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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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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일본에서 사는게 걱정되는가?!(허연화) 댓글:  조회:1791  추천:0  2017-08-08
일본에서 공부하고 가정을 이루고 이젠 중년이 되여가는데도 고향의 부모님들은 전화할때마다 필자의 타향살이를 걱정하시군 한다.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가도 걱정되는것이 부모마음인가부다.   주로 두가지를 걱정하신다. 하나는 빈번히 일어나는 지진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사람이라서, 외국사람이라서 차별을 받지는 않는가 하는 걱정이시다.   우선 지진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일본은 확실히 지진대국이다. 면적이 세계의 0.25%도 안되는 땅떵어리에서 세계의 20%의 지진이 일어나고있다. 그것은 일본이 북미/필리핀해/대평양/유라시아 4개의 플레이트(板块)가 부딪치는 곳에 위치해있어 지반이 불안정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지진대국인 동시에 지진대책대국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일어나는 지진들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났으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났을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건물에는 일정한 내진(耐震)기준이 요구되여있기에 80% 이상의 건물들이 내진/면진(免震)대책이 마련되여있다. 건물을 지을 때 테플론제, 고무, 액체충전식으로 기초를 만듦으로써 흔들림의 충격을 감소하거나 흡수하는 작용을 한다.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대지진때 무너진 집들의 92%는 지진의 흔들림에 의해서가 아니라 쓰나미(海啸)에 의하여 밀려간것이다.    2011년의 경험으로부터 봤을 때 지진도 무섭지만 쓰나미 또한 지진 못지 않게 무서운것이다. 그럼 쓰나미에 의한 피해는 어떤 대책이 마련되여있을가? 일본의 도꾜는 세계에서 자연피해리스크가 가장 높은 도시중의 하나로서 근래에 수도권지진이 일어날것이라고 전문가는 예측하고있다. 쓰나미 그리고 큰 홍수피해를 감수하기 위하여 도꾜교외의 지하 50메터에 거대한 수로가 만들어져있다. 이것은 세계최대급 지하하천인 동시에 거대한 홍수조절탕크로서의 기능을 하고있다.   일본의 교통시설에도 지진대책이 되여있다. 2011년 지진이 일어나던 당시 일본렬도에서는 27대의 신깐센(新幹線)이 달리고있었다. 지진이 일어나던 그 순간 지진센서네트워크에 의해 지진조기의 미동을 검출한덕에 긴급브레이크가 작동함으로써 신깐센에서는 사망자는커녕 상처입은 사람 하나도 없었다.   일본에서 살다보면 텔레비죤이나 핸드폰에 지진속보 및 재해경보가 뜰 때가 많다. 요즘은 핸드폰에 알람형식으로 경보가 울릴 때가 있어서 필자도 한번 크게 깜짝 놀란적이 있다. 이처럼 일본은 지진 등 자연재해가 오기전에 작동하는 조기경보시스템 또한 매우 발달되여있다. 조기의 미동을 검출함으로써 지진이 오기전에 가스를 잠그고 몸을 피하는 시간을 벌수가 있기에 자연재해에 있어서 조기경보시스템은 매우 중요하다.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대지진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12개나라의 23만명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인적피해가 확대된 리유의 하나가 조기경보시스템이 없었기때문이라고 전문가는 지적했다. 국제사회의 협력하에 인도네시아 기상청에는 지진경보센터가 만들어지고 2011년10월에 운영이 시작되였다.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자연재해에 대한 준비자세가 되여있지 않으면 피해는 계속 존재한다. 이면에서 일본은 국가로부터 일반국민에 이르기까지 자연재해에 대한 의식자체가 다르다. 자연재해의 시달림을 받아온 력사가 긴 만큼 자연재해에 대한 준비자세가 다른것이다. 국가에서는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비용을 투자하여 준비해두는것”을 방향으로 하고있다. 가정에서는 피난시의 긴급물품을 일상적으로 준비해두고있으며 , 개인적으로는 유치원때부터 쭉 학교다니면서 피난훈련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있다.    우의 내용이 조금이나마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들의 걱정을 덜어드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세계가 이상기후에 시달리고 여기저기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고있는 현시점에서 어디에서 살든 리스크는 동반된다. 중국에서도 지진과 홍수로 인한 인명사고가 전례없이 늘어나고있는 이 시점에 일본의 재해대책의 많은 경험들이 류용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 이번엔 일본의 일상생활속에서 외국사람이라서, 중국사람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는 않는가 하는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실 일본에 금방 왔을 때 필자도 어딘가는 같은 생각을 했었다. 텔레비죤을 켜면 뉴스라는것이 거의 매일 중국인범죄자와 북조선의 위험에 대한 얘기이기에 뉴스자체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학교에서도, 알바하는 일터에서도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일본어소통능력이 많이 늘어나고 공부도 알바도 능숙해짐에 따라 많은 좋은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바하는 곳에서 가장 무서웠던 일본할머니가 일한지 1년되던 겨울에 손수 떠준 장갑, 길을 잃어 헤맬 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던 처음 본 일본아저씨, 무작정 연구실에 찾아간 중국류학생을 웃음으로 맞이해주시던 일본교수님, 참 마음이 따뜻해지던 순간들이였다.    아직도 사람을 속박하는 무형의 압박감이 있는 일본이라는 사회에 대해 숨막힘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보다듬어주는것 또한 자주 지나다니는 일본의 정서있는 골목길이며 캠퍼스의 여기저기이며 좋아하는 일본의 지인들과의 차 한잔이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들한테 전화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하나하나 꺼낸다.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어주고싶은 마음에서도. 하지만 중일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부모님은 다시 걱정을 하시면서 “밖에서 다닐 때 조심하거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럴 때면 “일본에선 아무일도 없이 잠잠하오니 걱정마세요”하고 안심을 시켜보지만 부모님은 믿지 않는 기색이다. 그러면 일본인의 국민성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얘기한다.    1980년후반기 중국에서 해외출국의 문이 일반국민한테도 열리게 되고 이에 맞춰 조선족들의 대규모적인 일본입국이 시작된지도 어언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중국“고학생”의 하나였던 조선족류학생들도 이젠 일본의 회사에 취직하고 가정을 이루고 둥지를 틀고 충실하고 멋지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정착이 되고 사람들이 모이니 이젠 크고 작은 조선족특유의 이벤트도 많이 진행되고있다.   올해 7월에는 일본의 조선족단체가 연변라지오TV방송국과 손잡고 “우리 노래 대잔치 일본편”으로 카라오케이경선이 동경에서 진행되였다.   또한 지난 8월6일에는 일본에 있는 16개의 조선족관련단체들이 힘을 합치고 2000명이 참가한 큰 조선족운동대회도 동경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간사이(오사카, 교토, 고베지역 등) 팀도 배구팀을 구성하여 원정참가하였다. 운동대회에는 조선족들뿐만아니라 한족, 재일교포, 한국인, 일본인 등 여러 문화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게임을 구경하고 우리민족음식을 즐겼다. 운동대회의 진행스탭들은 빌린 일본교포학교마당의 청소까지 깔끔히 완성하고 운동대회의 막을 내렸다.    필자가 사회학수업에서 일본학생들한테 교재로 쓰고있는, 마이노리티(사회적소수자)를 리해하는데 좋은 ”My Name Is Khan “이라는 인도영화속의 인상깊은 메시지로 마지막을 마무리짓고싶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나라의 차이, 문화의 차이, 종교의 차이가 뭣이 중하랴!”.   어디든 다 사람 사는 곳이다. 인민넷
61    우리네 결혼이야기: 어제 그리고 오늘(리화) 댓글:  조회:1669  추천:7  2017-08-02
1910년생 김씨 할머니(1992년 사망)는 열네살 애된 나이에 열아홉 리씨 할아버지와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의 자그마한 리씨 종족부락에서 소박한 중매혼인을 했다. 2남5녀 일곱 자식에 22명의 손주들을 슬하에 두고 할아버지가 여든둘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옹근 63년간 부부의 연을 이어가셨던 두분, 맏이와 막내의 터울이 무려 24살이였던 탓으로 일곱 자녀의 결혼은 1947년도에 막을 올리기 시작하여 1980년도에 이르러서야 드디여 그 엔딩을 고하게 되였고 그 사이 조카들이 이모, 고모, 삼촌보다 먼저 혹은 비슷한 시기에 결혼식을 올린적도 여러번 있었다.    할머니의 장남은 1969년 스물아홉에 고중 동창이였던 안해와 연길시 태양향 광흥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년년생 남매를 보았다. 1995년 스물다섯, 1999년 스물여덟에 각자 대학 동창남편, 오다가다 첫눈에 반한 안해와 연길시에서 련애결혼한 남매는 스물두 살짜리 아들과, 열네 살짜리 딸을 두고있다.   열네살에 벌써 결혼생활을 시작하셨던 증조할머니와 아직 부모 눈에는 철부지 애기일뿐인 열네살 증손녀, 늦어도 서른전에는 "치워버릴수" 있었던 자식들과 마흔이 되도록 결혼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손주들, 청일색 우리 민족으로부터 이제 한족은 기본이요, 만족, 회족, 장족, 그리고 한국, 일본 등 그 성분이 엄청 알록달록해진 "다국적•다민족 사위, 며느리 대오", "리혼하면 동네망신이요, 인생의 실패"인고로 "일부종사"만이 진리라는 신념을 굳게 지켜오셨던 할머니와 리혼과 재혼으로 과감히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혼인을 정리하고 다시 그 조각 맞추기에 도전하는 손주세대의 "사랑과 자아 찾기", 할머니가 평생 고수하셨던 혼인한 녀자의 상징 쪽머리, 그 딸과 며느리들의 새각시파마 그리고 처녀인지 각시인지 구분이 어려워진 손녀딸, 손자며느리들의 머리차림새, "딸 가진 죄인"으로부터 "아들 가진 죄인"으로 역변해버린 결혼시장판도, 집안에서 술판을 벌이면서 며칠이고 이어졌던 잔치를 고작 두, 세시간내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마무리하는 례식장혼례. 한두마디로 명쾌한 정리가 어렵지만 대충 짚어낼수 있는 리씨가족 4대에 걸친 결혼변천사 어제와 오늘의 주요 포인트라 할수 있겠다.   1924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근 100년간 이어진 리씨가족의 결혼이야기,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민초들의 자잘한 삶의 한자락, 단지 그 정도로만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함과 친근함은 분명 우리의 몸과 기억의 구석구석 스며들고 배여진 우리에 의한, 우리네만의 백년짜리 결혼이야기의 축소판이기도 한 리유때문이리라.   인류학에서의 대표적인 정의로 이른바 결혼(혼인)이란 "한명 혹은 여러명의 남성과 한명 혹은 여러명의 녀성의 결합. 즉 사회가 지속적인 성접촉의 권리를 부여하고 인정한 남녀사이의 관계"로 설명된다(William A․ Haviland). 여기에서 남성, 녀성은 생물학적인 성별(sex)일수도 있고 사회적성별(gender)의 가능성도 포함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결혼이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에 따라 각자 다양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지극히 사적인 령역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결혼이 실은 부동한 문화의 틀 속에서 나름대로의 도덕성, 륜리성과 정체성을 성찰, 확인하고 실천해나가는 규범 내지는 제도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는것이다. 단 문화의 특성상 전통의 지속은 정도 부동한 변화를 수반하면서 비로소 가능하며 이는 한 문화요소의 존재양상이 곧 전통의 지속과 변화의 력동적인 경합 혹은 그 결과를 의미한다는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속에서 규범 또는 제도의 재정립이 이루어진다고 볼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동안 부계적 출계규범을 바탕으로 동성동본불혼의 근친상간 금제(incest taboo)를 엄격히 지켜왔다. 이는 지금도 성씨와 본이 동일하면 근친결혼이라 하여 기피하고 특히 본이 하나뿐인 성씨일 경우에는 통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사실로부터도 알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고집해왔던 민족내혼의 전통은 개혁개방 이후 국내 대도시 및 해외로의 활발한 인구이동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여 우리네 통혼권은 기존의 민족내혼 및 국내 타민족과의 통혼 그리고 국제결혼이라는 세갈래의 방향으로 넓혀가게 되였다.    일정 년령에 도달하면 당연히 결혼해야 하고 결혼을 생애과정의 필수적인 통과의례로 여겼던 전통관념 역시 만혼, 비혼에 의해 색바래지기 시작했다. 얼핏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미혼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띤다. 이제 더는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되여버린 결혼, "언제 결혼해?","왜 결혼 안해?" 라는 걱정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결혼적령기의 폭이 넓어졌고 비혼에 대한 사회적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결혼식의 전주의례로서의 말떼기, 사돈보기는 통합, 간략화의 변용을 보이고있다. 결혼의 하이라이트라 할수 있는 결혼식은 1989년 연길시 성흥혼례청사의 개업을 시작으로 가정집으로부터 상업성 례식장으로 그 무대를 옮겼으며 전안례, 후례가 소실되고 신랑신부 혹은 신부와 부친의 동반입장, 드레스 착용, 부케 던지기와 등 서양식 혼례 및 액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폭죽 터뜨리고 혼례날자의 선정, 증여교환의 장에서 중국어발음의 행운과 복을 의미하는 수자들을 선호하며 결혼증서를 선독하는 등 한족식 혼례의 여러 절차와 요소가 추가되는 등 변용의 모습들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가족의 탄생과 신혼부부의 사회적 신분전환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통과의례로서의 문화적의미는 그대로 혹은 형태를 바꿔가면서 이어지고있다. 이를테면 교배례와 합근례, 큰상받기 등 부부의 결합을 상징하는 문화요소들이 례식장 결혼식을 통해 적절하게 재구성되고있으며 다산과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닭이나 달걀, 대추 등 음식들이 나란히 큰상에 오른다.    그런가 하면 련애기간 내의 이벤트는 물론 약혼, 혼례의 전반 과정에서 남성이 주도하고 그 소비를 책임지는 정형화된 젠더역할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이른바 전통의식과 시대적 변용의 아이러니한 공존이 뚜렷하게 안겨온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결혼이 곧 녀성의 친정에서 시댁으로의 귀속변경이라 생각하며 시댁에서는 반드시 며느리를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농후하다. 즉 녀성들의 공적령역에서의 활약상과 달리 가정생활에서는 여전히 남성이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결혼상대로서 바람직한 남성상 역시 사회적지위나 경제적상황 등 여러 면에서 모두 녀성보다 우월할것을 기대하며 웨딩촬영과 신혼여행, 혼례비용, 신혼집과 인테리어, 함에 넣는 고가의 장식품과 의류, 현금 등 결혼을 상징하는 일련의 물질적 표상중 절대 대부분을 남자집에서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성과 사랑을 기초로 하는 현대결혼은 정서적친밀성을 특징으로 하고있지만 "돌아누우면 남"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중심을 이루는 두사람의 관계가 생각보다 많이 섬세하고 취약하다는게 함정이다. 1990년대 이후의 조선족사회 최대 사안의 하나가 바로 급증하는 리혼률과 그에 수반하는 자녀교육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였으며 이는 곧 민족공동체의 위기론으로 이어졌다. 물론 기존의 연구들에서 강조하는바와 같이 경제적리익 추구의 인구이동이 리혼의 급증을 유발한 요인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구조적변화와 더불어 녀성의 경제능력 제고, 개인의 정체성 및 개인주의가치관의 침투, 도덕적제약의 완화, 전통적 가족규범의 약화 등 보다 넓은 분석의 틀에서 조선족사회의 리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또한 증가하는 리혼률에 비례하듯이 재혼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며 결혼이 이제 더는 "일생에 한번뿐"이 아닌것으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재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이 많이 거두어졌다. 그런가 하면 언제부터인가 황혼재혼 역시 우리네 결혼이야기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초혼에 비해 복잡한 관계성 그리고 젊은 층의 재혼이 마주하게 되는 자녀문제와 황혼재혼에서 부딪치는 재산분규, 돌봄문제 등 재혼가족들이 풀어나가야 하는 어려움 역시 만만치 않은게 현실이다.   우리는 결혼을 통하여 가족이라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질긴 인연의 끈을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만들어내며 귀속된 사회집단 전체의 존속과 위상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따라서 날로 늘어나는 만혼, 비혼과 리혼, 재혼 등으로 인한 여러가지 문제와 위기에 대처하는 지혜와 해결책의 탐색은 향후 조선족사회가 지속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며 그 고민의 깊이만큼 깊어진 우리네 결혼이야기가 세세대대 오래도록 이어져갈 것임을 감히 기대해보는바이다. 인민넷 2017-7-31
60    '공공외교'와 조선족(리상우) 댓글:  조회:1566  추천:0  2017-07-19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들어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초로 강제, 위협과 제재를 내용과 수단으로 하는 “하드파워(硬实力/硬权力)”의 사용이 제한 받으면서 설득과 유인을 앞세우는 “소프트파워(软实力/软权力)”의 중요성이 증대되였다. 이에 힘입어 하드파워를 사용하는 전통적외교와 달리, 문화•가치•인적자원과 같은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외교 상대국의 정부 및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의 리익을 실현하거나 이미지를 제고하는 등 외교적목표를 달성하는 “공공외교”가 각국에서 각광을 받고있다.    물론 “공공외교”의 정의에 대해서는 론자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수 있지만, 필자가 보건대 다양한 개념정의를 관통하고있는 핵심키워드는 타국 대중과의 “소통”, “공감대 확산”, “신뢰 확보”와 자국의 “국가이미지와 국가브랜드 제고”, “소프트파워 증진” 등이라 할수 있다. 또한 공공외교의 주체와 대상이 정부만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를 포괄하고있고, 관계 류형이 수평적, 쌍방향적 교류 및 대화라는 점에서 공공외교의 주체중에서 재외동포의 역할이 주목된다. 이는 재외동포가 사실상 외교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고, 본국에 대한 거주국의 여론과 인식을 변화시키고 국가이미지와 국가브랜드를 선양하며 네트워크를 보유한 중요한 자원과 력량이기때문이다. 200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였던 오바마의 “한미관계의 기본은 200만명이 넘는 한국계 미국시민과 한국에 사는 10만 미국 시민이다”라는 언급이나 2013년 당시 국무원 교무판공실 부주임엿던 하아비(何亚非)의 “화교화인은 세계가 중국의 목소리를 듣고, 중국을 리해하는 중요한 창구가 될것”이라는 평가는 상술한 맥락에서 리해될수 있다.   중국 지도부는 “공공외교”와 “공공외교”에 있어서의 재외동포의 역할에 주목해왔다. 2009년 7월 제11회 주외사절회의(驻外使节会议)에서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였던 호금도는 공공외교를 실행해야 함을 지도부 차원에서 최초로 강조했고, 2011년 전국교무사업회의(全国侨务工作会议)에서 당시 국무위원이였던 대병국(戴秉国)은 “교무공공외교(侨务公共外交)”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다. 또한 2013년 9월 국가주석 습근평의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중에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의 전략적구상이 잇달아 발표되고 “상호련계(互联互通)”가 “일대일로(一带一路)”의 취지로 확정되면서, “공공외교의 전개”, “인문교류의 강화”와 “민심상통(民心相通)”이 “일대일로”전략의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잡았고, “일대일로”전략과 공공외교정책 추진에 있어서 재외동포-화교화인의 역할이 강조되였다. 최근 중국학계에서 공공외교와 화교화인의 역할을 련계시킨 많은 연구들이 쏟아져나오는것도 이러한 정부의 정책방침과 무관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공공외교와 화교화인의 역할을 련계시킨 기존의 론의들은 대개 중국의 대동남아 국가 공공외교에 있어서의 화교화인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는 해외 화교화인 인구중 절대 다수가 동남아국가에 분포되였기때문인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기존의 론의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은 중국과 한국의 공공외교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역할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하고싶다.   현재 찾아볼수 있는 관련 론의의 경우, 한국의 공공외교와 조선족을 련계시킨 학술론문 두편과 연구보고서 몇편 정도가 전부이다. 이러한 론의들에서는 “통일공공외교”의 관점에서 조선반도 통일을 위한 조선족의 역할을 다루고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필자도 공감하고있으나 1970년대에 동서 진영간 데탕트(긴장완화)가 진전되고 경제문제를 둘러싼 마찰과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국제정치의 주요 관심사가 군사와 안보 등의 문제를 다루는 하이폴리틱스(high politics)에서 경제, 사회, 문화, 환경, 지식, 정보 등의 문제를 다루는 로폴리틱스(low politics) 령역으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공공외교” 관련 론의에 비추어볼 때, “조선반도 통일”의제외에도 중한 량국의 공공외교와 조선족을 련계시킨 더욱 풍성한 론의들을 이끌어낼수 있을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의 립장에서 조선족은 재외동포(재중동포), 중국의 립장에서 재한 조선족은 “신화교” 범주에 속하기때문이며, 조선족은 공공외교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인 “소통”의 매개체역할의 적임자이기때문이기도 하다.    1992년 중한 수교이후 중한 량국 정부는 량국 전략적협력동반자관계에 내실을 기한다는 의미에서 2013년 6월 정상회담을 통해 력사, 문화와 같은 소프트한 자원을 운용하는 협력의제를 발굴하고 이에 기초해 다양한 형태의 인문교류를 통해 “인문뉴대(人文纽带)”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필자가 보건대 중국의 대한국 공공외교 또는 “교무공공외교” 추진에 있어서, “인문뉴대”사업의 강화와 함께 13만명의 한국 국적자를 포함한 78만명에 달하는 재한조선족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시킨다면 중국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인식 변화, 긍정적인 중국 국가이미지의 구축에 일조할것으로 보인다. 인민넷
59    중국조선족의 근대성을 상상한다(5)--박우 댓글:  조회:1550  추천:0  2017-07-12
현미경, 천체망원경 등의 도구와 수많은 방법을 통한 실험이 의학, 천문학, 물리학의 과학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추상의 령역이 시각화됨으로써 증명가능한 령역이 되고, 그 증명의 방법에 기초하여 보편적법칙을 찾아내는(또는 리론화 및 개념화)것이 어쩌면 자연과학의 과학화내용의 한 부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후 이러한 증명, 즉 실증의 방법들이 인간 행위의 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면서 일명 사회과학이 정립되기 시작합니다. 인간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의 제반 령역에 “과학”이라는 어미가 붙어 연구의 배경, 목적, 대상, 사례, 자료, 방법, 틀, 내용, 결과, 함의, 한계 등 일련의 통제된 과정을 통해 사회과학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학적방법으로 사람들은 다양한 시각으로 인간행위를 “리해”하기 시작합니다. “인간행위는 이래야만 한다”가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이렇게 볼수도 있구나”의 문제로 리해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사회의 상은 이해의 차원으로 옮겨졌고 인간의 사회에 대한 리해는 다양한 상에 대한 리해로 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과학적방법과 보편적법칙의 틀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존에 대한 고정적인식(또는 라해)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고를 하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이러한 사고전환의 한 측면이 “전통”과 “현대(근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데서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력사흐름속에서 한 집단의 리념, 생활양식, 경제활동양상 등이 근원적으로 새롭게 구조화되었다고 보여질(리해될) 때, 추상적으로 전자를 “전통”, 후자를 “현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전통과 현대는 변화한 상을 표현하고 리해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고안한 해석적용어인 셈입니다. 전통과 현대는 물질, 사상, 구조, 담론 등의 추상적요소로 구성될수 있고, 이 요소들을 언어화해줄수 있습니다. 언어화의 도구중 하나가 바로 우에서 말한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사회는 어떻게 리해되였을가요? 이 리해의 언어는 무엇일가요? 제가 보기에 우리가 지금 중국조선족에 대해 “말”을 함에 그 인식적토대는 조선족 개인의 생활의 경험과 지식엘리트에 의해 문자화된 조선족의 삶과 사유의 양상인듯 합니다. 개인의 생활경험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이것이 “말”이 되고 담론이 되기 해서는 문자화된 기록과 그 기록에 대한 여러가지 방식의 해석, 그리고 이 해석에 대한 무한반복과 재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학문적으로 이 기록을 문학과 력사학으로 볼수 있습니다. 중국조선족사회의 지식엘리트집단에는 방대하고 거룩한 문학가들이 있습니다. 조선족사회를 “리해”하는 “말”은 이 문학가들에 의해 주도된 측면이 있습니다. 문학작품들은 조선어문교과서부터 책, 잡지, 드라마, 영화 등으로 콘텐츠화되여 많은 대중들이 눈으로 보고 머리로 해석하게 했습니다. 한 인구집단의 문화적상이 “실상”이든 “허상”이든 문학의 역할은 바로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이 인구집단의 문화적상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하고 리해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국조선족사회를 리해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였지요. 문학의 외연은 지속적으로 시공간적 확장을 경험합니다. 과거 신경 쓰지도 않았던 사람이 문학가로서 새롭게 발굴되고 조명받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있는 지리정치적공간이 아니여도 충분히 그 가치가 인정되면 문학가라는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문학은 조선족사회를 리해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된것 같습니다. 즉 문학으로써 “조선족학”은 어쩌면 그 얼개가 나름 분명합니다. 중국조선족사회를 “리해”하는 “말”은 력사학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중국조선족사회에는 기라성같은 사학자들이 있습니다. 과학의 령역에서 수학이 기초학문이라면 인문학의 령역에서 력사학이 기초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족지식엘리트중 사학자들이 많은 덕분에 우리 사회의 인식적토대는 굉장히 튼튼한 기록적기초에 립각할수 있었습니다. 조선족 이민(주)사, 항일운동 분야의 연구들은 력사학 그 자체로서 조선족사회의 상을 “리해”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문학과의 호혜적인 학문관계속에서 새로운 내용으로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현재 력사연구는 굉장히 미시적인 령역까지 스며들어 특정한 시기 조선족사회의 한 측면에 대해 아주 깊이있는 리해를 도와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력사학은 조선족사회를 리해하는 또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된것 같습니다. 즉 력사학으로써 “조선족학”이 그것입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저는 “발전”이라는 방법과 시각에서 조선족사회를 리해하기 위해 많은 문학, 력사학 문헌을 읽었습니다. 또한 이런 문헌에 기초하여 조선족사회에 대해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머리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중국조선족사회의 “발전의 상”을 한편의 대하드라마로 만들 때, 기존의 “리해”의 인문학적기록들은 어떤 역할을 할수 있을가? 제가 받은 느낌은 기존의 문헌들은 조선족을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치지 않고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한 인구집단으로 설정하거나, 농경사회에서 왜곡된 산업사회를 부분적(또는 제한적)으로 거치고 후기 산업사회로 진입한 인구집단으로 설정하는 역설을 만든게 아닌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공업적요소 등이 건드리기 부담스럽기때문에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족공동체의 발전상은 산업사회에 대한 “리해”와 “말” 그리고 “해석”이 없이는 구성될수 없고, 구성된다 하더라도 극히 파편적일수밖에 없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공업)사회로의 진입은 인류사의 하나의 보편적인 흐름이였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이 흐름에서 증발된게 아니였습니다. 이 흐름속에는 조선족 개개인의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공헌이 고스란히 담겨져있고, 일상속에서 열심히 일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단지 이 부분을 “리해”하게 하고 “말”하게 하는 도구(방법)와 이들의 생활을 “해석”하는 시도(보편적법칙)의 고안이 없었을뿐입니다. 분명 조선족들은 이 과정에 행위 실체로 기능하였을것입니다. 우리의 인문학은 너무 우리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한 나머지 우리 사회의 보편성을 “리해”고 “말”하고 “해석”하는것을 간과한듯 합니다. 극히 지엽적인 산업사회의 상을 보겠습니다. 저의 고향에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공장이 많았습니다. 이런 공장들은 시민의 일상생활의 물질을 생산했습니다. 물론 개인사업자가 운영하는 소규모 점포도 있지만, 일상생활의 많은것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대량생산이라는 산업화를 통해 개인들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전통적물질중 상당수는 공장제를 통해 생명이 연장되고 효능이 증대되었습니다. 공장을 통해 가정생활에 들어간것에는 식장, 단수, 바가지, 가마솥, 세수대야 등 생활을 구성하는 물질의 거의 전부가 해당합니다. 이런 전통적물질은 민속적인 “고유한” 령역이 아니라, 디자이너에 의해 재단되고 설계되여 생산되였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전통적물질의 산업화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공장제를 중심으로 한 산업화는 우리 사회의 굉장히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지요. 발전의 상에 대한 “리해”와 “말”, “해석”은 사회과학적인 시각을 필요로 합니다. 보편적언어로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의 연속과 단절을 설명하고, 조선족사회 발전의 양상을 보편적세계 흐름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조선족사회를 통해 세계사회에 대한 지적함의를 끌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조선족사회에 대한 리해의 과학화, 즉 사회과학연구는 기존의 “전통”과 “현대”를 새롭게 해석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시도는 우리의 문화를 100년 전의 농업생산(수단)과 유교적가치관의 재현을 통해 콘텐츠화하는 문화적 빈곤상태에서 벗어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과정은 우리 미래에 대한 상을 기업가정신, 계약, 합리성 등을 통해 상상하게 할수도 있습니다. 중국조선족 근대성의 상상은 바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복원, 그 삶속에서 보편적법칙 발견, 나아가 이 법칙을 통해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일것이라고 리해되는 함의를 도출하는것입니다. 조선족 근대성의 상상은 인식적패러다임의 전환입니다. 이 전환은 어쩌면 사회과학으로써 “조선족학”에 기초할지도 모릅니다. 인민넷 2017-7-10
58    조선족의 도시 진출과 미래(최학송) 댓글:  조회:1621  추천:0  2017-07-04
조선족은 과경민족이다. 조선족은 흔히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사이 조선반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후손들을 가리키고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3성에서 집거생활을 하는 농경민족이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의 이런 거주환경과 종사업종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족들도 하나, 둘 농토를 떠나고 동북을 떠나 연해도시나 해외에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개척해나가고있다. 이제 조선족은 동북에 주로 거주하는 농경민족이라는 말로 설명할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있다.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 도시화의 흐름을 타고 전반 중국 사회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조선족의 변화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리유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로 요약해볼수 있다. 첫째는 높은 교육열때문이라 할수 있겠다. 초기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크게 자연재해, 일제의 허위선전 등 리유에 의한 생계형 이주민과 조선의 독립과 광복을 위한 투쟁형 이주민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이런 투쟁형 이주민들은 어느 정도의 문화 수준을 갖고있었으며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는 방도의 하나로 “교육”을 내세웠으며 본인이 직접 선생으로 나섰다. 생계형 이주민도 힘든 자신의 오늘을 돌아보며 그 탈출의 방도로 “교육”을 주목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을 학교에 보냈다. 이런 리유로 이주민들이 어느 정도 모여 사는 곳에는 꼭 근대식 학교가 들어섰으며 글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이주민의 삶을 소재로 한 많은 문학작품에는 꼭 이처럼 이주민 동네에 학교를 세우려는 유지인사들과 이에 적극 호응하는 이주민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고 있는 조선족마을에는 꼭 조선족학교가 세워져있었다. 연변을 돌아본 하경지가 쓴 시에서는 조선족마을의 특점으로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마을마다 학교”를 하나 더 추가해도 될것 같다. 교육에 대한 이런 열정과 중시가 있었기에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대학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국내외의 대도시에 진출하여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있는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조선족 젊은이들은 비록 대학이라는 경로르ㄹ 통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튼실한 기초교육을 바탕으로 여러 도시들에서 각자의 빛을 발하고있다. 비록 요즈음 조선족 인구의 감소에 따라 조선족 기초교육이 많이 위축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타민족에 비하여서는 상대적인 우세를 갖고있다. 올해 길림성 대학입시 문과 장원이 조선족학교에서 나온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은 할수 없는것이다. 둘째는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조선족들의 강렬한 욕망과 개척정신을 들수 있겠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살던 동북을 “룡이 나온 곳(龙兴之地)”이라고 하여 아무도 살지 못하게 하며 누구든 동북에 잠입하면 살인죄로 다스렸다. 하지만 19세기 말엽 이후, 련속되는 자연재해와 일제의 폭압을 피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도강죄”라는 살인죄를 무릅쓰고라도 두만강을 건너 동북으로 넘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에서 갖은 곤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냈다. “동북의 수전농사는 조선인들이 개척한것”이라는 말속에는 초기 이주민의 피눈물이 그대로 스며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게 한것이 바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과 개척정신이라고 본다. 중국 이주 초기로부터 몸에 배인 이런 정신은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중한수교 이후 또 한번 그 빛을 발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의 길을 걸었다. 조선족들의 내면에 숨겨진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남먼저 포착하게 하였으며 남다른 개척정신은 또 조선족들로 하여금 그 흐름의 선두에 서게 하였다. 20세기 초반에 “도강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넜다면 20세기 후반 조선족들은 “밀입국”이라는 모험을 감행하며 황해를 다시 건넜다. 그리고 국내외의 도시들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의 대림, 북경의 왕징, 청도의 청양, 오늘은 가슴뿌듯이 이름 부르는 이런 매 하나의 새로운 조선족집거지는 참으로 많은 꿈과 땀방울과 눈물과 이야기들이 뒤엉켜 이루어진것이라고 할수 있다. 셋째는 한중 두 나라의 발전 격차와 그 리용을 들수 있겠다. 1992년의 중한수교는 조선족에게 절호의 발전 기회를 제공했다. 조선족은 중한 두 나라의 교류와 발전을 위하여 공헌하는 동시에 그 사이에 자신을 키워왔다. 이주민족으로, 농경민족으로 자신이 다루고있는 땅이 거의 유일한 믿천이였던 조선족에게 있어 한국은 산업화, 도시화의 흐름에 합류하는 가장 큰 밑천이였다. 오늘날 국내외 도시의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과 관련되는 업무 혹은 분야에 있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우리가 지난 20여년간 의지하고 활용해오던 한중 두 나라의 발전격차가 갈수록 줄어들고있다는것이다. 아직도 일부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의 발전 추세로 보아서는 그 차이가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증이 없다.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주변의 타민족과 거의 동일한 선에서 산업화, 도시화라는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는 경쟁을 하게 되였다. 하루빨리 우리의 새로운 경쟁력을 발굴하고 키워가는것이 필요하다. 조선족으로 놓고 보면 우리 세대는 처음으로 산업화, 도시화를 맞이하는 세대이다. 그러다보니 도시적 삶의 경험이 빈약할수밖에 없다. 농촌을 배경으로 집거생활을 하는 농경사회로부터 도시를 배경으로 산거(散居) 생활을 하는 산업화, 전자화 사회로 무대가 바뀌였다. 농촌을 배경으로 축적된 력사와 문화, 그리고 단일민족 집거생활을 토대로 형성된 사유와 의식으로 다양성을 대표적성격으로 하는 도시에서 살아가다보니 적응이 쉽지 않으며 가끔 문제들도 나타나는것 같다. 도시에서 살아가는것까지는 괜찮으나 도시에 융합되기 어려운것은 바로 이때문인것 같다. 한 도시에 진정 융합되었을 때 우리는 이 도시의 주류사회에 진입할수 있고 나아가 이 도시의 주인이 되였다고 할수 있다. 도시적삶에 대한 적응은 도시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문제이겠지만 조선족같은 경우는 연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수자로 살아가고있다. 때문에 자신의 실정에 적합한 도시적삶의 방식과 문화를 창출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족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과 문화도 필요하겠지만 각자가 생활하는 지역과 도시의 특성에 적합한 방식과 문화를 만들어가는것이 좋겠다. 이것이야말로 “실사구시”가 아닌가싶다. 인민넷 2017-7-3
57    윤동주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최유학) 댓글:  조회:1441  추천:3  2017-06-28
올해는 윤동주시인 탄생 100주년이다. 모두 함께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인 윤동주시인을 기리고 아울러 윤동주시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량심적인 시인과 지식인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1. 윤동주시인은 누구인가?   윤동주(尹東柱)(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감옥에서 28세로 생을 마감한 불운의 시인으로, 어두운 현실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현실을 진정으로 가슴 아프게 고민하던 량심적이고 순결한 령혼을 지닌 저항시인이였다. 그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애족적시인이다. 다만 윤동주는 총칼을 잡고 일제와의 전투에 직접 뛰여들거나 붓을 총으로 삼아 일제를 규탄하는 행동실천형이 아니라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어둠의 현실을 분석하는 내향적인 자기성찰형의시인이다. 즉 그는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이였다. 윤동주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안고 산 시인으로 부끄러움과 죄의식이 그의 시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피지배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응전태세를 갖추지 못한데 대해 부끄러움에 빠져 괴로워하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룡정시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에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공부하다가 1932년에 룡정에 있는 은진중학에 입학하였다. 은진중학교 재학시절에 그는 교내 문예지 편집팀과 학교축구팀의 맴버로 활동하였다. 1935년 9월에 은진중학교 4학년 첫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에 진학하여 3학년 하학기에 편입하였다.    숭실중학교가 이른바 신사참배거부문제로 하여 페교되자 윤동주는 1936년 봄에 다시룡정으로 돌아와 5년제인 광명중학 4학년에 편입되였다. 1938년 2월에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앞으로 의학을 전공하라는 아버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해 4월에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연세대전신) 문과에 입학하였다. 일제의 억압통치가 더욱 심했던 서울에서 윤동주는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재난과 민족적수모를 더욱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였다. 이와 같은 참담한 현실은 일제에 대한 그의 반항의 정신과 더불어 자기 민족과 나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격발시켰다. 1942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칠 때 졸업기념으로 자기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묶어 출판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것이라고 예상한데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것이라는 우려와 출판비부족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2년 4월, 그는 진학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처음에는 도꾜의 립교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그해(1942년) 10월에는 교또(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학과로 옮기였다. 그러나 당시 전시동원체제하의 일본사회에서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조선인으로서 그는 심각한 오뇌와 고통에 휩싸일수 밖에 없었다. 그의 민족적울분과 고독감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는 일제식민정책에 저항하는 길로 나가게 되였다. 당시 그 어떤 반항도 허락하지 않는 일본사회에서 그는 사상범혐의로 1943년 7월 19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그 이듬해(1944년) 3월 31일에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실형을 언도받고 일본 후꾸오까형무소로 이감되여 모진 옥고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고 생체실험대상자로 분류되여 성분을 알수 없는 주사를 자주 맞았으며 1945년 2월 16일 그가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새 아침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해부용으로 사용하려고 구주제대 의학부에서 방부제를 사용하여 그의 시신은 생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였는데 후에 화장되여 한줌의 재가 되여 고향 룡정에 묻혔다. 그가 쓴 많은 글들도 일제에 의하여 압수당하여 지금까지 그 구체적행방을 알지 못하고있다.   2. 윤동주시비 건립의 현황 및 전망   올해(2017년)는 우리 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탄생 백주년이다. 아마도 조선반도의 남북뿐아니라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있을것이며 시비건립이 여러군데서 추진되고있을것이다. 즉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와 시비건립은 현재형이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와 그의 시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많은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류공동의 재부이다   2016년의 모 기사에 따르면 일본의 시민단체 “후꾸오까에 윤동주시비를 설치하는 모임(이하 모임)”이 후꾸오까 모모치니시(百道西)공원에 시비건립을 타진했지만 2015년 관할 지자체로부터 윤동주가 후꾸오까에서 유명하지 않고, 후꾸오까시에 공헌한 인물도 아니라는 판단 아래 “불허”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윤시인이 숨을 거둔 후꾸오까(福岡)형무소터와 가까운 모모치니시공원은 매년 윤동주추도식이 열리고있다고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꼭 이 공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후꾸오까에 윤동주시인의 시비건립은 시간문제일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윤동주시비가 이미 일본에 건립되여있기때문이며 윤동주시비를 마다할 리유가 별로 성립되지 않다고 생각되기때문이다.   또 다른 2016년의 모 기사에 의하면 연변조선족차지주 룡정시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에 윤동주의 동지사대학교 동문이라고 할수 있고 윤동주의 초판 유고시집 출판에 기여했던 한국의 시인 정지용의 시비를 건립하는 협의가 진행되고 정지용시비건립이 추진되고있다고 한다. 윤동주생가의 정지용시비건립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진전이 당분간 늦어질수는 있지만 필자는 그 건립도 시간문제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지용시인의 시비를 윤동주생가에 건립하는것은 윤동주를 기리는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 일인것이다. 정지용시인은 윤동주가 본보기로 삼는 시인중의 한사람으로 생전 윤동주은 정지용의 시집에 “걸작”이라는 글씨를 남기기도 하였다. 윤동주가 사망한후 해방뒤 1947년에 《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가 발표될 때 정지용이 소개문을 썼고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될 때는 정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본적이 없이!’라는 내용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현재까지 설립된 대표적인 윤동주시비가 세워진 상황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는 1968년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고, 1992년 8월 24일 중한 수교에 힘입어 1992년 9월 23일 윤동주의 모교인 룡정중학교 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그후 1995년 2월 16일 윤동주의 순국일에 윤동주시인을 추모하여 윤동의 모교인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특이한것은 윤동주와 정지용의 남다른 인연으로 정지용의 시비가 2005년 12월 18일에 모교인 동지사대 윤동주시비옆에 나란히 세워진것이다.   윤동주시인과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놓이게 된것은 두 시인의 남다른 인연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시인이 문학공부를 할 때 정지용을 본보기로 삼은것만은 분명하다. 《정지용시집》이 간행된것은 1935년 10월이였는데 윤동주는 이 시집을 평양에서 1936년 3월에 구입해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고 “압천”이라는 시작품밑에 “걸작”이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두 시인이 직접 만났는지는 밝혀진바 없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후에 정지용이 이전에 수학했던 동지사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만 일본에서 체포되여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며 우에서 언급했듯이 광복후에 윤동주의 유고가 정지용에 의해 《경향신문》에 소개되기에 이르고 1948년 시집발간때 정지용이 서문을 쓰기까지 한다. 문단에서 이 두 시인이 맺은 인연은 실로 보기드문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암울한 시기에 량심과 지조를 지켜온 윤동주의 저항정신은 후세들에 의해 길이 기억되여야 하며 윤동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지용도 길이 기억되여야 한다. 앞으로 생가에 나란히 선 두 시인의 시비를 룡정에서 볼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우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윤동주시비는 그가 나서 자라고 뼈가 묻힌 고향 룡정에 있는 모교라고 할수 있는 룡정중학, 한국 서울에 있는 모교인 연세대, 일본 교또에 있는 모교인 동지사대에 모두 세워져있다. 그밖에 룡정중학의 교사(校史)전시실에는 동주전시물이 전시되여있고 룡정의 생가가 복구되여 윤동주기념전시물들이 전시되여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국문인협회, 연세대 등에서, 중국에서는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인 《연변문학》잡지사 등에서 모두 각각 윤동주문학상이 제정, 운영되고있다. 아쉬운점은 윤동주를 소개하는 인터넷상 소개글들에 오류가 많다는점이다. 현재 중국의 한어인터넷상의 오류를 례로 든다면 윤동주의 본명이 윤해환(尹海煥)이 아닌 윤해파(尹海波)로 잘못 소개가 되여있다. 이런 오류를 범한 웹사이트들로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운영하고있는 중국작가망도 포함되여있다.   3. 윤동주와 함께 기억되여야 할 사람들    앞에서 언급한 정지용외에 윤동주와 함께 기억되여야 할 사람들이 또 있다. 바로 송몽규와 강처중이라는 인물이다. 윤동주의 일대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 “동주”(2016)를 보면 그속에도 송몽규와 강처중이란 인물이 나오지만 실제로 이 두 인물은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준 친구들이였다. 윤동주 생애의 가장 절친한 친구를 꼽는다면 바로 사촌형이자 친구, 동지로서의 송몽규를 꼽을수 있으며 그리고 절친한 친구를 또 한명을 더 찾으라면 강처중이란 친구가 있다. 윤동주의 저항정신은 송몽규와 강처중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사한 윤동주는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명이 한방을 썼다. “윤동주는 흡사 송몽규와 강처중의 은행 같았다. 그들은 돈이고 물건이고 필요한것이 있으면 동주를 찾아와 손을 벌렸다”고 한 정병욱의 증언은 그들 셋의 남다른 우정을 립증해주고있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이자 고종사촌형인 송몽규는 저항정신과 독립운동성향이 강한 애국청년이였다. 송몽교의 부친 송창희선생과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선생은 명동소학교를 교회로부터 분리해내여 사회주의성격의 “인민학교”로 만드는데 동조한 사람이며 송몽규는 “인민학교로의 접수”를 위해 그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상대로 연설까지 하고 돌아다닐 지경으로 적극적이였다고 한다. 후에 송몽규는 1935년에 김구계렬의 독립운동단체인 락양군관학교에 가서 독립운동에 관한 교육을 받은적도 있었다. 송몽규는 아마 그때로부터 일제의 요시찰인물로 되였을것이다.   장석주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가 일본에서 체포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귀향준비를 서두르던 윤동주의 귀향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윤동주가 사상범으로 교또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된것이다. 그때 송몽규도 함께 잡혀들어갔는데, 이들의 죄명은 “사상불온•독립운동•비일본신민•서구사상농후” 등이다. 1943년 한국 학생대표가 한국독립의 의지를 밝히려고 중국의 장개석과과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에게 가던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일제는 똑똑하다는 한국학생들을 잡아들였는데, 그때 윤동주와 송몽규도 체포된것으로 보인다.    윤동주에게 두번째로 절친한 친구가 바로 강처중이다. 강처중을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중에서 제2위에 놓는 원인은 강처중이 윤동주의 유품을 보관하고 윤동주의 시집출간을 실제적으로 주도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윤동주가 일본류학을 가서도 조선에 있는 강처중과 편지련락을 끊이지 않고 사상적으로 교류를 해나갔다는 사실에 의해서다. 강처중이 “안전”을 위하여 윤동주의 편지 부분은 페기하고 시만 남겨놓았다는 사실은 그 편지내용에 “극비요소”와 “위험요소”가 들어있지 않았을가 라는 추측도 낳게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강처중은 좌익운동가로6.25를 전후하여 한국에서 처형당한 사람이며 그가 세상에 남겨놓은 단 두편의 짧은글은 리순신과 윤동주를 기리는것이라는점이였다.   일제에 압수된 작품외에 윤동주의 작품들은 친구 정병욱, 강처중과 친인들에 의해 보존되여오다가 1948년에 강처중의 주도로 유고시집출간이 이루어졌으며 정지용의 ”서문”, 강처중의 “발문”과 함께 출간되엿다. 그 전인 1947년에 강처중은 당시 《경향신문》기자로서,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무명의 시인 윤동주의 저항시를 《경향신문》지면을 통해서 세상 전면으로 띄워올렸다. 이때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었던 정지용도함께 역할을 했던것이다. 책출판도 이 두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는데 정지용은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것이다.   이 서문에서 우리는 정지용이 윤동주와 매국적(賣國賊)인 “부일인사”들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고있으며 윤동주의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일제시대부일문사들의 역겨운 글과 대조를 하면서 윤동주의 자기성찰의 방법 그대로 민족의 문단을 성찰하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강처중은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間道에서 나고 日本福岡에서 죽었다. 異域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祖國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중략)…”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殞命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朝鮮獨立萬歲를 부르는듯 느껴지더군요.”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 갔던 그의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러나 그후 윤동주의 시집 판본에서 좌익운동가였던 강처중이 쓴 발문은 시대상황에따라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없어졌으며 사람들 기억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있었다. 강처중이 보관해낸 윤동주의 시고들이 윤동주의 개인사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와 비중을 송우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윤동주가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겨두었던 물품들까지 모두 챙겨서 보관했다가 해방된 뒤에 서울에 온 시인의 동생 윤일주에게 전했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품중에서, 중학교시절까지의 시와 동시와 습작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품 거의 전부가 강처중에 의해 세상에 남았다. 더구나, 윤동주가 동경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속에 적어넣었던 5편의 시를 보관해낸 일로 해서 그가 윤동주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특히 높이 칭송받을만하다. 강처중이 아니였더라면, 윤동주가 목숨을 빼앗긴 땅 일본에서 쓴 시는 단 한편도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을것이기때문이다.”   강처중이 보관했던 윤동주의 육필시고들중에는 ”팔복“, ”참회록“, ”간“ 등 시와 일본에서 쓴 시 5편 ”쉽게 씌여진 시”,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봄”이 있다.   * 이 글에는 예전에 썼던 글중의 일부도 들어있음을 특히 밝혀둔다. 인민넷 2017-6-26  
56    "일대일로"시대를 열어가면서(예동근) 댓글:  조회:1697  추천:1  2017-06-21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중국과 서양을 련결해왔던 모든 교역로를 통칭하여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외의 해상과 륙상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도시를 선택하라면 꼭 꼽히는 두 도시가 있다. 하나는 말카라해협의 동방의 사업 중심지로 부상하였던 말라카이다. 다른 하나는 동서문명 교류의 장인 사마르칸트이다. 이 두 지역의 중심에는 모두 이슬람문명이 자리잡고있었고, 그 당시 세계의 경제, 문화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였으며 동서문화 만남의 지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동방에서는 중국이 창조한 4대문명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구로 전파되였다. 특히 종이의 전파는 인류문화의 보편적인 확산에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8-13세기 이슬람의 황금시대라는 것은 종이의 황금시대이기도 하였다. 15세기의 유럽은 종이를 이교도의 물건이라고 천시하였기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소수의 성직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다싶이 하였고 양피지에 쓰여있는 성경책이 거의 유일한것이였지만 중세유럽의 문화발달은 종이를 만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이처럼 국가, 지역, 문명의 몰락은 개방과 페쇄에 의해 부단히 교체되면서 발전하였다. 보편적으로 보면 페쇄적인 문화는 새로운 대안으로 될수 없다. 개방된 시스템을 갖고있다고 하여 꼭 영속적으로 발전하는것이 아니라는것도 밝혀져있지만, 개방과 교류는 문명발전의 중요한 동력인것은 사실인것 같다.   고대 중국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시발점이고 추진주체였는데 왜 새로운 문명시스템을 만들지 못하였을가? 당나라때 륙상실크로드를 개척하고 번성을 이루었고 명나라때 해상실크로드를 통하여 거대한 업적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왜 결국 페쇄의 문명경로를 리탈하지 못하였을가?   오늘날, 우리 나라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중국의 고대경험, 무슬림문명과 유럽문명에서 어떤 경험들을 섭취해야 하는가? 우선 유럽의 작지만 강대한 국가 네덜란드의 력사경험을 살펴보자.   17-18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산업은 발뜨해 무역과 련결되여있었다. 당시 서유럽 국가의 선박은 발뜨해의 관문인 외레준드(Oresund)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그후에 해상패권국가로 등장하였지만 처음에는 그 국력이 단마르크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 이 해협을 장악하고있던 단마르크에 선박통행료를 내야 했다. 그런데 당시 통행료 산정방식이 매우 특이했다. 선박의 중량이 아닌 갑판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은것이였다. 즉 갑판이 좁을수록 통행료를 적게 낼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런 불리한 도전에 두손을 들고 투항한것이 아니라 부단히 새로운 방법을 찾고 혁신을 통하여 강대한 해상무역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대량무역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통행료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만드는 대신 시설 대부분을 선체 아래에 집중시킨 플류트(Fluit)선(뚱보화물선)을 제작하는것을 계기로 조선업과 해상운송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였다. 그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수백척의 화물선을 제조할수 있었고 선박금융, 무역금융을 활용하여 세계의 무역을 련결시키는 무역시스탬을 구축할수 있었다.   대표적인것이 바로 네덜란드가 만든 동인도회사 VOC이다. 네덜란드의 VOC는 근대 주식회사의 시초가 되였으며, 처음으로 증권거래소와 근대은행을 탄생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네덜란드는 작은 국가이지만 기술혁신, 경영혁신, 시스템혁신을 통하여 세계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할수 있었다. 당시 영국은 네덜란드보다 앞서 동인도회사를 만들었지만 국가간섭이 많은 영국식 시스템은 네덜란드보다 한수 아래라고 볼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만든 동인도회사 VOC는 동방무역회사들의 상업자본을 하나로 모아 거대자본을 형성한 결과이며, 네덜란드 상인들과 국가의 리익이 결합하여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강력한 확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기능을 종합적으로 갖추게 되였다. VOC가 만들어질 당시 자본금은 약 650만길더로 영국 동인도회사 자본금의 10배가 넘는 금액이였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상업패권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시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이 네덜란드 상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발뜨해협을 통과하는 네덜란드선박이 영국선박의 13배에 달했으며, 발뜨해 국가들의 곡물과 목재 운송의 4분의 3, 스웨리예 철수출의 절반을 네덜란드선박이 도맡았다.   이같은 해상운송의 발달로 당시 유럽의 부유한 가정에서는 중국산 도자기에 담긴 인도산 사탕을 손님에게 대접하였고, 북아메리카산 담배를 피우며 뻬루산 은잔에 독일산 포도주를 따라 마실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느린 세계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볼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나라의 “일대일로”는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균형있게 추진하고있고, 이 무역로드를 장기화하고 실현시킬수 있는 금융시스템 AIIB기금을 구축하였으며, 또한 맞춤형 실크로드기금을 만들어 적재적소에 투자하고있다. 또 네덜란드처럼 국가가 판을 깔고 상인들이 춤을 추게 하는 국가-시장의 결합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있다.   서구의 성공적인 경험도 중요하지만, 중국력사의 시각에서 실크로드경험에 대하여 성찰하는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나라의 륙상실크로드와 명나라의 해상실크로드에 대하여 성찰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현재의 현실에 대하여서도 랭철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   력사적으로 볼 때 대당제국은 력사상 가장 개방적이였고, 다양한 문명과 문화를 가장 활발하게 흡수하면서 다양화,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서유기》에서 현장법사는 인도로 가서 대장경을 가져와서 한어로 번역함으로써 중국문화의 질을 한층 높였으며, 중국문화의 발전에 신선한 혈액을 넣어 부단히 발전할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놓았다. 세계의 종교, 인종, 국적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고, 대담하게 세계와 교류를 한것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나라로 볼 때, 영락제시기에 정화함대가 일곱차례나 세계를 돌고 왔다. 일본의 미야자키 마쓰카스는 정화의 원정이 세계사적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의 “제1차 대항해”와 서양인의 “제3차 대항해”사이를 잇는 “제2차 대항해”라고 극찬한다. 정화의 원정은 1405년 7월 11일 시작되여 1407년에 끝난 제1차 항해를 시작해 그가 죽을 때까지 항해한 1433년까지 28년 동안의 대항해는 그 규모와 신대륙의 발견 차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선단의 보선 크기는 길이가 150메터, 선폭이 60메터, 아홉개의 돛대를 지난 약 3,000톤 배수량을 지닌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모함을 중심으로 대형함선 100여척, 소선 200여척 등 317척으로 무려 27,800여명이 탑승하였다.   영락제는 몽골과 서역 등 북방 초원을 다섯차례나 직접 원정을 다니면서 륙상실크로드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게빈 멘지스의 연구에 따르면, “정화는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서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을 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다녀오게 되였다. 이는 콜롬부스의 대항해보다 70년 앞섰고, 다이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에돌아갔으며,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해협을 통과했고, 쿡선장보다 300년 먼저 오스트랄리아를 탐사했다.” 지리상의 대발견과 규모로 볼 때 류례없는 대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영락제가 죽고, 정화가 죽자 명나라는 해양대국의 꿈을 접고 페쇄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영락제가 조카의 황제자리를 찬위하여 세계 각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대항해를 시작하였다는 설, 국내 무역의 자급자족으로 대규모 함대의 운영과 보양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필요성이 떨어졌다는 설 등 다양한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것들을 잠시 간과하고 오로지 정화라는 이 인물에 대하여 볼 때 흥미로운 점이 있다.   정화는 본명이 마화이다. 명나라가 당시 운남의 곤양성을 정벌할 때 명나라 장군은 영특하게 생긴 소년인 마화를 죽이기 아까워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들어 궁으로 보냈다. 후에 마화는 영락제가 보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워서 환관중 두번째로 높은 내관태감의 직위에 올랐고 “정”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종이발명가 채륜을 이어서 중국의 유명한 3대 환관으로 기록되여있다.   이처럼 력사에 출현한 우연한 사람이 정화가 아니라면 명나라의 해양대항행은 존재하였을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대표적인 륙상, 해상 실크로도의 사례에서 소수민족의 역할과 공헌이 여실히 반영되여있다.   오늘날, “일대일로”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대장정이 시작되였다. 앞으로 다양한 문명과 공존하면서 호혜할수 있는 새로운 무역시스탬, 문명시스탬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성공을 기원하면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배경의 인재를 등용하여 더 멋진 중국문화가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인민넷 2017-6-19
55    문화의 힘을 말하다(안성호) 댓글:  조회:1381  추천:0  2017-06-12
지구촌 시대, 다양한 문화가 활발히 교류하면서 전례 없는 문화발전의 호황기를 맞이하고있다.고립된 문화의 섬은 차츰 미약하여지고 보다 활성화된 다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문화의 공생, 공존을 기초로 하는 초문화가 화두로 되고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계상의 약소민족 문화들은 주류문화의 강대한 공세하에 동화와 소실의 위기에 처하여있다. 기타 문화와 공생, 공존하면서 자체의 문화를 보존, 발전시킴에 있어서 전제로 되는것은 자문화를 전승하여가는 문화의 힘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어떻게 힘을 발휘할수 있을가?    세계 4대문명은 인류가 가장 일찍 창조한 위대한 문명들이다. 5천여년전에 탄생한 4대문명 가운데서 이라크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이집트의 파라오마을에서조차 파라오의 명맥을 찾을수가 없게 되였으며 아랍어가 이집트의 통용어가 되였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13세기경에 이미 인도지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중국에서 다시 전해져갔으며 오늘날 그렇다 할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있다. 하지만 중국을 위수로 하는 동아시아지역에서 녀와(女娲)신화를 비롯하여 공자, 맹자 등 선인들의 남겨놓은 신화, 명언들이 어린이를 포함하여 사람들속에서 광범위하게 전해지고있다.   약소민족인 유태인은 2000여년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오면서 갖은 박해를 받았다.하지만 유태인들은 민족문화를 전승하여오면서 동화되지 않은 우수한 본보기로 되고있다. 유태인의 문화전승에 있어서 유태교의 역할은 널리 알려져있다.즉 문화의 전승에 있어서 종교와 결합된 유태문화의 힘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고대문명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발전된 리유는 무엇일가? 흔히 고대 전쟁이 문명의 전승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기타 3대문명의 소실도 고대의 대규모적인 전쟁과 이로 인한 파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중국 또한 늘 외래 민족으로부터 오는 전쟁피해를 받아왔다. 일찍 주(周)나라시대부터 주변 민족의 군사적공격이 있었고 한나라는 늘 흉노의 공격을 받아왔다. 5대10국시기 북방의 정권은 유목민족들에 의해 장악되였다. 원, 청 시대는 소수민족에 의한 통치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만큼 중국의 고대문명도 전쟁 등의 영향을 심하게 받아왔음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하문명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대문명을 오늘날까지 전승하여오고있다. 여기에서 문명에 대하여 생산방식 등 여러가지로 분석할수 있지만 가장 주된 부분으로서 문화와 같은 의미에서 분석하여볼수 있다. 약소민족가운데서 문화전승의 본보기로 되고있는 유태인들은 송원시대까지 락양에서 유태인거리를 조성하고 민족문화를 전승하고있었지만 오늘날 락양 유태인거리에서 유태인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중국에서 활발한 무역을 진행하면서 집거지를 형성하였던 아랍인들은 중국에서 정착하면서 점차 종족화(宗族化), 현지화 과정을 거쳐 회족으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이러한 현상들에서 우리는 중국문화가 지니고있는 커다란 힘을 발견할수 있다. 중국 문화는 종족(种族)이나 혈통주의에서 기인한것이 아니라 문화와 도덕을 중시하고있다. 일찍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제하(诸夏)가 주변 민족의 례의를 쓰면 주변 민족(夷狄)이 되고 주변 민족이 제하의 례의를 쓰면 제하가 된다(诸夏用夷礼则夷之,夷狄用诸夏则诸夏之)”는 리념이 인정되였다. 유가, 도가 사상을 대표로 하는, 제자백가사상을 기초로 하는 중국문화는 중화례의로 개괄되였으며 이를 중화와 주변 민족을 구분하는 표준으로 간주하였다. 즉 중화문화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표준으로 정함으로 하여 중화문화를 수용하는 주변 민족들은 자아로 인정, 수용하고 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혈통과 종족에 구애되지 않은 방대한 문화공동체를 형성할수 있었다. 청나라 시기, 조선과 일본이 소중화라고 일컬을수 있었던것도 이러한 문화를 전승, 수용함으로 하여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공동체를 전승, 발전시킴에 있어서 한자는 중요한 매개작용을 하였다. 언어, 풍속이 다른 다양한 주변 민족들을 자아로 포용함에 있어서 한자는 문화의 전승과 교류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매체였다. 한자를 통한 문화 전승과 발전은 글로벌시대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고있다. 영어 외래어가 세계적인 범위에서 범람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어권에서 모든 외래 문화는 한자를 통한 중국화가 진행된 다음에야 류통이 가능한것이다. 자아문화의 발전과 타문화와의 공생, 공존에 한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것이다.    중화문화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특성을 지니고있음으로 하여 주변 기타 민족과의 교류, 주변 기타 민족 문화의 흡수와 융합을 촉진하였다. 오늘날 국학으로 각광을 받고있는 전통적인 경전을 문화의 핵심으로 유지함과 동시에 주변지역의 문화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현지화함으로써 문화의 내포를 보다 풍부화하고 발전시켜나갈수 있었던것이다. 여추우(余秋雨)는 중국문화의 발전은 전통적인 농경문화만으로는 부족한바 북위시대 선비족의 한족화 정책을 통한 유목민족기질의 흡수가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즉 유목민족의 기질을 흡수함으로 하여 농경문화의 내면적이고 보수적인 부분을 극복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문화로 탈바꿈할수 있었던것이다. 봉건시대의 전성기였던 당나라시대는 이러한 융합과 교류의 대표적인 시대였는바 호(胡)의 특색이 가장 농후하였던 시대이기도 하다.   중화례의로 대표되는 문화적핵심의 존재와 포용력, 타문화에 대한 흡수, 융합은 중화문화가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게 하였다. 이러한 문화의 힘으로 인하여 몇천년동안 주변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충격과 정치적지배에도 불구하고 발전하여왔을뿐만아니라 주변 민족에게 막대한 문화적영향력을 과시하여왔다.    조선족문화는 전에 지적하였듯이 타문화에 대한 강한 흡수, 융합 능력을 지니고있다. 이로 인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글로벌이동에 대한 강한 적응능력을 지니고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교적 강한 문화의 힘을 확인할수 있다. 다만 필자는 조선족문화에는 일부 핵심적요소가 다소 결여되여있다고 본다. 이는 앞으로 민족지성인들이 고민하고 발굴, 보완하여야 할 사항들이기도 하다. 인민넷 
54    중국 부동산시장의 새로운 정책과 그 영향(리천국) 댓글:  조회:1551  추천:3  2017-06-07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와글로벌전략연구원 리천국   주택은 대다수 주택을 마련하지 않은 직장인들의 관심사이다. 특히 북경과 같은 대도시의 주택가격의 추세는 항상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떤 경제관련 화제라도 부동산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주택마련은 민생과 직결된 문제로 중요한 연구과제라는 뜻이다. 부동산시장의 거대한 자금은 금융시장과 련결되여있어 개개인뿐만아니라 국가차원에서의 경제안정과 지속적인 발전과 밀접히 관련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정부도 여태까지 수많은 부동산 규제정책을 제정하면서 부동산가격투기 방지에 나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제성장속도가 빠른 발전도상의 국가로서 부동산시장에 대한 통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재부가 빠르게 축적되면서 투자상품과 투자상품을 거래할수 있는 건전한 자본시장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의 방대한 여유자본이 수시로 투자나 투기의 기회를 노리고있어 국가의 금융시장의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시장의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고있기에 올해 두 회의에서 정부는 다시한번 “주택은 입주하기 위한것이지 투기하기 위한것이 아니다”라는 부동산시장조정에 대한 정책적 취지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정책적목표를 안고 2017년 3월부터 북경의 여러 부문은 부동산시장에 대하여 10여가지의 새로운 법규를 련이어 발표하였다. 이번 부동산정책을 살펴보면 북경 사상 가장 엄격한 부동산규제정책으로 불리울 정도로 북경시정부가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부동산 신정책의 내용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과거주택구매회수와 과거 주택 대출에 대한 규정이다. 과거에 주택이 있었지만 현재 이미 판매하였어도 2주택구매자로 분류되고 전국범위에서 한번이라도 주택담보대출을 하였던 기록이 있으면 여전히 2주택구매자로 분류된다. 2주택구매자로 분류된 주택구매자는 새로운 부동산정책에 의하여 은행주택담보대출시 60-80%의 높은 계약금을 지불하여야 하여 과거보다 수십만원부터 수백만원 되는 계약금을 추가 지불해야 된다.    류의할 점은 이번 부동산정책은 1주택구매자한테 큰 정책적제약을 두지 않았다는것이다. 1주택구매자는 일반적으로 부동산투기행위와 거리가 멀고 대다수 주택에 대한 실제 수요를 반영하기때문에 규제의 대상에서 제외된것이다. 따라서 1주택구매자는 예전과 같은 주택담보대출정책을 누릴수 있게 된다. 반면에 부동산을 자산투자로 리용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은 이번 정책에 의하여 큰 자금면의 제약을 받게 되고 이는 부동산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부동산시장의 거품을 빼내는데 유리하게 된다.   북경시의 신부동산정책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는데 이미 성도, 하문, 중산 등 10여개의 도시에서 북경시의 부동산정책을 따라 이와 비슷한 부동산규제정책을 내놓고있다. 물론 도시들마다 부동산시장의 특징이 서로 다르고 해결해야 할 과제도 다르기에 부동산조정정책의 강도가 모두 같은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부터 보면 북경, 상해, 광주, 심수 등 모든 1선도시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제한정책을 실시하고있고 성도, 중경, 소주, 하문 등 도시의 부동산규제정책은 부분적으로 제한하고있다는 특징을 띠고있다.    이번 부동산정책의 내용으로부터 보아낼수 있듯이 정부는 주택구매자의 분류에 따라 분명히 다른 규제정책을 실시하고있고 또 주택담보대출면에서도 은행과 기타 부문과 함께 협력하여 레버리지률을 통제하는데 중점을 두고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효과적이라고 평가할수 있다.   이번 부동산정책을 통하여 북경이나 천진과 같은 도시의 주택가격은 큰 영향을 받게 되며 부동산시장은 점차 안정기에 들어설것으로 보아진다. 실제로 조사에 따르면 북경의 일부 부동산중계업체는300여개 지점의 문을 닫을 계획이라고 한다. 왜냐면 3월에 북경의 새로운 부동산규제정책이 시행된 이래 신규주택이나 기존주택(二手房)의 거래수는 현저하게 감소하고있고 신규주택가격의 상승세가 크게 둔화되고있으며 특히 기존주택가격은 심지어 하락하고있기때문이다. 앞으로 부동산세와 토지정책, 지방세수정책 등면에서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면 부동산가격의 전환점은 멀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민넷 2017-6-5  
53    뿌리깊은 나무 댓글:  조회:1846  추천:0  2017-05-22
요즘은 "우리말 하기, 우리말 배우기, 우리말 지키기" 붐이 일어나기라도 한것 같다. 여기저기서 우리말을 배우고 지키자는 글들이 속출하고 또 전국각지 대도시들에서 ‘정음우리말학교’가 세워지고있다는 반가운 소식들이 전해오고있다. 새세대들에게서 점점 잊혀져가는 우리말을 되살려보려는 노력에 박수 한번 크게 보내고싶다. 강의 중 “왜”라는 물음에 “because”가 먼저 나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거의 세계 통용어로 쓰이는 영어를 무의식중 뱉어냈다는 점에서는 기특하기도 했지만 정작 가장 익숙해야 할 민족어가 외국어보다 더 생소하고 낯설다는 점에서는 씁쓸했다. 왜 겨우 20~30년 사이에 이런 ‘거대한’ 변화가 생겼을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30여년 사이에 새 세대의 다수가 우리말을 잃어가고있다는것이 놀랍다. 이 30여년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을가? 한번 되짚어보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근면함은 우리 민족의 일대 장점이다. 그래서인지 늘 부지런히 달린다. 2세들은 시골 고향에서 아주 성실히 농사일을 하였고, 잠간이였지만 대도시 김치장사에도 부지런하였고, 한국, 일본 출국 바람이 불자 바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날아가 여전히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렇게 축적한 재부가 지금 대도시에서 살고있는 많은 3세들의 아빠트가 되고 사업자본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도시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고있는 3세들 역시 이 부지런함이란 전통을 충실히 이어가고있다. 그래서 새세대들은 학원에서 학원으로 기계처럼 돌아가고있다. 그속에서 민족어는 잊혀지고 고유의 전통은 사라져가고… 성실한 로동으로 앞만 보며 달려와보니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항상 지탱해줘야 할 주추대가 사라지고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막연하게 가슴 아파하고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가? 이런 현상속에는 우리 민족 전체의 어떤 특성이 숨어있지 않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있는것 같고 잘 적응해가는것 같다. 그런데 반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늘 어떤 붐이 일기 바쁘게 한쪽으로 오구구, 또 어떤 바람이 불기 시작만 하면 바로 우르르 몰려간다. 너도나도 대도시 김치장사무리에 끼였다가 한국붐에 몸을 실었고, 그 다음은 지구의 구석구석으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날아갔다. 가난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후대들에게 더 나은 생활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하여서였다고 하면 충분히 설득이 될수 있다. 2세들이 가난과 전쟁했다면 3세들은 대도시에서 안정된 보금자리 만드느라 힘들었고 4세들을 대도시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생하고있다고 할수 있겠다. 이러다보니 우리는 항상 힘에 부친 일들을 하는 “도전적”인 민족인것 같다. 평균 교육수준이 높은 민족이라고 나름 자랑도 많이 한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이리도 서글퍼지는것은 무엇때문일가? 몇십년 시간을 눈앞에 그려보니 모두가 안깐힘을 다 해서 쉬임없이 달려오긴 했는데 늘 누군가에게 뒤지지 말아야지, 누구보다 잘해야지, 잘살아야지 하는 비김속에서 눈앞만 보면서 달려오고 지금도 그렇게 달리는것 같다. 항상 자식들을 위함이라는 방패를 내걸었지만 진정 그것만이였을가? 그 내면에는 허영심이라는것도 덩그라니 놓여있지 않았을가? 그리고 쉬이 바람따라 움직이는 갈대의 근성은 내포하고있지 않았을가… 이렇게 숨가쁘게 달리는것이 영 리해가 안되는것만은 아니다.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민족이라지만 지금 살고있는 이 땅에서의 력사는 겨우 150여년, 력사의 긴긴 려정속에서 150년은 아주 순간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다. 이주와 정착, 생존과 생활을 거듭하면서 우리만의 전통, 문화를 만들어왔지만 그것에 대한 자부심은 아직 단단해지지 않았던것 같다. 그래서 늘 있는것을 쉽게 포기하고 먼발치에 보이는 산을 쫓아가군 했었다. 그런데 산우에 산이 있고 하늘밖에 하늘이 있으니 쫓아가도 쫓아가도 끝은 없고 숨은 가빠지고 조바심은 더해지고 그러다보니 원래 지녔던것은 하나하나 던지는격이 되였다. 우리 자체의 문화적뿌리를 깊이깊이 내려야 할 시간에 뒤좇아가는데만 급급해있었기에 항상 흔들리고 간들간들한다. 진정 우리에게는 지켜야 하고 지킬만한것이 그리도 없었단말인가. 늘 성급하게 무조건 뭔가를 향해 달려야 하는것이 우리의 일대 특징이였던 것 같다. 조용히 머물러있는것에 익숙치 않고 그런 상황이 대단히 불안하다. 오직 질주하는것만이 정답이라고 믿는다. 적극적이고 정열적이라고도 할수 있겠지만 늘 현상태에 불안해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감, 자부심이 모자라기에 늘 넉넉함의 여유를 잃고있었다. 허둥바둥거리다보니 몸에 베여있던 소중한것들이 하나하나 잃어져가는것을 망각하고있었다. 그러다가 “아차”한 2, 3세들이다. ”아차”는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붐에 따라 움직인다. 아이들을 례로, 영어를 모르면 안되다고 하니 영어학원, 어느 아이가 무용을 한다니 무용학원, 악기를 하나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음악학원… 지금은 온통 이렇게 학원들을 채바퀴 돌듯이 하고있다. 부단히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느라 다그치면서 물질적인 비약을 가져왔다면 현시점에서는 잠시 쉬여가면서 진정 또 소중한것이 없는지를 돌이켜보고 재생, 보완하면서 앞으로 더 긴 시간 우리를 지탱해줄 정신적여유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때론 꼭 뭔가를 해야만 영향력이 생기는것은 아니다. 그냥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향기가 되는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잃어가고있는 본연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우리 작은 민족이 큰 물에 적응해야지 어떻게 이 큰 세상을 안고 내 영향이 미치도록 할수 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에 던진 작은 돌도 그 파급력은 존재하며 물결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물속의 전파도 사라지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계속 이어지고있다. 결코 눈에 보이는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본연을 찾는 당당한 모습이 일부 민족이나 사람들에게는 이미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치고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있는지도 모른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무작정 새 세대들은 고생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편단심이 오히려 아이들의 순수한 백지장을 락서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기성세대들의 좀 더 랭정한 판단과 지혜만이 새세대들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줄수 있을것이다. 백화점 옷만을 자랑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입으면 시장 옷도 명품으로 된다는 자신감이 가득 찬 사람으로, 생일파티에 몇천원 소비한다는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기보다는 혼자 힘으로 곤난을 이겨나갈줄 아는 사람으로, 숙명처럼 주어진 민족을 부정하기보다는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이어나가는 사람으로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라고 한다. 150여년의 이주, 정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우리만의 음식문화도 생겼고, 오락문화, 새로운 언어문화도 형성되였다. 문화와 문화의 충돌 속에서 제3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제3의 문화를 부끄러운것으로 여기면서 홀대할것이 아니라 더 당당하게 표현할수 있는 여유와 배짱이 필요하다. 단단히 다져져야만 거세찬 파도, 휘몰아치는 바람과의 충돌 속에서도 유연함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갖출수 있다. 한 민족의 주추대는 결코 한세대, 두세대 짧은 시간에 다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세대들의 부단한 노력과 성과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페지들이 모여 깊이 뿌리를 내린다. 모두가 깊은 뿌리의 일부가 되여 가지가 무성해지도록, 잎이 더 푸르러지도록 자양분들을 섭취하고 공급하는 작용을 했으면 좋겠다. “용비어천가”의 아름다운 어구로 마무리를 해본다. [원문-“아래아”는 ㅏ로 표기]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새,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현대어 풀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가 이루어져 바다에 가느니. 인민넷
52    긴가민가 우리말 어원(김청룡) 댓글:  조회:1868  추천:0  2017-05-10
인민넷
51    조선족연구의 방향을 고민해본다(리성일) 댓글:  조회:1918  추천:6  2017-05-03
재일조선인의 연구를 참고로 며칠전에 일본출장을 다녀왔다. 책방에서 고베학원대학의 리홍장(李洪章, 재일조선인 출신)박사의 저서 《재일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경험》(生活書院, 2016년 출판)이라는 책을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였다. 저자는 저서에서 “열린 공동성”으로서의 민족은 가능한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인의 시각에서 “민족(재일조선인)의 형상”을 묘사하면서 민족의 이질화(異化)와 동질화, 저항과 영합(迎合)이라고 하는 단선적인 리해로부터 포착할수 없는 재일조선인들의 “생”을, 그 어떠한 정치에 결코 매몰되지 않도록 그려내려는 강렬한 의욕을 보여주었다. 1982년 출생으로서 교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학자 리홍장씨의 글에는 중국조선족 젊은이들에게도 보여지고있는 민족의 아이덴티티와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과도 내적으로 련관되는 부분이 잘 드러나고있다. 물론 이러한 내적 련관성은 재일조선인 출신들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의 정아영(鄭雅英)교수의 《중국조선족의 민족관계》(嶺南堂, 2000년 출판)와 일본 죠치(上智)대학 권향숙(權香淑)박사의 조선족 관련 연구에서도 여실히 반영되여있다. 이들의 연구에는 중국조선족 연구를 통해서 재일조선인의 아이덴티티와 진로에 대한 고민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이 함께 보여지고있다. 따라서 민족의 진로를 고려함에 있어서 중국, 일본이라고 하는 거주국이라고 하는 큰 배경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조선반도로부터 이주해 온 력사적뿌리와 민족의 특성을 지키고자 하는 피타는 노력에는 상당히 깊은 련대성이 있다고 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재일코리안과 중국조선족들 사이에는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재일코리안사회는 재일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과 재일한국인민단(민단)으로 크게 나뉘여져있어 조선반도의 분렬구도가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중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있지만, 조선반도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고있어 일본국적으로 귀화하는 수자가 점차 늘어나고있는 상황이다. 인구감소라고 하는 현상만을 보면, 중국조선족이나 재일코리안 사회는 모두 공동한 특성과 추세를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력사적인 원인으로 재일코리안사회는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기초교육으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체의 교육체계를 구축해왔다. 이는 과거 동북지역을 근거지로 했던 조선족사회와는 양상이 매우 다르다. 현재 북경, 상해, 광주, 천진, 청도 등 지에서 정음우리말학교나 조선족 사립학교가 설립되여있지만, 절박한 후대들의 민족교육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조선족사회도 재일코리안들이 초창기 시절에 도쿄나 오사카 지역에서 민족학교를 세우고 운영해 온 피타는 노력과 경험을 배우고, 가능하면 상호간에 교류, 협력도 추진해야 할것이다. 또한 재일코리안이라고 하는 인적(민족) 자원을 고려할 때, 조선족연구도 중국내 이동, 중한간의 이동(정착)이라고 하는 단선 파악 혹은 량자 시각을 벗어나서 적어도 중국, 일본, 조선반도라고 하는 동북아지역의 흐름을 파악하고 상호간의 공동 연구와 협력을 위한 다자적인 접근 노력이 매우 절실하다. 최근 중국, 한국, 일본에서 조선족출신 젊은 학자들이 수준 높은 연구성과를 배출하고있으며, 학계에서도 점차 활약상을 나타내고있다. 따라서 이러한 인적 연구자원을 보다 네트워크화하고 공동한 주제와 객관적 시각이 결합된 연구협력의 시기가 도래하고있다. 정음문화칼럼도 중국, 한국, 일본에서 활약하고있는 조선족 젊은 학자들이 주체를 이루고있으며, 이는 단순한 연구네트워크뿐만아니라 문제를 고민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주체의식이 서서히 자리잡고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단순한 차원에서의 조선족문제가 아닌, 지역적차원에서의 조선족문제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매우 절실하다. 특히 조선족 젊은 학자들이 자각적인 의식과 선도적인 실천적행동이 우선되여야 할것이다. 인민넷 2017-5-2
50    음식으로 보는 민족과 전통(최선향) 댓글:  조회:1737  추천:1  2017-04-25
우리는 흔히 한 민족의 문화를 론할 때 그 민족의 전통과 풍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력사적으로 보면, 한 민족의 전통과 풍속은 고정불변한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되여왔다고 할수 있다.   음식을 례로 들면, 지금 우리가 먹고있는 김치 역시 력사상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김치라고 하면 우리는 먼저 고추가루가 들어간 붉은 배추김치를 떠올리지만 배추가 조선반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한것은 조선왕조 중후기인 17~18세기경부터다. 우리 민족이 즐겨 먹는 배추, 시금치, 미나리, 생강, 고추 등은 고려시기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반도에서 고추와 호박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경부터 재배되었으며 시금치, 미나리, 생강 등도 이 시기 기록에 처음 보인다(김내창, 1992).    고추를 넣은 붉은 김치는 1700년대 전반에 형성되였다고 한다(이규태, 1991). 이로부터 볼 때 우리 민족이 지금처럼 고추가루, 생강이 들어가는 배추김치를 먹은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러나 배추김치는 지금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음식이 되였다. 한족들도 김치를 辣白菜라고 부르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많이 먹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 땅콩 등도 18세기 중엽~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조선반도에서 재배되었다(김내창, 1992). 우리가 지금처럼 세끼의 밥을 먹게 된것 역시 극히 근세의 일로, 세계적으로 세끼 밥은 극히 1백~2백 년 사이의 일이다(이규태, 1991).   과거에는 아침 저녁의 두끼 밥이 관례였다. 19세기 중엽 조선 후기의 실학자 리규경(李圭景)은 해가 짧아지는 음력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다섯달 동안은 조석 두끼만 먹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2월부터 8월까지 일곱달 동안만 점심을 먹는것이 조선의 식속(食俗)이라 했다. 곧 음력 2월의 춘분날부터 점심을 먹기 시작하고 9월의 추분날부터 점심을 페하고 두끼만 먹는다 했다.    월경민족인 조선족은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많은 민족전통을 이어왔을뿐만아니라 중국에 살면서 또 나름대로 조선반도의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전통을 만들어왔다.    연변의 조선족음식을 례로 들면, 조선반도의 민족 전통음식을 연변의 실생활에 맞게 변화, 발전시킨 가지밥과 감자밥, 옥수수온면, 초두부, 오누이장, 언감자밴새(언감자만두) 등과 한족 및 기타 소수민족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여 새롭게 개발한 건두부무침, 양꼬치 등 음식과 사과배 등 과일이 있다. 그리고 중국음식도 제법 맛들여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한족들처럼 초우차이(炒菜)식의 료리도 많이 해 먹는다.   지금은 한국에도 서울시 구로구의 가리봉동과 구로동 등지에 “조선족타운”이 생겨나 조선족들이 먹고싶은 고향음식을 사먹을수 있게 되였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이나 한국에 가서 한동안 있다온 조선족들은 귀국하면 먼저 훙쏘우러우(红烧肉), 꿔보우러우(锅包肉) 등 한족료리나 조선족음식을 먼저 찾군 했다. 그만큼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음식과도, 또 한족음식과도 닮은듯 하면서도 다른 음식문화와 전통을 가지게 되였다.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족적, 민족적, 공동체적 뉴대감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수 있다. 사람들은 같이 모여앉아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고 가족의 정과 우정을 돈독히 한다. 그래서 같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것은 소중한 추억이 되기도 하여 그때 그 시절, 그곳의 사람들을 추억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단지 맛만을 위해 먹는게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그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먹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것은 또 공동의 기억—즉 공동의 력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일수도 있다.   민족적측면에서 볼 때 음식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디아스포라로 유명한 유태인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민족정체성을 잘 유지해왔는데 그들은 유태교 계률에 따라 먹는 음식에 금기가 많다.   유태인들은 코셔 푸드(Kosher food, 유태인의 률법에 따른 정결한 음식)를 먹는데 일단 피가 섞인 고기는 먹지 않는다. 그래서 가축을 도축하면 피를 모두 뺀다. 네발 가진 동물은 발굽이 두개로 갈라지되, 먹이를 반추(되새김질)하는 동물, 즉 소나 양, 사슴 같은 동물의 고기는 먹을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돼지고기나 말고기, 토끼고기 등은 먹지 않는다. 물고기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먹을수 있다. 뱀장어나 갈치, 미꾸라지 등 비늘이 없는것은 먹지 않으며 새우나 조개류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고기와 우유 등 유제품을 같이 먹지 않는다(裔昭印,2010).   유태인들은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유태교 계률에 따른 독특한 음식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다. 이는 그들이 수많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그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민족적정체성을 잘 유지할수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아니였을가? 음식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결정요인이 될수 있으며, 민족정체성 역시 음식선택의 결정요인이 될수 있다. 음식과 민족정체성은 상호 작용을 한다고 할수 있겠다.    그리고 전통이란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것과 오랜 세월과 풍파를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는 정수(精髓)가 있기 마련이다. 지구화시대, 격변하는 이 시대에 국내와 국제 이주가 많아지면서 그 어떤 민족이든, 민족전통의 고수란 쉽지 않은 과제가 될것이다. 하지만 사물은 항상 변화하면서 발전한다는 점을 명기한다면 그 어떤 전통의 상실로 두려워할 일은 없을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민족전통(정수)을 이어감과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는가 하는것이다.    참고문헌:   김내창 집필, 《조선풍속사》3,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이규태, 《재미있는 우리의 음식이야기》, 1991 裔昭印主编,《世界文化史》,北京大学出版社,2010年版   [최선향 략력]   성명: 최선향 (崔鲜香)   소속: 장강사범학원 력사학과 부교수   연구분야: 중조문화교류사, 녀성사, 녀성학연구    학력: 연변대학교 력사학 박사 연변대학교 력사학 석사 동북사범대학교 력사학 학사   경력: 천진사범대학교 성별과 사회발전연구센터, 한국어학과(2006~2013) 청도황해학원 중국근현대사교연실(2014~2017.3) 현재 장강사범학원 력사학과 부교수.   겸직: 한국 학술 등재지 《젠더와 문화》(KCI 등재)의 편집위원   주요 론문:  《Lives of Old Women of Korean Nationality in Beijing----A Case of One Dance Team》,《Asian Women》,Spring 2010 Vol.26 No.1(SSCI)를 비롯하여 《高丽女性在高丽与蒙元关系中的作用》(《内蒙古大学学报》,2010,1); 《1970年以后韩国妇女运动的发展与变化》,《当代韩国》,2010,2(中国人民大学复印资料《妇女研究》2010, 6全文转载)등 론a문 20여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공동 편저로는 《全球地方化语境下的东亚妇女与社会性别学研究》(湖南大学出版社,2016)가 있다.
49    디아스포라 조선족아리랑의 서사와 담론(정월매) 댓글:  조회:1888  추천:1  2017-04-19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민족의 노래이다. 아리랑은 조선반도의 적대적 남북관계에도 동질성의 끈이 되여 “국가”의 경계를 넘어 “민족”이란 호명으로 하나로 묶어주고 해외에 거주하는 조선민족에게 민족적정체성을 확인시켜준다.   아리랑이 널리 확산되고 조선민족의 아이콘이 된것은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되었다. 영화 예술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운규감독은 나라 잃은 설음을 영화에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영화스토리는 간단하다. 대학을 다니다 3.1운동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된 주인공 영진에게 아끼는 녀동생이 있었다. 일본경찰의 앞잡이노릇을 하는 기호가 어느날 녀동생을 겁탈하려고 하자 영진은 기호에게 낫을 휘두른다. 영진은 일본순경에게 붙잡혀 수갑을 찬채 끌려간다. 이때 주제가 “아리랑”이 흐르며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 영진의 모습이 마치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헤매여 조선반도를 떠나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수난당한 한민족과 같다고 생각한 관객들은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의 흐름과 함께 영화관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영화의 주제가는 우리들이 익숙히 알고있는 가사이다.     1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네     2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3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4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예전의 지역적인 민요아리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불러졌고 공동체적 집단의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가사에서는 “우리네 살림살이” “이 강산 삼천리”라는 국토관념, 민족이라는 더 큰 대자아로 비약하게 된다. 이는 영화안팎의 사람들을 이 강산의 일원으로 동참시켜 노래의 민족정서적공감속에서 집단적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상상의 공동체로 메아리치게 하였다.   일제는 “아리랑”이 민족의 얼이 깃들어있다고 하여 상연금지령을 내렸고 아리랑노래를 부르는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조선인작가들을 동원하여 대동아공영을 위한 황국신민의 친일아리랑을 만들게 하였다. 대표적인것이 윤해영의 “만주아리랑”이다.   그러나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투사들이 건너온 중국지역은 항일독립운동근거지가 되면서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아리랑이 탄생하였다. 여기에는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혁명아리랑” 등이 있다. “독립군아리랑”의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 일제놈 쳐부셔 조국을 찾자/.../부모님 처자들 리별을 하고서 왜놈들 짓부숴 승리를 하자//(후렴)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가사에는 총칼 들고 일제놈 싸워 이겨 조국을 되찾자는 항일의 의지, 저항의 의지가 굳게 표현되여있다.   민요뿐만아니라 중국지역에는 항일의식과 항전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아리랑”무대가 열렸다. 그 일례로 1938년 조선의용대가 계림에서 공연한 연극 “아리랑”, 1940년 서안을 비롯한 전선지역이 가까운 서북지역에서 순회공연한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 등을 들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아리랑”은 아리랑고개를 넘어 고향을 떠나 이역을 류랑하는 조선민족의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하였다. 일제강점기 늙은 농부와 소녀가 침통한 표정으로 한번 떠나면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올수 없는 아리랑고개를 넘는 장면들이 나오고 극의 결말은 죽더라도 조국의 품안에서 죽겠다고 절규하는 청년들의 굳은 의지로 끝난다.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유한이 창작한 가극 “아리랑”은 극정이 조선의용대의 “아리랑”에 비해 심오하다. 평화로운 조국의 품에서 살던 목동과 촌녀는 련인관계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아리랑산 정상에 일본국기가 걸리고 강산은 혈흔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늙은 부모와 리별하고 산아래서 보국을 맹세한 뒤 한국혁명군에 가담한다. 그뒤로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수십년전 떠나온 고향에 돌아와 전투에 림한다. 그러나 적의 포화속에서 장렬히 희생되고 한국 국기는 다시 아리랑산우에서 나붓긴다.   이국에서 망국노로 살아가면서 독립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저항의 상징이였다. 공연이후 공연대가 지나간 서안외곽 전쟁구역에는 아리랑노래가 류행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하였다 한다. 이 공연은 항전에 참전하고있는 독립군을 독려하였고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은 함께 일본을 상대로 싸울수 있는 항일력량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그들을 항일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구국투쟁운동의 대외선전역할을 하였다.   해방전 동북을 비롯한 중국지역에는 항일아리랑이 있었는가 하면 일제의 수탈을 피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살길 찾아 북간도로 이주하는 이주아리랑이 있었다. 여기에는 민요 “신아리랑”, “북간도” 등을 들수 있다. “신아리랑”의 "밭 잃고 집 잃은 동포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북간도”의 "문전옥답 다 빼앗기고 거지생활 웬 말이냐" 등 가사들은 이주시기의 어려움을 잘 반영하고있다.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는것은 일제에 삶의 뿌리가 뽑혀 고향을 떠나는것을 의미한다. 아리랑고개는 리별고개이고 원한고개이며 설음고개이다. 이주아리랑은 이산의 상징이고 민족수난의 상징이다.   그 외에도 이주력사에 관한 아리랑으로 실제사건에 의거한 리혜선의 논픽션 “두만강 충청도 아리랑”(2001)을 들수 있다. 이 저서는 1938년에 충북지역에서 180여호가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서 생겨난 마을 도문시 량수진 정암촌 사람들의 이주 이야기를 담고있다. 그들의 집단이주, 광복, 한국전쟁, 집체화와 문화대혁명 등의 시대적상황에 따른 이주민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하였다. 특히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기인된 뜻하지 않은 고향과의 리별, 그 리별의 아픔을 삭이며 살아야 했던 애절한 삶을 그려냈다. 이는 조선족이주사의 축도로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랩소드 오프 C 아리랑”(일명 청주아리랑) 제작진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장조사를 통해 살아 숨 쉬는 소설속 인물들과 일일이 접촉하면서 세세한 감정까지 포착하여 다양한 예술장르를 접목한 스팩타클한 공연을 2014년 서울 구로에서 선보였다.   1945년 조선반도의 광복과 1949년 중국의 해방이후 동북지역에 100만명 정도 남은 조선인들은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인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갔다. 해방초기 조선족의 아리랑은 조선의 영향을 많이 받아오다가 중국현지에 맞는 가사와 한국의 아리랑과 중국의 아리랑선률을 혼합한 조선족특색의 아리랑을 창출하였다. 여기에는 “새아리랑2”, “장백아리랑”, “연변아리랑”, “장백송”, “장백가요” 등을 들수 있다.   “새아리랑2”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새로운 이 마을에 봄이 왔네/보슬비 내리여 땅이 녹고 흙냄새 구수하다/..../ 뻐꾹새 밭갈이 재촉한다" 가사는 중국의 건국토지개혁정책아래 분배받은 땅에 씨앗을 뿌려가는 농민의 기쁜 심정과 삶의 활력을 표현하였다. “장백의 새 아리랑”의 "장백산마루에 둥실 해 뜨니 푸르른 림해는 / 록파만경 자랑하며 설레이누나/ 칠색단을 곱게 펼친 천지의 폭포수는/ 이 나라 강산을 아름답게 치장하네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리아리스리스리 아라리가 났네/..../ 아리아리아리스리스리 아라리가 났네 장백산은 우리의 자랑일세" 가사는 백두산과 장백폭포를 통해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 여기에서 아리랑은 기쁨의 아리랑이고 행복의 아리랑이다.   연변가무단은 아리랑을 주제로 가극, 무극을 창작하였다. 1989년에 창작된 대형가극 “아리랑”은 민간에 류전되고있는 “아리랑설”을 기초로 하여 발전시킨것이다. 2016년의 대형무극 “아리랑꽃”은 근 3년간의 시간을 들여 창작하였는데 중국조선족무용가를 창작원형으로 하였다. 꽃의 고유한 속성인 향기에 립각하여 서막 “향기속으로”, 1막 “파란 향기”, 2막 “빨간 향기”, 3막 “하얀 향기”, 4막 “노란 향기”, 종막 “천년 향기” 등 6개 부분으로 나뉘여 립체감을 살리는 현대적이고 몽환적인 조명, 전통악기와 관현악을 결부한 음악과 판소리, 다채로운 무용형식을 아울러 화려한 그림으로 펼쳤다. 플래시백(倒叙)형식으로 예술을 추구하는 한 중국조선족무용가의 인생을 다루었다. 극은 무용가 순희의 해방전부터 지금까지의 파란만장한 예술인생과 피타는 노력으로 우수한 예술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중화대가정속에서 중국조선족의 불요불굴의 정신과 민족의 전통문화를 집중적으로 나타냈고 이를 통해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길림성 여러 민족 군중들의 정신면모와 번영발전하고 조화롭게 진보하는 변강의 국면을 표현했다.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출중한 표현으로 폭발적인기를 누렸으며 조선족의 열의 높은 매일투표와 함께 고득점으로 금상을 수상하였다.   이상 디아스포라로서의 조선족아리랑은 이주력사를 반영하는 아리랑,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아리랑, 내 고향과 내 조국을 찬양하는 아리랑으로 나눠보았다. 이는 조선민족의 근현대력사와 함께 중국 지역의 현실성이 결부된 조선족 특유의 아리랑이다. 조선족아리랑은 조선족의 운명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온 노래이다. 거기에는 이주할수 밖에 없는 한이 서려있고 침략자에 대한 저항이 표현되여있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신명이 체현되여있다.   조선반도 남북의 삼각점에 있는 중국조선족은 어제도 아리랑을 불렀고 오늘도 부르고있으며 내일도 부를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아리랑고개를 넘을것이다. 현재 조선반도의 정세에 긴장이 감도는 갈등의 현대판 아리랑고개, 그 해법을 아리랑으로 풀었으면 한다.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유전자 압축파일 같은 존재이다. 현재 50여종의 갈래에 8천여수로 세계로 널리 퍼져있는 아리랑에는 민족정서인 한과 대동정신의 신명과 같은 감성, 하나가 되는 어울림정신이 있다. 민족모순, 국가모순 등을 녹일수 있는 창조적힘과 가치가 내재되여있다. 한국 아리랑을 대표하는 한류의 세계적열풍,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의 아리랑대집단체조, 그리고 세계스포츠대회에서 여러차례 남북의 스포츠단일팀의 국가나 응원가로 된 아리랑은 민족과 세계 통합적 이데올로기로서 남북의 화합과 세계 화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있다.   예술을 넘어서서 아리랑을 부르며 손에 손잡고 마음을 터놓을수 있는 대동과 상생의 한마당, 조선반도 남북이 그리고 세계가 아리랑정신으로 통섭의 장, 세계평화의 장을 열어가는 그날을 바란다.     전월매 략력     소속: 천진사범대학교 한국어학과 부교수     학력: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학박사     저서 《재중조선인 시에 나타난 만주 인식》(역락, 2014), 《한국문학 연구와 교육의 현장》(학술정보, 2016)를 비롯하여 "윤동주와 심연수의 시에 나타난 만주 인식 고찰", "'민족협화'의 허상과 백석의 만주행", "타자와 경계: 한국영화에 재현된 조선족 담론", "중국부상에 따른 세계경제국제질서 재편론 담론-조정래의 장편소설 를 중심으로" 등 국내외 학술지 30여편의 발표론문이 있음.   인민넷 2017-4-17
48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조선족 "경상(鏡像)"은?(허명철) 댓글:  조회:1673  추천:3  2017-04-11
앤더슨이 제시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명제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아닐수 없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명제는 우리들에게 민족을 규명하는 객관적인 특징이라는 벽을 넘어서서 민족의 상징적 기호와 그 의의에 대한 해석에 주목하면서 심층의 문화적가치를 직지할것을 요구한다. 앤더슨의 해석에 따르면 민족은 력사문화변천과 더불어 사람들의 심층의식구조에 형성되여있는 상상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우리도 상징성과 의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민족공동체 조명을 시도해볼수 있다.   전근대적인 농경문화에 근저를 두고있던 우리민족은 20세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대 문화격변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커피숍에서 커피에 명태안주까지 주문하고 첫잔은 건배하자고 제의한다. 팩스를 넣고 국제전화를 걸어 팩스를 보냈으니 3일이면 도착할것이라고 통보한다. 엘리베이트앞에 다가서서 단추를 누르지 않고 노크한다. 한권의 책으로 묶어놓으면 베스트셀러로 선정될 정도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우리는 그래도 현대문명의 막차를 잡아타고 전근대문명과 결별하고 새로운 생활방식을 개척하였다. 도시생활공간의 확장과 물질생활의 풍요로움으로 하여 우리는 선조들이 창조했던 수많은 문화풍경을 더 이상 목격할수 없게 되였다. 뒤잔등에 어린 애기를 포대기에 감싸 업고 조선족띠를 허리에 둘러맨 어머니들이 머리에 따발을 얹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은 오래전부터 이미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언제부터인가 식후 가마치숭늉을 즐겨마시던 우리도 이젠 식후에 자연스럽게 커피를 찾게 되였으며 커피문화도 스스럼없이 우리민족 문화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해마다 설명절이 되면 조선족가정들에서 새해의 축복을 바라면서 복조리를 문에 걸어두던 민속도 자취를 감춘채 "복"자를 거꾸로 붙이고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농경문명시기에 창조하고 전승해왔던 전통적인 문화기호로 조선족을 상정하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조선족을 상상할수 있는 현대적문화기호는 과연 무엇이며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구축한 조선족"경상(鏡像, Mirror Stage)"은 어떤 모습일가?   조선족이라는 "경상"은 력사기억과 기술에서 형성되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실존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스스로 형성한 "경상"에 의해 타민족은 조선족에 대한 "고정적인상(刻板印象)"을 갖게 된다. 필자는 가끔 자문해본다. 내가 왜서 조선족일가? 쉽게 나올법한 답인데 나오는 답은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이다. 자아위안이라고 할가, 신분증에 적혀있는 조선족, 호구부에 적혀있는 조선족이 아이러니하게도 정답이 아닌 정답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국내 타민족에게 보여준 "경상"은 어떤 모습이며 한국을 비롯한 해외 타민족에게 보여준 "경상"은 또한 어떤 모습일가? 여전히 과거에 구축했던 김치를 좋아하는 민족, 랭면을 좋아하는 민족, 가무를 즐기는 민족, 축구를 잘하는 민족에 그쳐있는것인가? 자문해보지 않을수 없는 질문이다.    조선족을 상상함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할수 없는것은 문화기호 못지 않게 중요한것은 기호의미에 대한 해석이라 하겠다. 민족을 상징하는 문화기호는 시대적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해석에 따라 그 의미도 달리된다. 력사적으로 조선족은 흔히 백의민족으로 불리우며 흰색을 조선족의 하나의 상징기호로 되기도 한다. 구미래는 《한국인의 상징세계》에서 흰색은 순결함, 깨끗함, 신성함을 상징하며 우리민족만큼 흰색을 숭상하고 생활화한 민족은 드물다고 하면서 그 뿌리를 태양숭배와 경천사상에 두고있다. 그러면서 흰색을 우리민족의 청렴결백한 선비형 인간상, 자연에 귀의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삶을 살아가려는 심성과 련관시켜 풀이한다. 반면 최현배는 《조선민족갱생의 길》에서 백의의 부정적의미를 경제적ㆍ심리적ㆍ물리적ㆍ문화사적으로 지적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백의민족이라 할 때 우리가 상상하는 백의의 의미는 무엇일가?    지금까지 조선족의 "경상"은 기록된 력사와 전통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오늘날 조선족의 현대적 "경상"은 일상생활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들의 일상을 통해 타자는 조선족을 알게 되고 조선족이라는 "경상"을 세우게 될것이다. 21세기에 진입하여 지구촌을 생존무대로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고있는 조선족을 전근대에 창조한 문화기호로 묘사한다면 현실과 엄청나게 괴리된 민족표상으로 될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발을 깎아 신에 맞추는(削足适履)"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급변하는 오늘의 시대에 지구촌을 삶의 무대로 하고 조선족에 걸맞는 "경상"을 설계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리는 쪽지게에 전근대적인 농경문화를 담아지고 오아시스와 같은 이 땅으로 이주해왔고 또한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지구촌 곳곳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초국가적인 삶의 무대를 개척하였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외딴 섬에서 자신만의 오아시스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다. 조선족공동체의 미래를 위하여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현상을 분석하고 "살아 움직이는"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변화하는 민족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옳바른 "경상"을 구축할수 있는 문화기호를 제시하고 의미를 부여하여야 할것이다. 인민넷 2017-4-10
47    조선족의 이주와 삶, 그리고 향수(방미화) 댓글:  조회:1813  추천:3  2017-04-07
글로벌화추세 및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배경하에 1990년대 이후 조선족들은 우리 나라의 북경, 상해 등 대도시나 청도, 위해 등 연해개방도시, 미국, 로씨야, 한국, 일본, 오스트랄리아, 유럽 국가 등 국외로 이주하는 이주민집단으로 변화되였고 그가운데서 한국으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한국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7년2월 한국의 조선족 총인구수는 623,772명에 달한다.    이주 초기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들은 력사적으로 로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지역인 가리봉동의 벌집방을 세맡아 거주하면서 한국에서의 려정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족들이 증가되고 그들의 조선족 음식, 생활 등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초기 한국으로 이주한 일부 조선족들은 가리봉동에서 음식점, 려행사, 중국슈퍼 등 상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조선족 자영업체들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가리봉동은 점점 포화상태로 되였으며, 조선족상가들은 점차 그 주변지역인 대림동, 구로동으로 확대되여, 현재 이 지역은 “조선족타운”으로 불릴 정도로 조선족들이 집중거주하고있는 지역으로 되였다.   중요한것은, 현재 서울시 영등포구, 구로구의 가리봉동, 대림동, 구로동 등 지역을 포괄하는 “조선족타운”은 한국에서 살아가고있는 조선족들의 일상문화와 경험을 살펴볼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는것이다. 그것은 민족정체성의 문화적표상과 경험은 대개 거대하고 호화롭거나 놀란만한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형식과 실천에서 발생하기때문이다.    “조선족타운”에 가보면 무엇보다도 눈에 뜨이는것이 조선족들의 먹거리이다. 중국 동북이주 이후, 조선족들의 음식문화는 기나긴 세월속에서 중국 한족들과의 음식습관과 혼합되면서 한족과도 구별되고 또 한국인과도 다른 조선족 특유의 음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족타운”의 조선족 먹거리를 살펴보더라도, 한족들과 구별되는 개고기(狗肉), 연변랭면(延邊冷麪), 양꼬치(羊肉串), 초두부(水豆腐), 연변반찬(延邊拌菜) 등이 있는가 하면, 한족음식인 건두부(干豆腐), 꽃빵(花卷), 꽈배기(油条), 샤브샤브(麻辣火锅), 마라탕(麻辣烫), 마라향과(麻辣香锅), 각종 중국 료리(炒菜) 등이 있다. “조선족타운”으로 음식소비를 하러 오는 조선족들은 한결같이 그곳에서 풍기는 냄새에 고향의 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기름냄새와 각종 향료냄새가 뒤섞인, 한국인들이 맡기에는 어딘가 낯설어보이는 냄새는 조선족들에게 정서적안정을 주는 고향의 냄새로서 그러한 냄새는 자신의 옛 기억을 되살리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또 한가지 발걸음을 멈추도록 하는것이, 조선족음식점에서 울려퍼지는 연변노래이다. 중국조선족가요 200곡-“민요와 타령”, “고향정”에 실린 노래들은 고향에서는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들었던 노래들이지만, 타향에서 울려퍼지는 이 노래들은 고향으로 돌아갈수 없는 조선족들로 하여금 타향에서의 삶을 망각한채, 고향에서의 추억을 잠시나마 되살리게 하는 정서적은신처가 되며, 또한 조선족들의 민족적정서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조선족 음식, 노래, 여가 등 문화적내용들을 담아내는 “조선족타운”에서 한국의 조선족들은 주말 혹은 평일 저녁에 조선족들끼리 만나 식사를 하거나 취미활동을 하는 등 만남의 시간을 즐겨 가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조선족타운”에서 조선족들과의 만남을 선호하는가. 어느 한 조선족은 조선족사투리를 마음대로 할수 있어서 이곳이 좋다고 한다. 또 어느 한 조선족은 한국국적을 바꾼 뒤, 한국인들의 무시와 편견을 받지 않으려고, 조선족사투리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국인이 된것처럼 살려고 하면서 조선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던것이, 한국인공동체에서 당당하게 살아갈수 없음을 뒤늦게야 깨닫고 결국 조선족단체를 찾아나서게 되였으며, 결국 그에게 “조선족타운”은 오아시스와 같은 곳으로 의미화된다. 물론 이곳이 모든 조선족들에게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주는것은 아니다. 어느 한 조선족에게 이곳은 ”문화적충격”의 장소로서 절대 다시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규정되며, 이곳에서 그는 인생 밑바닥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조선족타운”은 고향의 기억으로 점철된 추억보따리를 풀어놓는 곳이면서, 또 고향을 등진 류랑객들의 “조선족”이라는 생득적인 신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제 조선족들에게 “향수”와 “고향”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향수(nostalgia)란 “어떤 시기나 장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련관성이 있는 행복했던 과거에 대한 감성적갈망 또는 동경하는 애착심”으로 정의되며(이창호, 2016), 어원은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algia에서 유래하여 “끊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싶어하는 동경과 갈망으로 인해 생긴 심리적인 고통”을 의미한다(임은미, 2006). 향수의 어원에서 알수 있듯이, 향수의 중요한 대상이 바로 “고향”이라는 장소다. 그리고 향수의 경험은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동한 이들의 이주경험으로부터 온다. 중요한것은 향수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했던 고향을 넘어 확대된다는 점이다. 즉 향수는 구체적고향에 대한 지향을 넘어서 뿌리 뽑힘, 집 없음 등의 감정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고향은 리산의 소용돌이속에서 편안한 땅에 대한 동경과 망향의 표상으로 발전되였다(김태준, 2006). 즉 대상자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고향은 구체적인 장소가 될수도 있고 이동성이 강한 현대 삶에 대한 표현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류동하는 조선족들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 어찌보면 그들에게 고향이란 “돌아가고싶을 때 돌아갈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될수도 있고,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그러나 돌아갈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의 땅이 될수도 있으며, “죽어도 돌아가고싶지 않은” 서러움을 안고 떠난 불만의 땅이 될수도 있다. 이처럼 리산의 소용돌이속에서 고향의 의미는 개별적인 조선족들의 경험, 인지, 느낌 속에서 다양하게 재현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대한 력사적기억은 어디까지나 조선족들의 락엽귀근(落葉歸根)을 지향하는 근원으로 된다. 즉 과거 조상들의 동북이주와 정착, 독립운동, 해방전쟁 및 사회주의건설에서의 무명영웅과 모범적역할, 민족영웅 및 자치주창립 등 조선족들이 걸어온 고난의 력사로 채워진 조선족들의 향수는 편안한 땅에 대한 동경을 넘어서, 상실될것만 같은 고향을 지키고 기억의 간격을 보충하여 채워넣는 복원적향수의 의미를 띤다 할수 있다. 또한 력사적기억을 기반으로 민족 관습, 규범, 풍속 등 문화적자원을 수단으로, 망향의 땅을 재건함으로써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를 끈질기게 지키려고 하는 갈망과 실천으로 가득찬 향수라 할수 있다. 결국 이동하는 조선족들의 향수는 지금은 도달할수 없지만 기필코 마음이 지향하는 곳을 지켜내려는 실천적, 열망적, 성찰적, 미래지향적인 향수인것이다.   덧붙이자면, 이동하는 조선족들이 느끼는 향수와 고향의 다양한 의미들은 그들의 일상적실천을 추동하는 감정, 정서들을 드러낼수 있는 실마리이자 이주 공간과 장소 및 그것을 련결하는 다양한 사회적관계의 변화를 더 세밀하게 분석할수 있는 요인이 된다. 또한 조선족들의 이주과정에서의 삶과 기억, 감정 및 문화에 대한 고찰은 월경민족인 조선족들에게 있어 “조국”, “모국”, “고국”의 의미와 향수란 무엇인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될것이며, 따라서 기존의 보편화된 “국민국가”의 틀이 어떻게 이주민들의 감정, 인지 및 실천의 령역속에서 재조정되고있는지를 살펴볼수 있는 계기가 될것이다. 인민넷  2017-4-5
46    연변말이 창피한가?!(허연화) 댓글:  조회:2021  추천:1  2017-03-28
연변에서 태여나고 자란 필자는 연변말이 참으로 정겹고 좋다. 일본에서 산지 오래되기에 연변말을 할수 있는 지인을 만나서 연변말로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소중하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 조선족이거나 한국 지인, 자이니찌분(재일동포)들과 대화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을 감추려 하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과 특수한 중국식 우리말 단어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 민족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줄수 있다는 배려에서 나온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연변사투리를 혼자 한다는것이 왠지 낯뜨겁다는 의식이 조금은 있었던것 같다.   연변말이 정겹고 좋은데 무의식적으로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 하였던것이다. 아마 독자들중에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거나 현재 이런 상황인 사람들이 있을수 있다. 왜 이렇게 연변말을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는 상황이 발생할가? 그것은 단지 편의를 고려해서일뿐일가?   본래 언어자체는 서렬을 매길수 없다. 하지만 현실생활에서 의식조사를 해보면 어느 나라에든 낮게 평가되는 방언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일본에서 동북지역의 방언은 촌스럽고 렬등하게 평가되며 이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일본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방언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한 한국 국내에서도 서울 및 서울말의 패권주의가 사회적문제로 론의되기도 한다.   허나 같은 방언이라도 표준말보다 호의적이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례를 들면 일본의 교토, 오사카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는 간사이벤(関西弁)이라는 방언은 현재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있으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토지역은 교토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다른 지역으로부터 온화하고 아름답고 정중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   그럼 왜 어떤 방언은 렬등감을 조성하고 어떤 방언은 자랑스럽다고 느끼는것일가?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편견에서 온다. 편견이라는 단어는 종종 나쁜 결과와 련계할때가 많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편견이란 어떤 집단의 성원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가지고있는 의견이나 태도를 말한다. 편견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많은 경우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얻어들은 소문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정보를 눈앞에 직면해도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같은 편 의식”을 느끼는 집단에는 호의적인 편견을 갖고있고 그렇지 않은 집단에는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특정된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있는 사람은 그 집단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기를 거부한다.   그럼 이런 편견은 어떻게 형성된것일가? 우선 매체의 영향으로부터 분석할수 있다. 연변사람, 연변말의 경우 한국TV의 뉴스와 드라마, 연예프로에서 부각된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 사실 한국에서의 “조선족”은 연변출신뿐만은 아니라 흑룡강성, 료녕성출신도 많다. 연변 이외의 출신의 말투는 연변말투와 다르며 경상도쪽의 말투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조선족”하면 연변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부각된다.    문제는 메체에서 보도되는 “조선족”의 표상이 특히 한국진출초기에는 사회밑층에서 사는 폭력적이고 거칠며 도시화되지 않은 모습이 위주였다는것이다. 그것은 한국진출초기 조선족이 종사한 일이 같은 한국사람일지라도 천대받고 기피하는 원향어선이나 3D(Dirty, Difficult, Dangerous)업종이였기때문이다. 게다가 말이 통하는것 같은데 아닌것 같은, 서로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다르다는것을 느끼던 적응단계였기에 크고작은 많은 트러블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매체에서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도 변화되고있지만 아직도 초기단계의 이미지가 뿌리깊게 작용하고있다. 하여 아직도 조선족이 쓰는 연변말은 흔히 조롱의 대상이 되군 하는게 사실이다.    연변말의 한국에서의 마이나스적 이미지의 영향은 한국사회뿐만아니라 중국사회 및 중국의 조선족사회에도 파급된다. 한국과 만나기전의 연변말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여러 억양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는 중심이였고 연변말은 주류어였으며 연변에서는 “표준어”로 통했다. 같은 연변에서 사는 한족들도 연변말을 따라하거나 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쇼핑중심이였던 서시장일대를 가면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아재, 아재”하고 말을 걸어오군 한다. “아재”란 연변에서 젊은 녀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또한 연변은, 중국의 다른 민족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특유한 문화를 유지하고있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며 깨끗하고 부지런한 민족으로 알려져있다. 중국의 55여개 소수민족중에는 천만을 넘거나 가까운 소수민족도 많다. 200만명(2010년 인구조사에서는 183만명)도 안되는 조선족이지만 예술에 능하고 교육률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국가를 만든 정률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강경산원사(중국에서 과학기술방면의 최고학술칭호), 중국대지의 각 대학의 조선족교수들, 우리말/우리문화를 유지하려는 모든 조선족들의 노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붐이 중국대지에 퍼지면서 한국매체에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중국에서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게다가 중국처럼 큰 땅떵어리에서 소수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없고 조선족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없는 지방에서는 되려 한국매체에서의 “조선족”의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로 자리잡을 때가 많다.    매체의 마이나스적 효과는 연변이미지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다. 매체는 소외, 모방살인, 사람들사이의 무관심의 생성, 편견의 강화, 중대하고 복잡한 문제의 왜소화와 간단화를 조성할수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물론 시청취자들은 그냥 피동적으로 매체가 보여주는것을 곧이곧대로 믿는것은 아니다. 시청취자들은 몰입만 하는것이 아니라 자기절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동성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별개다. 영국의 어떤 대학의 연구팀에서는 과거 TV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력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뉴스의 객관성보다 화면에 비춰진 폭력적인 기억이 고대로 사람들의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있었다는것을 발견했다. 주류매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연구결과이다.   매체가 만드는것은 부정적인 편견뿐만이 아니다. 우에서 말한 일본의 간사이지역 방언의 경우가 매체에 의해 전파된 긍정적인 편견에서 온것이라고 볼수 있다. 일본의 강호동, 류재석으로 통하는 산마, 신스께 등 개그맨거장들이 간사이지역출신이고 또한 연예프로그람에서 간사이출신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함으로써 간사이벤이라는 방언을 전 일본에 침투시켰다.    상업화된 매체가 주류인 현대사회에서 객관성을 가지기란 어려운 작업일것이다. 하지만 매체를 비판적 눈으로 관찰해야 할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여야 한다.   편견은 또한 한 집단이 처한 경제적위치와도 관련된다. 한국의 여러 동포들중에서도 연변말투가 유독 촌스럽다고 부각되는것은 왜일가?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만난20세기 90년대의 중국의 경제적상황에 의한것이 많다. 즉 같은 동포라 할지라도 재일, 재미 동포는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에서 온 동경의 대상이고 중국, 구쏘련 동포들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때문이다. 사실 구쏘련지역출신의 동포, 재미, 재일 동포들은 우리말자체의 보유가 매우 어려운 력사적,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우리말자체의 유지가 되여있지 못하고 사투리로라도 우리말을 구사할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하지만 중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중국소수민족정책이 유효하게 결합됨으로써 소수민족집중거주지에서 민족학교를 꾸리고 조선말로 공부를 할수 있고 심지어 대학입시시험도 조선어로 시험을 볼수 있다. 타향에 이주해서도 우리말로 말하고 글을 쓰는 매우 행운스러운 집단이 조선족인것이다. 물론 연변말은 다른 모든 방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말에서 나왔지만 또 자기 지역의 특정에 따라 변이를 거친것은 사실이다.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은것에 대한 자부감을 갖고있었는데 되려 “고국”에서 그렇게 소중하게 유지해온 우리말이 우리말이 아니라고 비웃음을 당한격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가난한 동포, “가난하다는건 게으른것이고 못배워서이다”는 한국사회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여 조선족이 쓰는 언어마저 가난해지고 천대받게 된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조선반도외에서 유지된 소중한 우리말의 변이인데도 말이다.   편견은 또한 력사적, 정치적 요인과도 관계된다. 례를 들면 일본의 동북지역방언이 자타평가에서 렬등적으로 평가받는데는 이 지역이 력사상 분단되고 정치적세력이 약화됨으로써 이 지역의 문화자체도 부당한 평가를 받은 력사가 현재까지 내려온것이 리유가 아닌가고 분석하기도 한다. 반면 교토는 오랜 세월 일본의 중심이였고 일본스러움의 모든 상징으로서 일본인의 귀속의식이 교토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언어의 이미지는 그 지역의 력사적인 평가와 밀접히 련관되여있다는것이다.   일본에서 살면서 여러 지역의 우리민족과 접촉해보면 우리말의 다양성과 변이를 느낄수있다. 각 지역의 우리말들이 억양이 다르고 쓰는 단어도 다를 때가 있지만 서로 느끼는 우리말의 기본적인 정서는 공통한것이 너무 많고 정겹다. 작년 3월, 일본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서 윤동주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었다. 시인이 남겨놓은 시를 읊는 부분에서 필자는 너무 감동을 먹었다. 우리가 다 아는 윤동주의 시들이 서울억양, 재일동포억양, 조선족억양, 일본인의 우리말발음억양으로 각각 읊어 귀에 들려오는것이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었다. 감동에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연변말이 낯뜨거웠던 그 시절이 낯뜨겁던 순간이였다.    “우리말”이라는것이 “표준어”만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더 넓은 범주로 의식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민넷 2017년 3월 27일자  
45    생(生)과 사(死) 그리고 우리네 삶(리화) 댓글:  조회:1958  추천:10  2017-03-23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여나 살다가 죽어가는 생(生)과 사(死)의 자연섭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말해서 신생아로부터 부단히 성장해가고 늙어가는 우리네 삶의 끝에는 항상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있는것이다. 아이러니한것은 오늘날 우리네 삶속에서 생(生)은 과분하다 할 정도로 반기고 또 그 반가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사(死)는 애써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터부시하는 대상으로 락인되여있다는 점이다. 마치 모두들 죽지 않고 천년만년 살것처럼, 죽음이 자신들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딴 세상 얘기처럼 착각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까지 빌어가면서 죽음에 관한 화제를 극력 피해가려고만 한다. 가령 친부모님에게라도 죽음을 대비해 저금통장이나 재산 정리, 유품 정리와 유언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렸다고 하자. 우리의 정서상 천하의 불효자식으로 세간의 손가락질과 질타를 받을게 분명하지 않을가. 따라서 새 생명의 탄생에 대비해서는 불과 몇주밖에 안되는 태아의 초음파사진으로부터 무려 열달이나 이어지는 임신일기, 태교, 만삭사진, 출산과정 동영상기록, 태줄도장, 태모필 그리고 떠들썩한 백일, 돌 잔치까지 이루 다 헤아릴수도 없을 정도로 그 이름마저 생소한 이벤트들에 모든 정성과 열정을 쏟아붓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영원한 안녕을 고해야 하는 죽음의 장에 있어서는 놀랄만큼 담백함과 랭정함을 보여준다. 그 일례로 뽀얀 담배연기로 가득 차고 슬픔과 경건함이란 도무지 찾아볼수 없이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 고성의 대화가 오가는 화장터에서 무엇이 그리 급한지 허둥지둥, 쫓기듯이, 건성건성 마무리해버리는 오늘날 우리의 상례 모습은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으며 때로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기도 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내 사람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나 자신 역시 누군가에 의해 보내져야 할것이다. 필자 역시 인생의 중간고개에 접어들고보니 매번 장례식장에 다녀올 때마다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차분히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닥쳐올 내 부모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그로 하여 이루 말할수 없는 슬픔에 빠짐과 동시에 이제부터는 정말 잘해드려야겠다는 철 늦은 다짐을 하게 된다. 설령 그 다짐이 또 일이 바쁘다는 구실로 얼마 동안이나 유효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게넵(1909)은 인간이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겪는 신체나 지위 변화의 중요한 시점마다 특정민족과 문화의 규정에 따라 치러야 되는 의식을 일생의례라 정의한다. 한편 우리 민족의 의례문화를 정의하고 연구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일생”을 확대 해석하여 세상에 태여나기전 부모의 기자(祈子)로부터 출생•육아•성년•혼인•환갑•죽음과 제사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의례를 모두 일생의례의 범주에 귀속시켜 왔다(김만태 2009). 이렇게 볼 때 일생의례의 중요한 축으로서의 죽음은 단지 한 개인의 육체적생명의 종결을 의미하는데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 혹은 공동체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처리방식은 해당 사회나 공동체의 문화적표상으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볼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역시 상례와 제례가 관혼상제의 절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의례로 간주해왔으며 “효”를 근간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원한 상례는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우리의 상례문화는 지금 전통의 계승은 제쳐놓고라도 죽은자에 대한 기본적인 례의와 애도의 분위기조차 느껴볼수 없을 정도로 피페해졌다. 사람이 죽으면 황급히 수의전문점에 가서 수의를 사다가 병원에서 소개해주는 장의사에게 초혼, 습, 소렴, 명정 등 시체처리의 기본 절차를 맡기며 게다가 그 장의사가 한족일 경우가 다반사다. 장례식장에서의 고별식 심지어 안신제마저도 한족집사를 고용하여 쫓기듯이 진행하고 상주를 비롯한 유가족의 옷차림 또한 각양각색이여서 조문객과 도무지 구분하기 어려우며 다만 일부 가정에서 녀성들의 머리에 꽂은 흰 광목끈이 가끔 눈에 들어올뿐이다. 조문객들 역시 형식적으로 고인에게 경례를 하고 공기 나쁜 장례식장을 떠나기에 급급하다. 유골을 화장한 즉시로 아예 날려 보내고 안신제마저 생략하는 집들 또한 적지 않다. 이러면 혹자는 "있을 때 잘해야지,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 있어"라는 말로 자아위안 겸 변명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살아계실 때 얼마나 잘해드렸을가. 우리 민족은 1950년대 초기부터 중국에서 유일했던 “로인독보조”의 활약과 198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 퍼진 2,000여개의 크고 작은 규모의 “로인협회”, 그리고 1989년 국가가 지정한 “9•9 로인절”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 전국 최초의 “8•15 로인절”, 각 가정에서의 모범적인 로부모부양 등 공적•사적 령역에서의 실천을 통하여 국내의 기타 여느 민족에게도 공유함직한 “효”의 문화를 우리의 중요한 표상으로 운용하고 그 정통성과 “다름”을 강조해왔었다. 그러나 2017년 현재 연변의 어느 조선족양로원 80명 로인 중 5명만 자녀가 모셔가서 설을 쇴다는 서글픈 신문기사를 접했을 때 소위 “효”의 민족이라 자부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느낄수 있으며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개개인 또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효”점수를 매길수 있을가. 최근 몇년래 초고령화사회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종활(终活)”이라는 단어가 대류행이다. 로인들이 자신들이 생을 마감했을 때 자녀가 곤난을 겪지 않도록 미리 유언작성, 년금보험의 재검토, 장례식, 묘지 결정, 엔딩노트 작성 등을 하는 활동을 한다. 그런가 하면 자녀가 부모와 함께 종활을 하는 사례도 많은바 몇년전 필자가 봤던 다큐멘터리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고령의 부모님과 함께 즐겁게 엔딩노트를 쓰고 사진과 옷가지 등 유품들을 정리하는 자녀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위하여 직장에 사표까지 내고 무료도우미가 오는 시간을 리용하여 파트타임으로 알바를 하면서 어린아이로 돌아간 어머니를 애기처럼 돌보는 딸, 시한부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온 식구가 돌아가면서 간병을 하고 그 어머니의 림종을 모두가 손잡고 웃으며 지켜보고 잘 가시라는 인사의 말을 건네는 자녀들… 부모가 자녀의 생(生)을 맞이하면서 그래왔듯이 자녀도 부모의 사(死)를 앞두고 온 마음을 다해 그 곁을 든든히 지켜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냥 어둡고 아프고 슬프기만 한것이 아닌 따뜻하고 경건하고 아늑한것이기도 했다. 생명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거스를수 없는 숭고한 자연의 섭리이며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느냐 하는것은 한 사회나 공동체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들을 뒤로 하고 온전히 홀로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게, 두렵지 않도록 부모님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고 함께 기다리다가 편안히 보내드리는 그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효”실천의 장이자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생(生)과 사(死)의 동반관계를 피부로 느낄수 있는 장임이 틀림없다. 흔히들 21세기는 의식형태가 아닌 문화적힘의 경쟁시대라 일컫는다. 조선족상례는 이미 2009년에 벌써 길림성비물질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른바 전통의 지속은 변용을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위적으로 재구축될수도 있는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전통문화에 대한 적절한 취사선택과 재구축을 통해 보다 성숙된 우리만의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족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절실한 과제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리화 략력】 성명: 리화 (李华) 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 전공: 문화인류학, 초국가적 이동과 가족, 조선족 생활문화 학력: 일본 동북대학교 학술박사 연변대학교 정치학 학사 주요 론저: 저서 《조선족사회의 변동과 가족생활》 (2015, 한국학술정보) 외 다수 론문을 국내외학술지에 발표
44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를 통해 본 평생학습도시의 구축 댓글:  조회:1690  추천:1  2017-03-14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를 통해 본 평생학습도시의 구축   김화선   평생교육이란 “개인의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전 생애에 걸친 교육(수직적차원)과 학교 및 사회 전체 교육(수평적차원)의 통합”을 의미하는것으로, 년령과 사회의 한계를 벗어난 일생에 걸친 교육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생학습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기존에 있었던 '학교중심의 교육'이라는 교육의 관념적한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생각의 일환으로 파악될수 있다.   20세기 60년대부터 유네스코에서는 평생교육을 중요한 교육사조로 전세계에 보급하는 노력을 해왔다. 중국은 1993년에야 정부의 문건인 “중국 개혁과 발전 강요”에 처음으로 “평생교육”을 써 넣었다. 2010년 7월, 당중앙과 국무원에서 공동으로 제정한 “국가중장기교육개혁과 발전기획강요(2010-2020년)”에 평생교육체계를 건립하고 완비시켜야 할 중요성에 대해 비교적 큰 편폭을 할애하여 다루었다. 따라서 국가차원의 평생교육체계를 설립하는것은 하나의 리상이고 목표라고 할수 있다.   평생교육체계의 설립은 학습형사회를 구축해가는데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수 있다. 현재 중국의 많은 대학교에 평생교육원이 설치되여있고 대도시의 사회구역에서도 사회구역대학을 설립하여 평생교육기관으로 응용하고있는 추세를 보인다.    2016년 12월 말, 연길시에“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가 설립되였다.“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는 연변주민정국에 등록을 하고 연변주부녀련합회를 업무주관 단위로 하는 사회단체로서 연변 조선족녀성들이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고있다. 법인 사회단체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의 설립은 기존의 민족 교육에 대한 인식과 담론을 확장시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할수 있다.    지난 2017년 1월 21일, 연변대학 예술극장에서는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과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에서 공동주최한 대형화책 《장백산의 진달래꽃-연변대학녀성평생교육총동문회성장발자취1999-2016》출판발행의식을 가졌다.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초대 회장 김영순이 주필을 담당한 화책 《장백산의 진달래꽃》은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중국어로 출판되였다. 화책은 연변대학에서 추진한 녀성평생교육프람과 회원들의 열정과 현실적수요, 그녀들의 문화적자각에 의해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가 설립되기에 이르기까지 17년간의 력사적 발자취를 기록하고있다. 녀성평생교육을 핵심리념으로 17년간의 력사적 실천경험을 생동하게 기록한 이 화책은 앞으로 연길시를 평생학습도시로 구축해나가는데 좋은 지침서가 될것이다.    이 화책의 주인공들인 연변 조선족녀성들은 주로 경영직과 전문직에 종사하고있는 고졸학력의 재직일군으로서 분망한 직업생활속에서도 평생교육프로그람을 선택하여 자신의 문화소양을 쌓고 문화안목을 갖추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들의 다년간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사업상의 진보는 이들을 가르치는 대학교 선생님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으며 지역사회의 존경과 인정을 받도록 했다. 연변녀성들이 17년간 평생교육을 매개로 직업녀성으로서 경제력 상승과 그에 상응한 문화적소질, 문화적안목을 갖추려는 노력은 격조높은 화책을 통해 집중적으로 보여지고있다.   현재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의 회원들을 대표적인 사례로 연변 조선족녀성들 사이에서 문화적인 여가생활수요와 실천활동은 폭발적으로 표현되고있다고 할수 있다. “연변시랑송협회”, “코끼리엄마클럽”, “명동서예교실” 등등 조선족녀성들의 학습공동체에서는 정기적으로 학습과 작품발표 등 모임을 조직하여 녀성들의 수요를 만족시켜주고있다.    연변 조선족녀성공동체의 문화적인 안목으로 실천되고있는 각종 학습프로그람들이 연길시를 평생학습도시로 구축해가는데 주요한 밑거름으로 역할하게 될것이라는것을 저자는 확신하고있다.   [김화선 략력]   김화선, 녀, 1969년 출생, 소속: 현재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주임, 연변대학 사회학과 부교수   학력: 리화녀자대학교 녀성학과 박사, 연변대학 정치학부 학사   저서: 《조선족마을의 변천연구》(2012년), 연변대학출판사. 출처: 인민넷 
43    신집거지에서의 민족학교 교육에 대한 사색 댓글:  조회:1926  추천:1  2017-03-13
신집거지에서의 민족학교 교육에 대한 사색 리상우 조선족 지성인들은 오래전부터 차세대 민족교육과 민족교육의 혁신과 관련해 고민과 실천을 이어왔고, 최근 정음문화칼럼 등 온라인에서의 열띤 론의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고 볼수 있다. 필자는 수년전부터 “신집거지에서의 민족교육”이라는 테마로 청도에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오고있다. 조사와 연구를 하면서 필자가 지속적으로 던졌던 질문은 “청도(또는 조선족 신집거지)에 거주하는 조선족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선택의 동기는 무엇일가?”였다. 조사와 연구는 비록 조선족 사립학교(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 두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공립학교가 없는 현에서 사립학교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앞으로 청도(또는 조선족 신집거지)에서의 조선족 공립학교 설립 및 그 향방과 관련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줄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조사결과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민족정체성 유지”보다는 “민족정체성 유지+실리 추구”를 위해 조선족학교를 선택한 학부모들이 많았다. 즉 존대말를 포함한 언어, 본 민족의 례의범절이나 문화를 습득하기 위한것과 더불어, 한국이라는 자원의 활용(또는 장래 목표는 한국류학), 조선족 학부모들간 비지니스 인맥 형성, (학부모가 맞벌이일 경우) 기숙학교의 장점 등 실리적요인도 무시할수 없는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미래지향적이고 선진적인 교육리념과 방식, 교육콘텐츠 등은 학부모들의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 조선족의 전통집거지인 연변의 “소인수 학급교육”(연길시 연신소학교)이 민족교육의 문제점들인 민족학교의 통페합, 학생수의 감소, 언어교육의 어려움, 능력있는 교원의 감소, 교원 수급의 어려움, 학교 재정의 곤난, 가정교육의 붕괴 등을 해결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매달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역의 교사들이 연신소학교에 모여 모델에 대한 교육을 받고, 수업을 참관할 정도라고 한다. “소인수 학급교육”은 일종의 “열린 교육”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는, 토론하고 합의해나가는 과정으로서 수업을 진행하는것을 핵심으로, 학급당 학생수를 20-30명 이하로 편성, 교장실, 교무실을 없애고 교무행정을 철저히 민주적으로 시행하면서 학생과 교사와의 관계를 수직적관계에서 수평적관계로 재정립, 수업시간을 40분으로 줄이는 등 내용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청도 조선족 사립학교의 경우, 교육리념과 방식, 교육콘텐츠 면에서 어떠한 칭찬할만한 또는 특이한것들이 있는가? 정양학교는 “바른 교육, 밝은 교육”을 교육리념으로 내세우고있는데, 특히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것은 다른 학생식당에서는 볼수 없는 “맛있게, 즐겁게, 깨끗하게,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는 패말이었다. 또한 서원장학교의 경우는 “인성교육”을 교육리념으로 내세우면서, “10가지 상”을 만들어 10가지 상중 7가지 이상에서 “상”을 받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3호(품행, 공부, 신체건강)학생”의 경우, 선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학업성적이라면, “10가지 상”에서는 그 1순위가 “효도상”, “학습상”은 9순위에 머문다. 더욱 놀라운것은 어느 한족학생 학부모와의 인터뷰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본인이 조선족학교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리유가 례의범절에 대한 교육때문이라는 점이다. 한편, 정양학교는 자매결연과 협약 등의 형식으로 연변대학과 한국 유수대학의 교육자원을 활용해 교육리념과 방식의 지속적인 혁신을 도모하고있다. 더불어 정양학교는 청도의 조선족대학생련합회와 지속적인 협력을 도모하고있는데, 같은 민족간의 교류가 민족정체성, 정서적뉴대감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때, 이른바 “조선족공동체의 해체”를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조선족대학생들에게는 재능기부의 기회를, 그리고 후배들인 중소학교 학생들에게는 민족정체성 강화의 기회를 부여하고있는것이다. 아울러 정양학교와 서원장학교가 내세우는 “1인 1특기”의 장기(特长)교육, 매학기 1회 이상의 학교 지도자와 학부모의 1대 1 면담, 그리고 최근 들어 한국 대원외국어고등학교(한국 최고의 외국어고등학교)와의 협력을 통해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부 학생들을 상대로 영미권대학반, 중국대학반, 한국대학반을 별도로 운영하고있어 많은 학부모들의 관심을 받고있다. 신집거지에서의 민족학교 교육에 대한 기존의 론의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체로 교육환경이라는 구조적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공립 민족학교 설립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는것이 아닐가싶다. 물론 필자는 교육환경이라는 구조적요인이 신집거지에서의 조선족 민족교육의 발전을 저애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임에 공감하고있고, 더불어 신집거지에서의 공립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행위자인 학부모들의 선택 동기, 즉 학교나 교육 프로그람의 다양성은 역으로 학부모들에게 선택의 딜레마를 야기시키며, 학교(민족학교)의 선택은 결국 비용, 교육리념과 방식, 교육의 질과 효률성 등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한 학부모들의 전략적결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민족교육이 서비스에서 경쟁력을 갖출 때 조선족학생은 믈론 한족학생 학부모들에게 조선족학교 선택의 동기부여를 할수 있고, 또한 그러한 리유에서 례의범절 교육때문에 조선족학교를 선택했다는 그 한족학생 학부모의 말씀을 되새겨봐야 하는것이 아닐가. 【리상우 략력】 성명: 리상우(李翔宇) 소속: 중국해양대학 조선어학부 전공: 조선반도문제, 동북아국제관계사 학력: 한국 서강대학 정치학 박사 연변대학 법학 석사 동북사범대학 법학 학사 경력: 한국 서강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연변대학 사회과학부 강사를 거쳐 현재 중국해양대학 한국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중국해양대학 조선어학부 강사. 주요 론저: 《초국적 이주, 중국조선족과 경계설정》(《한국과 국제정치》, 2015) 、《신집거지와 중국조선족의 민족교육 실태 분석: 칭다오 정양학교 사례를 중심으로》(《동아연구》, 2014) 、《개혁기 중국조선족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 구심력과 원심력을 중심으로》(《동아연구》, 2007) 등 다수 론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인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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