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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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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조선족의 생활세계와 젠더 질서의 변화 가능성(최선향) 댓글:  조회:2094  추천:0  2019-12-10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차(性别差异)가 아닌 사회적인 성별(社会性别)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녀성성(女性气质,女人味)과 남성성(男性气质,男人味)은 력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1970년대 이후 녀성주의학자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젠더라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발전하면 녀성성, 남성성의 내용도 달라지고 성역할 규범이라든가 성별분업(性别分工)에도 변화가 따른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학술회의 차로 연길에 다녀왔는데 10여년 만에 가 본 연길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 제일 반가운 변화가 주말 연길공원에서 본 아기를 안고 공원을 돌던 젊은 아빠의 모습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쌍둥이 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산책하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였다.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아빠들을 보며 홀연 10년전 조선족녀성로인들의 로후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만났던 한 할머니의 남편이 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변 화룡 출신의 그분은 퇴직간부였는데 젊은 시절 화룡에 살 때 안해를 돕고 싶어도 주위 사람들이 비웃을가 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셨다. 물을 길어도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남들이 안 볼 때 가서 길어왔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한금옥선생의 라는 론문을 보면 1990년대초 조선족 가정의 가사분담에서 남편의 참여는 아주 저조하였다. 조복희 등 학자들의 론문 를 보면 1990년대초 연변조선족 가정의 육아분담 조사에서 남편은 거의 안 한다고 답한 비례가 40.5%나 된다.(리화, 2019: 43, 45)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도시화, 지구화를 배경으로 한 이주의 물결 속에서 조선족의 생활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의 녀성화와 엄마의 부재라는 전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가사일에 별로 손을 대지도 않던 조선족남성들이 안해가 한국이나 외지에 일하러 가고 홀로 집에 남게 된 것이다. 그들이 홀로 가사일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며 연변 소품(小品)에도 가정 살림을 맡아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에는 많은 낯설음과 심리적 갈등, 콤플렉스 등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착되였을 것이다. 몇년전 추석에 남편의 고중 동창네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그 친구의 변화를 보고 많이 놀랐다. 예전에 본 그는 한국기업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기라 사람이 성격이 활달하고 자신감 있어보였다. 그런데 중년에 들어서며 직장을 잃고 거의 3년 동안 집에서 놀(?)아서(그의 말을 빌린다면) 그런지 사람이 기가 많이 죽고 많이 소침해있었다. 남편이 왜 이리 많이 변했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너도 집에서 한 3년 있어봐. 이렇게 돼.”라고 하는 것이였다. 참으로 그런것 같다. 남자가 젊은 나이에 일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리해가 안 가는 일이다. 실은 남자들도 집에 있으면서 ‘놀기’만 하는 게 아닌 데 말이다. 그의 안해의 말을 들어 보면 남편이 직장 생활을 안하는 대신 집에서 집안일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는 자신을 많이 돕는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에 애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있으며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녀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처럼 그 정도까지는 기죽지 않는다. 왜 그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지만, 여기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성별분업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몫 해서다. 우리는 남자가 할 일, 녀자가 할 일을 따로따로 구분해 놓은 남녀의 성별분업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 가사일과 자녀양육은 먼저 녀성과 련결시키는 대신 남성들은 바깥일을 잘 해야 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왔다. 보통 돈을 벌어 오는 일차적인 책임은 남편이 짊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남편이 그런 책임을 잘 못 질 경우 부실한 남자, 못난 남편으로 평가 받는다.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 집안일은 안해도 되고 못해도 된다. 반대로 집안일은 잘하지만 돈을 못 벌거나 많이 못 버는 남자는 좀 모자란 남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여가생활에서도 남자와 녀자는 취미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 아는 지인 부부가 부부싸움을 많이 했는데 들어보면 안해는 남편이 매일 드라마나 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라면 뉴스나 큰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왜 드라마만 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안해 되는 사람이 아주 녀성적이지도 않은 데 말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만큼 성역할 분담을 잘 못해서 불만을 가질 때가 많다. 녀성은 돈을 잘 벌고 능력이 있어도 집안 살림을 잘 못하거나 자녀양육에 신경을 많이 못 쓸 경우 가족과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녀성일수록 자신의 녀성스러움, 즉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더 굳히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이렇게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할 때가 많다.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야 남자든 녀자든, 직장일이든 가사일이든, 자녀 양육이든 편하게 할 수 있는 데 말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의 발전을 론함에 있어 경제나 사회, 교육 등 공적 령역에 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생활세계에 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에 의하면 사회는 크게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눌 수 있다. 체계는 권력, 돈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도구적 리성과 목적합리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이고, 생활세계는 가치, 규범, 상징적 상호작용 등 의사소통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심영희,1999:90) 공적 령역에 관한 연구와 거시적인 안목,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사적 령역, 생활세계, 조선족의 일상에 관한 미시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일상이란 반복되고 체화되여(생각, 사상, 리론 따위가 몸에 배여서 자기 것이 됨.)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일과들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의 사적이고 내면적인 삶과 닿아있는 중요한 령역이다. 일상생활은 흔히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국가나 민족, 사회의 구조도 따지고 보면 개개인의 반복적인 일상생활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들이 일상적인 생활세계 안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꾸려가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은 상황에 구속받음과 동시에 상황 자체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실천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지금까지 시대와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오늘날 지구화라는 현실에도 빠르게 적응하며 새로운 생활패턴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나라, 지역에 흩어져 살며 초국적 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 새로운 현실에 더욱 잘 적응하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남겨져내려온 전통적 습관과 문화를 새 시대에 걸맞게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젠더 규범과 젠더 질서의 변화가 요구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 남녀가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야 보다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으며, 가족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가며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보다 충실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실천과 노력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리화, , 2019년 두만강포럼 녀성분과 론문집. 심영희,
121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갈채(전월매) 댓글:  조회:2089  추천:0  2019-11-26
현대사회에서 운동경기 혹은 어떤 경쟁에서 1등을 한 사람, 승리하거나 이긴 사람은 환호의 박수갈채를 받게 되지만 꼴찌를 한 사람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박수갈채는 뭐니뭐니해도 승자의 몫이다. 더구나 기록을 갱신한 승자의 경우, 불꽃축제처럼 화려한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우러르는 동경의 대상이 되며 두고두고 호명되고 회자된다. 만약 꼴찌에게 갈채를 보낸다면 어떨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씁쓸하고 억지스럽기 하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일등만 추구하는 지나친 경쟁 위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후기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적자생존의 압력 속에서 무엇이든 수자로 우렬을 책정하기 좋아하는 현대사회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수자라는 건 언제나 비교하기 쉽고 서렬을 매기기 용이하다. 네모와 동그라미 같은 도형은 서렬을 매기기 어렵지만 1, 2, 3 과 같은 수자는 한눈에 표가 난다. 결국 수자적 삶이란 계속하여 비교하고 비교되여지고 서렬이 매겨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가장 처참해진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낮은 값어치로 매겨질가 안절부절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와 서렬을 확인하고 체크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세워진 수자의 기준 속에서 개인 리력서에 쓸 수자들을 위해 분투하고, 쉴새없이 계산기 자판기를 두드리며 사람의 모든 걸 수자로 환원시키는 수자의 삶에 빠져들어있다.  실제로 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수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과 행복을 보장할 수 없고 년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 없다. 진정한 가치는 수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한국 녀류작가 박완서의 수필 에서는 마라손에서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감수하면서 등수와 상관없이 묵묵히 뛰는 꼴찌의 삶,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꼴찌의 삶도 당당하여 칭찬받아 마땅하기에 꼴찌에게도 박수갈채를 보낸다고 하였다. 이 글은 2017년 신편중국조선어문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려있기도 하다.  꼴찌주자는 쓸쓸하고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선두주자를 기다리는 응원객과 구경군들이 어느새 흩어져없고 홀로 남은 려정을 계속 달려야 할 때, 꼴찌주자에게는 많은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 고통으로 남은 려정을 꼴찌로 계속하여 달려야 할지? 아니면 중도포기해야 할지? 꼴찌인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이다. 실제로 꼴찌주자가 마지막 완주하기까지에 대결해야 할 적수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마라손이라는 지루하고 기나긴 려정을 달려간다는 것, 꼴찌주자는 모든 환호와 영예의 우승자와는 달리 관중들의 무관심 속에서 환호 없이 달리는 고독에 익숙해야 하고, 승리나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완주하려는 일념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무서운 의지력이 있어야 하며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꼴찌라는 수치심도 지워버려야 한다. 마라손이 슬프도록 정직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과의 싸움을 극한 상황까지 몰고가는 데 있고 그 기나긴 시간을 꾸준히 해나간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라손은 극대화의 고통과 고독과 극기를 요구하는 장거리운동이다. 우리의 생활 또한 마라손과 흡사하다. 끝없이 펼쳐진 마라손이라는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어제를 뒤로 하고 래일을 바라보며 오늘에 끝없이 경주한다. 그 과정이 즐거움으로만 되여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고통으로 점철된 마라손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염치는 한 마리 물고기, 그 고통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부단히 성숙하고 성장하고 성공한다. 고통을 겪은 사람이 모두 성공할지는 몰라도 성공한 사람의 리면을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라는 개미들이 수만마리 지나간다. 이 속에서 그들은 참고 견디고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새롭게 태여난다.  미국 미시간주 앤아(Ann Arbor)라는 곳에는 세계 유일의 실패박물관이 설립, 운영되고 있는데 1년에 20만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미국의 실패연구권위자 로버트 맥메스가 40년에 걸친 연구와 수집 끝에 1990년 설립한 실패박물관에는 식료품에서 가정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패작들이 전시되여있다. 코카콜라회사도 보관하고 있지 않은 1980년대의 실패작 무색콜라의 샘플을 비롯해 심지어는 일본, 오스트랄리아 등 외국의 실패작들까지 볼 수 있다. 7만여점의 실패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실패박물관에서 많은 관객들은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종합분석하고 거기에서 성공으로 가는 열쇠, 즉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의 성공의 해답을 찾는다고 한다. 일본과 미국에는 실패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실패학이 학문으로 정립되여 실패학회가 있고 정기적으로 '실패학 국제세미나'가 열리고 있는데 실패학은 주로 첨단 기술과 과학의 최고 단계에서 다뤄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실패학회에는 히타치, 후지쓰, 미쓰비시 등 일본 대표 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며 실패학은 경영학 석사(MBA)보다 100배 효용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실패학이 성공학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실패 바람이 불고 있다. ‘실패학 국제세미나’가 열리는가 하면 회사에서 실패사례분석은 물론 실패보고서에 실패파티까지 열리고 있을 정도다. 삼성 에버랜드만 해도 직원들 사이에서 열리는 실패파티가 큰 화제라 한다. 팀원들이 빙 둘러서서 붉은색 양초를 X자형으로 꽂은 케이크를 앞에 놓고, 실패한 직원의 실패 발표에 이어 생일축하노래의 가사만 ‘실패 그만 합시다’로 바꾼 축하노래까지 선사한다고 한다. 게다가 서울의 한 유치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시간까지 있을 정도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샤를 페팽(Charles Pépin)은 저서 《실패의 미덕》에서 세네카, 키케로, 사르트르, 프로이트를 통해 실패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이끌고, 우리 삶에서 실패가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낸다. 그는 “실패는 우리가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 가능성에 도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단 한번도 실패를 겪지 못한 삶이 진정한 실패”라고 말한다. 성공이 도취로 우리의 눈을 가린다면, 실패는 현실과 만나고 자신에게 정직해질 수 있는 기회와 다양한 해법 등 성공을 위한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패에서 배우면 큰 실패를 막고 성공의 지레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꾜대학 명예교수 하타무라 요타로는 저서 《써먹는 실패학》에서 실패 없이는 발전도 없다, 실패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 실패 원인은 여러 계층으로 되여있다, 실패는 방치하면 더 커진다, 하나의 큰 실패 앞에는 300개의 작은 실패가 예고되고 있다, 실패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완성도 높은 씨나리오를 여러 개 갖고 있으면 실패를 예방할 수 있다, 실패를 창조로 바꾸는 사람이 되라, 실패를 살리는 리더가 되자 등으로 개인이 직장에서,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 현장에서, 실패를 줄이거나 예방해 가장 효률적으로 일하는 방법,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실패리용법을 소개하고 있다. 실패를 통해 끊임없이 분석하고 재다시 도전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거듭되는 실패의 씨앗으로 남겨두느냐 성공을 위한 디딤돌로 만드느냐가 결정된다.  실패를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삶, 열심히 뛰고 있는 꼴찌주자에게 보내는 박수갈채, 바로 여기에 이러한 도전정신에 대한 긍정과 격려가 있다. 현재 조선족의 조선어문교육이 현실에 맞추어 인문성, 도구성, 창의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은 박수갈채를 보내야 할 일이다. 2014년에서 2019년에 편찬된 중국조선족 조선어문의 신편교재에서는 개인 성장의 아픔과 고민 서사, 내면의식의 자아성찰 서사, 노력과 분투를 통한 성공서사, 사람과 사람관계 스토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고난을 딛고 실패를 극복할 줄 아는 인내심과 끊임없이 도전할 줄 아는 끈기 있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리해하고 그 노력을 찬미할줄 아는, 인간으로서의 삶, 륜리로서의 삶을 중시하는 인간존중의 사회가 만연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정호승의 시 에서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해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무잎사이로 반짝이는 해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2019년 11월 16일) 인민넷 조문판 
120    수도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는 룡정고중 졸업생들(1)---리성일 댓글:  조회:2089  추천:1  2019-11-12
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2020년 3월 17일, 중국조선족 첫 고중인 룡정고급중학교 건교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이듬해인 1950년 3월 17일에 고고성을 울린 룡정고중은 ‘연변고급중학교’ 등 여러가지 명칭을 사용하다가 1983년에 이르러 오늘의 룡정고급중학교로 명명되였다. 초대 교장인 권녕하 선생님의 “학생을 가르치기에 앞서 학생이 따르는 스승이 되라”는 교육리념에 따라 그 동안 2만 여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냈으며, 1963년 성중점중학, 1978년 성중점고중, 2005년에 길림성모범고중으로 평의선정되였다. 모교인 룡정고중에 가면 원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 장군의 ‘중국 첫 조선족고중(中国第一所朝鲜族高中)’이라는 제자가 걸려있는데 첫 조선족고중답게 그동안 참으로 많고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해냈다. 저명한 신문학자인 연변일보사의 남인순(1기 졸업생), 첫 수소탄 폭발시험에서 기여한 남창민(1기 졸업생), 중국 축구계의 ‘중형땅크’로 불리웠던 리광수(1기 졸업생), 저명한 시인인 김성휘(2기 졸업생), 전국우수력사교원인 안장원(2기 졸업생), 《수호전》, 《홍루몽》 조선문판 역자인 리해산(5기 졸업생), 90년대 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담당했던 문진섭(12기 졸업생) 등 정계, 과학계, 문학계, 교육계, 언론계, 출판계 및 체육계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걸출한 졸업생들이 배출되였다.  1983년 3월 17일, 룡정고중창립 33돐 기념일을 계기로 룡정고중 선배졸업생들은 룡정고중선배장학기금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중국 조선족중소학교에 있어서 처음으로 되는 선배장학금이다. 지금까지 수백여명의 재학생들에게 귀중한 장학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학업에 커다란 도움과 정신적 지지를 주었다. 선배장학금에는 선배 졸업생들의 겨레의 넋, 모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 후배들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담겨져있다. 룡정고중 선배 졸업생들은 참으로 훌륭한 선두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7월에 룡정고중, 룡정고중선배장학금기금회, 룡정고중동창회가 련합으로 모교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편성한 《우리 동창들》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다. 그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많은 학우들이 이미 작고했거나 직업상의 리유로 인하여 그들의 생애와 업적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도 북경에도 자랑스러운 룡정고중 졸업생들이 많이 있다. 1951년 9월에 북경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한 최병석(1기 졸업생)을 비롯하여 많은 룡정고중 졸업생들이 북경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했으며, 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있는 직장에 배치되여 활약해온 선배들이 있다. 비록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1951년 1기 졸업생부터 1960년 10기 졸업생까지 보더라도 70여 명이 되는 룡정고중 졸업생들이 북경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직장에서 근무했다. 그분들을 본다면 1951년 졸업생으로는 철도과학원의 김동찬, 중국정법대학의 최병석, 중국항천국제려행사의 리광림, 북경성건건축연구원의 최창률 등이 있었으며, 1952년 졸업생으로는 중국핵공업경제연구소의 현광혁, 국가수전수리과학연구원의 김학룡, 북경대학 물리학부의 전호석, 국가항천부 8357연구소의 조승하, 해방군의학과원의 최두만, 중국과학원의 홍병포, 중국전자파연구소의 김원송 등이 있다. 국가항무공정국의 김태익, 중국과학원 금속연구소의 김주경, 국가교통과학연구원의 박하홍, 북경석탄과학연구원의 리창대, 중국과학원 고생물연구소의 남동선, 국가지질부 지질연구소의 김생금, 북경시화학섬유연구소의 함문숙, 북경외국어대학의 리균식 등 1953년 졸업생들이 있다. 1954년 졸업생들로는 수도강철병원의 김로수, 화공부화학연구소의 리문수, 국가석탄부콕스연구소의 손봉근, 중국정법대학출판사의 지원순, 북경대학 물리학부의 김동한, 북경기계수출입공사의 김봉호, 전국농업전람관의 지량겸, 중국과학원 공간물리연구소의 주지현 등이 있다. 또한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부의 김숙자, 중국금룡송향집단회사의 장승욱,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의 박룡을, 국가야금부 철강연구원의 지용겸, 중국과학원 계산기연구소의 김지온, 국가야금부 유색금속연구원의 강이룡 등 1955년 졸업생들이 있다. 1956년 졸업생들로는 중국림업과학연구원의 김은수, 중국과학원 흑색야금연구소의 최안라,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의 김영숙, 중국해양지질연구원의 박하권, 북경사범대학 력사학부의 김상춘, 중국인민대학 수학학부의 박순옥, 해군공정설계연구국의 천을석 등 유명한 학우들이 있다. 중앙교육과학연구소의 최상록, 북경외국문도서출한사의 리영숙, 북경제트차공사의 백준환, 북경무선전공장의 허재현, 중국통용기계공정회사의 박종수 등 1957년 졸업생들이 있다. 1958년 졸업생들로는 중앙민족대학의 엄성흠, 국가림업국의 김정도, 중앙인민방송의 리복송, 북경화북광학의기공장의 리구봉, 기계공업부의 김세진, 중국선박공업총공사의 김형만, 항천공업총공사의 김수복 등이 있다. 북경아동병원의 최채선, 북경유리2공장의 리향란, 북경전선공장의 김창학,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의 주재만(후에 연변대학으로 전근), 지질광산부 지질연구소의 방청송 등 1959년 졸업생들이 있다. 1960년 졸업생들로는 중앙재정금융대학의 리권실, 중앙민족대학의 김미자, 북경공전연구소의 김경환, 중화전국총공소합작사의 리원후, 8.1영화촬영소의 현훈, 북경시전신국의 김진숙, 중국의학과학연구원의 강진철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1951년부터 1960년까지의 1기부터 10기 졸업생들만 보더라도 자랑스러운 룡정고중의 교육 업적과 모교가 배출해낸 우수한 학우들의 활약상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다만 이러한 휘황찬 성과와 그들의 사적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아 후배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2005년 6월 1일, 룡정고중동문회 북경분회가 설립되였다. 명예회장으로는 당시 중앙교육과학연구소의 최상록선생(7기 졸업생), 명예부회장으로는 중국정법대학의 최병석선생(1기 졸업생), 북경아동병원의 최채선선생(9기 졸업생), 회장으로는 중앙재정금융대학의 리권실(10기 졸업생)선생이 맡았다. 후에 제2대 회장 황영(1986년 졸업생)선생을 거쳐 현재로는 제3대 회장으로는 리성일(1990년 졸업생)이 맡고 있다.  현재 북경분회는 동문회 친목을 위한 신년회, 신입 대학생들을 위한 진로경험 교류회 등 다양한 활동을 개최하고 있다. 이외에 골프회(회장: 한화, 1989년 졸업생), 축구팀(회장: 장서호, 1991년 졸업생) 모임이 있으며, 상해 등 지역의 분회와도 친목, 교류활동을 활발히 벌리고 있다. 이제 돌아오는 70주년 기념 행사를 계기로 수도 북경에 있는 룡정고중 졸업생들을 소개하면서 금후에는 모교의 선생님들과 졸업생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록하는 력사적인 작업이 널리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인민넷 조문판 
119    가속발전시대 소외된 우리들의 삶(허명철) 댓글:  조회:2194  추천:0  2019-10-12
수년전 CCTV에서 ‘과학적 발전, 휘황한 성과’를 주제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인들의 물질생활수준의 향상을 보도하는 뉴스프로에서 기자들의 "당신은 행복하냐"하는 무작위 취재에 사람들의 해답은 각양각색이였다. 취재를 접수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과 물질생활수준의 차이로 행복에 대한 리해가 달리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행복은 개개인의 감수성과 직결되여있기에 행복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행복한 생활인가에 대해 공감을 이루기는 당연히 어렵겠지만 일상이 "매우 바쁘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늘날 디지털시대에 접어들면서 수자가 모든 것을 평가하는 중요한 자대로 될 때 감수성과 련관되는 행복한 삶이나 아름다운 생활이 무엇인가를 보편적인 기준으로 규명하기는 확실히 어려움이 있다고 보아진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아름다운 미래와 행복한 삶에 대하여 한번 쯤은 상상해보았을 것이고 이를 실현해보려는 욕망도 불태워본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고달프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개개인의 행복한 삶에 대한 설계 또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과 현실간의 괴리 때문일가?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사(Rosa)는 그 원인을 시간에 있다고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는 시간에 쫓겨 사는 경우가 많다. 자의든 타의든 고속으로 질주하는 ‘시대호’에 몸 싣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마저 없을 정도로 생활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여유로움이 없는 삶, 압축되고 있는 여가생활, 어찌 보면 이것이 현대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인 것 같다.  오늘날 사회가 가속도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일차적인 요인은 당연 과학기술의 진보라고 하겠다. 무한정으로 무절제적으로 창출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성과는 인류사회발전의 종착지가 어디인지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하며 삶의 륜리와 도덕의 예속을 벗어난 과학의 신화는 인류사회의 발전이 아닌 인류의 훼멸에 가까운 엄청난 위험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생활이 보다 윤택해졌고 모든 것이 편리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은 이미 목적 아닌 도구에 예속되여있으며 한시도 컴퓨터, 핸드폰 등과 떨어질 수 없을 정도이다. 출근길에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왔다면 행여나 중요한 전화나 메시지가 오지 않았을가 하는 걱정과 불안감에 쌓여있게 되며 정전 때문에 컴퓨터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하루 일과를 방치하기도 일쑤이다. 그 만큼 우리의 삶 자체가 현대적인 도구에 예속되여있다는 것이다. 시간, 공간, 행동, 물질, 자아 등등이 점차 일탈되고 소외되는 것 이 자체가 오늘날 우리들의 행복추구에서의 하나의 걸림돌이 아닌가 싶다. 현재 우리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것 같지만 항상 내심 어디선가 밀려오는 불안감, 초조감 등을 떨쳐버릴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자원해서 하게 되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경쟁이 현대사회를 규명 짓는 핵심적 척도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경쟁력 향상 자체가 목적으로 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소외된 관계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삶은 행복할 수 없다고 보아진다.  요약해본다면 시대발전에 힘입어 생활절주가 빨라진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들의 여가생활이 압축되여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떠한 생활이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개개인의 감수성에 달렸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개개인의 삶 자체가 로빈손처럼 외딴 섬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만큼 특정된 사회를 배경으로, 자원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지원 속에서 개개인은 아름다운 삶을 설계하고 영위해가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은 사회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하며 사회와 타인과 지배관계, 예속관계가 아닌 공명관계를 이루면서 자기의 본분 대로 살아가는 것이 현시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가 아닌가 싶다. 인민넷 조문판
118    백세인생을 쾌적하게 만드는 생전(生前)정리---허연화 댓글:  조회:2028  추천:0  2019-09-17
생전(生前)정리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유품정리는 들어봤어도 생전정리라면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생전정리란 글 그대로 살아있을 때의 신변정리를 말한다. 이 말은 일본에서 온 말이다. 일본은 1970년에 이미 고령화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인구의 7%를 넘었을 때)에 들어섰고 2007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국민 인구의 21%를 넘어 세상 어디보다 앞서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반면 출생률은 저하하여 부모를 돌볼 수 있는 자식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게다가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도꾜나 오사까 등 도시에 이주하여 부모와 떨어져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일본은 장수의 나라이자 또한 독거로인의 대국이기도 하다. ‘독거로인’과 ‘독거사(独居死)’는 쭉 일본사회에서 주목해온 중요한 사회문제였다. 2009년 처음으로 ‘슈카쯔(終活)’에 관한 서적이 일본에서 출판되였다. ‘슈카쯔‘란 말 그대로 인생의 종말을 위한 활동의 략어이다. 2011년 ‘엔딩노트’라는 다큐영화가 일본에서 개봉되였다. 영화는 일만 하며 살아온 말기암의 아버지의 모습을 감독인 딸이 다큐로 남긴 것인데 제한된 여생을 자신답게 살기 위해, 또한 남겨질 가족이 어렵지 않도록 엔딩노트를 작성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였다. 이 엔딩노트는 자신의 인생의 되새김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2012년에는 ‘슈카쯔’와 ‘엔딩노트’라는 단어가 일본 류행어대상에 오르고 현재는 일본의 여러 매체에서 ‘슈카쯔페아’, ‘생전정리로 모두 행복’, ‘장례사전상담’ 등 기사를 자주 볼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슈카쯔’와 ‘엔딩노트’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행위를 카리킨다. 이것은 죽음이 가까운 고령로인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자식교육이 끝나고 정년퇴직한 사람, 정년퇴직할 년령은 아니지만 로후를 준비해두고 싶은 사람이 미리 죽음과 마주하고 마지막까지 자신다운 삶을 살기 위한 준비이다. 이제 생전정리는 그냥 죽기 직전의 준비가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정이고 능동적인 생활태도이다. 하지만 일본사회에서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생전준비를 해두는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였다.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건 일본사회에서도 껄끄러운 일이였기에 장례에 대한 의논은 거의 림종이나 사후에 하군 하였다. 유교사상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우리 조선족사회는 일본보다 더 죽음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금기로 생각하고 있기에 건강한 부모님 앞에서 장례 등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사회가족분위기가 아직 형성되여있지 않다. 경할 경우 부모님이 섭섭해하거나 중할 경우 불효자식이라고 노여워하실 수도 있다. “낡았다고 내가 쓰던 물건 버리려구 하는구나. 그럼 나도 버려라.“ 하고 감정적으로 나올 부모님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이면 고령화의 현실에 대한 도피일 뿐이며 특히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가족에는 번거로운 일들이 많아질 수 있다.  2010년 길림성인구보편조사의 통계에 의하면 길림성의 65세 이상 조선족인구는 12만명을 넘는데 이는 총 길림성 조선족인구의 12%를 초과하였다. 조선족인구가 집중해 거주하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품은 길림성의 이 데터는 조선족이 중국 국내의 어느 민족보다도 고령화정도가 높은 집단에 속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령화의 진행상황을 생각하면 9년이 지난 지금, 조선족의 65세 이상 인구는 고령사회에 가까울 정도로 증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조선족은 출생률이 낮고, 인구이동률이 높은 집단으로서 중국 국내에서 선두적으로 일본이 부딪친 독거로인, 독거사 문제가 사회의 중요과제로 다가올 것이다.  인생의 골인이 누구나 죽임이라 하면 이 골인을 불안과 공포로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죽음과 맞이하고 인생의 끝까지 자신의 삶을 될수록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여생을 더욱 효률적으로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 구체적으로 생전정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본의 ‘슈카쯔’, ‘엔딩노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자신답게 멋지게 마무리하기 위해 여생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리해놓는다.  1. 주민번호 등 본인의 기본정보를 정리해둔다. 여러가지 수속에 필요한 준비를 위해서이다.  2. 자신과 관계되는 인물과 련락처 등을 남겨둔다. 가족, 친척, 직장관계자, 은인, 법적관계의 상담자 등 다방면의 정보가 필요하다. 3. 저축통장, 카드, 인터넷결제, 주식, 부동산, 의료보험, 양로보험 등 재산에 관한 정보를 정리한다. 4. 치매 등 의사표달이 흐릿해질시 희망하는 치료방법과 케어시설, 연명조치 여부 등을 정해둔다. 5. 유언서에 대해 유산분할의 내용, 유언서의 유무, 상속리스트 및 보관장소 등을 기록해둔다. 6. 장례식장 예약, 장례규모와 관의 선택, 납골방법, 영정사진, 참가리스트 등을 정해둔다. 7. 못해봤거나 해보고 싶은 버킹리스트를 써놓는다. 이외에도 개인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일생에 대한 회고록을 정리해본다거나, 신세를 진 사람들한테 메시지를 남긴다든가 등등 여러가지 생전정리가 존재한다. 요즘 일본에서는 건강할 때 자신의 장례식예약을 하는 케이스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죽은 후 들어갈 관에 직접 들어가보는 체험이벤트도 있다. 우리한테는 렵기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조사에 의하면 일본로인 3명중 1명은 장례식 등 여러가지 죽음과 관련한 이벤트에 참가한 경험이 있거나 현재 미리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산업부문에서는 ‘엔딩산업’이 나날이 확대되고 번창하고 있다. 2015년부터 매해마다 엔딩산업전람회가 열리고 있으며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상품, 기술, 서비스 등을 출품하는 기업이 400개나 되며 3일간 2, 3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다. 또한 2013년부터 생전정리보급협회가 설립되고 이사짐센터 및 유품정리와 구별된 생전정리인정 지도원 및 자격을 가진 직원으로 구성된 전문성업체가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용은 트럭의 크기와 작업인수에 따라 변동이 있는데 대략 3만5천엔(인민페 약 2200원)부터 30만엔(인민페 약 2만원) 좌우 든다.  하지만 생전정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있는 일본과는 다른 사회에 사는 우리는 일본의 그것을 고대로 옮겨 쓸 수 없다. 우리는 생전정리의 선진국인 일본의 경험을 참고로 함과 동시에 우리의 상황에 맞게 생전정리를 도입하는 것이 좋다. 몇해전부터 필자는 고향에 돌아가면 친정부모님의 물건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고향에는 생전정리라는 말이 보급되여있지 않았기에 자칫 말을 꺼냈다가는 ‘죽음’과 유품정리로 오해하고 섭섭해하실가 봐 처음엔 생전정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집청소할겸 이미 집에 살고 있지 않는 나와 동생의 잡동서니들을 정리하겠다고 하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바깥세상에서 배운 새로운 지식이나 생각을 무작정 부모님한테 강요하지 말고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인내심 있게 한발한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정리를 하면서 깜짝 놀란 건 이미 중년인 필자와 동생의 소학교졸업장부터 탄원증, 각종 상장, 대학입학통지서 등등 다 고이 보관해두시고 있었다. 이젠 자기 둥지를 틀고 나와 사는 몸이지만 다시 한번 부모님 슬하에서 근심걱정없이 살아왔던 그 시절이 생각나며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감돌았었다. 짐정리하면서 부모님들과 이래저래 옛얘기도 나누고 추억이 될 만한 상장이나 졸업장, 대학입학통지서 같은건 사진찍어 데터로만 남긴 후 가위로 파쇠해버렸다. 정리정돈이 되니 집이 깨끗해지고 추억을 되새기는 좋은 자리도 되여서 부모님들도 기분좋은듯 보였다. 분위기가 좋아진 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이 참에 집에 있는 옛날 물건들 다 정리하자”고 말을 꺼냈다. 처음엔 좀 거부하시는 태도였다. “아직 움직일 수 없는 상황으로 늙은 것도 아니니, 알아서 한다며, 어쩌다 집에 온 너를 힘들게 하고프지 않다”고 하셨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많지만 어딘가는 살짝 섭섭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셨다. 그래도 밀고 나가는 정신으로 “딸이 왔을 때 하자구, 딸이니까 부끄럽거나 어색할 거 없다고, 깨끗해지면 마음도 가벼워질거라”고 밀어부쳤다. 또한 이 때 처음으로 ‘생전정리’라는 단어의 존재를 알리고 “일본에선 짐정리를 죽기 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제2의 가볍고 쾌적한 인생을 위해서 한다”는 얘기를 꺼내며 열심히 설득하였더니 흔쾌히는 아니지만 허락해주셨다.  부모님의 건강을 고려하여 여러날을 나눠서 옷, 이불, 그릇, 신 등 종류별로, ‘계속 사용할 것’, ‘버릴 것’, ‘고민, 보류중’ 등 3가지로 나눠서 정리했다. 지금도 제일 처음 물건을 정리했을 때의 일을 잊지 못하겠다. 무슨 물건이 구석구석 그리 많이도 나오는지. 둘만 사는 집에 이불요는 왜 그리도 많은지. 아마 20명은 넉넉히 잘 수 있을 수량이였다. 옷장에는 부모님 옷외에 이미 독립한지도 오래된 나와 동생의 옷들, 그리고 주인 모를 친척들의 옷들. 화장실 안에는 새 치솔과 낡은 주인 모를 10여개의 치솔들. 주방에는 손님치기를 얼마나 많이 해왔나 할 정도로 셀 수 없는 그릇들. 맏이로서 살아온 부모의 삶을 고대로 보여주는 그 물건들을 보면서 왠지 존경스러움과 찡해남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약서랍을 여니 중국약은 물론 일본에서 필자가 보낸 일본약, 한국에서 이모가 보낸 한국약, 친척이 보낸 미국약,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독일약 등으로 꽉 차있었다. 요몇해 어머니가 몸이 좀 아프셨을 때 각 지역에 흩어져 사는 친척지인들로부터 건강보조약품을 부쳐보내셨다 하더니 약서랍이 완전 글로벌화되여있었던 것이다. 약을 보낸 친척들의 얘기도 나누며 이미 복용기한이 한창 지난 약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중국의 정체모를 모임에서 샀다는 의료기계도 같이 체험하면서 내가 옆에 없는 부모의 삶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다.  부모의 물건을 정리하는 건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옛날을 되새기고 현재를 알아가고 미래를 같이 고민하는 너무도 소중한 부모님과의 시간임에 고마웠다. 생전정리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겠나 싶었다.  백세시대라 불리우는 요즘 세월, 그 어느 때보다 더 길어진 인생의 황혼시기, 죽음을 두려워하고 인생을 허무해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남아있지 않는가? 자신의 쾌적한 남은 삶을 위해서 생전정리라는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였으면 한다. 인민넷 조문판 
117    백세시대, 우리네 부모님들이 있을 자리는 어디(리화) 댓글:  조회:2093  추천:1  2019-08-30
연변대학 사회학과 리화 "자식이 있는데 왜 같이 안 살아요?" 하는 질문이 사뭇 생소하게 느껴지는 요즘 세상. 이제 우리에게 조손3대가 한 지붕아래 오순도순 살아가던 '가족신화'는 지나간 옛말이 된듯. 생활습관이 달라서, 따로 사는 게 편해서, 자식에게 페를 끼치기 싫어서… 리유도 가지가지, 표현방식 또한 각양각색이다. "니들도 바쁜데 짐이 되지 말아야지" 약간은 기대하면서도 자식의 처지를 따뜻이 헤아려주는 신중한 부모가 있는가 하면 "니들 신세는 절대 안 진다" 제법 호기로운 '독립선언'을 발 빠르게 해버리는 성급한 부모도 있다. 뭔가 부모님들 쪽에서 더 눈치를 보이거나 질색팔색하는 기혼자녀와의 세대동거다. "륙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세에… 팔십세에… 구십세에… 못 간다고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노래 가사처럼 세상은 바야흐로 '백세시대'의 문이 열리고 글로벌 고령화의 큰 흐름은 한층 거세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생 륙십을 넘기면 충분히 장수했다 하여 동네방네 떠들썩 축하했었던 우리네 환갑례 역시 칠순, 팔순, 구순, 백수잔치로 미뤄지고 주위에는 장수로인들로 차고 넘친다.  문제는 이러한 평균수명의 연장이 꼭 행복하고 여유로운 로년의 삶과 정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인간의 신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서히 각종 기능의 저하와 면역력의 감소를 동반하기 마련이며 여러가지 질병과 사고의 위험이 증가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로화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쇠약으로 인해 별것 아닌 일에도 쉬이 서운해하고 보기 싫은 '꼴'들도, 하고 싶은 말들도 점점 많아지며 세대 간의 갈등 또한 깊어지기 일쑤다. 거기다 효자효녀들만 살고 있는 동화 속의 세상도 아니요, 어느 자식이나 모두 년로한 로부모를 케어할 수 있는 능력과 형편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랭정한 현실. 그래서 로후난민이나 고독사와 같은 불편한 사회적 이슈들이 산생하기도 한다. 백세시대, 정작 길어진 로년의 삶으로 인해 죽음으로 향하는 려정이 퍽이나 멀어진 우리네 부모님들. '로년이 즐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로년이 지겹기만 한'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육체와 정신이 쇠락해가면서 더 이상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네 부모님들이 있을 자리는 어디며 어디여야 편할 수 있을가.  우리 사회 로부모부양의 여러 양상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가족이란, 부모자식관계란 과연 어떤 것인지 새삼스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모와 자식 사이는 평생을 걸쳐 지속되는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이며 그 안에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교환성 원칙이 내포되여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주고 키워줄 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건강하고 기력이 있을 때까지 그 자식이 낳은 손주들을 돌봐주고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든든한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부모가 로쇠해지고 자식에게 의존적이게 됐을 때 자식은 부모로부터 받은 도구적•경제적•정서적 자원을 다시 돌려드리는 호혜의 원칙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배은망덕', '불효막심'의 큰 죄를 짓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의 손길이 필요한 부모를 직접 돌보지 못할 때 그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며 "내 사정이 변변치 못해서", "일이 너무 바빠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끝없는 변명과 구실들을 찾아가며 애써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하지만 부모와의 동거를 통한 로후보살핌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장기적인 로환과 의존상태의 일상화는 그러한 로부모를 돌보는 자식에게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감을 가져다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 그리고 형제자매 사이에 불화와 갈등을 초래함으로써 가뜩이나 버거운 로년의 삶을 더 숨 막히게 만들기도 한다. 요즘은 사람들의 관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서, 또 자식세대의 초국가•초지역적 이동으로 인해 따로 살면서 보모를 고용하여 부모님의 돌보게 하거나 양로원 같은 시설에 로부모를 맡기는 가족들을 심심찮게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믿음직한 보모를 찾기 어렵다든지 치매나 성격 등 로부모 쪽 원인으로 보모가 견디지 못해 일을 그만둔다든지 변수가 너무 많아 큰일이다. 보모를 금방 부모님 댁에 데려다주고 출근했는데 직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두겠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얘기며, 한달 사이에 보모를 다섯명 바꿨다는 얘기… 웃기고 슬픈 얘기 투성이다.  그런가 하면 양로시설에 들어갔을 경우에도 마냥 그리운 것이 가족이고 집이다. 보태여 그 곳 역시 타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작은 사회인지라 로인들 사이의 다툼과 갈등이 다반사이고 경영자와 직원들은 그런 문제가 로인들에 대한 신체적 보살핌보다 더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시설에 들여보냈다 해서 "만사태평, 근심걱정 끝!"이 아니다. 자식들이 찾아오기를 어린애마냥 손꼽아 기다리는, 그래서 자주 찾아드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정서적인 안정감과 행복감을 되찾는 부모님들.  우리네 부모님들이 삶을 마무리할 곳, 거기가 어디면 가장 적합한 것인지, 어떻게 해드리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고령화와 저출산, 핵가족화와 인구이동 등 시대적 격변 앞에서 우리 사회도, 개개의 가족도 아직은 모두가 많이 방황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시행착오적 단계에 머물러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이 어디가 됐든 삶의 끝자락에 선 부모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가족의 따뜻함이며 자식은 영원히 부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천륜의 도리이다. "따로 살다가 움직이지 못할 때는 양로원에 가지뭐"를 입버릇처럼 외우는 요즘 부모님들.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죽을 때는 니들이 책임져라", "너네 집으로 가겠다"를 선뜻 먼저 꺼내는 부모는 거의 없다. "내리사랑"이라고 자식에게 부담을 주는 게 마냥 미안하고 어색하기만 한 우리네 부모님들이기에 부모자식관계는 사실상 비균형적 호혜관계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력을 갖추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둔다 하더라도 정작 늙음과 질병이란 사람을 한없이 무기력해지게 만드는 그런 무서운 존재. 그러니 절대 자식신세를 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그 앞에서는 한낱 부질없고 민망한 오기에 블과할 뿐. 여차할 때에는 자식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자식에게 베푸는 마지막 보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보낸 뒤에야 몰려올 못해드렸던 것에 대한 후회와 통탄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 골목길 언덕에서 해볕쪼임을 하는 여나문명의 동네 어르신들을 뵌 적이 있다. 일순 웬지 모를 애잔함과 처연함이 확 안겨왔다. 오가는 대화도 거의 없이 그냥 쪼로로 모여앉아있을 뿐인데 고독과 외로움들이 물씬 풍겨오던 그 풍경이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다.  유엔의 전망에 따르면 2030년 65세 이상 인구가 10억 명에 이르게 될 것이라 한다. 급속한 고령화에 대비해 국가와 지역사회는 양로정책과 보건체계의 확립에 바삐 움직인다. 가족안의 사회. 사회안의 가족이란 말이 있듯이 서로가 분리된 철저한 사회부양도 완전한 가족부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네 부모님들 그리고 언젠가는 로년의 삶을 맞이하게 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개개의 가족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백세시대, 로부모의 마지막을 돌본다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민네 조문판
116    녀성 지식의 소통, 새로운 젠더 질서를 향하여(김화선) 댓글:  조회:2040  추천:0  2019-08-08
필자는 얼마 전에 《연변녀성》잡지에서 라는 문장을 보았다. 문장의 저자는 연변에서 갓 교원사업을 시작한 20대 후반의 녀성이였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류학을 다녀오기까지 9년 동안 연변을 떠나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대학교에서 8명의 학우들과 한 기숙사에서 동거동락하면서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은 대부분 집에서 아버지가 밥을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였다. 연변 조선족가정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머니가 일터에서 총책임자로 계셨고 월급도 아버지보다 높았지만 집 공간에서 어머니가 가사로동을 맡아서 해온 것을 보아왔고 또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교 생활, 류학생활을 통해 많은 녀자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녀가 받은 또 다른 문화적 충격은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외사촌남동생이 가문에서 장남이자 장손이고 가정도 부유해서 어려서부터 ‘왕자님’으로 떠받들려 자랐지만 결혼후에는 주방에 들어가 밥도 하고 걸레질도 한다는 사실이였다. 저자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량반은 한물 갔고 왕자는 죽었다”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렇듯 조선족녀성들이 학업이나 취업을 위해 연변을 벗어나 지구/지역간 이동을 경험하면서 녀성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연변녀성》잡지에서도 잘 보여지고 있다. 첫째, 녀성이 글쓰기의 주체가 되여있고 글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강화하면서 가부장적 질서의 변화, 그중에서도 녀성들이 느끼는 가족과 성역할의 변화에 대하여 많이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조선족녀성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녀성들이 자신의 로동생활과 경제생활을 어떻게 재조직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셋째, 고령화시대에 조선족 로인녀성들의 돌봄자원이 어떠한지, 복지는 어떤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선족녀성들은 지구/지역화 시대에 류학이나 취업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새롭게 구성해 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나는 가치가 있고 존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라는 바탕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 이미 조선족녀성들의 생활방식을 재구성하고 있으며 주체성의 구성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조선족녀성들은 가족 외에 일반적으로 동창생 커뮤니티를 활용하고 있으며, 작은 범위의 독서회나 심지어 정규적인 녀성단체에도 참가하여 사회적 인맥을 쌓아가면서 보다 나은 나(주체)를 만들어가는 일에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연변녀성》잡지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다양한 녀성 주체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연변녀성》잡지사와 ‘전국애심녀성포럼’문교위원회에서 5회째 합작한 “애심녀성컵”생활수기응모을 통해 우수한 녀성작품이 게재되고 있다. 또한 BEIK스튜디오와 협력하여 제1회 《연변녀성》컵 핫맘&베이비모델쇼를 통해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사회단체인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연변지체장애인협회, 연변과학기술대학AMP총동문회애심협회, 연길경영인함께독서회 등등의 채색활동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면 되다’를 실천하는 조직, ‘전승, 융합, 개척, 기여’, ‘서로의 배려, 단합과 번영’이라는 주제, ‘나눔을 꾸준이 이어가는 조직’. ‘나눔과 배움을 실천하는’ 독서회 등의 현대적인 사회단체들의 활동 주제들을 전달하고 있다.  “남성은 사회를 중심으로 하고 녀성은 가정을 중심으로” 한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관념이 존재하고 있고, 녀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가고 있으나 녀성의 취업상의 취약성으로 인해 녀성과 남성의 소득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 그리고 시장화시대의 교육정책하에서 개인 가정의 전략이 엄마들의 역할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조선족 녀성들은 자신이 처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을 알아가고 있고 새로운 젠더 평등 사회구조에 대한 상상을 하고 있으며 녀성에 대한 사회적 지지 네트워크와 제도적 기회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보다 평등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녀성들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여 제도화하려면 녀성 개인과 단체의 연대가 수요된다. 《연변녀성》잡지는 조선족 녀성 개인과 단체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교류할 수 있는 통로로서 역할을 해왔다. 연변 지역 사회의 새로운 젠더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해 앞으로 정부, 대학, 사회단체, 개인 등 다양한 입장을 가진 주체들이 련대하여 성평등의 한결 같은 목소리를 내는 데 주력할 필요가 제기된다. 인민넷 조문판 
115    지역화에 대한 재고(再考)-예동근 댓글:  조회:1890  추천:0  2019-07-23
운남성 려강에 가면 세계적인 음악명인 선과(宣科)란 분이 있다. 이 분은 그 자신이 문화유산이고, 문화유산을 만드는 활화석이다. 27살에 감옥 가서 2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48세에 석방되였지만, 세계를 놀라게 하는 ‘나시고악(那西古樂)’을 재창조하였다, 그리고 이 ‘나시고악’은 중국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3년전에 86세의 고령이지만 여전히 건재하였고 영어, 중국어, 나시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국제음악인이다. 그는 유명한 학자로서“음악은 공포에서 산생되였다"는 독특한 가설을 세워 음악의 기원설을 한층 보완하였다. 이로 그는 세계적인 음악정상에 올라서게 되였으며, ‘나시고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전파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나시족의 음악인 ‘워러러(窝热热)’가 생각났다고 한다. 석방된 후 반백의 나이로 수년 동안 나시족의 전통상례에 참석하여 동네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고, 음악의 악보와 춤을 훌륭한 그림솜씨로 멋지게 기록하였다. 수년 동안 연구하여 1986년 《천진음악학원학보》의 제4기에 중국어로 3만 7천자의 긴 론문 (音乐起源于恐惧)를 발표하였다. 그후 이 글은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였다.  금년에 다시 곤명, 려강 지역을 돌면서 려강의 유명한 화가 화품정(和品正) 선생님의 댁을 방문하게 되였다. 화품정 선생님은 동파그림에서 굴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국화가 주림(周霖) 선생님의 외손자이다. 화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국화를 배웠지만, 차후 탄탄한 국화의 기법을 기반으로 동파문자의 서법과 그림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 그의 동파작품은 영국, 일본, 한국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였다, 지금은 동파서화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화계의 큰 어른으로서 나시족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나시음악의 큰 기둥인 화문광(和文光) 선생님을 려강에서 다시 만나게 되였고, 가깝게 하루동안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금년 7월에 우연히 화선생님, 그리고 심천에서 찾아온 제자 익단단(易丹丹) 가수와 함께 점심식사도 하게 되였다. 2000년 초반에 화선생님은 생면부지의 호남성의 한족가수 익선생님의 부탁으로 혼쾌히 을 작사, 작곡하여주었다. 우리는 대연고성의 중턱에 있는 화선생님의 전시실을 방문하고 내려오면서 즐겁게 두 음악인의 흥얼흥얼한 노래를 려강고성의 맑고 활기찬 시내물의 연주 속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흥이 올라오자 편하게 노래 두곡을 올린 화선생님의 제자, 그리고 노래에 푹 잠겨서 밥상에서 반주를 하는 화선생님을 보면서 오전의 얘기가 다시 떠올랐다. 화선생님은 4대가 음악인이다. 화선생님의 할머니부터, 어머니, 부인, 아들, 딸 모두 유명한 음악이다. 화선생님의 어머니는 86세의 고령인데 아직도 수십곡을 부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록황제 최건(조선족)과 화선생님의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찍은 여러장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최건은 자기 어머니의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였다. 화선생님은 매우 총명하고 멋진 분이였다. 그의 동파서예는 2008년 올림픽의 대표작으로 선정되였고, 2000년 초반의 만리장성 서예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서예로 인정받았다. 화선생님은 자신의 글씨는 보통수준이지만, 모두 아이디어가 좋아서 전국, 나아가서 전세계의 인정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는 국가1급작곡가로서 이미 음악작사 방면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서예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다른 서예가들과 달리 과감하게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많은 나시족들의 서예가들은 지역에 집착하고 있지만 그는 민족, 인종, 국가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것을 나시족의 작품으로 재현하는 것이 세계화의 길이라고 하였다. 화문광선생님은 나시족은 몇세대가 대를 이어서 서예, 음악, 종교 등을 전승한 집안들이 많다고 하였다. 수직적인 전승은 잘되였지만, 수평적인 확장이 부족한데, 자신은 나시족의 문화가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회학에서 지역화(localization), 글로벌화(globalization) 두개의 매우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최근에 지역화와 세계화(글로벌화)를 함께 사용하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란 개념이 있다고 설명하여드렸다. 문화방면에서도 글로컬화는 매우 중요한데 나시족에게서 가장 잘 재현된 것 같다고 하였다. 특히 나시족이 집중하여 사는 려강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세곳이 집중되였는데 이 자체가 글로컬화의 대표적 자연/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화선생님은 나의 얘기를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나무가 우선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하는데 이것이 지역화이다. 뿌리를 깊게 땅속으로 묻어야 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로 높게 넓게 뻗어나가는 것이다. 하나의 가지는 한국으로, 하나는 일본으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세계화가 아닌가?” 이번에 이 세분 뿐만 아니라 운남성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양복천 선생님, 차마고도연구원 부파 원장님, 나시족의 민족화가 란벽영 선생님 등 70명 정도의 나시족엘리트들과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교류를 하였다. 일언이페지하면(一言以蔽之), 그들은 나시족의 문화를 너무 사랑하고, 말마다 우리 나시족은, 이 음식은, 이 차는, 이 떡은, 하나하나 나시족의 종교, 일상생활, 문화, 전통과 련결시켜 이야기하여주었다. 그것을 즐겁게 그림으로, 음악으로, 학문으로 승화시키는가 하면, 려강의 따뜻한 해빛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그 노래, 그 그림은 빠르게 감동과 행복, 미소를 전 중국,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려강으로 오게 하는 이것이 그들의 지역화이고 세계화이다. 나시의 왕(土司)이 거주하는 목부(木府)로 가는 대문에 ‘천우류방(天雨流芳)’이란 글이 있는데 이는 나시족언어의 발음을 한자로 표시한 것이다. 나시말로 “책을 읽으러 가세요”라는 뜻이다. 화선생님은 나시족은 독서를 좋아하는 민족이여서 교육수준도 중국의 조선족 다음으로 높다고 하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조선족문화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인민넷 조문판
114    지역사회 관광산업 발전에 대한 소고(안성호) 댓글:  조회:1797  추천:1  2019-07-09
근년래에 전국적인 관광붐이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의 관광산업들은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특히 고속철도의 개통은 각 지역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켜 하루생활권을 형성하였으며 단거리려행을 포함한 관광객들의 이동을 추진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우, 장백산 관광코스와 민속문화축제, 관광축제 등 민속문화특색 관광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2017년 연변주를 찾은 국내외 관광객은 2139.6만명에 달하였으며 관광업 총수입은 401.9억원에 달하였다. 2018년 국경절 기간에만 247.93만명의 관광객을 접대하였으며 관광업 수입이19.29억원에 달하였다. 2019년 단오절 기간에는 69.77만명의 관관객들이 연변을 방문하였고 관광수입은 7.97억원에 달한다. 관광객, 관광업 수입이 해마다 15% 이상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내고 있다.    각지에서 년휴 기간에 맞추어 지방특색이 짙은 관광축제들을 지속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민속문화체험, 마을체험, 전통탐방, 노래무대 등 다양한 행사들을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조선족 전통 집거지 관광산업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일으키고 있으며 지역관광산업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동북 조선족집거지역 민족특색 관광산업의 발전은 도시 산재지역 조선족어린이들이 민족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보귀한 장이 되고 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북경, 상해 등 지역 주말학교 조선족어린이들이 고향탐방으로 연변 등 조선족집거지역을 다녀가면서 피부로 민족문화를 느끼고 있다.   관광산업 발전은 이미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발전, 도시화시대 민족문화의 전승과 발전 등 여러 분야에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는 관광산업에 대하여 문외한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선족집거지역 관광산업이 더욱더 발전하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동안 느껴던 일부 내용들을 지적하여보려 한다.   몇년전에 필자는 여름방학에 애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간 적이 있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에서 생활체험도 하고 민족문화도 체험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떠나기 전에는 애들과 함께 물고기도 잡고 물도랑에서 물장난도 치고 하면서 즐겁게 지낼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었다. 하지만 정작 마을에 가보니 마을을 잘 건설되여있어 흥이 났지만 애들에게 인기가 있을 내용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뒤강은 모래를 파게 되면서부터 들어갈 수 없는 위험한 강이 되였고 논물 도랑들에도 농토기본건설 차원에서 세멘트로 제방을 쌓아서 물고기잡이나 물놀이할 상황이 아니였다. 마을에는 농가들이 잘 정비되였고 음식점도 섰지만 애들에게 인기가 될 내용들은 없었다. 그렇다고 린근에 애들이 좋아할 만한 테마파크가 있는 것도 아니였다. 결국 애들은 집에서 매일 애니매션을 보다가 돌아오게 되였다. 항주로 돌아오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빠, 엄마는 참 불쌍하다고 하였다. 아무런 놀이터도 없고 놀 장소도 없는데서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묻는 것이였다. 고향으로 떠나오기 전은 호언장담이 현실 앞에서 완전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동북 각지에 다니다보니 단오, 국경절 등 관광성수기에 진행되는 관광축제들을 한번도 참가하여본 적이 없다. 하여 늘 일상적인 모습들을 보게 된다. 관광축제가 결여되여있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조선족집거지역 관광산업들은 특히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놀거리가 결여되여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길 시내를 산책하거나 지방마을에 가면 주택, 전시관, 민족특색음식 등은 풍부하게 준비되여있지만 한바퀴 돌고 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 가무, 노래의 고향인 연변에서 손님을 모시고 특색 있는 공연을 보려고 하여도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관관객들이 재미 있어 하루라도 더 묵고 다시 오고 싶게 이끄는 일상적인 행사들이 필요하다.    필자가 있는 항주는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관광도시로서 서호, 경항대운하, 량저(良渚)등 유네스코 유산을 비롯한 수많은 경관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항주가 관광객들을 끌 수 있는 것은 꼭 이러한 훌륭한 자연경관 뿐만은 아닌 것 같다. 항주 주변 마을들에 가면 음식가게에서 록차만 주문하면 하루종일 앉아서 트럼프나 마작을 치면서 휴식할 수 있어 주말마다 휴가를 보내러 나온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등산코스, 산책코스 등 별로 돈을 들이지 않고 예약하지 않아도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시설들이 잘 정비되여있어 손쉽게 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일단 지어지면 인력이나 유지 비용이 별로 들지 않으나 인기가 있어 사람들이 잘 찾아오고 있다. 비록 이러한 코스들은 무료이나 손님들이 오게 되면 주차비, 식비, 심지어 주숙 등 소비들이 뒤따르게 되여 짭짤한 수입을 얻을 수 있다.    관광정보도 잘 정비되여있어 여러 앱들을 리용하면 하루관광코스, 이틀관광코스, 호텔예약, 공연입장료구입 등을 매우 순리롭게 진행할 수 있고 교통안내까지도 가능하다. 관광체험담도 풍부하여 처음 오는 관광객들도 쉽게 다녀오고 체험할 수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놀거리, 볼거리 또한 풍성하다. 테마파크, 쇼 등이 년중무휴로 운영되고 있어 놀고 싶거나 보고 싶으면 아무때나 리용이 가능하다. 특히 송성그룹은 테마파크, 호텔, 무대쇼 등 다양한 시설들로 관관객들을 끌고 있다. 세계 삼대 쇼의 하나인 은 “나에게 한시간을 주면 당신에게 천년을 돌려주리라”라는 슬로건으로 화려한 무대로 남송시기를 재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낮에는 관광지답사, 저녁에는 송성공연이라는 형식으로 주로 저녁에 공연이 진행되였지만 이제는 인기가 많아 하루종일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금년 관광성수기에는 송성에서만 하루에 두 극장에서17차례의 공연을 번갈아 진행하였다. 관광객을 겨냥하여 인위적으로 제작된 쇼이지만 화려한 무대설계과 공연에 힘입어 항주로부터 전국 각지에 35개 극장, 7만5천좌석, 년간1만5천여차례 공연과 5천여만 관객을 보유하는 문화집단으로 발전하였으며 2018년 영업수입이 32억1천만원을 초과하였고 리윤은 15억4천만원에 달한다. 이러한 시설들은 관광객들에게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름방학 등 기간에는 본지방 시민들을 상대로 반값 할인 등 행사들을 진행함으로 하여 시민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높다.    관광명소인 항주와 동북지역 관광산업은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변지역의 경우, 장백산 관광자원과 연변지역 민족민속자원의 우세를 잘 발휘한다면 관광산업을 보다 활성화할 수 있을지 않을가 생각한다. 기존의 관광축제 등을 리용한 관광성수기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개인관광객들을 흡인할 수 있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하고 풍성한 볼거리, 놀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여야 한다.    일단 여러 지방 관광 담당 행정부서들에서 본 지역의 상세한 관광안내를 현지 인기 있는 여러 휴대폰앱들에 제공하여 충분히 홍보할 필요가 있다. 국내 관광 선진지역들의 홍보현황, 한국의 관광진흥단체들의 사이트 관광안내 등을 참고하여 보다 알기 쉽고 찾기 쉽도록 하는 데 주력을 하여야 한다. 관광개발에 있어서 스토리성을 중시하여 단순한 경관지 참관이 아닌 관광객들이 감수할 수 있는 문화적 내포들을 보다 중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또한 바이두지도, 고덕지도 등과 제휴하여 개개인들이 편히 찾아갈 수 있도록 대중교통을 포함한 여러 가지 교통안내정보들을 제공하여야 한다. 휴대폰 하나로 모든 일들을 해결하는 요즘 시대이지만 정작 여러 민속촌을 포함한 관광지를 찾아가려면 교통정보가 전무하여 여러 곳으로 알아봐야 하는 상황들이 비일비재이다. 자가용으로 오지 않은 이상 몇십킬로메터 거리를 무작정 택시로 이동하려는 개인관광객들은 적으리라 생각한다.    지역특색을 충분히 발굴하고 지역 현실에 알맞는 다양한 행사들을 발굴하여야 한다. 금년 5월부터 연변가무단에서 진달래음악시즌 계렬공연을 금요일 저녁마다 연다고 들었다. 이 정례공연을 계기로 연변의 훌륭한 가무가 더욱 발전되고 관광산업 발전에도 일조할 것을 기원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주요 상대로 하고 본 지방에서만 감수할 수 있는 볼거리 놀거리들을 보다 많이 개발하고 다양한 계층의 수요들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취미성, 다양성을 보다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 관광객 증가추세에 맞추어 테마파크 등 투자 유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민족집거지역 관광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의 생태자원의 최대 활용이라고 본다. ‘청산록수가 금산은산’이라고 조선족집거지역 마을들은 대다수가 생태환경이 잘 유지되여있다. 거창한 유람구 건설에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기보다 현존의 환경을 잘 유지하고 주변 시민들이 다망한 도시생활에서 탈출하여 한가한 주말을 지낼 수 있도록 필요한 시설들을 준비하는 것부터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바베큐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힘들면 자고 갈 수 있도록 필요한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 자연히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마을마다 남아있는 분들이 많지 않은 상황하에서 될수록 관광객들이 셀프로 직접 하게끔 최소한 필요한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수익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필자가 여러 마을들을 다니다보면 늘 빛갈 있는 음식들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분들께 송구스럽게도 가장 선호하는 음식은 밭에서 금방 따온 오이 등 신선한 야채들이였다. 유기농야채 제공, 친환경생태체험 등을 중심으로 마을 특색, 지역특색을 살리는 바람직한 방향인 것 같다.   관광문외한이 과연 이러한 글을 적어도 괜찮을지 몇번이고 주저하였다. 아마 현장에 있는 분들 립장에서 보면 당연한 사안일지도 모르고 관광산업 발전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필자가 개인관광객의 시각에서 일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두서없이 적어보았으며 고향마을을 포함한 조선족집거지역 관관산업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민넷 조문판
113    조선족식 공동체: 넘치는 ‘정’과 빈약한 ‘신뢰’(박광성) 댓글:  조회:1973  추천:1  2019-06-25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러 민족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봐도 ‘정’ 하면 역시 우리 민족이 최고인 것 같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만나기만 하면 풍성한 식사 대접은 물론, 그리고는 서로 돈을 내겠다고 밀치락 뒤치락 하는 모습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싸우는 것 같다. 술 한잔에 쉽게 ‘형님, 동생’하면서 친해지고 골병이 들게 대접하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려 하지 않는다. 그 옛날 시골마을에서도 생활은 곤궁해도 ‘정’만은 찰찰 넘쳤다. 이웃사이에는 음식 그릇이 늘 오갔고,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달려가서 제집 일처럼 도와 나섰다. 명절이나 계절에 따라 놀이문화가 발달했으며, 궁핍한 생활이지만 나누면서 즐겼다. 그러한 습관들이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남아있어 도시에 살면서도 민족내의 공동체들이 쉽게 재건된다. 그런데 아이로니한 것이 이렇게 ‘정’이 찰찰 넘쳐나는 조선족사회이지만 절강의 온주인들이나 광동의 조주인들처럼 힘을 합쳐서 큰 사업을 벌렸다거나 큰 돈을 벌엇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반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조선족들이 단결심이 없다거나 힘을 합치지 못한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를 늘 듣게 된다. 그렇다면 왜 ‘정’이 찰찰 넘치는 조선족사회에서 ‘힘’만은 합쳐지지 못할가? 그것은 바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집단내에 ‘신뢰’가 부족할가? 필자는 그 원인이 바로 ‘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떤 사람은 ‘정’을 믿고 다른 사람의 돈을 ‘슬쩍’ 해버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정’ 때문에 돈을 꿔주고도 낯이 간지러워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친척, 친구, 지인 사이의 돈거래가 깨끗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돈을 꾸고 제대로 갚지 않는 사람의 심리적 근저에는 결국 꿔준 사람이 ‘정’ 때문에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꿔주고 달라 말 못하는 사람 역시 ‘정’에 얽매여 당당하게 갚으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렇다보니 친척, 친구, 지인 사이에 서로 돈거래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돈 말을 꺼내지 않는 사람이 신사로 통한다. 그러나 상업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기본관계는 교환이고 돈거래이다. 돈거래가 없다면 현대사회도 없다. 이는 농경사회의 일종의 생활문화가 현대사회로의 전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명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나 미국의 사회학자 파슨스는 일찍 정이나 감정 같은 정신적 요인들이 계약, 법과 같은 합리성으로 전환되여야 현대사회에 순조롭게 들어설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허나 조선족사회의 현실을 볼 때, 대도시에 와서 생활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념적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지인들끼리 돈거래를 꺼리며, 돈거래를 하지 못하니 개인 손에 널려있는 소자본들이 모여서 사업을 할 수 있는 큰 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소비돈으로 전락되여버린다. 조선족의 큰 한계인 셈이다. 따라서 인젠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 ‘정’보다 ‘신뢰’를 중시하는 풍조가 온 사회에 형성되여야 한다. 집단내에 ‘신뢰’문화가 형성되여야 ‘합작’이 일어나게 되며, ‘합작’이 이루어져야 경쟁력이 생긴다. 집단내에 협동심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이나, 중국에서 장사 잘하기로 소문난 온주인, 조주인 모두 집단내에 끈끈한 신뢰심이 형성되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뢰문화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우선 온 사회적으로 신용불량자를 걸러내야 한다. 사기를 치거나 신용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입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사회적으로 발 붙일 자리를 주지 말아야 한다. 이 방면에서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는 각종 단체들이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기 단체에 가입하는 사람들의 신용을 꼼꼼히 잘 확인하고 단체마다 신용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반면 신용을 잘 지키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적극 홍보되여야 하며, 그런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고 합작하여야 한다.  오늘날 경쟁은 점점 치렬해지고 생존환경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개인의 힘이 약소함이 어느 때보다 실감되는 시대로, 미래는 결국 합작을 잘하는 집단에 의하여 좌지우지될 것이다. 따라서 조선족공동체도 더이상 농경시대의 ‘정’문화에 발목이 잡혀있지 말고, 현대경제가 필요한 신뢰문화가 든든히 구축하여 큰 ‘플렛폼’도 만들고 큰 ‘배’도 띄워야 한다. 단순히 ‘정’에 목매는 ‘의리맨’보다 ‘합리성’과 ‘계약정신’으로 무장한 ‘슈퍼맨’들이 활보하는 조선족사회를 그려본다. 인민넷 조문판
112    동북경제의 장기적 과제(리천국) 댓글:  조회:1968  추천:0  2019-06-06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리천국   얼마전에 전국의 2019년 1분기의 GDP성장률에 관한 통계가 나왔다. 중국 내지의 2019년 1분기의 GDP총액은 21조 3433원에 달했고 성장률은 6.4%를 기록하였다. 이 성장률은 작년 4분기에 비하면 동일한 수자이지만 작년 1분기에 비하면 0.4%가 감소한 수자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여전히 하행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로 볼 때, 광동성의 GDP는 2조 3886억원으로 경제규모면에서 여전히 전국에서 1위의 자리를 지켰고 강소성과 절강성이 2, 3위를 차지하였다. 경제성장속도면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성은 운남성, 귀주성과 강서성이다. 이 세 성은 모두 성장률이 8% 이상에 달하였는데 특히 운남성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9.7%에 달한다.   안타까운 현실은 상기의 지역에 비하여 동북3성의 경제성장률이 여전히 리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2.4%와 5.3%로 전국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료녕성은 그나마 6.1%의 성장률을 달성하였지만 여전히 전국에서 20위를 차지한다.   물론 지난 몇년전과 비교하면 동북3성의 경제상황이 나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사회복지가 개선되고 빈곤인구도 줄어들고 있지만 경제성장의 근본적인 변화는 여전히 시간이 더 걸려야 할 것 같다.   동북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것은 동북의 가장 주요한 성장원천인 공업생산과 밀접한 련계가 있다. 새중국 창립 초기에는 우리 나라의 가장 중요한 중공업생산기지로 국가의 경제건설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동북지역이다.    료녕성을 놓고 말하면 1950년대에는 공업총생산액이 전국의 20% 이상을 차지하였고 순위를 놓고 말하면 전국에서 2위를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길림성은 자동차와 화학공업분야가 유명하였고 흑룡강성은 비행기제조와 기계설비제조로 전국에서 독보적인 위치였다.    우리 나라는 원래 전통적인 농업국가였으니 공업을 위주로 발전시킨 동북지역은 전국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대의 수요와 발전에 맞게 발빠르게 철저한 변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북의 국유기업에서 생산한 전통적인 공업품은 경쟁력 때문에 빛을 잃었고 동북의 공업기업은 대다수가 수익성이 하락하였다. 1990년대말, 전국을 휩쓴 국유기업개혁 속에서 동북지역은 800만명이 되는 정리해고와 실업 로동자를 배출하였다.   동북의 이러한 전반적인 경제발전상황은 또 많은 인재의 류실을 초래하였다. 흑룡강성이 발표한 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매년마다 12.6만명의 인구가 흑룡강을 떠난 것으로 집계되였고 2011년부터 2015년에는 매년 6.92만명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런 인구 가운데서도 고학력자와 청년의 비중이 더 큰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대형기업에서 리직을 택한 기술자는 전체 리직자의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부터 동북지역의 경제상황은 전국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고 정부도 동북경제의 진흥을 장기적인 중대한 과제로 삼고 이에 대해 많은 정책적인 지원을 하였다. 중앙은 2003년 첫해에만 610억원이 되는 첫번째100개 프로젝트를 동북지역에서 실시하였다.    동북지역은 동북진흥의 정책과 기업의 노력으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고 있다. 인재 류실의 문제를 감안하여 최근에 동북지역도 인재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에 뛰여들었다. 2019년 1분기의 경제지표도 어느 정도 이러한 성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동북의 경제가 신속한 발전단계에 들어서려면 여전히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두께가 세자나 되는 얼음이 하루에 언 것이 아니듯이 동북지역의 공업을 부활시키는 것은 장기적인 과제로 동북지역의 꾸준한 노력과 개혁이 필요하다. 인민넷 조문판
111    속담으로 본 우리의 민족적 특성(권진홍) 댓글:  조회:3086  추천:0  2019-05-21
“한국에는 멀리 내다보는 속담이 없어. 중국에서는 ‘나무를 기르는 데는 십년이 필요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는 백년이 필요하다(十年树木,百年树人)’라고 하잖아? 한국 속담에는 이렇게 멀리 내다보고 계획하는 속담이 어디 있냐?”  얼마전에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중 오빠가 나한테 한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말이 나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말만은 유독 머리에 박혔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여서인지 아니면 또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말은 우리말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정말 크게 다가왔다. 말 듣는 순간 머리 속 채널을 부지런히 돌려보았지만 반박할 만한 속담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이 지나고도 이 말은 여전히 귀전에서 맴돌았고 속담들을 좀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네이버사전에 들어있는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에 수록된 속담들을 다 추출해냈다. 어마어마한 량이였다. 학생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다음은 속담들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보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절반 정도를 봤는데도 내심 기대했던 속담은 없었다. 실망감이 들기도 하고 왜 이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오빠의 그 한마디를 듣고 속담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속담은 여느 말들과는 달리 한 민족의 력사, 풍습, 민속, 지혜 등을 담은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백과사전(1998)에서는 속담에 대해 옛날부터 말로 내려온 교훈이나 비유의 뜻을 담은 짤막한 말로 민중의 지혜가 응축된 민간 격언, 이언, 속언이라고 정의하였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삶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이나 어떠한 가치에 대한 견해를 간결하고도 형상적인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속담을 어떤 종류의 교훈, 기지, 상상, 경계, 비유, 풍자 또는 모든 관찰 경험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표현하는 말로서 인간 생활에 관한 진리를 말할 목적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기술하였다. 이처럼 속담은 인간이 집단적 사회생활을 해 오는 과정에서 개인적 또는 집단적 사유 및 공감을 통해 수렵된 세상사 및 인간 삶에 대한 지식이며 신념체계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속담에 내포된 심리적 특성을 “한 국가의 기질과 정신은 속담에 의해 발견된다”라고 하였듯이 속담에는 민족의 마음이 반영되고 민중의 꿈과 슬기가 새겨져있다.  민족의 특성, 슬기, 정신을 언어화한 것이 속담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기대하는 속담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속담을 토대로 한국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한 심리학자의 연구결과는 언어중시, 체면지향, 목전실리, 피해의식 네가지로 정리되여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공짜는 양재물도 마다 아니한다’, ‘나중에 꿀 한 식기 먹기보다 당장 엿 한 가락이 낫다’, ‘래일의 천자보다 오늘의 재상’ 등 속담처럼 목전실리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속담에 멀리 내다보면서 장기 계획을 하는 속담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속담은 어느 짧은 시간 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 민족 전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왜 목전실리를 중시하고, 이런 목전실리를 중시하는 심리는 어떻게 형성되고 계속 이어졌을가 하는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담은 역사성, 문화성, 사회성을 갖는 만큼 이러한 속담들이 많이 형성 된 것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 종교와 갈라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가를 들여다보았다.  보통 우리는 민족 고유의 종교가 없다고들 한다. 종교 만큼 한 집단의 의식과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진정 우리는 토착종교가 없었을가? 아니면 우리의 토착종교는 완전 사라져버린 걸가? 대부분의 민족이 나름의 원시종교가 있듯이 우리 민족도 토착 종교가 있었다. 샤머니즘,무교/무속(巫教/巫俗)이 바로 우리 민족의 토착 종교였다. 다만 우리 민족 대부분은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신이라면서 저속하게 여긴다. 우리 민족 대부분의 심리 깊은 곳에는 무속적 특징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대체 무속이란 어떤 것일까? 무속은 신령이 실재하여 샤먼이라는 주술자에게 붙어 신에게 소속되고, 신으로서 행동하여 악마와 요정을 쫓고, 인간에게 복지를 가져다준다는 원시적인 민간신앙이다. 샤머니즘은 북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포된 하나의 원초적 종교였다. 무속은 수천년이란 시간을 연속해오는 과정에 박해와 수난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지속되여오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언어, 풍습 제도 등에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 민족의 흥, 노래, 춤, 술문화 등은 바로 무속의 제의 형식인 굿에서 발전하여 온 것이다. 무당의 무가, 신무 등이 오늘날의 우리의 가요, 춤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여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 원시종교는 언제부터일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알리는 신화에 ‘단군신화’가 있다. 천제의 아들 환인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단군 왕검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신화이다. 그런데 ‘단군’이라는 명칭은 하늘을 뜻하는 알타이어 ‘텡그리(Tengri)’의 음에서 유래한 것이며, ‘왕검’의 ‘검’은 신령을 뜻하는 ‘캄(Kam)’의 음역을 따서 한자로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즉 우리 민족 무속의 력사성을 단군신화에서부터 찾는 것이다. 무속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인데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은 왕호이자 무칭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사에 있어서 무당은 부족 내지는 부족 련맹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고대 신앙이 불교와 혼합하여 창조적인 형태로 전개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화랑도이다. 그러다가 신라의 쇠퇴기에 사회가 불안해지자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격의 무속이 개인의 안전과 축복을 찾는 무격 신앙으로 발전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유학자들이 서서히 많아지면서 무당들이 억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극력 꺼렸기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무속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하지만 고려 때에도 무속은 생활면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였고. 개인이 발병을 해도, 국가의 행사에도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귀족의 딸 가운데에도 무당이 된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유학, 그중에서도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무속은 전례없는 압박을 당하고 무당들은 천민계급으로 강등되고 도성 출입이 금지되였다. 유교를 숭상하는 량반들은 무속을 빈천한 것으로 폄하하면서 멀리했다. 그렇다고 무속이 도성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는 성수청, 활인서 등의 무청이 있었고 사제무가 기우제, 산천신제, 성황제 등을 도맡아서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고상함으로 표방하고 있는 양반들도 정작 가문에 불행한 일들이 생기거나 하면 부인들에게 못이기는 것처럼 하면서 야밤중에 무당들을 불러다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무당들이 다 도성에서 쫓겨났지만 도성 속의 무당에 대한 수요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무속은 오늘까지 이어져왔다. 조선조 500여년 동안의 억압과 핍박하에서도 요절하지 않고 지속되여올 수 있었던 것은 존재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민중들이 믿고 신앙하고 위기 때마다 민중들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으로 되였기 때문에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 문화의 핵이 무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무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현세중심, 현실중심, 실용주의, 인간중심이라고 한다.  이햇님(1997)은 무속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첫째, 자연주의적이고 현세중심적이다. 무속에는 초지상적인 가치나 형이상학이 없고 오직 자연 질서에 따른 생자필멸사상(生者必灭思想)과 현세에서의 가족 내지 부락 공동체의 구복(求福)과 제재(除灾)를 위한 현세중심적 가치관과 도구적 신관이 있을 뿐이다. 민족의식 • 국가의식 • 력사의식 같은 자연적 공간을 초월하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 의식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 • 혈연, • 부락 등 일차적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좁이 의미의 공동체 의식은 비록 범위는 좁을지라도 의식의 강도는 높다. 둘째, 평화적이고 인간중심적이다. 무속에서는 선 • 악 같은 량극적 가치들 사이의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평화나 화해를 추구한다.  셋째, 현실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다. 무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고 그 현실에 적응하면서 최대한의 리익을 찾는다. 현세적 리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건 실용적으로 리용한다.  우리 민족 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무속의 특징을 보면 왜 우리 속담들에 현실중심적이고 실리적인 속담들이 많은지 자연 리해가 된다. 그리고 또 왜 장기성을 나타내고 큰 그림을 그리는 속담이 없는지도 리해가 된다. 혈연, 마을공동체의 리익은 중시하면서 그 범위를 벗어난 민족의식, 국가의식이 결핍하였던 문화원류가 그 원인이 아닐가 싶다.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철저하게 즉 ‘지금’, ‘이곳’을 중시하는 현재중심적 사고,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신도 인간의 삶을 부러워하고 인간의 조종을 받는 현세중심, 인간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되였을 것이다. 무속이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수천년을 존속되여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존재의 리유가 있고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 무속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무속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을 쓰면서, 사고를 하면서 느낀 점이 피해의식을 나타내는 속담이 많을 정도로 우리 민족이 피해의식의 심리가 강한 것은 자기 부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가 싶다. 흔히 우리 민족을 ‘한’의 민족이라고 한다. 강국들 사이에 끼여있는 지역적 특성에서 ‘한’이 맺혀 피해의식이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많은 력사적 사건들 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문화의 핵인 무속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조선조, 일제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무속에 대한 부정과 폄하, 핍박으로 하여 점차 무속을 저속한 것으로,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원초적인 종교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부정하기 전에 이미 형성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무속 의식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핍박받을 수록, 부정할수록 그에 대한 의지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을 우리의 문화의 핵이라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하지 못할 뿐더러 부정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불교적으로, 유교적으로 기독교적으로 포장하면서 살아왔다. 자기에 대한 강한 부정은 내심 속 자리하고 있는 덩어리와 충돌하면서 한이 생기고 피해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된다. 피해의식이 생길수록 리해관계에 민감해지고, 리해관계에 민감해질수록 미래를 지향한 장기적 계획보다는 단기적 즉각 만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자기 부정이라는 것도 우리 민족의 원초적 심리인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시조 단군을 탄생시킨 웅녀는 곰이라는 자신을 부정하면서 인간이 되려고 하였고, 일련의 시련을 거쳐 녀자가 되였고, 환인과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다른 종교들처럼 신에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조종하여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주고, 신도 인간세계를 부러워하는 인간중심의식, 민족•국가의식보다 더 강한 혈연의식, 그 범위를 더 좁혀보면 강한 자기애라고 할 수 있겠다. 강한 자기애와 강한 자기부정, 서로 반대되고 상충되는 이 두 의식이 강렬하게 부딪치면 어떤 심리가 만들어질가? 그러면서 어떤 특징이 보여질가? 세상을 비추기도 하고 담기도 하는 말의 일부인 속담으로부터 민족의 성격을 보았고, 심리를 보았고, 그 원류로 생각되는 것에 거슬러올라가 보면서 우리 문화의 핵을 짚어보고 그것이 집단심리형성의 원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나의 좁은 식견으로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새로운 과제도 남겨본다. 인민넷 조문판
110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는 연변말을 보며(김부용) 댓글:  조회:1988  추천:3  2019-05-17
   인천대학교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조교수 김부용 인간이 살아가면서 빠질 수 없는 것중 하나가 바로 언어일 것이다. 언어는 사유와 소통의 도구이자 내용이며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치밀한 사유가 가능하고 타인과 세밀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언어가 없는 삶을 상상해보라.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와 기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도 불가능상태가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따뜻한 인사 한마디 건넬 수 없고, 배고프다는 의사표현도 정확히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는 특정 지역,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며 인간은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해간다. 얼마전 우연히 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조선말이 금지되여 점점 사라져가던 1940년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의 말을 모으는 ‘말모이’사전을 만드는 내용이였다. 독립이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 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감명 깊은 영화였다. 이렇듯 언어는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데, 오늘날의 연변말을 돌아보면 정체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지하다싶이 연변말이라 함은 중국 연변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언어로, 함경도의 방언이 가장 밑바탕이 되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시대에 걸쳐 만주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함경도 출신들은 두만강 건너편인 길림성으로, 평안도 출신들은 압록강 건너편인 료녕성으로, 그리고 경상도 출신들은 흑룡강성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길림성 연변지역에서는 함경도의 방언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있다. 여기에 조선의 표준어인 평양어 그리고 중국어가 적절히 융합되면서 연변지역만의 고유한 언어가 탄생하게 되였다. 대표적인 연변말로 ‘일없슴다’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괜찮다(没事儿)’라는 의미의 중국어표현을 그대로 직역한 것에 함경도 종결어미인 ‘습구마’ 대신 연변식 개신형 어미인 ‘슴다’가 붙여진 것이다.  연변말은 누군가에게는 촌스러운 사투리로 들릴지도 모르나 조선족에게는 곧 표준어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조선족중심지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조선족을 말하면 제일 먼저 연변이란 지역과 연변말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연변말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국과의 교류가 깊어가면서 TV에서도, 라지오에서도 서울말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글도 서울식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처럼 대세는 서울말로 바뀌는 와중에 일부에서는 “서울말은 영어표현을 많이 쓰므로 우리말로 바꿔쓰는 조선식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례를 들면 ‘코너킥’을 조선처럼 ‘각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볼(ball)이 영어발음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각볼도 순수 우리말은 아니다. 한마디로 연변말은 현재 연변말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지 서울말로 바꿔야 할지, 아니면 조선식 표현(특히 신조어)을 사용해야 할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단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 우리 조선족이 나는 중국인 및 조선족이냐 아니면 한국인 혹은 조선민족이냐의 사이에서 정체성의 방황을 겪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변말을 부정하고 타의 언어를 표준어로 표방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조선족이라고 불릴 명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도 연변말을 쓰자는 의미는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한국사회에 잘 융합되려면 한국어를 쓰는 것이 맞다. 그러나 조선족의 집거지이자 뿌리지역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연변말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리해해야 할 것인가?! 인민넷 조문판
109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이야기(2)---리성일 댓글:  조회:2039  추천:1  2019-05-07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전의 북경대학 조선족들의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 건국대학 손염홍(장춘 출신) 교수의 저서 《근대 북경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서울, 역사공간, 2010년 출판)은 북경대학에서 공부했던 일부 조선인들의 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손염홍 교수는 저서에서 《불령단체관계잡건-조선인의 일부–지나 각지》(제1권 1919년 3월 작성, 제2권 1922년 1월 작성, 제3권 1924년 월 작성), 조선총독부 북경 파견 통역관이였던 키후지 고쿠기(木藤克己)의 《북경 재류 조선인의 개황》(1927년 5월 작성) 등 일본 자료들을 인용하여 고룡환, 장자일(통주 로하중학 졸업후 1917년 북경대학 입학), 김용환, 김호영, 서범석(1921년 북경대학 정경학과 입학), 소완규(1920년경 북경대학 문예과 입학), 량명(북경대학 문과), 리대위(1921년 북경대학 졸업), 리윤재(1921년 북경대학 력사학과 입학), 리정규(북경대학 경제학과), 리유동(1927년 북경대학 졸업). 차응준(1923년 북경대학 입학) 등 여러 조선인들이 북경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부경대학 조세현 교수도 저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교류와 연대》(창비, 2010년 출판)에서 1920년대 초에 리정규가 북경대학 생물학 리석증 교수의 도움으로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되였다고 했다. 기실, 현시점에서는 당시 북경대학 학적부를 조사하기 어렵고, 설령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국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확인이 곤난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金山, 본명 장지락)은 1921년에 북경협화의과대학에 입학, 후에 현재 해정구 중관촌 일대에서 활동했던 기록이나 주문빈(周文彬, 본명 김성호, 1928년 북경 통주 로하중학교에서 첫 당조직을 설립)렬사의 동생인 김상호가 연경대학에서 공부했던 사실, 지금도 북경대학도서관에 1920년대 초에 신채호, 류자명 등 독립운동가들이 북경에서 만든 《천고》(天鼓) 잡지가 보관되여있는 등 여러 사실에 비춰본다면,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전에도 북경대학에서 다수의 조선인이 공부했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이 가능하다.  개혁개방 이전에 북경대학 졸업생들중 모교에 교원으로 배치된 분들외에, 비록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중국과학원, 중국인민대학, 중앙민족대학, 료녕대학, 길림대학, 연변대학, 심양시과학기술대학, 사천성 성도지질학원, 계림야금지질학원 등 전국 여러지역 대학과 연구기관에 배치된 분들도 있다. 이분들도 자신들의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 그중 특히 언급해야 할 것은 2007년에 작고하신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의 연구 및 활동 업적이다. 최룡수 교수는 1962년에 북경대학 철학학부를 졸업하고 길림전력학원에 배치되였다가 1978년에 중앙당학교 철학연구실에 전근되였다. 20세기 80년대 초, 중앙당학교에 연수하러 왔던 조남기 장군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분의 말씀에서 많은 계발을 받고 조선족혁명렬사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관련 연구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던, 특히 관내지역에서 활약했던 리철부(본명 한위건), 한락연(본명 한광우), 양림(본명 김훈), 김산(본명 장지락), 주문빈(본명 김성호) 등 조선족혁명렬사들의 업적을 연구, 발굴하고 널리 알렸으며, 《조선혁명가들의 항일투쟁》, 《연안에서의 조선혁명투사들》, 《수도에 있는 조선족 로혁명가와 그 유가족들》 등 여러편의 연구론문을 발표했다(《최룡수문집》, 북경, 민족출판사, 2010년 출판). 최룡수 교수의 연구, 선전과 노력으로 인해 북경의 조선족 로혁명가 자녀들 간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으로 2005년에는 한국 로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주문빈렬사의 녀동생 김신정, 김산렬사의 아들 고영광, 한락연렬사의 아들 한건행 등 세분이 선대들에게 주는 대통령 표창상을 수여받았다. 또한 최룡수 교수의 정신을 본받아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한락연연구전업위원회가 2017년 7월에 정식으로 설립되였으며, 한락연을 비롯해 관내지역에서 활동했던 조선족혁명렬사들에 대한 연구가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7년 9월,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가 주문빈렬사의 모교인 북경시 통주구에 있는 로하중학교를 찾아 학교내의 렬사의 동상과 혁명렬사비, 학교기념관 및 주문빈반을 참관했으며, 주문빈렬사장학금에 조선족단체로서 처음으로 인민페 1만원을 기증했다. 이러한 것들은 최룡수와 같은 선대 학자들이 조선족 혁명렬사들을 연구, 발굴하고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1956년 북경대학 아랍어학과를 졸업한 한국해외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연변 팔도태생으로 과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현재 한국에서 실크로드 력사분야의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비록 80여 세의 고령이지만 《실크로드사전》, 《해상실크로드사전》, 《실크로드도록》, 《해상실크로드도록》 등 방대한 연구서적을 련이어 출간함으로써 오늘날 일대일로연구에 중요한 참고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신강 키질석굴연구에서 연변 룡정출신의 화가 한락연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북경대학 조선족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 선대들의 이야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력사기록들이 아직도 너무 많이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력사, 선대들의 업적을 잊지 않고 기록해야 만이 그들의 정신과 문화를 전승해나갈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시급한 것으로 전 사회적인 관심과 노력, 지원이 참으로 절박하다. 인민넷 조문판 
108    조선족의 이주, 리산과 녀성로인들의 로후생활(최선향) 댓글:  조회:2028  추천:0  2019-04-18
지난 해 여름방학, 나는 조선족녀성 생애사를 연구하기 위해 길림성 J시에 가서 조선족녀성로인들을 만나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70대, 80대, 심지어 90이 넘은 녀성로인들을 만나 그분들의 인생사를 들으며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90이 넘은 녀성로인들에게서는 언제 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아 하루에 두세시간씩, 며칠을 나누어 들은 적도 있다.  처음에는 “난 언변이 없어 말 못해요.” 라며 수줍게 이야기하시던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더 생기가 돋고 활기가 넘치셔 듣는 내내 그분들의 내면세계의 변화를 읽는 것 같아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찾아주어서 고맙다고, 누구도 당신이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젠 자식들도 말만 꺼내면 엄마는 또 그 얘기다, 그만 하라는 식으로 말한다고 하셨다.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고도 나한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는 그분들을 보며 한평생을 농사일과 가족, 자식들을 위해 바쳐오신 그분들이 참 고맙고 존경스웠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웃고, 함께 눈물을 흘리던 그 시간들을 지금 이 글에 담아 조선족사회가 로인들의 로후생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사회의 보편적 특징중의 하나가 이주와 그로 인한 리산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족녀성로인들의 삶에서 나는 이주와 리산이 낳은 득과 실을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자녀분들과 손자녀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이나 일본 등 외국과 북경, 상해 등 외지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곁에 가족이 있는 분들이 많지 않다. 그분들중에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시다 농촌의 조선족소학교, 중학교들이 무너지며 손자녀들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시내에 나와 살게 된 분들이 많다. 처음에는 세집을 맡아 살다가 후에는 자녀들이 번 돈으로 조선족중학교 근처에 집을 사서 시내에 살게 되였다고 하신다.  그분들은 농촌의 어려운 살림에도 자녀들을 키우고 뒤바라지 하기에 최선을 다 하셨고, 자녀들이 결혼을 해서는 외국이나 외지에 나가 일하는 자녀들을 대신해 손자녀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한다. 그중 한 할머니는 아들 내외가 북경에 가 김치장사를 해 어린 손주를 대신 키웠다고 하신다. 그러다 농촌의 조선족중학교가 문을 닫아 남편과 함께 손주를 데리고 시내에 나와 세집을 맡고 손주 공부 뒤바라지를 했다고 하신다. 이젠 손주도 다 자라 북경에 가서 일을 하고 있고, 남편은 세상을 떠나 할머니 혼자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그외에 한국에 나가 일하는 자녀들을 위해 손주들을 돌봐준 할머니도 계셨는데 친손주, 외손주 모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뒤바라지를 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남편이 앓아 남편 병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70대와 80대 초반의 할머니들, 특히 남편이 생존해있는 할머니들은 모두 집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아직 건강한 셈이고 로부부가 같이 생활하는 경우 서로 의지가 되여 보기 좋았다. 그분들중에는 중소학교 교사를 지내셨던 분들을 위주로 문학동아리 등 여러 동아리들이 무어져 나름 성공적인 로년을 보내고 계셨다. 하지만 80대 할머니들중에는 남편이 돌아간 다음 조선족양로원에서 생활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양로원에 달마다 내야 하는 비용은 한국이나 외지에 가서 일하는 자녀들이 분담한다고 하신다. 할머니들께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가고 물으니 양로원에 와 계시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답하는 할머니들도 계셨다. 왜냐하면 매일 손수 밥을 안 지어도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고,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다 해주니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하셨다. 실로 그분들한테는 고된 농사일 뿐만 아니라 매일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집안 청소와 빨래 등 가사일을 하며 자식을 키워야 했던 지난 시절이 힘들고 고된 추억으로 남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딱 한 가지가 안 좋다고 하신다. 자식들이 모두 한국에 나가있어 자식을 볼 수 없어 괴롭다고 하셨다. 같은 방에 계시는 다른 할머니의 자녀들이나 친척들이 할머니를 뵈러 오는 날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야기를 나누며 양로원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자녀들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그 마음은 마치 중학교 때 기숙생활을 하며 언제면 엄마, 아빠가 우리를 보러 오시겠나 기다리던 어릴 적의 우리 모습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더욱 가슴이 아리고 아팠다. 양로원에 계시는 할머니들은 그렇게 자식들이 찾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신다.  87세의 한 할머니는 이야기를 나누는 몇시간 내내 한 숨을 지으셨다. 73세 때 남편이 돌아가고 홀로 농촌 집에서 7년 살다 80세에 시내 양로원으로 나오셨다 하신다. 농촌의 집은 마을에 이사온 한족 부부에게 세집을 주었는데 그게 후회된다고 하셨다. 불을 때야 하는 겨울에는 부득불 시내 양로원에 살아야 하지만, 더운 여름에는 농촌의 집에 돌아가 살았을 걸 하시면서 말이다. 6남매를 낳아 키우시고 또 손자녀들까지 돌봐주었다고 하신다. 하지만 자녀들은 자녀들 대로 한국이나 외지에 나가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바쁘고, 이젠 자녀들에게도 손자녀가 생겨 손자녀를 돌봐주어야 한다. 그래서 같은 시내에 살고 있지만, 바빠서 별로 와보지 못하고 명절 때나 자녀네 집에 가서 하루 이틀 자고 온다고 하셨다.  양로원에 계실 경우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있고 같이 마작놀이나 카드놀이를 할 수도 있어 좋다. 할머니들은 양로원 원장 내외가 로인들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보살펴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지만 양로원에는 치매를 앓거나 운신을 못할 정도로 병이 심한 분들이 꽤 많아 주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셨다. 혹 양로원에 살다 생명을 마감하는 로인들이 생기면 할머니들 역시 마음이 우울해나고 슬프다고 하셨다. 자녀들이 한국에 있어 생명을 마감할 때도 자식 얼굴 한번 못 보고 가는 로인들이 꽤 있다고 한다.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자식들이 한국에서 부랴부랴 돌아와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간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요즘은 80대, 90대까지 장수하는 로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로인들은 모두 일찍 결혼해 일찍 자녀를 보다 보니 자녀들과의 년령 차이가 많지 않다. 때문에 로인들의 자녀들도 이미 로년기에 들어섰다. 그외에 조선족로인들 대부분이 농촌에 살다 보니 퇴직금이 없어 로후생활을 자녀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에 땅이 있어 땅에서 나오는 수입이 있기는 하지만, 자녀들의 경제적 지원과 정서적 지원이 필요하다.  한국거주 조선족인구가 80만명을 넘긴 오늘, 한국에 나가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들 중에 로후생활을 한국에서 보낼 계획을 하고 있는 준로인들이 적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한국에서 일하며 거기서 살아가는 노하우가 생겨 그곳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들의 부모 세대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로후생활을 해야 한다.  한국에 나가 일하다 가끔 귀국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일하느라 바빠 자주 돌아오지 못하고 전화로 안부를 전한다. 로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한 할머니가 한국에서 일하는 며느님의 전화를 받는 걸 보았다. 할머니는 돈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으셨고, 또 많이 보고 싶다고, 언제 만나겠는가고 이야기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년세가 많아지면서 청력, 시력이 저하되고 걷기도 불편하고, 뇨실금으로 고생하는 할머니들도 계셨다. 양로원에 계시는 할머니들의 경우 모두 남편은 돌아가고 혼자 남은 경우였다. 그러고 보니 그분들중에는 자식 뒤바라지, 손자녀 뒤바라지 뿐만 아니라, 남편 병시중, 심지어 먼저 간 자식 병시중까지 맡아 하신 분들이 적지 않다. 지금은 로화되여 간신히 몸을 움직이지만, 젊은 시절 한 가정을 떠맡아 보살피고 농사일과 가족의 일상생활을 책임지며 억세게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분들이 로후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한국이나 외지에 나가있는 그분들의 자녀들만의 몫이 아닌, 조선족 사회 전체가 힘과 지혜를 합쳐 고민해보아야 할 일이라 생각된다. 특히 동북 현지의 조선족중소학교들에서 학생들의 사회실천의 일환으로 학생들의 양로원 방문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조선족양로원이 중학교 근처에 있어 학생들이 방문하기에도 편하다. 학생들이 가끔 양로원에 가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지역사회와 민족의 력사를 배웠으면 좋겠다. 공부는 교실과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 속의 공부만이 아니라 사회와 실천을 통해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력사 역시 교과서나 책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이 조선족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분들의 헌신적인 삶과 근검절약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 평범하지만 나름 자신 앞에 차려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그분들은 분명 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조선족중학교 학생들이 가끔 양로원을 방문해 로인들에게 춤과 노래를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연으로 끝나는 만남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더욱 생산적인 관계가 형성되였으면 좋겠다. 할머니들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고 힘을 얻고, 학생들은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지혜와 강인한 정신력을 배웠으면 좋겠다. 조선족대학생들 역시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등을 리용해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양로원을 방문해 로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많은 계발과 사랑을 배웠으면 좋겠다. 인민넷 조문판 
107    민족의 얼과 교육의 과제(허명철) 댓글:  조회:3241  추천:0  2019-03-20
  어려서부터 우리는 가족을 단위로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생활례법을 비롯한 민속을 익혀왔고 민속은 우리에게 하나의 법으로 인지되였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지적인 호기심이 담긴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어른들은 항상 "이것이 법이다"고 에누리 없는 대답으로 일축하였고 왜 민속이라는 이 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너는 조선족이기 때문이다"는 ‘묻지 마’식의 대답이 고작이였다. 육체와 령혼의 합일체인 내가 "조선족이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요소, 즉 민족의 피줄을 이어받아 태여난 육신이고 나의 령혼심처에 민족의 얼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너는 조선족이기 때문"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지켜야 했고 따라야만 했던 민속이 말 그대로 일종의 ‘습관법’으로 각인될 수 있었고 민족구성원들의 무의식적인 행위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상술한 소박한 론리는 민족과 민속의 직접적인 련관성을 의미하고 있으며 민속에는 우리민족의 그 어떤 고유의 정서 내지 생활철학이 담겨져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민속이 하나의 전통으로 전승되여올 수 있었고 또한 시대적 요소의 영향으로 변용된 양상을 보여왔었지만 여전히 하나의 ‘법’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민속행위 및 의례 내면에 민족고유의 가치 또는 정신이 내재되여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내적인 가치가 바로 민족의 령혼이고 민족의 정신이며 민족의 얼이라 하겠다. 이번 인대 및 정협회의 기간 습근평 총서기는 정협 제13기 2차 전회에 참석한 문화예술계, 사회과학계 위원들과의 좌담에서 한 국가, 한 민족에게 있어서 령혼이 없어서는 안되며 문화문예사업과 철학사회과학사업은 민족의 뿌리를 키우고 령혼을 만들어가는 사업이라고 지적하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우리는 전형인물을 부각시키면서 ‘무혼’ 또는 ‘군혼’을 구가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으로 있는 우리민족의 령혼은 무엇일가? 필자는 이러한 물음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일상에서 우리는 령혼을 얼이란 낱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얼빠진 사람’이라는 용어도 자주 사용한다. 사람이 령혼과 육체의 혼합체라고 할 때 ‘얼이 빠졌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아울러 인간에게 있어서 령혼 즉 얼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시사해주기도 한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럴진대 개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 또는 공동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족이 한개 집단공동체로 존속해나가려면 이 공동체를 결속시킬 수 있는 혼이 있어야 하며 민족공동체로서의 얼이 있어야 한다. 민족의 혼 또는 얼은 그 집단의 정신이고 뿌리이며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신화’ 또는 융이 말하는 ‘원형’ 또는 집단적 ‘무의식’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으며 민족고유의 생활양식과 삶의 철학과 가치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뿌리에 기반하여 우리민족은 단군신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홍익인간 정신, 신라시기의 화랑정신, 조선시기의 선비정신 등등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정신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족교육을 성찰해본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자랑하고 있는 민족교육도 방향성 조정이 필요한 시점에 다가온 것 같다. 민족교육은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면서 후세들에게 지식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며 민족의 력사와 문화지식을 가르치고 생활민속을 습득시키는 데만 그쳐서도 안된다.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의 혼을 심어줌으로써 ‘나는 누구냐’하는 자아정체성을 자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의 령혼 심처에는 무의식적인 상태로 잠재되여있는 민족적 혼이 있다. 일례를 든다면 우리에게는 화랑도라는 것이 있었고 정신적 추구와 수련방식이 있다. 이러한 화랑정신의 소유자였기에 우리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림전무퇴’의 정신을 과시하였으며 어려운 생활여건 속에서도 항시 농악을 즐기는 락천적인 삶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또한 이 같은 강인함과 락천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우리는 전반 이주시기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주민족의 꿈을 이루어왔으며 세인에게 민족의 위대한 정신과 찬란한 문화 무궁한 저력을 과시해왔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현묘지도’라고 하는 ‘풍류도’정신이 있기에 다양한 외래문화를 소화해낼 수 있었으며 이들 외래문화요소를 우리민족문화가 생성할 수 있는 문화토양으로 활용하였다. 우리는 또한 학식과 인격을 겸비한 지식인을 존중하여 선비라 불렀고 재물과 권세에 초연하고 학문과 덕행과 사회정의를 귀하게 여기고 추구해 오는 이른바 선비정신을 창출해내였으며 이러한 선배정신은 후세가 본받아야 할 인격상으로 되였고 거족적인 교육열을 불러일으키는 데 동력으로 되였다. 어찌 보면 우리들의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왔던 행동과 가치추구의 배후에는 민족의 얼이 항상 숨 쉬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현대화라는 슬로건하에 현대성의 거센 충격으로 서구식 현대문명만을 쫓아다니다 보니 오히려 자체민족의 혼이 숨쉬고 있는 민족문화를 외면시하는 모습들이 우리사회 구석구석에서 드러내고 있다. 어찌 보면 현대판 ‘위기탈출’을 재현해야 할 상황에 직면한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차례 민족의 얼을 살리는 계몽교육을 실시할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된다. 이에 호응하여 학교교육은 물론 민속연구에 있어서도 재현의 민속, 해석의 민속, 발굴의 민속에서 벗어나 민속을 문화와 정서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일상화하여 민속이 우리민족에게 부과되는 의미와 가치를 살려야 하며 이들 민속이 민족경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지위와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력사적으로 창출하고 전승해왔던 민족의 얼을 되살리고 민족문화 창달을 거듭해나가야 한다. 인민넷 조문판 
106    한국남성과 결혼한 조선족 이주 녀성들의 삶의 려정(방미화) 댓글:  조회:2266  추천:0  2019-03-06
현재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국제적 환경 및 한국의 경제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산업부문 특히 중소기업의 생산 관련 직의 인력부족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남과 동시에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그리고 1987년 이후의 로사분규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로동자의 임금수준은 급상승했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 한국내에서는 ‘3D’직종의 일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였고 이는 아시아지역 개발도상국 출신의 외국인 로동자 특히 녀성 이주 로동자의 류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로동시장의 소비형 서비스 산업의 증가추세와 한국사회에서의 성차별문화, 가족중심주의 인식은 이 부문에서 선호하는 녀성로동자의 인력난을 초래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녀성의 결혼기피 및 만혼, 배우자선택의 차별화, 남성의 경제력약화, 남성성비의 불균형 등등 사회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한국 녀성배우자와의 결혼이 힘든 한국남성들은 국제결혼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려 하엿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하에 아시아 여러 국가 및 기타 발전도상국의 녀성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게 되며, 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한국으로의 로동이주가 불가능한 녀성들은 이주의 수단으로 국제결혼, ‘위장결혼’을 선택하여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조선족녀성들도 당시의 국제적 환경의 흐름 속에서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였으며 현재 한국의 국제결혼 녀성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조선족녀성들이 국제결혼의 방식으로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 것은 또한 국제결혼행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및 지원과 갈라놓을 수 없다. 한국녀성들과 결혼할 수 없는 한국남성들에게 조선족녀성과의 결혼은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으며 한국정부는 또 그들이 결혼과 관련된 행사에 적극 개입하거나 지원하는 것외에 로동력이주는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가장 손쉽고 유리한 입국통로로서 결혼을 통한 이주를 허용하고 지원하는 이주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족녀성들이 ‘결혼’이라는 이주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시대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부에 대한 욕망, 자녀부양 등 개인적 선택,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여 한국녀성과의 결혼이 어려워진 남성들의 수요와 이를 보장해주는 이주정책 그리고 상업화된 결혼시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녀성들의 삶의 려정은 어떠한가. 물론 한국남성과 결혼한 녀성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틀어 살펴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녀성들도 학력, 직업 등에 따라 계층적으로 분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아갔던 조선족녀성들의 삶의 려정을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은 이주녀성의 능동적인 삶을 드러내고 향후 발전 방향을 가늠함에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우선, 한국으로 이주하기 이전 조선족녀성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살펴본다면,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녀성들의 생활과 가치관의 변화를 세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19세기 중엽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이주하면서부터 1949년 새중국 창립 이전까지이고 둘째 단계는, 새 중국 창립 이후부터 문화대혁명 이전까지이고 세번째 단계는 1966년-1976년 사이의 문화대혁명 기간이다. 먼저, 동북 이주 초기에 봉건적인 ‘삼강오상(三綱五常)’, ‘삼종사덕(三從四德)’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지니고 온 조선족녀성들은 의식주행용 일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어른, 남편, 자식을 위하며 오직 가도만을 위하여 노력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을 유일한 미덕으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그러한 의식이 몸에 배인 녀성들이였다. 그후, 1919년 신문화운동과 서방의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의 전파는 민족의식교육과 구국구민(救國救民)운동 등 반일계몽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되였을 뿐만 아니라 장시기 동안 봉건유교사상의 속박하에 있던 조선족녀성들로 하여금 ‘남존녀비’, ‘삼강오상’, ‘삼종사덕’ 등 봉건륜리도덕규범을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며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도록 추동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 조선족녀성들은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현처량모를 인생의 최종가치로 간주하며 순종적이고 페쇄적인 삶을 살았다. 다음으로, 새중국 창립 이후 조선족녀성들의 사회적 지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녀성들의 가치관 판단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중국은 전반 녀성의 로동계급화를 통하여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였고 가정의 사회화, 집단화를 정책적으로 추진시켜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족녀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이 사회에 나가서 생산로동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사회진출을 통하여 조선족녀성들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의 향상은 얻어왔지만 동시에 사회와 가정에서 량립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의 부담도 상당히 컸다.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여전히 남자중심의 가정생활로서 조선족녀성들은 모든 가사로동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 사회생산활동에도 참가해야 하였기에 사회와 가정의 이중적 부담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하고 힘겨웠다. 그 다음으로, ‘문화대혁명’의 10여년간 중국의 조선족녀성들은 가정생활과 혼인생활도 의식적으로 정치와 련관시키면서 정치운동 참여에서 자기의 사회적 지위, 정치적 가치를 찾으려 하였다. 한마디로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사회에서 녀성들은 우선은 가족의 생존이라는 중임을 짊어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녀성들이였을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삶에 있어서의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녀성들이였으며 또한 변화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생활력, 포용력의 소유자들이였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녀성들은 상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도시, 해외로 이동하여 경제활동에 종사함으로써 경제적 지위가 향상시킴과 동시에 점차 과거 가정의 현처량모, 사회에서의 종속적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모순체로부터 탈리되여 자존, 자주, 자강의 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따라서 혼인관에 있어서도 결혼을 평생 결합으로 간주하고 혼인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리혼하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기면서 혼인을 파괴하지 않으려던 의식으로부터 국제결혼도 능히 허용하고 또 출국의 수단으로 국제결혼도 가히 리용하는 혼인의식을 형성하였다. 국제결혼에 나타나는 ‘가짜리혼’ 혹은 ‘위장결혼’ 현상은 그들의 정조관념이 륜리도덕보다 경제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에로 변화되였음을 말해준다. 어찌되였든간에 중요한 것은 일부 조선족녀성들이 그들이 가족 부양의 의무 때문에 글로벌 차원의 결혼시장으로 편입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의무 못지 않게 그들 자신의 계층상승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도 그들이 국제결혼을 선택한 중요한 리유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체제의 급격한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과거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하는 적극적 행위자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으로 입국한 후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서로 다른 가정에서 성장한 성인 남녀가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적응과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우기 서로 다른 력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남녀가 맺는 국제결혼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많은 모순들을 내재하고 있다. 조선족녀성들의 국제결혼 가정도 례외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더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례하면, 한중관련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경우 남편은 중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면서 조선족 안해를 ‘무시’하고 ‘비하’한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조선족녀성들은 이런 남편의 태도에 ‘정말 실망’하게 되며, 이런 부부간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조선족녀성들은 “내가 왜 한국에 시집왔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고 한다. 국가의 리해관계에 있어서 의견이 다른 경우 한국남성은 조선족녀성을 안해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비난한다. 국가관에 있어서 한국남성들은 조선족녀성들이 무조건 남성의 국가관을 순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한국남성들은 조선족녀성들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더 순종적이고 자신의 말이면 무조건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들은 결혼생활을 통해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의 남녀관계는 한국보다 덜 ‘전통적’이며 상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선족녀성들은 수십년 동안 중국이라는 문화권 속에서 사회발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조선반도의 녀성과는 다른, 중국의 한족과도 상이한 조선족특유의 문화를 창조하였고 이중성격의 녀성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외유내강의 기질과 강한 생활력, 적응력, 포용력의 소유자로서 사업에서는 자신이 자주적이고 남성들과 겨룰 수 있는 강자로 되려고 하며 생활에서도 자신의 생활적 여유와 향수도 누릴 수 있는 삶을 바란다. 하지만 한국 가족구성원들은 조선족녀성들의 이러한 고유한 문화특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적응만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적응기에 있어서 남편으로부터 '소외', 시부모에 대한 '복종', 동서들로부터 받은 '무시'경험,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차별적 경험을 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삶의 방식을 재형성함과 동시에 민족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조선족녀성들은 다양한 가족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한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기보다는 적절하게 회피하거나 적당히 반항하는 등 자신만의 방어기제와 삶의 전략을 형성하게 된다. 례하면, 중국어구사능력으로 자신만의 우월감을 형성하며 ‘중국인’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하고 또 완전히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조선족단체에 귀속되여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한국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녀성들도 있다. 요컨대, 한국남성과 결혼한 국제결혼 이주 녀성들은 새로운 미래와 비젼을 위해 국제결혼 이주를 선택한 능동적인 행위주체들로서 그들은 계층상승 혹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과 강한 생활력의 소유자들로서 남편과 가족 및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완전히 복종하지 않으면서 또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유연성과 포용력으로 스스로의 삶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한국사회에서 가정을 영위해나갔으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에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족녀성만의 독특한 삶의 단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선족 국제결혼 이주 녀성들의 삶의 려정은 세계 각국 이주 녀성들의 초국적인 경험과 삶을 조명하고 향후 이주 녀성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좋은 일례가 될 것이다. 인민넷 조문판
105    우리네 중년이야기: 요즘 부모로 산다는 것은(리화) 댓글:  조회:2207  추천:3  2019-02-20
성인자녀와 백발부모의 사이에 끼여있는 50, 60대. 백세시대 절반을 접고 보면 어느새 내 인생의 세대좌표 역시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중간 그 자리에 와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온전히 나 자신 뿐만이 아닌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어느 자식의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여야 하는지. 인간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이번 생은 처음이라, 자식으로 그리고 부모로 사는 것도 처음이라 정답이 무엇인지, 그 정답이란게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알쏭달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와 반성, 불안과 고민으로 골고루 어우러진 이런저런, 여차저차한 사연과 시비들 속에서 어렴풋이 그려지는 우리네 중년 그 삶의 모노그라프. 이제 더 늦기 전에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반백의 부모는 외국에서 일한지 어언 십수년, 일전 한푼이라도 아껴 쓰면서 힘든 세월을 버뎌낼 수 있었던 리유는 오로지 자식 하나 때문. 다행히 부모가 곁에 없어도 삐뚠 길 걷지 않고 좋은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잘난 아들, 그게 더 기특하고 장하고 미안해서 뼈 빠지는 줄 모르고 열심히 뒤바라지를 해왔다. 여기까지는 부모된 도리로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거라 치자. 문제는 대학졸업후에도 마법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류학, 결혼, 집장만, 손주 돌봄의 얽히고설킨 실타래… 빠듯한 월급에 매달려 살아가거나 경제력이 없는 부모들에게는 더더욱 답답하기만 한 이 상황들. 그야말로 밑 빠진 독, 도무지 헤여나올 구멍이 보이지 않는 기묘한 부모-자녀관계의 덫에 갇혀버린 요즘 우리 중년들의 모습이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그만큼 성인이 되고 출가한 뒤에는 아들보다 부담이 적고 부모에게 살갑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네 딸들은 얼마나 다를가. 온갖 정성을 다해서 잘 키웠다고 자부했더니 '신세대 녀성답게' 남자와 똑같이 신혼집, 자가용 비용을 반반해야겠다며 어려운 부모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딸. 시부모보다 더 편하다는 구실에 반찬부터 자녀양육에 이르기까지 살림살이 전체를 친정부모에게 떠맡기면서도 이러쿵저러쿵 여러모로 마땅치 않은 딸. "자기 부모라서 믿어서" 더 거침없이, 더 서슴없이 내뿜는 가시 박힌 폭언들… 그래서 요즘은 며느리보다 딸 시집살이가 더 힘들다고 하는가. 물론 공부 뿐만 아니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게 자란 자녀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자녀들을 둔 경우에도 사방천지로부터 소리 없이 죄여오는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 내지는 '부모다움'의 사슬. 형편이 모자라서 자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함이요, 형편이 되면서도 안해주는 건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라. 그래서 우리는 누가 머라 하지 않아도 제 풀에 찔려하고 분노하며 답답해한다. "키워주고 대학까지 보냈으면 됐지 어디까지 해줘야 해?", "우리 집 형편에서 더는 안 돼, 여기까지야", "이건 분명 좋지 않은 풍기야, 바꿔야 해!" 하면서들 말이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 못된 것일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립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이른바 ‘캉가루족’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면서 경기불황, 저임금, 고용불안과 취업난, 고물가 등 사회경제적 구조에 초점을 맞춘 담론들이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우리네 가족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걸가.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결혼=출산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였으며 특히 농경사회의 가족에 있어서 자식은 생산로동력, 로후 부양자로서의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 인식되여왔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에서는 년로한 부모님 앞에서 제 자식을 이뻐라 하는 티를 내도 불손한 것이였고 가장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는 다른 식구들이 음식을 먼저 짚어도 안될 정도로 철저한 위계질서가 지켜졌다. 자식들은 때가 되면 결혼하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기본 도리였다. 요즘도 농촌에 가보면 로인협회의 가입년령이 50세로 되여있듯이 불과 십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50세만 넘으면 로인취급을 받고 환갑을 넘기면 생산로동에서 완전히 손을 뗐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결혼은 더는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으로 되였으며 출산과 자녀의 수 역시 자체조절 가능한 가족계획으로 탈바꿈했다. 한 구들에 올망졸망 아이들이 부모님을 둘러싸고 오순도순 시끌벅적 살아가던 풍경은 이미 옛말이 된지 한참. 집안행사에 어린 아이 몇명 찾아보기 힘든 요즘 세월에 자식은 말 그대로 꼬마황제.  아이가 귀해진 만큼 이제 자식은 로동력이나 로후대비책이 아닌 정서적 애착과 애정의 대상으로서 그 가치를 재확립하게 된다. 아울러 부모는 학업은 물론이고 취업, 결혼, 손자녀의 출산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성인기를 훨씬 지난 자식의 모든 생애과정에 밀착관여함으로써 집값을 비롯한 물가의 폭등과 취업난 등 사회적 악재와 더불어 자녀세대의 실질적인 성인으로의 이행을 크게 지연시키고 있다. 덕분에 기약 없이 늘어진 우리네 중년기. 이제 50, 60대는 더 이상 대접받는 로인이 아닌 인생 제2라운드 육아전에 출전하는 주력선수들이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다. 오늘날 '공부 잘하는 자식=잘 자란 자식'이라는 등식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공부만 잘하면 뭐든지…","이번 시험을 잘 치면, 중점고중에 붙으면, 중점대학에 붙으면…". 자녀에 대한 모든 관심이 공부에 집중되고 성적의 높고 낮음이 곧 금전적인 대가로 직결되며 반대로 정신적 소양이나 인성•사회성 교육에는 아예 뒤전인 부모들이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네 정서상 가족사이 돈 얘기는 왠지 불편하다, "그까짓 돈이 뭐라고","돈이 먼저야? 자식이 먼저야?"… 자식을 위해서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희생하고 지원해야 '부모다운' 부모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의 담론들. 얼핏 들으면 나름 그럴 듯한 '부모다움'의 해석이고 척도인양 비춰지겠지만 그 리면에는 부모세대가 겪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와 경제적 부담 그리고 이제 닥쳐 올 로후준비의 어려움들이 한가득 감춰져있다는 것. 탈무드에 “물고기를 잡아주면 아이가 하루를 살 수 있지만, 그물 짜는 법을 알려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식을 무조건 감싸고 희생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켜가야 하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소중한 자식이기에 내 힘으로 일어서는 수고스러움과 즐거움을 알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떠나야 할 때 과감히 놓아주는 게 참사랑이 아닐가. 현명한 부모라면 자식에게 준 만큼 돌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자식이 부모와 동거하면서 로후를 돌볼 것을 기대하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 시설이나 친구들과의 공동양로 등 다양한 방식의 로후생활을 구상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중년세대에게는 또 년로한 부모님들이 계신다. 급격한 고령화로 크게 연장된 로후로 인해 아래우로 자식-부모-자식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세월이 길어졌다. '더블케어(Double Care)', '트리플케어(Triple Care)'라는 개념까지 출현하듯이 그나마 전통적인 가족관념을 어느 정도 소지한 마지막 세대로서 부모를 부양하고 자식과 손자녀까지 챙겨야 하는 요즘 50, 60대 중년들, 그네들의 등골이 휘여간다.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부모로 산다는 것은 두렵고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어디까지 해야 하며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다.   인민넷 조문판 
104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사이(허연화) 댓글:  조회:2046  추천:3  2019-01-31
디즈니 애니메이션 에서 주인공 엘사가 부른 'Let it Go'라는 노래는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번역되여 불리우고 있다. 일본에서는 'Let it Go'를 ‘ありのままで’ 즉 ‘있는 그대로’로 번역하여 부르고 있다. 사역동사로 된 문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전체 이야기의 리해에 편리한 뜻풀이로 후렴부분을 “ありのままの 姿見せるのよ、ありのままの 自分になるの…(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거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거야…”로 번역하였다. 나는 여기서 어느 영어가사의 번역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절묘한 일본식 뜻풀이가 마음에 와닿아서 ‘있는 그대로’란 말로 우리 조선족과 한국의 사이를 풀이해보고저 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 우리 조선족은 한국과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이 더 많다는것을 느낄 수 있다. 중국에 뿌리박은 력사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생존과 적응의 필수 결과로 남과 북이 없는 부분들이 많이 생겼다. 해외의 다른 조선민족에 비해 중국의 조선족이 우리글을 읽고 우리말을 하고 우리습관을 더 많이 유지해왔다 하지만 중국적인 것도 많이 접수하며 살아온 지역의 특징적인 중국조선족만의 변이를 거쳤다. 이것은 타향에 뿌리 잡은 모든 사람들의 필수 결과이기도 하다.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동포. 그래서 한국에서는 '재미교포', '재일교포', '중국동포'라 갈라부른다. 동포끼리도 많이 다르다. '미국동포'는 많은 부분에서 미국식 사고를 하고, '재일교포'는 일본식, '중국동포'는 중국식으로 편향하는 건 불가피한것이다. 우리가 흩어져 살면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츄럴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다르다는 것은 남이라는 것이고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같은 편’ 의식을 느끼는 집단에는 호의적이지만 ‘같은 편’이 아니라고 느끼는 집단에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즉 사람들은 ‘같은 편’이 아니라고 느끼면 그냥 ‘같지않구나’, ‘다르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입견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얻어들은 소문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정보를 눈앞에 접해도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또한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에 대해 공평하게 대할 것을 거부한다고 한다. 하기에 한국사람도 중국조선족도 다르다는 걸 싫어한다. 한국사람들이 우리가 ‘중국조선족’이라고 자칭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 또한 ‘중국조선족’이라는 호칭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같은 편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조선족도 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에 포함되는 것이 싫다.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특유의 사용제한성으로 ‘다문화가정’이라고 하면 ‘일반 한국가정’과 다르다는 것이 강조되기에 조선족은 다문화라고 불리우는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니기에 접수가 안되는 것이다. ‘우리’인지 ‘남’인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할가? 이 세상에는 자아와 타자를 구분함에 있어서 혈통, 력사, 조상, 국적, 언어, 습관, 외모, 가치관 등등 여러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립장에서 보면 조선족과 한국사람들은 엄연히 남이 아니라 우리일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다 조선사람들이고 백의동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혈통이 달라도 우리일 때가 있다. 요즘 일본의 탁구계에서 최연소 우수선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하리모토 토모카즈(張本智和) 선수는 본이 장씨인 중국 탁구선수출신의 부모를 둔 혈통이 중국이지만 국적이 일본인 사람이다. 국제경기가 펼쳐지면 일본대표로서 많은 일본국민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있다. 단일민족을 자칭하는 일본사회에서 ‘순수한’ 중국혈통을 가진 사람을 자기 나라 대표로 의식했다는 것이다.  국적을 기준으로 하는 사람들의 립장에서 보면 일본국적인 하리모토는 일본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습관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해도 일본에서 태여나서 자라고 일본의 교육을 받은 하리모토는 뭐라 해도 일본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사는 중국사람들은 하리모토가 국적은 일본이지만 실은 중국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중국계 출신의 탁구선수가 일본의 가장 최고선수라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중국사람들도 있다.  국적, 습관, 가치관을 기준으로 보면 조선족은 대부분 중국국적이고 중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았기에 습관과 가치관에서 한국의 것과 많이 다르기에 ‘남’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은 만나면 나이부터 묻고 아래우를 정돈하려 하는 한국식 인간관계방식도 유지하고 있고 우리말을 하고 김치와 된장을 먹는데 어찌 남이냐 하고 웨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머리가 막 복잡해질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질 정도로 답하기 어려운것이 정답이다. 한국친구들이 흔히 우리한테 이런 질문을 한다. “너는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하고 . 이 문제 자체가 제한성이 있는 것이다. 단일민족국가에서 자란 한국인과 일본인이 흔히 하는 질문이다. 미국, 카나다,중국 등 다민족국가에서 자란 사람들은 하지않는 질문이다. 이중, 다중 정체성이 당연한 사회와 그렇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의 차이인 것이다.  애초에 왜 반드시 ‘우리’와 ‘남’을 구분해야만 하는가?! 문제는 ‘같은가 다른가’가 아니다. 다르다는 리유로 사회적 배제를 당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 배제에는 로동시장, 교육, 건강, 사회복지, 법적 평등 등등으로부터의 배제가 있다. ‘남’이 두려운 것은 모르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하기에, 사회질서안정이 위협받을 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범죄와 사회적 배제의 상관성 연구에 따르면 범죄률은 사회적 배제를 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살고 있는 사회에 열애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야말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질성이 우리를 더 가깝게 한다면 이질성이 우리를 더 깊이 리해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두가지를 갈라 생각하지 말고 복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대가 지금의 글로벌시대가 아닌가 싶다. 인민넷 조문판
103    신시대 조선족 녀성의 성장에 관하여(김화선) 댓글:  조회:2205  추천:0  2018-12-27
2018년은 우리 나라 개혁개방 40주년을 맞는 해라 각계에서는 지난 40년간의 발전성과를 총화짓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예측하는 많은 담론을 쏟아냈다. 정부에서는 지난 12월 18일, 개혁개방 40주년 경축대회를 열어 개혁개방선봉자 100명을 표창했다. 그중 11명의 녀선봉자들은 자신의 전문성으로 인정받은 직업녀성의 대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 40년 이래 중국 조선족녀성들도 대거 공적 령역에 진출하여 개혁개방 시대의 참여자, 증인 및 수혜자로 되였다. 개혁개방 초기, 도시의 조선족 기혼 녀성들에게 직장일과 가사일의 평형을 유지해가야 하는 당위성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고 녀성의 직업발전을 억제한다는 연구보고들이 나온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많은 조선족 녀성들이 직장일을 통한 경제적 소득을 갈망하고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면서 녀성들이 직장일과 가사일의 평형을 잘 유지해간다는 신화가 깨지는 많은 사례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992년, 중한 수교를 계기로 지난 20여년간 수십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기혼 녀성들이 전통적인 주요활동공간이였던 가족 공간을 떠나 대도시나 외국에 이주취업을 떠나자 이들 녀성들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많은 조선족 기혼 녀성들은 외지에서 아기나 로인, 환자를 돌보는 돌봄로동 령역에 취업하여 관련 전문기술이나 지식을 쌓고 경제적 소득을 창출하면서 전문직으로서의 돌봄로동에 관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였다. 특히 기존의 가족내에서 무보수로 행해졌던 주부의 가사로동에 대한 가치절하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면서 가족내에 돌봄수요가 있을 때 녀성개인과 가족성원, 시장인력 사이에서 어떻게 평형을 잡아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제이주취업을 경험한 조선족 녀성집단이 생산해내는 돌봄로동에 대한 다양한 담론은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12월 23일,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제1대 회장 장명숙, 제2대 회장 박매화, 제3대회장 리경자) 설립 30주년 경축대회가 심양에서 거행되였다. 1988년 3월에 설립된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는 중국 조선족 녀성사회단체중 가장 일찍 설립된 단체이다. 340명에 달하는 협회 회원들은 심양시 공무원, 교사, 기업가, 전문직 등 진취심 있는 직장녀성들로 구성되였다. 대회에서는 30년간 사랑과 열성으로 협회를 위해 봉사해 온 장명숙, 강옥금, 김동화, 김정자, 리운애, 장신옥 6명의 원로회원에게 ‘평생회원상’을 수여했다. 또한 심양시조선족련의회,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 심양시조선족부녀협회가 《료녕신문》과 함께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녀성’ 9명을 표창했다.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상은 정춘자, 최봉순, ‘가장 아름다운 시어머니’상은 리련호, ‘가장 아름다운 며느리’상은 김춘화, 강화, 정경자, 라분선, ‘가장 아름다운 딸’상은 리미자, 류춘화 등이 수상했다. 이들 9명의 아름다운 녀성들은 질병이나 나이듦, 혹은 민족차이 등에 의해 힘들어야 했던 가족관계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일생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긍정에너지를 전달하며 가족성원에 대한 돌봄로동을 장기적으로 수행해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사실 중국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녀성단체에서 스스로 우수하고 훌륭한 녀성을 발굴하여 표창한 력사는 1997년에 시작되였다. 제1회 중국조선족 장한 녀성, 훌륭한 어머니 표창대회가 1997년12월 20일에 심양시에서 처음 열렸고 1999년1월에 연길시에서 제2회, 2001년 9월에 장춘시에서 제3회, 2003년 8월에 연길시에서 제4회 장한 녀성, 장한 어머니, 장한 안해 표창대회를 했었다. 그때 심양시조선족녀성협회, 장춘시조선족녀성협회,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등 동북지역의 조선족녀성단체가 합동으로 주최했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조선족가족에도 고령화, 질병과 사고 등 각종 원인으로 고령 로인에 대한 돌봄로동, 장애인에 대한 돌봄로동의 수요가 더 많아지고 있으며 치렬하게 직장일을 하는 자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손자녀 돌봄로동을 책임져야 하는 조부모들의 돌봄기간도 줄어들지는 않는 모습이다. 아직까지도 녀성이 가족내 돌봄로동의 주요 책임자로 당연시되는 성별역할문화가 사그러지지 않고 있다. 사회가 진보하면서 정부에서는 공공정책 제정을 통해 돌봄로동에 대한 남성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사회복지를 강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공업화, 정보화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시대에는 많은 중복성을 띤 체력로동, 정신로동이 대체될 가능성이 많지만 녀성들의 애심, 돌봄, 상상력, 창조력, 소통능력 등 면에서의 창조력, 리더십과 특장은 전례없이 강화될 것이며 미래는 녀성 개개인의 자신의 잠재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개혁개방 40년간 조선족 녀성들의 잠재력은 아직 진정으로 활짝 발산되지 못했다. 수많은 조선족녀성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에 참여하여 자아가치를 창조하려는 내적 동력을 품고 있으며 세상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조선족 기혼 녀성들은 자신의 학습과 성장을 완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기 위해 쉼없는 노력과 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조선족 녀성들의 몸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 성장을 이끌 거대한 잠재력을 잉태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우리 사회도 녀성들의 몸에 내재해있는 생기발랄한 힘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족관계 속에서 조선족남성들은 사회적 진보에 따라서 녀성을 존중하고 량성평등을 추구하는 언어와 태도, 실천을 일상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인민넷조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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