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http://www.zoglo.net/blog/xudongzhi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칼럼/단상/수필

전체 [ 39 ]

19    인테리와 학문의 부패 댓글:  조회:2217  추천:140  2007-02-21
대학생들의 졸업논문을 심사하면 거의가 인터넷에서 도적질해온 조잡품이여서 기껏해야 급제를 주지 절때로 우등은 주지못하겠다는 대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나서 당신네 대학교 선생들도 학술지에 써올린 글들도 대부분이 도적질한거지 하고 내가 질문했더니 그것은 교수나 부교수가 되기 위해서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 선생들이 방법이 없으면 대학생들도 졸업장 때문에 방법이 없어 그렇게 하니 우등을 좀 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오늘날의 학문부패는 시대적인 원인과 특성이 있다. 언젠가는 정치적인 사상적인 원인으로 하여 겸손하게 <<학습>>한 체득이라고 하면서 앵무새 소리를 내더니만 현재는 분명 표절품인데도 이름자를 감히 써넣고 <<연구>>를 한 성과라고 한다. 이만큼 요즘의 학문은 인테리들의 체면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학문의 자존심>>을 입밖에 낸 자가 더 무안할 지경으로 너저분하다.먼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학문이란 속세의 淨土로서 깨끗한 심성의 대명사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중국의 인테리들은 속세와의 타협을 생존수단으로 해왔으며 또 관료배로의 전락과 타락의 걸음을 멈춘적이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국의 인테리들은 아무런 물질준비와 심리준비가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레 들이닥친 동전의 물결에 휘말려 아주 짧은 시일내에 아주 대규모적으로 백기를 들고 있으며 인테리의 타락과 학문의 부패가 큰 사회문제로 남아있다.이런 현상에 대하여 나로서는 리해가 되는것같기도 하고 또 리해하기가 힘들기도 하다.언제가는 유도탄을 만드는 사람들이 茶계란을 파는 사람보다도 못하는 말이 있었듯이 인테리들이 참으로 푸대접을 많이 받아왔고 하물며 인테리도 사람인데 5情6慾이 있을텐데 하고 생각하면 현재의 학문의 부패와 인테리의 타락에 대하여 조금 리해되는상싶다. 하지만 반면에 한 나라에서 소위 <<진리를 사색>>하는 사람들이 다 이지경으로 되였다면, 이런 분들 대부분이 나의 눈에는 거의 올가미로 보이는 동전 구멍에 머리를 깊이 들이밀고 공부는 무슨 공부 연구는 무슨 연구 하는식으로 살고 있다면 ,살아간다면 중국의 만백성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가 하는 위구심이 나를 죽인다. 진짜 술 한잔 하면서 <<래일을 위하여>> 한마디 부르짖는 일도 곤혹스러운 일로 되여버린다.
18    유학의 실패 댓글:  조회:2279  추천:96  2007-02-21
유학은 인간의 륜리도덕과 현실생활에만 관심을 두었고 인간의 령혼불멸과 來世의 추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리유만으로도 유학을 종교라고는 할수가 없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종교는 형식면에서 敎義와 조직시스템 그리고 신도가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인간의 終極적 과제인 령혼불멸과 인간생명의 영구성을 추구한다고 판단이 되여왔다. 종교에 관한 상술한 전통적인 판단규준으로 볼 때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고 학설이고 사상이고 리상이다. 헌데 동아시아지역에서 유학은 몇천년동안 주체적인 이데올로기와 륜리도덕규범으로 존재하여 왔고 객관적으로도 인간의 정신생활면에서 거의 종교적인 역활을 해왔다. 그래서 누구는 유학도 종교라 하고 있으며 또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학이 종교인가 종교가 아닌가 하는 쟁론도 있다.유학사상의 기본은 3강과 5상이다. 三纲은 君为臣纲. 父为子纲,夫为妻纲이고 五常은 仁、义、礼、智、信이다. 유학은 3강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관계와 인간사회관계를 5상의 수단으로 조화롭게 꾸리고 조화롭게 구축하여 리상적인 인간사회를 만들려 했고 노력도 많이 해왔다. 력사적으로 보면 유학은 춘추전국시대에 百家중의 일가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무제시기의 大儒 동중서를 통하여 권세가들의 중시를 받고 사상독존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후에는 불교와 도학의 영양을 섭취하여 동아시아지역의 통치사상으로 되였다. 특히 宋明시기에 유학은 리학으로 전변하여 완만한 체계를 이루었고 농경사회의 인테리와 관료계층을 포함하는 각 계층이 一知하는 확고부동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부동한 문화권 사이에 발생하는 상쟁을 종극적으로는 물질적인 힘만 아니라 사상의 상쟁이라 할수가 있다면 근대로부터 있게 되는 공업문명을 토대로 하는 해양세력을 상대하여서부터 유학은 먼 옛날 유목문화를 상대하던 시대의 우세를 크게 상실했고 끝내는 경제적인 사회적인 토대를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통치사상의 위치에서 탈락하여 수많은 인테리들과 사상가들의 철저한 비판을 받아왔다.유학은 아시아농업생산방식과 북방에 긴 포위선을 이룬 유목사회를 대처해야하는 동아시아 생존환경의 산물이다. 륜리도덕규범과 사상통일을 통하여 인간관계의 리상적인 조화와 인간사회의 리상적인 질서를 구축하여 천륜사회를 이루려했던, 또 어느 정도의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였던 유학이 어찌하여 무참한 실패를 당했을가? 나는 유학이 실패한 원인을 사회객관환경의 변화와 유학의 제한성 그리고 통치계층의 음험성에서 찾아보고싶다.근대에 이르러서부터 동아시아지역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서방세계를 직면해야했다. 생존환경의 격변은 지리적 시야와 사회적 시야가 상대적인 밀봉상태에 있었던 동아시아인들로 하여금 생존렬세를 느끼게 하였으며 또 자아도취의 苦果를 실컷 맛보게 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지역도 서서히 격변기에 들어섰고 전통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유학은 존재의 사회토대를 상실하게 되였다.유학은 동아시아지역의 리상주의사상으로서 인간관계와 인간사회관계의 질서를 구축함에 있어서 윤리도덕규범의 힘을 과대했고 인간관계와 인간사회관계의 물질성에 대하여 충분한 리해가 없었으며 물질생산과 소비 그리고 사회제도갱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물질성과 동물성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전제조건으로 이루어진 서방민주사상과 비교하면 유학은 부득불 무력하고 또 내재하는 허위성을 감추기가 아주 어렵다. 지금까지 봉건지배계층을 비롯한 소위 통치계층은 유학을 리용하여 인테리와 만백성에 대하여서는 윤리도덕의 리상적인 경지를 요구했지만 자아집단내부에서는 유학과는 전혀 다른 윤리도덕규준을 내세웠고 실행하여왔다. 이처럼 공자 맹자의 아름다운 리상과는 다르게 통치계층의 리용지물로 되였던 유학은 현실사회에서 우리의 언행을 다소 지배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만 유학이 문화의 관성속성의 힘을 빌었기 때문이다.유학 또는 공자 맹자의 한두마디 고운 말들을 빌어서 유학을 분식하는 일들이 없었으면 참 좋겠다.
17    문화대혁명에 대한 雜見과 기타 댓글:  조회:2352  추천:119  2007-02-21
문화대혁명이 1966년에 시작되여 1976년에 결속되였다 한다면 바로 내가 태어난 해에 시작되여서 내가 소학교 3학년을 다닐 때 끝난것으로 된다. 소학교 때 공구와 림표를 비판하는 작문을 써서 교실 뒤쪽에 있는 흑판보에 붙혀놓아야 했던 일, '4인방'을 분쇄하고 <<꾀꼴새가 노래하고 제비가 춤춘다>>는 시구를 밥 먹듯 외우고 지각생들이 결심을 표해도 <<머리에는 뿔이 나고 몸에는 가시가 돋힌>> 계급의 적들을 족치는 혁명후계자가 된다고 하던 일, 그리고 생산대에서 <<농업은 대채를 따라배운다>> 하면서 어른들이 다락밭을 만들고 빈하중농들이 부농을 투쟁하던 일 등 등이 '문화대혁명'이 나에게 남긴 거의 전부의 직접적인상이라 한다면 이런것들은 모두가 '문화대혁명'이 나에게 남긴 표면적이고 편면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나이를 먹으면서 문학작품과 영화 등을 통하여 '문화대혁명'에 대한 수동적인 간접적인 리해를 꽤나 진행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문화대혁명'이란 몽롱한 이미지다. '문화대혁명'이란 구경 무엇이였을가? 모주석이 착오적으로 발동한 착오적인 정치운동이라는 한마디로 '문화대혁명'의 내실과 전부를 설명할수가 있을가? 중국공산당내부의 권력다툼이라는 상습적인 판단 하나로, 당대 중국인민의 수난의 력사라는 낱말 하나로 문화대혁명을 우리의 기억에서 깨끗하게 지워 버릴 수가 있을가? '문화대혁명'은 력사사건으로서 정치운동이면서도 또한 문화현상이다. 나는 문화대혁명은 60년대와 70년대의 랭전백열화시기에 중국에서 발생한 중국력사문화의 관성적인 로출이며 중국정치문화의 습관적인 로출이라는 나름의 생각을 해본다. 중국은 근대에 쇄국국책을 취하였다가 뒤에 수동적으로 문호개방을 했고 인테리들은 적극적으로 西學中用이라는 지도사상아래 서방국가의 선진적인 물질문화와 제도문화 그리고 정신문화를 받아들이기를 시작하였다 . 하지만 짧은 시간내에 중국은 西學을 받아들일 <<소화계통>>도 없었고 부패한 관료정부와 국력의 대 상실로 하여 제1차세계대전뒤에도 소위 전승국이기는 하였지만 서방렬강의 식탁에 오른 료리 한접시에 지나지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뒤 신중국 초창기에는 쏘련의 힘을 빌러 국제무대에 오르려고 노력은 했지만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권의 간섭과 밀봉포위를 받았고 또 쏘련권에서의 탈출을 계기로 다시 지구상의 孤島로 되였으며 대국이기는 하지만 인류사회동참권을 얻지를 못했다. 랭전시기의 이러한 4면초가 국제정세가 모택동을 비롯한 신중국인들에게 크나 큰 생존부담과 심리적 부담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 대응과 발로로서 신중국인들은 모택동의 천성적인 선동력과 선전기구의 강대한 인도하에서 또 다시 외국렬강인 제국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하여 크나큰 증오심을 품게 되였고 <<간고분투 자력갱생>>의 분발심과 피타는 노력으로 기존하는 국제질서를 때려부시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쟁취하여 생존과 발전을 꾀하려 하였다. 이 시기는 또 중국사회내부가 천천히 관료사회로 전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과거에 중국의 신민주주의혁명의 령도자로 핵심으로 부상했던 중국인테리들과 직업군인들이 인생목표로 받아들였던 위대한 공산주의리상과는 다르게 권력숭배에 물젖기 시작했고 기득권으로 대두하여 보수적인 세력으로 변화되였으며 사회등급결구에서 확고한 최상을 차지하게 되였다. 리상주의와 낭만주의의 기질로 넘치는 모택동은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자>>는 념원과는 거리가 날마다 멀어지는 중국사회를 바로잡기 위하여 또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이 인민대중의 힘을 리용하여 관료사회를 개조하려던 '문화대혁명'은 그 뒤에는 욕망과는 다르게 정치투기자들의 조종과 군인들의 정치참여에 의하여, 또한 홍위병을 대표로 하는 광범한 신중국인들의 맹목적인 정치참여열성과 국제질서와 국내정세에 대한 불만의 히스테리적인 발로로 하여 끝내는 모택동도 수습하기 어려운 동란으로 변해버렸다.'문화대혁명'은 철저한 실패를 보았다.대내적으로는 관료사회를 얼마 개조하지도 못했고 대외적으로는 인류사회동참권도 얻지를 못했으며 다만 중국사회에 막대한 손실을 남겼고 문학가들의 문학소재만 수두룩하게 남겼을뿐이다.'문화대혁명'에 대하여 문화적인 반성과 력사적인 반성이 있어야한다.나로서는 어떤 제도와 수단으로 중국 인테리들의 관료배 전변을 방지하고 정치와 국방의 상대적인 독립을 추구해야 할가고 생각해보고도 싶다. 그리고 또 어느 나라든지 국민의 열성으로만 인류사회 동참권이 주어지지 않으며 국력을 키워야 만이 인류사회로의 동참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16    중국력사의 중앙집권제도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2431  추천:120  2007-02-21
파미르고원과 티벳고원에 놀러갔을 때 중국은 다행이도 서쪽방향과 서남방향 가장자리에 이처럼 거대한 천연병풍을 소유하고 있기에 기나긴 중세기에는 륙로를 통하여 오는 서방세력의 침입을 받지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력사에는 假設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만도 근간에는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져보면서 나는 유라시아대륙의 대서양과 가까운 동네인 유럽지역은 다행이도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험산준령의 덕분으로 , 남아시아지역은 다행이도 티벳고원의 덕분으로 동아시아 농업제국의 거대한 힘에 말려들지 않았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동아시아농업제국 바로 중국의 중앙집권제도의 력사적인 흐름을 가늠해보면 나는 그럴사한 느낌에 사로잡힌 듯하다.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나라를 통일해서 부터 중국은 줄곧 분봉제를 페지하고 중앙집권제도를 리용하여 생존과 발전을 꾀하였다. 거의 2천년간에 중국의 朝代가 많이 바뀌기도 했고 남북분렬기를 거치기도 하였지만 중앙집권제도가 국가권력결구시스템에서 주맥으로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여왔다. 따라서 중앙집권제도의 강력한 힘으로 중국 국토의 상대적인 완전보존과 확장을 실현했고 중화문명권의 독립성을 확보했다. 진한제국과 당제국 그리고 청제국을 중국의 중앙집권제도의 전성기라고 볼수 있다면 상응한 중세기에 유럽이라든가 인도대륙은 중국과는 다르게 권력분산의 길을 많이 걸었고 분렬기가 많고도 길었기에 통일정권이 다소 있기는 하였지만 국력이 중앙집권제도하의 중국 국력보다는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만일 상술한 천연병풍이 없었다면 유럽지역과 인도지역에서 중화문명의 세력침투를 견제할수가 있었을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중국력사의 중앙집권제도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가 전국의 권력을 대집성하는 제도이다. 권력의 절대적인 대집성은 절대적인 독재라든가 부패라든가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중앙정부가 국가기구를 리용하여 강압적인 수단으로 비교적 빠른 시일내에 전국의 물력과 재력 그리고 인력을 집중시켜 대외적으로는 外족의 침략에 대응하고 대내적으로는 큰 사회변고를 대처할수가 있었다.근대이전의 중국력사는 황하지역과 장강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와 북방의 초원을 무대로 하는 유목사회 사이에 있었던 판가리와 타협 그리고 융합으로 이루어진 력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먼 옛날부터 중국의 농경문화권은 몽고고원의 강대한 기동군사력을 안받침으로 약탈을 업으로 삼는 유목문화권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분산된 국력과 군사력을 합류하고 힘을 대집성하였고 자연히 중앙집권제도를 실행하여왔고 또 중앙집권제도는 중국전통정치문화의 한부으로까지 되여왔다.이처럼 중국의 중앙집권제도는 중국의 생존과 발전의 전제조건이였으며 또한 필연이였다. 간단한 실례로는 만리장성을 들수가 있다. 중국의 국가권력결구시스템이 중앙집권제도가 아니라 다른 분산적인 국가권력결구시스템이였더라면 만리장성이라는 막대한 국방공사가 가능했을가? 중국만이 아니라 생존위기의 직접적인 배출물인 중앙집권제도를 실행했던 나라가 력사적으로 많이 존재한다.1차대전뒤에 러시아는 10월혁명을 거치여 중앙집권제도를 꾀하였고 또 그 힘을 빌어 서방세력을 견제하였으며 2차대전기간에는 쓰달린의 전시경제정책을 비롯한 중앙집권제도의 강화를 통하여 반파쑈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를 통하여 중앙집권제도를 강화했고 그후에 세계렬강의 하나로 부상했었다. 당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중앙집권제도를 리용하여 생존과 발전을 꾀한 종족과 나라가 꽤나 존재하여왔다.냉전시기에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본주의권에서 반공과 반사회주의정책을 실행했던 리유의 하나가 그들이 공산권국가의 중앙집권제도의 힘이 크게 무서웠던 까닭이 아닌가 싶다. 중국처럼 락후한 나라가 모택동과 공산당의 령도아래 중앙집권제도의 힘을 빌어 빠른 시일내에 2彈1星까지 만들었으니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에서는 얼마나 놀랐고 무서웠을가?어떠한 국가권력결구시스템이든지 장점과 단점이 있고 또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사여원위(事与愿违)라는 결과도 초래하게 된다.중앙집권제도도 마찬가지로 독재라든가 부패라든가 문화독점이라든가 등의 마이너스영향을 가져올수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류의할 바이다.근년에는 제도만능주의가 비판을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少见多怪이여서 그런지 권력제도를 비롯한 사회제도를 의논하는 사람들이 퍽 줄어 들었고 그런 내용을 담은 소책자들이 많이 적어졌다는 느낌도 있다.
15    중국인의 문화적인 부담 댓글:  조회:2315  추천:143  2007-02-21
소유하고 있는 자도 부담이 있다. 어딘가 떠나고싶지만 또 떠나야 하지만 소유하고있는 가택이라든가 재산을 버릴수가 없어 자리에 머물러있는 사람이 있듯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소유물을 지켜야 하기에 보존해야 하기에 시달림을 받는다. 북경의 고궁박물관이라든가 서안의 섬서성력사박물관에서 중국문화의 물질적 증거물로 되는 문물들이 즐비하게 진렬되여 있음을 구경하고 중국만큼의 력사문화를 소유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이런것들을 보면 한쪽 어깨가 축 내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굴린적이 있지만 나는 가끔은 중국인은 찬란한 력사문화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문화의 견제력과 소유한 자의 시달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중국은 근대로부터 국력의 쇠퇴와 서방렬강들의 침입으로 하여 정치,경제적인 수난을 많이 겪은 또 문화적인 천신만고의 세례를 받은 나라이다. 중국의 수많은 인테리들이 5.4운동시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전통문화비판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반성을 멈춘적이 없다. 헌데 요즘의 중국에서는 옛날 유목문화와 불교문화를 받아들이던 넓은 흉금과 너그러움을 다 잃어버리고 무엇이든 좋은것이면 중국의 전통문화와 이어놓으려는 심상치 못한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아시아 네마리 룡의 경제기적을 한국과 싱가포르를 례를 들어서 중국유학문화의 산물이라고 강의를 했고 90년대 중엽에는 儒商이라는 낱말과 중국식 인테리가 경제주도권을 가져야한다는 學潮가 크게 류행되더니 근년에는 後현대유학이라는 유령이 중국에 떠돌면서 호금도주석이 과학적인 사회발전관으로 和谐社会(허세써후이)를 가꾼다는 이념도 중국의 유교사상이라 떠들어대는 학자들이 있지만 민주사회리념이라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처럼 유학사상이란 무엇인가 유학사상이 현실사회에 적합한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를 못하고 무엇이든 좋은 것이면 유학을 대표로 하는 중국전통문화에 강접을 시키려는 사람이 행세를 한다.생각해보면 슬픈 일이다. 전통문화가 좋기 때문에 지킴이 아니라 선조가 만들었기에 우리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행위가 바로 소유한자의 괴로움이다. 로신과 같은 반유교 맹장들은 전통문화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상으로 비판하기도 했지만 천년의 고질도 선조들이 많들었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중국인이다.중국인은 소유하고 있기에 부담스럽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아니면 코웃음을 하는 사람이 있고 무엇이든 먼 옛날에 우리는 이미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중국인이 아직도 적지않다.세상사람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멀다. 언제이면 중국인도 소유한 자의 한계와 부담을 떨치고 신들메 조일수가 있을가?
14    빈곤대학생의 은행대출 그리고 중국신임위기 댓글:  조회:2354  추천:104  2007-02-21
빈곤대학생 하면 어감적으로 조금 기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있고 현실속에는 경제여건이 좋지못한 대학생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한다. 교육산업화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육人性化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 근년에는 나라에서 빈곤대학생들에게 은행대출제도를 베풀고있다. 따라서 적어도 리론적으로는 돈없는 집 애들도 공부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였다.내가 사는 도시의 물가수준하에서 한명의 대학생 일년학비와 일년생활비 합계가 적어도 인민페 만원은 소요되는것 같다. 부모가 직장을 둔 대학생은 괜찮지만 농촌에서 온 대학생에게는 인민페 만원이라는 돈이 참으로 거금이다. 그러므로 매스컵에서 하는 이야기처럼 빈곤대학생 은행대출제도는 아주 좋은 일이라 생각해왔다 .헌데 리론과 현실을,국책제정과 국책집행을 일치화 시키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대학에 직장을 둔 집사람이 개학해서부터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친다. 대학생들 공부때문에 바쁜게 아니라 대학생들 은행대출로 하여 아주 시간이 없다고 한다. 대학생들을 설복하여 학비를 내게 하고 또 은행대출을 신청하는 수속을 밟아주다나니 밤 12시까지 잔업을 한다. 물어보면 현재 그 대학교에는 학비를 내지않는 학생이 아주 많으며 그런 대학생중에는 빈곤대학생보다도 부모의 돈을 받아서는 학비로 쓰지않고 소비도 하고 장사도 하는 소위 가짜빈곤대학생이 더 많다 한다.가짜빈곤대학생들은 경제여건이 주어졌지만은 학비를 내지않고 대학교의 학비독촉을 받으면 향정부 혹은 가두판사처의 벌건 도장을 박은 빈곤대학생증명을 제출하여 대학교측에서도 아직은 별로 좋은 대책이 없다고 한다. 헌데 많은 재교학생이 학비를 내지않으면 학교정상운행이 불가능해짐으로 대학교에서는 지금 한창 나라정책의 힘을 빌어 은행과 재정국과의 상담을 거쳐 무이자(이자는 성재정에서 대신 지불)대출을 <<발급>>하는 중이라 한다.그리고 근년에는 학비를 빚지면 졸업해도 대학졸업장을 주지않는다는 대학교규정을 아주 무시하고 졸업장이 다 뭐냐 하는 식으로 졸업후는 학비를 빚진채로 졸업장을 포기하고 사회진출을 하는 대학생도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공짜공부를 하는 대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다 .공짜공부를 하는 대학생들의 학적을 지우면 금방 정책위반으로 되기에 학교측에서는 꾸준하게 참고 견디는 상황이라 한다.근년에 중국인의 신임위기라는 이야기가 많이 제출되고 있지만 이것도 중국인 신임위기의 하나가 아닐가?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것은 교육을 주관하는 부성장이 중앙에서 규정한 빈곤대학생 은행대출임무를 완성하지못하여 비평을 받았고 따라서 대학교 교장들이 부성장의 비평을 받게 되였으며 대학교 선생님들은 교장의 임무를 완성하느라 바삐 돌아친다는 이야기다. 바로 행정수단을 리용하여 빈곤대학생 은행대출을 대학생들에게 <<발급>>하고 있다는 이야기다.중국에서는 좋은 제도와 국책도 진행중에 많이 이변을 한다. 그래서 <<우에 정책이 있고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는 속어가 줄곧 류행되는가 본다. 신임위기도 위기이지만 이러한 국책진행이변이 더욱 음흉한 위기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13    중국국민과 스포츠붐 댓글:  조회:2177  추천:126  2007-02-21
월드컵과 올림픽은 서반구에서 진행되는 때가 많다. 텔레비에 중계되는 경기를 거의 새벽까지 구경하고나면 나는 낮에는 <<물주머니>>가 되여 출근하고 사무실에서 크게 졸아야한다. 회사의 대부분 남자직원들 태반이 나처럼 <<몽롱>>하기에 우리는 사표를 낼 필요도 없이 봉급도 받으면서 그런대로 잘 넘어간다.중국국민의 스포츠붐은 언제부터 시작되였는지? 내가 살아보지못한 시대는 잘 모르지만 탁구외교시대와 녀자배구성장시기부터가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내 경력으로는 탁구외교는 그저 남한테서 얻어들은 말이고 녀자배구붐은 그 말기를 조금은 체험한듯하다. 중국은 세계화에 진입하는 면에서 스포츠가 선견대 역활을 해왔다. 특히는 1984년 로스안젤스올림픽부터 시작하여 올림픽을 통하여 중국국민은 다른 문명시스템도 많이 접촉하게 되였고 또 그만큼 중국을 세상에 알리게 되였다. 참으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의 스포츠붐은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헌데 중국국민의 스포츠붐에는 아직도 기형적인 내용도 잠재한다고 생각한다. 올림픽에서 진행되는 경기는 보통 중국팀이 참가하고 또 중국인이 우승을 할 가능성이 있는 항목만이 중국에서 많이 중계된다. 물론 광고수입방면의 원인도 있겠지만 요인은 중국국민은 이렇게 스포츠경기를 시청한다는 말이다. 나같은 인간은 어떤 경기항목은 경기규칙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경기과정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지만은 시청만은 잘한다. 그리고 오직 경기결과에만 관심을 보인다. 중국은 금메달 **개 은메달 **개 동메달**개 그리고 지금까지 메달개수로는 몇등이다 하는데만 신경이 가다나니 스포츠정신이라는 스포츠리념에 대하여 별로 생각할 겨를이 없다.스포츠란 인간이 누려야할 일인데 나로서는 경기가 조금 슬픈 일로 되여버린다. 당제국 원제국 청제국을 거쳐 문명고국의 하나로 불리우던 중국은 <<동아병부>>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근세로부터 국력의 쇠퇴와 서방렬강의 침략으로 물심 량면에서 크나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博大宽容>>의 문명을 지닌 족속이라 하지만 벌레도 밟히면 꿈지럭거린다는 말처럼 중국국민은 많이 각성했고 분발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주 배타적인 복고주의도 있었고 냉전시기에는 제국주위와 수정주의를 타도하자는 신경과민증에 걸리기고 했으며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중국국민의 스포츠붐에서도 중국특색이라고 이야기할수 있을 정도로 부족점이 많이 존재한다. 선수는 나라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야만 영웅이고 패하면 죽을 욕도 얻어먹듯이 우리의 스포츠 일상에는 정치적인 외교적인 문화적인 색채가 너무 깊다. 진정한 스포츠정신을 생각하고 누리려는 사람이 극히 적다. 누군가 희랍문명의 위대함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신체의 건강을 리상적인 이미지로 이끌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점이라 했다. 그처럼 올림픽정신은 인류의 크나큰 재부이다. 이제는 우리 중국국민도 위대한 스포츠정신을 고양해야 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며 또 누릴 날이 멀지않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12    기차 그리고 등급차별과 빈부차이 댓글:  조회:2383  추천:111  2007-02-21
기차가 없다면 우리 중국사람들은 바깥출입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국토가 거창할 정도로 너르고 아직은 지갑의 내용이 푼푼하지 못한 國情이라 바깥출입에 있어서 누구나 항공편을 리용한다는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다.나같은 인간은 일생에 기차를 얼마나 타야 할가? 시간합계와 路程합계를 해보려니 천문수학으로 된다. 아주 어릴적에는 고향마을 어구에서 기차를 바라보면서 기차에 앉아다니는 <<놀고 먹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대학교를 다니면서부터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도 기차를 엄청나게 타왔다. 꼬박 48시간 탄적도 있으니 몇시간 정도의 기차타기는 <<식은죽 먹기다>>. 그리고 硬좌와 軟좌는 물론이고 좌석이 없어 기차복도에 서보기도 했고 신문지를 기차바닥에 펴놓고 자보기도 했고 짐을 놓는 <<덩대>>에 앉아보기도 했으며 차창으로 만원기차를 오르내린적도 있다. 또 硬석와 軟석만이 아니라 쥐들이 <<운동회>>를 하는 고물기차에도 앉아보았고 중국최고급이라 말하는 東方快車도 누려보았다.땅덩어리가 작고 경제상황이 좋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중국기차를 타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입을 딱 벌린다. 특별히 우에서 언급한 중국기차의 좌석다양화와 등급차별에 대하여 리해하기 어려워한다.같은 기차내에 부동한 티켓값에 따르는 좌석등급차별이 있다는 일은 중국담배가격이 한갑에 백원으로 시작하여 일원까지 쭉 배렬된다는 일처럼 아주 리해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러면 나는 중국은 등급차별이 좀 심각한 나라입니다 하는 한마디로 <<해석>>한다. 그리고 언제까지도 硬석티켓을 사려면 處급간부여야 했고 軟석티켓을 사려면 局급간부여야 했다고 주해를 단다.모든 등급차별을 박산내려는 리론이 우리의 건국리념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물질적인 등급차별만이 아니라 신분직위의 등급차별이 심각하다. 다른 나라에도 등급차별이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중국처럼 등급차별이 아주 세분화되여 있는 나라는 적다고 생각한다. 사실 상품등급차별은 신분직위차별이 가져온 결과이다.말하자면 부동한 신분직위에 따른 경제능력차별로 말미암아 부동한 상품등급차별이 요구되고 또 공급이 있게된다. 근 20년 사이에 중국사회의 빈부차이가 아주 심각하여지고 또 사회우환으로 되리라는것은 아마도 개혁개방의 창시자 등소평할아버지도 미처 예견하지못한 일이 아닐가? 듣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빈부차이상황이 인도보다도 심각하다 하는데 실례로는 어느 가난한 시골에서는 애들의 몇십원 학비도 내기 어렵고 어떤 도시사람은 만원자리 월병도 먹는다는 일이다.비합리적인 절대적인 등급차별과 빈부차이란 사회불안정요인의 하나다.다행히 요즘에는 과학적인 발전관이라는 지도리념으로 새사회를 구축한다는 이야기를 들으수가 있어 앞으로 10년후에는 우리가 어떤 생활상을 할가고 생각해본다.
11    鄭和붐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2213  추천:159  2007-02-21
CCTV1에 <<정화>>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였다. 듣는 말에 의하면 복건성 해변지역의 어느 빈곤현에서는 인민페 몇천만원이라는 거금으로 정화를 기념하는 행사도 하였다 한다. 조금 급작스레 정화를 위대한 항해가로 중화민족의 영웅으로 크게 추대하고 어마어마하게 떠들어대는 일을 정화붐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붐의 내면에는 우리 중국이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해양시대로 돌입하려는 욕망이 안받침되였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도 중국은 사유와 행위의 一同이 많은 나라이다. 헌데 고맙게도 상술한 정화붐을 두고 색다른 생각을 하고 부동한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섬서성위성TV 에서 학자 두분이 학생들을 모여놓고 현재 정화붐은 정치쇼와 별반 다름이 없으며 우리는 민족주의리용지물로 된 정화가 아니라 력사에 존재한 정화에 대하여, 정치적인 정화가 아니라 문화적인 정화에 대하여 연구해야 하며 중국근세의 항해사업의 부족점과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거론하는 장면을 시청하면서 나는 만일 이 땅에 인격적으로 학술적으로 사회적으로 獨存하는 인테리가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해갈가 생각해본다.중국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알려지는 법가독존과 한나라 동중서의 유가독존 그리고 宋明시기의 유가독존과 청나라의 문자옥을 전형으로 하는 이델레오기의 독점기가 아주 많았던 나라이다. 현대와 당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이델레오기독점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델레오기독점은 력사적인 문화국책으로서 물론 국토가 너르고 지역차별이 아주 복잡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한 중앙집권강화에 큰 역활을 하였다. 반면에 또 중국인의 사유를 크게 억제하였다는 사실도 부인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중국의 학자 혹은 문인들은 많이는 주체적인 이델레오기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추종하는 일에만 집념한다. 학술연구에서 사유독립과 인격독립을 지키는 사람이 적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 중국의 長遠발전에 있어서 크나큰 장애물이다. 어느 나라이든 어느 민족이든 비약적인 발전을 하려면 위대한 인테리들의 사고와 창출적인 사상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가석하게도 중국은 유구한 력사와 인구대국이라는 현실과 거리가 멀게 지금도 <<론어>> <<장자>> 등 고서가 중국사상의 최고봉을 장식하고 있다. 함부로 하는 말로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중국인은 대뇌가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분들의 말씀처럼 우리는 정화에게 차려진 민족영웅이라는 桂冠을 두고 송가만 부를일이 아니라 정화의 항해사업이 어찌하여 외교적인 수단에만 머물고 상업목적도 크게 이루지못했으며 또 요절했을가고 생각을 굴려보아야한다. 토론도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테리들도 낡은 머리를 버리는 작업을 해야한다.
10    대학교가 뭔데? 댓글:  조회:2237  추천:113  2007-02-21
대학교입시 때문에 7월은 더욱 무더워진다. 불합격자가 저수지에 뛰여들어 자살했다는, 어느 시골애는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경제원인으로 하여 포기할수밖에 없다는 등 뉴스가 7월의 쨍쨍 해빛으로 변한다.중국은 국토가 넓어도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서 인구당 소유하는 자연자원이 보잘것없고 그만큼 생존경쟁이 심각한 나라이다. 국민의 머리와 소질을 키워주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리라고 추산된다. 그래서 앞으로는 공부를 못하면 굶어죽을지도 모른다고 나처럼 허튼소리 하는 사람도 있다.무더운 날씨에 어떤 대학교에 가면 좋은가에 관해 쟁론을 했다. 나는 대학교는 집을 나서서 타향에 있는 대학교에 그리고 되도록이는 종합대학에 가면 좋다고 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 멀리 가면 자주능력을 키울수도 있고 세상구경도 할수 있고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교류도 할수 있으니 一石二鳥가 아닌가! 종합대학이면 학과가 많아서 서로 좋은 영향을 받을것이고 중국 각지역사람만이 아니라 류학생도 모일테니깐 얼마나! 하고 운운했다. 헌데 상대방은 나의 말에 수긍하는척 하다가 중국사회란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회자원이 빈약하면 살아가기가 힘겨웁고 타향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현지대학을 다니면 졸업후에 풍부하고 든든한 사회관계자원을 소유하게 되므로 현지대학을 나와도 좋다고 반박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성급행정기관 공무원으로 서북사범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많고 시급행정기관에는 란주대학을 나온 사람이 많다는 설이 있다. 사실 그런듯하다. 살펴보면 서북사범대학을 나온 사람과 란주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동학과 校友들이 많아서 우리 外來戶보다 편한 점이 아주 많다. 이민도시라고는 하지만 살아가는데는 아직도 소위 지연과 학연 그리고 혈연이 아주 중요하다. 언젠가는 대학을 나와 연변으로 돌아간 학우들이 술자리에서 연변에서는 연변대학을 나와야 한번 써먹는다고 이야기하던 일도 다시 기억된다. 그렇다면 사실은 전 중국이 내가 사는 동네와 거의 구별이 없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한사람이 득도하면 개와 닭도 승천한다>>는 중국의 속어가 사전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사회에 깊이 존재한다.사람이 살면 자연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리익집단을 구성하게 된다고 하는데 현실생활은 리익집단을 구성하는 요소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리론보다는 은밀하고 또 <<부끄러워 해야 할>> 점도 많고도 많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조심해야지! 이 무더운 7월에 이렇게 생각하고나니 더욱 무덥다. 그래서 대학교가 다 뭐냐 하고 한마디 질러본다.
9    <<머리깍기 운동>>과 기타 댓글:  조회:2079  추천:92  2007-02-21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닐때의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 남자애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배우들을 따라배우느라고 그랬는지 아니면 아주 어릴때부터 줄기차게 깎아온 빢빢 상고머리가 진짜로 싫어서인지 태반이 더벅머리를 길게 하기를 퍽 좋아했다. 헌데 학교에서는 그 더벅머리스타일이 얼마나 싫었던지 남자학생들이 머리를 귀밑까지 빡빡 올리깍지를 않으면 등교못한다는 규정을 세우고 아침이면 상학전에 머리검사를 진행했고 머리불합격 애들을 교실에서 몰아내는 운동을 벌렸다. 어떤 애들은 세상 좋다고 아예 학교를 나오지않고 바깥에서 빙빙 놀아댔고 또 어떤 애들은 반들반들 중머리를 깍는 항의를 보였다. 나중에 학교에서는 강제적규정의 보조수단으로 전교 남자애들을 큰 회의실에 모여놓고 선생님 한분이 <<미학강의>>까지 하셨는데 강의는 미학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이 배우들은 무대효과를 위하여 머리를 길게 남길수가 있지만은 학생은 멋을 부리기보다도 머리를 짧게 하고 공부에 전력하여야 한다던 설교뿐이였던 기억이다 .나로서는 그적에 어찌하여 그런 일들이 발생하였는지 여태껏 잘 터득되지를 않았다. 어떤 머리스타일을 취하나 자신의 나이와 신분 그리고 옷차림과 신장 얼굴모양새에 마추어야 한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조금 느끼고 있지만 또 오래동안 밀봉환경에서 살다가 갑자기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긴 머리스타일을 따라배우는 흉내를 냈었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隨从심리와 반역심리도 작간했었으리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학교와 선생님들은 어찌하여 더벅머리스타일을 그토록 반대했을가에 대해서는 여직 리해하지를 못했다.어제 누구와 이 일을 거론해보았다. 기분좋게 명답 하나를 얻은듯하다. 중국은 80년대까지도 개성을 말살하고 大一統질서를 고집하던 시기로서 사람들의 의식을 대일통하여 행위의 대일통까지 이루기위하여 반드시 생산방식과 생활방식의 대일통을 하여야했다.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어표달방식이라든가 복장스타일이라든가 음식습관이라든가가 생활방식의 카테고리에 속하는데 대일통사회질서를 좋아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유규칙과 행위규칙 그리고 생활방식의 구석구석까지도 대일통이 출현하게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때 학교에서는 학교공동질서를 다잡기 위하여서는 학생들의 생활방식의 대일통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인간의 개성을 반대하는 <<머리깍기 운동>>을 했다는것이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과 물어보면 태반이 80년대 중엽에 학교를 다니면서 <<머리깍기 운동>>을 체험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연변만이 아니라 80년대 초중엽에 전 중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거지반이 <<머리깍끼 운동>>을 벌렸다는 판단도 되겠다.지금은 <<머리깍기 운동>>이 언제 있었더냐 하는 식으로 소위 개성화의 특색으로 거리에는 빨갛고 노랗고 짜르고 길고 멋있고 괴상망측하고 벼라별 머리스타일들이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물론 오늘날에 사람들의 사유규칙과 행위규칙이 머리스타일만큼 풍부하고 다채로워 졌을가에 대해서는 판단이 잘 되지를 않지만 나로서는 이 개방시대의 활력을 얼마만큼 감지하는듯한 즐거운 기분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자신심을 비롯한 심성이 옛날 밀봉시대보다도 많이 건강해졌음을 많이 느끼게 된다. 따라서 대일통에 대한 의구심도 아주 커지어 이제는 대일통이 정말 싫다는 이야가 된다. 대일통이란 사람의 사유를 꽁꽁 묶으려는 집단 혹은 精英인물의 수단이고 비리이다 .노예근성을 배태하는 제도이고 불합리성이다. 낙후하면 낙후할수록 페쇄적이면 페쇄적일수록 대일통이 살판치고 사람을 잡아먹는다. 행운스럽게 우리는 지금 한창 대일통과 빠빠이를 하고 있는중이다. 이런 생각을 굴리면 나의 손이 저도 모르게 나의 머리카락에 닿는다. 참으로 잊혀지지않는 <<머리깍기 운동>>.
8    한자혼용설 토론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2128  추천:108  2007-02-21
한자혼용설은 편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에서 기인했다고 생각된다. 문자의 실용성이 아주 주요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문자와 한자에 대한 심층적인 사고를 거치지않고 문자의 실용성만 추구하여 한자혼용설을 받아들인다면 어느 이름못할 함정속에 빠지지않을가 하는 의구심으로부터 나의 생각을 조금 적어본다.한자만이 아니라 모든 문자는 언어의 기록방식으로서 사용하는자의 사유방식에 심원한 영향을 준다고 인정되고 있다. 우리 한글이 우리의 사유방식과 심리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고있느지는 몰라도 근간에 한자가 중국인에게 남겨준 낙인과 중국인의 소위 문자후유증에 대한 글을 읽어 보면서 나는 조금 느껴도 보고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혹시 우리의 한자혼용설 토론에 작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욕심으로 중국 학자들이 꽤나 활발하게 진행하는 한자토론을 거론해본다.한자는 상형문자이다. 象形, 指事, 會意, 會音, 假借로 구분하지만 한자는 서양의 라틴문자와는 달리 몇천년 진화중에서도 표음문자로 전환되지 못하고 본질적으로는 상형문자로 존재하고 있다. 한자발전이 문자의 발전규칙을 위반한 원인에 대하여서는 아직 명답이 없지만 한자가 중국인에게 주는 영향은 많이 연구되고 있다.한자의 좋은점으로서는 문자와 사유의 일치성적인 쾌속도(눈으로 보면 뜻을 알수가 있어 청각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뇌사유로 전환), 독특한 意境만들기(唐詩宋詞의 아름다움을 전형으로 볼수 있다) , 수많은 방언을 하나의 문자로 통합하여 一統적인 력사를 보존한 사실(중국의 수많은 방언군체는 모두가 한자를 사용하여 혈연감과 귀속감을 느끼는 일) 등이다.한자의 부족점은 추상사유방식을 많이 저애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말하자면 한자는 형상사유문자로서 표현이 모호하고 론법성이 결여되여있어 중국인의 추상사유능력을 잘 키워주지못했다는 이야기다. 한자는 표음문자인 라틴문자와는 달리 명확한 개념과 개념의 분류가 결여되였고 어법적인 워인으로 명제가 모호하며 론법방식이 흔히는 비유법과 같은 형상사유로 전개되며 따라서 중국인의 사물의 긍국적인 원인에 대한 사고가 적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중국이 근대에 이르러 서양보다 많이 뒤떨어진 원인을 중국인의 문자로 하여 존재하는 추상사유능력의 결여로 보는 사람도 있다. 력사적으로 중국은 과학연구(실용성을 떠나 학리적으로 진행되는 사유)보다도 기술에 대한 노력이 많았다는 점이 바로 이 론점을 받침하는 하나의 큰 근거이다. 그래서 문언문을 페지하고 어법과 론리성이 있는 백화문을 사용한것이 중국인의 획기적인 혁명이다. 하지만 한자가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주는 영향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문화적인 반성이 있어야한다. 나는 우리의 한자혼용설 토론도 상술한 說들과 한자가 디지털시대에 적응하려고 한참 몸부림치는 현실을 직면해야 하며 또한 한글이 우리에게 주는 심원한 영향도 연구하여 더 높은 차원에서 문자혼용을 토론하면 좋겠다 생각한다.
7    '민공' 그리고 기타 댓글:  조회:2264  추천:102  2007-02-21
내가 사는 동네는 현재 치안상태가 별로 좋지 못하다. 밤중에 택시기사들이 승객으로 가장한 강도들의 겁탈을 당하는가 하면 회사거나 가정집에 도적이 드는 일도 많다. 확실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러한 형사범죄자의 대부분이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민공>>이라고 인정한다. 편견이 아니라 텔레비 뉴스를 보거나 조간지를 읽으면 경찰에 잡힌 범죄자들중에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꽤나 많은것 같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두가 형사범죄자가 아니겠지만 건축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작업복도 아닌 람루한 옷을 입고 길고 어지러운 머리를 이고 거리에 나오는 <<민공>>들을 만나면 어떤 사람들은 이마를 찡그린다. 그리고 <<낮에는 일하는척하고 밤에는 못된 일을 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곁에 있는 친구 하나가 <<민공>>들의 도시진출을 아주 통제하는 정책은 없는가 하는 물음에 그래도 대충대충 <<무거운 대답>>을 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중국에서의 도시화는 기껏해야 몇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을가? 소위 도시인으로 자처하는 우리들 거의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시골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어찌하여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으로 시골사람들을 차별시하고 랭대하고 있을가? 물론 시골사람들의 물질생활수준과 문화수준이 도시인에 비하여 많이 뒤떨어지고 있지만 현재 도시와 시골의 엄청난 발전차이는 시골사람들이 빚어낸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아야한다. 시골사람들의 도시진출로 하여 도시인의 생활질서가 조금 흔들린다 하더라도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헌법조목의 法理하에서는 우리가 시골사람들을 차별시하고 랭대할 법적인 근거와 도덕적인 근거는 없다. 시골사람들의 도시진출을 통제하려는 욕망이라던가 어떤 기묘한 정책도 제도도 인도성과 합법성이 전혀 없다 .중국농민의 과거도 참으로 괴롭게 보여진다. 력사기록에는 北魏시대와 수당시기전의 莊園경제시대에는 중국농민은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면서 거의 자유없는 생활을 하다가 중앙집권을 위한 均田制의 혜택으로 자유경작농으로 전화했다 한다. 하지만 기나긴 중세와 근세에는 士族지주 또는 豪族지주의 토지겸병으로 도산을 당하기도 하고 끊임없는 자연재해와 전쟁의 재화를 입으며 말 그대로 근근득식 하였다. 그리고 현세에 이르러서는 중국농민은 제국주의 봉건주의 식민주의 3대산에 억눌리우며 어려운 삶을 하였다. 공화국창건이후에는 중국농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나라건설을 위하여 지불한 대가는 엄청나다. 지금 우리가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분발하고 있지만 국민생산액도 많이 늘어났지만 이러한 성과의 출발점과 받침으로 되여있는 중국당대 원시자본축적의 주력군--중국농민의 질고를 헤아려주는 도시인은 별반 없다. 서양은 식민지 약탈로 공업사회로 전환하는 필수조건인 원시자본축적을 완성했지만 중국은 신민주의혁명이후에 농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원시자본축적을 완성했다. 만일 중국농민의 신근한 노력이 없다면 현재 중국의 핵능력을 비롯한 국방보장과 우리 모두 같이 잘 살자는 등소평 할아버지의 개혁개방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농민에 대한 고마움 대신 부득불 땅을 버리고 도시로 올라와 두 주먹으로 일하여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을 <<민공>>이라 차별시하고 랭대하고 착취하고 있으니 마음이 아픈 현실이다. 언젠가는 <<민공>>들이 뼈 빠지게 일하고도 월급도 받지 못하여 높은 건축물에 올라서 죽음으로 시위를 하는 장면을 텔레비에서 많이 보았다. 많은 도시에서는 시골 사람들에게 무슨 돼지고기나 팔듯이 도시호적을 판매한다. 시골사람들의 자녀가 도시의 중소학교에 입학하려면 고가의 학비를 내야 한다. 도시의 온갖 어지러운 일과 힘든 일은 시골사람이 담당하고 있어 만일 <<민공>>의 참견이 없이는 도시의 정상적 운행도 어려울 정도이다. 시골사람들 행위에 위법행위가 있다 하더라도 범죄사회학의 시각에서 보아야 할것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을 세워야한다.어떤 인민대표들이 땅과 농민을 꽁꽁 묶어놓는 호적제도를 페지해야 한다는 건의를 제출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농민의 인신과 경제자유를 보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음가짐을 잘 해야 하거니와 중국농민들의 로동기능을 개변하는 좋은 국책이 있어야 한다.
6    우리의 삶의 공간 댓글:  조회:2174  추천:105  2007-02-21
<<신향토중국>>이라는 격변시대의 중국농촌에 대한 사회조사를 쓴 책에는 호북성 여고지역에서는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하여 피땀으로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집을 장만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경문지역에서는 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 집을 장만한다는 단락과 그것은 두 지역 농민들이 앞날에 대한 추측과 삶에 대한 가치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며 여고지역의 농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타향에서 살려는 타산이고 경문지역의 농민들은 삶의 의미를 고향의 장래에 의탁한다는 설명이 있다.상품교환과 정보교환 그리고 대규모의 인구류동이 현시대 특징이기는 하지만 나처럼 직장이 있고 신분증과 호적이 있고 려권이 있는 속인들은 아직은 구체적인 공간을 떠나서는 삶을 의미를 구축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려권을 버리고 숨어사는 형한테 전화를 하면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고향에 돌아온다 한다. 형은 몸은 한국에 있지만 삶의 의미는 고향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되겠다 . 시골출신인 로인들은 퇴직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落葉歸根도 좋고 錦衣還鄕도 좋고 우리의 삶의 공간의식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 전통적인 농경문화가 낳은 우리의 심리구조에 맞는 공간의식이기는 하지만 현실은 우리들더러 그것을 팽개치게 한다. 자유로동력 공급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공업화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파산하는 농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WTO가입 등 원인으로 대폭 증가할 추세라 한다. 180여만의 인구수를 보이는 중국조선족들도 태반은 농민이므로 공업화와 나라에서 전략적으로 진행하는 국부지역 중점발전책의 영향과 그것에 가첨되는 로무수출이라는 특수한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였고 삶의 의미를 의탁하는 공간이였던 농촌을 고향을 떠나 도시로 전국각지로 해외로 나가고있다. 농촌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우리 군체의 상대적인 집중거주가 무너지는 현실앞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잘 보존하여야 한다는 말씀들은 참으로 창백하고 무력하다 . 우리의 마음 어디에는 깊은 공포감만 차서 넘친다. 중국문화의 영향력을 론한 문장을 읽었는데 아주 내용이 없는 문화라 하여도 좋은 경제력과 강대한 국력을 뒤받침으로 하면 이질적인 문화와의 교류에서 우세를 차지한다는 명제와 중국문화의 영향력을 발휘하는데는 소위 사상가나 학자들의 책임은 무겁지만 그들은 <<능력>>이 없으며 <<능력>>은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있다는 관점이 인상적이였다 . 인터넷에서 전국권교수님의 <<료녕조선문보>>에 쓴 <<우리 군체 잘 살려면 >>을 읽었다. 지당한 말씀이 많다. 생존환경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참다운 생존반성이 없이는 경제발전의 튼튼한 사회기반이 없이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기탁하는 공간은 보존하기가 아주 어렵다 생각한다.
5    관광지 있는 동네도 슬프다 댓글:  조회:2212  추천:100  2007-02-21
"관광산업은 취업난을 잘 풀어주는 무연산업이다" 하는 관광경제학리론이 아주 성행하는 오늘날, 많은 지역에서는 관광산업 발전에 전력하고있다. 통이 크게 나라 돈을 물 쓰듯 하며 세계자연유산재 세계문화유산재를 신청한다 부산을 피우는 동네가 있는가 하면 욕심으로는 << 아무 시대 아무 때에 명인 아무개가 오줌을 누던 자리 >>라는 패말이라도 번듯하게 걸어놓고 돈버는 재미를 실컷 보았으면 좋겠지만 아무런 풍경지도 없고 유적지도 없어 관광자원이 극빈한 동네는 한숨만 풀풀 쉬고있어 아주 가엽다 . 그 중에서도 약삭바른 동네는 <<유명한>> 관광경제학 교수를 불러 먼지낀 지방지를 뒤적이며 관광에 리로운 <<이야기>>를 <<제조>>하고 기획회사를 청하여 인공 관광지를 기획하느라 진땀을 뺀다 . 직업의 덕으로 많은 관광지를 다니며 꽤나 좋은 구경을 많이 했다 . 나는 관광지가 있는 동네도 슬펐다 . 말이 유적이지 자그마한 흙담 또는 새로 지은 고풍 간이건축을 구경시키면서 고가의 입장료를 받아먹는 동네도 슬펐고 세계급이라 자청하는 어마어마한 관광지를 운영하면서 공용화장실 입장료까지 받아먹는 탐욕을 보며 많이 슬펐다 . 중국 관광지 입장권은 국민수입에 비하여 많이 비싸다. 물론 싸면 손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관광지를 보호하기 힘들다는 등의 수많은 리유가 있겠지만 물가관리부문의 벌건 도장을 찍어 가격을 껑충 올리는 입장료변동통지서는 많고도 빈번하다. 몇년전만 해도 외국인은 국내인 입장료의 곱으로 되는 입장권을 사야했다. 인종차별이라는 말을 듣기가 싫어서인지 아니면 WTO에 가입하기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외유별 입장권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관광지에서 일어나는 해괴한 <<전>>들을 생각하면 나는 소름이 끼친다. 화산풍경구에서 1원짜리 일회용 비닐비옷을 비오는 날에는 30원에 판다는 뉴스처럼 긴급하게 사용되는 물건이나 독점경영하는 물건은 엄청난 고가를 받는 <<바가지전>> , 가게의 <<위험지대>>에 가짜골동품을 아주 근사하게 벌려놓고 손님들의 <<불조심>>으로 인하여 망가지면 ****원 배상을 하라는 소위 <<지뢰전>>, 가게 주인이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감언리설에에 아주 싸게 산 차잎이 집에 돌아오면 나무잎으로 변하는 <<심리전>> 등 가지각색 <<전>>으로 하여 우리는 관광에 나서면 조심을 앞세워야한다. 소위 <<전>>들은 돈에 대한 기형적인 감응이라고 나름의 판단을 해본다 . 상업사회를 얼마 경험하지 못하였고 침침한 계획경제를 깨뜨린 일이 금방 어제의 일이므로 당연히 돈에 대한 남다른 반응상태가 있으리라는 나의 몸에도 그런 심리 그런 행위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군자는 돈을 좋아하되 버는 방법이 따로 있다.>>라는 입담이 잘 사용되는 나라의 관광지에서 아직도 미숙한 경제작법들이 통행되고 있음은 어딘가 가슴을 치며 통탄하여야할 일이 아닐가 . 어찌 관광산업뿐일까? 뉴스에 나오는 상품품질에 대한 검사보고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서늘할 지경이고 제발 식품과 약품만은 가짜상품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주위사람들의 소박한 념원을 들으면 우리의 생존상태를 곰곰히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광서의 북해시에서 바다가 銀灘관광지를 가로막던 몇키로의 담벽을 무너뜨리고 입장권을 받지않기로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되였다 . 입장권 수입보다도 관광지로서 손님들한테 친근감을 주고 손님들의 체류기간을 늘이는 편이 좋다는 경제적인 예산도 있지만 좋은 풍경을 높은 담벽으로 감금하던 고약한 구식 관광산업과 고별한다는 좋은 소식이다 .
4    아버지 댓글:  조회:2286  추천:101  2007-02-21
우리집 댁호가 <<모의집>>이였으므로 아버지의 태생지를 함경도 길주의 모의(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화로 다시 확인해보니 어머니의 이야기는 아버지는 룡정 신화촌에서 출생하셨다 하신다. 작은 키에 조금 수척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르기는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란 유년시절의것은 기억에 남은것이 아주 없고 또 열여섯살부터 학교를 다니느라고 방학에만 집에 돌아갔으니 기억속의 아버지는 고작해야 십년으로 환산이 될가?. 나는 아버지께서 나이 50에 본 <<늙으막 자식>>이다. 누나들 이야기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젖먹아들이 태어났다고 아주 기뻐하시며 해란강변에 나가 뙈기논도 풀었고 나는 어머니 젖 대신 아버지가 탄광에 다니시면서 하루에 2냥씩 배급받는 쌀을 가루내여 지은 죽을 먹었다 한다. 동년의 기억에는 아버지는 일만 수걱수걱 하시였지 나하고는 아무런 소통도 없었던 같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는 옛날 사람들은 생활난으로 하여 자식을 귀여워할 시간도 기교도 없었나? 하는 우둔한 생각마저 했었다. 요즘에는 밭에 갔다 오시면서 개암과 같은 산열매를 챙겨다주시던 아버지가 가끔 생각힌다. 마흔살에야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의 진미를 터득하는상싶다. 아버지는 귀가 많이 가셔서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반드시 목소리를 높혀야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청년시절에 룡정에서 반일구호를 외치다가 일본인순경한테 구타당한것이 아주 고질로 변했다 하시였다. 우리집은 성분이 중농이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부지런하여서 괜찮게 살았는데 장남인 아버지는 동네에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탄 청년으로서 학교인지 서당인지 공부하러도 다니셨다 한다. 아버지는 <<죽은 공부>>를 한 덕택으로 내 고향마을에서는 거의 수재역을 하시였다. 누가 세상뜨면 弔文을 쓰셨고 친척들 애기이름을 많이 지어주시였다. 아버지는 붓으로 넙덕글자(한자)를 잘 쓰시였고 어느 밤이면 책을 중얼중얼 소리내여 읽으셨다. 내가 소학교 3학년 때에 <<수호전>>과 <<삼국연의>> 소설책을 빌어다 읽으면 아버지도 가끔 읽으셨는데 꼭 운문을 외우듯이 소리를 내시니 산수풀이가 지장을 받아 내가 아니좋게 생각하던 일은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첫 부인과 딸 하나 아들 둘을 보았는데 나에게 큰 누나로 되는 딸은 내가 태여나기전에 시집가서 난산으로 죽었다. 아버지는 상처한후에 남편을 잃고 조선전쟁시기에 딸 둘을 데리고 조선 청진에서 연변으로 돌아온 나의 어머니와 재혼하셔서 새 가정을 이루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적에 어머니한테 구혼인이 두사람 나졌는데 점쟁이한테 가니깐 나의 아버지가 귀는 갔지만 마음이 좋아서 괜찮다는 권고를 받아 아버지를 선택하셨다 하신다.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10년 아래이기는 하지만 어릴때 아버지 고향 룡정 신화촌에서 같이 살았고 마을 서당에서 훈장인 아버지한테 글을 배운적도 있듯이 서로간에 잘 아는 사이였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여보 대신 바울라(어머니의 천주교교명)라고도 부르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총각일 때 어머니는 할아버지 집에 가서 내 고모랑 같이 놀던 이야기도 자주 하시였다. 인연이 만들어준 새 가정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계셨고 삼촌도 장가전이였으며 아버지 자식 셋에 어머니 자식 둘, 그리고 두분이 자식을 다섯이나 주렁주렁 또 낳았으니 (둘은 요절하고 셋만 남았음) 두분이 겪은 생활난과 마음고생은 나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내가 소학교 1학년을 다닐때라 생각되느데 하루는 집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점심밥을 먹는데 대들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남긴 큰 집은 큰형이 공부를 할때 차지를 받고 작은 집으로 바꾸었느데 빈대가 낄 정도로 헐망하였다. 그해에 아버지는 집식구들과 의논하고 새집을 짖는다 하시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아버지는 거의 날마다 내 셋째 누나와(큰형과 둘째 형은 장가들고 큰누나와 둘째 누나도 이미 결혼했음) 함께 소수레를 몰고 산에 가서 나무도 베어오고 생산대 빚도 내여 집지을 준비를 하셨다. 다음해 낡은 집터에 아담스런 새집이 일어서고 온돌을 놓고 벽과 온돌을 건조하려고 불을 지핀 아궁이앞에 앉아 내가 감자를 구워먹던 늦가을에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는데 집에서는 <<개도 먹지않는 돈>>때문에 나와 잘 친하던 우리집 황둥개를 전공들에게 팔아버려 내가 울었더니 아버한테서 크게 꾸중을 받았다.생산대 일은 아주 힘들었지만 아버지는 해마다 자류지 근처에 황무지를 일구었다. 그래서 고추라던가 호박을 심으면 어머니는 여름 가을내로 장마당에 이고가 팔았고 겨울에는 또 자류지에 심었던 박과 비자루수수로 만든 바가지와 비자루도 가져다 팔았다. 장마당수입이 주요한 생활래원으로 되여던것 같다. 어느 해인가 <<자본주의 꼬리>>를 자르는 바람에 아버지의 고추밭이 민병들의 낫에 거덜이 난 일도 있었다. 내가 소학교 5학년이 되는 때든가? 아버지는 삼촌과 상논하고 청명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를 룡정 신화촌으로 <<멜레>>(이장)하였다. 조상의 묘소는 마음대로 옮기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권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꿈에 할아버지가 자꾸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고집을 부려 끝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뼈를 룡정 신화촌에 이장했다. 미신인지는 모르지만 그해로부터 집일이 별로 순조롭지못했다. 삼촌네 집에서는 나와 거의 동갑이던 사촌동생이 연길 어느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빠져죽었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주정하기 시작하였으며 건강상태가 많이 나쁘게 변해갔다. 술 한잔에도 말씀이 많았고 누구도 응대가 없으면 밤이면 넉두리를 하시였다. 인생을 많이 한탄하고 사는 재미가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누구는 신선님처럼 사는가 모두가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하고 집식구들이 권해보기는 했지만 별로 효력을 보지못했다. 아버지는 대학공부까지 한 큰형에게 희망을 두었던것이지만 큰형은 멀리 중경에서 살았었고 얼굴보기마저도 힘들었으니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낙망감을 그렇게 표현하시였는지? 아니면 회갑까지 쉰 년세에 코흘리개 자식까지 먹여살리려니 너무나도 힘에 부치여서 그래셨는지? 주변 로인들은 그렇게 말씀하는 분들도 있었다.마음이 무너지면 사람은 빨리 로쇠한다 한다. 그때로부터 아버지는 늘 침상에 누워계셨고 어머니와 셋째형은 로인치매증이 심한 아버지 때문에 거의 십년간을 별라별 고생을 다 하였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공부를 잘 해서 박사가 되라는 농담까지 하시던 분이 방학에 집에 가면 <<애들이 잘 크오?>> 물으실 정도로 로망을 하시다가 아버지는 1988년에 끝내는 저 세상으로 가시였다.아버지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아버지의 삶은 땅과 가정에 응고된 평범한 인생이다. 아무리 작고 번거로운 삶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도 인간으로서의 꿈은 많았을건데 아버지께서는 어떠한 꿈으로 인생을 살았을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어도 틀림없이 자신의 인생과 자식들의 인생의 풍만한 결실을 바라는 꿈이였을거다. 하지만 세월은 무정하여 아버지께서는 자신도 꿈을 이루지 못했고 자식들의 <<번한 날>> 구경도 못하시고 인생을 마치시였다. 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드릴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가 떠나가신 그해 대학교 정원에서 높고 맑은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쓴 <<碧空傳奇>> 를 다시 조용히 읽어본다. 아버지 당신을 죽이던 가을이 다시 오고 있습니다하늘하늘 나붓기는 락엽 사이로껑충 높아간 벽공이 보입니다학교 갔다 배고프던 그 가을날 저의 더벅머리를 어루쓸고는 당신은 허구픈 웃음만 지으셨지요 그러나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겠지 하던 의문은소슬한 명상속에 끝내는 풀리고 그 웃음이 울음이고 통곡이였음을 파란 벽공이 알리고 있습니다아버지저의 마음은 신들메 조이고당신의 생명을 속이던 그런 가을이 아니라누구에게나 풍작의 인생을 주는 아름다운 가을을 찾아 떠나갑니다당신의 벽공전기는 영원히 가버리면 합니다
3    조선족 산업화 《입장권》은 어디에? 댓글:  조회:2195  추천:95  2007-02-21
기후환경의 차이로 서늘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은 대뇌가 좋고 따듯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은 손재간이 좋으며 추운 지역에서 사는 사람은 사람은 근면하고 무더운 지역에서 사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일가? 괜찮게 살아가는 나라는 거의가 온대가 아니면 온대와 가까운 지역에, 가난한 나라는 많이는 적도지역에 자리잡은듯하다. 물론 소유한 물질자원의 다소차이와 구체적인 력사발전상황이 빈부차이의 주요원인이기도 하겠지만 특정적인 기후환경이 인간의 심성에 끼치는 영향으로 하여 나라마다 종족마다 부동한 생존문화가 형성되여있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삶에 큰 작간을 하고있음도 의심할바가 없다. 수만년을 거쳐 특정된 자연공간에서 지정된 생존방식으로 살아가면 인간이 물려받는것은 피줄만이 아니라 크게는 사회제도와 사유방식 작게는 사소한 생활습관까지에 이른다. 누구도 알게 모르게 좋아하든 싫어하든 문화의 지배를 떨쳐버릴수는 없다. 그래서 문화는 인간사회의 제일 견고한 현상이라는 평판을 받고있다. 우리는 북온대와 아한대의 접경지대로부터 남하한 몽골계 유목민과 조선반도 토착민들이 융합된 종족의 후예라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일이지만 우리는 우에서 언급한 어떤 부류의 종족공동체에 속해있을가고 감히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살아온 지역의 위도를 보나 기후환경을 보나 우리는 서늘한 동네와 추운 동네에서 사는 종족으로 점찍어진다. 대뇌가 좋고 근면한 종족이라는 三段적인 판단을 해본다 . 나도 그중의 일원이니깐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생각만으로도 우리 종족의 괜찮은 지력상수와 근면성을 부인하기가 싫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괜찮게 살어가는 종족일건데? 자문자답을 해보면 얻어지는 답은 별로 신통하지가 않다. 우리 종족의 현재의 집거지는 조선반도,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미국 등 지역이라 하는데 북조선과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은 아직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돼 있지는 않다.멀리 사는 동포들의 이야기는 삼가하고 중국에 사는 우리들만을 살펴보아도 밥먹고 사는 흉내는 내고있지만 아직까지는, 하는 내 나름의 생각이다. 우리는 중국에 이주하여 여태껏 농경의 가난에 허덕이면서 풍족한 물질사회를 이루지 못하였다 . 복잡다단한 국내외정세와 농업생산력의 저수준으로 하여 빈곤선이하에서 헤매이다가 행운이라 할가 20세기 80년대로부터 시작되는 등소평할아버지의 개혁과 개방을 맞이하였다. 중국경제의 개혁개방은 경제제도혁신과 산업전환을 수단으로 한 경제혁명이다 . 중국의 산업전환은 세계경제의 일치화물결속에서 로동력밀집산업의 공간적인 이동챤스를 리용하여 비교적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는 90년대로부터 경제향상과 더불어 인금원가가 훨씬 높아진 <<아시아 4마리 룡>>이 로동력밀집산업에서 자본밀집산업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하는 과정에 많은 로동력밀집산업이 중국의 렴가의 로동력자원우세와 시장잠재력을 엿보아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결과 지금의 중국은 <<세계공장>>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였고 산업구조상에서나 취업에서나 외화획득에서나 로동력밀집산업을 떠날수없는 정도이다 . 여러 선진국도 중국로동력밀집산업에 대한 의뢰성이 아주 커지어 잠시는 중국을 대체할 무역대상을 찾기가 힘들다 한다. 우스개로 중국의 옷공장이 문을 닫고 신공장이 문을 닫으면 미국사람들이 엉뎅이를 드러내놓고 맨발로 자가용을 타야한다는 말이 유행이다. 헌데 이러한 천지개벽속에서 중국에 사는 우리는 어떤 생존상을 하고있는가? 중국의 사회환경을 떠나서는 우리의 생존을 운운할 여지가 없다. 따져보면 우리는 바로 산업전환의 과정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버리고 한국이 아니면 연해지역으로 나가 로동력밀집산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확실한 통계수자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 로동력의 거의 반수에 가까운 인원이 산업화에 휘말려들었다는 내 나름의 추측을 해본다 .그리고 앞으로도 퍽 대규모화될 추세이다 . 이러한 산업화중에서 나는 우리의 산업화 <<입장권>>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산업화에서 자본과 기술, 로동력과 시장이 4대요소로 알려지는데 우리가 지니고 있는것은 너무나도 빈약하다. 자본과 기술은 중국의 다른 지역인보다도 많이 뒤떨어진 상태이고 시장면에서도 남보다도 더 뛰어난 우세가 없다. 제 욕심으로는 상업경험이나 좀 있었으면 아주 좋겠지만 김치장사를 시작해서 상업화에 밀려든지가 기껏해야 15년이 될가 말가 하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사밀방>>도 없다. 다만 빈 주먹과 본능적인 생존욕구 그리고 거의 백지장에 가까운 상업경험으로 삶을 개척하고 있다 . 동족이라는 감성의 혜택으로 언어가 통한다는 기능의 원인으로 한국에서 연해지역에서 익숙하지못한 산업에 종사하면서 일할줄 모른다,신용이 없다는 평판을 받아야한다. 일자리를 쉽게 바꾼다, 기능련마에서 떨어진다, 고용인들의 많은 불만을 자아낸다. 그래도 국내외의 브로커들에게 빚을 낸 거금을 사기당하기도 하고 위장결혼도 밥먹듯 하여야한다 .산업화 <<입장권>> 이 없는 우리에게 힘에 부치는 현실이다 . 한다면 우리의 산업화 <<입장권>>은 어디에 있을가? 참으로 곰곰히 생각해야 할 일이다.
2    중국의 북방장성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2204  추천:119  2007-02-21
력사지도에 표기되는 중국의 북방장성은 기후도에 표기된 300미리 강우량선과 거의 맞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년에는 지구의 온난화로 북방의 강우량이 줄어들어서 300미리 강우량선이 남하하였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먼 옛날 중국의 북방장성이 300미리 강우량선을 따라 구축되였다는 일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라 북방의 300미리 강우량선이 바로 농경지역과 목축지역의 분계선이였기 때문이다. 부동한 생산방식에 따라 부동한 생활방식과 사유방식이 있게 된다. 먼 옛날 농경으로 살아가는 선인들은 농경의 주기성과 농경지의 중요성을 잘 터득하여서 장성이남에는 토지제도가 비교적 이른 발전이 있게 되였다. 하지만 장성이북의 유목민은 풀과 물을 찾아 떠돌이생활을 하였고 땅에 대한 소유권보다도 사용권에 대하여 애착이 컸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가뭄이 들거나 폭풍설에 의한 재해가 있게 되면 빈번하게 남하하여 천성적인 용맹과 뛰어난 기마술로 농경인을 대상으로 한 겁탈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농경인들이 땅문서를 내놓으며 이곳은 내 땅이요 어서 당신네 고향으로 돌아가오 하는 요구를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유목민들은 종이 한장을 근거로 제 땅이라 설론하는 농경인들의 생각을 전혀 받아드리지가 않았다 . 그리하여 잇따라 농경민들의 반항이 있게 되였고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게 되였었다. 중국의 중세기사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생존다툼이 그 축을 이룬다. 아주 오랜 세월 농경민은 화친이라든가 토벌이라든가 등 책략으로 야만적인 유목민을 상대하였다. 또 국고를 말끔히 털어내여 유목민을 대처하기 위하여 구축한 공사가 바로 중국북방의 장성이다. 먼 옛날 진, 조, 연나라가 시작한 공사가 중국력사의 유전적인 공사가 되여 거의 근세로 돌입하던 명나라까지도 만리장성이라는 막대한 공사를 하였었다. 그리하여 중국력사에는 진시황은 장성을 쌓아 이름을 날리고 청나라 강희황제와 건륭황제는 장성을 허물고 회유정책으로 몽고인을 다루어서 위업을 남겼다는 이야기와 같은 장성과 유관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방장성이 거의 중국의 신볼로 되여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력사문화와는 조금 떨어진 미학적인 심리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이 북방장성이란 도대체 무엇이였을가?장성이라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군사적인 방위구축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돌과 벽돌로 쌓은 국부적인 장성을 내놓고는 대부분이 봉화대와 호로 구성되였기에 방위적인 작용을 이루지못하였다. 사실 중국의 북방장성은 방위공사라 하기보다도 군사정보시스템이라 함이 더 적합하다 . 말하자면 북방장성은 유목민의 일거일동을 봉화라는 신호를 통하여 최고관부에서 정보를 알리는 시스템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스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여년전부터 북방의 호, 흉노, 척발, 거란, 몽고 등 유목민은 북방장성을 마음껏 뛰여넘어 남쪽 나들이를 밥먹듯 하였었다 .물론 장성이남에 전쟁피해를 많이 주기는 하였지만 어떤이들은 유목민들이 력사적으로 중원농경문화에 많은 활력소를 입주하였음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세월의 거창한 흐름속에서 중원민족의 피와 사유에는 유목민들의 인자가 많이 섞이게 되였다는 이야기이다.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다만 농경민의 시각에서만 먼 장성이북을 바라보면서 회고하고 또한 생각을 굴리고 있다. 우에서 말한 력사적인 미담이든 전설이든 그 대부분이 농경민의 생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장성이북에 사는 유목민들은 장성이남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가? 훌륭한 종족은 객관적인 력사관을 소유한다는 말이 있다. 나로서는 좋은 력사공부는 하지못했다. 내가 배운 토끼꼬리만큼한 력사란 시험을 응부하는 력사였고 현세를 위하여 서비스하는 정치력사였다. 지금의 애들은 어떤 력사공부를 하고있느지? 무척 알고싶어진다.
1    고향 댓글:  조회:2284  추천:77  2007-02-21
고향을 떠난지가 거의 20년이 되는것 같다 . 현성에 있는 고급중학을 다닐 때부터 마음을 미지의 지역에 두었던 기억으로서 내 마음이 고향마을을 떠난지는 어느덧 20년을 넘는다. 부끄러운 일이고 알수없는 일이지만 어려서는 고향마을에 별로 애착을 느끼지못했다. 나의 고향은 조양천에서 화룡으로 가는 철길 북쪽켠, 해란강 북안의 산아래에 자리잡은 작은 촌락이다. 주민은 대부분이 조선족이였고 몇호만이 한족이여서 한족들도 조선말을 잘 하였었다. 고향말로 동네이다. 벼농사도 하고 밭농사도 하였는데 추억에 새록새록한 일은 여름철에 철뚝아래 개울에서 목욕하다가 객차가 지나가면 옷을 물에 적셔 객차 창구로 머리를 내민 사람들한테 물참봉을 시키고 손짓 발짓을 섞어서 소리지르던 일이다. 그적에 누나 또래네 처녀들은 나라 쌀을 먹는 공인한테 시집가는게 꿈이였고 형 또래네 총각들은 군대로 가는게 꿈이였다. 우리 또래의 꿈은 권투나 배워서 어디서 거들먹거리거나 무슨 맛있는 음식이나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일이였다. 그리고 아버지들의 꿈은 술이였고 엄마들의 꿈은 아버지가 술을 끊어버리는 일이였던가? 교통이 너무 불편한 동네가 아니였는데도 나는 소학교 3학년에야 처음으로 화룡에 영화구경 갔다가 영화관이라 부르는 건물에 들어가 보았고 고급중학 때에야 처음으로 연길행을 해보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야 소위 인 먼 동네로 다녀보았다.지금은 고향을 멀리 등진 동네에서 밥벌이를 하고있다. 가끔 지도를 들여다보면 내 고향은 아주 편벽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 그렇게 흔한 바다도 한조각 끼지못하고 넓은 중국땅의 자그마한 가장자리에 고독하게 표기된 고향, 어릴 때 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내 고향은 위도상으로나 지형적으로 볼 때에도 농경에 적합한 지대는 아니다. 그리고 지정학의 시각으로 보거나 현실적인 국제정치형세로 보면 로동력밀집형산업이든가 자본밀집형산업이 찾을 자리가 아니며 실력적으로도 과학기술산업을 키울 신세도 아니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모두가 한국으로 외국으로 떠나감이 오늘날의 삶의 길로 되여있다. 알건대로는 노무수출에서는 중국에서 아마 복건성 다음이 연변일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소규모의 농사를 해서는 먹고 살기에 힘겹고 그래서 삶을 찾아 자꾸만 떠나는것이다. 인터넷에는 조선족 인구의 마이너스성장, 농촌의 황페화, 농촌학교의 페교 등으로 여론을 끓이고 있다. 헌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는가? 우리의 피줄과 문화를 이어갈 대책을 대자 하는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는건 물론이고 현대사회 인구류동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감을 다시 한번 느끼게된다. 잘 살아야지 잘 살게 만들어야 떠나지 않을텐데 혼자말로 중얼거리기도 한다. 2003년 겨울에 고향마을로 한번 다녀왔다. 어릴 때에는 그렇게 높아보이던 산이 작은 둔덕처럼 보이고 꽤나 넓던 하곡평원이 너무나도 작은 뙈기논으로 널려있어 나의 눈에는 살풍경으로 보였다. 마을의 벽돌집은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마을내의 길이 꼬불꼬불 어지럽게 변해졌고 인구도 많이 감소되였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뿐이였다. 나는 철뚝길을 바라보면서 어릴 때 뉘집 아이가 밤에 도랑물에 고기잡이발을 놓고 레루를 베고 잠자다가 기차에 다쳐죽은 일과 나무숲이라곤 별로 없는 남산을 쳐다보며 겨울에는 온 동네 남자일군들이 남산탄광에서 도적석탄을 캐다가 가끔 사고를 당해 죽던 일들이 생각되였다. 아주 슬퍼졌다. 사람이 모여살면 어떠한 인간사회의 생태시스템을 이루기 마련이다. 현재 고향마을의 생태상황은 잘 알수는 없지만 70년대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중국의 시골은 모두가 그렇게 살았던 시대였으므로 고향 마을에서 일반적으로는 생산대장 정치대장 회계 창고보관원이나 괜찮게 살아가고 제일 불쌍한 인간은 부농이였다 . 마을에 지주급의 계급의 적은 없었고 부농이 최대의 계급의 적으로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많이 받았었다. 그때문에 고향 마을에 있는 새쓰개(정신병환자) 2명이 죄다 부농의 자식이였다. 말하자면 천성적인 정신병자가 아니고 인위적으로 정신병자 2명을 창출했다는 이야기다. 로인들은 악한 일을 하면 죄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기는 하였지만, 부농들을 투쟁하던 일과 애들도 부농집 애들을 천대하던 일들이 나에게 많은 좋지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인간사회의 불평등에 대하여도 얼마간은 알게 된듯하였다. 말에 의하면 고향 마을은 습깨지(소택지)에 세운 마을로서 물도 별로 좋지않고 강북과 음지에 자리잡아 풍수가 나쁘다 하였다. 그래서였을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소궁둥이 때리기가 싫어서였을가 나는 언제든지 고향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 심리적인 현상으로 보면 그 누구나 적어도 순간적으로 탈출의 욕망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가. 나는 언제든지 시골호적을 버리고 싶었다. 어제는 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70년대 도시빈곤인의 생활을 그린 영화였다 . 영화의 주인공 2명도 도시인임에도 불과하고 자꾸만 탈출의 꿈을 하고 있었다. 생각끝에 나는 나의 어릴적의 탈출심리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하나 얻었다 . 정상적이고 향상하는 사회는 매 인간에게 소위 신세를 개변할수 있는 여건을 주어야 한다. 그러한 제도가 없거나 그 제도가 활성화되지를 못하면 사회는 창백해지고 인간의 심령세계가 아주 변형되는것이 아닐가?. 고향 사람들도 지금은 대규모의 산업류동과 인구류동에 지배되여 모두가 삶을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매 개인에게는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족사회로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있다 . 못살더라도 버티고 앉아있을건가? 아니면 모든것을 팽개치고 잘 살기에 동분서주 할건가? 나로서는 정확한 답을 할수는 없지만 우리 조선족사회가 지금 그 답복을 하고있음은 틀림이 없다.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