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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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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항주 조선족사회의 과거와 현황(안성호) 댓글:  조회:1943  추천:1  2018-03-27
항주 조선족사회의 과거와 현황 안성호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속담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조선반도에서 중국땅으로 이주하여 살아오면서 마을과 지연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공동체가 삶의 기반이였고 우리 조상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주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반도 출신 지연이 전승됨과 동시에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크고작은 지연네트워크들이 새롭게 구축되였고 중시받게 되였으며 조선족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왔다. 이러한 지연네트워크는 1990년대 이후 조선족사회의 급격한 인구이동과 함께 확산되였다. 현대 통신기술발전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지연네트워크는 확산과 재조합을 반복하고 있으며 새로운 이주지에서 향우회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발전되고 있다. 전통적인 지연과 현재 거주지 지연이 결합된 새로운 지연네트워크는 도시화 시대 조선족사회발전의 새로운 특징이기도 하다. 북경, 천진, 청도, 상해, 심천 등 지역의 조선족사회는 이미 상당한 규모로 발전되였고 조선족단체들이 활약함으로 하여 새로운 지연네트워크와 조선족사회 발전망이 형성되였다.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족행사들도 지연성과 민족성 표상을 통하여 새로운 거주지에서 민족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지연성과 민족성이 련결되고 강화됨으로 하여 도시화 시대에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민족문화를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이를 위하여서는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보다 깊은 리해가 필요하며 우리 민족과의 련관성에 대하여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절강지역은 조선반도와 교류가 매우 밀접한 지역이다. 일찍 쌀문화가 우리 나라 강남지역에서 조선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신라, 고려로 이어오면서 바다를 통하여 많은 인적교류가 이루어졌는바 고려청자는 남송 황궁에서 애용하는 도자기였고 정씨, 팽씨 등 우리 민족의 많은 성씨들은 강남지역에서 기원한 성씨이다. 고려왕자인 의천대사는 항주 혜인사에 화엄경 등 불교경서들을 기증하였다. 중국에서 조선반도로 전해진 불교경서들이지만 중국에서 전란으로 인하여 분실됨으로 하여 중국으로 재류입되여 중국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항주 혜인사도 고려 의천대사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고려사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근대이래 항주지역과 조선반도의 관계는 조선반도의 독립운동과 련관되여있다. 1932년 5월10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해에서 항주로 옮겨왔고 1934년1월 한국독립당 본부도 상해에서 항주로 옮겨왔다.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1935년11월 진강으로 옮겨가기까지의 3년 6개월 동안 수많은 조선반도의 독립운동가들이 항주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그 자녀들은 항주 현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항주에는 조선반도의 독립운동가 후손이 조선족정체성을 지니고 생활하고 있다. 새중국 창립 이후 항주에 조선족들이 모이게 된 것은 졸업배치, 대학교진학 등을 통하여서이다. 1960년대 중엽에 이미 졸업배치 등으로 항주에 오게 된 조선족이 있었고 78급에 최초로 진학을 통하여 항주에 온 조선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 항주에 있는 조선족은 극소수였으며 대학생의 경우도 89급까지는 몇명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조선족 학생수는 매우 적었다. 절강대학교 94급생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절강대학에 연구생1명, 90급1명, 91급 1명, 92급 1명, 93급3명, 94급4명, 95급2명, 항주대학 연구생1명, 본과생 1명으로 모두 15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 절강농대, 절강의대 등 기타 대학에는 조선족학생이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학업졸업후 직장배치를 통하여 일부 조선족들이 항주로 남게 되였으며 절강성사회과학원, 절강대학교, 항주대학교 등 연구기구들에 조선족들이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절강성화극단 등 다양한 업종에서 조선족들이 극소수이지만 활약하고 있었다. 항주 조선족사회의 확대는 기타 연해지역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관광도시인 항주는 개혁개방 이후 우리 나라의 향항, 오문과 더불어 아시아 기타 지역에서 유람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관광활성화를 위하여 1989년 절강성관광청에서 아시아권 려행사 사장들을 초대하여 절강성 관광홍보행사를 진행하였다. 아직 수교 전인 한국에서도 16개 려행사 사장들이 초대되였다. 한국관광객 유치를 위하여 절강성내 여러 려행사, 황룡호텔 등 관광관련 업계들에서 동북에 가서 조선족졸업생들을 초빙하여왔으며 관광업을 중심으로 조선족들이 항주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향항을 경유하여 항주를 찾는 한국관광객들이 늘어남에 따라 항주 려행시장은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으며 통역 겸 가이드로서 조선족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였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려행객들이 단체로 항주려행을 다녀감으로 하여 관광업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이 대폭 증가하게 되였으며 2000년대 중엽까지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엽 이후 관광가이드에 대한 규범화, 상해려행사들의 항주관광업무 참여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점차 위축되게 되였으며, 조선족 가이드들은 황산, 장가계 등 타 지역으로 가거나 기타 업종에 종사하게 되였다. 관관업이 위축되고 있으나 항주 조선족사회는 2000년대 중엽 이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해외와 국내의 대학원 학업을 마치고 절강성내 대학교에 취직하는 조선족학자들이 꾸준히 늘어나게 되였는바 항주에 있는 대학교, 대학부속병원 등 기구에만 이미 50명을 초과하였다. 대학교 재학생들도 점차 늘어나게 되여 절강대학교만 하여도 40-50명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항주시 전반에 100명 좌우의 조선족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항주 기업 취직, 창업 등을 통한 항주 진출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등 한국회사들이 항주로 진출하게 되면서 조선족취업이 일부 늘어나게 되였다. 그러나 항주시의 경우, 현지 중국기업 취직과 독립적인 창업이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알리바바, 넷이즈(网易) 등 현지 중국 기업에 취직하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항주 조선족사회의 규모가 점차 커지게 되였다. 거주구역도 성시(城西), 하사(下沙), 빈강(滨江), 소산(萧山), 여항(余杭) 등 항주시 전역에 산재하여있다. 현재 항주 조선족인구는 800여명 좌우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족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여러가지 동호회, 동아리 등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였다. 2007년에 이미 조선족 산악회가 조직되였고 2014년 절강성조선족대학교수련의회가 발족되여 송년회, 등산 등 행사들을 진행하게 되였다. 2017년초, 항주시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되여 주말마다 축구경기를 진행하고 있으며 항주시조선족바드민톤협회도 설립되여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바드민톤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 해에 항주시조선족련합회준비위원회가 설립되였고 12월에 항주시조선족련합회가 정식으로 출범되였다. 2018년1월에 열린 항주조선족2018년 신년회 및 항주시조선족련합회 발족식에는 140여명의 조선족들이 참가함으로 하여 항주시 조선족사회의 친목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뭉쳐야 산다는 말이 있듯이 조선족사회 최대의 사회자원은 지연을 기반으로 하는 지연네트워크이다. 항주시 조선족사회는 력사가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이미 동호회, 련의회 등을 거쳐 조선족련합회까지 설립됨으로써 항주시 조선족 지연네트워크를 구축,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항주시라는 지연성을 지니고 타지역 조선족단체들과 교류하게 되는 여건도 갖추어지게 되였다. 조선족사회에서 진행되는 여러가지 모임과 행사들은 쓸모없는 술자리가 아니냐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모임은 조선족문화의 중요한 특징이고 호혜, 상통유무, 상호의존을 특색으로 하는 지연네트워크는 중요한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연성이 민족성을 특징으로 함으로 하여 산재지역 조선족민족문화의 전승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글로벌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여전히 집단적 정체성을 민족에서 찾고 있으며 모임과 모임에서의 교류를 통하여 조선족으로서의 집단적 귀속감을 얻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임을 기초로 하는 조선족사회의 지연네크워크 구축은 앞으로도 보다 강화될 전망이다. 조선족 지연네트워크의 구축과 강화는 현지 주류사회와의 활발한 교류와 현지 사회 적응, 현지 사회 기여 등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하며 협소한 민족울타리에서만 머물러있어서는 안된다. 뿌리줄기(块茎)형태로 발전되고 있는 조선족사회의 네트워크는 산산히 흩어져있는 조선족사회를 단합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글로벌 경쟁시대에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다. 인민넷 조문판 2018.3.26
87    현단계 중국경제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1825  추천:0  2018-02-27
      중국경제는 지난 30여년동안 고속성장을 이룩하여 오다가 최근에는 점차 성장속도를 6-7%대로 늦추고있다. 이러한 중고속성장에 대하여 일부 직장인들은 걱정스런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중국경제 성장속도가 느려지면서 기업의 이윤율에 영향을 주어 개개인의 소득에 영향을 주지 않을가 하는 생각때문이여서 일것이다. 많은 이들은 2008년의 전 세계를 휩쓴 글로벌 금융위기를 중국경제 성장속도가 하향하게 된 주된 원인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중국경제의 성장은 외부적인 경제충격과도 련관이 있다는 점은 일리가 있는 견해이다. 왜냐면 중국경제는 더는 예전의 봉쇄된 경제가 아니라 외부 시장과 밀접한 련계가 있는 개방적인 경제이고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래 대외수출과 투자는 이미 중국경제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요인으로 변하였기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세계경제발전상황은 중국경제 성장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요인일뿐 주된 원인은 아니다.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국가가 공업화 발전단계를 거쳤지만 아쉽게도 대다수의 국가는 장기간의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였다. 수십개의 국가들중에서 10여개 정도의 국가만이 성공적으로 공업화를 실현하고 고소득국가행렬에 들어서게 되였는데 이들의 공통특점을 보면 일정한 경제수준에 도달한후 모두 하나같이 경제성장속도가 큰 하향세를 보이였다.   한국의 경우만 봐도 60년대후반부터 90년대 아세아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까지는 전 세계 초고속성장의 대표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겪은 뒤로 경제성장이 중저속단계에 진입하였고 그뒤로 현재까지 다시는 8%대의 성장단계로 들어서지 못하였다. 물론 한국의 경우 아세아금융위기가 한국의 전반 경제발전과정에서 고속성장을 결속짓는 방아쇠역할을 하였다고 볼수 있지만 아세아금융위기의 영향이 훨씬 적은 일본이나 싱가포르등 국가들의 경우를 봐도 대개 비슷한 상황을 보이고있다.   세계 수많은 국가의 경제성장과정을 살펴보면 대개 류사한 발전패턴을 나타내고있다. 다시말하면 그 어떤 국가도 고속성장을 항상 유지하기 어렵고 일정한 경제수준에 도달하면 성장속도가 느려지는것은 일종의 법칙처럼 되여있다. 경제성장속도의 하향추세는 외부원인보다도 국민경제의 내부 경제구조와 성장방식에 비롯된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당초 중국을 비롯한 발전도상의 국가들은 어떻게 장기간의 높은 경세성장을 이룩할수 있었을까? 그 답은 후발적인 우세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발전도상의 국가들은 자본보다도 로동력과 자원관련 원자재의 가격이 싸기 때문에 대량으로 로동력과 원자재를 투입하는 로동과 자원소모적인 성장방식에 집중하게 된다. 로동력과 원자재 가격의 우세는 발전도상의 국가로 하여금 국제시장에서 관련 상품이 낮은 가격으로 높은 국제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로동집약형과 자원집약형 상품의 수출과 더불어 발전도상 국가의 기업과 국민소득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일정한 단계에 진입하면서부터 국민소득의 상승과 함께 로동력가격도 상승하게 되고 주민의 거주환경 개선과 함께 자연자원에 대한 개발도 점차 속도를 늦추게 된다. 이러한 성장방식과 경제구조는 발전도상의 국가가 초고속 성장단계에서 중고속이나 중저속 성장단계로 전이하게 되는 근본원인이라고 볼수 있다.   현재 중국경제도 이러한 전환단계에 처하여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진행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5년 사이에 전국 임금수준은 2.95배 상승하였고 아직도 여전히 년평균 8%정도의 속도로 상승하고 있으며 이러한 임금성장속도는 전세계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환경보호에 대하여서도 중시를 돌리고 있고 기업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페기, 페수등에 대하여 엄격히 통제하고 이를 위반하는 행위에 대하여 엄벌하고 있다.   2017년 환경보호부는 전국의 도시에 대하여 순찰하고 현장검사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전국의 446개의 국가급자연보호구에 대하여 감독과 검사를 실시하였다. 이런 검사를 통하여 주민들과 기업의 환경보호 의식을 강화하였을뿐만아니라 기업의 페수,페기 배출등 행위를 막아내고 환경보호령역에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다.   현재 중국경제상황을 보면 비록 경제성장이 초고속성장이 아닌 중고속성장으로 변하였지만 전반적인 경제지표를 보면 여전히 량호하다고 할수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경제개혁은 현단계뿐만아니라 앞으로도 장기간의 경제발전에 유익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더욱 의의가 있다. 물론 일부 기업들이 계속 예전의 생산과 경영패턴을 고집하다보면 경제수익성이 떨어지고 경영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국가의 전반 경제성장패턴이 바뀌고 있는만큼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발전전략과 경영마인드를 바꾸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인민넷조문판  
86    "인터넷+조선족": 새로운 희망을 본다(박광성) 댓글:  조회:1743  추천:2  2018-02-19
이 세상의 모든 성취 뒤에는 인간의 결합이 있다. 한 개인의 힘은 개미와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생존에 필요한 큰 일들을 해낼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결합되여 집단을 구성하고, 그 집단이 어떻게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수요를 충족시켜나가는가가 사회생활의 핵심문제이다.   인간이 집단을 구성함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이 있으나, 장구한 력사시기에 있어서 “지역”이란 단위가 인간집단을 형성하는 “큰그릇”의 역할을 해왔다. 사람들이 장기간 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분업을 형성하고, 상부상조하는 생활체계를 만들어 왔던것이다. 따라서 쓰딸린의 민족리론만 보아도 “지역”을 “민족”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보았다.   근대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지역구조”는 큰 변화를 겪는다. 기존에 작은 단위의 “촌락공동체”들이 점차 “도시”라는 새로운 형식의 지역단위로 대체되기 시작하며, 이에 따라 인간사이의 상호작용 방식도 크게 변하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는 이를 “공동체사회”에서 “리익사회”로의 리행으로 파악하며, 짐멜이라는 학자는 이를 “숙인사회(熟人社会)”에서 “낯선사회(陌生人社会)”로의 전환으로 파악한다. 총적으로 말하면, 인간사회가 “정”에 기초한 사회에서 “리익”에 기초한 사회로 전환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지역구조”의 변화가 인간의 사회관계를 변화시키고있는것이다.   지난세기 80년대 말부터, “지역”이란 존재는 또 한번의 거대한 변혁을 맞게 된다. 기존의 변화가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전환이라면, 이번 변혁은 “지역”이 인간생활에서 의미가 날로 약화되는 “탈지역화(脱域化)”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다. 인간이 휴대폰을 통하여 물품들을 구매하고, 휴대폰을 통하여 장사를 하고, 휴대폰을 통하여 타인들과 대화하고, 휴대폰 통하여 여유생활을 즐길수 있게 됨에 따라, 지역적 혹은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더욱 큰 세상과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된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지역”이 별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어느 곳에 위치하여있지만, 인터넷이라는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련결되여있어, 이 지역과 유리되여있어도 생활에서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때문이다. 집안의 책상에 앉아서 세계와 자유롭게 대화할수 있게 되였다. 인간사이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것이다.   따라서 “지역”의 중요성이 날로 약화되고있다. 기존에 인간을 “지역적인간”으로 본다면, 오늘날의 인간은 “네트워크인간”인것으로, 기존에는 “지역”을 기초로 집단을 형성했다면, 오늘날에는 “네트워크”를 통하여 완전히 집단을 구성하고 영위해나갈수 있게 되였다. 따라서 최근에는 “탈지역화”가 사회과학연구의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고있다.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의 추세를 놓고볼 때, 종종 지역사회의 쇠퇴를 근거로, 조선족사회의 해체를 운운하는것을 20세기적 발상으로 볼수 있다. “탈지역화”는 이미 새로운 사회발전의 추세로, 인간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이 가상공간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지역”은 더 이상 “집적(集積)”공간이 아닌 “류동(流動)”공간으로, 하나의 “정거장”으로 되여버렸다.   조선족사회를 놀고 보아도, 류동으로 구성원들이 동아시아지역, 나아가 북미, 유럽지역까지 퍼져있지만, 상호소통으로 인한 사회적밀도는 예전보다 훨씬 증가되여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방송이나 신문을 통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민족사회의 소식들을 접할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위챗을 통하여, 미국에 있는 친구가 점심식사를 뭘로 했는지까지 알수 있는 세상이 되여버렸다. 즉 지역적으로 확산되여있지만 상호작용의 밀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된것이다.   작년에 고향친구의 조카가 백혈병에 걸렸었다.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친구라 그 소식이 위챗을 통하여 전해지자, 세계 각지에 있는 지인,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조차 분분히 위챗을 통하여 성금을 보내왔다. 거액의 치료비는 금방 해결되였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속에서 아이는 병마를 이겨냈다. 친구는 “좋은 세상을 만나서 아이가 살수 있었다”고 감개무량해했다. 옛날 동네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이것이 곧 인터넷, 련결의 힘이다. 련결의 시대에 한 집단은 결코 해체되지 않는다, 다만 개조될뿐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조직 혹은 집단창출이 기술혁신 못지 않게 생산력을 추진하는 힘으로 큰 관심을 받고있다. 마운이 이끄는 알리바바의 경우, 인터넷을 통하여 사람들의 소비행위를 변화시킴으로써, 창업한지 십여년 밖에 안되는 기업이 많은 가라성 같은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부상하였다. 새로운 모델 창출이 획기적인 성공을 견인한것이다.   최근에 북경대학의 한 교수는 인터넷 기술의 활용능력이 빈부격차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기존에는 인터넷의 “접속의 불평등”이 빈부격차를 조장한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였지만, 이 교수는 기초시설이 많이 개선된 생황에서 접속의 불평등보다, 활용능력이 빈부를 유발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그는 절강의 농촌들에서 할머니들이 손자를 품에 안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물건을 파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남방에는 토보촌(淘宝村)이 많은 반면, 북방에는 왕바(网吧)가 많은 현상을 주목한다. 알리바바가 제공한 수치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는 인터넷 활용능력이 개인이나 지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있음을 론증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터넷이 우리의 생활세계를 재구조화시킬뿐더러,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터넷 활용능력은 구경 어떠한가? 사실 조선족과 같이 “탈지역화”가 빠르게 진행되고있는 집단도 드물며, 인터넷상의 케뮤니티도 나름대로 활성화되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터넷을 얼마나 생산적으로 활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혹 “접속”에만 열중했을뿐 “활용”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하지 않은것이 아닐가? 또한 우리가 얼마나 인터넷을 자신이나 민족사회가 성장할수 있는 수단으로 고민해보았는지를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래가 초련결사회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인터넷으로 련결된 가상공간이 활성화됨에 따라, 사회생활의 “탈지역화”가 더욱 현저하게 이루어질것이며,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들이 가상공간으로 이동될것이다. 따라서 인터넷이 산업은 물론 기존의 인간사회의 결합방식마저 획기적으로 개변시킬것이다. 그속에는 “민족”도 포함되여있다. 즉 인터넷이 “민족”도 개변시킬것이다. 예전에는 “민족”이 “지역”에 의존하여 존재했다면, 앞으로는 “민족”이 인터넷에 의존하여 유지되고 활성화될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인터넷+조선족”을 제기하는 리유다. “탈지역화”되는 현실속에서 조선족은 더이상 단순히 “지역”에만 련련하지 말고, 광활한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 길에 우리의 새로운 미래가 있을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85    조선말이냐 한국말이냐(권진홍) 댓글:  조회:2451  추천:0  2018-02-06
정음우리말학교에 대해 자문하는 분들의 전화를 자주 받게 된다. 대부분은 등록시간, 수업시간 등등에 대한 내용들이지만 가끔은 정음우리말학교에서 가르치는 우리말이 한국어이냐 조선어이냐 하는 물음도 있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이주해 와서부터 지금까지 배워오고 사용해온것이 부정당하는것 같아 이런 물음을 접할 때마다 살짝 기분이 언짫아지군 한다. 듣다보면 그러려니 할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면역은 잘 생기지 않는다. 번마다 속으로 한숨 길게 들이쉬고 또 한번 더 쉬고 대답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재는 재외동포재단에서 지원받는 한국에서 만든 교재라고. 그러면 또 가르치는 선생님이 한국인이냐 조선족이냐 하고 집요하게 물어오는 분들이 있다. 한국 선생님도 계시고 조선족선생님도 계신데 대부분이 조선족선생님이라고 답해준다. 묻는 물음에서 이미 선입견을 감지해낸터라 전화로 루루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싶지 않아 묻는 말에만 간단명료하게 답변을 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 사람만이 원어민이라고 생각하고 “원어민”이 가르쳐야만 잘 가르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떤 “원어민” 교사가 어느 한번 이런 말을 하는것을 들은적이 있다. “나는 우리 한국어가 너무 쉬운데 왜 다들 어렵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어이쿠~~~” 했다. “원어민”이라고 해서 별 우세가 없음을 설명하는 한 장면이였다. 우리말에 대한 전문지식이 조금이나마 있고 어려운 문법들을 최대한 쉽게 아이들한테 풀어주려고 노력해본 선생님이라면 절대 쉽게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무작정 믿고싶어하는것, 맹목적으로 닮아가고싶어하는 현상은 이제는 지양되여야 한다. 이 기회에 도대체 “원어민”이 무슨 뜻인지도 한번 살펴보고싶다. 사전에서는 “원어민”을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원어민: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 우리말은 한국과 조선, 이렇게 남북이 분단되면서 같은 언어인데도 불구하고 명칭을 달리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 조선에서는 문화어, 그리고 우리 중국에서는 조선어.  많은 사람들이 왜 한국어라고 하고싶어하고 조선어가 아닌 한국어를 배우고싶어하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만할거 같기도 하다. 오직 한국말, 그것도 중부방언- 사람들이 익히 알고있는 서울말을 구사해야만 한국적인것 같았고 그 한국적이라는것에 자신감이 충만되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다수 존재한다. 다른 방언을 사용하면 어딘가 서툴고 투박스러운것처럼 말한다.  사실 우리말(한국어, 문화어, 조선어)은 하나의 언어체계이다. 다 세종대왕님이 창제한 문자를 사용하고 기본문법도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어느 언어나 다 방언이 있듯이 우리말도 방언이 있다. 지역에 따라 중부방언, 경상도방언, 전라도방언, 충청도방언, 평안도방언, 함경도방언, 제주도방언 등등으로 나뉘여진다.  그러면 방언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될가? 방언은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이다. 어떠한 요인에 의해서 분화된 결과이냐에 따라 방언은 흔히 지역방언과 사회방언으로 나뉜다. 지역방언은 지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져있음으로써 생기는 방언을 말하며, 사회방언은 동일한 지역안에서 사회적인 요인에 의하여 분화된 방언을 일컫는다. 지역방언은 험준한 산맥이나 큰 강, 넓은 삼림(森林), 늪지대, 바다 등의 지리적장애로 두 지역간에 래왕이 불편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생긴다. 결정적인 장애가 없더라도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져있으면 방언차가 자연히 생긴다. 그리고 거리상으로는 가깝더라도 행정구역이 다르다든가 경제권이 다르다든가 하여 래왕이 적으면 애초에는 같은 말이였던것도 분화되여 역시 서로 다른 지역방언이 된다. 우리 조선족들들은 중국에 이주한 력사가 꽤 오래 지났지만 선조들이 사용하는 방언 억양을 보류하고있어서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 전라도 등 여러 방언 억양을 그대로 보전하고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경상도, 전라도와, 또는 조선에 있는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과 말하는 방식이 꼭같지는 않다. 우리는 이미 장시기동안 정치권도 경제권도 그들과는 다른 지역에 정착하여 오랜 세월을 살면서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특색이 생성되였다.  우리 중국의 조선어와 한국어가 하나의 언어체계임은 누구나 다 알고있다. 그러면 우리 조선어와 한국어는 도대체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몇가지만 적어본다. 첫째, 사전을 펼쳐보면 자모배렬에 차이가 있음을 알수 있다. 조선어: 자음-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 모음-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ㅐ ㅔ ㅒ ㅖ ㅚ ㅙ ㅟ ㅘ ㅝ ㅞ ㅢ 한국어: 자음-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모음-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어느 배렬이 더 과학적이라고 할수는 없겠지만 이 두가지 순서에 맞춰 각각 강의를 해본 결과 조선어배렬에 따라 가르치는것이 훨씬 효과적이였다. 두번째, 두음법칙의 유무이다. 조선어에서는 어두에 나타나는 “ㄹ”, “ㄴ”를 다 그대로 기록하지만 한국어에서는 어두에 “ㄹ”이 출현할수 없다. “ㄴ”도 뒤에 “ㅣ”와 합쳐질 경우 “ㅇ”으로 변한다. 그래서 조선어에서 ‘로인, 리발, 녀자’ 등으로 쓰는것을 한국어에서는 “노인, 이발, 여자” 등으로 적게 된다. 세번째, 우리말에서 “토”라고 하는것을 한국어에서는 주로 체언과 부사 등에 사용되는 “조사”와 동사, 형용사 뒤에 활용하는 “어미”로 나누었다.  네번째, 띄여쓰기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의존명사를 앞 단어에 붙여쓰는 조선어와 달리 한국어에서는 조사 이외의 어휘들은 다 띄여쓰기로 되여있다. 아마 언어학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두음법칙과 띄여쓰기만이 눈에 띄일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따지면 또 여러가지 차이가 좀 있지만 전체적인 언어체계를 파괴할 정도는 아니며 서로의 글이나 말을 리해하고 소통하는데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 경제가 다른 지역에서 생활함에 따라 형성된 새로운 우리의 언어를 우리 자신이 부정한다는 점이다. 중한수교 이후 경제적으로 좀 많이 우세했던 한국을 접하면서 “한국우월주의”에 너나없이 감염되여 우리가 사용하던 언어마저 한국에서 사용하는 언어보다 세련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렬등감을 가졌던것이다.  원래 함경도방언, 평안도방언, 경상도방언 등을 사용하던 우리사회의 일원들이 무조건 “한국말(서울말)”만 사용하려고 하고 아이들한테도 “한국말”을 가르쳐야 한다고만 한다. 언어도 시대에 따라, 지역환경에 따라 변화하고있음에는 무감각인채로. 그래서 본인에 대한 자신감 저하를 가져왔을뿐만아니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주위 사람들마저도 신임하지 못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이고 사유의 도구이다. 우리 언어로 사유하고 우리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는것이 중요하지 어조나 억양을 굳이 남의것에 맞춰가려고 하는것은 자신감부족을 의미할뿐이다. 그리고 요즘은 어디서나 개성적인것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따라하는 “서울말”보다 오히려 내 몸에 베여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류창하게 구사할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매력적일것이다. 우리에 대해 자존감, 자신감을 좀 더 높여 보다 우리다운 우리로 한걸음 더 성장해가는 모습을 갖는것이 필요하다. 인민넷조문판 2018.2.5
84    디아스포라 경계인으로서의 글쓰기(전월매) 댓글:  조회:1922  추천:0  2018-01-12
       스웨덴 한림원은 2017년 10월 5일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수상리유는 "정서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인간의 환상 아래 숨어있는 심연을 드러냈다"라고 밝혔다. 영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이번이 열번째이고 일본출생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는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만엔 원년의 풋볼》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1994)에 이어 가즈오가 세번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는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여나 5세때 영국으로 이주했다. 1978년 켄트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철학학사를 받고 1980년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에서 문예창작석사를 받은 뒤 1982년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데뷔작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를 배경으로 한 《창백한 언덕 풍경》(1982)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나가사키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정서를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으며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수상했다. 1986년 출간한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도 같은 상을 한번 더 수상한데 이어 그의 대표작이자 1930년대 영국 격동기를 배경으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가치관 혼란을 담아낸 《남아있는 나날》(1989)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는 력사소설뿐만아니라 과학환상소설, 추리소설,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1995)로 첼트넘상을 받았고 같은 해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으며 영미권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립지를 다졌다.   가즈오는 모국인 일본과 거주국인 영국을 잘 아는 “중간상태”의 경계인으로서의 디아스포라 작가이기에 일본과 영국을 아우르는 글들을 쓸수 있었다. 가즈오처럼 노벨문학상을 획득한 이민작가로는 아일랜드출생의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사뮈엘 베케트(1969), 폴란드태생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교수인 체스와프 미워시(1980), 뽀르뚜갈출생이지만 추방당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1998), 토이기 출생의 오르한 파묵(2006), 토니 모라슨(1993) 등이 있다. 적지 않은 이민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수는 디아스포라문학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있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례이기도 하다.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작가로 손꼽히는 이들로는 미국의 이창래; 일본의 유미리, 이회성, 이양지, 현월; 중국의 허련순, 김인순 등을 꼽을수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리스어 동사 “speiro(씨를 뿌리다)”, “dia(넘어서)”에서 유래되였다. 기원전 6세기 유태인들이 나라를 잃은후 세계 각지로 떠돌이생활을 해온 그러한 비참한 상황, 원거지에서 다른 곳으로의 집단이주를 가리킨다. 1900년대에 들어서서 디아스포라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디아스포라는 유태인의 경험뿐만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국제 이주, 망명, 난민, 소수민족공동체, 문화적차이, 정체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였다.   근현대 디아스포라는 세계나 국가적인 정치권력이나 경제력, 군사력 등에 의해 국가들지간의 경계지대에서 이동하는 개체 인간이나 혹은 한 국가의 주변부에 살고있는 민족공동체로 확장되였다. 한 국가의 주변부에 살고있는 민족공동체로는 일본의 재일조선인과 재일한인, 미국의 재미한인, 로씨야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이 있다. 이들은 한 국가에서 소수민족이나 소수자이다.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는 대개 고향에 대한 끝없는 향수와 고향과 관련된 기원신화를 공유하는것,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서의 정체성 갈등, 이주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는 변두리상태, 경계인으로 살아가기 등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있다.   한국계 미국작가 이창래는1995년 장편소설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을 출간해 헤밍웨이문학상 등 6개 문학상을 휩쓸며 해마다 노벨상 단골 후보로 꼽혀왔다. 《영원한 이방인》은 정치적사건에 련루된 한국계 미국인 헨리박을 앞세워 이방인으로 존재할수밖에 없던 한 남자의 삶과 정체성 문제를 다루었다. 즉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주류의 사회에 끼지 못하고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헨리박은 경계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자신 스스로에게 또 세상을 향해 웨치고있다.   재일교포작가 이회성은 1971년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유미리는 1996년 《가족시네마》로, 현월은 1999년 《그늘의 집》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는데 이들의 작품들은 재일교포들의 애환적인 삶을 다루고있다. 1988년 《유희》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양지의 장편소설 《나비타령》은 거주국에도 속하지 못하고 모국에서도 자기의 귀추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원한 이방인의 애환을 그렸다.   중국조선족작가 허련순은 중국에서 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 《바람꽃》(1996)은 한중수교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에게 동포포서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돈때문에 엄청난 모멸을 느끼고 불법체류자로서 법적, 제도적 억압을 경험하면서 조선민족이라는 민족정체성보다 중국공민으로서 국민정체성을 강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2004)에서는 이중적정체성의 갈등으로 고민하고있는 조선족의 과거와 현실을 통해 고향상실과 더불어 목숨을 내건 고향찾기의 실패의 비극을 이야기하고있다. 《중국색시》(2014)는 재외동포법의 개정으로 조선족의 한국이주가 자유로워지자 한족과 조선족의 혼혈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녀성과 교통사고로 인해 장애로 자기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남성이 자신의 상처에 함목되여 상대를 리해하지 못해 결혼이 파탄에 이르고 긴 시간뒤에 사랑의 힘으로 화해하는 모습으로 한국인과 조선족의 협력과 화합을 그리고있다.   중국조선족작가 김인순은 장편소설 《춘향》으로 중국소수민족문학 대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재미교포작가나 재일교포작가들처럼 그녀도 거주지언어로 창작활동을 한다. 김인순의 《춘향》(2008),《판소리》(2000), 《기》(1999), 《고려왕사》(1999) 등 작품들은 민족을 소재로 하여 끊임없는 민족정체성을 탐색하고있다.   그외에도1993년 작품 《택시광조곡》이 영화로 제작돼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하여 화제가 되였던 재일교포작가 양석일은 재일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소설의 주요 소재로 삼았는데 그는 장편 《피와 뼈》에서 한국인들의 생활지역인 오사카를 배경으로 재일교포 1세들의 삶과 이데올로기를 유장하게 그려내였다. 어머니가 한국인인 한국계 미국작가로 영국에서 활동중인 미라 스타우트는 그의 첫 작품인 《천그루의 밤나무》에서 자신의 외가집인 고씨 가문을 소재로 한국 근현대사를 조명했다.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노라 옥자 켈러는 등단 초기부터 꾸준히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을 써왔는데 소설 《종군위안부》를 출간했다.   중간상태에 처해있는 디아스포라의 개체인 이민작가들은 모국과 거주국의 문화계통에 대해 잘 알고있는 제3의 문화계통이라 할수 있다. 이러한 제3의 문화계통을 가진 경계인들은 자유롭고도 보다 넓게 경계의 공간을 넘나들수 있어서 풍부한 소재를 갖고있다. 이들은 모국과 거주국인 두 나라의 자연, 인정, 세태를 잘 리해할뿐아니라 이국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기 민족과 문화를 비춰볼수 있다. 나아가서 여러 문화와의 접목을 꾀하는데 예술적형식에서도 고금중외의 우수한 문학과 예술의 기법을 적극 수용해 변형, 환몽, 패러디,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하고 시도한다. 이는 단일문화구조에 비해서 더욱 강한 문화적기능과 예술창조력을 가지는데 그 결과 문화적 변이와 혼종성을 일으켜 다중문화신분을 갖게 된다. 다중문화의 풍부함과 심오함이 최근에 세계적범위에서 디아스포라작가, 디아스포라문학이 각광받는 리유가 아닐가싶다. 인민넷 조문판
83    크리스마스가 주는 명절문화의 계시(허명철) 댓글:  조회:1821  추천:0  2017-12-28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년말이 되면 부모님이나 일가친척 또는 친구들에게 년하장(賀年卡)을 보내면서 새해의 축복을 전달하는것이 하나의 문화로 되였었다. 이러한 축복방식은 언제부터인가 성탄카드로 바뀌기 시작했고 크리스마스는 새해맞이행사의 주메뉴로, 새해맞이 분위기를 띄우는 단골로 되였다. 도시의 번화한 거리에 위치해있는 가게들 거의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문화기호로 장식되여있고 그동안 왕림해준 고객들에게 보답한다는 뜻에서 다양한 이벤트행사를 조직하고 풍성한 선물을 준비하기도 한다. 따라서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오색찬연한 성탄수들이 도시의 밤거리를 장식하는것은 물론 상가들에서도 여러가지 이벤트행사를 벌리면서 고객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것은 하나의 관례로 되여왔고 소비자들도 모름지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되였다.   사실 종교적차원을 떠나서 크리스마스를 규명해본다면 크리스마스는 일종의 제전(祭奠)으로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에 불과하다. 기독교문화의 상징으로 되고있는 예수는 유교문화에서의 공자, 불교문화에서의 석가모니와 마찬가지로 인류문화의 중요한 한페지를 엮어온 문화시조이기도 하다. 문제는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나 공자의 탄생일과는 전혀 다르게 무엇때문에 크리스마스만이 종교적신앙의 경계를 넘어서 동서양을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즐길수 있는 대중화한 하나의 축제명절로 되고있는가 하는것이다.   기독교신도들이 교회에서 진행하는 행사와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대중화한 명절로 승화될수 있는 남다른 요소들을 구비하고있지 않을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각자 알찬 한해를 보낼수 있었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또한 새해의 축복을 기원하는 적합한 시점이라는 시간적요소도 중요하겠지만 계층과 신분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길수 있고 참여할수 있다는 크리스마스의 대중화한 상징적기호들의 흡인력때문이 아닌가싶다. 크리스마스하면 누구나 부담되지 않는 크리스마스카드,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방울소리 울린다"는 명쾌한 멜로디, 이쁘장한 붉은색 모자, 오색찬연한 성탄수들이 쉽게 련상된다. 이들 상징적기호들 또한 평안과 행복을 기원해주는 소박한 가치리념을 반영해주고있다. 다시말한다면 대중들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는 소박한 희망을 대중화한 상징적기호로 전달해주는것이 크리스마스의 매력인것 같다.   이처럼 크리스마스와 같은 "수입명절"은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하여 하나의 명절문화로 되고있는 반면 우리들의 전통민속명절은 오히려 많이 위축되고있다는 점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개혁개방에 힘입어 우리들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은 크게 제고되여왔고 자체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도의 증가와 더불어 다양한 축제행사도 펼쳐지고있지만 현시대에 걸맞는 민족문화창달에 있어서 너무나 안일한 자세를 보여주고있는것 같다. 일례로 해마다 단오절이면 우리는 단지 시장에 나가 쭝즈(粽子)를 사먹는데 그치며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단오명절놀이인 그네뛰기나 널뛰기, 민속씨름 행사도 표현자와 관람자의 관계를 구성할뿐 대중적인 참여는 한계를 보여주고있다. 우리 민족의 민속명절이란 공(公)적 행사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의 공(共)적 참여와 받침이 없다면, 다시말하면 공(公)과 공(共)의 결합이 없다면 언젠가 우리의 민속명절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될것이다. 많은 대중들의 참여와 지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우리도 자체 민속명절의 상징적기호를 발굴하는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뜻풀이하면 예수라는 성인이 탄생한 날이다. 모든 민족에게는 민족의 시조, 문화의 시조가 있으며 성인이 있는바 이들이 탄생한 날은 그 민족에게 있어서 “성탄절”이 될수 있는것이다. 자기 민족과 문화의 시조를 기념하는것은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기원하는 중요한 표징이라 할수 있다. 반면 자기민족의 시조를 잊어버린다면 민족의 부흥을 담론할 자격마저도 없다. 그 어느 민족과 마찬가지로 우리민족도 민족의 시조나 문화의 시조로 상징되는 성인이 있다. 이들의 탄생한 날자가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적인 성탄절이 될수 있다.크리스마스도 결국은 예수의 탄생일이다. 우리가 공자 탄생일에 제를 지낸다거나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행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앙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종교적요소를 떠난다면 역시 그 집단의 조상의 제를 지내는것이라 볼수 있다. 우리도 자체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민족문화의 정신가원(家园)을 지켜 가는데 일조하고자 자체의 명절문화를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이 요청된다. 인민넷
최근 몇년래 한국에서는 “조선족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있다. "황해", "신세계", "차이나타운" 등에 이어 올해 2017년에는 "청년경찰", "범죄도시", “악녀" 등 무려 세편의 영화가 개봉되였으며, 그중 “범죄도시”는 추석년휴 개봉 시 일일흥행순위 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에 재한동포총련합회, 중국동포한마음협회 등 47개 단체로 구성된 “중국 동포, 다문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한국 영화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이들 영화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고, 중국동포들은 "한국에 정착해 지역사회와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는 중국동포를 리유 없이 매도하고있다"고 토로하고있다. 실제로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족들은 사회・문화적으로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중국인” 혹은 “3D업종에 종사하는 최하층 로동자”라는 고정관념속에 위치해있으면서 무시, 편견, 차별의 경험을 하게 되며, 법적・제도적으로도 미국과 일본 등 발달국 출신의 “동포”와는 구별되는, 출입국과 체류자격이 엄격히 제한된 “동포”의 사회적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조선족의 한국이주가 거의 30여년이 되여가고있는 현재 조선족을 폄하하는 영화가 흥행하며,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은 왜 지금도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하게 되는가.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필자는 재한 조선족들의 차별적처우를 헤르트 홉스테드의 문화분석리론을 바탕으로 한국문화의 속성과 련관 지어 살펴보고 한국에서의 외국인차별해소를 위한 제언을 해보고자 한다. 홉스테드모델로 알려진 VSM에 의하면 문화적 가치지향성은 개인주의/집단주의, 권력거리, 남성성/녀성성, 불확실성회피성향, 과업지향성/인간지향성 등과 같은 5가지 차원으로 나눌수 있다. 재한 조선족들에 대한 차별실태 분석에 유용한 개인주의/집단주의, 권력거리, 불확실성회피성향 등 세가지 차원에 대해서만 언급한다면, 홉스테드는 집단주의는 자기와 내집단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 “우리”가 시작되는지 확실치가 않아, 단결이 잘 될 때는 좋지만 상황이 안 좋을 때는 서로간의 불분명한 경계때문에 갈등이 많이 생기며, 그 대신 내집단과 그밖의 불특정다수 사이의 경계는 매우 뚜렷해서 여간해서 뚫고 들어가지를 못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집단주의는 결국 내집단에 속하지 않은 타자에 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 권력거리란 사람들 사이의 의존관계의 척도로서, 이것이 높다는것은 계층간에 감정적거리감이 크다는것을 의미하며, 높은 권력거리 문화에서는 낮은 계층 구성원들이 높은 계층 구성원에게 선뜻 다가가서 쉽게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하기가 어렵고 반대의견 같은것은 내놓고 말한다는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높은 권력거리는 곧 힘없는자에 대한 차별로 귀결된다. 불확실성회피성향이란 불확실하거나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해 갖는 불안감의 정도를 말하며, 불확실성회피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무언가 색다른것을 접할 때 다른것은 위험하다는 반응이 우세한데 반해, 낮은 나라에서는 다른것은 흥미롭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따라서 불확실성회피성향은 다른것에 대한 강한 차별성을 내재하고있다. 요약하면 집단주의는 개인주의에 비해 집단의 개인에 대한, 그리고 내집단의 외집단에 대한 차별이 강하고 큰 권력거리문화는 작은 권력거리문화에 비해 지적, 경제적, 신분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강하며 강한 불확실성회피성향문화는 약한 불확실성회피성향문화에 비해 비주류 혹은 주변적 세력에 대한 차별이 강하다. 그렇다면, 한국문화에서 이러한 속성들이 어떻게 나타나고있는가. 먼저, 한국인들은 집단주의성향이 강한 집단이라 할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모든 이주로동자들은 “이주자” 즉 외부인이나 이방인들이다. 조선족들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일부분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이은 모든 사람을 “우리 민족”이라고 인식하기도 하지만, 중국에서 이주한 조선족들은 그들에게 여전히 “외국인” 혹은 “이방인”들이다. 필자의 조사에서 알수 있듯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은 꼭 한번쯤은 “개네 중국사람이 돼서 안돼”, “중국에서 거지가 왔다” 등등의 모욕적인 언행을 당한 경험이 있을것이다. 이처럼 조선족들은 “우리”집단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한 영원한 “남”인것이다. “우리”와 남을 구분하여 행동하는 경향은 모든 인간집단에 공통된 현상이라 할수 있으나, 한국인들의 “우리”에 대한 애착과 남에 대한 배타성은 좀 유별난 측면이 있다. 한국의 최재석교수는 이러한 한국인의 성향을 친소구분의식이라 이름짓고, 그 뿌리를 유교륜리의 혈연중심적 가족주의에서 찾았다. 이러한 가족주의에서는 개인의식보다는 집단의 동질성과 뉴대나 포괄적인 집단의식이 강조된다. 중요한것은 “우리끼리 문화”가 국가차원으로 확대될 시, 단일민족으로서의 “우리”인 한국인과 “남”인 외국인이 대비되는 인식구조가 생겨나게 된다는것이다. 따라서 단일민족으로서 혈통의 단일성, 문화적 동질성이 끊임없이 강조되는 한편, 외부의 다른 민족집단에 대한 경계와 대항 의식이 고취된다. 자신들 이외의 타민족들은 “이웃”이 아니라 “밖”의 개념으로 인식되여 잠재적인 침략자거나 경쟁자로서 부각되며, 외국인은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 된다. 다음으로, 한국문화에서는 높은 권력거리와 강한 불확실성회피성향문화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통유교사상이 잔존하고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육체로동에 대한 천시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있다. 따라서 공장로동 및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3D업종은 오래전부터 지위가 낮고 하찮으며 비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직업에 따른 위계서렬”로 표현되는 높은 권력거리의 문화안에서 조선족 이주로동자들은 한국사회에서 “하층계급”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한국인로동자들보다도 한층 낮은 로동자로서 취급되며, 그들과의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소외된다. 관련 연구와 필자의 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조선족은 이주전 어떠한 직업에 종사했든지간에, 설령 그가 공무원 혹은 교사 등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지위가 높은 직업에 종사했더라도 한국에 이주한후 일단 공장로동 혹은 3D업종에 종사하기만 하면 모두 “하층계급”으로 편입되며, 허드레일에 종사하는 “아래것들”로 취급된다. 이러한 높은 권력거리의 문화적속성속에서 조선족은 “하층계급”이라는 힘없는자로서 차별의 대상이 되는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높은 권력거리의 문화속에서 두 집단간의 경계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뿐만아니라, 한국인들의 문화적속성에서 불확실성회피성향문화가 강하게 드러난다. 한국 이주생활경험이 있는 조선족들은 아마 대개 한국인들과의 문화적이질성을 느낀 경험이 있을것이다. 례하면, 한국어와 연변말 억양의 차이, 조선족은 계란을 간장에 찍어먹고 한국은 소금에 찍어먹는 등 음식문화차이 등등. 한국인들은 이러한 차이를 경험했을 때, 대개 자신들이 늘 익숙하게 알고 대해왔던것이 아닌것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자신들과 다르다는 리유로 ‘미개하다’, ’후진적이다’라고 판단으로서 상대를 무시하거나 차별하게 된다. 불확실성회피성향은 “우리”와 다른것은 위험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다른것은 위험하다”는 정서를 만들며 외국인공포증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 “조선족범죄”를 다룬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리유도 아마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해볼수 있을것이다. 요컨대, 오랜 세월동안 단일민족이데올로기의 지배하에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오던 한국인들이의 배타적집단주의성향, 높은 권력거리, 불확실성회피성향 등 가치성향에 내재된 차별의식이 이주로동자들로 하여금 인간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거나 인격적모욕을 당하도록 한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것은, 한국인들이 갖고있는 이주로동자에 대한 부정적이미지는 대부분 언론ㆍ방송, 사회화된 이슈의제 등을 통해 형성된 “상상된 관념”으로서의 이미지들이며, 력사적ㆍ구조적 배경을 가지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배타적분위기는 결국 “조선족범죄”를 다룬 영화와 같이 매체의 영향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지배적담론으로서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는 더욱 견고하게 유지되는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과 로동의 세계화에 따른 이주로동자와 낯선 문화의 류입과 함께 다문화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한국은 동일성의 주술에서 벗어나 앞으로 평등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국문화의 가치지향성속에 내재되여있는 원천적인 차별적요소들을 직시하고, 합리적사고를 북돋을 사회적풍토를 닦아야 할것이다. 나아가 한국정부의 관주도형 다문화주의가 아닌, 진정으로 “나”와 다른 모든 인종과 민족, 국가가 각기 고유한 문화전통을 갖고있으며 그러한 문화는 유구한 세월속에서 성장한 사회ㆍ력사적 산물임을 인식하고 인정할수 있는 공생의 원리와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교육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것이다. 인민넷 2017.12.18
81    '내가 어떻게 저네한테 아바이요?!'(허연화) 댓글:  조회:2025  추천:0  2017-12-13
필자는 방학이 되면 조선족학자 몇몇과 함께 연변의 여러 농촌에 사회조사를 하러 다니군 한다. 한번은 어떤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60세 정도 되여보이는 남성분과 인터뷰를 가지게 되였다. 그분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 주긴 했지만 중간중간 표정이 안좋으신듯 보였다. 왜일가 하면서도 그냥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고있는 와중에 그분이 “내가 어떻게 저네한테 아바이요?! 저네 부모들과 나이 비슷할건데?”라고 하시는것이였다. 그러고보니 필자 일행은 공경함과 친절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아바이”라는 연변에서 년세있는남성분한테 흔히 쓰는 호칭을 사용하였던것이다. 그것도 인터뷰중 여러번. 그제서야 중간중간 표정이 안좋으셨던 리유를 알게 된 필자 일행은 냉큼 사죄를 드리고 “아버님”이라고 호칭을 고쳤다. 호칭을 고치고나니 한결 표정이 밝아보이셔서 우리 일행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던 기억이 난다. 다시 돌이켜보면 그날 우리 일행의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이였다. 즉 우리가 “아바이”라고 불렀던 그분은 우리 부모님과 년세가 비슷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적으신것이다. 필자는 자신의 부모님이 “아바이”, ”아매”라고 불리우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하면서 우연히 만난 60대 분한테는 스스럼없이 그 호칭이 나갔던것이다. 그럼 “아바이”, ”아매” , “로인”, “늙은이” 등 호칭은 어느 나이부터 사용하는것이 정확한가?  유엔에서는 60세 이상을, 유엔의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65세 이상부터를 고령자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인”이라고 정의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65세 이상부터 고령자로 여기지만 중국, 브라질 등 국가에서는 60세 이상부터 고령자로 정하고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인간수명은 나날이 길어지고있고 사람들은 옛날과 비할수 없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생활을 보내고있다. 91세에 2002년 런던 마라손경기에 참가하여 407명의 젊은이들을 앞지른 파우쟈신의 이야기, 80세에 에베레스트에 오른 현재 최고령보존자 미우라유이치로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국제적으로 65세 이상을 고령자로 정하였지만 그에 대한 의학적근거는 매우 빈약하다고 한다. 로년학연구자들은 고령자의 정의에 대한 재고를 제의하고있으며 실제로 각 나라에서 고령자의 년령을 올리고 퇴직년령을 조절할것에 대해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있다.  즉 지금의 60대는 예전과 비교해볼 때 너무 젊고 건강한것이다. 이런 분들한테 “로인”,”아바이”, ”아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이다.  당사자들도 그렇게 불리우는것에 대해 불쾌함,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왜 그리 불리우는것이 싫은가?!  우선 60대, 70대가 육체상, 심리상 옛날에 비하여 로인이라고 불리울 정도의 로화를 느끼지 않는다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인에 대한 사회적이미지의 변화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고령이 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시하여왔다. 로인들은 공동체에서든 가족에서든 중요한 발언권을 가지고있었다. 이에 반해 공업사회에서는 가족에서든 사회에서든 로인들의 권위는 떨어져만 가고있다. 로인은 더 이상 지혜의 상징이 아니다. 로인은 시대에 떨어졌고 무력하며 누군가에 의존하는 존재로 각인되여가고있다(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중국, 한국 사회처럼 로인을 공경하는 유교권에서도 근대화의 발전에 따라 로인들의 이미지는 나날이 약자로 변해가고있다. 그러기에 “로인”,”아바이”, ”아매”라고 불리우는것은 그냥 로화가 됐다는것만 강조받은 느낌인것이다.  우리 조선족 60대, 70대도 옛날과 비교해보면 너무 건강하고 활력으로 차넘치지만 우리는 옛날의 습관 그대로 아직도 60세 좌우 되여보이는 사람들한테 서슴없이 “아바이”, “아매”, “로인” 등 호칭을 사용하고있다.  아마 누군가는 “존경과 친절의 표징으로 좋은 뜻에서 사용하는 호칭인데 뭐가 나쁜게 있는가“ 할것이다. 좋은 뜻에서 출발하여 사용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상대방한테 좋은 뜻이 아니라 오히려 불쾌함, 불편함으로 느껴진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보는 격이다. 한두사람의 느낌이 아니라 전반 60대분들이 비슷비슷한 경험을 했다는것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 전반 사회가 “로인”, ”아바이”, ”아매” 등 호칭의 사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것이다.  일본에서는 로인복지법에서 65세 이상을 로인으로 정하고 “로령기초년금”을 받을수 있는 나이도 65세로 규정짓고있지만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65세 이상이지만 일하고있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 비추어 호칭에 대한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고있다. 매체에서도 “환갑을 맞이하는 로인들”이라는 부분을 “환갑을 맞이하는 사람들”이라고 바꿔 사용하거나 늙었다는 뜻이 들어있는 “로인(老人)”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않고 “고령자”, “몇세의 녀성/남성” 등 단어를 사용하고있다. 일본어에는 참 사용하기 편리하고 무난한 호칭이 있다. 상대방의 성씨에 “さん쌍”이라고 붙여서 부르는것인데 중국어에서 사용하는 “先生” 같은것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김씨”, ”김선생”이라는 호칭이 보편적이 아니다. “김씨”라고 부르면 왠지 한국사회에서 노가다 뛰던 때를 연상시키구, “김선생”이라 하기엔 “선생”이란 단어가 좀 어색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부르면 60대분들이 불쾌하지 않을것인가? 답은 사람마다 다를것이다. 필자는 언어학자가 아니기에 언어학연구자들과 이 문제를 심각히 고민할 자리를 마련하고싶다.  현재의 일견으로는 60대, 70대를 향해 ”아바이”, ”아매”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자는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면목을 모르는 고령자들한테 ”아바이”, ”아매”라고 부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뻐스에서 자리내여주거나 시장에서 물건살 때 정도일것이다. 사실 버스에서도 시장에서도 호칭 안불러도 할일은 다 한다. 하지만 도저히 부를수밖에 없을 때가 있을것이다. 그때면 어쩌면 좋을까? 자신을 기준으로 부르는것은 어떠한가?  우에서의 필자의 인터뷰 얘기를 다시 되새겨보면 필자 일행은 상대방을 “아바이”라고 부르기전에 자신들의 나이를 깜빡했다는 점이다. 30대중반부터 40대후반으로 구성된 맴버들이였기에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아바이”가 아니라 “아버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더라면 상대방도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을것이다. 연변으로 놓고 말하면 자신의 부모님들보다 젊어보이면 “아즈마이”, ”아즈바이”, 자신의 부모님과 비슷하거나 더 많아보인다면 “어머님”, ”아버님”으로 부르는것이 무난하지 않겠는가싶다. 물론 이것은 그냥 필자의 일견에 불과하다. 많은 우리말 학자분들의 지혜를 모으면 더 멋지고 친절한 호칭이 있으리라 믿는다. 전 세계가 백발화(白发化)하는 현시점에서 고령자에 대한 정의는 재고할 필요성이 있다. 하기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로인”, ”아바이”, ”아매”라는 호칭의 사용에서 우리말 매체, 그리고 우리 개개인들이 신중함을 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인민넷 2017.12.12
80    "우리", 가족과 우리네 삶(리화) 댓글:  조회:1906  추천:4  2017-12-05
정음칼럼에 내는 글은 우리 민족을 주제로 다루어야 바람직할거라는 나름대로의 강박감때문일가. 필자의 글 제목마다 따라붙는 "우리"라는 대명사. 어찌 보면 인젠 질릴 법만도 한데 이번 글 또한 례외없이 일단은 "우리"부터 자동입력 해놓고서야 안심하고 다시 주제 선정에 고심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묘하게 납득이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네 삶 속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비중과 그 의미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주지하다싶이 인간과 자연, 초자연(超自然) 그리고 인간 간의 관계성은 인류가 생존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는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관계들이다. 다만 문화가 부동함에 따라 상기 세 종류의 관계에 대한 중시도(重视度) 역시 차이를 보이는바 우리 민족을 포함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문화권의 경우 래세(来世)보다는 현세(现世)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다. 그 일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종교활동이나 조상숭배 즉 조상에 대한 제사 등 초자연과의 교섭행위 역시 그 어떤 사후초월(死后超越)보다는 그러한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서 현실의 세속적인 삶을 무난하게 영위해나가려는 공리성이 다분히 실려있다는 사실을 들수 있다. 이렇듯 현세 및 현실 속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적정서안에서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대체적으로 "우리"와 "남"이라는, 어찌 보면 그 경계가 지극히 애매모호한 두개의 집합으로 구분 짓는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리적으로는 정확하게 잴수 없는 친밀성의 거리 내지는 마음의 울타리를 만들어놓고 때로는 고집스레 때로는 유연하게 "우리"가 "남"이 됐다가 "남"이 "우리"가 되기도 하는 변덕스런 과정들을 거듭한다. 동시에 이러한 밀당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의 간격을 쉼 없이 조절함으로써 "우리"에 소속됨으로 얻는 심리적 안정감과 관계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왔다.  사전적인 해석에 따르면 "우리"란 자기와 함께, 자기와 관련되는 여러 사람을 다 같이 가리킬 때, 또는 자기나 자기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 할 때 반대어로서의 "남"은 자기와 따로, 자기와 관련 없는,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리라.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편"-"우리"속에서도 굳이 꼭 우선순위를 매기라고 한다면 당연히, 두말할것도 없이 가족을 꼽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것이다.  가족, 말만 들어도 촉촉하게 스며오는 따뜻함, 편안함과 든든함. 인간은 가족속에서 생명의 탄생을 고하고 또 살아있는 동안 다양한 가족을 만들기도, 만나기도 하다가 그속에서 생을 마치며 죽어서도 가족에 의해 봉사(奉祀)를 받는다. "나"와 소소한 일상을 공유해주고 질풍노도의 시각들을 함께 버텨주는, "나"를 가장 잘 알고 리해하는, 그래서 내 치부마저도 스스럼없이 드러내놓고 맘껏 숨 쉬며 살수 있는 공간이, 사람들이 다름 아닌 가족이기에. 그래서 가족은 소중한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착각하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보편적으로 지니고있는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과 가족관계를 향한 과도한 합리화 내지는 일종의 환상이라 할수 있겠다. 인류학, 사회학뿐만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과학령역에서 사전적인 의미로 인용되고있는 Murdock의 정의에 따르면 "가족/가정(Family)은 공동거주, 경제적협력, 그리고 생식이라는 특성을 지닌 사회집단이며 성관계를 허용받은 성인 남녀와 그들이 낳은 자녀 혹은 입양한 자녀로 이루어진다"(Murdock 1949).  어찌 보면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정상가족"의 모델이라 할수 있겠다. 그러나 정작 세계상의 적지 않은 민족들을 볼 때 우리 나라 운남성의 나시(纳西)족이나 인도 남부의 나야인(Nayar)처럼 자녀의 생물학적아버지를 제외한 외할머니, 이모, 외숙부 등 어머니의 혈통만으로 구성되는 모계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프리카 수단의 어떤 부족처럼 녀자끼리 결혼하여 결성되는 가족도 있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부계(父系)적가족제도 역시 조선시대 후기에야 정착된것으로 그 이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어머니의 조상 모두를 족보에 기록했다. 동성동본불혼(同姓同本不婚)의 원칙을 고수하는 우리 민족과 달리 가까운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사촌끼리의 결혼이 허용된다.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있으며 대리모, 정자은행 등 새로운 출산방식들이 출현하고 복제인간의 탄생까지 꿈꾸는 시대가 왔다.  즉 성과 혈연을 기본적인 뉴대로, 성원들의 공동거주를 주요한 특징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자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가족은 실제로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적산물에 불과하며 설령 동일문화에 있어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는것이다.  1990년대 이후 조선족사회는 전례 없는 인구이동의 소용돌이속에서 거대한 변혁을 겪고있으며 그 중심에는 시종일관 가족이 자리하고있었다. 근 30년래 조선족사회 변천의 표상 혹은 담론의 주제가 가족의 변화에 집중되는 가운데 "결손가정/가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빈번히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흔히 같은 집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로 구성 된 세대/가구(household)를 개념적으로 가족과 혼동하는 경향이 짙다. 개인단위 이동이 위주라는 특징으로 말미암아 조선족의 이동은 많은 수의 조손세대, 독신세대, 편부모자녀세대 등 소위 "정상"범주를 벗어난 "비정상적세대"를 량산했다. 따라서 이를 곧 우리 관념속의 "정상가족"과 련관지어 비정상적인 "결손가족"으로 정의하며 심지어 "가족의 해체"에까지 직결시켜 해석한다.  하지만 세대와 가족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공동거주성이 무너졌다고 해서 가족성원들이 더 이상 가족이 아닌것이 아니며 가족이 해체되는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자신들의 가족과 주위만 살펴보더라도 대부분의 가족이 주어진 사회적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으로 나름대로의 뚜렷한 미래 지향적목표를 가지고 분산거주를 선택했으며 일상의 실천속에서 기존의 가족 리념과 규범을 바탕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가족을 영위해왔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동속을 살아가는 조선족가족은 "결손가족"이 아니라 초국가적련결망을 특징으로 영위되여가는 새로운 정상가족의 한 형태로 보는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가족은 문화적산물이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그렇다면 "가족이기때문에, 가족은 당연히 그럴거야/그래야만 해"라는 본능적인 명제 또한 재검토가 필요한것이 아닐가.  사실 우리는 가족으로 인해 마냥 행복한것만은 아니다. 특히 피줄의 조화로움과 끈끈함을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더 강조하는 우리민족 특유의 가족주의질서속에서 가족은 무조건 사랑하고 나누고 희생해야 하는것, 가족이라면 리유 없이 그냥 그래야 하는것으로 각인되여왔다. 이렇듯 과분하게 리상화된 가족상 그리고 견고하게 정형화 된 가족제도의 틀안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수많은 누이, 녀동생들은 철없는 남동생, 오빠를 위해 무고한 희생을 강요당하고 안해들은 가장구실도 못하는 남편을 인내하고 안팎으로 바삐 돌아쳐야 하며 맏아들은 장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하고 늙으신 부모님은 허리가 휘도록 자식을 위하여 재산을 남겨주고 손자녀를 돌보는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는 분에 넘치는 "주고받음"으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얽히고 설킨 가족의 끈, 가족이기에 사랑하고 희생하고 행복하기도 하지만 가족이기에 더 숨 막히고 아프고 슬프기도 하다. 그래서 "남보다 못한 가족"이 되여가기도 한다. Levi-strauss는 가족은 법적뉴대, 경제적, 종교적 및 그외의 의무와 권리, 성(sex)적 권리와 금지, 애정, 존경, 경외 등 다양한 심리적정감으로 이어져있다고 함으로써 공동거주를 가족의 중요한 지표로 지목한 Murdock의 주장과는 달리 가족구성원간의 정서적 뉴대 및 결합의 중요성을 호소한다(Levi-strauss 1956).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정서적 결합과 친밀성이 결코 필연적이고 자명한것은 아니라 "남"이 "우리"가 되고 가족처럼 되는데까지 쏟아 부어야 하는 그 이상의 진심과 배려와 리해가 무엇보다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라는 친밀성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가족보다 더 적합한 상대는 없는것 같다. "남같은/남보다도 못한 가족", "가족같은/가족보다 가까운 남", 짓궂은 말장난 같지만 가족은 주어지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것이다. 소중하기때문에 더 조심스레, 더 소중하게 가꾸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편"-"우리", "가족"이 만들어지지 않을가. 인민넷 2017.12.4
79    녀성지식공동체의 힘을 키워가자(김화선) 댓글:  조회:1663  추천:2  2017-11-28
요즘 매체에서 중국의 녀성학자들이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둘러싸고 전례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있다. 절강대학사회학과 모 남자교수가 녀연구생의 다수는 졸업증을 타기 위해 공부하는것이고 연구를 계속하려는 녀학생은 열에 하나도 안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데 대해 많은 녀성학자들이 성차별관념을 지닌 남성교수가 대학교내에서 권력을 행사할 때 녀학생에 대해 공정평등할수 있겠는가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를 냈다. 중국 한 녀류학생이 일본에서 살해된 사건의 재판을 앞두고 중국의 매체에서 부모들은 녀자아이들이 친구를 잘 사귀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식의 담론이 범람할 때 중국 녀성학자들은 비극의 직접적원인을 만든 남자살해범이 실련을 리유로 녀성에 대해 살인이란 폭력을 휘두르게 만든 성별폭력문화에 대해 우선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14-2016년 사이에 중국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한 리혼사건이 94571건이고 그중 99.9996%의 가해자는 남성이였다. 녀성학자들은 폭력은 남성의 통치방식이였다고 지적하고있다. 유엔에서는1999년 11월 25일을 “세계녀성폭력추방의 날”로 정했다. 2016년 3월 1일부터 중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반가정폭력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또 대도시의 모 유치원에서 교사자격증이 없는 교사들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른데 대해 매체에서 분노의 힘을 분출할 때, 녀성학자들은 전 사회적으로 아동성폭력예방교육 프로그람을 보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력설하고 아동폭력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경험을 표현하고 폭로할수 있는 힘을 갖도록 격려, 지원하고있다. 1995년 제4차 세계녀성대회가 북경에서 개최된 이후, 중국의 대학교, 사회과학원, 당학교, 부련회를 중심으로 녀성연구센터가 우후죽순마냥 생겨나면서 점차 중국 녀성지식공동체가 만들어졌다. 또한 중국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 녀성들이 지식계에 많이 진출하면서 대학교의 녀대생 비률이 남학생을 초과하는 현상이 많다. 또 일부 학과의 녀석사연구생, 박사생 비률이 남성을 초과했다. 그런데 일부 남성교수들이 이야기하는 녀연구생들이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리유는 어디에서 찾을수 있는가? 중국의 사회학자 비효통선생이 제시한것처럼 중국 향토사회의 ‘’남녀유별”사회질서가 남성들로 하여금 “같은 남성에게서 심리적친밀감을 바라는” 정감방식을 초래하여 “남녀유별”이란 심리지력구조의 불평등인식이 생기게 했고 남성들은 부계 가족화의 지식공동체를 건립하는것을 통해 우세적지위를 획득하고 녀성의 심리지력활동 능력을 타자화하고 왜소화시키며 무의미화시켜냈다고 이야기할수 있다. 대학교 녀교수들의 경험에 의하면 녀학생들은 학술을 할 때 중시를 덜 받고 고무격려를 덜 받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많은 녀학생들이 녀교수님들의 가르침과 고무격려를 받고 나서 우수한 연구자가 된 사례가 많다. 그러나 지식계에서 남성연구자는 우세적지위를 차지하고있고 녀성들은 종종 배척과 거절의 처지에 직면하게 된다. 현재 중국 녀성연구자들은 대학교 “녀교수협회”, “성별사회학위원회위원”, “녀성사회공작위원회”,”중국부녀연구회”소속 단체회원100여개 등 사회조직내에서 활발하게 교류하고있다. 얼마전에는 남경대학에서 “제2회 중국녀사회학자포럼”를 개최, 중앙민족대학에서 “민족문화와 성별”학술대회를 같은 날에 개최하여 전국 녀성지성인들의 교류를 활성화했다. 녀성학자들이 중국 녀성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녀성발전과 녀성해방에 관한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족녀성사회학자들도 적극 참여하여 중국조선족녀성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관점, 운동사례들을 발표하고있다. “녀성지식공동체”의 임무는 녀성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써가고 자신의 련맹을 만들어가며 서로 지지하는 사회네트워크를 형성해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더 내야 하는것이다. 오직 성차별적이고 편견적지식을 소유한 집단에 항의를 해야만 그들이 스스로를 반성하게 할수 있다. 습근평주석은 우리 나라를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하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할데 대한 목표를 제시해주었다. 녀성은 사회참여를 통해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자신의 꿈을 실현해나가야 한다. 동시에 남녀 모두 성별적 문화대화와 문화자각을 건립해가야 하는 공동의 의무가 있다. 이것이 남녀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생활의 기본축을 이루고있기때문이다. 인민넷
78    40년을 고이 간직해온 초심 (최유학) 댓글:  조회:1693  추천:0  2017-11-22
 《중국조선어문》 창간 40주년을 기념하며    한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얼"은 "령혼"이요, "굴"은 곧 "골"이고 "꼴"이니 고로 "얼굴"은 바로 "령혼의 모습"이라는것이다. 이 민간어원의 정확여부를 떠나서 이 말은 얼굴이 중요하며 얼굴과 령혼의 불가분적관계를 강조한 셈이다. 이를 우리민족의 언어와 련관시켜 말해본다면 우리 민족의 “얼”이 조선어라면 그 조선어를 꾸준히 지금까지 잘 가꾸고 꽃펴온 기관과 기관지가 우리 민족의 “굴”인 셈이다. 그 기관은 바로 동북3성조선어문협의지도소조요, 그 기관지는 《중국조선어문》잡지사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우리 민족의 "얼"과 "굴"을 사랑해야 함은 당연한 일인것이다. 우리 나라 민족정책의 따뜻한 해살아래 여럿 민족어중의 하나인 조선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싶다. 그것도 40년이란 세월을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지키고 가꿔왔음에랴!   지난 8월 10일에 중국조선어문포럼이 연길 백산호텔에서 성황리에 개막되였다. 이 포럼은 중국조선어문발전사업과 관련된 실질적인 지도기구인 동북3성조선어문협의지도소조 판공실에서 주최하고 동북3성조선어문협의지도소조 기관지인 중국조선어문잡지사에서 주관한 광범위한 대표성을 띤 전국적규모의 포럼이였다. 더군다나 중국조선어문잡지사의 창간 40주년을 맞아 개최된것으로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수 있다.   필자는 포럼에 참가하는 영예를 가지게 되였는데 오늘까지 수개월이 지나서도 그 감개무량함이 남아있다. 그 감개무량함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조선어문 관련 학자들로부터 관련 분야에서 집적된 성과들을 이 계기를 통해 배운다는것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연변이 고향이 아닌 필자가 우리 중국내 조선족들의 수도인 연변에 와서 연변의 이모저모를 직접 보고 느끼게 된것 자체로도 가슴 벅찼기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하였고 눈에 보이는 간판들마다 볼수록 정다웠다. 아, 조선글이 명기돼있는 간판들이 있어 연변이로구나 라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각양각양색의 음식들이 간판과 함께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아, 우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아 연변이로구나! "순이랭면", "진달래랭면" 등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여러가지 "뀀점", "뀀성"에, 칼국수집 등 우리 민족의 맛있는 음식들의 천국으로 정말로 없는것이 없었고 있을것은 다 있었다.   다시 포럼으로 돌아와본다면 8월 10일의 포럼 개막식에는 우리 민족의 언어와 관계되는 보석같은 존재들인 중국조선어학회, 중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 중국민족어문번역국,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등 학회 및 기관들의 관계자와 여러 민족의 언론사들의 관계자, 대학교 교수 등 총 120여명이 자리를 함께 해 지난 40년 간의 중국조선어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황과 미래를 론의하는 학술교류의 장이였다. “일대일로”배경하에서의 중국조선어연구 현황과 미래”를 주제로 마련된 이번 회의에는 해외의 조선어 관련 유명 학자들도 참석하여 축하의 분위기를 더욱 돋워주었다.   이번 포럼에서 중국조선어문잡지사 총편집 김계화가 《중국조선어문》 창간이래 40년간의 사업에 관한 보고를 하였고 중국한국(조선)어교육연구학회 회장 강보유, 중국민족어문번역국 부국장 김영호, 중국조선어학회 회장 김영수,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김명철이 각기 축사를 했다.   우리 조선어의 파란만장한 력사를 돌아보는 개막식이 다소 엄숙하게 진행되였다면 제12회 “정음상” 시상식과 《총서》 발간식은 활발하게 진행되여 축제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달아오르게 하였다. 제 12회 “정음상” 시상식에서는 《중국조선어문》잡지에 발표된 론문중 학술조, 사회조, 교육조의 우수론문들이 선정되여 상을 수상했다. 주인공들의 얼굴마다에는 행복과 긍지의 웃음꽃이 피여났으며 장내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계속 이어졌다.   시상식에 이어 이틀간 지속된 이번 포럼에서는 중국조선어문 잡지에 발표된 론문들을 둘러싸고 과거 40년간의 다양한 분야에 집적된 학술성과들을 돌아보고 그 장단점을 분석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뜨거운 학술토론의 장이 벌여졌다.   필자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당연히 《중국조선어문》 잡지사의 발전력사였다. 이 글에서는 주로 《중국조선어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7년에서 발족되여 2017년의 장장 40년의 세월을 줄기차게 달려온 《중국조선어문》에는 그동안 우리 민족의 발전 력사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중국조선어문》잡지사의 발전단계는 그 변화, 발전에 따라 다음과 같은 3개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1977년 11월-1982년 6월까지의 초기 창간단계이자 비정기내부간행물 단계로 《조선어문사업통신》과 《조선어문통신》 단계라고 할수 있다.   1977년 11월에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의 사업 규칙과 계획에 따라 《중국조선어문》의 전신인 비정기내부간행물 《조선어문사업통신》이 창간되였다. 《조선어문사업통신》이 창간된 1977년은 “4인무리”를 짓부신 이듬해로서 《조선어문사업통신》은 그 사이 어지럽혀진 우리 말 우리 글을 바로잡기 위하여 규범화에 관한 원칙, 세칙, 방안, 통일안, 론문 등 글들을 잡지에 편폭을 아끼지 않고 실음으로써 아름다운 우리 말을 되찾고 조선어의 규범화사업을 밀고나갔다. 《조선어문사업통신》은 1981년 2월까지 총 5호를 펴내고 제6호부터 이름을 《조선어문통신》이라고 개칭하였는데 《조선어문통신》은 1982년 6월의 제9호까지 이어졌다.   두번째 단계는 1982년 10월-1986년 12월 까지의 초기발전 단계이자 공식간행물로 출범한 단계로 《조선어 학습과 연구》(계간)와 《조선어문》(계간) 단계라고 할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전문성이 강한 조선어문 관련 계간지인 조선어문잡지를 갖게 되였다.   1982년 10월부터 《조선어문통신》을 《조선어 학습과 연구》(계간)로 개칭하고 공개간행물 시험호를 펴냈고 1983년부터는 《조선어 학습과 연구》가 정식으로 출판발행되였다. 1986년 3월, 《조선어 학습과 연구》를 《조선어문》(계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어 학습과 연구》(1982.10-1986.2)와 《조선어문》(1986.2-1987.1)은 이 기간 우리 동포들이 자기의 말과 글을 힘써 학습하고 널리 사용하며 학술문제를 토론하고 교수경험과 어문사업경험을 교류하는데 있어서의 친근한 길동무, 유력한 대변인으로 되였다. 특히 해방전 자기의 말과 글을 빼앗겼던 쓰라린 력사를 갖고있는 우리 민족이 해방후 처음으로 자기의 어엿한 어문잡지를 가지게 된 이것은 우리 말과 글을 후대에 전할 성스러운 사명을 리행하는데 있어서의 뜻깊은 첫걸음이라 할수 있었다. 편집진들은 중국에서의 유일한 조선어문잡지라는 점을 념두에 두고 원고를 선택하고 편집함에 있어서 원고의 질과 특점을 첫째로 보면서도 또 지역적균형을 유지하는데도 류의하였다. 이를테면 중국조선족의 언어상황, 특히는 산재지구 조선족의 언어상황을 고려하여 “보급과 제고를 함께 돌보”던 재래의 편집방침을 “보급과 제고를 결합하되 보급을 위주로 하는” 편집방침으로 고치고 편폭과 수량상에서 학술성문장을 30%로 하고 보급성문장을 60~70%로 정함으로써 보급위주를 실현하여 우리 동포들의 한결같은 옹호와 지지를 받았다.   세번째 단계는 1987년 1월-2017년 현재 까지의 안정적 발전 단계로 《중국조선어문》(격월간) 단계라고 할수 있다.    1987년 1월부터 계간지인 《조선어문》의 공식명칭을 《중국조선어문》으로 개칭하고 격월간으로 바꾸었다.   이 기간 편집진은 시대발전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각 새로운 시기마다 수록내용에 일부 변화를 기하며 끊임없이 잡지를 발전시켜나갔다. 례를 든다면 《중국조선어문》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발행범위가 확대되고 동북3성은 물론 관내의 타민족 구독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 비추어 1992년 7월부터 전문란 “조선어강좌”를 설치하고 5년간 련재하여 타민족들이 우리 말과 글을 배우는데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며 “민족어문정책”, “고찰과 연구”, “교원연단” 등 기둥전문란을 중심으로 번역, 출판, 방송, 문학, 생활, 습작과 관계되는 전문란을 꾸리는 한편 형세의 수요와 조선어문발전의 수요에 의하여 어문분야의 국내외 동태보도도 적당히 늘이고 잡지 취지와 편집방침을 견지하는 전제하에 지식성, 취미성 글도 종종 선을 보여 구독자들의 열독구미를 돋구어주었다.    그리고 국내국제학술교류활동이 빈번한 정황에 비추어 중국조선어문사업지도일군들과 조선어학자들을 세상에 널리 알릴 의향으로 전문란 “인물소사전”을 설치하고 다섯호에 나누어 중국조선어문분야의 인물 81명을 해내외에 처음으로 널리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기간 《중국조선어문》은 조선어문의 발전 진작을 기해 전국조선족중학생작문경연을 벌려 학생들이 자기 언어를 갈고 다듬는 열의와 교사들의 학생지도의 열의를 북돋아주었고 “정음상”(正音奖)을 설치해 조선어문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를 고무해왔다. 1986년부터 1991년 사이에 잡지사에서는 전국조선족중학생작문경연을 세차례 벌려 학생 54명, 지도교원 34명, 집단 5개 학교를 표창하였다. 1995년에 설치한 “정음상”(正音奖)은 “훈민정음”창제 550주년, 반포 548주년에 즈음하여 설치된 상으로서 중국에서의 조선어 학자와 교육자, 번역사업일군, 매체언론인들을 고무격려하여 조선어 연구와 발전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함으로써 조선어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긍지감을 높이고 중국에서의 우리 말의 보급과 옳바른 사용을 추진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소양향상에 이바지하려는데 취지를 두고 이미 12회의 시상식을 가져 411명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2003년 제4호부터는 “조선어/한국어 교수와 연구”란을 설치하여 전국의 200여개 대학의 조선어학과 교사들에게 조선어교수 경험과 연구성과를 교류할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었는데 많은 우수한 론문들이 발표되였다. 시대적요구에 맞게 잡지의 질적향상을 가져오기 위하여 잡지사에서는 2012년부터 또 일련의 개혁과 변화들을 시도하였다. 우선 새롭게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잡지건설에서 편집위원회의 역할이 커지도록 하였다. 편집위원으로 전국 여러 대학의 조선어학과의 권위적인 교수들과 동북3성의 조선어문전문가 그리고 한국과 조선의 학자들을 초빙하였다. 다음, 독자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의하여 판면을 원래의 72페지로부터 96페지로 확대하여 조선어연구일군과 조선어문교원들에게 자기의 연구성과를 교류할수 있는 보다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해외 조선어학자들과의 인적 래왕과 학술교류를 통하여 정보의식과 학술수준을 높였을뿐만아니라 잡지의 위망과 지명도를 한껏 높였다. 2012년 제1호부터 2017년 제4호까지 조선 사회과학원언어연구소, 김일성종합대학 학자들의 론문만 34편이 잡지에 게재되였다.   2014년부터 시작하여 3년에 걸쳐 출판한 《총서》는 장장 40년을 기록한 《중국조선어문》의 력사를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대형총서로 우리 잡지사가 이룩한 성과를 집대성한 도서이기도 하다.   2016년은 《중국조선어문》의 력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한해라고 평할수 있다. 2016년 《중국조선어문》은 국가신문출판방송총국에서 진행한 학술간행물 확정 및 정리에서 국내 학술간행물로 확정되였고 길림성 사회과학류 간행물 30강에 진출했으며 중국조선어문잡지사는 동북3성 조선어문협의사업 선진집체의 영예를 받았다.   이처럼 《중국조선어문》은 40년 세월의 부침속에서 시대의 발전과 민족어문사업의 수요 그리고 구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경주해왔다. 40년 동안 우리 민족 언어의 지키고 가꿔나가겠다는 초심을 버리지 않고 새시대에 맞게 능동적으로 변화와 발전을 이어나온 점은 우리모두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는 우리 언어의 지킴이 《중국조선어문》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것이며 《중국조선어문》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고 함께 앞으로 박차고 나가야 할것이다.   * 이 글에서 《중국조선어문》에서 보내준 자료내용을 인용하였음을 특별히 밝혀둔다. 인민넷 2017.11.21
77    "정음"학술을 향하여(예동근) 댓글:  조회:2028  추천:0  2017-11-14
정음칼럼이 곧 90회, 100회를 갖게 되면서 2주년이 다가오고있다. 처음에는 조선족박사와 교수들이 모여서 그래도 자신들이 공부하면서 느낀것들을 글로 써내면서 사회와 공감하고 교류하면서 조선족공동체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언론을 만드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류학자들은 민속, 교육, 정체성, 문화자원 등에 대하여 론의하는가 하면, 정치학자들은 “일대일로” 등 거시담론을 얘기하며, 경제학자들은 중국의 경제 나아가서 경제상식에 담은 에피소드들로 경제를 친숙하게 하였다. 사회학자들은 조선족사회 구조, 형태, 발전양식, 근대화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확장하면서 종횡무진하게 조선족사회의 담론을 풍성하고 깊게 하고있다. 녀성학자들은 “녀성”이란 독특한 시각을 담아서, 력사학자들은 조선족 나아가서 조선민족사까지 들어가기에 깊이도 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가, 이것이 하나의 체계로 연구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하고있다는것이다. 비록 조선족사학회가 그 중심에 있고,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를 지속하는 조선족연구학회가 있지만 조선족의 사회과학적연구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돌파구를 찾지 못한것이다. 조선족사회과학연구가 선명한 민족성을 갖고 국가통일과 민족발전에 도움이 되는 실용학문으로 첫번째 단계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매우 기초적인 “조선족사회조사데타베스”를 만들어야 한다. 통일화되고 표준화되고 정확한 데터베스가 있어야 더 정확하게 조선족사회를 진단하는것이다. 중국인민대학교 사회학과는 중국사회보편조사의 중심지이며, 돈 많은 기업가가 1억 넘게 기부하여 전국적 사회연구에서 앞장서 갈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있다. 많은 대학동문 혹은 사회기업가들은 장학금, 학교발전기금으로 기부하는데서, 사회에 환원을 할수 있고, 유용하게 기금이 사용할수 있는 방법을 찾고있다. 우리의 조선족사회도 성공한 기업가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모교에 기부하여, 이름을 남기거나 어릴 때 힘들게 공부하였기에 장학금으로 기부, 혹은 학교발전기금으로 기부한다. 이제는 명확하게 용도를 설명하고 기부하여, “조선족사회조사 데터베스센터”를 공동으로 창립하거나, 함께 사회창출을 할수 있는 “문화브랜드”센터를 만들거나, 기금을 모아서 10년,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구조로 데터를 모으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처음에 효과가 적겠지만, 이런 데터가 3년, 5년 지나가면 귀중한 자료로 변하면서 조선족사회의 변화를 수치로 깔끔하게 보여줄수 있으며, 조선족사회의 분포, 형태 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더 효률적으로 조선족사회를 위해 이바지할수 있게 한다. 나는 3년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였고 연변대학의 사회학과 혹은 기타 유능한 학과에서 이런 연구센터를 건립하고 매년마다 힘들면 2년에 한번씩 연변사회종합조사를 진행하면서 10년동안 연변사회데터부터 먼저 모으도록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인민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전국사회조사에서 연변지역이 빠져있어서 연변지역을 추가하여 전국데터와 비교할수 있는 표준화자료를 만드는데도 협력을 하였다. 그리고 훌륭한 사업가들을 설득하여 이런 일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국내외 유수 연구기관과 학자들도 이런 사업에 참여시키면서 연변, 나아가서 전국, 더 나아가서 해외에 있는 조선족까지 포함한 조선족사회데터의 수집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본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조선족사회의 연구는 어느 한사람의 연구로 되는것도 아니고, 정말 사명감 있는 학도들이 모여서 정확하고 표준화된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재생산할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그것이 조선족사회연구의 기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음칼럼”이 이제 100회에 다가가는 시점에 한번 “정음”의 이름하에 모인 조선족학자들이 어떤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협력과 분공을 통하여 더 생산적인 연구를 하여야 하는지? 사회기업가들과 어떤 형태의 협력을 하여 더 좋은 조선족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였으면 한다. 인민넷 2017.11.13
    요즘 2017년도 노벨상 수상명단이 새롭게 공개되면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있다. 필자의 전공관계로 관심사는 항상 다른 분야보다도 경제학상에 주목하게 된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리처드 탈러(Richard H.Thaler)에게 돌아갔다.   리처드 탈러의 연구분야는 행위경제학인데, 이 경제학분야는 경제학과 심리학이 결합되여 탄생된 젊은 학과라고 말할 수 있다. 2013년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나 예전의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등 경제학자들까지 포함해보면 경제학계에서 행위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져가고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사실 앞에서 얘기하였듯이 행위경제학은 경제학의 신흥연구분야이다 보니 일부 경제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있다는것은 어떻게 보면 그럴만도 하다. 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사이에서도 행위경제학에 대해 약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만큼 행위경제학의 연구방법과 리론은 전통적인 경제학과는 꽤 나 큰 차이가 있기때문이였다.   전통적인 경제학도 인간심리의 활동을 중시하고있지만 전반 경제학의 틀에서 보면 일정한 선에서만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특히 비합리적인 인간의 선택, 다시말하면 인간이 쉽게 범하게 될수 있는 멍청한 선택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행위경제학은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비합리적인 행위도 인간의 심리로부터 기인한만큼 연구의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시키고있다. 러처드 탈러는 생활속의 작은 현상으로부터 행위경제학의 응용을 해석하고있다.   리처드 탈러의 한 친구는 화분에 알러지가 있어서 화초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과민이 오는 체질이다. 그 친구는 10딸라만 지불하면 전문일군에게 맡겨 본인의 집 뜨락의 잔디를 깎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러지위험을 무릅쓰고 매주마다 본인이 직접 잔디를 깎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친구한테 20딸라를 주면서 이웃집의 잔디를 깎아달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 친구는 단호히 50딸라를 준다고 해도 깎지 않을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 친구는 분명 10딸라를 아끼려고 본인이 직접 잔디를 깎지만 정작 50딸라를 주면서 잔디를 깎아달라고 의뢰한다면 거절한다는것이다. 분명히 같은 일이지만 그에 대한 가치를 다르게 판단하고있다는것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적인 분석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선택을 비리성적인 판단으로 간주하고 거의 연구범위에서 배제하고있지만 이에 반하여 행위경제학은 이를 인간의 심리와 직결된 결과로 여겨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고있다.   행위경제학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리처드 탈러는 한번은 우연히 야구시합티켓 두장을 다른 사람한테서 선물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야구시합 당일 눈보라가 심하여 시합관람을 포기하게 되였다. 그는 어차피 티켓은 본인이 직접 돈을 주고 구매한것이 아니기에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다. 하지만 이 일이 지난 후 리처트 탈러는 만약 야구시합티켓을 본인이 직접 구매하였다면 전혀 다른 결과였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야구시합티켓을 쉽게 버릴수 있은 원인은 본인이 그 어떤 매몰비용(sunk cost)을 들이지 않았기때문이라고 인정했다. 분명히 같은 시합티켓이지만 본인이 지불하여 직접 구매하였느냐 아니면 타인한테서 무료로 양도받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가치가 매겨지고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로부터 오는 하나하나의 경제적인 법칙은 기업이 자사의 상품을 생산하고 마케팅하는데도 적용될뿐만아니라 개인의 자산투자활동, 심지어 정부가 국가의 경제제도를 제정하는데에도 유용하게 리용될수 있다. 실제로 리처드 탈러는 현재 스웨리예 양로금제도의 개혁 설계에 참여하고있는데 인간의 심리를 적용하여 양로금의 사용과 투자방안을 구상하고있다.   흥미로운것은 이러한 행위경제학의 법칙은 이번에 리처드 탈러가 인민페로 700만원이 넘는 노벨경제학 상금을 사용하는데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리차드 탈러는 이 상금은 로동의 대가로 받은 소득이 아니라 의외로 공짜로 얻은 수입이니 가장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써버리겠다고 하였다. 인간의 매몰비용법칙이 또 다시 적용되는 순간이다. 인민넷
75    민족축제와 민족문화의 전승(안성호) 댓글:  조회:1565  추천:0  2017-11-07
근래에 각지에서 여러가지 민족문화축제 개최에 관한 반가운 소식들을 종종 접할수 있다. 단오축제, 류두절, 진달래축제, 농부절, 김치축제, 고추축제 등 다양한 축제행사들이 개최되여 도시화시대에 흩어져살고있는 우리들에게 민족문화를 체험하고 모처럼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지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주고있다. 축제는 인류사회에서 고대로부터 전래하여온 기념행사이다. 개인 또는 공동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거나 결속력을 주는 사건이나 시기를 기념하여 의식을 행하는 행위로서 흔히 종교의례에서 기원한것으로 볼수 있다. 축제에는 여러가지 류형들이 있다. 산신제, 기우제 등 마을 신앙과 관련된 축제가 있는가 하면 두레놀이, 동제, 마을제 등 마을 공동체의 단합과 유지를 위한 축제, 인생 통과의례와 관련된 축제, 단오제 등 주기적 순환축제들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조선족 조상들이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이러한 다양한 축제의 전통들을 지니고 오지 않았을가 생각한다. 특히 농업호조조직인 두레, 황두가 1950년대까지 이어져내려오면서 모내기와 김매기가 끝난후 진행되는 두레놀이, 풋굿이나 호미씻이는 전승되여온것으로 보여진다. 농업집단화정책의 실시와 농업호조조가 건립됨에 따라 전통적인 로동호조조직인 두레, 황두, 품앗이 등은 사라지게 되엿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축제들도 사라지게 된것 같다. 다만 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을 알수 없다. 조선족사회에서 마을축제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진 행사는 운동회였다. 1912년에 룡정 대교동에서 제1차 간도학생운동대회가 열리였고 1913년 단오에는 32개의 조선인사립학교에서 국자가 모래사장에서 련합운동회를 개최했다. 이후부터 해마다 단오절에 종합적운동회를 개최하는것이 관례가 되였다. 특히 축구경기는 가장 인기 있는 경기로서 주로 민족의 명절인 단오와 추석에 각 마을에서 개최되였다. 마을간 경쟁이 심하여 도시와 학교의 우수한 선수들을 초빙해오기도 했다. 이렇듯 마을을 기본단위로 하는 규모 부동한 축제와 운동회는 중국이라는 새로운 이주지에서 마을주민들의 통합과 새로운 공동체를 확립하고 지역정체성을 재정립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였다. 조선족사회에서 운동회는 매우 활발히 진행되게 되였다. 단오절, 추석 등 전통명절 혹은 여름 농한기를 리용하여 마을, 향, 현 등 여러 행정별 조선족 운동회, 씨름경기, 축구경기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인민공사화전, 혹은 1960년대 중엽까지 조선족운동회가 개최되였다. 이러한 운동회는 단순한 스포츠경기 행사만은 아니였다. 개막식에서 악대, 단체무 등 문예공연이 진행되였고, 경기종목으로서의 널뛰기, 그네뛰기, 조선장기, 씨름 등 민족전통놀이들이 진행되였다. 운동회는 1980년대에 다시 회복되였으며 지역 민족사회 최대의 년중행사의 하나가 되였다. 조선족운동회는 조선족사회의 대표적인 민족행사로서 전통문화의 전승과 사회 문화적인 통합기능을 수행하였다.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지역 조선족사회의 련대감을 강화함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집단의식을 고취하여 사회적뉴대를 강화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 단순한 조선족운동회로부터 민속운동회, 민속축제 등으로 명칭들을 바꾸어 개최하게 되였다. 1990년대 이후 지방정부들의 지지 하에 민족축제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게 되였으며 여러가지 류형의 축제들이 나타났다. 현재 이루어지는 민족문화축제는 지역적으로 동북조선족 전통집거지와 산해관이남 연해지역으로 나눌수 있고 주관기구도 지방정부와 조선족단체로 나눌수 있다. 동북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는 축제들은 지역경제활성화, 일자리창출 등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있으며 지방정부가 전액 혹은 대부분의 축제비용을 지원한다. 연해지역의 경우, 정부의 인가를 받으나 재정지원이 없이 민간의 힘으로 이루어지고있으며 주로 북경, 청도, 심천 등 새로운 도시 집거지역들에서 이루어지고있다. 이러한 축제들은 경제활동보다는 지역 조선족사회의 친목에 중점을 두고있다. 축제의 내용들을 보면 대형문예공연, 지역 단체들의 집체무용, 무형문화재공연, 씨름, 그네, 윷놀이, 널뛰기 등 전통적인 민속놀이와 전통음식 등이 주요한 행사가 되고있으며 노래자랑, 스포츠경기, 문화포럼 등 행사들을 진행하는 지역도 있다. 전국 각지와 한국, 일본에서까지 진행되는 민족문화축제는 도시화, 글로벌화라는 시대적배경하에 조선족들이 전통문화를 체험, 전승할수 있는 소중한 장소가 되고있다. 문화축제에서 전통적인 집체무용, 전통유희, 전통음식, 전통한복, 무형문화재공연 등 다양한 민족문화들을 선보임으로써 조선족들이 도시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수 없는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피부로 전통문화를 느끼게 된다. 민족문화축제의 다양한 행사의 준비, 직접적인 참가를 통하여 전통문화를 전승하고 민족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나가게 된다. 지역 조선족사회가 차세대들을 포함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차세대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족문화전통들을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고 정서적으로 동화할수 있다. 체험과 참여를 통하여 단절된 전통을 이어가는 고리의 역할을 할수 있다. 문화축제는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조선족으로서의 문화적자각을 실현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고있다. 동북지역 조선족 전통집거지의 인구가 날로 줄어들고있는 상황에서 민족문화축제의 개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지역 조선족사회의 민족문화를 전승하는 대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있다. 행사에서 다른 지역의 문화단체들을 초대하고 외지에서 생활하고있는 지역출신 주민들을 초대하는 등 오픈된 행사를 조직함으로써 련대감을 강화하고 지역 조선족사회의 활성화에 일조하고있다. 기타 민족 지역주민들도 참여하는 오픈된 행사로서 지역 다문화사회의 문화적교류를 추진하고 상호 리해와 믿음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고있다. 할빈시조선족민속문화축제, 길림시조선족민속문화축제 등은 2013년 제10회 중국 예술축제(藝術節)에서 행사부문 “뭇별”상을 받음으로써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문화행사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두만강문화관광축제, 장백산진달래국제문화관광축제 등 축제는 도문, 화룡 나아가서 연변을 대표하는 축제로 성장하였으며, 류두문화절도 녕안을 대표하는 축제로 되였다. 민족문화축제의 지역경제, 조선족사회에 대한 구심점역할 등으로 인하여 여러 지역들에서 경쟁적으로 민족문화축제를 개최하고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특색이 있는 문화축제를 개최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그러나 민족문화축제의 개최에 문제점이 없는것도 아니다. 여러 지역의 축제내용들이 대동소이하고 지역특색을 잘 살려내고있다고 판단하기 어려워보인다. 지역 조선족사회가 스스로가 즐기는 축제거나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를 담고있는 축제라기보다는 관광객유치와 경제활성화, 혹은 단순한 조선족간의 친목을 위한 축제로 자리매김되기 쉽다. 물론 이러한 기능들은 현재 진행되고있는 여러 축제들의 주된 목적들이기도 하다. 다만 민족문화축제를 보다 활성화하기 위하여 놀이, 민족문화전승, 지역경제활성화 등 기능들을 강화함과 아울러 지역 특색 살리기가 필요하다. 타지역에 없는 지방성 지식들을 살려내여 행사내용에 포함시킴으로써 지역문화발전의 촉매역할을 하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족사회가 벼농사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동질화된 발전의 길을 걸어왔기에 지역적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은것도 사실이다. 전통적인 집거지뿐만아니라 북경, 청도, 상해 등 연해지역을 포함하여 지역사회의 민족력사문화자원을 발굴하여 민족문화축제를 포함한 지역문화행사들에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전승과 새로운 문화의 창출에 이바지할수 있다. 이는 글로벌시대 조선족사회의 문화적자신감 확립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이를 위하여 민족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민넷 2017.11.6
74    조선족은 어떻게 "힘"을 합쳐야 할가?(박광성) 댓글:  조회:1933  추천:2  2017-10-17
                                      박광성       20세기초에 미국을 방문했던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미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교파”가 영향을 끼치고있음을 발견한다. 례를 들어, 한 치과에서 그는 환자가 의사가 소속된 교파를 확인한후 시름놓고 치료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그 환자에서 무엇때문에 의사의 교파를 확인하는가 묻는다. 환자는 “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수양이 높기때문에 신뢰할수 있다”고 대답한다. 즉 그 당시의 미국에 있어 교파는 단순한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상호 신뢰의 공동체로, 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을 할수 있는 사회적자본의 장(場)이였던것이다. 베버는 당시 미국의 큰 기업가들이 많이는 “침례회”회원임을 확인하면서, 이 교파는 높은 도덕적수준을 전제로 회원을 발전시키기때문에, 이 교파 회원으로 되는 순간 그 사회적신뢰도가 증명되여 타인들과의 협력이 용이한 점을 발견한다. 이것으로 베버는 서로 신뢰할수 있는 사회적자본의 형성이 기업, 경제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된다.     또 다른 례로, 유태인들은 내부의 단결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있다. 족내의 끈끈한 협업과 협력을 기초로, 그들은 2000여년동안 나라도 없이 사처로 헤매고 다녔지만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세계경제의 명맥을 쥐고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합작의 기초를 다져왔을가? 그것은 바로 유태인문화에 률령(律令)이 발달했기때문이다. 세계에서 유태인들처럼 반드시 지키야 할 률령이 많은 민족도 드물것이다. 가령, “갚을 능력이 없이 빚을 내서는 안된다”, “세금을 내지 않은 상품을 매매해서는 안된다”, “당지의 법과 어긋나는 초과리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등과 같이 생활 곳곳에 지켜야 할 원칙들이 숨어있으며, 유태인이라면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러한 원칙들이 확립되여있기때문에, 유태인들끼리는 돈을 꿔주든 투자를 하든 사기당할 걱정이 없다.     해외의 화교들도 결집력이 높기로 소문이 나있다. 따라서 그들도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결집력은 원천은 또한 무엇일가? 그 답은 바로 종족(宗族)조직에 있다. 북방의 한족들과 달리 남방의 한족들은 종족문화가 발달되여있어, 그들은 씨족을 단위로 사당(祠堂)을 세우고, 종가를 중심으로 하여 혈연적관계를 유지,확장시켜나간다. 근대에 해외로 흘러나간 화교들의 경우만 봐도, 외국에서 돈만 벌면,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당부터 수건한다. 따라서 그들은 뉴대감이 끈끈한 방대한 친족집단을 형성해갈수 있었다. 가령, “세계허씨총련합회”와 같은 종족조직들은 몇년에 한번씩 세계적인 친족회의를 개최하여 내부적결속을 다진다. 혈연을 매개로 뭉친 집단이기때문에 회원들은 다 친척이 되는 셈이며, 따라서 내부에서 사기를 하거나 하면 아예 사회관계에서 매장된다. 따라서 친족내부에서 다양한 협력이 용이해진다.     상호간에 신뢰형성이 집단내의 “힘”의 결집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기때문에 당대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아예 이를 “사회적자본”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돈”만 자본인것이 아니라, “서로 신뢰할수 있는 사회적관계”도 자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경제적자본”으로 전환될수 있기 때문이다. 우에서 얘기한 사례들이 바로 “사회적자본”이 어떻게 “경제적자본”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고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어떠한가? 조선족의 문화모체는 기본적으로 상업문명이 결여된 농경문화이다. 게다가 근대에 일제의 침략을 겪으면서 파산된 상황에서 국제적이주를 경험하다보니 종족(宗族)관계도 거의 단절되다싶이하였다. 파산된 빈농집단이 국제이주를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력사적과정을 거쳤고, 그 와중에서 혈연과 계층을 초월한 “공동체”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공동체였다. 힘들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해주었는바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공동체의 구성을 통하여 해소하였던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위로의 공동체”, “정의 공동체”, “놀이의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 삶이 고단하고 각박하니 서로 “아픔”을 나눌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이러한 아픔을 나누는 과정에서 “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으로 “놀이의 문화”가 필요했다. 이러한 조선족공동체는 해방후에 “마을”이라는 안정된 정착지를 찾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조선족마을은 바로 “위로의 단위”, “정의 단위”, “놀이의 단위”였다.     공동체생활에서 “정”이 강조되다보니, “계산”, “리익”, “계약”, “신뢰” 등과 같은 도구적합리성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싶상이였다. 가령, 조선족마을에서는 “리익만 따지고”, “계산적이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나쁜 사람의 전형으로 되기 일쑤였고, 반대로 인심이 후하여 다른 사람과 옴니암니 따지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의 전형이였다. 따라서 시장경제에 필요한 도구적합리성을 발전시킬수 없었다.     오늘날 조선족은 비록 도시화되여 대부분이 도시에서 살고있지만, 그 “공동체문화”의 습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있다. 조선족이 모여살고 있는 도시들마다 각종 “협회”가 설립되여 “공동체를 재구성”하고있지만, 이러한 공동체들은 기본적으로 합작을 기초로 “힘”을 키우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보다는 여전히 “정”을 나누는데 치중되여있다. 가령, “기업가협회”의 활동들을 보면, 협회를 통하여 유기적인 경제적합작이 이루어지기보다는, 기업인들이 돈을 모아 공익성활동과 문화활동에 열중하고있다. 따라서 “기업가협회”는 “힘을 결집하는 사회적자본의 장”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공동체를 도시에서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즉 우리는 아직 “사회적자본”을 “경제적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칠수는 있지만, 그것이 “믿을수 있는 사회적신뢰”로 되여 “힘”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조선족은 “정”과 “아픔”은 같이 나눌수 있어도, “힘”과 “리익”은 같이 나누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공동체생활에서 우리는 “정”을 나누는데에만 습관되여있기때문이다.     인젠 세상도 변했고, 우리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삶의 환경이 바뀐것에 비하여, 우리의 가치관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조선족의 미래는 물론, 우리 개개인의 미래에 있어서도 어떻게 신뢰를 기초로 “사회적자본”을 형성하고, 이를 “경제적자본”으로 전환하는가에 승패가 달렸다고 볼수 있다. 날로 치렬해지는 시장경쟁속에서 특별한 묘기가 없는 한 령세한 업소는 설자리가 없다. 한 사람의 힘이 부족하니 열사람, 백사람의 힘을 합치여 일단 덩치를 키워야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족공동체는 기존의 “정의 공동체”에서 “합작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이러한 진화를 촉진시키는것이 민족을 사랑하는 이 시대 조선족지성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인민넷 
73    우리말이 주는 행복과 서글픔(권진홍) 댓글:  조회:2260  추천:1  2017-09-25
올해 7월, 북경정음우리말학교에서는 심양오가황중심소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 민족문화체험과 교원연수를 진행하였다. 1918년에 설립된 오가황소학교는 료녕성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조선족학교이다. 그리고 항일투쟁사조사연구기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교육연구기지이기도 하다. 오랜 력사와 전통을 가진 학교를 방문하고 문화체험을 할수 있었던것은 우리의 행운이였다.    정음우리말학교에서 이번 방문에 참가한 선생님은 7명, 학생은 18명이였다. 오가황 선생님들께서 알심들여 만들어준 프로그람 덕분에 우리는 심양에 도착해서부터 떠나는 시각까지 일분일초도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여름방학이 막 시작된 시점이라 집에 있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지만 오가황소학교에서는 정음학교 학생들에게 짝꿍을 맞춰주느라 일일이 전화로 또는 가정방문까지 하면서 학부모님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냈다. 그래서 학생들은 심양에서의 2박 3일을 심양 짝꿍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지낼수 있었다.    문화체험내용은 조선족 양로원 방문, 민속촌 방문, 수공예품 만들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양로원에서 학생들은 로인들께 고운 춤도 보여드리고, 손안마도 해드리고, 만두도 만들어드렸다. 양로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도 우리는 좋은 체험을 할수 있었다. 조선족 마을에 들러서 장작불 가마솥에 찐 감자, 삶은 옥수수도 맛보았다. 찐 감자를 처음 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참 가관이기도 했다. 이것도 먹을수 있냐는 눈길이였다. 어느 아이부터 어떻게 먹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찐 감자도 호호 불면서 먹기 시작했고 차에 올라서는 감자 더 달라고 응석섞인 코소리까지 했다. 낯선 분들 앞에서 체면차리느라 실컷 못먹었던 모양이다.   그다음은 논밭 구경을 갔었다. 매일 먹는 쌀알을 맺는 식물이라고 했더니 그것마저도 새롭기만 했던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따라 심양 날씨가 찜통 같았지만 학생들마다 피곤하다거나 짜증어린 기색이라곤 찾아볼수 없었다.    민속촌에서는 한복 입어보기; 가마 타보기; 감자 캐기; 도마도, 수박 따기; 김밤, 비빔밥 만들기; 제기차기; 투호놀이 등등 짧은 시간에 참으로 다양한 체험을 하였다.    마지막 날에는 오가황소학교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수공예품만들기 수업을 해주셨다. 아이들마다 정성껏 각자 꽃을 만들었다. 다들 엄마 갖다드린다고들 했다.    2박3일간의 학생들 문화체험 기간 교원들은 틈틈이 오가황소학교 선생님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을뿐만아니라 한나절 시간동안 전문 연수를 받기도 했다. 다년간 소학생 교육을 해오신 분들이라 전문직이 아닌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학생들을 인솔하는 실천장면으로부터 현실에 맞춰 창의적으로 잘 만든 준비물 등등은 다 우리의 귀감이였다.    짧지만 알찬 시간을 보내고 온 우리는 꽤 긴 시간동안 그 감동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했고 지금도 잔잔한 여운속에서 행복을 느끼고있다. 학생들에게는 그냥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에 잠간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선생님들에게는 한차례의 세례였던것 같다. 어릴때 경험했었지만 이미 리탈한지 오래되였고, 늘 옛 생활의 잔상들을 머리속에 그려보면서 추억속에만 담아오던 생활들을 다시 한번 경험하면서 느낀 감동은 참으로 말로 표현할수 없을만큼의 값진것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사색의 실마리 아니 서글픔도 남겨주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조선족집거지구 조선족학교들이 많이 와해되고, 유지되고있는 학교들도 엄청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소식들을 많이 접했었다. 물론 나의 고향의 학교들도 없어진지 오래다. 수십개에 달하던 소학교가 지금은 하나로 통합되고 그마저도 겨우 연명해나가는 처지라고 한다. 이러한 실상을 매체를 통해서 접할 때마다 늘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세계화와 대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 상태에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도 생각했다.    다른 여느 학교들과 별반 다름없이 오가황소학교 역시 학생래원 결핍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있었다. 학생이 많을 때는 700여명에 달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15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축구, 민족무용, 중국전통악기 고쟁(古筝),색소폰 등 악기를 무료로 가르쳐주면서 다재다능한 인재들로 양성하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이지만 학생 감소는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한다. 오가황소학교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 다 위기감을 느끼고있다.    사회가 격변기를 거치면서 인구류동이 가속화되였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모든것이 경제위주로 돌아가고 점점 빨라져가는 생활절주속에서 사람들은 무작정 단방향 직진을 하고있다. 그래서 작고하신 리득춘교수님께서 일찍 지적하셨던 본민족어 어맹(语盲)이 나날이 늘어나고있다. 학교가 없어 지식을 배울수 없어서 문맹이 생긴다면 어맹은 필요한 언어환경이 없음으로 해서 생기는것이다. 원 집거지구의 학생들이 줄어들고 따라서 학교 수가 감소된다는것은 어딘가에서 우리 민족 어맹이 늘어남을 의미하고있음이다.    내가 본 오가황소학교 선생님들은 가능한한 한명이라도 어맹이 안되도록 온 힘과 열을 다 붓고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중국어가 더 편한지 짝꿍들끼리도 만나자 바로 중국어로 소통했다.   인류가 진보한 상징의 하나로 다종 언어 사용을 꼽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민족어를 잊어가고있다는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언어가 잊혀지고 어맹이 많이 생긴다는것은 그 민족의 문화가 약화되고 묻히게 됨을 상징하기도 한다. 과연 뿌리없는 꽃이 얼마나 성장할수 있고 얼마나 아름답게 필수 있을가.   모든 언어는 그 민족 문화를 담고있는 매체이고 그 민족의 사유방식, 생활습관, 민속, 역사를 담고있다. 모든 언어는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포함되여있다. 언어는 곧 민족정신이고 민족의 상징이다.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것만으로도 뉴대감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킨다. 심양오가황소학교 학생들과 북경정음학교 학생들이 멀리 떨어져있지만 바로 친해질수 있었고 심양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줄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리유에서일것이다,    오가황소학교 선생님들을 만났을 때 비록 모두가 처음 만난 분들이지만 우리는 서로 낯설지 않았다. 여러 환경이 점점 안좋아지고있음에도 아이들이 우리말을 배울수 있도록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는 오가황소학교 선생님들 모두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무엇을 공부하느냐는 부모들의 교육태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세계화의 영향하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은 우세언어(중국어, 영어 등) 교육에 열중하고 지력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있다. 그래서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진 본민족언어는 모어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다른 지력개발프로그람에도 밀리고있다. 사유와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지력발전에 아주 큰 긍정적영향을 미치고있지만 민족어는 여전히 홀대당하고있다. 아이들의 첫 교육적환경이 가정이고 가장 오랜 시간 머물러있는 환경 역시 가정이란 점을 감안하면 부모들의 언어에 대한 인식, 본민족어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것이 더 급선무일지도 모른다.   이번 오가황소학교 방문에서 우리는 좋은 경험들을 하고 많은 배움을 얻었었지만 우리가 도움을 줄수 있는것이 없다는 부분이 안타까웠다. 미약한 호소밖에 할수 있는것이 없어 한심스럽기만 하다. 우리말이라는 매체로 북경-심양의 학생, 선생님, 학부모들이 다 하나가 되는 행복을 만끽했고 또 우리말, 글, 문화가 점점 색 바래져가는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것 같아 한없는 서글픔도 느꼈다.    이미 전일제학교가 없어진 북경 같은 도시에서는 부득이한 방법으로 주말학교를 만들어 겨우겨우 민족어를 인식시키는 정도이지만 아직 유지되고있는 집거지구의 학교들에서는 앞으로 우리말을 연구하고 갈고 닦는데 주역할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집거지구 학교들, 도시에 새로 세워지고있는 주말학교를 충분히 활용하여 우리말, 우리글부터 착실하게 배워나갈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고 실천하는것이 당면 문제이다. 인민넷 2017-9-25
72    조선말 방언은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김청룡) 댓글:  조회:5928  추천:0  2017-09-20
어릴적에 학교에 이상한 조선말을 하는 학생이 전학해왔다는 소문이 있으면 전교생이 모여들어 목을 빼들고 구경을 했다. 그만큼 타지역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희한했던것이다.  조선말 방언은 19세기 중엽이후 대량의 조선이주민이 중국에 몰려들면서 중국에 자리잡고 차츰 방언구역이 형성된다.  19세기중엽부터 1910년 사이 청나라의 봉금령이 해지되면서 20만명에 달하는 조선이주민이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한다. 주로 조선 평안도의 자성, 만포, 초산, 벽동, 창성, 의주 등 지역 출신들이 압록강이북의 집안, 통화, 흥경, 환인, 관전, 안동 등 지역에 정착하고, 함경도의 혜산지역 출신들이 장백지역에 정착하며, 함경도의 무산, 회녕,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등 지역 출신들이 두만강이북에 정착하고, 함경도의 일부 출신들이 흑룡강성의 무원, 료하, 호림, 보청, 밀산, 동녕, 녕안, 목릉 등 지역에 정착한다.  일본외무성 《재만조선인 개황》(1933년)을 살펴보면 1910년이전 압록강, 두만강이북 지역에 정착한 조선이주민은 대부분이 함경도, 평안도 출신이지만 제주도방언을 포함해 조선어 6대 방언 지역출신들이 모두 존재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조선반도가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많은 애국지사와 땅 잃은 조선농민들이 또 중국 동북으로 대거 류입했다. 이 시기도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이주자가 위주였지만 그중 함경북도, 평안북도, 경상북도 이주민이 함경남도, 평안남도, 경상남도 이주민보다 많았고, 강원도, 황해도 이주민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이주민보다 약간 많았다. 그리고 이주민중 80%가 오늘의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 지역과 장백, 집안, 림강, 환인, 관전 등 지역에 정착하고 기타 20% 정도가 다른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함경도출신들이 주로 오늘의 연변지역에 정착하고 평안도와 경상도 출신들이 주로 오늘의 료녕지역에 정착하였던것이다. 그후 1937년 일제의 “집단이민”정책에 의해 조선이주민이 또 한번 중국에 대량 정착하면서 중국에서의 조선말 방언 구역분포가 기본적으로 형성된다.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출신들에 비해 전라도, 경기도 등 기타 지역 출신들이 인원수가 훨씬 적기에 그 구역분포가 선명하지 않다. 이 시기에 형성된 조선말 방언 구역 분포는 오늘에까지 유지되고있으며 대체로 다음3대 방언 구역을 이루면서 조선반도에서의 방언 지리적분포와 대칭구조를 이룬다.  (1) 함경도방언 구역: 연변지역, 목단강지역, 통화지역의 장백. (2) 평안도방언 구역: 단동지역, 무순지역, 심양지역, 영구지역, 철령지역, 통화지역(장백을 제외한 곳들). (3) 경상도방언 구역: 장춘지역, 길림지역, 사평지역, 할빈지역, 수화지역 등.  조선말 방언은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한국과 조선이 분단되여 상호 방언에 대한 료해 및 연구가 결핍한 상황에서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이 사용하고 보존해온 방언은 더우기 소중하다.  도시화에 의한 인구류동과 전반 교육질의 향상에 의해 중국 조선말 방언도 위기를 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가 방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연구자들이 그에 대한 연구를 깊이할 필요가 있다. 인민넷 2017-9-19   [김청룡 략력] 출생년월: 1979.2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언어학, 조선어 학력: 한국 경희대학 국어국문과 언어학 박사 한국 서울대학 국문학과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석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언어학 학사 경력: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강사, 석사생 지도교수(2012.9 – 현재) 한국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2011.8 - 2012.8) 한국 대진대학 교양학부 외국인 전임교수(2011.3 – 2012.8) 한국 호원대학 국제교육원 강사(2010.3 – 2010.7) 중앙민족어문번역국 조리번역(2002.8 – 2005.3) 주요 론저:  저서로는《韩中待遇词汇对比研究》(2014, 한국, 박문사)、역저로는 《韩国风俗画》(2015, 商务印书馆)등. 《浅析韩餐菜名的结构类型-以显性要素与隐性要素为例》(2015)、《韩中待遇词汇语域关系对比分析》(2014)、《基于语料库翻译学的韩汉有标识被动句的翻译研究小议》(2014)、《韩国语自我待遇词汇语义类型分析》(2014)、《韩国语汉字词与汉语的人称词缀对比分析》(2012)、《刍议中国国内韩国语教育改善方案》(2010)등 10 여편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인민넷 조문판 
71    “일대일로” 건설과 조선족사회의 발전(리성일) 댓글:  조회:1633  추천:3  2017-09-12
“일대일로(一帶一路)” 건설과 조선족사회의 발전 리성일 2013년 9월, 습근평(習近平) 국가주석은 까자흐스탄에서 한 연설에서 유라시아국가들과의 새로운 경제협력모델로서 “실크로드 경제벨트” 건설 구상을 제시하였다. 동년 10월, 습근평 국가주석은 인도네시아에서 동남아국가들과의 해양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건설을 제안하였다.  2014년 4월, 리극강(李克强)총리가 박오(博鰲)포럼에서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건설을 금후 국가의 중요한 프로젝트로 추진할것이라고 언명하였다. 동년 12월에 “실크로드기금”이 북경에서 설립되였고, 등록자본 100억딸라로 출발하였다. 2015년 2월, 당중앙은 “일대일로건설사업지도소조”를 설립하고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부총리 장고려(張高麗)를 조장으로 임명하였다. 동년 3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상무부, 외교부는 련합으로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공동 건설하기 위한 비전과 행동”을 공포하였으며, “일대일로” 건설 목표와 구상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12월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북경에서 정식으로 성립되였으며, 2017년 5월 현재 가입 성원국은 77개에 달하여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금융기구로 새롭게 성장하였다. 2017년 5월,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이 북경에서 개최되였으며, 140여개 국가와 80여개 국제기구의 대표 16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습근평 국가주석은 개회식에서 “일대일로” 건설을 보다 가속화시키고 “실크로드기금”에 인민페 1000억원을 증가시킨다고 선포하였다.  현재 통계에 의하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중국은 “일대일로” 연선국가와의 무역액이 3조딸라, 투자액은 500억딸라를 초과했다고 한다. 이제 “일대일로” 건설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중국꿈”을 실현하는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 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외국의 선진기술, 자본, 관리 경험을 “해외로부터 도입(引進來)”하는 대외개방에서 이제는 해외에로의 투자, 관광, 건설에로 전환하는 “해외에로 진출(走出去)”하는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대일로” 건설은 중국과 아시아의 주변국가들, 나아가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역협력체제 구축과도 밀접하게 련관되여있다. 또한 “운명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책임공동체”, “리익공동체”를 목표로 지역내 국가들과의 상호존중, 상호협력, 상호 혜택과 리익 원칙하에 “신형국가관계” 건설에도 크게 이바지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는 “두개 100년”목표를 실현해나가는 전략적발전시기를 잘 파악하고 지역 경제사회의 전면적발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일대일로” 건설에 관한 비전과 구상에 대해서 전략적발전차원에서 깊이 리해하고 고도로 중시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력사적력동시기에 처해있는 우리 민족사회는 “일대일로”에 대한 리해나 중시, 연구 및 공동보조가 상당히 뒤떨어져있는 상황이다.  우선, 민족사회 전반적차원에서 “일대일로”에 대한 전면적인 리해와 대대적인 선전이 매우 절박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여론 및 언론 보도를 보면 “일대일로”에 대한 대부분 리해가 단순한 소식보도수준에 머물러있으며, 국가의 장기적발전을 위한 전략적차원에서의 리해가 부족하다. 또한 지역사회나 정부도 “일대일로”에 대한 중시나 선전, 나아가 지역 발전과의 유기적인 결합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중국정부는 “일대일로” 전문 지도기구를 내오고 비전이나 행동 원칙을 제시하였으며,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상무부, 외교부는 이미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발전 전략과 정보는 “일대일로”에 대한 리해에 참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일대일로”에 대한 리해와 선전을 위해서는 정부가 주체로 되여 기업, 학계, 신문보도기관을 인도하여 련합으로 “일대일로” 종합전문란을 만들어 중앙의 정책과 동향, 관련 정보들을 우리 사회에 널리 선전하여 전면적인 중시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대외협력 발전에 있어서도 적극 활용해나갈수 있다. 다음, 지역 사회 발전차원에서 “일대일로” 건설과 유기적으로 련계시키고, “관산학” 협력체제를 적극 구축, 활용해야 할것이다. 현재, 지역사회에 대한 조사연구과정을 보면, 정부와 기업, 특히 학계간의 유기적인 련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정부로서는 나름대로 지역의 경제발전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있지만, 지역사회에만 한정되여있어 대외적인 홍보가 상당히 미흡하다. 학계는 정부나 기업의 행위에 대해서 조언을 하고싶지만, 실질적인 수요를 파악하지 못하고있기때문에 서로간에 괴리가 심각하다. 따라서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기업-학계간의 협력을 추진하는 이른바 관산학(官産學) 협력체제를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과 학계가 협조하여 조속히 구축해야 할 필요가 매우 절박하다. 조선족사회는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기때문에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 분야에서 많은 전문가, 학자들이 활약하고있다. 이러한 지적자원을 민족사회발전에 유기적으로 련계시켜야 할것이다. 특히 연변지역을 동북 3성을 벗어나 중국사회에 널리 알리고 주변 국가들에 알리려면, 관산학협력을 통해서 북경, 상해 등 대도시에서 적극 홍보하는 사업도 진지하게 고려하는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지역발전비전을 위한 “일대일로” 건설에 관한 관산학 간의 공동연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셋째, 장기적인 발전 비전에 있어서 “일대일로” 건설과 민족사회의 발전을 전략적차원으로 결부시켜야 할것이다.  “일대일로” 구상은 장기적인 발전전략이다. 민족사회의 문명한 발전과 전면적인 진보를 위해 우리도 “일대일로” 장기적인 발전전략을 바탕으로 자체의 발전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야 할것이다. 최근, 한국에서의 “사드”배치, 조선에서의 핵실험 등으로 인하여 조선반도정세가 급속하게 긴장되고있으며, 중국과 조선반도 국가들 사이의 관계도 커다란 영향을 받고있다. 지정학적요인으로나 력사적관계로 보아도, 우리 민족 사회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제한을 크게 받으며, 이미 경제적손실이나 소극적영향이 많이 나타나고있다. 물론 지정학적위치나 력사적련대를 개변할수는 없지만, 발전전략에 있어서 조선반도와의 경제적, 문화적 련계에 지나치게 치중했던 부분에 대해서 심사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부딪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대일로”라는 커다란 발전전략속에서 지역사회의 발전전략을 새로운 대안차원에서 보다 다각화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할것이다.  동북아지역에 위치한 지리적특수성을 리용해서 “동북진흥”에 적극 참여해야 할뿐더러, 조건을 적극 창조하여 “중국-몽골-로씨야 경제회랑” 건설 등 기타 “일대일로” 건설 프로젝트에 동참해야 할것이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한 보다 주체적인 의식이 보다 바람직하다. 인민넷 2017-9-11
70    근대로의 전환기 중국과 서양의 만남(최선향) 댓글:  조회:1657  추천:1  2017-09-07
근대라는 시점은 중국 력사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다.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해온 중국은 력사적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오래동안 책봉-조공의 관계를 이어오면서 종주국으로서의 위엄을 떨쳤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등 서구 렬강들의 침략을 받으며 기나긴 아픔을 견뎌야 했고, 종주국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근대로의 전환기에 청나라는 이미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중화사상을 가지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전근대의 중국은 주변 국가들에 막강한 정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쉽게 례를 들면 한자를 사용하는 한자문화권과 유교문화권의 형성이 그 좋은 례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조선글이 조선시대 세종대왕때 창제되여 1446년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반포되였지만, 조선시대 사대부 량반들은 조선글을 녀자들이나 쓸 글이라고 낮잡아 암글이라 일컬으며,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한문(漢文)을 사용하였다. 조선글이 창제된 후에도 조선왕조의 공문(公文)은 줄곧 한문이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실시하며 조선글이 공문으로 반포되긴 하였지만 조선글은 여전히 한문과 같이 사용해야 하는 문자였다.  조선반도만이 아니라 일본, 베트남도 한자를 사용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이 형성되였고, 중국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유교문화권이 형성되였다. 유교 사상에 기반한 률령과 의례(儀禮), 제도(과거제도, 중앙과 지방의 행정제도) 등도 주위 나라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문화적영향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보면 중국은 주변국가와 오래동안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해왔다. 조선과 베트남 등 국가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공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을뿐만아니라 새 왕이 즉위하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력사적으로 보면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중국인은 화이론(華夷論)적세계관을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세계를 중국 및 그와 조공관계에 있던 나라를 합한 직방(職方)세계 중심으로 인식하였다. 천하 국가를 조공—책봉의 관계로 파악했던 송나라 이후의 중국인이 그린 세계지도는 직방세계만을 표현하는것이 일반적이였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서양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서양의 세계지도는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류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보면 “마테오 리치(利馬竇)의 지도에 나타난 해양의 여러 나라를 보니, 중국은 동쪽 구석에 치우쳐있으면서 크기가 손바닥만하고, 우리 나라의 크기는 버들잎만하며, 서역은 천하의 중앙이 되여있다. 마음이 허탈하여 수용할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 이름 전한자가 잘못한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의 지식인이 이렇게 허탈하다고 하였으니 중국인들은 오죽했으랴?  근대에 이르러 중국인들은 지리적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했을뿐만아니라 화이론적세계관도 버려야 했다. 고대로부터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과 충돌해온 력사를 갖고있는 중국은 유목민족들이 인의(仁義)를 지키지 않고,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변덕스럽다는 인식을 갖게 되엿다. 근대에 이르러 중국에 온 서양인들 역시 북방의 유목민족과 다를바 없는 오랑캐라고 여겼으며, 서양 국가들과의 대외관계를 허락하지 않고, 무역만을 허락하였다. 대다수 사대부들은 서양과의 관계 역시 조공제도의 틀안에서 리해하면서 영국 등 서양 국가들을 중국과 대등한 나라로 대우하지 않았다. 1840년대까지 청나라 관료들은 서구 렬강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1840년대와 50년대, 림측서(林则徐)와 공자진(龚自珍) 등을 포함한 청나라 사대부들은 서양 국가의 국명을 쓸 때, 보통 짐승과 상관된 편방(偏旁, 보통 犬字旁)을 썼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영국은 1858년에 체결한 천진조약 제51조에, 이후 청정부의 모든 공문에 영국 국민을 표시할 때 “夷”자를 쓰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1861년 이후 중국의 대외관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두차례 아편전쟁에서의 실패와 1860년 영국과 프랑스 련합군의 북경 점령, 그리고 원명원을 불태워버린 사실은 청나라의 일부 관료들로 하여금 서양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하였다. 그들은 서양인들은 예전에 중국을 침입했던 오랑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것을 인식하게 된다.  1861년에 외국 외교관들이 북경에 거주하게 되며, 청정부는 중앙에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한다. 그리고 18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곽숭도(郭嵩燾)를 첫 영국주재 공사로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 만족 관료들은 자신의 신분을 높이기 위해 외교사무를 기피하였으며, 서양에 외교관으로 파견되는것을 류배지에 류배되는것과 같은것으로 리해하였다. 문화적자부심이 강한 대다수 사대부들은 서양문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865년, 리홍장(李鴻章)에 의해 설립된 강남제조국의 역서국(譯書國)에서 서양서적을 많이 번역, 출판하였지만, 1890년대 중반까지 근 30년 동안 13만 권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후쿠자와 유키치(福泽谕吉)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은 1865년에 출판되자 거의 즉시 25만권이 팔렸다고 한다. 당시 4억명이 넘는 중국의 인구 규모와 비교하면 중국인들은 정말 서양문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다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것 같다. 이번 전쟁의 실패로 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게 되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2000여 년간 이어오던 책봉-조공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서구 렬강들에 의해 령토가 분할되는 심각한 민족적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중국은 서양과 일본에 대한 생각을 철저히 바꾸게 된다. 그전의 양무운동시기까지만 해도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무기에만 관심을 가질뿐,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자국의것을 고집했던 중국에서 이제부터는 사상, 제도적인 측면에서 서양과 일본을 배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참고문헌: 徐中约著,朱庆葆、计秋枫译,《中国近代史(1600—2000:中国的奋斗)》,世界图书出版公司北京公司,2013年第2版。 [美]费正清、刘广京编,中国社会科学院历史研究所编译室译,《剑桥中国晚清史(1800-1911年)》上、下卷,中国社会科学出版社,1985年第1版。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새문사, 2009년. 인민넷 
69    중국조선족의 융합문화(전월매) 댓글:  조회:1771  추천:0  2017-08-30
중국조선족은 19세기중엽에 조선반도에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이주한 조선민족의 후예로서 인종적으로 조선반도와 뿌리가 같고 국가적으로는 중국국적을 소유하고있다. 이주 100여년이 넘는 조선족은 한편으로 조선반도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오면서도(해방이후는 조선문화의 영향을, 중한수교이후에는 한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른 한편 중국문화의 환경속에서 조선반도문화와 중국문화를 혼용하고 융합하여 생활하면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조선족 자생문화를 창출하였다. 이 글에서는 자생문화에 앞서 조선족문화특징중의 하나인 융합문화에 대해 담론하고자 한다. “융합(融合)”의 사전적의미는 “다른 종류의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비빔”, “섞음”이라 말하기도 한다. 둘이상이 모여 새롭고 유익하게 만들어진 창조적섞임을 말하기도 한다. 민족문화와 중국문화가 공존하면서도 둘이 섞여 만들어진 조선족특유의 혼종문화, 융합문화는 조선족 삶의 가장 기본요소인 언어와 음식, 거주문화에 체현되여있다. 우선 조선반도에서 내려온 우리말 단어자체에서 융합의 정신을 볼수 있다. 외래어가 들어오면 중국의 경우는 중국식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일본의 경우는 외래어를 그대로 쓴다. 그러나 우리말은 한자어나 외래어가 들어와도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융합정신이 있다. 례로 한자어와 결합된 “황토흙”, “초가집”, “역전앞” 등을 들수 있다. 한자어에 “토(土)”, “가(家)”, “전(前)”이 있음에도 고유어인 “흙”, “바다”, “앞”자를 추가하여 융합시켰다. 외래어와 결합된 단어로는 “닭도리탕”, “모찌떡”, “라인선상”, “찌프차” 등을 들수 있다. 외래어인 “도리”, “모찌”, “깡”, “라인(line)”, “찌프(jeep)”에 우리말인 “닭”, “떡”, “선”, “차”를 겹쳐놓아 융합시켰다. 이는 한자어나 외래어가 들어왔을 때 그들을 배척하는것이 아니라 끌어안아 우리말과 접목하여 한데 아우르는 융합정신을 보여준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일상생활에서 습관적으로 조선어(중국조선족), 한국어(한국), 문화어(조선), 한자어(중국), 외래어(외국)를 혼용하여 쓰고있다. 례를 들면 중국조선어에 흔히 쓰는 한자어 “소학교”, “사업단위(工作单位)”, “견지하다”; 연변방언 “와늘”, “얼빤하다”, “탈망살이”, “매짜다”; 문화어 “끌신”, “창문보”, “물보라”; 한국어 “몸짱”, “얼짱” “짱짱하다” 등을 두루 쓰고있다. 거기에 제지해야 할 사항이겠지만 “쌍발(上班)”, “츠판(吃饭)” “샹차이(香菜)” 등 통째로의 한어단어들까지 가세하여 일상용어로 혼용하여 사용한다. 단어뿐만아니라 언어구사에서 중국조선족은 어릴 때부터 조선어는 모국어로, 중국어는 일상용어로 하면서 이중언어를 동시에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즉 중국조선족은 태여나서부터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우리말과 중국어, 두개의 언어를 동시에 습득하는 조기이중언어구사자이다. 과학자들이 12세를 기준으로 조기와 후기로 나누어 이중언어구사자들의 뇌활성화 이미지를 관찰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12세 이전에 배운 제2언어는 제1언어와 뇌활성화 부위가 같지만 12세 이후에 배운 언어는 부위가 다르다는것이였다. 즉 12세 이전에 배운 제2언어는 동일하게 모국어가 된다는것이다. 조기이중언어발달자는 단일언어학습자에 비해 타외국어를 습득하고 융합하는 능력이 월등히 높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족의 융합된 민족언어구사는 중국이란 한자문화권에서 남과 북의 삼각점에 있는 중국 조선족지역은 지리적, 문화적, 력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한국어와 조선의 문화어, 중국의 한자어의 자양분을 나름대로 섭취하는 “융합의 장”이여서 가능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이러한 장이 될수 있었던것은 조선-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1992년에 이루어진 중한 수교, 그리고 사회주의체재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중국에서, 원형의 민족적 정서와 문화를 잘 보존하고있는 중국조선족지역만이 남과 북의 사람들, 중국인, 조선족이 공존하고 여러 언어를 받아들여 혼용하고 융합할수 있는 장이 될수 있지 않았나싶다. 다음으로 음식문화에서도 융합의 정신을 찾아볼수 있다. 조선족음식의 특징은 한국음식과 중국음식의 융합에 있다. 상차림을 보면 김치, 된장찌개와 같은 한식과 볶고 지지고 한 볶음반찬 중식의 융합이다. 중국음식만 먹으면 기름기가 많아 느끼해서 김치와 찌개를 찾게 되고, 김치와 찌개만 먹으면 속이 허해서 금방 배고프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두가지 성질의 음식인 한식과 중식을 한꺼번에 차려서 먹는 조화로움은 조선족만의 독특한 음식문화이다. 그러나 한식이나 중식을 그대로 두지 않고 나름대로 입맛에 맞게 조화, 융합시킨다. 조선족들이 즐겨먹는 개장국, 동북생채무침(东北凉拌菜), 건두부무침, 양꼬치, 순대 등 음식은 모두 조화와 융합의 산물이다. 개고기는 서양에서는 기피하지만 동양에서는 즐겨먹는 음식이다. 개고기를 된장으로 끓인 국에서 말아먹는다는 말에서 비롯된 “개장국”은 “개장”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보신탕”, 조선에서는 “단고기”라 부른다. 개장국은 삼계탕과 함께 삼복절식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개고기의 식용에 관한 력사적인 최초의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진기제 5장에서의 "진덕공 2년(기원전 679)에 삼복날에 제사를 지냈는데 성내 사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를 막았다"는 기록으로 보고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명청시기까지 개고기는 상류층만이 향유할수 있었던 고급음식이였다 한다. 중국조선족의 개장국은 한식과 중식의 융합이다. 조선반도의 개장이 대체로 삶아서 잘게 찢은 개고기와 함께 파, 고추가루, 생강 등을 넣고 푹 끓인다면 조선족의 개장은 그 기초우에서 중국료리의 향료인 팔각회향(大料)과 중국인이 즐겨먹는 향내음 나는 고수풀(香菜)을 더 넣는다. 향료는 노린내 없애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된장, 고추장, 시래기 등을 넣기도 하고 양념으로 소금, 고추가루, 후추가루, 간장, 깨, 파, 마늘, 고수풀 등을 넣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복날 뜨거운 개장을 먹고 땀을 흘리고 나면 더위를 물리치고 몸의 혈맥을 다스려 허한 기운을 보충하는데 이는 건강유지에 필수음식이라 한다. 동북생채무침은 생배추, 오이, 숙주, 건두부(干豆腐),묵랭채(拉皮),돼지살고기, 고수풀재료에 소금, 설탕, 미원, 간장, 후추, 향유, 기름고추가루 양념을 넣고 비비고 섞어 담백하고 시원하게 먹는 중식료리중의 하나이다. 중식이 담백하다면 조선족은 고추가루를 듬뿍 넣고 설탕과 식초를 내서 맵고 달고 신 맛을 낸다. 건두부무침도 마찬가지로 건두부를 주재료로 파, 오이, 고수풀, 마늘 등을 넣어 맵고 새콤달콤하게 무친다. 양꼬치의 양념은 대체로 소금, 커민(孜然), 고추가루, 생강가루, 양기름(羊油) 등을 섞는다. 국이나 무침은 색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각 종류의 야채와 고기, 맛이 부동한 양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섞고 비벼서 조화를 이루어내고 융합을 이루어 맛을 내는것이다. 조선족음식의 특징은 대체로 맵거나 혹은 맵고 달고 새콤하거나 혹은 향료를 써서 자극성이 있다. 이는 동북3성의 추운 기후를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진 알콜농도가 높은 술과 궁합이 맞아떨어진다. 한식이나 중식을 토대로 나름대로 재료와 양념을 추가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음식으로 탄생시키는것, 이는 한식과 중식을 아우르는 량극단의 통합과 융합으로 얻어낸 조화이다. 그다음으로 주거문화인 가옥에서 동북의 조선족마을 가옥의 가장 큰 특징은 두개의 문화를 한 공간에 구현하고있다는 점이다. 즉 북방문화인 온돌과 남방문화인 마루를 하나의 공간에 만나게 했다는 사례이다. 중국은 온돌이 있고 마루가 없으며 일본은 마루가 있고 온돌이 없다. 조선반도는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는데 이 둘의 결합은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우리 민족 거주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한다. 한국은 대부분이 온돌은 집안에 낮고 평평하게, 마루는 바깥에 있다.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우리 조상들은 우리 민족 거주문화의 기초우에서 중국의 온돌문화를 답습하여 동북의 추운 기후에 알맞은 온돌문화와 마루문화로 변형시켰다. 온돌과 마루를 하나의 방 공간에 공존하도록 설계하였다. 온돌은 겨울을 대비하여 아궁이와 구들로 만든 난방장치이다. 조선족가옥의 온돌은 아궁이는 집안이나 정주간에 있고, 구들은 한국처럼 신 벗고 들어가면 평평하고 낮은것은 일부분이고 대부분이 한족의 구들을 모방하여 걸터앉기 맞춤한 높이로 쌓아올린 구들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넣어 가열하면 방전체가 보온을 유지하고 온돌은 좌식생활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구들에는 아래목과 웃목이 있는데 아래목은 아궁이에서 땐 불기운으로 가장 따뜻한 곳이고 웃목은 아궁이로부터 거리가 가장 멀어 불기운이 거의 닿지 않는 가장 추운 곳이다. 이러한 아래목과 웃목은 방안의 공기순환을 돕는 자연공기청정기역할을 한다. 즉 아래목에서의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웃목에서의 찬 공기는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저절로 공기순환이 이루어지는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인 공기순환은 더운것과 찬것을 융합시켜 집안 온도를 높인다. 마루는 여름을 대비하여 만든 더위를 식혀주고 습기를 차단하는 공간이다. 조선족가옥의 마루는 추운 기후의 특성상 대부분이 안방의 온돌과 이어지고 온돌과 공존하며 간혹 바깥에 설치되기도 한다. 집안의 마루는 불을 지펴 음식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여름에 구들이 더워나면 거기에서 생활하고 취침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바깥의 마루는 무더운 여름의 휴식처나 각종 곡식들을 널어 말리는 등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적수요에 따라 한집안에 공존하는 조선족가옥의 온돌과 마루는 융합의 가치를 설명해주고있다. 조선족문화에서의 융합의 정신은 언어와 음식, 거주문화뿐만아니라 수전과 한전농사에서, 그리고 문화와 예술 등 기타분야에도 반영되여있다. 조선족의 융합문화는 그 정체성과 관련이 크다. 중국조선족의 이주력사는 조선반도에서 우리 나라 동북3성으로, 동북3성에서 연해도시로 다시 한국이나 일본 혹은 기타 세계로 이어지는 중첩된 디아스포라이다. 중국조선족의 이러한 특성이 융합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나아가서 조선족 삶을 반영하는 독특한 자생의 문화(조선족문학, 조선족예술 등)를 창출하지 않았나싶다. 21세기는 통합과 융합의 시대이다. 섞여야 아름답고 섞여야 강해지며 섞여야 살아남는다. 중국조선족의 언어와 음식, 거주문화에 담겨진 융합의 정신은 화해와 공생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나눔, 어울림 등 의미의 글로벌 가치가 담겨있다 할수 있다. 인민넷 2017-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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