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봉
http://www.zoglo.net/blog/zhufeng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0 ]

10    술을 알고 잘 마시자 댓글:  조회:4020  추천:277  2011-09-13
술을 알고 잘 마시자 주 봉   술, 그 이름에 얽힌 추억은 참 감미로왔다. 바로 내가 어릴 때 술찌끼 풍기는 냄새를 맡을 때마다 어쩌면 그리도 구수하고 싱그럽던지… 또 한번은 내가 발목을 상했을 때 옆집 아저씨가 불이 이는 소주를 손바닥에 자주 묻혀 상한 발목을 마사지하니 어쩌면 눈물겹던 그 동통과 부증까지 다 훌~ 경감됐던지… 술의 이런 매력으로 나는 그때 정말 신비한 마술의 세계에 흠뻑 빠진 격이였다.       기억도 새롭게 실상 지난 날 내가 술에 대한 느낌은 칸트(미국)의 “술은 마음을 열게 하는 도덕적 물질 이다.”는 론술에 힘 입어 종종 친구들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나눈 술에서 였다. 이를테면 속상하거나 스트레스 쌓일 때 서로의 믿음으로 마음을 터놓아 잠시 여유를 갖고 또 속세에도 벗어나 스트레스도 해소되여 그 무엇이 존재하는 촉매로 어쩌면 순진한 소녀의 랑만도 다 지녀봤던지? 바로 이런 술문화의 일조로 나의 청춘은 나래쳤으니 참말, 술의 례찬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었다.   세울은 흘러 몸과 맘도 다 개혁개방 물결속에서 출렁이던 1992년 봄날, 학교를 퇴직한 나는 야심차게 무역 상사를 꾸리고 한국대양회사가 흑룡강성내 복장과 일용품의 전매권을 대리 받았다. 이 별안간의 물망은 상사의 문쪽에 불이 날 지경인데 조, 한 상인들은 또 서로 내팔 끌어 음식점에 가는 붐을 일구며 복닥거렸다 ……    이런 초대연은 많은 경우에서 그들이 함께 베픈 성애술이여서, 그 술문화는 일견 사람을 사귀고 인연을 느리며 감성과 우정을 담아내는 그런 전달매체와 다양한 콘텐츠로 거개가 서로의 상업리익을 챙기는데 기인되 여 퍽 열기를 띄였다. 이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빈번하게도 그렇게도 많은 술을 마시기 시작 하였던것이다.   보라, 연회는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우선 주최자의 기발된 건배사에 따라 소주를 련거퍼 석잔을 “깐!깐!깐!” (干杯)하는 대작형식으로 시작했다. 다음은 위계순으로 각 자가 자신의 욕구를 곁붙혀 나와 각각 소 주 한잔씩 건배했는데 참 “취옹의 심사는 술에 있지 않다.”처럼 어떤이는 “한국에 보내 주세요.”란 청도 하였다.   그런데 술상의 생선머리가 나를 향했다고 글쎄 어미쪽 분과 막 건배시켰고 또 내가 술을 흘리고 남겼다며 의뭉스레 억지부려 두잔 더 벌주시켰다.이어서 수작형식과 획권(划拳)도 해 나는 또 여러잔의 술을 마셨는데 그때 나는 이미 취기로 머리가 띵 해 났다. 아무튼 강권해서라도 손님의 만취가 잘 된 접대라니 도정신 한 나도 시선과 파장몰아 그들에께도 술을 권했고 그들도 서로 뒤질세라 막 권커니작커니하며 술을 겨루어 벌컥벌컥 들이키고 더불어 신나게 획권도 했고 또 목청 돋우어 서로 다투며 세상일을 모르는 것 없이 다 론리하여 기고만장한 그 열광은 진작 폭주족들의 천국이였다. 그러다가도 누가 술을 회피하면 곧 왕따에 벌주주고 우격다짐으로 술을 강권했으며 또 누가 늦게 술자리에 오면 무조건 술 석잔을 추가시켰다.   이처럼 그윽한 술향기속에 막 무르익는 분위기를 참아 깰수 없어 나는 부득이 초반취기도 마다한 끼와 용기 로 계속 순배되는 포도주를 다 마셨고 맥주도 마구 건배했다.하여 사람들은 모두 “폭탄주”를 마셨으니 어찌 취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이런 술문화와 음주량 그리고 권주문화나 안주문화는 가히 세계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엔 또 우르르 노래방에 몰려 가 고성방가에 춤추고 다시 술을 마시며 밤을 패던 것이다. 허나, 숙취 된 사람도 있어 소식을 접한 집은 급히 자기 남편이나 부인들을 모셔갔고 나도 취한 채 먼저 자가용으로 집에 가서 끝내 토하고 열물까지 짜 냈다고 한다.   원래 우리 조선의 술문화는 술맛을 음미하여 마시며 풍류를 즐겼고 또 인생도 학문도 담론하던 그런 삶의 표 출이였다. 허나, 지금 이 후손(폭주족)들은 줄곧 “급히, 많이, 거듭”마시는 음주문화를 고취하다보니 진작 술에 다 “먹히워” 그 술 버릇도 너무 험하기로 참, 말이 아니라고 전해왔다.   .   보라, 그 중 한 분은 곤드레만드레 취해 거리에서 비츨대고 웃고 울다 쓰러져 자면서 대소변도 실금했다면, 또 다른 두 분은 광장에서 토하고 소피보고 욕질에 싸우다 경찰이 오니 대뜸 이완 돼 “워메이쭈이”(我没醉)란 아는 주정의 그런 인격과 덕행(德行)을 반사시켰다. 결국 술에 지친 그들은 모두 패출소에서 하루 더 자야했고 따라서 후에 또 따끈한 교육도 받고서야 집으로 돌아 갔다고 한다.   더욱힌 또 한 분은  택시덕에 집동네는 왔어도 마구 남의 집문을 두둘여 외려 나온 주인을 욕질 해 동네를 번졌고 또 제집에 가서는 처자를 때리고 가장집물을 마스는 등 상습적 비행이라, 정녕 도덕의 저선(底线)을 넘어 “110”에서까지 간섭됐으니 어찌 타민족들이 “조선족의 술 버릇은 참 나쁘다”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 인젠 더는 간과 못 할 이 술 과음과 강권에 나는 깊이 자성하며 그 후 초대연부턴 엄격히 금약을 세웠으며 또 음주의 례의와 시간까지 강조했기에 다시는 비일비재한 술 주정이 없게 되였던 것이다. 하긴 이렇게 계속3년을 술 선행 “거래법칙”따라 운행하다 보니 우선 내가 지나친 음주의 세례로 끝내 지방 간이 유발됐다. 이 간암 전 적신호에 나는 저으기 놀라 무조건 의사의 지시따라 아예 술, 담배를 끊고 치료와 양생을 거쳐 드디어 지방간을 치유 할 수가 있었지만 불혹지년인 내 두 동생은 모두 폭주로 숨지고 말았다...... 글쎄, 큰 동생이 취중운전에 사고를 쳐 숨진 원통한 일에서도 교훈이 이만 저만 아닌데, 아니 막내 동생은 이미 알콜중독에 걸렸으면 응당 참답게 계속 단주하고 치료를 잘 받아야 하겠는데, 젠장 금단현상이 일었다고 어쩌면 제 자신이 죽을것도 모르고 다시 술을 퍼 마신단 말이겠는가? 그러니 심장마비로 급사 할 수 밖에 더 없지, 또 무엇 이곘는가? 그래서 “악마가 사람을 찿아 다니기에 바쁠 때에는 그의 대리로 술을 보낸다.”(프랑스 격언)고 동생들은 아마 이러하여 의사의 충고나 나의 제지도 마다하고 곧 잘 시도 때도 모르고 술을 물처럼 켜 마신것이 아니였겠는가? 바로 이런 무지 막지로 나는 얼마나 비분에 찬 눈물을 흘렸던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인젠 단주했고 또 이렇게 설상가상으로 두 동생도 폭주로 잃은데 반해 금후엔 혹 술로 인한 폐단이나 사고를 더는 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웬걸2000년 7월, 나는 또 술로 인해 하마터면 일본 상인까지 죽일 뻔했다. 즉 상사는 “96 야생표고계약”으로 나는 매년 7, 8월이면 날마다 중어가 류창한 일본상인을 앞세우고 곧 잘 동녕, 동경성일대를 누비며 각 팀에서 수구 해 놓은 포동포동한 야생표고버섯을 검수하고 포장하여 당날로 목단강공항에서 직접 일본에 운송시켰다.   그러던 어느 점심엔 일부 조선족일꾼들이 약속을 어기고 몰래 소주를 갖고 와서 어리석게도 글쎄 일본로무로 갈 일념에 일본상인과 진작 섣부른 “폭주외교”를 하다 보니 그만 인사불성되게 한 것이였다.이 파격적인 소식에 달려 온 나는 너무 뜬금만없어 당시 한창 주정부리는 조선족일꾼들은 언제 돌볼 겨를 없이 다른 사람들께 맡기 고 우선 졸도한 일본상인을 급히 동녕현인민병원에 호송해 링게르꼽고 구급,치료하여 겨우 그를 살려 내고서야 나는 비로소 안도히 쉼 쉴수 있었다. 참, 지금도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지 신경이 막 곤두 서는 것이였다. “술은 인격을 비춰주는 거울이다.”는 아르케시우스(그리스)의 말처럼 이같이 과분한 음주는 남도 해쳤다면 또 나 자신은 리성을 잃고 술 주정으로 사회적불화나 사고와 가정폭력을 야기시켜 조선족의 낯도 깎았고 또 건강 을 해쳐 질병과 로화에 목숨마져 빼앗아 정녕 친인들 가슴속에 뜨거운 눈물만 남겨 주었던 것이다.   실상 음주폐단은 술 자체보다 어찌 술 마시는 사람나름에 기인되지 않았던가? 때문에 이는 어디까지나 모든 국민의 소질, 도덕적 힘과 지적수준의 향상을 우선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이다. 오직 이런 선행만이 궁극적으로 세계인이 괄목하는 문명하고도 건전한 음주문화와 술문화가 확립 될 수 있음을 필자는 재삼 강조하고 싶다.   이상 사람따라 술의 리병과 량면적문화에 제한 료해와 인식의 차이는 너무도 컷고 또한 그 음주의 목적, 효 과나 영향도 참, 얼마나 달랐던지 모른다. 때문에 술을 좀 더 깊이 알고 잘 마시기 위해 현대의학과학은 또 이른바 “알콜은 인간을 대상으로 발암성이 확인된 물질로 규정했다”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달린 국제암 연구소 (IARC)는 일찍 1998년에 이미 공포한 바 있었다. 또 2011년 1월 15일 흑룡강신문도 “모든 술은 발암물질이다. 소주, 양주, 맥주,몸에 좋다는 와인, 막걸리 가릴것 없이 술속의 알콜은 인간에게 암을 일으 킨다.”는 정설을 파급했다. 하다면 이는 어찌 생명을 아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께 내린 “금주령”이 아니며 또 음주는 어찌 만성적 자살도 아니겠는가?   예서 많은 친구들은 내가 이미 술을 끊어 건강과 삶의 가치 품격이 퍽 늘었다고 부러워하고 있다. 그래도 나 는 지난날 지나친 음주로 인해 자신의 몸에 이미 축적 된 알콜 총량이 꼭 시한폭탄과 같아 언제쯤 암병으로 터칠려는지? 하는 우려가 자주 반추되여 참, 은근히 근심 할 때도 많은 이 점만은 더는 숨길 수 없는 것이였다. 하여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것은 바로 알콜 0흡수자인 이슬람교도들과 청소년들이다. 이로써 부 모나 선생님들도 청소년들께 “제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충고가 많게 된다. 허나, 바꾸어서 “술은 당대에서 마약다음 독성이 강한 약품이다.”,“술은 간암, 유방암 등 60여종 질병과 관련되고 또 이로하여 중국은 매년 무려 250만명이 사망된다(2008년 기준).”(WHO)는 사실과 과학적 근거도 겸해 강의하고 설득한다면 그 충고의 효험은 어찌 더 크지 않겠는가? “아니, 이눔이 자식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구  또 술을 먹었니?” “어쩌면 저눔의 술공장엔 불도 나질 않는다더니? ”   이는 술에 취하여 남의 등에 업혀 온 어린 손자를 보고 속상 해 외치는 한 할머니의 격한 하소연과 성토였다. . 이처럼 술 유혹에 잠시 도취된 청소년들은 진작 음지에서 엽기적으로 마신 술이라 어찌 그 맛과 향, 멋과 뜻을 알며 또 그 술 버릇도 어찌 기형적이 아니겠는가? 이 차세대에 제해 특히 학교는 “조선족수양”과나 과외활동을 통해 응당 옳바른 술 지식과 그 문화 및 술의 해악과 음주례의범절에까지 거쳐 차근차근 강의와 설득에 갈파 시키고 인도한다면 그들은 최종 술을 끊지 않아도 어릴적부터 좋은 술 버릇으로 벅찬 미래를 향할 것이다. 한편 술의 발암설은 오늘도 인정 사정없는 해일처럼 참, 많은 사람들을 놀래워 필자는 의학자문을 하였다. 즉 “술의 발암기전은 알콜의 대사물인 아세트알데히드에 기인되며 음주량과 발암빈도는 정비례된다.”,”알콜의 대 사는 대체로 “알콜-아세트알데히드(유독물)-아세트산(무독물)-이산화탄소,물-체외로 배설된다.” (IARC)고 했다. 이로서 적당한 음주는 아세트알데히드의 정상적 대사로 몸에 무리가 없으나 일단 과분한 음주는 알콜과 아세 트알데히드의 대사 한계로 그 대부분이 대사 못한 채 체내 각 장기에 머물며 취기를 준다. 만약 술 과음이 계속 잦으면 필경 체내에 루적되는 알콜과 아세트알데히드가 많아 곧 중독 혹은 암을 유발 시키게 된다. 또한  혈중 에 알콜농도가 단 0.4~0.6%가 되어도 내 동생처럼 치명적이 되는것만큼 응당 폭주를 피면하는데 반해 우선 음 주 전엔 빈속이 되지말며 일단 음주시는 꼭 적당히, 천천히와 안주를 많이 집는 것도 좋은 음주문화인 것이다.     특히 음주중 흡연은 그들 서로의 상승작용으로 발암확률이 음주 전 40배로 더 늘며, 또 음주 후 고성 방가는 성대에 무리를 주어 혹 파렬되면 곧 세포속에 머문 알콜과 접촉되여 쉽게 후두암을 유발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일견 해장술은 간에 부담을 더 가중하기에 응당 수분, 전해질과 당분을 잘 보충 하는 것만이 과학적인 것이다.   이같이 소주나 맥주로 쉽게 일으키는 폐단에 비해 와인은 너무도 훌륭하였다.비록 와인속엔 일정한 량의 알 콜도 있지만 특히 페놀성항산화제가 동시에 들어 있기에 일단 와인을 마신다고 해도 항암공능으로 생체가 섭취한 발암물질까지 다 대폭 해독하기에 일반적인 와인량을 마셔도 발암 위험은 없게 된다. 또 와인을 적당히 마시면 심혈관계질환, 심장병의 방지와 항산화, 항로쇄, 항우울증작용 및 각종 퇴행성 성인병에도 효과적이며 특 히는 과학적인 자양효능으로 와인은 “보건의 비타민”과 “생명의 천수(天水)”라고 그 찬사가 아낌없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세계 주류 술문화중 현대인들은 언녕 와인을 선호하여 음주관습을 변천시켰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도 건강하고도 과학적인 와인문화의 새 시대에 돌입하는 창의적 정신으로 술문화를 갱신하여 보자! 바로 그 진맛과 향기, 빛갈과 품위가 어우르는 서정시속에서 줄곧 우아하고도 진지한 교제로 마신 와인의 랑만으로 말이다. 하지만 당전 생활수준은 값진 외국와인보다 그래도 값싼 국산와인을 선택하거나 혹은 요리집에서 한컵, 한컵씩 사서 규칙적으로 마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지금 새롭게 와인문화시대를 맞는 것은 그 얼마나 벅차고 신성한지 모른다. 이는 필경 세계 주류 술문 화를 따르는 한낱 고상하고도 문명한 술문화의 영조- 바로 광영한 력사사명을 이끄는 기수로 우리 조선족 들에겐 필연코 획기적인 대사로 될 것이다! 실상 이런 술의 기원은 먼 옛날 원숭이가 빚은 술이 곧 잘 예화로 등장하게 된다.즉 그들이 나무가지 갈라진 곳이나 바위가 움푹 팬 곳에 저장 해 둔 과일에 공기중의 효모가 들어가 우발적으로 발효되여 알콜을 함유한 액체가 된 것을 먹어본 결과 그 맛이 좋았으므로 다시 의식적으로 만들어 갔을 것이란 설로 고고학은 술을 무려 20만년 력사를 어우르게 하였다. 바로 인류와 함께 탄생한 것과 다름 없는 술은 이미 상당히 문화적으로 술이 없이는 살수 없듯이 일반화와 세계화한 현실상태의 청신호로 되게 한 그 것이다. 하기에 조선시대나1920년 미국의 금주령은 이런 사회력사발전법칙에 부응 할 수 없고 또 자연법칙과 사람 들의 습관세력에도 순응되지 못한 그런 폐단이 너무도 커서 줄곧 사회안정과 생산력의 발전을 저애하여 필경 취소 될 수 밖에 더 없었다. 동시에 우리 중국정협위원들의 “금주법” 제안도 역시 통과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금주령은 필자처럼 나 개인 (혹은 소집단)은 쉬워도 다시 국가적행위와 수단으론 그처럼 많은 사람이나 집단,민족과 종교단체 등을 상대하고 보면 너무도 어렵고 또 실현 될 수도 없다는 섭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때문에 술공장엔 불이 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응당 계속 잘 생산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는 국민경제 GDP도 제고시켜 주는 “애국적행동”에서나 또한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그리고 하많은 굿일, 행사와 연회 등 습관과 전 통과 수요에서도 어쩌면 술은 특히나마 마셔 주어야 하는 그런 변증법도 시사하고 체현시켜 준 것일 것이다 . 그래도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중국표준화관리위원회에서는 2006년 10월 1일부터 중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주류에 제해 “과분한 음주는 건강에 해롭다.”, ”임신부와 아동은 음주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 표지를 꼭 부착 할 것을 의무화 했다.                                              바로 이런 경세(警世)적 규정은 필경 술은 안전한량이 없음을 재삼 제시한 것일 것이다. 때문에 술은 언제나 꼭 알고 잘 마셔야 랑만에 찬 내 건강 챙기고 또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 기여하게 끔, 정녕 부끄럼도 실례도 없는 그런 숭고한 약속이 될 것이다! 술, 그 이름에 얽힌 술문화는 이 시대 문명발전의 축사(缩写)다. 허나, 음주량은 이 문명발전을 대표하지 못 하며 또한 음주는 그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약속과 행위범주에 속하는 속성으로써 필시 법치를 떠날 수 없다. 때문에 금년 5월1일부터 중국에서도 취중운전을 형사상의 범죄로 취급하며 일단 형사처벌을 받은 공직인원은 그 직까지 박탈하게 되였다. 이런 특정적 대상에 관한 법치 외에도 필자는 우리 중국도 응당 캐나다나 미국처럼 목전엔 우선 사회적인 술 소비를 줄이는 규제부터 세워 아무사람(특히 임신부와 아동)이나 아무곳에서 마음대로 술을 살수 있고 또 아무 때나 아무데서 술을 마시는 것을 제한시키며 이 외 주류판매 경로제한, 주류광고 금지, 주세인상과 주정뱅이 단속 등 규정도 모두 다 정비하는 주법(酒法)을 제정 할 것을 특히 제의한다.   그렇다, 이는 당대 중국에서 과분한 음주를 통제하고 또 술 절제도 강화하는 한낱 중요한 혁신적 조취로써    어찌 획기적인데서 술문화의 창의적 갱신과 영조 및 조화사회 구축에도 그 이채를 돋구어 주지 않겠는가?                                                                           (2011년 6월 16일  북경에서)      * 본문은 컵 “건강한 술문화 만들기 작품공모”에 참가했던 원고작이다.                                                                         
9    조선족 간부대오의 건설에 제하여 댓글:  조회:4424  추천:367  2011-03-14
조선족 간부대오의 건설에 제하여 Ο 주 봉   나에겐 고향의 농촌에서 지부서기로 있는 한 망년지우(忘年之友)가 있는데 일전에 그가 전화로 전하는 말이 바로 얼마전 향민족간부 경선에서 그만 망신스럽게도 낙선되었다고 했다.그 원인을 듣고 추려보니 아니 그 무슨 견정하고도 정확한 정치방향과 사상이 결핍했다는 그런 큰 모자에서였는데 참,너무 파격적이고도 뜬금만 없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두 우리 조선족사회의 공성으로 된 문제들이였는데 바로 이는 지서로써 그래도 한국을 미화하고 선전했기에 촌민들은 자본주의 우월성을 고취하고 중국을 열애할수 없게 됐고 또한 몸은 비록 중국에 있어도 마음은 완전히 한국에가 있게 됐다는 그것이였다.더욱힌 두개문명 건설까지 빈약해 결국 촌민들은 뿔뿔이 한국이나 관내성시로 떠나가버리고 따라서 폐교되고 밭이 묵고 또 마을까지 황폐하게 한 그 “책임”이라고 꼬집어 말했다고 한다.   글쎄 경선도 경쟁도 모두 회피할수 없는 숙명이고 승패(胜败)는 전쟁의 상식이라 했지만 만약 이 향에 조선족간부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문제는 좀 달랐을 것이다.그 당시 이 조선족간부가 당연히 대뜸 내 친구를 두둔해 그 격돌적이고도 집요한 질문에 거쳐 해설하고 변호까지 해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이로써 내 친구는 조그마한 자존심이라도 찾고 또 우리 조선족사회도 타민족들의 앞에서 좀 더 광범한 요해를 시켜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이처럼 조선족사회는 지금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간부가 적고 또 바야흐로 위축되여 가고 있는 형편이다.내가 살던 목단강시만 보아도 조선족 간부가 시급은 원래부터 없고 국급간부가 이전의5명이던 것이 지금은 한명밖에 없으며 과급간부는 이전의 13명에서 지금은 그저 6명(그중 2명은 2선간부)밖에 없는 것이다.그리고 보도를 참작해도 지금 연변을 제외한 기타 동북3성의 조선족간부대오도 한창 위축되는 추세에 직면하고 있다고 했다.그렇다면 조선족간부대오의 이런 전통과 현실의 딜레마 상황은 어떻게 빚어졌고 이를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3년전 내가 목단강시에서 살 때 나의 옆집엔 시위 조직부에서 갖 퇴직한 처장 한분 살고 있었는데 한번은 내가 “왜서 조선족간부를 잘 발탁시켜 주지 않는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이는 숨길 문제도 아닌 공개비밀”이라고 하며 아주 꾸밈도 꾸김도 없이 대답을 주었다.그 줄거리를 엮어보면:   하나는 지금 적지 않은 조선족분들은 간부하기보다 한국에 가서 벌이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며 아예 간부를 포기하고 있다.그리고 어떤 분들은 조직체제를 개혁해 선거로 간부해야 제명분이라고 하며 지금같은 간부는 하고 싶지 않는다고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지금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조선족공무원들을 고찰해보면 그들중 일부 사람들은 한국바람에 휩싸여 사업에서 들뜨고 쩍하면 한국공무원들과 그 대우를 비하면서 깊이 사업심을 고착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또 어느 한분은 자못 준엄한 중한상무회담에서 통역 중책까지 감당했지만 오히려 적게는 한국측에 편향했고 좀 중하면 중국측 상황을 루설시켰으며 지어 어느 한분은 한국을 조국이라 갈파까지 했다고 한다.그리고 어떤 분들은 사회생활에서 나가서는 자신의 신분도 잃고 모임이나 굿일에서 술에 만취해 주정까지 부렸다면 또 어떤 분은 국제적 가짜결혼이나 밀입국을 조직하는데 참여했고 지어 한국비자수속에서 뒤문거래로 서류를 조작하고 보수까지 챙기는 일이 다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상 종종 표현들은 당전 조선족간부 발탁에 막상 그늘만 지워주어 자연히 조선족간부 배양을 위요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재삼 조사연구해야 했고 또 다시 고찰하고 고험까지 해야 하는 즉 이는 필경 그 확률이 낮을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떤 것이다.   이처럼 그가 시사한 사실과 의미는 오늘도 여전히 심장하기만 하였다.그런데 필자는 또 기억도 새롭게 지난 세기 60년대 불어댔던 조선바람에 그렇게 많은 조선족청년들이 조선으로 막 줄쳐 넘어간 일이 다시 새록새록 상기되였다.하긴 후에 그중 많은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 왔다지만 예서 우리 민족은 어찌하여 조선과 한국바람에 이같이 쉽게 우리 부형들이 중국에 와서 어렵게 정착한 그 보람을 다 저버리는지?또 오늘따라 왜서 이렇게 타민족과 상급조직의 인상을 막 흐려주고 있는지?참말 우리 조선족의 입지까지 막 흔들리는것 같아 더없이 통탄스럽고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보면 이는 모두다 우리 조선족사회 발전중의 필연이고 또 역사란 이 장장대하에서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이다.그러면서 예서 그 줄기찬 흐름만은 막을수 없듯이 우리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번영,그리고 모든 조선족들이 잘 살고 행복해지는 일은 누구도 막을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와 관련해 지금 조선족 집거지는 실상 대중의 지주(支柱)로 되는 각급 간부가 얼마나 급급히 수요되고 또 이 간부들의 역할에 기탁해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보라,지금 눈앞에 띄인 토지확보나 인구감소에 또 관내성시로 이주간 분들 자녀의 교육문제 등에 거쳐 어찌 간부가 나서지 않고서야 될 일이겠는가?주지하는바 예서 조선족간부는 쉽게 조선족사회의 실제에서 출발해 중앙정책을 관철 집행할 뿐만아니라 또 능란하게 상하좌우를 다 내통하는 즉 그 이해와 착안점이 뚜렷하고 더욱힌 성숙된 대책으로 령활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민족의 이익도 잘 수호할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오직 간부의 대두적 인솔과 역할이 있어야 조선족들의 치부가 쉽고 또한 한국에 가지 않고서도 당지에서 더 좋은 벌이를 할수 있는 것이다.실상 이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생성기제(生成机制)를 충분히 이용하고 발휘시킨 기초에서 다시 외부의 자금과 기술을 인입해 결합시킴으로써 마치 강소성 화서촌(华西村)처럼 새농촌 건설을 다그치는 그것이다.특히 농촌에 많은 기업을 들여 앉히여 농한기마다 농민들이 흥겹게 벌이를 할수 있게끔 하는 그것이다.   이렇듯 간부는 길잡이로  또한 민생을 챙기고 보듬하는 천사로써 조선족 대중들은 한국에 가서 벌이할 필요가 없게되고 더욱힌 농촌에서 쩍하면 술판에 마작판까지 벌려 허송세울을 보내던 그런 나날도 다시는 없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역사가 한개 시대를 평가함은 그가 비단 얼마나 풍부한 물질과 정신재부를 창조했는가를 볼 뿐만아니라 더욱힌 이 시대를 주도했던 그 어떤 인물들이 산생하였는가를 보게 된다.참,영웅도 거인도 눈에 띄이겠지만 이중에서 우수한 간부는 더욱 빼놓을수 없는 한 인물이다.때문에 시대에 걷맞고 또 과학적 민족가치관을 수립한 방대한 조선족간부대오의 건설은 나라에서 뿐만아니라 우리 조선족사회 발전에서도 얼마나 중요하고 또 획기적인 대사인지 모른다.   그런데 조선족간부대오의 건설은 그 어디까지나 상급 조직부문에서의 발탁한다기보다 이는 내가 스스로 자신을 발탁시킴에 일념할 일임을 익히 알아야 한다.따라서 이는 또한 전체 조선족사회가 궐기하여 모든 활력과 역동성을 불어넣어 더욱 많은 조선족지성인들이 발벗고 달려나와 간부하려고 나서게끔 해야 하는 일인것이다.그리고 재직중의 조선족간부들은 으례 더욱 열성적으로 조선족공무원들을 인도하고 배양하는 그런 도사로써 또 백락(伯乐)이 되여 많은 조선족간부를  상급조직에 추천하는 이 성스런 역사사명을 감당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요녕성 환인현은 조선족간부대오 건설에서 놀라운 예지력을 부여해 우리들에게 큰 계시와 본보기를 보여주었는데 지금 자못 물망에 오르고 있다(요녕신문 2011년 2월 25일).바로 이 현의 금년 음력설이퇴직간부련환회의에서는 조선족장로간부들이 당전 본현의 조선족간부대오가 위축되는 사실을 발언했는데 그 즉석에서 현위서기의 찬성과 지시까지 받았던 것이다.이로써 후날 환인현 조선족민간단체는 련명으로 조선족간부대오 건설의 의견서를 제출했고 동시에 현급과 과급 그리고 촌민위원회 성원 명단까지 다 작성하여 추천하였으며 또 대학생 촌관(村官)명액 분배에서도 조선족사회에 편리를 도모할 것까지 다 제기한 것으로써 그 귀추가 너무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번쩍번쩍 불꽃 튕기며 진격하는 새시대 세월속에서 광할한 960만km² 강토는 얼마나한 기회의 땅이랴!바라건데 우리의 더욱 많은 조선족지성인들이 오직 뛰면 된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용약 간부대오에 뛰여들어 창의적이고도 지향적인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주도하는 그런 당찬 모습을 과시해 보여줄 것임을 필자는 더없이 확신하고 또 기대하는 바이다.     2011년 3월 14일 북경에서
8    조선족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다그치자 (주봉) 댓글:  조회:6112  추천:424  2010-12-26
우리 조선족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다그치자   주  봉   보도에 따르면 지금 우리 조선족의 3분의 1의 인구가 도시화 물결에 말려 동북의 집거지에서 대거로 관내성시에 이주했다고 한다.그 거주는 대부분 산재해 살아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생존 방식으로 인생과 그 삶을 엮어 바야흐로 우리 조선족 역사의 또 한페이지를 펼쳐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나 보았던 이 부류의 많은 조선족인들은 달인같은 그 기술과 재간에 또 근면하고도 악전고투하는 소질이 있는 것으로서 그들은 비록 낯선 땅이라 하지만 창업의 불꽃을 튀었기에 그 먹고 사는 문제만은 없었다.그리고 어떤 이들은 성계나 국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특유한 다문화 우세를 발휘한 것으로서 참말 한국에 가기만 낫다고 하였다.하여 그들은 참말 지난 농경생애보다 퍽 환한 호연으로 삶을 영위하고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과 삶의 궤적에는 항상 조선족이란 그 이미지가 없어 참말 감미롭지 못한 일면에 또 텅비거나 혹은 그늘진 자리를 겸병케 해 마치 “타향살이”같은 그런 별도로 종종 침체 된 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하긴 그들은 나보다도 수천 수만배 더 되는 한족들의 포위속에서 살며 동북의 집거지와 달리 완전히 조선족의 전통적인 정체성이나 사회적 교류와 왕래 그리고 문화교육과 민속 등 방면에 거쳐 받아야 할 대우나 그 선천적 향수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때문에 이곳에서는 지금 참,많은 문제점들을 발로 시켜 뭇사람들의 깊은 사색을 자아내고 또 자연의 당전 우리 조선족 문제를 더없이 가장 돌출한 점으로 부각시켜 주고 있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그 주요 원인은 어디 있겠는가? 필자는 그래도 이 곳에서 우선 민족정책의 결여함에서부터 찾아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인정된다.   보라,그들은 비록 당지의 생산과 건설의 앞장에 서서 재부를 창조 해주는 그런 당당한 중국공민이였지만 불쌍하게도 사회정치적 대우를 받을 길 없었다.아니,글쎄 호구를 받아주지 않지,땅도 분배해주지 않지,더우긴,선거권과 피선거권도 없지,또 조선족 병원도 없고 의료보험에도 참가 할수 없지,그리고 민족간부의 제발이던가 공무원의 취직과 참군까지도 모두 될수 없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조선족 문화교육을 받을수 있는 문화관이나 도서관,그리고 학교도 건립해 주지 않고 또 연변위성방송마저 인입해 낙착시켜 주지 않는 것이다.그러면서도 참,웃기는 일은 글쎄 우리 조선족들의 어쩌다 각지에서 모여와서 모임을 가지거나 학교를 꾸려서 조선족명의로 이름을 짓는 것도 안된다고 한다.사실 동북 집거지에서는 언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 그러나 누가 공익사업에 돈을 많이 부조하면 인츰 표양에 편리를 주며 또 정협위원직까지 주고 있으니 참말이지.이 모든 것은 얼마나 불가사이한지 모른다.   이에 필자는 아래와 같이 대조되는 두가지 실례를 더 피력하련다. 하나는 우리 연변위성방송을 동북 각성시에서는 완전히 국가재정에서 부담하여 당지에 인입하고 낙착시켜 주었는데 관내 각 성시에서는 왜서 절대 안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전하는데 의하면 이에 청도시 한 관원은 “지금 청도시에 조선족 인구가 이미 십이삼만은 퍽 넘는데 인당 한 2,30원쯤 내고 나머지는 시에서 부담하면 안되겠는가?”하는 정도로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사실 낙착비가 많아서250만원인데 이 관원의 말대로 만약 우리 조선족들이 이 돈을 낸다면 시에서 무엇을 더 부담하려는지? 참 알고도 모를 일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조선족 중,소학교 (문화관,도서관이나 병원 등을 포괄)를 동북집거지에서는 완전히 국가에서 맡아 건립하고 운영해 주고 있지만 관내 각성시에선 왜서 안된다고 하면서 그만인지 모르겠다.하물며 국가의 의무교육법을 관철집행하는 오늘에도 말이다.이로서 불쌍한 우리 조선족 어린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혹은 울며 겨자먹기로 한족학교에로만 다녀야 하니 참,예로부터 “교육은 백년대계”이고 “교육만이 살 길”이라는 면에서 우리 민족의 장래가 얼마나 걱정되는지 모르겠다.   글쎄 어른들의 문제는 좀 참고 견디고 또 점차 해결을 받는다 하지만 자라는 어린 아이들은 참 한시가 급하다.때문에 목전 관내 성시에 우리 조선족 중,소학교 건립은 그 얼마나 급급히 해결되어야 할 중요하고도 초점적인 문제가 아니겠는가? 여기에 또 이런 실례가 있다.그것은 바로 내몽골에서는 유목민들이 어디로 옮겨가면 그들의 장막학교도 곧 잘 그곳으로 따라간다고 한다.또 하나는 중앙정부에서 북경등 성시에 서장과 신강소수민족학교나 반을 꾸려주고 있는 상황도 있지 않겠는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다른 민족이 할수 있는 일을 왜 우리 조선족들은 하지 못해야 하고 또 우린 왜서 이런 민족정책이나 해빛정책을 받을수 없다는 말인가?   이처럼 민족정책은 동북의 집거지에서는 그 당위성의 빛발을 냈어도 관내에서는 절대 아닌 것으로 추궁되고 있어 모든 것은 다 겉 맞는 것 없이 불가사이만 하고 또 오직 웃기는 일로 밖에 더 되지 않고 있다.다시 말해서 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산다고 하지만 관내성시로 진출한 우리 조선족들은 완전히 고아신세에 핍진한 처지에 떨어져 마치 대중화가정의 일원도 아닌 그런 외인과 소외 된 민족존재로만 되었으니 참말이지,그들은 얼마나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또 언제까지 이처럼 불쌍히 살아가야 하겠는가?   기억도 새롭게 우리는 지난 세월에서 위와 같은 문제와 더불어 조선족 정체성이나 전통과 현실의 딜레마 그리고 우리 말과 글,문화유산과 민속 등에 대한 수호 또한 집거지에서 토지의 확보 등에 거쳐 그렇게도 많은 문제들을 매체를 통해 다방면으로 피력하고 깊이 답론하였으며 또 힘껏 호소해 왔다.그것도 20여년,바로 강산도 두번 변한다는 세월속에서 말이다.그러나 이 제반문제들에 거쳐 지성인들의 그렇게 드높은 신념과 주장이나 또 생신한 업그레드와 그 주견은 모두 여론에서 여론에로만 고작 머물러 가고 또 모두 그것은 끝을 보지 못한 이 어찌 사실 아니였겠는가? 예로부터 “우는 아이 젖 좀 더 주라”고 하였는데 왜서 국가의 결책부분에서는 우리 조선족 문제에 거쳐 이렇게도 관심과 주목을 주지 못하고 있는지?참말이지,이것도 어찌 또 사실이 아닐수 있겠는가?   이런 현실을 맞받은 우리 조선족군체는 더없이 비감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만약 우리 조선족들께 국무원총리만 있어도 아니,그저 성장이나 시장쯤 급이 있는 어른들이 있었어도 혹은 단 국가교육부 부장이나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쯤만 있어도 이렇지 않았을 것이 아니였겠는가?하긴 이는 전적으로 해보는 말이겠지만 우리에겐 응당 있어야 할 조선족자치구가 없는 이것이나 또 문제를 들고 일어나 리드하는 조직이나 선줄꾼조차 없는 이것이야 말로 어찌 진말이라야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지금은 글로벌시대 새로운 도약이 나래치는 이 땅위에서 우리 조선족 군체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신속히 그 비전과 전략을 치밀하게 짜야 할 때다.그런데 어찌 이런 현실을 정시하는 것으로만 살아가야 하고 또 어찌 이렇게 계속 가만이만 있을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리드하고 또 어떻게 문제를 제출하여야 좋겠는가? 나의 견해는 이러하다.즉 우리 조선족민중자체의 여러 집단에서 함께 청원서를 중앙정부에 올리는 것이다.그러나 아직도 전통적으로 관본주의 유습이 심한 중국 특색의 메커니즘은 그래도 조직적이란 이 절차를 밟는 것이 더욱 유효하려니 말이다. 그렇다면 제안을 올릴수 있는 조선족기충조직이란 그 어떤 대상들이겠는가?그것을 예들면 바로 신문사,출판사,방송국,학교나 TV와 인터넷 등 매체 조직일 것이고 또 우리 조선족 간부가 있는 동북의 각성시 민족사무위원회가 될수 있다.더욱힌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와 그 산하주관부문이나 각 시,현 정부 차원이 될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에피소드로 한가지 메시지를 더 피로하련다.그것은 목전에 가장 유효하고도 빠른 도경인데 이는 바로 곧 닥쳐오는 춘 3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인 것이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에겐 많은 조선족 대표들이 있고 그들은 또 제안으로 우리 조선족의 모든 제반문제들을 중앙정부에 직접 제출할 수 있는 것이다.참말,이는 천재일우와 절호의 기회로 진정 우세를 발휘 할 타이밍이 아닐수 없다.또한 우리 조선족들을 대표한 매개 대표지성인들이 민족의 중임과 사명을  지고 그 기량과 충성을 다 바칠 수 있는 그런 고험기가 아닐수 없다.참말 천시,지리,인화가 다 조화되나니 우리는 다시 한번 대표들께 파이팅을 높이 외쳐 그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중국엔 “전국이 한 장기판” (全国一盘棋)이란 말이 있거늘,필자는 더없는 신심에 우리 조선족 문제들이 꼭 신속히 해결 될 것임을 굳게 믿는다.또 하루속히 제도상에서 보장받아 우리 조선족들의 집거지나 혹은 관내성시에서 안정되고 새롭게 발전해 살아가는 이 획기적인 기반과 시스템이 형성될 것도 더없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2010년 12월 26일 북경에서
7    댓글:  조회:3233  추천:181  2010-07-15
·수필· 물 지난 봄,목단강엔 느닷없이 솜같은 유기체가 륙속 나타나 목단강시는 발칵 뒤집협다.사람들은 아우성과 함께 장사진쳐 광천수를 사고 또 산으로 샘물 길러 욱-몰려갔고 그 정수기 구매도 참붐을 일으켰다.아울러 시와 성의 언론매체는 물론 중앙TV도 연일 소식과 그 처리상황을 보도했다. 이는 해림시 맥주공장에서 목단강지류인 해랑하에 술찌끼를 배설해 형성된 유기체다.다행히 국가환경보호총국에서 무독균류로 판명해 주었기에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하여 다시 수돗물을 마시고 또 격정됐던 그 감정도 무마됐던 것이다.   참말 사람은 물을 떠나 살수 없다.건강한 사람은 먹지 않아도 4주일간은 연명하지만 물만 끊으면 1주일간도 지탱치 못한다.또 좋은 물은 활성수소와 광물질 공급으로 노페물을 제거하여 사람들의 자연치유력과 생명력을 주지만 오염된 물은 생체내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해 DNA를 파괴하고 또 여러 효소의 기능저하를 불러 각종 질병과 로화를 가속화한다. 그런데 지구상 지금 물부족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실상 지구의 저수량은 14.5×109억㎥이지만 그중 바닷물이 97.2%나 점해 륙지물은 오직 2.8%만 차지한다. 예서 쉽게 이용되지 못하는 빙설、지하수、토양과 대기중의 물 및 오염된 물들을 제외하면 지금 인류가 이용하는 물은 이 2.8%중 단 0.01%도 안된다. 중국만 봐도 400억㎥/년 물이 부족해 2030년엔 2000억㎥/년 물부족이 예측된다.이에 정부차원에선 지하수와 빙설을 개발하고 장강물을 북으로 이끌어오며 또 바닷물의 담수화도 추진하고 있다. 물의 이런 심각성에 UN은 3월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정해 사람들께 《물쓰듯》하지 말고 꼭 아끼고 오염되지 않도록 호소하였다.   때문에 당전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유의 물자원보호와 오염원의 제거다.예서 건전지 하나가 600T의 물을 오염해 한 사람의 일생 음용수를 탕치니 말이다.실상 자신이 오염시킨 물을 마신다는 이 자살폭탄테레행위를 알아야 한다.수치와 위기감속에서,또 더없이 물의 공덕도 추소하면서…… 물(H2O),그것은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 결합물인 액체로써 순수한 상태에서 투명하고 아무 빛갈도 냄새도 맛도 없으나 생물의 생존엔 없어서는 안될 물질이다. 이에 노자(老子)는 물을 상선여수(上善如水)라며 또 《물은 착하여(善) 만물에 리로와도 뽐낼줄 모르니라》는 부쟁지덕(不争之德)까지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숭고한 사상과 도덕을 도야하고 정립하게끔 면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물은 매사에 어질고 착실하며 상대에 응해 고집하지 않아 둥근 대야에선 둥글며 네모난 어항에선 다시 네모나고 또 까스삐해는 그런 태아형상이다. 허나,물은 원칙성만 강해 수준기로 수평을 판단하고 또 해평면을 기준해 쵸몰랑마봉은 8848m,사해는 -392m로 그 고도를 준확히 측정하게 하였다.   일견 물은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고 또 음성산소립자로 공기도 청정하며 자연정화공능까지 있는데다 눈과 얼음마저 먼지와 병균을 다 삼켜버리니 이 세상을 일신시켜 주는데서 얼마나 기여가 큰가?   물은 또 부력에 떼목을 띄우고 기선도 운행시킨다.그런데 락수물도 댓돌을 뚫어 그 힘은 물방아를 돌리고 전기도 내는 등 순환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예서 러시아의 저명한 《보리쑈브안》의 구상도 보자.바로 베링그해협에서 미국 알라스카주의 슈어드반도와 러시아의 츄코트스끼반도 사이가 제일 좁아 그 거리가 85.5㎞이고 수심은 50m이내다. 만약 이곳에 땜을 쌓아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북빙양의 물을 500㎦/일씩 태평양에 퍼낸다면 반대쪽에선 필시 더 많은 량의 메히꼬난류가 흘러들 것이다. 이로써 년평균 0℃이하인 씨비리 겨울기온도 5~10℃나 더 높아져 많은 농토를 일구는 기적에,우리 곳과 미국,캐나다의 기온도 높아진다면 또 얼마나 굉장한 새 생태환경과 생태경제기능구도를 펼쳐주랴! 가장 주목됨은 물이 100℃에선 증기로 변해 스팀을 줄수 있고 0℃엔 눈과 얼음으로 전환돼 사람들이 스케이트나 스키를 탔다면 또 붙는 불도 끄고 다시 전기분해로 수소와 산소가 돼 그 용도와 덕망이 더 뛰여난 것이다. 이렇듯 희생도 초연한 물,정녕 세상에 둘도 없이 담백한 일생이리라!허나,물은 깊을 수록 소리없고 또 항시 낮은데로만 흘러가 자리잡고 그렇게 꼭 뭉쳐있지 않는가?   물의 가장 큰 공덕은 생물의 어머니로서 바다와 강물은 얼마나 많은 생물을 살리고 또 바닷물로 소금 내고,강물로 농사해 쌀을 내고 음뇨수로 줬던가?   만물과 인류문명도 물과 련관돼 보라.저 천자만태한 종류석과 땅을 차고 일떠선 고층건물을,또 물을 《폭풍우》、《노도한 파도》로 혁명의 도래,성세와 그 력량에 비유해 연설하는 정치가들과 물을 《무지개는 통일의 칠색다리》,《파나마운하로 태평양과 대서양이 포옹한다》로 상징해 그토록 고대한 민족의 단합과 나라의 통일,그리고 혈육의 상봉을 표방하는 문학가들을. 이에 즘해 필자는 만약 한방울의 물을 백성에 비하면 수적성천(水积成川)과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것은 필시 숙명적인 백성의 대통합을 상징하니 우리 중국과 고국은 어찌 통일되지 않겠는가!때문에 물이 제곬으로 흐르게 목전엔 쌍방의 대화,협력과 함께 응당 모든 백성들을 자유로이 래왕시켜야한다.바로 이런 백성들은 마치 물이 새 그릇에서 곧 새 형태를 이루듯이 으례 통합돼 무리없이 스스로 류례없는 호황의 새나라 운명을 모색할것이다. 필자는 이런 궁극적 이미지를 굳혀 또 한가지를 더 강조하고 싶다.즉 흐르는 강물은 줄기차다.허나,그강물을 꼭 막아 수위만 높이면 결국 범람해 사나운 홍수로 되지 않겠는가? 한편 그 어떤 홍수도 절대 물의 착오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처럼 자연의 섭리를 어긴 만행으로 혹은 강과 생태를 다스리지 않는 죄악에서 또는 급변하는 기후를 제때에 예측치 못한 그 우매와 무능에서일 것이다. 이런 인과보응은 필경 폭풍우가 닥치면 기필코 더욱 사나운 홍수가 터져  더럽고 낡은 그 세계까지 다 삼켜 버리지 않겠는가?  본 문은 2006년 7월 15일 길림신문에 발표됨
6    한국드라마 ‘대장금’을 보고서 댓글:  조회:3061  추천:182  2010-07-15
한국드라마 ‘대장금’을 보고서 주  봉   뜻깊은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와 세계반파쇼전쟁 승리 60주년을 맞은 이 나날,필자는 한국드라마 ‘대장금’을 보게 되여 무척 깊은 감명을 받고 오늘도 그 격동과 격정을 금치 못하며 가슴을 울렁이고 있다.   실상 무려 54집에 달하는 이 드라마를 전부 보았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은 아니였다. 실은 우리 이곳(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이 드라마를 TV‘금융증권’채널에서 보다 많은 광고를 보도록 방송돼 1회당 35분좌우로 줄여 그간 3차이상의 광고를 넣었으니 참 말이 아니었다.그래도 참고 빼놓지 않고 다 보아냈으니 이 어찌 자랑거리가 아니랴.한편 이렇게 말은 해도 그 설레이는 마음속에는 우리 이곳에서 남들보다 먼저 ‘대장금’을 방송한것과 ‘대장금’은 우리 민족의 역사, 겨레와 삶을 생동하게 보여준 것으로 자연스럽게 그 모든 잡념들이 일시에 려과되고마는 것이다.   일견 유감스러운 것은 필자는 오직 중국말로 번역된 ‘대장금’을 본 것으로 보다 투철하게 이 극을 다 보아냈다고 장담할수 없는 미심성이다.그러나 중국에서 중국말로 된 한국드라마라도 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다행스럽고 또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른다.이 기회에 필자는 재삼 중한수교에 환성 올리며 또 중한문화교류에서 번역사업을 종사하고 있는 분들이 이렇게 우수한 드라마를 중국에 인입한데 제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문화는 국경이 없다.오래전부터 신문과 방송에서 한국드라마 ‘대장금’의 한류(韓流)가 중국에 휩쓸려 들어올것이라는  것을 들었다. 한국에서 무려 58%란 TV시청률로 붐을 일으켰다니 그 인기는 이만저만 아닐 것으로 생각되였다. 한국 중앙일보의 6월 4일 실린 내용을 보니 ‘대장금’은 올해초 대만,홍콩지역에서 폭팔적인 인기를 얻으며 한류열풍을 가속화했다면,최근에는 이 여세를 몰아 말레이시아·베트남 등 동남아지역으로 확산됐다고 했다.또 지금은 열사의 땅 중동지역은 물론 유럽지역까지 수출되여 곧 방송 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바로 이런 생생한 소식을 첩첩히 접한 상황에서 자연히 ‘대장금’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다.드디어 7월 잡아 우리 이곳에서도 ‘대장금’을 방송했으니 그 기쁨과 희망은 말로만 표현할수 없었다.실상 재중국 우리 조선족은 이런 드라마로 한국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고 또 이런 기회를 타 그리운 고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자부심을 고취하며 부단히 새 삶을 다지고 있지 않겠는가? 필자 역시 이런 관심을 갖고 이 극의 모든 과정을 심절히 지켜보게 되였으며 또 이에 그 무슨 특징적인 생각들을 엮어서 좀 툭 털어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금치 못하면서 이 필을 들게 된것이다.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필자는 용기내여 삼가 이 글을 아직 ‘대장금’을 보지 못한 우리 조선족 겨레들에게 드려 참작하게 하고 품을 실토하는 바이다.   김영현 극본,이병훈 연출인 ‘대장금’은 16세기 이조 11대 중종황제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억울하게 모해당한 궁녀의 딸 서장금의 성장경력과 그 곡절 많은 삶을 아주 정채롭게 보여준 극이다.이외 극은 많은 역사재료로 그를 다시 재현시켰는데 시청자들은 또 그 옛날 궁중의 가효(佳肴)와 전통음식,조선시대 한의학의 지혜, 그리고 궁녀들의 희노애락도 다 보아내고 만끽할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극은 벌써 첫 대목에서부터 황후를 암살하는 장면이 펼쳐져 시청자들의 모든 초점을 모으게 되였다.하지만 이 갑자사화(甲子士禍) 사건에 참여한 한 무사군관이 다시 반대파들의 추격에 상처 입어 산굴에서 한 도사의 치료와 가르침을 받으므로써 극은 다시 신화처럼 전개된다.“자네의 운명은 꼭 세 여자와 상관 되나니 첫 여자는 이미 만나자 죽었고 둘째 여자는 자네가 비록 구해줬지만 다시 자네로 죽으며 셋째 여자는 충성하나 결국 그녀로 자네는 죽느리라”하며 도사는 글을 써 확 뿌려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그후 무사는 도사가 써준 ‘好’와 ‘順’자를 갖고 절에가 도승의 풀이를 받는데 好는 女와 子로 됐으니 필경 이는 꼭 여자 혹은 자녀와 관련되고,順은 내천(川)과 머리두(頭)옆의 頁(머리혈)로 됐으니 이는 내천옆에 머리를 대고 있는 여자라고 했다.   참,운명을 이길수 없는지 무사는 후날 과연 강가에서 물에 머리칼을 적셔 쓰러진 한 여인을 발견한다.인츰 구급하였는데 이녀가 바로 모해받은 궁녀 박명이다.결국 그들은 배필 맺고 심산산골에서 살게 된다.예서 태여난 딸 자식이 바로 이 극의 주인공 서장금이다.이로써 극은 정식으로 새 생명으로 인해 연극되는 것이다.   유수 같은 세월에 벌써 8살 된 장금이는 어느날 아버지와 함께 씨름구경을 갔다.하지만 한 장사가 여러 사람 재끼고 너무나도 희룽거려 장금의 아버지는 참다못해 씨름판에 선뜩 들어가 그를 재껴놓는다.이로써 그만 상대방과 말썽을 일으키고 지어 “쌍놈”이란 말까지 듣는다.열받은 어린 장금이가 “우리 아버지는 쌍놈이 아니라 군관이예요”라고 외쳐 그렇게 당부하고 당부했던 비밀신분을 탄로시키게 된다.마침 그자들은 지금 관가에서 황후를 살해한 자를 잡으려고 내붙인 포고문 그림에 있는 자가 바로 장금이의 아버지임을 간파하고 즉시 그를 관가로 잡아간다.또 이 소식을 접한 장금이 어머니는 급히 뒤쫓아가다 그만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우리의 주인공 장금이는 이렇게 일찍 부모를 다 잃고 오직 자신의 두 주먹으로 생존과 삶을 맞받아 지난한 길로 가다니,순간 시청자들은 이 어린아이가 불쌍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장금의 운명을 걱정해 다음 극 장면만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극에서 장금의 성장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눠본다면 첫단계는 그가 어선방(御膳房)에서 궁녀로 일하며 또 알찬 노력들여 훌륭한 요리사로 육성되지만 결국 모해받아 제주도로 유배해가 관비로 되는 것이다.두번째 단계는 제주도에서 수석의녀 장덕을 알게 되여 그에게서 의술을 배우고 또 시험 통과하고 다시 의녀로 입궁된다.예서 장금이는 비범한 의력과 고심한 노력으로 의술을 천착하고 또 큰 성과도 거두어 끝내 조선의 제일 여어의(女御醫)로 승직되고,중종황제는 그를 친히 ‘대장금’이라 임명해 높이 추대하였으며 또 정3품당상관(正三品堂上官)으로까지 봉책했던 것이다.마지막 단계는 장금이는 파란만장한 삶속에 쉼없이 달려온 세월을 다시 돌이켜보며 추호도 이 고위급관직과 그 후록에 미혹되지 않고 수구초심이라,그는 의연히 사직하고 고향으로 간다.그후 광활한 이 민간 무대에서 장금이는 만백성을 위하여 병을 봐주고 동시에 사랑하는 민정호씨와 함께 백성들이 누리는 그런 단순하고 단백한 생활로 행복과 자유 및 그 삶을 탐닉하며 살아나갔던 것이다.   참,옛이야기처럼 엮어져 방송된 ‘대장금’은 여기 우리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족들까지도 식후나 서로 만나는 기회면은 한낫 주요한 화제로 여기저기 짜깁기한 리듬에 열렬히 의논되였다.필자는 일련의 그 과정에 참여하고 또 잘 지켜본 것으로써 새삼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던 몇개 장면을 간단히 예를 더 들어 그 체득을 피력하며 다시 현실에도 비추어보고 또 더없이 우리 민족의 얼도 한층 더 추궁해 보려는 시도도 숨김없이 밝혀서 말하는 바이다.   하긴 인류역사는 선과 악의 투쟁을 종시 끊지 않았고 또 이런 투쟁을 통해 인류사회는 진보하고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대장금’에서도 마찬가지로 장금이를 위수로 하는 정의 세력과 최성금상궁을 대표로 하는 악인 세력들과의 교전은 끊지 않았고 그것은 또 주선률로 온 극의 장면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나 하나 펼쳐나갔던 것이다.과연 이 교전은 “니 죽고 내 사는” 판가름의 싸움이라,번마다 장금의 운명은 칠성판에 오르게 되나니,시청자들은 그 극속에 푹 빠져 마치 바늘 방석에 않은듯 긴장해 나고 또 가슴을 졸리고 숨도 몰아 쉬면서 지켜보았던 것이다.그러나 장금이는 이 교전에서 우세를 확보할수 있는 그런 자아까지 숨어있는 것으로써 결국 악인들의 방선은 돌파되고 시청자들은 비로써 숨을 활 내쉬며 또 절로 환성까지 올려 그 기쁨을 발로 했던 것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인들의 그 덕성은 지위와 재물에 대한 무치한 탐욕으로써 그 수단은 흑백을 전도하고 죄를 남에게 씌워 줄곧 자기가 발뺌함이 일수다,예하면 한상궁이 어선방최고상궁이 된 그때,황제는 풍한증으로 온천욕을 하고 점심에 오리고기까지 잘 들었었는데 불씨에 열이 나고 졸도 해 장면은 발칵 뒤집혀진다.이때 줄곧 황제를 맡아 치료하던 정윤수내의정은 황당한 나머지 자신의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급히 최상궁과 오겸호우의정과 결탁해 황제의 병근은 점심에 수라상에 올린 그 유황먹은 오리고기 탓이라고 왜곡해 결론짓게 한다.이로써 눈물겨운 장면이 펼쳐지는데 한상궁과 장금이는 억울하게 역모의 죄를 쓰고 제주도로 유배가고 또 도중에서 한상궁은 끝내 사망되고 마는 것이다.장금이는 너무도 원통해 끝없이 파도치는 남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흘러간 이 세월에 최상궁과 시합에서도 이긴 우수한 요리기능도 또 최고상궁이 되라던 어머님의 그 유언도 다 수포로 되어 가니 더없이 실낱 같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게 되였던 것이다.   막상 이렇게 인생의 갈림길에 선 장금이는 그래도 장덕의녀 덕으로 입궁하는 기회를 다시 쟁취하지 않았는가? 그즈음에 최성금이는 지조상궁이 됐고 최금영이는 어선방최고상궁으로 됐던 것이다.사실 최씨 가문은 지금 6대로 어선방과 거기의 물자구입을 공제하고 또 이 기회에 많이 탐오까지 하여 부자로 됐으니 그 세력은 막강하기로 상하에다 뻗혔다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그러나 장금의 재출연은 그들 모두의 가슴을 서늘케 했고 오직 다시 장금이를 해치는 길외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악인들을 전승하려면 우선 내가 강대해야 하고 또 내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총명한 장금이는 진작부터 현실을 직시하고 또 앞을 향해 아주 비범한 의력에 최선을 다 해 의술을 열마한 성과로 이 조건을 구비한다.가장 특출한 예는 장금이가 다른 의원들이 속수무책인 병들을 다 치료하여 낸 그것이다.즉 백성들의 전염병 근원 찾아 치료했고 또 선후로 태후,황후와 황제병도 다 치료한 것이다.특히 황제는 유황오리안 그때와 같은 병이라,그는 이미 장덕의녀와 황제병력서를 연구하고 또 그와 유사한 병도 치료하여 기초를 갖는다.그의 독창적 의술은 조사연구와 남다른 미각으로 온천물을 감정하여 황제의 병근을 찾아 그 치료를 성공시킨 것이다.실상 황제는 장기로 이런 미량의 비소가 들어있는 온천에서 목욕하고 계속 그 부근에서 오는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였다.이런 초인적 의술 성과는 또 악인들을 전승하는 돌파구로 되었으니 어찌 유황오리안은 오진과 치료사고임이 불보듯 하지 않았겠는가?그리고 유황먹은 오리고기는 선단 맞자비란 사실도 확인 되였으니 궁극적으로 한상궁의 죄는 자연히 씻어지게 되였던 것이다.   이 극에서 시청자들을 가장 죽여주는 장면은 장금이가 비밀리에 처단받게 되는 것이다.원인은 장금이가 유황오리안(案) 그 당시 황제의 병근을 밝히려고 황후의 허락으로 그의 병력서를 보련다는 핑계로 책고에 들아가 가만히 황제의 병력서를 꺼내 베낀 일이 탄로된 것이였다.그런데 TV에서 문뜩 장금의 화면이 또 나타났으니 참,얼마나 시청자들을 놀랍게 했던지 모른다.사실 이것은 황후가 지금 앓고 있는 황제의 병을 연구하도록 곧 상선대인과 민정호와 짜고 장금이를 비밀 지점에 둔 사안에서였다.   참,전화위복이라,예서 필자가 느낀 것은 장금의 높은 의술도 의술이겠지만 그의 용기와 진취심,더욱이는 그 사람됨됨이에서 오는 착한 성품,지어 보복심도 버린 그 흉금과 생애의 호연,따라서 오는 그토록 성실한 삶과 생존방식이 바로 그가 동료,상사와 황후 같은 귀인의 도움도 받도록 한것이다.또 이것은 악인들도 전승하는 그런 중요한 인소로 되여 돋보였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일견 장금의 사람됨됨이는 지어 그의 적수들인 최상궁과 내의정까지도 탄복했고 또 끝끝내 그들은 장금의 어머니를 모해한 것과 유황오리안 등 일련의 죄악을 다 실토 하였던 것이다.   ‘대장금’의 이런 극적 정절의 심화와 발전은 또 그 애정극도 돌출하게 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감치여 너무너무 감동적이였다.이것은 장금이와 민정호의 사랑은 사업에서나 또 생사도 같이 하는 그런 역경속에서 굳게 맺혀졌으니 이는 필경 현실에서도 본보기로 됨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대장금’은 이렇게 우리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과 깊은 인상을 주고 서서히 막을 내렸다.이런 성공은 필경 출중한 극본 연출과 그 연기 외 또 한국의 독특한 문화적 특점을 잘 그려낸것에서 온 것이다.예서 필자는 그중 도저히 잊기 힘든 주요 두 요소만은 꼭 제출해 재차 그 성공을 피력하고 싶다.   하나는 장금의 역을 맡은 이영애의 출중한 연기가 최상의 수준을 뽐낸 그것이다.때문에 그는 의례 한국MBC의 대상까지 받고 다시 최고 인기연예인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그가 한복을 입은 차림새와 그 연기는 너무너무 매력적이고도 인기적이여서 단연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웬만하면 한국에서는 그를 “산소같이 투명한 여자”라 칭송하고 대만에서는 남자들의“꿈속의 연인(夢中情人)”이라고 추대하랴! 또 많은 대만과 홍콩의 극성팬들은 한국으로 몰래가 장금의 발자취를 찾아 그 역사도 새김하고 또 그리운 영애씨도 만나보려고 불탄다고 까지 웨치랴! 참,대단하다! 다음으로 민정호역을 맡은 지진희의 연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실은 우리는 “쥴리엣의 남자”에서 그의 얼굴을 본 것으로 이번엔 너무 익숙한 편이였다.이 극에서 그는 충후한 성품으로 소리없이 장금이를 보살피고 지키며 또 그 깊은 사랑을 잘 표현한 것으로 시청자들의 절찬을 받았다.이로써 지진희는 연예사업에서의 새 고봉에 톺아오를수 있어 지난해 한국SBS연기대상까지 받았다고 한다.그외 최성금역을 맡은 양미경,최고상궁역을 맡은 홍미나,그리고 황제역을 맡은 임호 등의 연기도 너무 성공적이였다.바로 이렇게 인기있고 우수한 배우들로 구성된 ‘대장금’의 출연은 어찌 성공적이 아니랴 …   다음으로 음악의 성공적인 창작이다. ‘대장금’은 고전극이지만 그 음악의 풍격은 어디까지나 전통적인데서 벗어나 현대인들도 감상할수 있는 음악요소를 주제로 참 잘 조화시켰던 것이다.게다가 그 연주는 기세당당한 관현악기까지 섰다는 그 점이다.그 다음으로는 주제곡 “오나라”와 “하망연”은 이 극의 온 장면을 관통하여 제일 많이 나왔는데 특히 관건적인 정절에서 주인공과 그 극정을 형상적으로 살리여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또 필자가 즐겼던 음악의 대목은 장금이와 궁녀들이 어선방에서 즐겁게 일할 때와 숙원낭낭(淑媛娘娘)이 축하 받을 때의 무곡은 신나고 경기났다.특히 악곡은 재즈음악에서 잘 쓰이는 절분음(切分音)과 그 명쾌한 리듬을 사용하여 아주 특징적인데서 거듭반복해 재현시킴으로써 더없이 시청자들에게 충격적인 흥과 격정을 돋구어주었고 또 농후한 생활분위기와 우리 민족의 얼까지 만끽하게끔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 계제를 빌어 다시 한번 ‘대장금’의 성공을 축하하며 또 이런 한국고전드라마도 한류를 일으킴에 손색이 없음을 지적해 말하고 싶다.그런데 지금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드라마에 제해 “저속적이니,아니니”하는 비난적인 조짐이 보이고 또 그 담론까지 일으키고 있어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대자금’의 붐은 물론 지난번에 본 ’명성황후’만해도 어쩌면 시청자들이 구들장을 치어 울며 일본놈들의 침략과 그 만행을 규탄했으며 또 나라의 주권 잃은 그 통분도 성토했으랴.그러면서 “반드시 내 나라가 강대해야 한다”라고 외치기까지 했나니,이 어찌 한국드라마를 저속적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점을 감안하는 차원에서 필자는 이번에 닥치는 그 담론에서 어디까지나 꼭 여추우(余秋雨) 교수편에 서고 싶다.정녕 여교수의 말처럼 “한국드라마는 우리에게 너무나 역사란 그 무게를 주지 않고 오히려 더 풍부한 인생의 삶과 그 생존방식을 알려주고 있지요.”이어서 그는 또 지금 우리 중국의 청궁극(淸宮劇)은 그 권모(權謀)의미가 너무 깊게 부여하고 있다며 이는 오직 “역사 학가들이나 즐길수밖에 없다”라고 시사했던 것이다.필자는 ‘대장금’과 같은 한국드라마가 금후에도 더 많이 중국에 진출될 것을 바라며 또 한류가 더 거세차게 세계 각국으로 번져갈 것도 기원하며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안녕, ‘대장금’!   본 문은 2005년 9월 24일 길림신문에 발표됨. 
5    신선족이라고 불러쓰지 맙시다 댓글:  조회:2547  추천:174  2010-07-15
신선족이라고 불러쓰지 맙시다. 주 봉 선족이란 일제가 만들어 낸 것인 즉 한족이나 우리 조선족들의 창조한 것은 아니다.지금까지도 선족을 쓰게 된 것은 선족의 뜻을 모르는데서 온 것일 것이다.타민족의 선족이라 부르지 않게 하려면 우선 우리 조선족 군체 모두가 선족이라 쓰지 말아야 또 타민족이 선족이라 할 때 해설하거나 지어 비평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오늘 본인이 2008년 10월 25일 흑룡강 신문에 발표한 문장을 참고로 재차 발표한다.   얼마전부터 필자는 재중한인사회에서 일부 자신들을 신선족(新鲜族)이라 불러 전해짐을 감안하고 적이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특히 윈난코리아 창간호와 주간흑룡강신문 138기에 가감해 전재된 운남한인회 김중 부회장님의 “신선족 마인드”란 문장에서 “나는 쿤밍에 정착하여 사는 신선족입니다.”라고 쓴 말씀까지 보고 나니,순간 이속에서 발산하는 열기와 우려되는 여러 징후에 거쳐 가슴이 막 울렁대였습니다.또 참아 더는 지나칠 일이 아님을 감득하고 단연히 이 필을 들게 된 것입니다. 하긴 궁하면 통한다고,1992년 중한수교의 문이 터이자 한국분들이 막 중국에로 진출되여 그 붐을 일으키고 또 언론,매체의 각광도 받은 것입니다.여기서 많은 분들은 흥성흥성 사업을 벌리였고 또 좋은 영향력으로 중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그 여생의 희망과 삶을 꽃피워 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특히 중국의 960만㎢ 이 동경의 땅우에서 그이들은 처음으로 정착을 시도하면서 대륙인의 넓은 가슴과 따사로운 관회를 심장으로 느꼈던 것입니다.이에 한층 감사와 우의를 표시하며 또 이 생소한 지역의 풍토인정에 말리고,더불어 그 인정과 사랑을 받아 자신들을 좀 더 확고한 위치의 자리메김을 하려는데서 불러썼다고 봅니다.다시 이것은 그 옛날 일제의 총칼과 그 만행에 못견디여 정든 내 나라,내 고향을 등지고 중국에 와서 정착해 뿌리 내린 우리 부모님을 비롯한 조선족들의 그 부름을 본따서 또 신선족이라 한 것으로도 인정됩니다.그러나 이 두 시대의 중국 정착은 너무너무 달라 가히 조선족과 신선족을 동등한 함의로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견 조선족의 본연과 그 부름은 일찍 우리 3천리 강산에 처음 세워진 고조선(古朝鲜)에서 전해왔음을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사실은 조선이란 바로 해뜨는 동방,밝고 맑은 아침의 나라 상징인 것만큼 조선족도 그 뜻으로 길이 전해오며 쓰인 것일 것입니다.그러나 선족이라면 여기엔 아침도 없고 그 밝음도 없어 궁극적으로 조선족 함의와 탈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중국의 일부 음식점이나 광고,그리고 당안자료에까지 아직도 혹 우리 조선족을 선족이란 간칭으로 쓰며,지어 일부 우리 조선족들도 “我是鲜族人” (나는 선족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던가,혹은 “这是鲜族拌菜”(이것은 선족 무침채입니다)라고 사구려 높이 장사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바로 이 부류의 조선족 동포들이 재중한인들을 보고 신선족이라 잘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를 동북저널 242호의 “중국의 新鲜族,그들은 누구인가?”의 문장에선 “이는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과 차별화 시킨다는 의미로,이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할습관의 많은 부분이 현지화 되었다는 의미다.”고 하였습니다.한편 이런 차원의 영향으로 재중한인 사회에서도 혹 그 자신들마저 신선족이라 따라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중국정부는 일찍 1951년에 소수민족 이름과 그 부름에 제하여 정령을 발포해 함부로 기시,오멸하는 뜻이나 그 작법을 엄금하도록 하였고,또  소수민족 간칭은 그 민족의 첫 글자를 쓰도록 규정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조선족의 간칭은 마땅히 조족(朝族)이라면 맞는 것입니다.이에 반해 2010년이면 재중한인이 무려 100만을 바라보며 또 이곳 조선족과 함께 300여만이란 우리 한겨레 대공동체도 무을수 있는 좋은 조짐도 보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재중한인들께서 원하신다면 신선족 대신에 신조선족(新朝鲜族),혹은 신조족(新朝族)을 채용해 자신들을 불러 쓰신다면 지당할 것으로 인정하며 또 제의로 추천하는 바 입니다. 하긴 예서 필자가 선족은 중국정부의 규정에 어긋난 간칭임을 발로시키고 시사하려는데서만 아닙니다.사실 선족이라면 그것은 또 막상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큰 치욕을 들씌운 죄악과 원한이 서린 부름임을 재삼 밝히여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고 또 모든 동포들의 주의도 환기하게 함에서 인것입니다. 기억도 새롭게 필자는 쉼없이 달려온 세월을 다시 돌이켜 보면서 그 치떨리고 통분한 1910년과 그 36년을 도저히 려과할 수도 또 잊을 수도 없습니다!바로 이때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우리 3천리 금수강산을 강점하고 급급히 우리 민족을 말살하여 완전히 일본인과 동화시키려 한것입니다.그러면서 일제는 “내선 융합”, “내선 일치”와 “내선 여일” 등 주장의 식민화한 정책으로 일본과의 합방을 감행하였는데 여기서 “내”는 일본을 가리키고, “선”은 당시 조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일제는 또 우리 민족 본신들의 이름과 말 대신 전적으로 일본 이름에 일본말까지 쓰는 법을 제정하여 억압했는데 이때부터 우리 3천리 강산은 완전히 일본의 한개 성으로,또 우리 부형들은 선족으로 되였던 것입니다.그후 일제는 또 중국을 침략하고 일본인은 1등민족,선족은 2등민족으로 제정해 3등민족인 한족과 노골적인 그 민족 이간을 붙혀놓았던 것입니다.웬만하면 당시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좀 꺼려하고 지어 “얼꾸이즈(二鬼子-둘째 일본 악귀)”라 욕설까지 하였겠습니까? 역사는 비추는 거울 일 것입니다.바로 이런 차원에서 필자는 이상의 소고를 재삼 새김하면서 다시 한번 외쳐 말하게 됩니다.선족이란 절대 조선족의 간칭이 아니라,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 강도들이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기시와 오멸,치욕과 탄압의 낙인이 찍힌 대명사며,그것은 또 망국의 한과 피로 얽힌 만악의 상징인 것이라고 말입니다.우리는 어찌 이 선족을 다시 불러 쓸 수 있겠습니까? 중국엔 “불지자 무죄(不知者无罪-모르는 자 무죄라)”란 격언도 있습니다.때문에 필자는 재중한인 여러분들께서 사려깊은 노력으로 금후 신선족이라 불러 쓰지 말것을 약속으로 드리는 것입니다.사실상 이런 염려는 또 우린 모두 다 단군의 후손으로 한 피줄,한민족 겨레들이기 때문에서 입니다.피는 물보다 진해,필자는 더없는 사랑과 갈망으로 재중한인 여러분이 별고없이 중국 정착에 성공하시고 또 숙명적으로 보람찬 삶을 영위해 찬란한 미래를 기약하여 만복을 누릴 것도 기원합니다.더욱힌 역사와 전통적으로 맺어 내려온 중한 우의와 교류를 계속 빛나게 하기 위한 역군이 될 큰 기대도 바라마지 않는 것입니다.
4    우리말 번역에서 떠오른 단상과 그 제의 댓글:  조회:2567  추천:189  2010-07-15
우리말 번역에서 떠오른 단상과 그 제의 ○ 주 봉 본 문장은 2008년 9월 6일 흑룡강신문에 발표됨.   중국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그 호황,그리고 종합적 국력이 세계적인 우선 순위는 줄곧 많은 외국의 선진기술,기업과 자금이 진입한 것과 큰 관계를 갖는다.예서 언어란 이 매개의 융통은 어디까지나 생소한 두 나라사이에서 그 교류과정을 다 잘 밟도록 함에 결정적 역할을 놀았다.다시 말해서 각 분야에서 사업하는 통、번역인들의 노력에 타국의 통하지 않던 말과 글을 중국말과 글로 전환한 그 성공에서 일 것이다.이 통、번역인 대오엔 우리 조선족들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주로 중、한번역 일선에서 사업하고 있다. 참말,우리 조선족들은 중국 실정을 잘 알고 또 중국말까지 잘하는 그런 “중국통”이다.게다가 한국과 한민족,같은 언어의 유대관계까지 있어서 아주 쉽게 중、한번역에 나설수 있었다.한편 세계적으로 번져가는 한류(韩流)의 비전이 중국에로도 다달아 필시 많은 중、한번역 일군이 수요되어 곧 우리 조선족들이 등극하고 중용되어 우리말까지 그 지위와 부가적 가치가 인상되였던 것이다.이로써 중국인들까지 우리말을 배우는 그 붐을 일으켰는데 단 31개 대학에서나 한국어과를 설치한 그것이다. 참,궁하면 통한다고,사실 1992년 중、한수교는 우리 조선족들이 새롭게 궐기하고 또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다시 알아보게 하는 계기로 되였다.중국의 부드러운 정책과 한국의 혜택으로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친척을 찾고 벌이하여 생활을 향상시켰다.더욱힌 발군된 그 실력과 막강한 영향력으로 기업과 그룹을 꾸렸고 또 많은 중、한무역,여행,번역회사와 학교들을 세웠다.특히 한국에서 직접 많은 기업과 자금을 중국에 인입해 그 공헌과 자랑은 참 대단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한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우리 조선족들은 날따라 한국인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했는데 주로 문화와 그 의식의 차이에서였다.특히 문화의 표상으로 되는 말과 글의 차이와 그 규범의 다름은 줄곧 전반 조선족사회와 번역인들께 막대한 애로를 갖다 주었다. 예하면,두음법칙에 따라 우리의 뉴대,로동을 한국은 유대,노동이란다.어휘사용은 우리가 쓰는 변소를 한국에서는 화장실로; 우리가 중국식 조선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비해 한국은 미국식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또 겹쳐 나는 소리에서 우리가 눙눅하다,민밋하다를 한국은 눅눅하다,밋밋하다라 한다.다시 띄여쓰기를 보면 우리는 문장의 매 단락 서두를 두 글자 비워 쓰지만 한국에서는 한글자 비우거나 직접 쓴다.또 불완전 명사를 우린 다 붙혀 쓰지만 한국은 반대다.지어 문장부호도 우리는 17개、한국은 23개나 쓰며,이 외 표준어 규정 발음법과 서사법도 그 차이가 다 많은 것이다. 바로 이런 차이는 수십년간 우리 3천리 강산이 3.8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가슴 아픈 역사가 우리말에까지 3.8선을 그어 곧 한국어와 조선어로 갈라놓은데서 온 것이다.그러나 지금 우리말은 분단의 고착화에 비해 아직 이질화 정도로 되지 않은 것이 참,다행이다. 그러나 그 상이한 사회제도,관념과 문화에서 파생된 차이점이나 답답함과 오해 소지는 참말,우리말 번역으로 하여금 대립과 갈등에 치달리게 한다.글쎄,조선반도와 한반도、북한과 북조선、남한과 남조선、조선민족과 한민족에 거쳐 어느 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말이다.이로써 그 번역은 줄곧 2차 언어 전환을 거쳐야만 완수될 수 있다.즉 우선 한국어(혹은 한어)를 조선어로 통찰하고 감안하여 그 낱말의 이미지까지 다 파악한 기초에서 비로써 다시 한어(혹은 한국어)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지금 번역의 실력과 그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는 오직 어떻게 조선어와 한국어를 잘 아우른 것에 주로 준거되고 또 대방도 보아야 하는 상황이다. 당전 우리말 번역은 이렇듯 준엄한 역사시기、특이한 언어 환경속에서 진행되다 보니,잘 되어 가면서도 혹 병집이나 웃음거리,지어 오류、오역까지 나타나고 있다.예서 필자는 한、중번역을 위주로 떠오른 단상을 여러 동인들 앞에서 먼저 발언하여 상의하는 즉 또 많은 조언도 바란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성명은 그 민족의 문화와 풍속,그리고 가문의 전통,부모님의 신앙과 희망 등을 고스란히 체현시켜 그 사람을 상징하는 일종의 표현형식 일 것이다.그 내함과 외연은 어디까지나 남다른 뜻 매김으로 형제들을 이어주고 또 다른 사람들과 서로 구별되게 하고 있다.그런데 한국드라마 “罗曼史”(로맨스)에 나오는 迟何英(지하영)은 너무 중국식 성명 번역으로 느낀다.필자의 이해는 못지(池),연하(荷),꽃영(英)에 池荷英으로 인정하게 된다. 또 “正在恋爱中”(지금은 연애중)의 尹好真(윤호진)이란 성명은 그 남동생이 尹好杰(윤호걸)이니,같은 바엔 尹豪真과 尹豪杰로 번역되였더라면 좀 더 의미적이고 겉맞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문뜩 TV화면에 나타난 기똥찬 생신잔치와 그 축하편액을 보면 글쎄 채림이 맡은 이 역의 성명은 윤호진이 아니라 윤호정이였다.그렇다면 그 번역은 마땅히 尹好贞 혹은 尹豪贞으로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사실 말과 글은 뜻을 담은 그릇으로 또 아주 운명적인데서 다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때문에 만약 내가 속한 국가나 문화권,처해있는 입장이나 이해에 따라 같은 말과 글 일 지라도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비근한 예로 냉정이란 말에서 일본인은 차분함을 우리는 차거움을 먼저 느낄지 모른다.또 애인이라면 한국과 서방국가에서는 연인으로、중국과 조선에서는 부인으로 인정 할 것이다.다시 시장을 번역한다면 그 이해와 공감력은 인츰 사구려소리 높은 장터나 자유와 번역이 넘쳐 상품유통을 이루는 그 전체 경제영력에 이룰 수도, 혹은 그 속의 자유경쟁이나 약육강식도 느낄 수 있다.또 배고프다든가,시험장소(试场)와 시의 행정장관(市长)에도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언어는 또 삶의 표출과 이것을 완수하는 원동력으로 기인된다.허나,언어는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니고 상징을 표시하며 또 실체와 상징사이에서 다의성이 발생하므로 번역의 관건은 바로 제뜻에 합당한 언어전환에 규결되는 것이다.여기서 응당 뜻이 부족하다든가 넘치는 언어는 잘 헤아리고 갈라 써야 하며 또 그 언어를 옮길 땐 꼭 대중의 접수 상황과 잘못 될 개연성도 염려해 그 불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때문에 번역인들은 반드시 세상물정 그대로 또 자구(字句) 본연의 순수성과 그 범주까지 다 발굴하여 다시 일관성있게 체계화하고 또 정확하게 뜻 매김해야 그 효험을 볼 것이다. 그런데 번역중의 오역은 참,뭍사람들의 신경을 마비하고 기로에 이끌며 또 원국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함이 일수다.예하면 위의 윤호정을 尹好真으로 오역된 것에 반하여 이 드라마에선 또 한국의 지명도 오역된 형편이다.즉 마포(서울시 중서부의 구)인데 응당 麻浦로 번역되어야 했지만 글쎄 马普로 되였으니 사실 이는 마보가 아니였겠는가? 그리고 이 극에선 우리 조선족들이 즐겨 부르는 “소양강 처녀” 노래도 나오는데 글쎄 이 소양강을 “苏样江” 이라고 번역하였다.사실 강원도 경내에서 흘러오는 이 소양강은 한강의 제2지류며 북한강의 제1지류로서 줄곧 몇백년을 “昭阳江”이라 써 내려 왔는데 왜 이렇게 “苏样江”이라 번역했는지 참,불가사의만 하였다. 국어사전에선 “무릇 한겨레의 언어는 그 겨레가 전 역사를 통하여 이룩해 낸 온갖 사고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이런 차원에서 번역인들은 응당 그 나라,그 민족의 역사,지리,정치,경제와 문화 등 각 분야에 거쳐 모두 투철한 요해와 파악을 가진 그런 소질이 구비되어야 한다.하지만 그 “罗曼史”(로맨스)엔 또 기원 6세기、어릴 때 잘 울고,16세 때 파격적으로 바보 온달과 결혼하여 다시 그 온달을 나라 영웅으로 출세시킨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란 별칭도 나오는데 글쎄,이 극에선 “平港公主”(평항공주)로 번역되지 않았겠는가? 필자가 조선역사와 “삼국사기”의 “온달설화”를 보니 생애에 그 호연을 선보여 후세들이 숭상하고 사랑하는 “평강공주”를 “平冈公主”로 씌여 있었다.당시 필자가 격앙된 감정이 가슴을 울렁이던 것도 인젠 다 무마 되였지만 그래도 이는 너무 험한 오역임을 다시 꼭 지적해야 될 것으로 본다. 이같이 2000년이나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한자 문화권에 있는 한국이 기왕 한자로 뜻 매김한 지명,인명,별칭,문물,명승고적 그리고 강,산,바다와 역사사건 등을 망라해 그 번역은 꼭 본의에 입각해 그대로 써야 한다. 이로부터 번역은 어디까지나 그 말과 어휘를 아집에 따라 우격다짐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런 태세도 아니다.그렇다고 너무 단순한 자구해설 차원의 번역으로 현실과 조화되지 않거나 혹은 앵무식 어음이전에 이탁 될 것도 못된다.예하면,한국드라마 “吾爱是谁”(내 사랑은 누굴까)의 “送幼稚院吧”(유치원 보내세)란 말에 한국 유치원이 그대로 번역됐는데 중국에선 그래도 “幼儿园”(유아원)이라 해야 좀 쉽게 들릴 수 있다.또 지금 우리말 일부 간행물은 외래어와 한어 어음을 이전하거나 직접 써 똑 마치 외국어나 한어문을 읽는 듯하다.한편 맞갖잖아도 외래어는 사전 힘 업고,한어는 그 표기된 한자를 보고 알지만,글쎄 사전에나 한자표기도 없는 것은 참,신경을 곧세우게 한다. 원래 우린 연변,원(元)이면 그만이던 언어신호가 불씨에 옌벤,위안으로 변해 반드시 2차사유전환을 거쳐야 하니 한참 뜯어볼 때도 있다.더구나 한어정자를 쓴 폐단까지 있어 얼마나 석연치 못한지 모른다.사실 우리 간행물의 대상은 광대한 조선족 독자란 방향을 명기한다면 많은 자구는 직접 뜻 매김으로 번역해 그 뒤에 한자를 괄호쳐 표기하면 쉽게 알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로써 한자를 아는 한국인들도 알아 볼 수 있으니, 어음이전 번역은 좀 적중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런데 원작을 떠난 번역은 하지 말아야 한다.예하면 지금 잘 발매되는 한국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곡 “오나라”의 한어음판은 줄곧 후렴의 “에야 디야”가 번역되지 않았다.대신 여기엔 무려 한자 열개나 우격다짐으로 배사해 아주 짜깁기한 리듬으로 불리고 있지 않았겠는가? 이로써 원곡의 리듬과 “쿵덕쿵” 장단의 파괴는 물론,더욱힌 우리 민족음악의 풍격과 형상이 다 빛을 잃게 했으니 이는 참,받아 들이기 힘들다.예서 좀 더 언급한다면,설녕 이 곡에 새 가사를 붙혀쓴다 해도 가곡의 주제는 하나기 때문에 “에야 디야”같은 특징적 음악형상의 가사는 꼭 번역하여 보류되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번역은 꼭 원작에 충성하여 진정으로 그 의미 생각과 느낌 등 속성을 천착하고 또 원래 풍격이나 특징을 보류한 기초에서 다시 창의력에 입체화하여 분명히 잘 다듬어야 비로써 유려하게 써낼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출중한 번역의 실력은 절대 일조일석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다.사실 번역의 고심참담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모두 면밀하고 철저하며 아주 간거한 재창작이라,꼭 산고도 겪어야 한다.다시 사계 선배들의 번역담을 들어보면 그들은 경상적으로 급변하는 현대사회 초점을 맞추어 생활에 대한 밀접과 탐닉,아울러 그 집적에 일심했다.또한 작가나 작품에 대한 몰입을 필수로 직접 작가를 만나거나 작품현장까지 돌아본다.이로써 아주 기발된 생각과 면모로 작가의 정신세계와 만나 그 기존사상과 숨은 뜻까지 다 생생히 살려 번역해 낸 그런 성공사례와 귀중한 선구자적 업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사실상 이 속엔 아주 독특하고 창발적인 상상력,직관력,통찰력과 판단력이 깊이 매료되였고 또 불꽃튀는 창조에 지대한 수고,번복과 피땀이 슴배겨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예서 조선영화 “꽃 파는 처녀”의 번역은 본보기다.당시 장춘영화촬영소에선 이 영화가 김일성 주석의 작품이고 주은래 총리의 지시까지 있어 아주 큰 중시를 주었다.그 중 “꽃분이”이란 이름의 번역만 보아도 조만치 않았다.문제는 “꽃”에 상응한 한자가 없어 연구 끝에 꽃화(花)를 채택했다.허나, “분이”는 그저 “花粉伊”, “花妹子”라 의논 될 뿐이였다.그 후 그들은 다시 영화에 나오는 간도인 연변에서 수십명 조선족 노인을 채방하고 비로서 “꽃과 그 화분”,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뜻을 체현해 “花妮”(꽃같은 그녀)라 불러 관중들의 호평과 언론의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번역은 소통에 대통까지 안아오는 거룩한 사업이다.한편 번역인은 또 나라와 나라 사이,그리고 각 분야와 민간에 거친 사업에 관한 일종 외교적 교섭과 수완을 시행하는 준일한 인물이며 또 그 한분 한분은 다 외교사자인 것이다.이런 사명과 직책은 통역이나 동시번역(同声传译)이 좀 더 특징적인데,이런 실례가 있다.바로 1982년 8월 22일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아프리카 중서부의 가봉공화국을 공식방문을 하였을 때 글쎄 환영의식장에선 느닷없이 돌연히 조선국가가 울렸지 않았겠는가? 이에 전 대통령과 대표단 성원들의 속이 발칵 뒤집힌 것은 불보듯 하였다.그러나 이 나라 봉고 대통령의 절실한 사과는 바로 그 난감하던 장면에 전기를 주어 그 후 방문과 두 나라 친선에도 지장 없었다고 한다.사실 이는 전적으로 통역인의 역할에서 왔다고 한다.즉 당시 봉고 대통령은 “매우 유감스럽게 되였습니다”란 일반 외교적 예의수사를 썼지만 총명한 통역인은 그 프랑스어(가봉의 관변측 언어)에도 없는 “참,백배로 사죄하고 용서를 빕니다.”라고 더 충실하게 수식해 통역한데서 비로써 전 대통령과 강경파 성원들의 기분을 가셔 주었다고 한다.참말,그 통역의 말은 더없이 절묘하게 마음을 이어주고 응집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좋은 소통의 도구로 곧 후날까지 미담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특히 예서 반영된 통역인이 나라의 이익,또 타국과의 우의를 념두에 두고 발휘 된 그 기발한 임기응변과 재능소질은 얼마나 후세의 번역사업을 편달하랴! 때문에 번역인은 마땅히 풍만하고 앙양된 정치사상 수양에 그 나라 국정,국책과 국시를 망라해 다시 내 나라와의 상관적 연대,이익과 정책성에까지 모두 투철한 인식과 파악을 가지는 그런 소질도 또 구비되여야 한다. 이상 여러면에서 언급한 우리말 번역에 제한 술회는 절대 독립적인 것 아닌、그것은 언제나 연대를 갖고 종합적으로 실천에 옮겨야 될 것이다.이와 관련해 필자는 또 응당 주의 할 네가지를 더 첨가해 시사 하련다. 하나는 번역에서 자칫 범하는 편향성이다.그것은 왕왕 실제를 떠난다던가 사실의 일단만 밝히며 또 너무 한쪽 나라 뜻만 체현시킨데서 기인된다.예하면 한국드라마 “吾爱是谁”(내 사랑은 누굴까)엔 “我家虽不富裕也算是小康了”(우리 집은 그닥 부유치는 않아도 그래도 잘 사는 표준일세)라며 운위하는 말이 있다.예서 “小康”은 한국의 잘사는 표준이 아닌 것으로 번역시 응당 삼가해야 할 것으로 본다.또 “上大陆出差去”(대륙으로 출장 가려네)란 말은 한국인들보다 대만인들의 말이라면 더 부드럽게 들릴 것으로 본다.당전 한、중번역에서 발로 되는 이런 문제점은 사실상 우리 일부 번역인들의 수준차이와 자기 성찰의 결핍에서 올 것이다.이에 따라 지금 일부 번역회사에서 한、중번역 원고는 최후로 한족들이 수정하고 체크하여 혹 원작의 뜻과 내용이 좀 기울려진 경우로도 필자는 적이 알고 있다. 다음 번역에서 제일 꺼리는 오류다.예하면,지금 일부 음식점、광고와 당안 자료엔 우리 조선족을 “鲜族”(선족)란 간칭으로 번역해 쓰며,지어 일부 재중한인들도 따라 신선족(新鲜族)이라 자칭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이다.한방면 소수민족간칭은 그 민족 명칭의 첫 글자를 쓰는 중국정부의 규정에 따라 조선족은 응당 “朝族”(조족)라면 맞는 것이다.또 선족은 역사적인 오작과 치욕이기 때문이다.즉,1910년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3천리 강산을 강점하고 급급히 우리 민족을 말살해 일본인과 동화하려고 “내선 융합”등 식민화한 정책을 감행했는데 예서 “내”는 일본, “선”은 당시 조선을 가르킨다.일제는 또 우리 민족 본신들의 이름과 말 대신 일본 이름에 일본말을 쓰는 법을 억압했는데 이때로부터 3천리 강산은 일본의 한개 성으로 또 우리 부형들은 선족으로 된 것이다.역사는 비추는 거울이다.우리는 일제의 이 만행을 알고 어찌 계속 선족이라 번역해 쓸 수 있으랴! 절대 근절해야 한다. 셋째로 번역에서 우리말 단어와 상응한 한자가 없는 경우다.예하면 1950년 항미원조 때,중국인민지원군의 군용지도엔 “花田谷” 、“岩石谷”같은 지명이 있어 통역은 조선백성들과 “여기 화전곡과 암석곡이 어디 있습니까?” 라 물어 모두 알길 없었던 사연이 지금도 가끔 화제로 되고 있다.이런 상황을 헤아려 당시 중국국방부는 조선족학자들을 모셔다 연구하고 타결한 끝에 이런 유의 지명은 마치“花田谷”(꽃밭골) 、“岩石谷”(바위골)처럼 일률로 원 조선어지명을 괄호쳐 밝히기로 하였다. 넷째로 번역에서 쉽게 홀시되는 기술적 문제다.이에 앞서 번역인은 응당 말의 맥락,의미와 감정,그리고 그 말의 미묘한 어감까지 다 감촉하는 그런 소질이 구비되어야 한다.그런데 지금 한국드라마에선 종종 번역 된 중국말의 길고 짜름이 무상이라면 또 원래 한국말 구형(口型)과도 맞지 않는다.그리고 말의 억양이나 성조(声调)가 그 행동거지와 표정과도 이탈되고 더구나 한어정자까지 번역해 자막을 채우는 폐단으로 참,재미 슬하다. 필자는 “노력하는 것만큼 나온다”란 말을 믿는다.그러므로 번역인은 마땅히 민족의 자긍심에 더욱 긴 안목과 자아세계에 갇히지 않는 고투로 부단히 당대 세계를 알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지 말아야 한다.특히 오늘같이 언어가 폭팔하여 유동성이 격심한 이때,응당 수시로 신문、잡지、방송과 TV 등 매체에 쓰인 어휘들을 설렵하여 자기 두뇌를 무장하여야 한다.이로써 항상 참신한 아이디어를 배동한 소통의 즐거움과 자아발산으로 미래와 약속하며 부단히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알찬 번역작품을 내놓게 되여야 하는 것이다.사실 그것은 더없이 정비롭고 세련 된 언어의 향연이 활활 펴나, 또 이를 탐독하는 모든 사람들께 절로 탄성을 자아내고 더욱 기쁨과 희망을 부여하게 끔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아래 두개 방면의 제의만은 꼭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제의하고 싶다. 하나는 번역인 대오의 건설과 그 수준의 질적인 제고이다.예서 중요한 것은 대학에서의 인재배양 일 것이다.다음으로,정기적인 통、번역인의 학습반、학술회、세미나와 경험교류회 등을 조직할 것도,또 번역작품의 심열이나 번역인과 그 회사의 자격심사、등급 등을 망라해 금후 번역사업의 정규화、규범화를 위해 꼭 해당부문의 출면이 진작 수요된다. 다음으로 우리말의 “통일”이다.이는 당전 우리말 규범이 정립자세에 처한 상황을 헤아려 하루속히 중、조、한 세 나라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타결이 수요된다.사실 사람의 힘은 한이 있어도 규범의 힘은 막강하고 무한하다.때문에 근본적인 것은 숙원으로 우리말 대법인 문법과 그 규범부터 집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글쎄 이것은 시간이 좀 걸려야 하므로 목전엔 응당 표준화、국제화에 입각한 과도성적 규범도 작성될 것이 또 얼마나 박절한지 모른다. 번역은 각 국과의 우호、단결과 발전을 도모하고 또 내 나라를 우상하는 중요하고 빛발치는 사업이다.더욱히 여러 분야에서 생산력을 촉진하고 경쟁력에 응집력까지 형성시키는 아주 가치있고 성스러운 사업이다.지금은 번역인들의 그 기량을 마음껏 자랑할 때다.그러나 우리말 번역은 아직 초창기라, 모든 번역인들의  다함없는 노력에 훈신의 힘을 다 할 것을 바란다.특히 우리 민족의 성공적 삶을 영위하고 더욱 당당하고 저력있는 민족으로 부상하기 위해 분투할 것이 또 얼마나 수요되는지 모른다.그리고 저 줄기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말 번역사업이 보다 사회적이나 민족적인데서 계속 변함없는 관심과 지지,그리고 그 기반이 마련되기를 필자는 충심으로 바라 마지 않는 것이다.  
3    조선어가 받는 도전과 위기에 제해 댓글:  조회:2761  추천:318  2010-07-15
조선어가 받는 도전과 위기에 제해 주  봉 본 문장은 제2회 조글로 칼럼상 우수상으로 당선 된 작품(원문) 2008년 11월 22일 흑룡강신문에도 발표됨.   지금 운운되고 있는 조선어의 위기가 한국어에서 왔다는데 제해 필자는 긍정 대신 오히려 조선어가 한국어의 새 도전을 받는다는 것이 좀 더 적절함을 고취하며 또 이로하여 조선어는 더욱 발전을 갖여 올수 있음을 새삼 시사하고 싶다.   기실 150년전 중국 문화권에서 형성된 조선어는 시종 자기보다 몇 백배로 더 많은 한족들의 포위속에서도 그 뿌리를 내렸고 또 변연문화체계의 독립 군체어로 그 생존과 발전을 갖여 왔는데 하물며 단 16년(중한수교 후) 사이 한국어의 영향이 어찌 조선어의 위기까지 줄수 있겠는가?자고급금에 경위한 사례를 약하고  단적으로 한국에 갔다 온  조선족들만 보아도 그들은 지금 한국말도 잘 할 뿐만아니라 또 잊지않고 조선말도 그렇게 유려하게 잘하는 것은 이 점을 더없이 실증해 준다.   역사는 비추는 거울,실상 조선어와 한국어는 재래로 조선반도에서 동일한 고국의 언어였고 오직 47년간(중한수교 전) 잠시 서로 갈라져서 일부 규범과 어휘가 좀 달라졌을뿐 전반적 어휘들이나 자구의 엮음과 말이 흐르는 맥락도 다 같다.이것은 바로 조선어와 한국어는 모두다 "훈민정음" 체계를 기반으로 또 그속의 민족얼과 핵인 DNA까지도 모두다 똑 같은 연고에서인 것이다.때문에 한국어가 조선어에 근본적인데서 위기를 줄수 없고 오직 새로운 도전으로 조선어는 더 한층 충실해 지고 풍부해져 필시 그 획기적인 발전을 갖져 올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포럼은 지금 이렇게 부동한 주장들의 피력으로 참 활기를 띄고 있다.마치 세 사람이 동시에 한 원을 각각 그 정면,측면과 원평면측 위치에 서서 관찰하여 얻은 "원","타원"과 "선분"의 결론처럼 그 부동한 각도의 견해를 아주 잘 보여 주었기에 사회의 많은 각광을 받고 잇다.그런데 예서 생각외라면 글쎄 아주 석연하고 자연적 섭리 같은 도리를 어쩌면 그렇게도 높은 학술적 각도나 혹은 심오하고도 추상적으로 논리 되고 또한 그처럼 퍽 멀리 남북의 통일되는 그날까지 우리 포럼을 끌고 가야 하는지? 참말,너무도 힘든감을 느낀다.때문에 우리의 포럼은 응당 한층 더 높은 안목에서 현실을 직시하여 좀 더 구체적이며 시의성 있는 경향과 현안에 대처해 초점을 맞추고 또 진지하고도 열띤 브레인스토밍을 벌려 새로운 해결 대책과 생신한 제의도 모색하는 방향에 그 종지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바로 이런 포인트를 잡고 필자는 먼저 그 비견한 견해를 발표하기로 한다.   새 도전에 제한 대안     그렇다면 한국어가 조선어에 주는 새 도전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는가?나의 기존 사상과 그 주장은 오직 브리핑인 하나,즉 한국어(말)와 조선어(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이다.이는 마치 내가 처음으로 한국인들과의 접촉과 대화중에서 모르는 어휘를 그들의 해설을 받아 안것처럼 즉 "화장실은 변소의 미칭","샘플은 견본"과 "이것은(염지) 부추"등으로 그 소통과 교류를 완수한것과 비슷하다.   이 면에서 우리 주간 흑룡강신문은 이미 앞장서 리드하고 있다.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좋은 신문,출판,방송,TV과 인터넷등 매체에선 적극적으로 간단한 한국어 규범,맞춤법에 한국어중의 일상어,외래어 및 일부 기호 그리고 또 조선어와의 그 대비되고 연대되는 관계를 잘 소개하고 따라서 파격적으로 오는 한국인들과의 문화의식 차이도 천착해 간명하게 해설과 설명을 주는 이런 좋은일들을 할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대,중,소학교에서는 비정식 한국어과를 설치 한다든가 혹은 써클,흑판보와 방송등을 통하여 한국어를 전수하고 소개 할 수 있다.또한 조선족교육학원이나 언어,문화연구의 행정기구등에서도 이런 "다리"를 놓을수 있고 동시에 조선족 사회에 적용되는 한국어를 추천하는 사업도 맡아 할수 있다.한편 지금 60개소의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설치한것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꾸린 한국어 속성 강습반,학원과 학교 그리고 한국에 갔다온 방대한 조선족들이 다 이 좋은 "다리"로 될수 있는 것이다.이외 한국의 도서,방송,영화와 드라마등도 이 "다리"에 이채를 줄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2000년이나 중국문화 영향으로 한자 문화권에 있는 한국의 재중한인들도 이 "다리"의 여세를 빌어 우리 조선족들과 (장래 조선을 포괄) 쉽게 소통과 교류를 갖져 올수 있는 것이다.내가 알고 있는 몇몇 재중한인 사장님들도 이젠 제법 조선말로 우리와 잘 교류한다.참,이제 곧 100만을 바라보는 재중한인들의 조선어(말)화는 필시 중국내 한겨레사회 형성을 촉진하며 또한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들이 한국 경내에서도 조선어(말)을 쓸때면 조선어도 자연히 한국의 지방어처럼 군체어로 되여 그 품위와 가치성을 더욱 시사 할 것이다.따라서 지금의 이 "다리"는 점차 철소되고 우리 겨레들은 새로운 시대 요망에 부응해 꼭 세계인이 괄목하는 기적을 일구며 잘 살아 나갈 것이다.   한국어의 도입과 수용을 두고     언어의 발전은 왕왕 새로운 언어의 도입과 수용을 떠나지 못한다.때문에 당전 중한교류의 활성화는 우리 조선어가 한국어를 도입하고 수용하여 더욱 풍부해지고 발전 할 수 잇는 가장 좋은 시기이고 기회이다.그런데 "정화"를 받아 들이는 원칙에 쫓아 한국어의 도입과 수용에서 필자는 아래의 다섯가지를 우선 강조하고 싶다.   첫째,문법은 언어와 문장을 지도하는 대법이기에 한국어의 도입과 수용은 "조선어 문법"과 저촉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조선족 언어 생활에 혼선을 줄 수 있는 한국어의 두음법칙이나 겹쳐나는 소리 규칙등에서 파생된 어휘들은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조선족의 당전 영어 수준 격차를 고려해 한국어중의 외래어 도입과 수용은 좀 적중해야 한다고 본다.그래도 쓸 필요면 꼭 해설이나 주해를 주고 또 한자로 괄호쳐 뜻매김도 해야 할것으로 본다.   넷째,한자의 동음 이의어 상황을 고려해 한국식 어음이전 번역은 꼭 심중해야 한다.비근한 예로 "위안"이라면 도대체 元인지 圆일지 참,알바 못된다.또 역사적으로 형성돼 전해온 지명이나 고유명사는 어음이전 할 필요가 없다.예하면 "연변"은 우리 조선족들의 정신 고향으로 국내외에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는데 이를 함부로 또 다른 "옌벤"이라면 참 사람들께 얼떨떨한 감과 물의까지도 일으킬수 있다.기실 한어가 능한 조선족들도 어떤때는 이런 어음이전 번역어를 한참 뜯어 보게 하거나 지어 알아 보지 못 할 때도 있다.때문에 이런 구구한 작법은 오직 조선족들의 언어 생활에 혼선만 주지 별다른 점은 또 없다. 다섯째,문화는 국경이 없다는 취지지만 새로운 한국어 도입에서는 꼭 조선족 군체의 실제를 잘 고려하는 이 중요성에 착목하고 또 언어의 배척이나 탈절 경향이 치닫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예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천 변소를 사용하는 상황을 헤아려 "화장실"이란 이 미칭을 흐르는 시간에 맡기는 것이 좋다.그리고 "열공"(열심히 공부한다),"언니 샤방 샤방"(언니 예뻐요)등 근거없이 만들어낸 약어나 또 민족의 치욕을 담은 "선족","신선족"은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어의 진정한 위기에 제해  아래의 두개 방면에서 발로되는 경향과 문제점은 진정으로 우리 조선어의 위기를 초래하는 즉 그 징후까지도 여과 할 수 없다.참말,그 폐부 깊숙까지 감지되는 그 위기는:  하나는 지금 피치 못하는 조선족 인구와 그 마이너스 생장률이다.여기의 원인과 연루되는 문제는 많지만 가장 돌출한 범례는 조선족 사상 초유로 이 10여년래 조선족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육속 한국이나  한족들께 시집가는 이 가슴아픈 사례이다.이로써 금후 우리 조선족들의 후대 "생산기지"가 막 파괴되고 대폭 축소되는 이 엄준성에 따라 조선어의 그 후대도 자연히 대폭 긴축 될 이점이다.이와 동시에 눈물겨운 에피소드로는 우리 조선족 청년 남자들이 날따라 장가가기 힘들어 자연히 한족 여성들과 결혼하여 그 후대가 막 동화되여 가는 이런 불가사의와 절분한 일로 또 어찌 우리 조선어의 후대가 막 축소되지 않겠는가?그리고 현재 많은 조선족 가정들에선 경제난을 고려해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혹은 낳으려 하지 않는 이 역시 어찌 우리 조선어의 후대를 대폭 감소 시키는 큰 불화점이 아니 겠는가?  다음으로 최근년래 우리의 적지 않은 조선족 농촌은 황페해 가고 또 학교나 유치원이 다 무너져 사람들은 뿔뿔이 전국 각 성시로 진출하고 있다.참말,눈물을 동이로 쏟아도 부족 할 그런 기막힌 사연이 벌어진 것이다.그런데 노스랠지어에 젖은 그들이 또 울며 겨자 먹기로 할수없이 자식들을 한족 학교에 보내거나 혹은 아예 집에 뚝 떼 두는 이 타향살이 신세와 그 역전적 사례는 더없이 조선어 후대를 잃게하여 참말,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상 두개 방면의 제반 문제는 글쎄,국무원 산하 결책 부문에서 이미 국민경제 균형 발전에 따라 정책과 조취를 강구해 지금 해결하거나 혹은 연구나 조작중에 있으리라고 익히 믿어 마지 않는 것이다.관련 소식에 의하면 지금 연변에서는 이미 아이 둘을 낳으면 장려금을 주는 희소식이 있다.또 전국부련회에서는 페미니즘보다도 더 완벽한 여성들의 우대 정책을 짜고 있으며,외교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선과의 국제통혼 실시를 위해 그 연구와 연계 조작도 시동하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생애의 호연을 선보이는 해빛 정책의 실시는 필시 우리 조선어 후대를 더욱 무성하게 장성하는 그 전망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런데 당전 조선족들의 분산 거주 추세 돌풍이 다시 자녀교육 문제로 번져가 마구 선풍을 일구고 있다.특히 의무교육 혜택을 받아야 하는 어린 조선족 학생들이 글쎄 조선족 학교가 없어 불쌍하게도 지금학교를 못 다니는 그런 폐단까지 발생하고 있는 이것이다.때문에 어떻게 신속히 청도,위해,북경이나 광주등 성시에 우리 조선족 중,소학교를 건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 겠는가?그러나 이것의 성공적 실시와 그 메커니즘은 어디까지나 우선 나라적인데서 베푸는 감동적인 민족정책과 해빛정책의 그 당위성으로 최선다해 절실한 조취를 낙착시킴이 근본인 것이다.하긴 또 지금 각지의 학생수가 줄어 그만한 교육경비도 남는 상황에 이 자금을 통일적으로 이용 할수도 있지 않겠는가?이밖에 국내외 자선단체와 기업의 지원,민간의 모금 또 체육과 연예계의 의연금이나 한국동포사회 의연금 등도 이사업에 주선 함이다.  한가지 더 달아 시사 할 메시지라면,참,내몽골에선 유목민들의 장막이 어디로 옮겨가면 그들의 장막학교도 곧 잘 그곳으로 따라 간다고 한다.또 하나는 나라적인데서 북경을 위주로 개별적 성시에 서장과 신강의 소수민족 학교나 반을 꾸려 주고 있는 상황도 있지 않겠는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더구나 다 같은 하늘 아래서 기타 소수민족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조선족들은 왜 하지 못해야 하겠는가?    필자는 오직 파이팅을 높이 불러 그 신념의 주장과 업그레이드의 주견을 재삼 심중히 제기하며 또 이 설상가상의 제반 문제들이 하루속히 해결 될것을 더없이 갈망하게 된다.그리고 한없는 열망에 우리 조선어가 생존하고 발전하는 동력과 그 획기적인 기반도 더욱 견실하고 드넓게 마련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 것이다.                                                
2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자 (주봉) 댓글:  조회:3139  추천:399  2010-06-14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자주 봉   우리 조선족노래는 150년 이민사의 사례를 거쳐 이미 생색하고도 풍만하며 또 아주 성숙된 문화로 부상되여 빛내어 가고 있다.그러나 지난 90년대를 잡으며 한국노래의 부단한 충격은 우리 노래로 하여금 그만 활기를 잃고 시들어가게 하였다.  우리 노래의 이런 전통과 현실의 딜레마는 당전 조선족들의 모임이나 노래방에만 가보아도 쉽게 알수 있다.글쎄 그들은 우리 노래는 아예 뒤전이고 제법 카라오케에 마춰 한국노래를 불러주는데 아주 흥에 넘쳐 또한 그렇게도 시체적인 사조로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필자가 흑룡강에 온 문예단체의 순회공연을 보아도 그속엔 우리의 새 노래로 꾸민 종목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이전의 조선민요에 많은 한국노래와 일부 춤과 중국노래들로 연출되고 있었다. 정말이지,어쩌면 이런 연출이 민족문화향수를 갈망하고 또 출국열에 자신들의 삶도 갈팡질팡하는 동포대중들께 새노래 종목연출로 시대의 격정과 새희망을 불러줄 대신 오직 이렇게도 위성방송에서 늘 보던 얼굴들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는 것으로만 끝쳐야 하겠는가? 참,시대와 형세에 뒤지고 또 당전 우리 조선족 실생활과 이탈됨을 너무도 짜릿짜릿하게 감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더욱 난감한 상황은 아니,어떻게 되어 마치 하루 아침사이에 약속이나 한듯이 우리의 노래 간행물이 정간되고 또 신문과 잡지에서 우리 노래가 전부 종적까지 감추지 않았겠는가? 이로써 지금 우리 조선족군체사회의 지주로 되고 있는 적지 않은 학교나 유치원 그리고 노인협회까지 모두 우리 새노래를 바로 찾지못해 그저 종종 한국노래나 중국노래를 배워 부르고 있는 것이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 새노래가 전국에로 진출되지도 못한 이 낙오다.또한 김봉호나 장천일같은 일부 저명한 조선족의 작곡가들은 한족문예단체에서 근무하다보니 우리의 우수한 노래 창작에 기여하기 어려운 이점도 있다.   우리 노래의 이런 침전상태는 당전의 조선족대중들로 하여금 정말 부를 노래가 너무너무 극빈하게 하고 있다.또한 한국노래가 자연히 조선족군체사회영역의 많은 시간과 공간을 독차지하여 필경 우리 노래가 몸살치고 배타되기 마련인 즉 이는 종종 정신문명건설이나 민족의식의 고취에도 불리한 경향을 끼치는 그런 조짐도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빚어진 그 주요한 원인을 어떻게 논해야 타망하겠는가? 필자의 견해는 절대 한국노래의 충격이나 도전에서가 아니고 이는 전적으로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께 귀결되는바 특히 새노래 창작이 너무너무 적고 또한 그 보급과 제고를 위한 조취,그리고 사계에세의 우리 음악문화 연구와 추진등이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우선 예기하게 된다.   주지하는바 노래는 일종 생활방식과 그 사회의식의 표출이다.그런데도 한국노래는 그저 우리와 한겨레인 동족유대관계에서 말과 글까지 서로 다 통해 아주 쉽게 접수되고 곧 잘 부를수 있는 것으로만 알면 좀 시비가 일지 않겠는가?실상 한국노래는 우리와 판이한 생활방식 이데올레기와 사회의식속에서 창작된 것만큼 그 어떤 한국노래는 혹 우리와 잘 어울리지도 않고 지어 국정과도 저촉된다.때문에 노래는 비록 국경도 없다고 해서 아예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 한국노래나 다 불러주는 것은 좀 고려할바 있고 또 적중하게 선택하여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지금 또 한방면 파생되는 문제점이라면 바로 적지 않은 조선족의 젊은 일대들이 중국노래나 한국노래에 치중해 우리 노래를 불러주지 않는 폐단이 만연되는 현상이다.실상 누구나 노래가 없는 민족은 아둔하고 꼭 소실되기 마련임을 익히 알고 있다.그런데도 젊은 일대들이 무턱대고 우리 부형들이 중국에 와서 정착해 가쁜 길을 걷고 또 쉼없이 달리는 세월속에서 풍요로운 새삶을 일쿤 그 생활의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모른다는 것은 너무너무 억망스럽고 또 상스럽지 못한 징후까지 보인다.참말이지,이렇게만 나가보면 멀지 않아 우리노래나 민족의 의식도 얼도 다 치닫아 혹 물거품이 되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예로부터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는 우리 민족의 가슴마다 아타까움으로 끓는데 일견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노래는 “재미없다”는 논조로 굳이 한국노래만 부르는 그 이유로 삼고 있다.이는 우리에겐 우수한 노래가 없다는 말일 것인데 사실상 지금 우리 노래 창작이 한창 저조기에 처한 상황에서 마구 역사나 전면적인 각도를 떠난 이 논조는 좀 공평치 못한 직감을 준다.역사는 비추는 거울,기실 우리 노래는 언녕 많은 우수한 노래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하면, “아름다운 나의 고향”(최정연 작사,정진옥 작곡), “사과배 따는 처녀”(장동운 작사,최삼명 작곡),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김성수 작사,최연숙 작곡)등과 지어 전국으로 진출해 한족들의 입에까지 오른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한윤호 작사,김봉호 작곡),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 (김철 작사,동희철 작곡) , “ 오래오래 앉으세요” (허종철 작사, 방룡철 작곡)등도 있지 않았는가? 특히 방초선이 부른 “처녀의 노래”(최정연 작사,정진옥 작곡)는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제6기 세계청년련환절에서 은메달까지 받은 이 모든 히트작들은 대중들의 폭팔적인 반응과 즐겨 부르는 것으로써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바로 이러한 노래로 우리 부형들은 중국에 와서 뿌리내렸고 또한 우리 새 세대들은 부단히 모진 엄한도 안개도 그리고 먼지까지 다 몰아내면서 무럭무럭 자라나 지금의 우리 조선족군체 사회를 무으고 있는 것이 아니였겠는가?   이처럼 노래는 삶이고 인생이다.때문에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는 것은 비단 민족문화 발전에서 뿐만아니라 더욱힌 우리 민족의 의식과 미래까지 다 다그치는데도 더없는 힘이 됨을 필자는 외쳐서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는 방도는 그 어디에 있겠는가? 요컨데 그 관건은 우선 우리 노래 창작을 더없이 다그치는 것이 선취일 것이다.실상 우리에겐 지금 창작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다.반면에 그 어느때보다도 방대한 창작대오를 갖고 있는바 그것도 수많은 고등교육을 받은 음악전문인재들을 말이다.그런데 그들이 격정에 넘쳐 창작된 새노래들은 응당 발표할수 있는 음악간행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때문에 최저로 예전처럼 “노래집”(흑룡강), “조선족노래집”(료녕) 등 음악간행물을 다시 복간시키고 또 지금의 “연변음악”(연변)을 성급이상 음악간행물로 올려 월간으로 꾸린다면 우리 노래 창작은 더없는 활기와 생기로 새봄을 맞이할 것이다.그리고 대중들이 각광받는 신문,잡지나 인터넷에서도 음악편집을 새로 두고 예전처럼 창작가요를 종종 실어주는 것도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또한 문화관 같은 문예부문과 방송,TV등 매체들에서도 정기적으로 새 노래 창작반을 꾸려 제때에 창작가요를 녹음해 발표해 주고 따라서 각지에서는 자주 활성화한 문예경연이나 노래콩쿨과 응모등을 조직함은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고 또 그 보급과 제고에도 한낱 더없는 역할을 기여할수 있는 것이다. 예서 한가지 실팍한 에피소드를 피로하면 글쎄 “생활안내”(연변)신문은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기 위해 임시로 음악 편집을 청해서까지 몇번 새 노래를 실어주었고 또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에서는 새노래 응모도 조직했는데 이는 참말 뜻밖의 경사가 아닐수 없다.이런 거동이야말로 그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향해 열린 폭넓은 마음의 자세에서만 비롯된 것으로 필경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것은 확연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재미 있는 노래” 창작에 제해 필자는 단한가지만은 우선 강조하고 싶다.즉 우리 노래 창작은 응당 오래동안 지속된 조선노래의 그 그늘속에서 벗어나야 하고 지금은 또 한국노래 그 물결에도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사실상 우리와 조선,그리고 한국은 생활방식이나 사회의식 그리고 문화까지 다 다르거나 차이가 있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반드시 똑같은 음악형상과 그 풍격의 노래가 나올수 있단 말인가? 응당 내라는 이 중국조선족의 생활에 착목하여 그 개성특색을 충분히 천착해 생생히 반영시켜야 할 것인바 예서 창의력과 독창성의 매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그러면서 또 정화를 받아들이는 원칙에 쫓아 조선노래나 한국노래 그리고 중국노래나 외국노래까지도 그 우수한 창작기교와 수법은 으례 따라 배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면에서 근년에 나온 그 전설과 같은 이민사를 형상화한 “아버지산 어머니강”(리홍국 작사,김세성 작곡) 또 출국열에 돈을 벌고 잊지 않고 고향을 찾은 “귀향부부”(서광익 작사,김경률 작곡) 그리고 연변축구팀의 응원가로 마치 백두호랑이가 출전하듯 힘차고 기세높은 “범 아리랑”(허동규 작사, 작곡)등 노래는 시대격정에 아주 절실하게 당대 중국조선족의 새생활을 반영하여 지금 대중들속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특히 그 풍부하고 청신한 선률의 멋진 표현력과 째인 절주 그리고 독특한 음악형상의 풍격은 더욱 생생하게 우리 민족의 숨결을 다 전해주었던 것이다.   사실상 재미있는 노래는 오직 보급의 기초에서만 제고를 가져오는 이 과정에서 줄곧 출현될 것이다.다시 말해서 오직 우리의 새로운 창작가요가 사태를 이루고 또 부단히 대중들속에서 널리 불러질 때,특히 방송,TV와 문예단체의 연출,그리고 각종문예경연이나 노래콩쿨에까지 채용하여 발휘될 때야 비로써 새노래의 보급과 제고를 다그치며 따라서 재미있는 노래도 자연히 육속 출현될수 있는 것이다.   노래는 그 민족의 얼굴이다.때문에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기 위해 하루속히 새 노래 창작의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으로 우리 노래가 획기적인데서 새롭게 발전하고 번영하는 길을 틔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 문장은 흑룡강신문 2010년 6월 26일 발표됨
1    주봉 프로필 댓글:  조회:2451  추천:289  2010-06-14
주봉 프로필 조선족 2세로 흑룡강성 목단강시 출생,말띠 사범대(수학계)를 졸업하고 한동안 교원,회사 직원,부문 경리,경리 등 직을 담당,현재 북경에서 자식들의 사업을 협조.   문학과 음악에 애호를 두고 자학과 함수로 약간한 문예창작을 전공해 창작한 노래나 문장을 다수 발표.  1994년, 한국KBS사회교육방송국의 해외동포청취문공모에서 “한국농민의 송가” 문장으로 대상을 받음.1998년,통,번역에도 투입.그중 한국의 저명한 작가 황순영의 소설 “미리 가 본 평화세상”을 번역,재미 조선족 문인 유순호의 “내가 사랑하는 조선족의 정조”등 여러 단편문장도 번역. 2008년, 전국 제3회 校园歌曲시합에서 “我呀我呀长大以后”(“나는 나는 크거들랑”을 번역) 소년아동가요로 2등 작곡상획득. 2009년, “조선어가 받는 도전과 그 대안” 문장으로 제2회 조글로 칼럼 우수상을 받음.   전  화: 150-1090-2906 E-mail: zf0725@hanmail.net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