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왔다. 이런 점에서 연변지역 밖에 산재해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연변지역 동포들에 대해 “연변사람들은 눈치만 보고, 믿을 수 없다”고 평가하는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0. 가치관 문제

50대 이상 중장년의 조선족은 대부분 혼인상대로 조선족을 선택했다. 한족 등 다른 민족과의 혼인은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조선족동포들이 집거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기 때문에 굳이 다른 민족과 결혼을 할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이런 공동체생활로 인해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게 형성된 반면 타민족과의 언어소통은 원활하지 못했는데 이런 점도 다른 민족과의 통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선 조선족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결혼도 하지 못하고 늙어가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같은 민족만을 결혼대상으로 고집할만한 여유가 없다. 따라서 요즘은 조선족마을에서 한족며느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물론 나이든 부모들도 한족처녀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 개혁개방과 문명화로 민족 간 문화적 교류가 커졌을 뿐 아니라 조선족사회에서 한족 등 타민족과의 접촉이 늘어나게 됨에 따라 이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 졌다. 특히 중국의 급격한 경제발전을 지켜보면서 조선족동포들이 한족사회를 재평가하게 된 것도 결혼관의 변화를 촉발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결혼관의 이 같은 변화는 민족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민족에 대한 가치 보다 현실적 필요를 더 중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중국사회에 동화되는데 더 용이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족은 90여개 민족이 동화되어 이루어졌다는 연구결과는 조선족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낳는다. 중국 과학원 유전연구소 한 연구원은 한족의 70-80%는 원래 한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 구성원들이 동화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조선족 역시 동화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 이런 현상이 심화될 경우 개개인의 미래는 있겠지만 조선족의 미래는 없다. 조선족의 미래가 없으면 동북아시아의 미래도 없다. 조선족을 연변과 함께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중국지향의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한민족 지향의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동북아시아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심적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글싣는 순서 
1. 정치적 측면
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
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
0. 조선족자치주의 미래
2. 경제적 측면
0. 연변경제 현실
- 개혁개방과 연변
- 산업별 동향
- 연변경제와 한국
- 연변경제의 미래
0. 주민생활과 소비
- 주민생활 수준
- 조선족의 소비행태
0. 연변경제의 문제점
- 지역 및 계층 간 부의 불균형
- 관광 및 소비향락 산업 편향성
- 한국 의존 심화
3. 사회문화적 측면
0. 인구 문제
0. 사회적 일탈 문제
0. 민족교육 문제
0. 정체성 문제
0. 가치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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