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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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잘난 도둑 날도둑 그 리고 대도(大盜) 상도둑 댓글:  조회:6499  추천:4  2015-05-22
잘난 도둑 날도둑 그 리고 대도(大盜) 상도둑 최근 당중앙의 에 걸려 줄을 선 , , 무리를 보노라면 분개와 함께 (만약 습근평정부가 없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였을가?)는 우려와 물음까지 뒤따른다.  오늘 필자는 에 비춰 을 곁든다. 도둑이 잡히면 감옥으로 간다.도둑범들이 모이면 서로간 정보를 주고 받으며 어떻게 된 일인 가를 묻는다.그리고 감옥에서 도둑범가 마련된다. 는 큰 도둑이 상좌에 않고 좀도둑들이 아랫자리에 않는다. 큰 도둑이 좌중을 향해 큰소리도 외친다. 큰 도둑이 일갈에 다른 도둑들이 라며 큰 박수를 쳤다.  이처럼 도둑의 눈에는 온 세상이 도둑으로 보였다. 덤을 노리는것도 도둑이요 턱없이 욕심을 부리는것도 도둑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탐욕을 부리게 되고 탐욕은 갖은 수단으로 욕심을 채운다. 압력으로 돈을 챙겨도 도둑이고 뢰물을 주고받아도 도둑이다. 남의 집에 들어가 강도질을 하고 남의 든 지갑을 터는 소매치기만이 도둑인 것은 아니다. 권력의 특혜를 받는 특권층과 금융의 특혜를 받는 모리배들은 법의 비호를 받는 도둑들이다. 공자는 권력형 축재보다 더 큰 도둑은 없다며 권문세도의 로략질을 상도둑이라고 하였다. 윤재근선생(한국)의 대도(大盜)이야기다. 화제의 주인공을 어떤 사람들은 대도라고, 어떤 사람들은 신판 림꺽정이라며 입에 침을 발라가며 동정하고 옹호했다. 대도는 특권층의 집이나 평판이 좋지 않는 부유층의 집만을 골라가며 도둑질을 하는데 보석이나 현금만 털고 기타에는 손을 대지 않고 흉기로 사람을 해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둑을 당한 사람들은 그 많은 불의지재(不義之財)의문에 꼬리가 잡힐가봐 신고를 꺼리며 랭가슴만 앓았다. 이에 백성들은 남의 도둑품을 다시 훔치는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림꺽정이 토호를 털어 배고픈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것을 곁들며 대도를 의적이라고 불렀다. 꼬리가 길면 잡히듯이 대도가 잡혔다. 감옥에서 대도는 자기는 훔친 것을 다시 훔친것밖에 없다며 먼저 훔친자는 떵떵거리는데 훔친것을 다시 훔친 자만 감방에서 콩밥을 먹어야 하는가며 자기의 이런 주장을 세상에 알리려고 탈출을 하였다. 대도는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서 밀려오는 수색조와 맞서다가 한 사람을 인질로 붙들고 버티였다. 현장에서 많은 사림들이 만일 대도가 그 인질을 방패로 해친다면 대도로 불리기는 글렀다며 안타까워하였다. 과연 대도는 대도였다. 그는 인질잡이를 뉘우치고 인질을 안전하게 풀어주고 스스로 잡혔다. 사람들은 도둑이 잡혔으면 속이 시원해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 특권을 누리는 도둑들이 세상을 망치는데 분개해 오히려 대도를 동정하였다.  도둑을 례찬하는 세상은 엄청나게 썩었음을 말한다. 썩어버린 세상에서는 숨은 도둑으로 하여 누가 도둑이고 누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렵다. 일전에 어느 경리가 연변텔레비를 보면서 하면서 모 령도의 종말을 기다렸다.. 장자는 대도의 조건을 聖(목표설정),勇(용기),義(책임감),智(판단 능력),仁(공평분배)이 라고, 거기에서 도둑이란 두 글자를 빼면 그 다섯가지조건이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조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한 자를 욕할 때 이라고. 꼭 5년 전(2010, 4, 27)에 필자가 발표한 글(길림신문)이다. 어느 술상에서 오간 얘기다.
169    독서 열독 그리고 괄목상대 댓글:  조회:6832  추천:4  2015-05-04
독서 열독 그리고 괄목상대 우리 민족의 속담에 고 했다. 는 젊었을 때 독서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독(讀)자를 파자 하면 말(言)을 팔(賣)다가 아닌가.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學知) 곤이불학(困而不學)  태여 나서 아는 자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그 다음이며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야 배우려는 자가 그 다음이고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이다. 이는 에서 배움을 언급한 말이다. 어느 자수성가한 문인이 고 했다. 공부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요 빨리 늙지 않으려면 책을 읽으란다. 리극강총리는 지난 인대보고에서 를 언급, 기자회견 때 독서를 열독(閱讀)으로 고 했다. 세계적으로 책의 민족이라 불리는 유태민족의 나라 이슬라엘은 500만 명도 안 되는 국민에 29종의 신문과 900종의 잡지가 발행, 매년 인당 독서량이 64권,2001년까지 100년간 노벨상수상자 680명중 세계 인구의 0.23%인 유태인이152명(22.4%)으로 으뜸을 차지였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괄목상대란 눈을 비비고 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재주가 전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였을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중국 삼국시대 때 오나라의 왕 손권의 부하에 글읽기를 싫어하는 려몽(呂蒙)이란 장수가 있었다. 어느 날 손권이 려몽을 불러 라고 하니 려몽이 고 대답하자 고 반문하였다. 왕의 귀뜸에 크게 깨달은 려몽은 그 후부터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몇 년후 박식해진 려몽을 재상 로숙(魯肅)이 찾아와 그의 학문에 깊이를 칭찬하자 려몽이 이렇게 말했다. 고 하였다. 모택동도 며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지금은 자본(資本)주의시대가 아닌 뇌본(腦本)주의시대다. 뇌본주의시대는 독서, 열독, 괄목상대를 버팀목으로 해야 하지 않을가. 오기활
168    의사가 퇴직하면 전문가라니? 댓글:  조회:6321  추천:1  2015-04-27
의사가 퇴직하면 전문가라니? 지난번 동북3성 언론사 응모작품총화모임 때 연변작가협회X주석이 필자와 하는 말이다.   전문가란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며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광고에 오른 의사들이 모두 전문가인가? 몇 년 전에 길림신문 에서 상금을 내 걸고 을 모집했을 때 편집부의 배치로 필자가 수백통의 을 편집하였는데 그때 독자들이 신문에 대한 원성(怨聲)이 제일 높은 것이 의사광고면이였다. , ,  … 는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을 편집하면서 왕청에 있는 조카(40대초 중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한심하였다. 그 때 연변의 크고 작은 신문의 한개 면을 차지한 란 광고는 글자수만 7592자, X가 자신 있게 뗀다는 병만해도 소화계통, 순환계통, 호흡계통, 신경계통, 비뇨계통의 39가지 병이였다. 실로 한 손으로 머리, 눈썹, 수염을 몽땅 거머쥐는 였다. 이는 오랜 위병환자로 자학하여 로 불리는 도문시 박모(79)가 필자더러 신문을 잘 꾸리라며 하던 분에 찬 말이다. 일전에 을 취재하면서 를 별도의 화제로 하였다. 김춘영원장의 말이다. 확실히 (연변기림병원전신)에서 남방  들을 끌어다가 과대광고, 허위광고를 하면서 환자들의 돈지갑을 털었다. 그 때 오죽하면 원성(怨聲)이 에 자리매김을 했겠는가?>>  리철호부원장의 말이다。 , 두부장사가 외쳐야만 사람들이 찾아 오듯이 의사도 외칠 때는 외쳐야 한다. 문제는 의사들의 과대광고, 허위광고다. 언젠가 연길시공상행정관리국해당부문의 검사에 따르면 등록회피광고가 200여건, 비법인쇄물광고가 상당수를 차지했다. 비법광고, 과대공고, 허위광고는 부덕한 광고주들의 문제만이 아닌 광고업자들의 사회적책임감과 법률적 책임감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적책임감과 도덕성을 외면하는 는 견결히 숙청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신선한 정보를 제공하는 광고의 생명력은 진실성, 도덕성, 신빙성, 예술성에 있다. 오기활        
167    상대를 움직이는 감각적인 언어의 힘 댓글:  조회:6401  추천:1  2015-03-30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다리우에서 한 장님이 구걸을 하고있었다. 그 장님걸인의 목에는 《저는 태여날 때부터 장님입니다.》라는 글구가 적힌 패쪽이 걸려있었다 어느날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고 걸인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루종일 있으면 얼마나 구걸합니까?》 《겨우 10프랑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장님이 침통한 어조로 대답하자 행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에 걸린 패쪽을 뒤집더니 거기에 다른 글을 적어놓았다. 한달후 미라보다리우에 행인이 다시 나타났다. 행인은 지난번처럼 하루 구걸하는 액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장님이 행인의 손을 잡고 감격해하며 말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다녀간후부터 하루 수입이 50프랑까지 올랐습니다. 대체 무슨 리유인지 모르겠습니다. 패쪽에다 뭐라고 썼길래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겁니까?》 그러자 행인이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별 말이 아닙니다 원래 당신의 패말에는 로 씌여있더군요. 저는 그 글구를 로 고쳐 썼을뿐입니다.》 이 일화는 우리가 쓰는 말(글) 한마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감각적인 언어(글)는 리성에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동시키고 감성의 심리를 자극한다. 중국의 첫 노벨수상자 막언의 말이다. - 지난해 10월 15일 습근평총서기가 소집한 문예일군좌담회는 이전에 참가했던 다른 회의와 달리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집에 모여앉아 한담하는것처럼 친절하였다.습주석이 즉흥적으로 말하던 내용은 그대로 문장으로 되여 청취후 인상이 매우 깊었다. 필자는 습근평주석의 2015년 신년사를 친절한 인정미와 감각적인 언어로 세인을 감동시킨 본보기라고 말한다. 《세월은 참 류수와 같습니다》 《…세계 각국과 각지의 벗들에게 새해 축복을 전하는바입니다.》 로 시작한 신년사는 지난해를 회고하며 《…인민생활을 새롭게 개선하였습니다.》 《…반부패의 확고한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세계가 중국을 더 잘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인민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인민들의 희생과 기여를 영원히 명기할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며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새로운 락원에서 행복하게 생활하기를 바랍니다.》로. 그리고 새해를 맞아 《…우리는 인민들의 기대를 우리의 행동으로 바꾸고 인민들의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할것입니다.》 《…초요사회를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목표가 제때에 실현되도록 추진할것입니다.》《…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생활상 만족을 느끼게 하고 마음상 따뜻함을 느끼게 할것입니다》 《…부패가 있으면 반드시 엄벌하고 탐오가 있으면 엄하게 숙청할것입니다.》 《…국가발전과 인민생활이 나날이 향상되게 할것입니다.》 《…중국인민들이 각국 인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해빛아래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며 《감사합니다.》로 끝냈다. 미사구려나 무미건조한 말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나 감동을 줄수 없다. 3000자도 안되는 습주석의 신년사에는 《…추켜들고》 《…견지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구호가 없는 대신 우리 나라 《남수북조》(南水北調)대공사의 이주민들의 생활, 말디브 수도의 물공급부족 등 지구촌의 안방구석까지 살피면서 다정다감한 감각적인 언어로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초요사회를 건설하려는 중국공산당의 결심을 보여주는데서 세인을 감동시키고 당의 형상을 돋보이게 했다. 막언의 말이다. - 진리만이 사람을 납득시킬수 있고 진정만이 사람을 움직일수 있다. 리론가는 리치로 사람을 설복시키고 문예가는 정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 나에게는 두가지 기본적인 판단이 있다. 하나는 중국공산당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정당보다 더욱 중국이 부강해질것을 바라며 둘째는 중국의 국가주석 습근평은 세계 어느 나라 원수보다 더욱 중국인민이 잘살기를 바란다는것이다. 습주석의 신년사야말로 감감적인 언어로 사람을 납득시키고 사람을 움직이는 감명 깊은 신년사라 하겠다. 길림신문 2015-3-25  
166    허룡길의 “육아 3불” 댓글:  조회:6442  추천:3  2015-03-27
음력설문예만회에서 본 소품 “소송”을 반추하며 얼마 전에 허룡길(39)이 말하던 “육아3불”이  머리에 떠오른다. 허룡길은 필자의 글 “추억의 추도문”과 “ 불효한 교육은 무효다”의 주인공으로 지난번에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던 걸음에 만났다. 지난 90년대에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녀동생을 데리고 호주노릇을 하다가 청도에 진출한 그는 지금 두 아들의 아버지로 가시부모까지 여섯이 한집에서 행복하게 지낸다. “두 애를 볼라니 너희 가시부모들이 고생이 많았겠구나!” “많았지요 … 그런데 우리는 로인들이 아이를 절대 못 안게 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로인들이 아이를 안고 엎고 다루는것이 심한 고역이라고, 로인들이 아이들 보기를 힘들다는것은 지친 몸으로 생각대로 되지 않아 혹시라도 아이들이 상할가봐 두려워하는 심리부담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로인들의 건강을 위한 <
165    그들의 드팀 없는 신념 댓글:  조회:7212  추천:1  2015-02-10
그들의 드팀 없는 신념 일전에 필자는 도문시 석현진향양촌달라자로인협회 박선녀(65)회장을 취재하면서 생각밖에 그의 남편(김철송)이 당에 대한 드팀없는 신념에 탄복되였다. 김철송(69)은 20대부터 단지부서기, 생산대대장(20년간)을 지낸 향양촌의 토배기로 1983년 제1기 촌민위원회 선거부터 지금까지 기마다95% 이상의 득표률을 확보한 《원로촌민위원》이다. 촌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그의 득표수가 촌장보다도 높은 데서 그더러 촌장을 맡으라니 김철송은 자기는 청각장애자이고 가방끈이 짧아서 못한다고 거절하고는 계속하여 촌을 위해 발벗고 달아 다니는 그를 촌민들은《무관촌장(無冠村長)》이라 불러왔다.  김철송은 확고한 신념으로 입당을 갈망하였다.  46년 전 그의 입당을 심사하는 당지부회의에서 쏘련에 간 그의 조부가 행방불명으로 하여  로 그의 입당이 통과되지 못했다. 그 후로부터 김철송은 자기 앞에 당문(黨門)은 막혔다고 하지만 당원답게 살겠다며당원의 조건으로 자신을 책임지기에 노력하였다.       김철송은 입당을 못한것에 불만이 있을 대신 사람은 신앙이 있어야 한다며 부인(64)의 입당을 적극 지지해 나섰다.  김철송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당령을46년이라고, 한번은 촌당지부서기를 찾아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물론 그도 비당원의 유골에 당기를 덮을수 없다는것을 알지만 그래도 당조직에 이런 유언을 남기니 마음이 거뿐하더 란다.  필자는 최근에 연변농학원 연동훈(84)교수의 회억록을 읽고 드팀 없는 그의 입당 신념에 다시 한번  큰 감동을 받았다. 연동훈은 소학교교원,조선류학(길일성종합대학 원산농업대학), 참군,참전(6급 잔페군), 연변대학강사, 우파분자, 감옥살이(15년), 호구없는 흑인(黑人)으로 희로애락 인생을 살다가 1979년에 루명을 벗고 연변대학에 복직하여1992년에 리식휴양하였다. 1979년에 연동훈은복직하자 먼저 당조직을 찾아서20여 년간의 과거사를 회보하며 드팀없는 입당의 신념을  밝혔다. (50년대부터 입당신청을 하였음)   15년간이나 억울하게 징역살이 하고도 입당하려는 그를 말리는 사람도, 코웃음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입당만은 그의 필생의  신념이였다. (감옥에서 푸르푸랄(糖醛) 등 연구성과로 나라에  수억원의 경제수익을 창출,소공 2차, 대공 2차, 특등공 4차를 세웠다) 이는 연동훈의 사상회보에 밝힌 그의 입당동기였다. 그의 드팀없는 신념 으로1982년에 그의 입당이 비준되였다. 신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상이나 명제, 연설 등을 적절한것으로서 또는 진실한 것으로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심적(心的)태도이다.  미국의 첫 흑인대통령 오바마는 고  했다. 해해년년 확실하게 자기의 심적당령(心的黨令)을계산하며 당원답게 살기 위해 드팀없이 노력해 온 김철송,역경에 부대끼다가 풀려 나와 사회에 분풀이를 할 대신 수선 먼저 당조직을 찾아가 입당을 신청하고 당원을 따기 위해 노력한 연동훈, 필자는 이들의 드팀없는 입당신념에 자신을 반성하며 신념이란 잠재의식의 위대성을 감수한다. 오기활           
164    앞줄에 앉은 사람들로 이어지는 그때 그 이야기 댓글:  조회:8838  추천:5  2015-02-03
60년대 농촌청년 참군기념사진을 보며 확실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내가 본 집체사진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대개가 친척이나 사회에서 존중을 받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어느 날 필자는 사진을 정리하다가 1969년 12월에 (徹底埋葬帝修)는 글을 새긴 집체사진에 눈길을 멈췄다.  이 집체사진은 당년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대대 7대(달라자마을)청년 김영화의 참군을 기념하며 찍은 것이다. 그때만도 누가 참군하면 온 마을의 경사로 동네가 들썽했으니깐 말이다. 총 32명에 그중 마을의 로농대표 4명(가족포함), 마을청년 16명, 지식청년(집체호)12인데, 앞줄에9명(주인공, 가족포함)의 대표적인물이 앉았다. 오늘 필자는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년대를 반추한다.(앞줄에 앉은 9명중 이미 6 명이 하늘나라 사람으로 되였음) 이야기는 왼쪽 첫 사람을 1번으로 9번까지 이어진다. 1,   – 고 장련귀(蔣連貴,) 지난세기 60년대 나라에서는 도시의 초중이상 졸업생을 조직하여 농촌에 보냈다. 에는 이들을 이라 부르며 광활한 농촌에 가서 단련한다고 했고   때는 이라는 부르며 농촌에 내려 가서 재교육을 받는다고 하였다. 1969년 4월 우리 마을에는 도문가도에서 조, 한족으로 조직한 가 입적하였다. 장련귀(한족)는 그때 온 청년으로 말이 지식청년이지 기실은 소학생 3학년정도였다. 납자쌍둥이의 형으로  태여난 련귀는 키가 작고 체질이 약질(弱質)이며 자기의 코물마저 건사할줄을 모르는 였다. 그는 집에서 놀다가 때로는 도문농장에서 양을 몰았다고 한다. 그런데 장련귀는 생산대 대비판회의 때마다 늘 선참으로 발언을 했는데 그는 발언할 때마다 을 반복하면서 상당한 지식청년의 신분으로 대접을 받으며 기치가 선명한이란 별호를 가졌다. 문맹을 자랑으로, 대신 지식분자를 로 비판하고 로동개조를 시킨 이  사진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사진의 최금순(중간줄 오른쪽 네번째)은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서 재교육을 받았고 반문맹인 장련귀는 으로 우쭐거렸다. 언비(言秘)에 걸린 최금순이 으로 사람들에게 무시(無視) 당하던 그 모습이 정말 측은했다. 2, -한성훈(韓成勳) 한성훈(韓成勳)은 고중을 졸업하고 철도중학교에서 한어교직에 있다가 이 라는 의심을 받고 실업을 당하고 집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의 별호는 , 였다. 때는 을 멀리 하고 책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을 라고 의심했다.수남마을에도 중문, 조문공부에 미쳐있는 열혈청년을 로 취급한 실레가 있다.한성훈은 실로 공부에 미친 (정신병환자)였다. 그는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수영도 잘했는데 그의 위병은 그가 농촌에 와서 의학을 배우고 자체로 자기 몸에 침을 놓으면서 완치하였다. 그는 라지오를 가지고 다니며 밤 늦게까지, 새벽 일찍부터 영어, 서반아어, 세계어, 로어… 등 외국어 공부를 견지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고 언변이 좋아 ,을 하도 생동하게 이야기 하기에 웃동네 사람들까지 들으려 왔다. 특히 그의 속기법과 한어발음은 사람들을 놀래울 정도였다. 그가 중국공산당 9차대표대회보고를 방송을 한어로 듣고 기록하고 기록한 문장을 한자성조(聲調)까지 달면서 기록하여 대회에서 전달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때 저마다 혀를 차며 엄지를 내 흔들었다. 로동자 모집때 그는 도문벽돌공장공인으로, 다시 도문제재공장 중학교교원으로, 개혁개방이 초기에 길림성대외무역국에서 한성훈을 제 1호로 초빙해갔다. 2007년 필자가 한성훈이 에서 꾸리는 의 편집으로 초빙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장춘에 가서 한성훈을 찾아 뵈였다. 필자는 지금도 한성훈의 의학필기장과 독서필기장을 수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식분자를 로 몰던 을 생각하면 진정 소름이 끼친다. 3, (猪官叔叔) – 오기활(吳基活) 오늘 따라 필자는 처음으로 용기르 내서 를 말하고 싶다. 1963년에 필자는 도문중학(그때는 연길현4중) 제 16기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 되겠다는 발언을 했고 뢰봉학습모범으로 학교에서 입단을 하고 회향(回鄕)하였다.  필자는 청년사업을 힘있게 틀어쥐여 달아자의 첫 단지부를 건립하고 단지부서기와 정치대장을 맡았다. 운동가운데서 전 도문시에서 제일 먼저 집체우사를 돌로 지어 전시에서 보급했고 모택동저작학습반을 잘 꾸린데서 1964년 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후 때 백부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되자 정치상에서 권리를 박탈하고5년간 생산대집체양돈장의 사양원을 맡았다. 그때 달라자양돈장을 성, 주, 시 전형이였고 필자는 주, 시 모태동저작학습선진분자로 대회에서 강용(大會講用)을 했다. 그때 필자의 별명은 오대장, 오서기, 오호장(집체호정치호장)이 라고 부르지 않고 로 불렀다.  글의 9번 (쇄지-김영철)에서 당년의 배경이 보충된다. 4, 농촌의- 고 최성욱(崔成旭) 최성욱의 별명은 농촌의 먼저 (코가 큰 사람을 가르킴)였다. 사람들은 한사람의 체구나 이목구비에 비춰 그의 별명을 곧 잘 짓는데 그때 달라자에는 , , 가 있었기에 그저 라면 서로간 엇갈렸다.. 최성욱은 코큰 아버지(최석준)를 계승하여 어렸을 때부터 라 불렸다. 소학교문화수준인 최성욱은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고 독서를 즐기기로 조선문으로 번역된 세계명작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그때 동네서는 최성욱이 그린 화토를 빌려 가지고 다니며 화토놀이를 하였다 최성욱은 퉁소, 해금 등 악기를 잘 다뤘고 목수, 미장일도 능했다.  그래서 동네서 그의 별명을 >보다도  농촌의 라 하였다. 최성욱은 달라자의 첫 공청단원이며 민병패장, 생산대장을 지냈다. 사회주의교육운동때인 1964년에 그의 그림작품 가 수남대대 계급투쟁교양도편교재로 추천되여 타동네서 빌려다가 전시 하기도 했다. 필자보다 9년 년상인 최석준은 19살에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양자를 길렀는데 그의 아들이름을 필자가. 글 문(文), 밝을 철(哲)로 이라고 지었다. 최성욱은 60이 넘은 나이에 돈벌이로 한국에 가서 페암으로 진단받고 집에 돌아와 타계하였다. 5, - 고 김철국(金哲國) 나의 아버지친구인 김철국의 별명은 에 까지 둘이다. 는 그가 혈변(血便)을 본다는 질병에서, 은 지난 세기 50년대 문맹 퇴지 야학반에 다닐 때 김철국이 자기의 성 이라고 쓴다는것이 으로 쓴후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로빈농성분에 체격까지 우럭진 김철국은50년대부터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 상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기록도 없이 회의 정신을 빠짐없이 전달한데서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1958년 대약진 때 상급에서는 마을을 단위로 경쟁을 벌렸는데 붉은색기는 공산주의사회를, 노란색기는 사회주의사회를, 흰색기는 자본주의를, 검은색기는 암흑한 봉건사회를 상징하였다. 그때는 며 5년이면 영국을 릉가하고 1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 천만군의 기세로 을 부를 때다. 그때 우리 마을의 큰길 옆에 자동차바퀴쇠가마를 높이 달아맨 종(鐘)대에 검은색기발이 펄럭거렸는데 김철국대장은 면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는 실사구시한 사람이였다. 지난세기 60년대에 빈하중농대표인 김철국은 정치대장을 하는 필자에게 몇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사실은 이러했다. 1952년 조선전쟁이 폭발한후 조선의 모 밀수군이(성이 남씨로 기억됨) 밀수건으로 달라자에 있는 사돈(오세준)을 찾아 왔다. 그 때 조선전쟁때라 고도로 긴장된 대대의 간부들은 그를 (남로당)라 의심하고 다시 오면 붙잡기로 하였다.(그때 필자의 사촌형(오기품)이 그 밀수군의 심부럼으로 밀수폼을 운반해 줬다고 했다) 하루는 김철국이 배앓이병 도져서 길옆 널판자변소에 앉아 있는데 그 밀수군이 또 나타나자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그자를 체포했다. 그런데 그후 신문에는 수남대대 민병련장인 송림마을의 안창렬이 달라자의 오세준세 집에있는 꿰짝속에 이틀간이 나 숨어서 그자를 기다렸다가 뛰쳐나와 직접 붙잡은 것으로 보도되였다는 것이다. 김철국의 얘기를 오랫동안 간직했던 필자는 이 글을 쓰려고 지난해 11월에 연변일보사 자료실에 가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 봤더니1952년 6월 19일자 에 지승원의 그림으로 는 련환화가 련속 3기로 발표되였다. 사진속에 한족솜옷을 입고 신끈도 없는 기운 왕바신(솜신)을 신고  등장한 김철국의 신분은 참군하는 아들의 아버지신분이다. 6 - 김영화(金英和) 김영화는 이 사진에 참군하는 주인공이다. 김철국의 큰 아들인 영화는 도문중학교(초중)를 졸업하고 회향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참군, 퇴대후 농촌에서 추천받고 중등전업학교에 입학, 졸업후 도문시건설국계통에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퇴직후 영화는 한국에가서 용역으로 일했고 한국모 부문에서 조직한 응모작품에 입선되여 상금을 타기도 했다. 영화는 말수가 적고 글씨를 잘 쓰고 장기에 흥취가 있었다. 영화가 (대어른)이란 별명을 얻게 되기까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가 한번은 동네친척집에서 차린 잔치에 갔다가 심부름꾼으로 술을 사려 도문에 갔다가 영화구경을 하고 친구 집에서 밤을 자고 이틑날에 왔다. 술을 고대히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너무나도 기가찬 나머지 며 자기를 달랬다.  7,   - 고 주성문(朱成文) 주성문은 60년대 중반에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이다.  그의 별명은 >, 둘이다. 얼굴모양이 쏘련사람 같다고 하여 라 불렀다. 주성문의 얘기는 세가지로 이어진다. 주성문은 언제나 남 먼저 남성들(그때는 자란들이라고 불렀다)의 개추렴을 발동하고는 자기는 번번히 빠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돈 때문이겠는데 술상에서 그를 라며 술안주에 올렸다. 김철국에게 당했다. 그 년대는 술이 귀하기로 는 년대였다. 어느 하루 길닦이를 하는데 주성문이 손님이 와서 아침에 술을 마였다며 술냄새를 피웠다. 그에서 술냄새에 함께 일하던 남자들이 며 서로간  올라오는 술충을 달랬다.  이에 주성문은 자기가 술을 마였다면서 고 하였다. 그런데 곁군들이 술생각을 잊어버리자 하면 그가  또 를 몇번이나 반복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미안해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로, 로 풀이를 하더니 나중에는 김철국(이 글의 5번)이 삽을 팽개치고 며 대판 싸움을 벌렸다. 장세날에 춤판을. 주성문은80로모가 사망되여 후사를 치른 날에 동네분들 앞에서 며 술상이 끝난후 먼저 나서 노래를 부르며 오락판을 벌렸다. 그때까지 모든 사망을 슬픔으로만 여겨온 필자는 주성문한테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호상이면 오락판을 벌려도 별문제인 풍속을 처음 알게 되였다. 필자는 주성문을 떠 올리면 술이 긴장하던 년대가 떠오른다. 8, - 고 최장국(崔長國) 최장국은 체격이 웅장한것으로 (키큰사람)란 별명을 가졌다.  항미원조 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퇴대후 영예군인으로 조직된 왕청현 석현진 에 배치 되였다. 그후 남양(지금의 향양)에 이사를 왔다가 또 아래 마을인  달라자에 이사를 왔다. 최장국은 성질이 콸콸하였다. 한번은 그가 돼지새끼를 팔려고 도문시장에 갔다가 팔리지 않아서 그대로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서  술독이 퍼졌던지 안산다리우에서 산 돼지새끼를 몽땅 북강물에 처넣었다. 또한 최장국은 필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필자가 수남소학교에 다닐 때인 1953년 음력 정월 초, 어느 날 오후에 내가 휴식시간에 합작사(공소사)에 가보니 바로 필자의 아버지(오호준)와 최장국이 마른 명태를 사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필자에게 한대에 3전짜리 싸리연필 몇대를 사주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이번 만남이 최후의 만남으로 될 줄이야! 그날 아버지는 쌀을 찧으려고 수남정미소를 갔는데 최장국이를 만나 술을 마이고 갈라졌는데 후에 아버지는 수남우물의 내리막 길에서 쌀마대를 싫은 소수레에서 떨어져 수레바퀴에 깔려 과다출혈로 이틑 날에 사망되였다. 그 후로부터 필자는 최장국이를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가 술을 함께 마이고 술동무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지난 70년대 김철국(5호인물)의 생일에 다른 술상에서 일부러 필자를 찾아 와 술을 마이던 최장국이 하며 옛이랴기를 하던 중 불시에 찰떡이 목에 메여 사망될 줄이야!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맺어진 최장국의 사망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해 11월 23일에 필자는61년 만에 처음으로 최장국의 아들 최정록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로 나누었다.(당시에 최정록이 외지에 있었다) 9.   -  고 김영철(金英哲)- 필자보다 한살 우인 김영철의 애명은
163    감각적인 언어로 상대를 움직이는 힘 댓글:  조회:7137  추천:4  2015-01-20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우에서 한 장님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장님걸인의 목에는 는 글구가 적힌 푯말이 걸려 있었다 어느날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고 걸인에게 물었다. 장님이 침통한 어조로 대답하자 행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에 걸린 푯말을 뒤집더니 거기에 다른 글을 적어 놓았다. 한달후 미라보 다리 우에 행인이 다시 나타났다. 행인은 지난번처럼 하루 구걸하는 액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장님이 행인의 손을 잡고 감격해하며 말했다. 그러자 행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 일화는 우리가 쓰는 말(글) 한마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 준다. 감각적인 언어(글)는 리성에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동시키고 감성의 심리를 자극한다. 중국의 첫 노벨수상자 막언의 말이다. 지난해 10월 15일 슴근평총서기가 소집한 문예일군좌담회는 이전에 참가했던 다른  회의와 달리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집에 모여앉아 한담하는것처럼 친절하였다.습주석이 즉흥적으로 말하던 내용은 그대로 문장으로 되여 청취후 인상이 매우 깊었다.  필자는 습근평주석의 2015년 신년사를 친절한 인정미와 감각적인 언어로 세인을 감동시킨 본보기라고 말한다.  로 시작한 신년사는 지난해를 회고하며 로,그리고 새해를 맞아 며 로 끝냈다. 미사구려나 무미건조한 말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나 감동을 줄수 없다. 2천 몇 백자에 달하는 습주석의 신년사에는 는 등 정치적구호가 없이 우리 나라 (南水北調)대공사의 이주민들의 생활, 말디브 수도의 물공급부족 등 지구촌의 안방구석까지 살피면서  다정다감한 감각적인 언어로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초요사회를 건설하려는 중국공산당의 결심을 보여주는데서 세인을 감동시키고 당의 형상을 돋보이게 했다. 막언의 말이다.    진리만이 사람을 납득시킬수 있고 진정만이 사람을 움직일수 있다. 리론가는 리치로 사람을 설복시키고 문예가는 정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나에게는 두가지 기본적인 판단이 있다. 하나는 중국공산당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정당보다 더욱 중국이 부강해질것을 바라며 둘째는 중국의 국가주석 습근평은 세계 어느 나라 원수보다 더욱 중국인민이 잘살기를 바란다는것이다. 습주석의 신년사야말로 사람을 납득시키고 사람을 움직이는 감명 깊은 신년사라 하겠다.
162    새해에 올리는 인사 - 행복만들기 댓글:  조회:7095  추천:5  2015-01-14
161    물욕치료 으뜸 비방 – 부동심 댓글:  조회:7132  추천:3  2015-01-06
요사이 주영강, 소영, 서재후 등 , 들의 기사, 그들이 염낭에 채운 검은 돈으로1000여척의 미국항공모함을 살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필자는 분노에 앞서 '그들이 그 돈을 제 돈이라고 생각했을가?'는 천진한 의문들이 따른다. 아니면 많은 자영업자들 마저 고 하는데 말이다. 명심보감에 이란 경구가 있다.물건을 보면 마음(물욕)이 생기므로 마음을 바로 잡고 응하라는 것으로  풀이 된다. 일전에 한국에서 온 외조카(엄학철,49)의 말이다. 농촌서 구차하게 살다가 한국바람에 결혼하고 아들까지 본 그는 소박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한 막힘이 없는 일군이다. 생활을 곁들던 조카의 말이다. 며칠전에 안해의 충고로 처음 큰 마음을 먹고 롯데마트에서 27만원(한화)짜리 등산복을 삿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복무원이 2 7만원을  2만 7천원으로 잘못 계산했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제쳐 놓고 급히 찾아 가서 보충 결산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조카가 그렇게 량심적으로 놀기에 인복과 일복이 따른다며 칭찬했다. 물건을 보면 집착하는것은 욕심이고 마음이 흔들리는것은 마음에 동요심이 꼬리치기 때문이다. 이는 옛날 로인들게서 듣던 명언이다. 부동심이면 물질에 미혹되여도 흔들리지 않고 련꽃처럼 진흙속에서 살아도 오염되지 않는다. 부동심은 현실을 피해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아닌, 수련을 통해 욕망과 집착을 자제하고 정심(正心)을 찾는 것이다. 고대에 은사(隱士)를 소, 중, 대로 나눴는데 소은사는 초야에 은거하고 중은사는 도시에 은거하고 대은사는 조정에 은거한다고 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세상의 시험을 통과한 은사가 비로서 대은사다. 남북조시대의 학자 안지추(顔之推)는 를 (顔氏家訓)으로 하였다. 만약 주영강, 소영, 서재후 등 조정의 와 도시와 초야의 들, 그리고 소방차경적이 울려도 자기를 잡으려 오는 경찰차로 착각하며 안방에서 떨고있 는 때를 기다리는 와 >들이 이 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가 ? 오늘 보면 집 389채, 황금,백은 42850근, 현금 15.8억원…이 있다는 주영강을 자기의 몫이 아닌 돈(물건)을 제때에 돌린 엄학철에 비하면 가련하고 불쌍하기 그지 없다.  주영강의 이 주영강의 령혼을 사막에로 끌고 갔으니 말이다. 부동심은 물리적용기(血氣)가 아닌, 비도덕을 배격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도덕적 용기이며 물욕을 치료하는 으뜸 비방이다. .어느 명인의 말이다  
160    '교환수'가 아닌 '지령원'... 으로 댓글:  조회:6977  추천:2  2014-12-24
모시 변호사사무소 주임의 말이다. 그 주임의 말인즉 부탁이나 질문을 받은 사람들 일본새를 보면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상급은 하급에, 하급은 상급에, 이 부문은 저 부문에…저부문은 이 부문에 전달만하는 라는 말이다. 그 결과 하는 일이 추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실례로 몇해 전에 도문서 를 준비했던 도문백탑(쏘련홍군렬사기념탑)이 매체의 지적과 시민들의 반대로 옮길 대신 최근에는 수건과 환경조경으로 새모습을 보였다. 하여 백탑이 도문의 관광상품으로 특히는 로씨야관광객들의 발길로 되고있다. 그런데 도문백탑에 새로 세운 석비의 비문이 미완성비문일줄이야! 새 석비의 비문에는 조선문으로 로 되여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몇몇 해당 책임자들을 찾아서 석비에 여백이 있으니를 빨리 보충할것을 건의했다.아니면 도문의 망신이라며 말이다. 그런데 몇 달간을 지켜봐도 그냥 그상이였다. 이에 필자는 어느 기회에 도문시관광국 조동범국장을 만나 또 한번 상술한 건의를 되풀이 하였다. 그때 조동범국장은 이 한마디여서 필자는 마음상 미심하였었다. 그런데 얼마후 조국장이 필자의 건의를 제때에 시달할 줄이야! 아마도 조동범국장은 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러기에 내가 그를  만난 자리에서 70대 로인이 그를 찾아와 제기하는 문제를 당장에서 해결해 드렸고 또 두만강광장탁구협회 책임자가 반영하는 는 요구도 는 답을 주어 그 책임자가 며 기뻐하며를 반복하였다. 지난 11월 28일 기자는 조국장을 전화취재 하면서 며 몇가지 일을 곁들자 는 또 한마디 였다. 주변에 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까짓 일, 작은 일, 응당할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 일을 안하거나 하지 못한다. 또 는 이 두고 보면 탁상공담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필자는 모 변호사 사무실 주임의 말을 빌어 인민의 공무원은 가 아닌, 내가 할 일을 내가 책임지는 조동범식 지령원, 시공원으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159    텔레비죤 대신에 책장을 댓글:  조회:14140  추천:13  2014-12-08
가끔 보면 대부분 가정에서 아이들이 텔레비나 전자 게임기에 매달려 방과후를 보낸다. 심지어 온 밤을 중앙텔레비아동프로와 동무한다. 이에 필자는 아이들이 텔레비에 매달려 있으면 익보다 해가 많다면 대방은 오히려 언어능력이 제고되고 지력이 발달한다며 설전을 벌렸다. 아무튼 세상에 절대적것이 없듯이 텔레비를 보고 안보고에 서로간 장단점이 있다. 구경 텔레비와 전자게임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에 필자는 학자, 전문가들의 일가견, 그리고 폄범한 아이도 세계 최강의 인재로 키워내는 유태민족들의 자녀교육을 독자들에게 답으로 제공한다.  이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성장발달연구프로젝트로 최근에(2012년 1월 초판인쇄) 편찬한 3-7세 아이를 위한 의 한 단락이다.    는 유태인 가정의 거실에는 거의 텔레비가 없고 그 대신 책이 가득한 책장과 독서후 토론을 위해 마련된 채걸상이 있다고 한다. 혹 텔레비가 있다해도 어린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텔레비코드를 빼버린다. 부모는 처음부터 아이와 어린이 프로만 보기로 약속하고 훈련을 시킨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기에 부모가 먼저 실천한다.  유태인들이 거실에 텔레비를 놓지 않는 원인은 아이들게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강렬한 세속문화를 차단하기 위해서고 영상매체의 강한 중독성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으로 불리는 유태인들은 아이들이 작은 활자가 빽빽한 책을 멀리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까다롭고 복잡한 내용의 책을 읽어야 하는데 반대로 독서를 싫어하기에 학습에서 락오될수밖에 없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호주 멜버튼대학 피터 도허티교수는 고 했다. 아이들한테 텔레비를 제약하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미국 이스트워싱턴 대학 바버라 브락 박사의 400가구 조사에 따르면 텔레비를 없앤 집 자녀의 51%가 전 과목점수가 A를, 83% 부모들이 텔레비를 없앤 효과라고 밝혀졌다. 그리고 텔레비를 안 보는 대신 활동으로 독서(1위, 놀이, 취미생활, 운동이 뒤를 이엇다. 한국의 의 저자 김명옥씨는 텔레비에 빠져있는 큰아들이 네살 때 텔레비를 완전히 끊게까지는 2년이 걸렸다며 2년간 텔레비시청 시간을 줄인만큼 독서를 시작,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5천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김명옥씨는 아들이 손만 뻗으면 책을 잡을수 있도록 아들이 눈높이에 맞춰 사방 벽에 엄선한 수백 권의 책을 배치하였다며 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보고서에 따르면 영상물에 지속적으로 로출된 아이들은 좌뇌 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우뇌는 창의력과 직관력, 좌뇌는 언어능력과 수리력을 담당한다. 좌뇌활동이 위축되면 논리력과 분석력이 악화되여 읽기, 쓰기, 셈하기 능력이 퇴보된다고 했다. 영상물은 사고능력을 떨어 뜨린다. 텔레비는 시청자의 눈길을 잡기 위하여 화면을 1-2초 간격으로 계속 바꾸면서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자극을 준다. 텔레비 시청은 주어진 자극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수동적인 행위로 어려서부터 텔레비에 빠져 있으면 스스로 오랫동안 넓고 깊게 생각할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자기 스스로 열정을 갖고 능동적으로 일을 해나갈 때 집중력이 생기고 창의력도 높아진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영상물에 익숙해지면 자연히 영상물에 비해 재미없고 덜 자극적이고 오래 생각해야 하는 독서와 멀어지게 된다. 필자가 의식적으로 관찰한 총명하고 활발했던 어린애가 텔레비에 빠지더니 지금은 친구를 사귀지 않고 자연과 교류하는 사회성이 떨어져 지금은 은둔형 로 변했다.  왈가 왈불가할것잆이 필자는 한마디로 아이들게 텔레비를 하게 제약하자는 주장이다.  
158    한국진출이 남긴 여운 ABC 댓글:  조회:12965  추천:14  2014-12-02
중국조선족들의 한국진출이 20년을 넘겼다 지금 한국체류중인 조선족이 60여만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는 한국로무가 우리 민족의 주요《산업》중의 하나임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진출로 중국조선족들이 가난에서 해탈하는 길이 열려 경제생활에서 여유가 있게 됨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얻는것이 있으면 잃는것도 있기마련이다. 한국진출로 인해 남긴 여운을 세가지로 정리했다. 《가장 큰 착오가 아이를 낳은것이다.》 한국에서 몇몇 젊은 부부들을 만났는데 이는 집에 두고 온 자식을 걱정하며 하는 말이다. 《건강하려면 한국에 가지 말라.》 이는 어느 한 생일상에서 한국에 다녀온 친구의 말이다. 그는 한국에 있으면 앓을 사이가 없다. 얼마전에 모 병원에 가보니 적지 않게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고 암환자도 적지 않다 했다. 《안해는 이다(전화만 통한다는 뜻)》60대 되는 한 친구의 안해가 한국에 간지 15년이 되며 안해는 이미 남이 됐다고 말한다. 이 세가지는 한국진출이 자식농사, 건강상황, 부부관계에서의 《3재(灾)》를 가져왔다는 말이다. 《3재》가운데 건강과 부부관계는 어른들의 몫이나 단 《아이를 낳은것이 착오이다》에 비춰 《돈농사와 자식농사를 함께 못한다》를 곁들고저 한다. 아이들의 제1임 선생님은 어머니이다. 아이 심성의 90%가 어머니를 닮는다 한다. 육아는 어머니의 책임이 절대적이라 할수 있다. 아이들은 《물드는 존재》(모방하는 존재)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다. 맹자네가 저잣거리에서 살 때는 애가 장사흉내를 내고 대장간옆에서 살때는 애애가 대장간 흉내를 냈으며 서당옆에 이사가니 애가 글공부를 하더라는것이다. 아이들은 기른 이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이를 낳자마자 유모한테 맡기면 심성이 유모를 닮는다고 하고 할머니에게 맡기면 할머니가 엄마로 된다 한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아기는 최저로 3살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3살전까지는 아이들의 성장발육의 관건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아이들은 사물을 인식하고 자아를 알고 하나 또 하나의 진보를 가져올때이다. 그래서《세살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는가 본다. 《가장 큰 착오가 아이를 낳은것이다》고 말하는 40대 부부는 아이가 한살때 너무 귀엽게 놀아서 동네의 사랑을 듬뿍 담았다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로부모에게 맡기고 한국에 가다보니 지금 소학교 5학년에 다니는 애가 말하기 싫어하고 친구들과 사귀기 싫어하며 혼자 독방을 차지하고 텔레비와 동무하는 애어린《로인》이 되였다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부모라면 자식에게 사랑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잘못에 꾸지람도 주어야 바르게 자란다. 그런데 로인들은 왕왕 지나친 사랑을 준다. 《제 에미가 키웠으니 말이지 우리가 키웠더라면 어림도 없지.》소학교 5학년에 다니는 손녀가 북경수학올림픽경연에서 우승을 했다는 70대 량주가 하는 자랑의 말이다. 돈농사와 자식농사는 함께 못한다. 자식농사를 잘하려면 《자기 자식은 자기가 키워야 한다.》유태인은 《엄마는 집안의 령혼이다》며 《어머니가 유태인이여야 유태인이다》고 한다. 《세계를 움직이는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것은 녀자이다》.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유태인)는 《내가 위대한 인물이 되려고 노력한것은 어머니가 나를 믿어주었기때문이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유태인)을 과학천재로 만든것도 엄마의 인내심과 슬기로움이였다. 우리 민족도 유태인 못지 않게 자녀들에게 헌신적이다.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희생한다.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녀교육을 돈과 결부시키며 경제적 여유를 만드는것이 교육의 기본으로 오해하고있는것이다. 조선 축구팀 명장 정대세는 어머니의 격려와 사랑의 힘을 입어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것이지 결코 돈이 아니였다. 정대세 어머니는 아들이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 될가 우려되여 어릴때부터 피아노와 그림을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 아들이 고중때 받은 12년 개근상이다. 《자식농사》는 단 공부만이 아닌 심성이 밝은 사람됨됨의 《인간농사》이다. 돈을 잘 버는것, 일을 잘하는것, 공부를 잘하는것은 서로간 학문이 다르다. 사람은 돈을 잘 벌든 일을 잘하든 공부를 잘하든 인간됨됨이가 좋아야 한다. 《가장 큰 착오가 아이를 낳은것이다》고 말하는 젊은 부부의 후회에 부모 무책임의 《쭉정이 농사》는 차라리 안하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은 벌었지만 가정농사가 잘 안됐다면 결과는 실패라 하겠다. 집은 있지만 가정이 없는 《빈곤족》이 측은해 보인다. 길림신문 1014-12-1  
157    왕청에《천리마》가 많은데는《백락》이 있기에 댓글:  조회:8230  추천:4  2014-11-25
근년에 왕청현에서 김정일(현민정국 부국장으로 국가민정부 상 획득), 오기철(배초구진 봉림촌 촌주임, ), 최광일(왕청현공안국 교통경찰대대 도시구역중대지도원, 전국 ) 등 국가급 모범인물이 련속 나타나 이들을 따라 배우는 활동이 한창이다. 《빈곤현》으로 불리우는 편벽한 왕청현에서 륙속 《천리마》가 나타난다는것은 실로 대단한 일로 이는 왕청현에 《백락》이 있다는것을 말한다. 백락(伯樂)은 중국 춘추시대의 유명한 말 감정가로서 아무리 뛰여난 명마라고 해도 백락의 감정이 없으면 명마로 알려 질수 없었다. 어느 하루 한 축농이 백락을 찾아가 자기의 말이 팔리지 않는다며 한번만 봐 달라고 부탁했다. 백락이 그냥 지나다 다시 한번 그 말을 돌아보자 그 말의 값이 당장에서 10배로 뛰여 올랐다고 한다. 필자는 왕청현에 《천리마》가 많은데는 《천리마》의 기질을 발견한 기자, 《천리마》를 제때에 인정하고 따라 배우도록 사회에 호소한 왕청현 당정 지도자들이 《백락》이 됐기 때문이라 하겠다. 왕청현에서 조직한 김정일, 최광일 사적보고단에는 연변일보사 기자(부유)와 교통방송기자(송정정)가 보고팀 일원으로 있고 또 《나의 사적이 상급에 반영되지 않기때문에 나는 모범이나 선진인물과 인연이 없습니다. 당원으로서 명예를 따지는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들이 오기철은 충실한 사람이고 당원답다고 말한다면 만족입니다》하면서 10여년간 묵묵히 빈곤지원사업을 견지해온 오기철이다. 왕청현 당위 전임 서기 곽학이가 《오기철은 왕청현 200여개의 촌, 툰에서 가장 우수한 촌간부이다》고 평가하고 2012년 7월, 길림성 당위 손정재서기가 중공중앙 위원이며 중국장애자련합회 당조서기, 리사장인 왕신헌과의 담화에서 《오기철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덕 모범이다》고 소개했다. 당년11월 15일 왕청현당위에서 대회를 열고 오기철사적보고회를 조직, 오기철을 따라 배울데 관한 현당위,현정부의 결정을 발표했다. 지난세기 80년대 필자가 연변일보사 도문 주재기자로 있을 때 도문시교통국 도로관리단의 조선족로동자 고만길이 1986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사품치는 얼음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한 사적을 취재했다. 당시 40여일간 고만길이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 근 100여명의 목격자를 만나면서 고만길이 15년 사이에 4차례나 사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 사실을 알게 되고 원래 《도문에 살아있는 라성교》라고 단 제목을 《생사를 가늠하는 천평우에서》로 고쳐서 연변일보에 보도한바 있다. 그에 따라 도문시 당위, 시정부, 주당위, 주정부, 길림성교통청에서는 고만길에게 《자기를 잊고 남을 구한 훌륭한 로동자》, 《뢰봉학습 우수로동자》등 칭호를 수여하고 고만길을 따라 배우는 열조를 이르켰다. 왕천현에 《천리마》가 많은것에 비춰 필자는 왕청현의 들이 모두 조선족으로 소수민족 《천리마》를 발견한 한족 기자들과 자기 주변의 선진인물을 제때에 발견하는 왕청현지도자들의 《신문열》에 탄복된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다》. 이는 당나라 팔대명시인 한유의 잡설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한유의 잡설 한 단락으로 이 글을 맺는다 이 세상에 백락이 나타난후 천리마가 있고 천리마는 흔하지만 백락은 쉽게 나타나지 않네 고로 명마는 있어도 마구간의 무명말과 같이 죽어가니 어찌 천리마라 불러지랴    
156    인정미가 풍기는 사람들 댓글:  조회:7105  추천:2  2014-11-04
올해에 필자는 도문시 석현진수남촌 신선툰(별명 신선더기)에 있는 약 1000평 가량되는 밭을 가꾸며 잊어지던 농촌생활을 체험하였다. 지난 80년대 말에 오늘과 같은 생각이 없이 우연간에 부인의 이름으로 신선툰의 허름한 초가집을 사놓았는데 집은 이미 허물어져 자취를 감췄고 지난해까지 그 집터를 내가 한번도 보지못한 외지 사람이 다루었다.  그런데도 남들은 오선생이 언녕부터 예견이 있었다며 부러워하는데서 앞으로의 희망성으로 진정 신난다.  하긴 이라는 호적에 언녕부터 입적한 우리 부부라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모습을 보고 지난 70년대 농촌의 제(새벽 3시 출근 저녁 7시 퇴근)를 한다며 탄복하였고 외국에 있는 아들딸들은 일에 미친 부모들이 일에 지칠가봐 걱정하였다. 말이다. 1, 가을걷이를 도와주는 장일천씨   필자는 지난 10월 12일까지 올해 농사일을 끝내고 를 가슴 깊이 느꼈다. 하긴 가 오염이 없는 깨끗한 물, 신선한 공기, 향기로운 풀냄새,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소리는 물론 후덕한 농민들의 인정미가 감미럽고 더욱 좋더라는 것이다. 신선툰의 별명으로 란 산허리에 있는 마을에 늘 시원한 바람이 일고 또한 태양빛이 따사롭다고 하여 붙혀진 별명인데 란 조금 높고 펑한 둔덕, 언덕을 뜻하는 말체이다. 그만큼 신선더기 사람들은 시원한 바람에 인품이 펄렁이고 따사로운 태양빛에 인정미가 무르녹았다. 이 마을에 집체농사때만 해도 근 20호가 살았는데 지금은 당년에 닭, 염소, 젖소사양과
155    추천할만한 일! 댓글:  조회:6342  추천:2  2014-10-27
지금 많은 농촌마을에 출국 및 도시진출로 주인이 없이 방치된 빈집들이 많다. 특히 나라의 새농촌건설지원혜택으로 많은 리향민들이 자기의 고향마을에 새집을 지어놓고도 회향하지 않은데서 새로 지은 집들이 수풀속에서 처량하게 서있기에 촌모, 툰모에 불미를 주고 있다. 이에 비춰 도문시석현진수남촌에서는 새농촌건설의 일환으로 방치되여있는 집들을 관리하고 리용하기 위하여  전면적인 촌민여론조사와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이런 세가지 조치를 제정하였다. 첫째; 당의 새농촌건설의 우혜정책으로 새집을 지운후 지금까지  4-5년간 새집을 비워놓고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집들을 촌에서 국가의 주택건설지원자금을 제한외 개인이 지출한 건축자금의 곱절가격으로 사들인다. 촌에서는 이렇게 사들인 집을 수남촌에 와서 수남촌의 건설에 적극 동참, 기여하려는 사람들에 팔수있다. 둘째: 새집을 비워놓고 아직도 2-3년사이에 돌아 올수 없을 경우 집주인은 매년 2000원을 촌에 상납하여야 햔다. 촌에서는 이금액을 통일적으로 관리하며 전문 빈집관리(정원, 도로, 주변미화, 수로 등 주변환경관리)에 사용한다. 세째: 일차 임대기한을 10년을으로 촌에서  빈집을 임대한다. 촌에서는 임대한 집들을 장식한후 도시 등 외지 사람들에게 으로 임대준다. 지금 수남촌에는 상기 범위에 해당되는 집들이 20여채나 된다. 수남촌의 이한 조치는 상급의 해당부문의 긍정과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0월 17일 석현진 김휘진장은  며  고 당장에서 표시하였다. 필자는 방치된 집들을 관리, 리용하는 수남촌의 작법을 새농촌건설의 일환과 새로운 발상으로 여타 촌에도  보급할수있는 가치있는 사업으로 적극 추천한다.
154    "촌민이 한 명이 있어도 안 된다!"니? 댓글:  조회:6858  추천:2  2014-09-16
당의 군중로선 교육이 한창일 때인 지난 9월 11일, 국가 부장급지도자가 왕청현 모 촌을 찾았다. 그의 이번 시찰은 그가 3년 전에 왔을 때 새농촌건설에 관한 몇가지 거론된 문제가 여실히 시달되였는가를 알아 보려는것이라고 촌민위원회주임이 필자한테 사전에 안민고시 했다. 필자가 근 1 년 만에 가보니 마을의 주거환경, 문화환경과 농업생산 시설이 놀랄 정도로 변했다. 특히 촌민들이 질적 삶을 추구하는 가치관념이 크게 변하였다. 촌민위원회주임의 자랑이다. 이 촌과는 구면이라는 그 지도자가 온다니 촌민들은 반가워서 서로 뒤질세라 명절옷단장을 하고 자체로 춤판을 벌리며 을 메고 오는 백성의 지도자를 마중나왔다.     이 촌의 최년상로인이 아들인양 정답게 지도자의 두손을 잡고 오가는 대화다. 필자는 인민의 공복과 백성간의 허물없는 만남과 주저없는 대화의 장면을 놓칠세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상상외의 일이 뒤따를 줄이야?! 필자가 촌민위원회주임의 이번 행사에 꼭 참가해 달라는 사전의 청탁을 받고 열심히 취재하는데 필자를 찾는 전화가 와서 찾아 갔더니 모 젊은 수행인원이 필자가 찍은 사진을 보자며 며 무릇 그 지도자의 신변에 촌민이 비낀사진은 몽땅 삭제하란다. 면서 말이다.  아무리 일철이라도 자기 집에 오는 손님을 마당까지 마중을 하는것은 최저의 례모인데도 말이다. 하물며 지금은 농한기인데.  (당의 군중로선교육에 지도자의 신변에 촌민이 한명이 있어도 안된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었다. 필자가 국가 부장금지도자와 촌 최년상어른의 다정한 만남을 담은 사진만은 남기겠다고 해도 안된다고, 지도자가 촌민위원회주임의 회보를 듣는 장면(그 장소에 수행한 주, 현의 간부외 촌민은 촌민위원회주임과 최년상로인 뿐임)까지 삭제해 버렸다. 필자는 기자의 신분으로 당지도자들을 찾아 고 질문하려고 하다가 그날의 기분을 고려하여 벙어리가 쓸개를 먹은 격으로 겨우 참았다. 볓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다. 기자를 찾은 그 수행인원을 놓고 말하면 이번 행사를 신문매체에 알리지 말라는 상급지시를 수행하는 그의 사업책임감은 장점으로 긍정되는 반면에 그가 기자들에게 상급의 정신에 비춰 보도에서 주의 할 점을 제시해 주면 될 것을 며 기자들이 남긴 가치있는 사진까지 삭제한(자체로 사진기를 다루며) 한 그의 사업방법은 그가 반성해야 할 단점이라 하겠다. 그래 군중이 없는 당의 군중로선교육이 존재할수 있는가?그래 지도자가 새농촌건설을 시찰하는데 촌민을 멀리한다면 무슨 시찰인가?
153    인간과 동물을 련상시킨 도문의 소싸움 댓글:  조회:6216  추천:4  2014-09-03
《도문호남》은 말밥에 《오바마》는 불복 《연변패왕》은 110을 《인간과 동물》의 저자, 한국 저명한 동물행동학자 최재천박사는 《행복한 동물학자의 삶》이라는 글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자연에서 배운다, 알면 사랑한다.》 그렇다. 화친, 속결, 기권, 불복, 결투, 그리고 이변으로 마무리해 브라질 《월드컵》라고 불린 2014 두만강문화관광축제 도문 제8기《 이동컵》소싸움은 실로 《동물에서 배우고 알면 사랑한다》를 체험하는 소싸움이였다. 련속 6년간이나 도문소싸움을 사회한 《인기사회자》 장소군은 인간에 비춰가며 이번의 소싸움은 치렬한 《영예전》, 《생사전》, 《복수전》, 《금전전》이라며 매 전투에 슴배인 재미있는 사연들을 일일이 곁들면서 관중들의 귀맛에 맛소금을 뿌려줬다. 말밥에 오른 《도문호남》 도문시 월청진 집중촌 4조 손태산(孫太山)네 《도문호남》은 (6살, 체중 850킬로그람, 순번 9호) 손태산이 《도문군사(軍師)》라고 작명한것을 사회자 장소군이 황소의 외모에 따라 《豪男》이라 개명했다. 연변농학원에서 축목수의를 배운 필자의 시각으로 봐도 확실한 《황소호남》이다. 16강전에서 《도문호남》은 별로 힘을 빼지 않고 16강에 올랐다. 《도문호남》이 말밥에 오르게 된것은 싸움이 끝난후 투우장밖에서부터다. 자기집 소가 쉽게 16강에 들었다며 기뻐맞은 손태산의 아들이 자랑스럽게 한창 《호남》을 다독이는데 《호남》이 (그까짓 별것도 아닌데 대중들 앞에서…)라고 생각하는지 불시에 뿌리로 그의 등을 슬쩍 떠밀어 내는 통에 소동이 일어났다. 《보험을 했는가?》,《빨리 병원에 가라!》며 몰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손태산은 명실공히 태산마냥 듬직하게 《아들이 평소에 소와 소통을 하지 않더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냥 나서서 《도문호남》을 만지며 자랑을 했다. 힘에 벅친 《도문호남》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또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내뛰는데서 주인은 사람들이 다칠가봐 자전거를 타고 《9호》를 쫓더라고 목격자들이 말했다. 투우장 관중들의 말밥에 오른것은 8강을 뽑을 때 11호 《오발마(傲發瑪)》(이하 한어 발음으로 오바마로 칭함)와의 결투때다. 투우장 동쪽문으로 좀 먼저 입장한 《도문호남》이 출장준비로 투우장도우미들이 한창 소목바를 푸는데 서쪽문으로 입장한 《오바마》는 위엄으로 대방을 압도하려는듯이 입장하자 청청 하늘에 대고 대성 영각을 하더니 불시에 달려와 돌아선 《도문호남》의 엉덩이를 들이박아 아무런 준비가 없던 《도문호남》이 소고삐를 끌고 내빼는 바람에 진것으로 판정되였다. 《도문호남》은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비명소리를 내면서 우장을 빙빙 돌며 달아 다니다가는 또 분풀이를 맹세하는듯 한참 두 앞발을 바꿔가며 모래땅을 파헤쳤고 때로는 투우장주석단 앞에 가서 주석단을 마중하고 큰소리로 《오바마》의 규칙위반을 공소하며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였다. 《9호는 작년의 억울함까지 고소하느라고 퇴장을 안하고 시위를 합니다!》 붓는 불에 키질하듯 사회자의 설화가 끝나자 《도문호남》은 더욱 기승스럽게 투우장을 빙빙 달아다니며 계속하여 울분을 성토했다. 《투우장에 테러분자가 나타났습니다. 공안일군들이 출동하십시요!》, 《테러분자가 시간을 1시간이상 지체하고있습니다. 투우장은 잡기표현장이 아닙니다!》 빨리 퇴장을 시키라는 사회자의 재삼 되는 독촉에 여러 도우미들이 힘을 합쳐 눈에 쌍불을 켠 《도문호남》을 붙잡으려 했지만 죽기내기로 기승을 부리는 《도문호남》의 기승에 겁을 먹고 몇번이나 잡았던 소를 놓쳐버렸다. 사회자가 투우장을 나서는 《오바마》를 가르키며 《싸우지 않고 이긴 운수좋은 승자》라며 《도문호남》을 《싸담》으로 비기자 전장내는 응원과 격려의 박수소리가 두만강반 일광산에 울려퍼졌다. 불복하는 《오바마》 4강을 뽑는 《연변패왕(1호)》과 《오바마(11호)》의 결투다. 《오바마》(5살, 체중 750길로그람, 축주 장경량, 도문시 장안진 장안촌)는 축주가 《오커마》로 작명한것을 사회자가 또 《오바마》로 개명했다. 《연변패왕》(7살, 체중 900킬로그람)은 몇년간이나 련속 등수에 올랐고 지난해는 2등을 차지한 로장이다. 《연변패왕》이 접전을 하자마자 깜쪽같이 《오바마》를 격패시켰다. 그런데 너무나 순식간이라 실패에 불복하는 《오바마》는 퇴장을 안하고 한참은 선 자리에서 땅을 파헤쳤고 또 한참씩 처량한 소리를 길게 내빼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를 지켜보는 《연변패왕》은 (네딴에 끝까지 달려들어 보라!)는듯이 제자리에서 머리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한참씩 으스대다가 다가오는 《오바마》를 마중나가 한참 그의 낯을 핥으며 애무를 하는데 불시에 《오바마》가 또다시 달려드는것을 이번도 왼쪽뿔로 떠박으면서 가볍게 《오바마》를 재껴버렸다. 《1호 승!》,심판이 승패를 공포하고 관중들이 《연변패왕》에게 열찬 박수를 보내자 《오바마》는 또 불복이라는듯 주석단앞에 가서 한창 땅을 파헤치며 대성질호한다. 《오바마》의 불복적인 행위연장으로 간단했던 접전이 30여분이나 지연되였다. 도문소싸움 길림성의 브랜드 이번 소싸움은 볼거리, 얘기거리 결전이였다. 《연변황소는 싸울수록 맹렬하다!》는 주석단의 련속적인 응원방송에 사회자 장소군은 오바마, 싸담, 조선, 로씨야, 프랑스 등 세계적인 인물과 나라들의 전술을 곁들면서 투우장의 분위기를 웃음과 환성으로 들끓게 했다. 이번 결전에서 시간이 제일 빠른 쾌속전이 《무적금강》(8호)과 《화룡호》(15호)의 결전으로 5초간에 결속되였다. 이번 결전에서 시간이 제일 길고 격렬했던 싸움이 《연변일패(一覇)》(10호)와 《비단웅사(非丹雄師)》(13호)의 결전이였다. 둘은 서로 살기 띤 머리를 맞대고 다른 전술이 없이 20여분간이나 밀고밀리며 힘겨룸을 하기에 사회자가 주석단에 고성음악을 방송하라고 호소, 뒤따라 절주 빠른 고성음악을 방송하자 웬걸, 싸우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힘겨름을 하던 《연변1패》가 그만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 바람에 《올해에는 연변1패 주인이 특수코치를 청하여 연변1패에게 좌우측 진공전술을 훈련시켰답니다》. 한창 《연변1패(覇)》를 자랑하던 사회자가 아예 《연변1패(覇)》를 《연변1패(敗)》로 싸담이라고 말을 돌려 골려줬다. 왕청현 배초구의 《동북범》과 《비단웅사》의 싸움은 화친과 고향정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평화전이였다. 도우미들이 긴 대나무대로 아무리 《투사》들의 머리와 목을 밀며 싸우게끔 하여도 서로간 싸울 잡도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자는 《소들이 안 싸우면 축주들의 결투로 승패를 결정하자》고 건의를 한데세 관중들이 《옳소!!》리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흑선풍》(7호)과 《철군1호》(24호)의 결전에서 명실공히 《철군1호》의 《철군》으로 《흑선풍》이 싸우지 않고 이겼고 《연변패왕》(1호)과 《왕청1도(刀)》(5호)의 결전에서 또 명실공히 《왕청1도》의 칼에 찔린데서 사회자가 《110》을 불러 《연변패왕》이 현장치료를 받게 되였다. 이번 쏘싸움은 또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우선 사람들이 4자를 죽을 사(死)라며 4번을 꺼리듯이 이번에 순번 4자가 달린 황소들이 몽땅 패하였다. 4번: 5번 결전에서 4번이, 1번: 14번 결전에서 14번이 졌고 24번: 7번 결전에서 24번이 기권을 하였으니 말이다. 또 이번의 《4강》은 몽땅 순번호가 1호부터 8호 사이에서 산생되였기에 제비뽑기도 인연이나 운수가 따르는가는 생각이다. 이밖에도 이번 《이동컵》에서 뽑힌 《4강》들은 모두 신진들이 로장들의 자리를 몽땅 《이동》시킨 《이동컵》이였고 약팀이 강팀을 꺼꾸러뜨린 브라질 《월드컵》이였다. 월드컵이 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는 대축제라면 도문의 소싸움 또한 도문을 세계에 알리는 두만강관광문화 대축제라 하겠다. 그래서 도문시 당위 김기덕서기가 기자와의 담화에서 《도문투우를 국가급, 세계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길림성 해당 부문의 책임자가 《도문소싸움은 길림성이 브랜드다.》고 밝힌것이 믿어진다. 길림신문
152    연길강변에 《건축패왕》이 서다니! 댓글:  조회:7381  추천:4  2014-08-30
연길강변에 세우고있는 《건축패왕》 요즘 연길장년개발회사에서 한창 시공중인 연길청년광장(원청년호)서쪽 《하경광장대천성(河景廣場大千城)》공사장이 말밥에 오르고있다. 《오선생이 연길강변에 고층집을 짓지 말자》는 글을 써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해당 부문에서 들어 주지 않는데…》 지난 8월 13일 《길림신문》 강동춘 특파기자가 대천성공사장을 가르키며 토하는 불만이다. 하긴 필자는 2010년과 2013년에 《연길시 해당 지도부에 건의 한다》, 《연길강변에 제발 를 세우지 말라》는 글을 발표, 글에서 중국도시발전연구회 주철진 부리사장이 국내외 여러 지역과 도시건설발전의 정, 반면의 경험에 따라 《도시 강변에 고층건물 를 세우지 말라》는 호소를 곁들었다. 《기자들이 애써서 기사를 썼지만 령도간부들이 조선글로 된 기사를 보지 않는다고 하꾸마. 다른 해결방법을 대봅소.》, 《지당한 말이다. 한국 서울서 한강변에 빌딩숲을 만든데서 후에 많은 인력, 물력을 소비했다. 남의 옛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개발상들의 눈앞 리익만 추구하지 말고 후대들에게 쾌적한 삶의 공간을 물려주는게 선대들의 책임이다.》, 《국가에 강변과 100메터 거리안에는 건축물을 짓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길시는 청년호를 없애고 집을 짓고있다. 연길시 정부에서 도대체 뭘하고있는지 모르겠다. 오선생의 글을 김서기나 강시장이 보았으면 좋겠다.》 이상은 지난해 11월 15일 《연길강변에 제발 를 세우지 말라》는 필자의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영이다. 영국 등 서방 발달나라에서는 집을 짓고 나무를 심었으면 임자들이 마음대로 허물거나 벨수 없도록 법적관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대로 집을 마스고 나무를 베니 환경오염, 인력, 재력랑비가 엄중하다. 연길시는 아름다운 청년호도 메워버리고 지은지 얼마 안되는, 그것도 시설이 쾐찮은 청년호텔도 마사버리니 시민들이 떠드는것이 응당하다. 이미 《죽은 아이의 자지를 만지기》가 되였지만 그때 일부 사람들은 청년호텔을 마스니까 그 자리에 주덕해의 옛집을 기념물로 복구하는 줄로 알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뚱딴지 같은 하경광장이요, 대천성이요 이름을 가지고 청년광장을 《하경광장대천성》의 앞마당으로 만들고 도시시용을 흐리우게 하니 연길시 정부가 시민들의 말밥에 오르지 않을수 없다. 더욱 한심한것은 대천성공사장에 내붙인 《只爲一座樓王》 이라는 구호다. 이들의 눈은 안하무인으로 그들에게는 오직 《대천성》만 있고 오직 《대천성》만을 위해야 한다는 공개적인 《건축패왕》이라는것이다. 필자는 연길강변에 《고층바자》를 세우고 청년광장에 공개적으로 《只爲一座樓王》을 부르짓게 만든것은 연길시도시건설계획과 건설국의 문제라고 감히 말하며 세번째로 연길시 지도부에 《도시 강변에 고층건물를 세우지 말라》고 재차 건의하는 바이다. 길림신문 2014년 8월 29일자  
151    "청첩장이 없어서 좋다!" 유감(有感) 댓글:  조회:5692  추천:6  2014-08-11
당의 군중로선교육, 이 불구자들한테도 혜택이 왔다. 일전에 도문의 2급지체장애인 최원(녀)의 얘기다. 최원네는 목욕탕을 경영하는데 말이 경영이지 여러가지 투자로 30여만원의 빚을 지고 목욕탕의 파가이주를 기다리며 적자경영을 하는 빛 좋은 개살구 신세였다. 그런데 올해는 습근평주석의 치국정치덕분에 에 청첩장이 없어서 200원을 절약한것은 물론 청첩장을 받고나서 (갈가? 안갈가?)는 심산(心算)이 없은데서 마음이 평행된다며 기뻐하였다. 2급지체장애자의 기쁨에서 당의 군중로선교육, 이 결국은 나라와 민생을 위하는 교육이고 정돈임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다. 청첩(초청전화)이란 경사스러운 일에 남을 초청하는 내용을 적은 글(전화)을 말한다. 청첩문화는 딱히 문서화된 어떤 규정이나 규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부상조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간 근사하게 들고다니며 경사의 분위기를 돈독히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후론에 오르는것은 청첩문화속에 부조(축의금)라는 개념이 크게 내포된것으로 상당수의 단위나 개인들이 그 을 엿보고 청첩장을 는 말을 들을 정도로 렴치없이 산(란)발 하는것이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래왕이 없었는데도 빠질가봐 전화책을 놓고 전화를 했다니 말이다. 고로 청첩장을 받고나서 또 는 신조어가 있는가 하면 해마다의 생일이나 몇번째 되는 재혼에까지 부절히 오는 전화로 하여 는 제목의 신문기사까지 있었다. 더욱 억울한 것은 일부 단위들의 개업식후에 신문지에 오른 의 명단을 보면 협찬단위들의 명단만 있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비를 맞으며 춤노래로 축하한 학교들의 명단이 눈을 비벼대며 찾아봐도 없는것이다. 그러니까 신문지면을 차지한 를  가 아닌  로 보는것이 옳다고 해야겠다. 하긴 필자는 개인적 경사에 축의금은 근절하니 축하의 마음만 가지고 동무까지 데리고 오 라는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 조광훈총경리의 초청을 두번(외손녀생일과 환갑생일에)  받고 혹자들은 는데도 필자는 며 빈손으로 동무까지 데리고 참석하였다.  이 밖에 의 초청장을 곁든다면 한국 박근혜대통령의 국혼 (國婚)때 박정 모씨가 발급한 이 청첩장이 지금도 인상깊다.                                  청 첩 장                                                    신랑; 대한민국                                                    신부: 박근혜 위 두 당사자는 15년 전부터 열렬한 사랑을 하여 왔습니다. 드디여 국민들의 성원으로 20 13년 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뜨거운 박수치며 축하합시다. 꼭 참 여 하여 영광을 함께 하십시요. 금세기 최대의 행사이며 상생의 시작이 될 웅장하고 근엄한 결혼식에 화환, 금품, 선물은 일절 사양하오며 다시한번 를 외치는 마음만 선물하세요.                        2012년 12월 20일. 박정모 박근혜결혼식진행위원회 필자는 요즘 결혼, 생일, 자녀승학 등 경사가 한창 많은데 비춰 건전한 청첩문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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