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몽이란 브리태니커에 의하면 대부분의 고대문명에서 신접(神接) 행위로 간주되였고 오늘날에도 일부민간에서 전통풍습을 계승하여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는 꿈, 점(占)을 말한다. 해몽이 고도로 발달했던 고대의 희랍, 애급, 바빌론에서는 꿈해석이 백사(百事)에 선행하는 중대사였다. 꿈은 신이나 사자(死者)가 흔히 경고의 뜻으로 령혼에게 전하는 메시지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있었다고 한다.
꿈해석이라면 무엇보다 프로이드의《꿈의 해석》을 떠올리게 되는데 졸문에서는 다른 얘기가 되겠다. 즉 우리 말 속담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미리부터 제멋대로 상상하고 기대한다는 뜻을 가진 “꿈도 꾸기전에 꿈해몽”이라는 말이나 좋고 나쁨은 풀이하기에 달렸다는 뜻으로서의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나 일은 어떻든간에 그것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마음을 기쁘게 할수도 있다거나 꿈은 아무렇게나 꾸어도 해몽만 잘하라는 의미로서의 “꿈은 잘못꾸어도 해몽이나 잘 하여라”는 속담들에 담긴 비유적의미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개라고나 할가,
우리 말에 “꿈보다 해몽이”에 대응되는 중국속어로는 “说得比唱得还好听”라는 말이 있는데 꿈보다 해몽이 좋을수밖에 없는것은 언짢은 일을 유리하게 둘러대여 해석함으로써 그렇게라도 요행심리를 정당화하거나 불길함에서 인기된 심리불안을 위안하려는 경우가 많기때문이다. 어쨋거나 꿈속에 꿈이라는 말처럼 꿈보다 해몽이 좋은것은 기실 꿈속에서 꿈을 꾸는것과 별로 다름이 없다.
가까운 실례를 든다면 고견이 있기로 비범한 어떤“전문가씨”들이 잘무너지는 대교나 백화청사처럼 앙숙인 이웃집도 갑자기 붕괴해버리는 환상을 전제로한 수다한 괴론들을 람발하여 가관이던데 어처구니없게 “흡(吸)”자에 매료되여 몽이야, 쓩이야 하며 부르고쓰니 백일몽이 야무진것인가? 그 해몽이 더 가관이라 해야 하는가?
개체간의 토론이나 쟁론같은데서는 감정, 자존심이 론리를 이기든 자기의 론리를 고집하기 위한 궤변이 판을치든 그에서 그치여 별문제가 아니겠지만 국제적이슈에 관한 담론이 그냥 한본새로 아전인수의 리기에 목을 맨다면 화자만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기사작성자나 그 나라 독자군의 불행이 아닐수 없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사실이 발생한것처럼, 사실인것처럼 고아대거나 대방의 의중을 잘모르면서 어림짐작하고 아전인수식으로 제좋은 생각을 굴리여 잔뜩 부풀려서 발표하는 언동은 추론이 궤론이 될수밖에 없다. 지금 어느 시대인가? 독자들속에 아두가 많지 않다. 자타에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자극적인 언론은 백해무익하다. 그런것을 모른다면 문풍이나 기교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철학의 부재일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는 자주적정신이 있어왔다. 목표성시대정신이 없이 혼돈에 빠져 우왕좌왕하며 허우적거리는 나라나 민족은 결코 번영을 이룩하지 못하였다는것을 력사가 잘 시사하고있다. 그 시대에 부응하는 민족정신을 내세우고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반드시 극복하고 성취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과제와 목표를 설정하고 민족의 공존을 확보하는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덕목이라할것이다. 주객과 본말이 전도되여있는 현실이야말 배달민족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야말 비극과 불행의 씨가 될것임은 자명하다. 그로써 배달민족에게는 해몽마저 불필요한 재난이라는것이 실증될것이다. 그리고 후회막급할 겨를도 없겠지만…
2. 동상이몽과 아전인수
동상이몽(同床异梦)이란 부부가 함께 한자리에서 같이 자면서도 감정이 불화한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애정이 없으면서도 실용주의와 공리주의 기초상에서 부부로 되였다면 더구나 서로 딴꿈을 꿀수밖에 없다. 그러니 동상이몽을 발칙하다고 탓할필 요도 없고 동상동몽이기를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상이몽”이란 말은 중국 남송때의 학자인 진량(陳亮)이 한“한침대에서 저마끔 다른 꿈을 꾸는것을 주공께서는 부디 따라배우지 마시옵소서. 공명까지 론할 필요야 있겠나이까?(同床各做梦,周公且不能学得,何必一一说到孔明哉!)”라는 말에서 비롯되고있다. 후에 단순히 부부간의 감정이화의 의미소를 벗어나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생각을 하는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쓰이게 되였다.
동상이몽의 근원은 아전인수에 있다. 아전인수란 제논에 물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만 리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하는것을 말한다. 살면서 우리들은 가능하다면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어떠한 문제에 대한 사안을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입맛과 리해타산에 맞춰 해석을 하려는 행위도 실질적으로는 아전인수이다.
한이불속에서 살을 섞으며 살면서도 동상이몽이 되면 바람직하지 않지만 부부라도 돌아누우면 남이라 하듯 남남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개개의 심장이 제심방에서 뛰고있는 생명이여서 평생, 언제나 동상동몽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록 일심동 체, 동심동덕, 동심협력, 동귀일체, 동고동락, 전심전의, 일편단심, 이심전심(以心传心) 등 아름다운 단어들이 많지만 그리되기를 바라는 념원에서 만들어진것이다.
동상이몽, 아전인수는 개체생명들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개체의 집합체인 국가간의 국제적동상이몽현상은 더구나 상식문제도 아니다. 당대에 명성도 뜨르르했던 영국수상 처칠은 국가와 국가사이에“영원한 벗이란 없고 오직 영원한 리익만 있다”고 단언하였다. 국제유희규칙에 계률이라 할만도 하다. 후에 그 말의 변종인지 영원한 벗이란 없고 영원한 원쑤도 없다는 세계적인 류행어도 생기였고 오직 영원한 국익만 있다고 말한다. 력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말이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오로지 국익을 위한 아전인수만 있을뿐이다. 그래서 지난날 원쑤가 벗이 되고 오늘날 벗이 래일의 적이 될수도 있다고 하지만 대양건너 미씨네가 사탕발린말로 “전략적동반자”“군사동맹”이니 하는 무슨 결약을 맺지만 내속은 어디까지나 우무룩한 아전인수의 능수이다. 결국 “리익동맹”혹은 “리익군체”로 결성되였다고 좋아하지만 단세포적인 발상에서 만들어진 림시방편일뿐인줄 알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큰 우산도 잔잔한 비는 말릴수 있어도 광풍이 휘몰아치면 쓸모없는것과 같다.
동상이몽이든 동상동몽이든 해석에 달릴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동상이몽은 리기의 터밭에서 익어간다. 리욕은 가장 직관적인 삶의 표현방식의 하나로서 도달점이 각각일수밖에 없는데 동상동몽이란 그만큼 희귀할수밖에 없다. 상생의 도는 역지사지와 아전인수의 차이에 있다, 하지만 오로지 내리익밖에 없는데 누가 상생의 도를 지킨단말인가!구동존이(求同存异)는 영원한 사회현상이고 동상이몽은 영원한 결과일뿐, 개체는 물론 국가지간도 그렇다. 세상에 동상동몽을 바라면 실망만 해석될것이다.
인간이 개체로 존재하는 한“동상이몽”자체가 허상이듯“동상동몽(同床同梦)”을 희망사항으로 보류해두는게 좋을듯싶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자가 타산하는바가 다르니 누군가 무시로 당신의 리익을 희생시키면서라도 아전인수할수 있다는것은 세상이 영원히 회의적이여서만도 아니다. 세상은 지독한 리기심으로 얽혀돈다는 이 시점에서 언제나 자신만을 믿어야 확실할것이다.
3. 말로 입히는 상처
말하는 사람은 무심코 한것이라도 듣는이는 화자의 말이나 태도에서 아물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악의적이 아닌 말인데로 왜 자칫 비난으로만 들릴가? 물론 남에게 상처를 주려고 작심하고 악담하는 자들도 많은데 아이러니컬한것은 그런 자들이 외려 남의 말에서 각별하게 상처를 잘 받는다는 사실이다. 결코 성품이 착하고 남을 잘 배려하는 덕성을 가져서도 아니고 남의 아픔과 불행을 진정 동정심해서도 아니다.
남에게 무작정 비뚤어진 소리를 하여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자들은 심리바탕에 누를길없는 렬등감이 있기때문이다. 렬등감은 누구누구보다도 못하다는 구체적인 대상에서 기인될수도 있고, 그냥 일반적기준에 비해 자신이 못하다는 콤플렉스일수도 있는데 구체적대상이 있을때는 렬등감은 더구나 미친다. 그런 고질적인 렬등감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아프지만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의식적으로는 잘 인정하지를 못한다.
남의 자존심은 도끼등으로 치면서도 제자존심은 바늘에 찔려도 아비규환을 짜내는데 쉽게 옮는 렬등감은 그 자신의 일이지만 남의 아픈곳을 찾아서 건드리는것으로 공연히 치솟는 분노를 무마하려하는갓은 어리석은 심태이다. 인격적으로 굳어져있는 렬등의식은 그리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비뚤어진 자존심과 감정때문에 제사 잘난척하는게 남새스러운 본틀이기때문이다.
보통 빈궁했던 자가 밥술이나 들게되면 공연히 요란하게 트림질하며 궁핍하였던 자신의 과거가 없었던듯이 자족에 그치지 않고 지금 어렵게 사는 사람을 보면 비웃고 꼬집으며 그로서 앙증맞은 심리평형을 찾으려한다. 이런 자들은 너무 천박하기에 내과거를 거울로 알고 인과관계를 생각할 량지가 없으며 그래서 배부르고 배고픈, 풍족과 궁핍의 변증관계에는 몰각일수밖에 없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라는 종교식설교가 있던지…이런자들은 똑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사건을 두고 무조건 부정적이다. 나는 똥을 싸도 문제가 아니고 남은 방귀를 뀌여도 동네방네 고아댄다. 그러나 어떠한 자세냐에 따라 량자의 결과는 완판 다르게 되는것은 불변의 진리인데도 말이다. 진실로 인격적인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객관사물을 객관적으로 투시하고 긍정할것은 긍정하는 객관적인 사유자세가 요청된다.
무작정 부정적인 색안경을 쓴 눈과 고개를 잔뜩 쳐드는 자세는 결국 자기를 왜소하게 만들고 우물안개구리로 만들어버린다. 적대적인 대방에게서도 우월한 점, 좋은 점을 보아내고 긍정할수 있다는것은 그만큼 밝은 마음의 눈과 인격력량을 가지고 있다는 표징이다. 늘 부정적인 시각자는 태생 사팔뜨기처럼 현실을 정시하지 못한다. 남의 좋은 점에는 코방귀만 뀌며 나쁜점은 만들어 내서라도 대방을 폄훼하려는 의식은 참으로 불쌍한 심태이기도 하다.
남의 장점을 보아내고 긍정하는 사람은 그런 자세때문에 차차 자기의 단점이 장점으로 바뀌게도 된다. 그리함으로써 그 장점을 따라배우게 되고 결국 그 장점이 생겨서 훌륭한 인간으로 거듭날수 있다. 남의 장점을 긍정할줄아는 사람이 진정 잘난사람이다. 부정적사유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못한다는것은 도리가 아니라 상식이다. 비뚤어진 시각과 리념은 자아도취에 빠져 우왕좌왕하게 할뿐이라는것은 상식이 아니라 도리이다. 적대자의 부족한것만 들추어내려하고 대방이 월등한 점이 많은데도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기죽은 마음을 추세운다. 그러나 분명 가련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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